여자 50세,축제는 시작됐다
특별취재=김수정·김정수·박혜민·구희령·고란 기자 sujeong@joongang.co.kr | 제134호 | 20091002 입력
각계에서 활동하는 1959, 60년생 여성 50명이 '나는 쉰 살'이라고 '커밍아웃'을 했다. 쉽지 않은 일이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20대 이후 나이에서 49와 50이 주는 어감의 차이가 아주 크기 때문이다. 50이란 숫자에는 '꺾어짐'의 분위기가 묻어난다. 여성들은 더 예민하게 받아들이게 마련이다. 여성 50인이 용기를 낸 배경에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나이에 대한 편견을 바꾸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깔렸을 것 같다.
"후배들이 말합니다. 쉰이 되면 자발적으로 은퇴해서, 봉사활동을 하며 여생을 보내겠다고요. 50이 돼보지 않은 자의 낭만적 생각이죠."‘여자 나이 50’ 기획취재 설문에 응한 박미경 한국투자증권 상무."중앙SUNDAY 기획이, 쉰을 너무 많은 나이로 봐 버리는 우리 사회 현상을 바로잡고, 50대가 아직 생생하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고 말했다. 맞다. '여자 나이 50' 기획은 쉰 살 한국 여자의 재발견이 목표다. 이미 그들은 자신들의 어머니 세대 때 50세와는 확연히 다른 삶을 살아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삶은 존재했지만, 장년·노년의 어중간한 카테고리로 넣어져 주목받지 못했을 뿐이다.
'한국 나이' 32세부터 44세에 이르는 중앙 SUNDAY 여기자들이 공동 취재에 들어갔다. '남성들이 읽어낼 수 없는 여성의 이야기'를 담아야 한다는 판단에서였다. 10여 년 후 혹은 몇 년 후 맞닥뜨려야 할 우리의 삶이기도 했다. 의외로 반응이 좋았다. “인터뷰에 응하면서 쉰이란 나이를 깨닫게 되고 인생도 되돌아보는 기회를 가졌다"는 이들도, "기자가 나의 옛 꿈을 되살려줬다"는 이들도 있었다. 갱년기 증상 때문에 “등에다 고구마를 얹어서 구워먹어도 될 정도로 열이 났다”는 한 여성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하는지 듣고 싶다”고 했다. 인터뷰에 흔쾌히 응한 경우도 있었지만 고민 끝에 거부한 경우도 있었다.
이미지가 자신의 활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정치인과 연예인 가운데 일부는 선뜻 답을 주지 않았다. 60년생은 만으로는 49세다. 60년생 정치인 가운데 한 사람은 “나는 마흔아홉”이라며 사양했다. “나의 팬이 생각하는 나의 이미지가 있어서, 다른 것은 몰라도 내 나이는 밝힐 수 없다”고 한 가수도 있었다. 어떤 의사는 “환자를 만나야 하는 입장에서 나이를 밝히는 게 부적절하다”며 취재에 응하지 않았고, 현재의 삶을 ‘적금 타먹는 풍요로운 기분’에 비유하며 성실히 답해준 한 주부는 “사진은 낼 수 없다”며 양해를 구했다.
지면 사정상 59년생과 60년생을 구분해 싣지 못했다. 어쩌면 억울한 60년생도 있을지 모르겠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 주길 바란다. “태어난 지 얼마나 되었는지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단지 삶의 어느 지점에 있고 당신 스스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무엇을 할 수 있고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지가 중요하다.”(옥스퍼드대 미래인간연구소 디렉터 닉 보스트롬)
취재 과정에서 알게 된 사실은 미국의 경우 베이비 부머 세대(46~64년 출생) 여성들의 50세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이 꾸준히 있어 왔다는 점이다. 66년 베이비 부머 세대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한 시사주간지 '타임'은 힐러리 클린턴이 쉰 살이 된 97년 '힐러리, 쉰이 되다'란 특집 기획기사를 다뤘다. 퍼스트 레이디인 힐러리의 쉰을 통해 전문직과 프로 주부로 미국을 변화시키는 여성들의 삶과 사회적 의미를 집중 조명한 것이다.
최근엔 50세를 맞은 연예인들의 활동상을 토대로 '여자 나이 50'에 대한 논쟁이 많았다. 지난해 가수 마돈나와 여배우 미셸 파이퍼, 샤론 스톤이 쉰을 맞았을 때 그들의 아름다움은 보톡스, 성형 수술로 유지된 것이어서 진정한 미가 아니란 주장도 쏟아졌다. 영국 가디언지는 이사벨라 로셀리니, 제인 폰다 등 여배우들의 인터뷰를 통해 '자연스럽게 늙어가는 아름다움'을 강조했다. 타임은 지난 5월 현재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는 10가지 아이디어 가운데 하나로 '젊은 시절 라이프 스타일을 죽을 때까지 지속하며 노화를 거부하는’ 아모텔러티(amortality)란 개념을 소개하기도 했다.
여성학자 수잔 브라운 레빈이 올봄 발간한 『50은 새로운 50(fifty is the new fifty)』이란 책도 화제를 모았다. 레빈은 "여성의 50세는 여성에게 새롭고 신나는 무대를 제공한다"며 "여성들에겐 가장 편안하고 희망의 에너지가 가득 찬 시기"라고 말했다. '할머니'가 돼, 뜨개질을 하며 뒤로 물러나는 전통적인 50대 삶과는 다른 삶이라는 것이다. 50이 된 여성에게 도움정보를 주는 단체(www.Fiftyisthenewforty.net www.FiftyandFurthermore.com) 등도 많다. 갱년기 증후군 대처법 등 의료정보에서부터 패션 가이드, 우울증을 극복하는 여행 가이드, 금융관리 방법까지 폭넓은 정보를 쌍방향으로 제공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50세와 그 이후 세대를 위한 정교하고 전문적인 장(場)들이 생겨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몸과 마음이 분열한다, 하지만 난 더 자유롭다여자 50세, 일과 사랑 그리고 로망
| 제134호 | 20091002 입력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느낌―. 시대가 바뀌었어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50의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어쩔 수 없이 맞닥뜨리는 현실이다. 본지 인터뷰에 응한 여성 50인도 신체의 변화가 가져온 크고 작은 충격에 직면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그네들의 사랑과 열정을 막지 못한다. 2009년 현재, 만 나이 혹은 한국 나이로 50을 맞은 그들은 보다 성숙한 내면의 아름다움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자신 앞에 펼쳐진 새로운 삶에 조용히 도전의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눈에 띄게 늘기 시작한 흰머리, 불규칙해지거나 영원히 멈춘 생리, 침침하고 뻑뻑해진 눈, 거울 속의 탄력 잃은 얼굴과 몸매…. 그녀들에게 50세 문턱의 높이를 가장 실감케 하는 건 역시 몸이다. 그동안 별탈 없이 받아왔던 건강검진에서 혈압에 대한 경고를 받고(이정희), 동기 모임의 주요 화제가 어느새 자녀교육 등에서 건강문제로 바뀌어(조은영) 있었다. 또 커피를 마시고 난 뒤 잠이 안 와 괴로워하다가(이성미), 높은 굽 구두를 신발장 깊숙이 밀어넣으며(권은정), 쉰이란 나이를 문득문득 느끼기도 한다. 직장에선 직원들에게 했던 말을 자꾸 반복하거나 같은 걸 되풀이해 물어보게 될 때(고영희), 혹은 자식 같은 연령대의 사람들을 업무로 만날 때(최선희)도 "내가 나이를 먹었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부쩍 자란 자녀들의 모습도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 만든다. "아이를 (우리 나이로) 마흔에 낳았기 때문에 40을 더하면 딱 내 나이"라는 송옥숙씨는 "아이가 열 살이 됐으니 내가 쉰이란 건 알겠는데 아직도 와닿지 않는다"며 웃는다. 누군가 물어보거나 서류에 기입해야 할 때야 비로소 '50이란 숫자'를 인식하는 이들조차 급격히 떨어진 체력과 건강이 걱정되는 것만큼은 여느 동년배들과 다를 바 없다. 마음을 따라주지 않는 몸에 좌절을 느끼기도 하고(유경), 아프면서 너무 오래 살까 봐 불안하기도 하다(홍선주). 흐려진 기억력(김진형·박경숙·손애리) 때문에 벌써부터 치매 걱정까지 생긴다.
남편이나 부모·시부모 등 가족의 건강 역시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관심사다(권은정·김화미·이동연·이연주). 지내온 시간보다 남은 시간이 적다(곽정숙)는 생각이 부쩍 드는 시기라서 그런지, '마지막 이별의 순간'에 대한 걱정도 많다. 이성미씨는 "어머니가 46세에 돌아가셔서 46세가 되는 순간부터'엄마보다 더 오래 살았네' 하는 생각을 해왔다"며 "나중에 날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게 잘 죽으려면 그것도 준비가 필요한 것 같다"고 말한다."만개한 장미가 시간의 숙명을 준비해야 할 것 같은 초조감을 느낀다"는 정옥임 씨처럼, 경제적·정신적인 노후준비(강의모·박순덕·이정희·조경남) 역시 그들에겐 걱정이다.
약해지는 체력이 걱정스러운 만큼 헬스나 걷기·등산·요가·수영·자전거 타기 등의 건강관리는 그녀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일상이다. 점심을 굶더라도 매일 한 시간은 운동을 할 정도(박영아)인 열성파도 적지 않다. 스포츠댄스의 매력에 푹 빠진 이들(전경희·조경남)도 있다. 적절한 식사도 건강을 챙기는 좋은 방법이다. 세 끼 꼬박꼬박 먹고(정옥임), 소식(少食)을 하거나(곽정숙·이동연·이성미), 여성호르몬 부족에 좋다는 검은콩 반찬을 먹는다(김혜영). 비타민제도 열심히 복용한다(최란).
40대 유부녀 연기자들이 TV를 점령하는 것에 격세지감을 느끼며, 외모관리도 안 할 수 없다. 영양크림·아이크림이나 안티에이징 제품을 이용해 기초화장에 좀 더 정성을 들이는 건(김혜영·전경희·홍정순) 기본. 집이나 전문숍에서 정기적으로 마사지를 하며 피부에 신경을 쓴다. 그 정도는 '나를 위한 작은 투자'(이은주)라고 생각한다. "발레를 하는 사람이라 얼굴보다 몸매가 탄력을 잃는 게 더 신경 쓰인다"는 최태지씨는 시간 날 때마다 몸 전체에 아로마테라피를 하면서 오일 마사지를 받기도 한다.
보톡스같이 보다 적극적인 피부관리 방법에 대해서도 비교적 긍정적이다. 보톡스 시술이나 쌍꺼풀 수술 정도는 받아볼 생각이 들기도 한다(곽정숙·권은정·유경). 차화연·최란씨는 "보톡스는 맞아봤다. 부자연스럽게 보일 정도만 아니면 괜찮은 것 같다"고 솔직히 털어놓는다. 본격적인 성형수술도 "나는 하기 싫지만 남들이 하는 건 상관하지 않는다"는 이들이 많다. 그래도 자연미인에 대한 로망은 여전하다. 나이에 따른 얼굴의 주름도 아름답게 여긴다는 여성이 적지 않다(김정숙·양현아·최태지).
물론 그렇게 관리한다고 20~30대 때와 같은 여성적 매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외형적 매력은 분명 준 것 같고(권은정·유경·조경남), 사회생활의 풍파 속에서 중성화됐다는(김진형·윤미량·최란) 느낌도 든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꽃에는 향기가 있다. 단지 다를 뿐"(안필연)이다. "섹시하다"는 단어에 거부감까지 느껴왔던 이들(문경란·이성미·홍정순)은 물론 한때는 '섹시한 여배우'로 분류됐던 연예인(송옥숙)도 이젠 50대만이 보여줄 수 있는 인간적·모성적 아름다움에 자부심을 갖는다. 아니, '표피적 아름다움에서 내공이 쌓인 원숙미로'(김혜경), '보졸레 누보에서 말르상 보르도로(햇포도주에서 오래 묵은 포도주로라는 의미)'(유재하), '남자에게 안기기 위한 매력에서 남자를 품을 수 있는 매력으로'(홍선주) 자신들의 아름다움은 오히려 진화했다고 믿는다.
그녀들은 나이 쉰에 진정한 자유를 느낀다고 말했다.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진정한 자신을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이다(김진형·박성혜).아이들이 대학에 들어갔거나 취업을 앞둔 이제는 자신에게 더 많은 시간과 관심을 쏟게 된 것이 행복하다고 했다. 가족 내에서뿐 아니라 사회 생활에서도 여유와 안정을 찾게 되면서(양현아) 더 자유로워졌다. 자신을 증명하려 애쓰며, 남들의 평가에 일희일비하던 시기는 지났다. 여성이라는 '굴레'에서도 꽤 자유로워졌다. 생전 처음 보는 남자에게 말을 붙여도 어색하지 않고(이동연), 남자 후배의 팔짱을 끼어도 뭐랄 사람이 없다(윤미량)는 것이 달라진 점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더 관대해지고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진 것도 행복한 일이다. 전에는 나와 다른 남을 보면 비난하기 바빴지만 이제는 그들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생각의 틀이 넓어지고, 나만의 주관이 생겼다(김유니스·오혜란)고 느낀다. 이은주씨는 "전에는 외모의 아름다움에 눈이 팔렸다면 이제는 내면의 아름다움이 더 중요해졌다"고 말했다. 김이숙씨는 인생을 산에 비유하면서 "지난 인생을 산을 오르는 시기에 비유한다면, 앞으로의 인생은 올라갔던 산을 내려가는 시기"라고 말했다. 천천히 산을 내려가면서 주변의 풍광과 산새의 노랫소리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제 인생을 진정으로 즐길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50세가 된 이들에겐 해보고 싶은 일들이 너무 많았다(곽정숙·오혜란). 남들이 좋다는 게 아니라, 내가 진정으로 행복하고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일들이다(김영혜). 책도 쓰고 싶고(강의모·윤미량), 혼자서 여행도 가고 싶다(서은숙). 가장 많은 사람이 하고 싶다고 꼽은 것은 '봉사'였다(이경희·정옥임 등). 이성미씨는 "마음 아픈 사람들,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을 돕고 싶다"고 말했다. “후배들에게는 믿을 수 있는 든든한 선배, 친구와 이웃들에게는 언제나 행복을 주는 사람, 같이 있으면 즐거운 사람이 되고 싶다.”(박경숙·김진·고영희)
새로운 것을 배우려는 의지도 강했다. 벌써 그림(조경남), 중국어(이은주), 첼로(송옥숙)를 배우기 시작했다. 예전엔 바빠서, 다른 해야 할 일들이 많아서 하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나이 쉰은 새로운 시작이었다. 남은 후반전을 어떻게 마칠지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는 있었지만 여유 가득한 시도였다. 이선희·김영선씨는"집착에서 벗어나게 됐다"며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일단 해보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동연씨는 연애소설 한 편, 안필연씨는 시간의 허구와 모순을 주제로 한 작품, 차화연씨는 몸을 불사르는 연기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자신에게 소중했던 예전의 꿈과 새로 꾸게 된 꿈들을 다시 꺼내보고 있었다.
가장 소중한 것을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대부분 '가족'이었다. 가족의 소중함은 세월이 갈수록 더했다. 박영아·최태지씨는 "가족이 가장 소중하다. 내 삶의 원동력이자 버팀대다"라고 말했다. 유재하씨는 "지금까진 어리고 날카로워서 감사함을 몰랐지만 이젠 내 입을 통해 감사가 터져나온다"고 했다.온갖 세상 풍파를 같이 겪으면서 더 많이 사랑하고 존경하게 된 친구이자 동반자(최란·김연주·지희정·김혜경). 50세의 그녀들에게 남편은 너무나 소중한 존재였다. 세월의 무게 때문에 처지는 어깨가 안쓰럽다고 느끼고 있었다(이행자). 이연주씨는 "죽는 날까지 남편과 건강하게 함께 살고 싶다"고 말했다.
친구의 소중함도 새삼스러웠다(김연주·이경희). 조은영씨는 "얼마 전 동창회를 다녀왔다. 화제가 모두 건강에 모아졌다. 우리 모두 항상 "건강하자"고 다짐했다"고 말했다. 동호회 등을 통해 마음과 취미를 함께하는 친구들을 만들어 가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문경란씨는 이제부터는 "죽을 때까지 함께할 친구들을 만들어 가는 시기"라고 말했다. 그들이 50에 발견한 것은 "명예·승진·감투·성공·돈이란 필요한 것이긴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라는 사실이었다(박미경).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주변 사람들의 행복이 바로 자신의 행복이라고 느꼈다.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손애리씨는 "지금은 사람이 우선이다. 사람을 중심으로 보는 눈이 생겼고, 본질에 더 가까워진 것 같다"고 말했다.
사회 생활을 하고 있는 응답자 중에는 미혼도 꽤 있었다. 아직도 사랑을 기다리냐는 질문에 대부분 "결혼 안 하겠다고 한 적 없다"고 답했다. 일에 바빠 결혼이 늦어졌을 뿐 이들에게 사랑과 결혼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었다. 13년 전 남편과 사별한 전경희씨는 아이들이 모두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재혼을 미뤄놨었다. 그는 "이제야 정말 멋진 사랑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자신했다. 이들이 기다리는 사랑은 능력이나 외모, 남들의 평판이 중요하지 않았다. 김영선씨는"같이 먹는 음식, 같이 듣는 음악, 듣기 좋은 칭찬 한마디" 같은 것들을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추석의 의미도 예전과 조금 달라졌다. 전에는 추석에 친척들이 모이는 것도 싫고, 엄청난 제사 음식을 만드는 것이 싫기도 했었지만 이제는 가족들이 어울려서 떠들썩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정을 나누는 것이 좋다고(권은정·김정숙) 느낀다. 친지들이 해외나 지방으로 흩어져서 추석에 보기 힘든 것도 쓸쓸하다(조은영). 어쩌면 부모님이나 시부모님들과 함께하는 추석은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그런 생각이 더 간절해진다(유경).
이들에게 50에 맞는 추석의 느낌은 특별했다. 예전보다 감사하고 정겨웠다. 홍선주씨는 "한가위 보름달처럼 꽉 찬 느낌"이라고, 박순덕씨는 "추석의 풍요로움을 진정으로 느끼게 됐다"고 말했다.
나에게 50은 ***다
| 제134호 | 20091002 입력
50을 맞은 여성들이 거울 앞에 섰다. 그들은 자신의 50을 '황혼의 언덕, 내리막길'로 정의하지 않았다. 자유를 만끽하고, 익숙해진 것들로부터 탈출해 도전에 나서는, 자신의 내면을 찾아 가는 때로 정의했다. 그들에게 50은 일상 속에서 맞는 새 인생의 출발선이었다.
“지천명(知天命)이 아닌 지자유(知自由)” -문경란
“이제 자유”-박영아
“비로소 내(我)가 되는 나이”-손애리
“골프에서 아웃코스 다음의 인코스”-이동연
“가을(10, 20대가 여름이라면)”-조영자
“(겸손하게 맞을 준비를 하는)가을 들녘의 벼이삭”-김혜영
“3막1장(내 인생이 3막이라면)”-차화연
“인생시계의 오후 3시”-유경
“제2의 사춘기”-오혜란
“생과 사,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나이”-김진형
“성공을 위한 인생의 새로운 출발선” -박순덕· 김영선·안필연
“새로운 삶, 도전의 시작”-이경희· 정옥임·서은숙· 김이숙· 최태지
“새로운 도약의 터닝포인트”-고영희·이연주·박경숙·김연주
“제2의 인생, 다시 다른 꼭대기를 향하는 시작점”-김정숙 ·권은정·조경남
“아직은 과정”-이정희
“여유로운 도전”-김영혜
“젊은 나이”-이행자
“이모작·삼모작을 할 수 있는 인생의 황금기” -김 유니스·최선희·곽정숙
“보석-30, 40대 열심히 일을 한 뒤 얻어진 결정체”-최란
“내 삶이란 호텔에서 가장 전망 좋은 방(Room of a view)”-유재하
“늘 오늘 같기만 하라고 바랄 만큼 좋은 나이”-박성혜
“온전히 내 생각으로 살 수 있게 된 나이” -박미경
“마라톤의 반환점”-김진
“하프 타임”-양현아
“두려웠지만, 다다르니 느껴지는 평온함” -홍선주
“누구라도 품을수 있는 고무줄바지”-이성미
“힘빼기(순리에 적응해가는)”-강의모
“자신과의 불화를 마감하는 시기”-이선희
“패션(fashion+passion )”-김혜경
“생각해 본 적 없는 나이”-지희정
“일상”-송옥숙
“나를 다시 만드는 시기”-이은주
내 롤모델은 '주변 어른'가장 많아
| 제134호 | 20091002 입력
"올해 아흔이신 시어머니를 닮고 싶다. 4년 전부터 치매로 고생하고 계시지만 언제나 깔끔하시고 영리하시고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 애쓰셨다."(이행자)
쉰을 맞은 여성들에게 ‘늙어가는 모습이 닮고 싶은 사람은 누구냐’고 물었더니, 50명 가운데 11명이 주변 사람들을 꼽았다. 곱게 늙어가신 시어머니, 베풀면서 사시는 이웃집 어른들, 사이 좋게 여행 다니는 80대 노부부 등이었다. 이 가운데 4명은 ‘나의 어머니’라고 응답했다.
국내외 유명 인사 가운데는 영화배우 오드리 헵번(1993년 사망)을 선택한 이들(6명)이 많았다. "아프리카 어린이를 안은 주름진 얼굴. 그녀의 주름 위에 ‘로마의 휴일’에서의 공주의 모습이 오버랩되더라"(이연주),"죽을 때까지 베푸는 노년의 삶을 닮고 싶다"(최태지)고 이유를 설명했다.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4명)과 오지 여행가 한비야(4명)씨도 그 뒤를 이었다.
가수 패티 김과 배우 김혜자씨, 한명숙 전 총리, 이효재 전 이대 교수, 마더 테레사, 제인 구달, 샤론 스톤도 롤모델 리스트에 올랐다. 탤런트 이순재씨와 정진홍 이대 명예교수, 지미 카터 전 미 대통령, 시사 만화가 박재동씨 등 남성들도'닮고 싶은 삶을 사는 노년'에 꼽혔다. 이동연씨는 카터 대통령이 대통령 시절의 부진을 퇴임 이후 잘 만회한 케이스라며 '롤모델'로 선택했다.
지금 당신은 35세, 긍정적 착각을 하라59년생 여성 심리학자가 본 '여자, 50세'
| 제134호 | 20091002 입력
"벌써 '커밍아웃' 할 생각은 없었는데…. 내 나이는 우리 학교 교수들 사이에서도 '국가기밀'이었단 말예요."지난달 23일 오후 서울대 사회과학대학 5층 연구실. 곽금주(사진) 교수가 농담처럼 한마디 한다. "교수님도 59년생 아니시냐. 같이 50세를 맞는 동년배 여성들을 위해 심리학적 조언을 부탁한다"는 인터뷰 요청이 그만큼 부담스러웠다는 뜻이다. 곽 교수의 전공은 발달심리학.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인간의 전 생애를 통해 몸과 마음의 성장이나 발달 과정을 연구하는 심리학 분야다. 그렇지만 유명한 발달심리학자라고 해서 여성의 나이에 대한 사람들의 선입견을 가볍게 넘길 수 있는 건 아닌 듯했다.
"솔직히 난 10년쯤 전부터 나이를 일부러 잊고 살아왔어요. 정신 없이 일만 하다 보니 40대가 됐는데, 스스로 너무 늙어 보이더라고요. 20대 땐 30대 여자들이 그렇게 흉해 보였는데, 40대가 되고 보니 30대가 정말 젊은 나이였다는 생각이 들고…. 충격이었죠. 한동안 방황하다가, '지금 이 순간이 나의 황금기고 난 아직 젊다'고 생각하기로 했어요, 나이 같은 거 잊어버리고."
그는 고령화 시대에 맞는 나이 계산법을 귀띔해 줬다. 기대 수명이 크게 늘고 있는 만큼 사회적 나이는 생물학적 나이에 0.7을 곱해 생각하라는 것. "50세면 사회적 나이는 35세란 얘기죠. 얼마나 한창 때예요? 할 수 있는 것도 많고…."그런 곽 교수가 자신의 50, 그리고 중년을 연구하기로 한 것은 심리학자로서 직무유기를 해왔다는 반성 때문이었다."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서울대생들도 많은 방황을 하는 걸 보고'흔들리는 20대'란 교양강좌를 만들었어요. 그랬더니 다른 교수님들이나 친구들이 '흔들리는 40대''휘청거리는 50대'에 대한 강좌야말로 필요하다고, 정말 진지하게 말하더라고요. 왜 그런 연구는 안 하느냐면서."사실 외국에서도 아동이나 청소년기에 비해 중년에 대한 연구는 매우 부족한 편이라고 한다.
과연 심리학자가 보는 여자 나이 50은 어떤 시기일까. 그것도 2009년 현재, 대한민국에서. 곽 교수는 "좀 더 전문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전제하며"많은 갱년기 여성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울증을 겪곤 하는데 우리나라 중년 여성들은 과도기적 삶으로 인한 스트레스도 적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지금의 50세 여성들이 젊었을 때만 해도 직업을 갖기보다는 일찍 결혼하는 게 일반적이었잖아요. 전문직 등을 가진 요즘의 당당한 여성들을 보고 위축되는 심리가 있죠. 게다가 우리나라는 전반적으로 젊음을 강조하는 사회라 젊어 보이게 살아야 한다는 것도 큰 부담이 되고…."
곽 교수가 제시한 대응책은 무엇보다 '포지티브 일루전(positive illusion)', 즉 긍정적 착각을 하자는 것이다. "어렸을 때는 매력적인 팔등신 미인으로 멋지게 산다든지, 화려한 스타가 된다든지, 유명한 작가가 된다든지, 그런 꿈이나 환상이 있잖아요. 그게 이뤄질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부터 나이가 들고 늙는 것 같아요. 반대로 착각일지라도 그런 긍정적인 생각을 자꾸 하다 보면 그것을 통해 내적인 젊음을 찾을 수 있는 거죠."그는 "남편들이 들으면 싫어하겠지만, 70~80세에 멋진 남자와 다시 사랑을 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다 보면 스스로를 더 매력적으로 가꾸게 되는 것 아니냐"며 웃었다.
그런 긍정적 착각에 빠져 열정을 쏟을 때는 남을 너무 의식하지 말도록 곽 교수는 조언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른 사람 눈을 너무 의식하면서 살다 보니 행복지수가 낮은 편이에요. 남한테 피해 안 주고 법에 어긋나지 않는 한도 내에선 하고 싶은 일을 얼마든 해보라는 거죠. 그렇다고 '주책아줌마'가 되라는 게 아니에요. 자신의 '교과서' 같은 틀을 깨쳐 볼 수 있는 나이가 50대인 것 같아요. 사실 청소년기뿐 아니라 중년이 돼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이게 내 인생 맞나' 하고 자아정체감에 대한 갈등을 느껴요. 하지만 중년에는 진짜 자기가 하고 싶은 게 뭔지, 자기 자신을 판단할 힘이 훨씬 크죠. 그걸 발견했을 때, '50세에 이러면 안 되지' 하고 지레 스스로의 열정을 막아버리지는 말자는 뜻이에요."
곽 교수 자신은 아직 갱년기 증후군을 겪어보지 않았다고 했다."워낙 긍정적인 성격이라 잘 넘어가겠지 싶다가도, 솔직히 조금 겁이 나요. 무기력해져서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기도 한다는데, 그때를 대비해 하고 싶은 일들의 리스트들을 쭉 만들어뒀다가 억지로라도 해보면 어떨까 생각해요."그는 또 갱년기 때 땀이 많이 나서 고생한 여교수 이야기를 들려줬다. "수업시간에 남학생들도 많아 혼자 끙끙 고민하다가, 어느날 "나 갱년기거든" 하고 겨울인데도 선풍기를 틀어놓고 강의를 했대요. 그랬더니 의외로 젊은 학생들도 이해해 주더라는 거예요. 힘들면 그렇게 주변에 알리고 이해를 구하는 게 현명한 것 같아요."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는데 연구실 문 옆에 마른 장미꽃이 가득한 상자가 눈에 띈다. "아, 지난번 생일 때 남편이 장미 50송이를 학교로 보냈더라고요. 50이나 됐으니 제발 철 좀 들라는 뜻이었을 거예요."환하게 웃는 곽 교수의 얼굴을 보니 정말 그렇게 느껴졌다, 나이, 그게 뭔데.
은퇴 이후, 개인적·사회적 노력 병행해야60년생 남성 사회학자가 본 '여자, 50세'
김호기 연세대 교수 | 제134호 | 20091002 입력
시인 천양희는 ‘마음의 수수밭’이란 시에서 “마음이 또 수수밭을 지나간다/…/저녁 만큼 저문 것이 여기 또 있다/…/이 세상에 없는 길을 만들 수가 없다”고 말한다. 시인의 연보(1942년생)와 시집의 출간연도(94년)를 비교해 보니 쉰을 전후해 이 시를 쓴 것으로 보인다. 내년이면 만으로 쉰이 되는 내가 보기에도 이 시는 50세를 맞이한 이들의 내면을 잘 전달하고 있다.
공자에 따르면 쉰이면 지천명(知天命)이다. 하늘의 뜻을 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면 쉰이 지천명은 아닌 듯하다. 오히려 마흔을 뜻하는 불혹(不惑)에 가까운 듯하며, 사람에 따라서는 아직 불혹에도 도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기대 수명이 늘어난 탓이다. 59년생의 경우 적어도 80세를 넘어 산다고 볼 때 오십은 성년이 된 스무 살에서 절반의 30년이 지난 시점이다.
마음은 이제 삶의 절반 정도를 지난 듯한데, 나를 보는 주위의 시선이 이미 노년 세대로 바뀐 현실을 자각할 때 쉰에 도달하는 건 아닐까. 선배와 동료들을 지켜보면서 이들의 내면 풍경에서 바로 이런 다소 혼돈스러운 정체성을 감지할 수 있다.이런 정체성의 변화는 특히 남자보다 여자 선배 및 동료들에게 더 예각적으로 표출되는 듯하다. 중앙SUNDAY의 이번 기획은 전문 직종의 여성들에게 초점이 맞춰졌지만, 대부분 직장 여성들에게 쉰은 은퇴를 서서히 준비해야 할 나이이며, 전업 주부의 경우 아이들의 정신적 독립으로 새삼 공허함을 느끼게 되는 나이다.
무엇인가를 새로 시작하기에는 너무 시간이 많이 지난 것 같고, 그렇다고 이렇게 그대로 노년을 맞이하기에는 마음의 수수밭에 쓸쓸한 가을 바람만 부는 것 같은 나이가 바로 쉰이지 않을까. 산업화 시대의 벽두에 태어나 성년이 된 후 민주화 시대를 가로질러 와 문득 돌아보니 어느새 또 다른 시대로 가는 문턱 위에 서 있는 다소 낯선 자신을 발견하는 나이다.
세대론적 시각에서 쉰을 맞이한 여성은 전형적인 ‘사이 세대’다. 부모든, 시부모든 전통 세대에 가까운 이들과 신세대로 불리는 젊은 자녀들의 사이에서 두 개의 규범과 문화를 때로는 강제적으로 때로는 자발적으로 내면화한 세대다. 부모에게 효도를 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갖고 있으면서도 자녀가 좋아하는 래퍼의 이름도 아이와의 소통을 고려해 익히고자 하는 세대가 바로 이들이다. 치열했던 80년대 민주화 운동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으면서도 외환위기의 풍파를 견뎌내고 이제 자녀의 청년 실업을 걱정해야 하는 게 이들의 자화상이다.
사회학적으로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쉰을 맞이한 여성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회적·개인적 노력이 동시에 요구된다는 점이다. 나이 쉰은 바로 노후 문제에 다가서는 세대인 만큼 이들을 위한 정책적 지원이 다각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일자리, 건강, 여가 등 쉰을 맞이한 여성들이 대면한 문제들에 대해 정부를 포함한 사회기관들은 더욱 큰 관심을 갖고 구체적인 정책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사회적 일자리를 늘리고, 평생학습 체제를 강화하며, 임금 피크제를 적극 도입하는 등의 제도적 개선이 요청된다.
이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개인의 주체적인 자각과 대응이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중심에서 벗어나 주변으로, 정상에서 내려와 하산 길로 들어서는 게 아니다. 삶은 모든 지점에서 의미 있는 것이며, 그 의미를 끝없이 새롭게 발견해 나가는 과정이다. 본래 삶은 때때로 단조롭기도 하고 때때로 격렬하게 요동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삶에 대한 우리 자신의 태도다. 오십이 됐다고 해서 삶에서 물러날 필요는 없다. 생각을 바꾸고 생활을 바꿔보자. 경제적 보수가 적거나 또는 없다고 해서 마다할 게 아니라 새로운 일을 찾아보자.
삶의 의미는 그 과정에 있는 것이지 결과에 있는 게 아니다. 천양희 시인이 말하듯 “저기 저 하늘의 자리는 싱싱하게 푸르다/…/올라가라고 그래야 한다고” 삶은 우리에게 속삭인다. 삶에서 절정은 없다. 아니 돌아보면 삶은 그 모든 순간이 절정이지 않았던가. 그러니 새로운 도전, 새로운 모험, 새로운 미래를 꿈꾸자. 바로 그럴 때, 쉰을 맞이해도 천양희 시인이 노래하듯 “내 맘속 수수밭이 환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