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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먹는 감, 찌르지 마세요
꿈 속에서 흰 봉투
두 개를 받았어요. 꿈이란 게 그렇듯이 어떤 상황이었는지 또렷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 봉투 중 하나만 골라 가질 수 있었던 거 같아요. 이걸
잡았다가 저걸 잡았다가, 사춘기 소녀가 깻잎머리 가르듯이 왼쪽으로 넘길까 오른쪽으로 넘길까 고민하는 마음으로 하나를 골랐어요. 조심스런 마음으로
열어본 봉투 속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어요. 빈 봉투를 고른 거죠. 나는 이 꿈을 왜 꾸었는지 알아도 너무 알아요.
오가닉 웰빙
남자친구와 무자극 무첨가물 연애 2년, 권태기가 찾아왔어요. 로맨틱한 레스토랑에서 마주 앉아 스테이크를 썰어도, 김밥천국에 홀로 앉아 야채김밥
먹듯이 심심해 밍밍해. 그러다 제3의 인물이 등장한 거죠. 편의상 A라고, 이름표를 붙여 네 가슴에. A는 동아리 선배, 모든 선후배와 동기들의
무한신뢰를 얻는 인기인, 훈내 나는 외모를 가졌어요. 그런 A가 저에게 따로 연락을 해오는 일이 잦아졌고 연락의 대부분은 제게 호감이 있다는
이야기. 처음엔 “어쩌라고” 싶었어요. 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끈질긴 반복학습에 백기를 흔드는 수밖에. 내 마음이 콧바람 앞의
여린 촛불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거죠.
나 좋다는 사람이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있다는데 얼마나 좋아. 둘 중 하나, 더 좋은 사람 만나면 되는 깔끔한 문제라고? 아닌데요, 틀렸는데요. 인생이 그렇게
간단한 거면 밤마다 비빔밥 양푼 부여 잡고 목놓아 먹지도 않았어요. 제가 스트레스성 핑계폭식을 하는 이유는 간단해요. A의 진심이 뭔지 알 수
없다는 거죠. 좋다고는 하면서 사귀자곤 하지 않으며, 남자친구 얘길 해도 질투하지 않고, 사람들 틈에서는 전혀 내색하지 않는다는 거. 아무래도
못 먹는 감 찔러나 보는 것 같아요. 내가 쉬워 보이는 걸까요? 가지고 노는 거 맞죠? 순진한 내가 낚인 거, 맞죠?
피해자가 되고 싶은, 비련의
여주인공들
극세사 마음을 가진
언니들의 연애고민, 8할이 이런 류. 그 남자가 나를 좋아하는 게 맞을까요? 그 남자의 진심이 뭘까요? 그 남자가 잠자리 한번 해보려는 심산으로
이러는 거면 어떡하죠? 모두 같은 카테고리로 묶어 버릴래요. 이름하야, 비련의 여주인공에 매료된 언니들로.
지구 상에 여자는
나뿐이라고, 집이 좁아 놔둘 데도 없는데 달이나 별 같은 걸 따다 주겠다고 우기던 전 남자친구. 진심이라 말해서 진심이라 믿었건만 나중엔
어땠나요. 지구 상에 여자는 나 하나뿐이라더니 화성의 다른 여자라도 발견했다는 듯 떠나가지 않았었나. 이 콜럼버스 같은 놈들. 남 탓만 할 필요
없이 우리 언니들도 마찬가지. 그때는 사랑이라 믿었지만 지나고 보니 그건 사랑이 아니었다며 일요일의 카페 테라스에 앉아 친구들과 브런치 꽃을
피운 적은 없었나. 그래, 진심이라는 건 지금 당장 알 수 없는 것. 내 진심도 알 수 없는데 하물며 남의 진심은
오죽할라고.
만만하게 군다면 만만해
보이리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피해자의 위치로 가, 사선으로 쓰러져 어흑 울고 있는데 상대에게 내가 쉬워 보이냐며 발끈 하는 것도 우스운 일. 내가 쉬워 보이는지,
멋대로 판정 내리고 상처받을 시간에 허리부터 꼿꼿하게 세워보아요. 옆구리 쿡 찌르면 바로 넘어올 만큼 쉬운 사람으로 비춰질까 두려운 그 마음의
정체는, 정말 옆구리 쿡 찌르니 바로 넘어갔기에 혼자 뜨끔한 거. 나는 왜 이렇게 만만한 사람일까, 나는 왜 이렇게 쉬운 사람일까, 은장도로
허벅지 찌르며 자학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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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였어,
내가 당했어!
자학은 그만두라
말려야 할 텐데 조금 더 자학적인 얘기를 덧붙일 수밖에 없는 지면을 용서해요. 어쩌다 이미 슬픈 사람이 돼버렸는지는 알아야 하니까. 따지고
보면, 먼저 좋아하고 더 좋아한 A가 애 끓여 마땅한 그림인데 오히려 애간장을 팔팔 끓이는 쪽은 왜 사연녀일까. 사연녀가 서술한 남자사람 A
설명서를 가만 들여다 보면, 이건 뭐 사기캐릭이 따로 없네요. 만인의 신뢰를 듬뿍 받는 데다가 훈내까지 풍긴다니 이런 엄친아가 있는 그 학교
대체 어딘가요. 나도 좀 구경 가게. 사연녀는 마치 성은을 입은 무수리의 마음으로 망극해진 거로군요. 이토록 잘난 남자가 나를 좋아해주다니 싶은
황송한 마음, 그 마음이 사연녀를 쉬워지게 만든 거라고.
그
남자, 찔러보는 걸까? 진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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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일까?
아닐까?
그의 마음이
진심인지 아닌지는 알 수도 없을뿐더러 중요하지 않아요. 마치 이 사연 속에서 남자친구의 존재감이 너무나도 미비하여 (미안해요, 당신에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상대가 보여주지 않는 마음을 마음대로 상상하며 미안해하고 배려하고 황송해질 필요는 없어요. A의 마음이 진심이면
어떻고, 한 번 놀자는 거면 어때. 그의 접근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 다면 그 알맹이가 진심이라고 해도 황송해 받들 필요 없으니까요. 복잡한
마음이 들게 하는 건, 사랑이 아니니까. 사랑에 빠진다면 Everything is clear in our world가 된다고 존레논 오빠가
그랬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