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feminism)
페미니즘은 성별에 대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인 평등이 존재한다는 믿음이다.
주로 서양에서 유래했지만, 페미니즘은 전세계적인 주장이며 여성의 권리와
이권에 관련한 활동을 하는 수많은 단체들이 내세우고 있다.
페미니즘(Feminism) 또는 여성주의(女性主義)는 남성중심주의적 사고에서
탈피하여 여성의 권익 신장을 논하는 사회적 운동이다.
여성주의(Feminism, 페미니즘, 女性主義)는 여성의 권리를 추구하며
여성에 대한 차별을 반대한다. 페미니즘(féminisme)이라는 용어는 1837년
프랑스의 유토피아 사회 철학자 샤를 푸리에가 만들어 냈다고 흔히 알려져 있다.
페미니즘이라는 용어는 1872년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 처음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며
1890년에는 영국에서, 1910년에는 미국에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운영하는 옥스퍼드 사전(Oxford English Dictionary)은
1852년을 여성주의자(Feminist, 페미니스트)가 처음으로 출현한 해,
1895년을 페미니즘의 해로 수록했다.
페미니즘은 20세기 초, 여성 참정권의 인정을 기반으로 시작되어
여성의 사회적인 이미지와 권리를 남성과 동등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
여성의 권리 확장과 성차별적인 대우의 타파를 통해 여성해방과 양성평등 및
인간의 실질적 평등을 달성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상이다.
근대 초기부터 지금까지 페미니스트들은 여성 참정권, 재산권,
여성이 의무교육을 받을 권리, 여성이 남성과 법적으로 동등한
지위를 획득할 권리, 아동과 노약자 보호, 성폭력 예방, 올바른 성교육,
환경보호, 사회복지, 노동환경 개선 등 폭넓은 분야에서 많은 성과를 이루어 냈다.
학계에서는 학제 간 연구의 일환으로 여성학 협동과정 등의 정규과정을 통하여
활발하게 탐구되고 있다. 페미니즘의 선구자로는 최초로 여성 참정권을 주장한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가 꼽히며, 대표적인 저작으로는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이나 베티 프리댄의 《여성의 신비》, 케이트 밀릿의
《성 정치학》 등이 있다. 성 평등을 주장한 19세기의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여성의 사회활동 참여를 주장해 초기 자유주의 페미니즘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상술한 대로 등장했던 시대가 시대인지라 사상의 이름에서부터
'Femini-(여성의-)'를 포함하는 만큼 일단 대외적으로 성적 불평등이
상당수 해결된 21세기 현재로선 '여성만을 위한 사상이다.'라는 인상으로
여겨진다는 의견이 나타나면서 외부만이 아닌 페미니즘 운동권 내부에서도
명칭에 대한 논쟁이 지속되는 중.
즉 다른 성평등을 추구하는 단어를 찾을것인지 아니면
원래부터 사용되던 단어를 계속 쓸 것인지의 차이.
페미니즘 명칭 존치측에서는 Femini라는 단어를 제외할려는 것에서
여성에 대한 문제를 감추려는 의도가 어느 정도 다분하기 때문이며
어느정도 개선되도 유리천장, 유리벽 등 암묵적인 차별이 크게 와닿는
와중에 근본적 해결이 안 된 상태에서 바꾸면 페미니즘을 완벽히 달성할 수 없으니
명칭을 바꾸기엔 아직 빠르다는 주장이다.
페미니즘 변경 찬성 측에선 상술한 의견도 긍정하긴 하지만 현재로선
그 이상으로 시스젠더나 트랜스젠더등 성의 기준자체가 모호한 사람이 많고
여성보다 이들이 더 소수이며 그만큼 더 차별을 받는 와중에 페미니즘이란
늬앙스는 원래의 모든 성의 평등을 가리키는 것과는 반대로 차별받는 축에서도
여성만을 위한다거나 아니면 남성과 다른 성을 배척하고 여성들부터 살펴야 한다는
반발이 나올 수도 있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페미니즘이란 단어를 변경하자는 의견 측의 주장대로 원래
페미니즘이 주장하는 '성평등'에서 현재까지도 성적소수자들까지
포용하기보단 근대 여권신장운동에서 시작하여 여성의 인권만을 주장하는
경우가 많고 어디까지나 과거에는 제3의 성이란 것 자체가 없다시피 했으므로
페미니즘의 사상이 여성에 쏠리기도 한다는 것과 현재 페미니즘 단체가 여초상태나
아니면 남성 자체를 배척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실제로 틀린 게 없는 의견.
다만, 페미니즘 운동 초기에 추구하던 여성 참정권, 사회 참여 등의 진전과 함께
최근에는 생물학적 성에 기인한 억압과 차별에 대한 폐지와 양성의 동일한 권리,
기회를 옹호하는 입장으로 차별 타파 위주의 평등주의와 혼용되기도 한다.
즉 페미니즘은 평등주의 그 자체는 아니지만 다른 부분에서도 평등주의의
입장을 많은 부분에서 수용하려고 노력한다.
배우 엠마 왓슨의 UN 여성의 날 스피치 역시 같은 관점을 반영했으며
디즈니 또한 남성에 대한 차별을 이야기했고, UN의 여성 권리 운동 역시 성별,
종교, 인종 등으로 인한 차별의 타파를 추구하고 있다.
물론, 모든 페미니즘 분파가 모든 차별의 타파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우월성 Superiority참조.) 국내의 워마드처럼 남성 혐오 분파는 오직
생물학적 여성들의 권리만을 위해 남성 성소수자, 트랜스 여성에 대한
차별과 비하를 묵인하거나, 그 차별과 비하를 적극적으로 행하기도 한다.
물론 여기에 반대하는 페미니스트도 존재한다.(TIRF) 참고로 이러한
극단적 현상은 인권운동에서 나타나는 흔한 양상으로 인종차별주의가 만연하여
한창 흑인인권운동이 활성화되던 60년대 미국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편하다.
인권운동이 활성화되면 꼭 집단이기주의를 동반한 극단적 우월주의도 따라오는 법이다.
허나 여성이면서 극단적 여성우월주의를 싫어하는 사람또한 존재한다.
크게 3개의 시대적 사조로 구분이 가능하다. 일반적인 역사 연구에서는
n세대라는 표현을 흔하게 쓰지만, 최근 여성 운동권이나 여성학계에서는
이 시대적 구분을 'wave'로 부르고 n파(또는 'n의 물결')로 번역하고 있다.
여성이 남성과 같은 권리와 기회를 누려야 한다는 믿음과 목표, 혹은 이를 성취하기 위한
투쟁 옥스퍼드 영어사전
Feminism is a radical notion that women are people.
페미니즘은 여자도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급진적인 개념이다.
마리 시어 (Marie Shear)
일반적으로 페미니즘(여성주의)은 18세기 근대 유럽에서 생겨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학자들 중에서는 프로토 페미니즘이란 용어를 써서 계몽 시대 이전에
존재했던 성평등 이념의 역사를 다루는 이도 있다. 예를 들어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국가>에서 "신체적인 힘에서 비롯된 차이만을 제외하면 여성과 남성은
동등하다"고 언급했다.
프로토 페미니즘과 페미니즘을 가르는 기준은 "페미니즘 개념이 정립된 때"이다.
그렇다면 페미니즘 개념이 언제 정립됐는지가 중요하다.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특정한 신념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한 건 1837년 샤를 푸리에가
처음이라고 흔히 알려져 있지만, 이러한 주장이 오류라는 반론도 있다.
최초로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칭한 인물은 프랑스의 여성 참정권 운동가인
위베르틴 오클레르(1848년~1914년)였고, 1892년 파리에서 열린 '제1차
국제여성회의'에서 "성평등 이념에 입각하여 여성에게 남성과 평등한
권리를 주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페미니즘을 정의했다고 한다.
여러 사료들을 종합해 보았을 때, 페미니즘 개념이 온전히 정립된 건
19세기 후반 이후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만약에 '프로토 페미니즘'이라는 용어를 받아들인다면, 페미니즘의 기원은
당겨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늦춰질 수도 있다.
그래서 몇몇 학자들은 프로토 페미니즘을 거부하기도 한다.
18세기 근대 유럽, 당시 계몽주의는 인간의 이성을 중시했고, 동등한
이성을 지닌 인간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
그러나 만인이 평등하다는 천부인권은 여성에게는 인정되지 않았다.
많은 계몽주의자들은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이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들 중에서도 일부는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이성을 갖고 있으니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주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특히 프랑스 혁명 이후 여성에게도 참정권 등의 법적 권리를 인정할 것인지에 대해
벌어진 논쟁은 근대적인 성평등 이념을 이끌어냈다.
초기 페미니스트들은 계몽주의에 입각하면서도 계몽사상의 한계인
남성 편향성을 극복하려는 비판적 성찰을 가졌다.
최초의 페미니스트라고 불리는 메리 울스턴크래프트가 활동하던 시절도 바로 이 때이다.
장 자크 루소(1712~1778)는 계몽 시대의 남성우월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에밀>(1762)에서 "여성은 남성의 마음에 들도록 만들어졌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르면, 남성은 가정에서 여성의 뜻에 따르는 대신에, 사회에서는
강자 행세를 하게 된다. 남성은 이성에 따라 스스로 성욕을 억제할 수 있지만
여성은 남성에게 순종하여 정숙한 아내이자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루소는 여성이 남성에게 예속되는 것을 정당화했다.
다만, 루소의 여성관에 대해서는 상반된 해석도 존재한다.
루소는 성(sex)에 있어서만 남녀의 차이를 주장했고 종(species)에 있어서는
남녀의 평등을 주장했으며,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는 존재라고 강조했다.
여성성을 강조하였으며 여성 교육을 주장하면서 당시로서는
페미니즘의 발전에 긍정적인 불씨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1759~1797)는 계몽 시대의 대표적인 페미니스트 중 한 명이다.
그는 프랑스의 정치인 탈레랑이 "여성은 가사교육만 받아야 한다"라고
주장한 데 반박하여, 저서 《여성의 권리 옹호》(1792)에서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교육을 받을 것"을 주장했다. 《여성의 권리 옹호》에서 주된 비판 대상은 루소였다.
울스턴크래프트는 루소가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여성상에서 '이성(理性)'이 결여되어 있음을 비판했다.
루소가 주장했던 여성 교육 역시 가부장제에 부합한 행실과 욕망을 자극하는 용모만을 갖추는 데
그친 노예 훈련이라고 비판했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성이 남성처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활동 전반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제도적 여건을 마련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남성과 여성은 상호관계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했고
성에 대한 이중잣대를 공격했다. 다만, 울스턴크래프트에게도 한계점은 있다.
그는 여성과 남성이 완전히 동등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아주 애매한 입장을 취했다.
즉, 완전히 같은 내용의 시민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지는 않다.
울스턴크래프트는 1797년 둘째 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고드윈'을 낳고 사망했다.
향년 만 38세. 딸 메리는 낭만주의 시인 퍼시 비시 셸리와 결혼했으니
호러 소설 프랑켄슈타인의 저자 메리 셸리가 그 메리다. 울스턴크래프트의 사상은
생전에 나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으나, 사후, 세 번째 남편이자 선구적
아나키스트였던 윌리엄 고드윈(1756~1836)이 <여권의 옹호 저자에 관한
회고록>(1798)을 발간한 걸 계기로 맹비난을 받았다.
고드윈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개방적인 인물이었고 <회고록>에서 아내 울스턴크래프트의
연애 이력, 이혼, 자살 시도, 부부 생활을 꽤나 솔직하게 밝혔다.
당대의 사회 통념과 보수 윤리에는 어긋나는 내용들이었기 때문에
고드윈의 의도와는 다르게 울스턴크래프트의 평판은 밑바닥으로 추락했다.
울스턴크래프트의 선구적인 정신은 백여 년 동안 잊혀졌지만, 20세기 들어서
버지니아 울프(1882~1941)와 엠마 골드만(1869~1940)에 의해 발견되고 재평가받았다.
1789년 프랑스 혁명 직후 작성된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은 여성이나
무산계급을 배제하고 남성에 대해서만 인권을 천명했다.
이에 반발한 몇몇 계몽주의자들은 여성에게도 권리를 부여할 것을 주장했다.
예를 들어, 니콜라 드 콩도르세(1743~1794)는 <여성의 시민권을 위한 청원>
(1790)에서 남성에게 부여된 자유와 권리를 여성에게도 부여할 것을 요구하며
여성 참정권을 주장했다. 올랭프 드 구주(1748~1793)는 <여성과 여성시민의
권리 선언>(1791)에서 남성에게 부여된 모든 권리를 여성에게도 적용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시 집권 여당이었던
자코뱅은 자신들을 비판하는 세력들을 숙청하는 공포 정치를 단행하고 있었다.
올랭프 드 구주는 왕정제를 옹호하고 자코뱅을 비판하는 저술활동을 벌이다가
길로틴에서 처형당했고, 그의 동지였던 콩도르세 후작은 체포된 직후 음독 자살했다.
"페미니즘이 이갈리타리아니즘(평등주의)에서 파생되었나"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우선 이갈리타리아니즘이라는 용어가 문서마다 각각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위키백과나 철학의 기초에서는 이갈리타리아니즘을 평등 이념을 하나의 사상
체계로 정립한 것으로 넓은 의미에서 정의하고 있다. 넓은 의미의 이갈리타리아니즘은
스토아 학파의 코스모폴리타니즘(세계시민주의)이나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평등
사상을 포괄하는 의미로 쓰였다.
반면에 스탠포드 철학사전 등에서는 고전적인 리버럴리즘(자유주의)에 대립되는
개념으로 별개의 운동이 된, 좁은 의미의 이갈리타리아니즘을 상정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이갈리타리아니즘은 용어가 정립된 이후인 19세기 후반에
형성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참조 "페미니즘이 이갈리타리아니즘에서 파생되었다"고 주장하는 측은 좁은
의미가 아닌 넓은 의미의 이갈리타리아니즘을 말하고 있다.
스토아 학파가 이갈리타리아니즘적이라는 건 "후대의 평가일 뿐"이라는 반론이 있다.
이 반론에 일관성을 맞춘다면, 이갈리타리아니즘이라는 개념이 정립된 19세기
이전에 존재했던 평등 사상들이 이갈리타리아니즘적이라는 건 모두 "후대의 평가일 뿐"일 것이다.
그리고 페미니즘 개념이 정립되기 이전에 여성의 평등을 주장했던
메리 울스턴크래프트(1759~1797)나 올랭프 드 구주(1748~1793)의 사상이
페미니즘적이라는 것도 "후대의 평가일 뿐"일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이갈리타리아니즘과 페미니즘을 모두 가장 협소한
의미로 파악하게 되어 서로 간에 큰 상관관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개념짓기 이전인 프랑스 혁명기의
여권 운동가들도 페미니즘이라고 용어의 반경을 넓히는 이상
"후대의 평가일 뿐"이라는 반론은 자기모순이 있다.
"후대의 평가"라는 반론 외에도, 프로토 페미니즘인 플라톤이 스토아 학파보다
이전의 세대이므로 페미니즘이 이갈리타리아니즘보다 먼저 발생했다는 반론도 있다.
잘못된 반론이다. 프로토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의 기원이 아니라 전사(前史)를 말하므로,
"플라톤이 프로토 페미니즘"이라는 말은 "페미니즘은 아니었지만
그 이전에 영향을 준 사상"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프로토 페미니즘만으로는 페미니즘이 이갈리타리아니즘보다 먼저
발생했다는 결론이 도출되지 않는다. 차라리 "이갈리타리아니즘을 분명히
정의하고, 스토아 학파는 이갈리타리아니즘이 아니라 이갈리타리아니즘의
전사(前史)에 해당한다"고 반론을 제기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스토아 학파는 평등에 이론적으로 영향을 주었을지언정 근대
정치철학으로서의 평등 사상까지 이르지는 않았던 것 같다.
페미니즘의 역사를 근대적 의미로 한정한 예에 비추어봤을 때
스토아 학파를 이갈리타리아니즘의 전사(前史)로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계몽주의자들의 평등 사상까지는 이갈리타리아니즘의 범주로 묶일 수 있을 것이다.
넓은 의미의 이갈리타리아니즘은 상당히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평등은 인류 보편의 관념이지만, 어떤 것이 평등인지에 대한 근대적 이론 체계는 고안되는 것이며
이런 이론들은 넓은 의미에서 이갈리타리아니즘이라는 범주로 묶일 수 있다.
사변적으로 봤을 때 페미니즘 역시 이갈리타리아니즘의 범주로 묶여
일응 하위 개념이나 파생 개념으로 보일 수 있지 않을까도 싶다.
그러나 아무리 이갈리타리아니즘을 넓게 보더라도, 일상적으로나 학술적으로나
현실상에서 페미니즘은 이갈리타리아니즘의 하위 개념, 파생 개념이 아니라
별개의 독립 개념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계몽 시대의 페미니즘은 이전의 이갈리타리아니즘을 그대로
계승한 게 아니라 안티테제로서 등장했다. 장 자크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
(1755)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여성의 권리 옹호>(1792)보다 시기적으로 앞섰고,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1789)은 <여성과 시민의 권리선언>(1791)보다 앞섰지만
단순히 시기적으로 앞섰다는 사실만으로는 파생관계라고 볼 수 없다.
계몽 시대와 그 이후에 이갈리타리아니즘이라는 타이틀을 내걸었던 지식인들은
지속적으로 여성을 평등의 대상에서 배제해왔으며, 페미니스트들 역시
자신들을 이갈리테리안과 구분지어왔고 오랫동안 독자적인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애초에 이갈리타리아니즘이라는 용어는 좁은 의미로나 '평등'을 의미하는
보통명사로 많이 쓰이고, 계몽 시대의 평등 사상은 이갈리타리아니즘이라고
묶이기도 하지만 계몽주의 일반이나 자유주의와 함께 묶여서 설명되는 경우가 더 흔하다.
이러한 역사적 전개과정과 통용되는 언어 사용을 고려했을 때 페미니즘은
이갈리타리아니즘과 별개의 범주로 묶는 것이 타당한 측면도 있다고 생각된다.
생각을 서로 공유하거나 영향을 받은 지점이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아나키즘의 탄생에 자유주의의 영향이 있었을지라도 아나키즘이
자유주의의 파생 개념인 건 아니다. "페미니즘이 이갈리타리아니즘에서
파생되었다"라고 주장하는 건 온전히 맞는 얘기라고 볼 순 없을 것 같다.
다만, "페미니즘이 이갈리타리아니즘에서 파생되었는가"라는 논의는"페미니즘을 젠더
이갈리타리아니즘으로 대체할 수 있는가"라는 논의와는 결이 다르다.
비록 페미니즘이 이갈리타리아니즘으로부터 파생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건 이갈리타리아니즘이라는 개념을 현실적인 쓰임과 과거 용례 등
언어의 사회성을 고려해서 정의내렸기 때문이다.
대체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측도 현실적인 쓰임을 주요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언어는 시대가 변함에 따라 함께 변화한다.
오늘날 말하는 이갈리타리아니즘은 젠더 평등을 포함하고 있고
페미니즘이 과거 여권 운동의 틀을 넘어서 젠더 평등을 지향하는
운동이 되었기 때문에, 대체 가능성은 충분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대체되려면 사회적 수용과 합의가 뒤따라야 한다.
아직은 일상에서나 학계에서나 논의가 미흡하다.
"1세대 페미니즘"이라는 용어는 원래 미국 68운동 세대의 페미니스트들이
자신들을 2세대로 규정지으면서 여성 참정권 운동을 부르던 말이었다.
19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전개되었으며,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발견된 페미니스트도 포함시킨다. 주로 자유주의 페미니즘
성향이 말했지만, 동시대에 유럽에서 진행되던 마르크스주의 여성해방론나
사회주의 페미니즘도 포함시킨다.
이들은 법적 수단을 통해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얻으려 했으며 여성의 자유와 선택을 중시하였다.
존 스튜어트 밀과 그 아내 헤리엇 테일러 밀은 자유주의와 개인주의를 근간으로 하여
페미니즘 사상을 한층 더 이론적으로 강화시켰다.
울스턴크래프트와 밀 부부는 뒤이은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형성에 기여하였다.
18세기부터 20세기 초에 걸쳐서는 참정권, 취업권, 재산권 등
법률적 권리의 획득과 관련된 투쟁이 이어졌다. 특히 1890년에서
1920년 사이에 미국과 영국 등지에서 일어났던 여성 참정권 운동이 핵심이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에멀린 팽크허스트였다.
그는 1903년 여성 참정권 도입을 목표로 여성사회정치연합(WSPU)를 창립했다.
《서프러제트》는 이를 다룬 영화이다. # 이 움직임들은 당시 큰 호응을 얻지는 못했으나
결과적으로 여성의 권리가 많이 신장되는 쾌거를 이룩하였다.
최초로 여성의 투표권을 보장한 나라는 1893년 뉴질랜드였고, 1920년 미국에서도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하게 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해방 이후 실시된
첫 선거(1948년)부터 여성에게 참정권이 부여되었다.
여성참정권론자들의 경우에도 남성성에 우월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여성들이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 남성과 같아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경향은 20세기 중반의 2세대 페미니스트들에게 비판받게 된다.
개중에는 비백인 여성과 여성 노동자를 차별하는 등 친제국주의 성향의 여성 운동가도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비판받았다.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는 이렇게 말했다. "남성 특권에 맞선 투쟁에서는
사자처럼 행동하는 부르주아 여성들은 대부분 참정권을 얻고 나면 보수적이고
종교적인 반동 진영의 유순한 양이 될 것이다."#참조
심지어 에멀린 팽크허스트조차도 장녀 크리스타벨 팽크허스트와 함께
국가를 위한다는 이유로 노동운동을 탄압하는 일에 앞장섰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팽크허스트 가의 반(反) 볼셰비키 성향이 강해져 1926년
에멀린-크리스타벨 모녀는 파업을 분쇄하기 위해 여성특별경찰부대에 자원 입대했다.
성병의 유해성을 이유로 남성 순결을 주장하는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삼녀 아델라 팽크허스트는 훗날 파시즘에 심취하여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
일본 제국을 옹호하다가 구금되기도 했다.
한편 미국에서는 여기서 페미니스트들이 기독교 근본주의와 결탁해
금주법 제정 운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캐리 네이션은 첫 남편이 알코올중독과 도박으로 사망하자,
금주, 금연, 금오락 운동을 주도했고, 보수주의 페미니즘 단체
'여성기독교금주연맹'을 이끌었다. 술집을 폐쇄하기 위해 직접 도끼를 들고 다니며
술집과 오락실, 경마장을 때려 부수다가, 30번이나 체포되었다.
결국 미국에서는 1920년 여성의 참정권 부여와 함께 금주법이 시행되었다.
그러나 오히려 금주법 시행 이후 범죄가 폭증하자 금주법 반대 연합 AAPA를
중심으로 금주법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여성 정치인 폴린 세이빈은 1929년
금주법을 반대하는 여성 단체 WONPR를 결성하기도 했다.
영국의 로버트 오언(1771~1858)은 자본주의의 한계를 인식하고 협동조합 같은
대안 공동체를 통해 사회변혁을 꿈꿨던 유토피아 사회주의 사상가였다.
그는 여성의 재생산 기능(가사노동, 양육과 교육 등)을 공동체 전체의 책임으로 확대하려고 노력했다.
윌리엄 톰슨(1775~1833)은 오언주의의 여성관을 확장시켰다.
톰슨이 1825년에 저술한 <인류 절반을 위한 호소(Appeal of One Half the Human Race)>에서는
자본주의 경제체제 내에서 여성의 재생산은 필연적으로 남성에 대한 경제적 종속을 초래한다고 보았다.
만약에 협동조합에 기초한 사회주의로 이행한다면, 여성의 경제적 독립이 보장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오언주의자들은 여성 노동자에게 가사노동과 임금노동이라는
이중부담을 지우는 걸 거부하고 결혼 제도의 폐지를 주장하기도 했다.
다만, 성적 자유에 관해서는 일치된 견해가 존재하지 않았다.
여성도 남성처럼 합리적으로 정념을 다루고 출산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성욕을 향유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오언주의자도 있는 반면에, 여성이 남성보다 경제적으로 취약해
연애 시장에서 불리하다는 이유로 자유 연애에 반대하는 여성들도 있었다.
프랑스의 생 시몽(1760~1825)도 자본주의의 한계를 인식하고 상호협력에 기초한 노동자연합이
생산수단을 소유하게 하여 무산계급을 해방시키려 한 유토피아 사회주의 사상가였다.
생 시몽 사후에 그의 추종자 앙팡탱(1796~1864)은 진정한 해방을 위해선
정치적 혁명만으로는 불충분하고 전통 윤리를 대체하는 도덕 혁명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는 가톨릭이 여성성을 억압해왔다고 봤고, 여성의 감정적인 본성이 남성의 이성적
본성을 보완하는 사회를 꿈꿨다. 성적 자유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보았다.
앙팡탱을 위시한 생시몽주의자들은 점점 종교적 성격을 띠어 여성 메시아의 도래를 굳게 믿고
종교공동체를 조직했다.
그러나 1832년 앙팡탱이 풍기문란죄(집회조례 위반)로 투옥된 걸 계기로 이들 조직은 해산되었다.
앙팡탱의 여성관은 당시로서는 진일보한 면도 없진 않았으나, 오늘날의 관점으로 봤을 땐
'여성숭배'에 해당되어 비판의 여지가 많다.
프랑스의 샤를 푸리에(1772년~1837년) 역시 유토피아 사회주의 사상가로서
이성과 도덕에 기반을 둔 문명사회 전반을 부정하고 '정념'의 해방을 부르짖었다.
그는 시장경제는 빈곤을 양산한다는 이유로, 일부일처제는 성욕을 억압한다는
이유로 인민의 욕구 충족을 방해한다고 비판했다.
또한 모성 이데올로기는 여성의 정념, 즉 사회적 능력과 성욕을 억압한다.
푸리에는 여성 해방을 사회진보의 척도로 삼았으며, 여성의 경제적 독립을 보장하고
여성의 성욕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가족제도가 변화할 것을 주장했다.
1960년대~1970년대에 걸친 운동으로, 소위 래디컬하다 일컫는
래디컬 페미니즘과 에코 페미니즘이 그 중심이 된다.
단순히 일할 권리만이 아니라 직장에서의 평등. 그리고 남성 유명 대학에 입학할 권리,
임신중절 합법화와 시민권 운동의 일환으로 행해진 운동이다.
차별적 관행뿐만 아니라 가부장제 철폐를 목표로 하는 래디컬 페미니즘 계열이 주가 된다.
근세기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여성우월주의도 2세대 페미니즘에서 갈라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