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4일 주님 수난 성지주일
이날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시고자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일을 기념한다. 성지(聖枝) 축복과 행렬을 거행하며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영광스럽게 기념하는 한편, '주님의 수난기'를 통하여 그분의 수난과 죽음을 장엄하게 선포한다. 성지를 들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는 것은 4시게 무렵부터 거행되어 10세기 이후 널리 전파되었다.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시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수난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다가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주님을 따라, 우리도 죽음에서 부활로 건너가는 파스카 신비에 동참합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중 일부분(마르 14, 32-64)
32 그들은 겟세마니라는 곳으로 갔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 “내가 기도하는 동안 너희는 여기에 앉아 있어라.”
○ 그런 다음 33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셨다. 그분께서는 공포와 번민에 휩싸이기 시작하셨다.
34 그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남아서 깨어 있어라.”
35 ○ 예수님께서는 앞으로 조금 나아가 땅에 엎드리시어,
하실 수만 있으면 그 시간이 당신을 비켜 가게 해 주십사고 기도하시며,
36 이렇게 말씀하셨다. +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
37 ○ 예수님께서 돌아와 보시니 제자들은 자고 있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 “시몬아, 자고 있느냐 ?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란 말이냐?
38 너희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
39 ○ 예수님께서 다시 가셔서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셨다.
40 그리고 다시 와 보시니 그들은 여전히 눈이 무겁게 내리감겨 자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몰랐다.
41 예수님께서는 세 번째 오셔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 “아직도 자고 있느냐 ? 아직도 쉬고 있느냐 ? 이제 되었다. 시간이 되어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어간다.
42 일어나 가자. 보라, 나를 팔아넘길 자가 가까이 왔다.”
43 ○ 그러자 곧,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유다가 다가왔다.
그와 함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이 보낸 무리도 칼과 몽둥이를 들고 왔다.
44 그분을 팔아넘길 자는, “내가 입 맞추는 이가 바로 그 사람이니 그를 붙잡아 잘 끌고 가시오.” 하고
그들에게 미리 신호를 일러두었다.
45 그가 와서는 곧바로 예수님께 다가가 말하였다.
● “스승님!”
○ 그러고 나서 입을 맞추었다.
46 그러자 그들이 예수님께 손을 대어 그분을 붙잡았다.
47 그때 곁에 서 있던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대사제의 종을 내리쳐 그의 귀를 잘라 버렸다.
48 예수님께서 나서시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 “너희는 강도라도 잡을 듯이 칼과 몽둥이를 들고 나를 잡으러 나왔단 말이냐?
49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으면서 가르쳤지만
너희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리된 것이다.”
50 ○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다.
51 어떤 젊은이가 알몸에 아마포만 두른 채 그분을 따라갔다.
사람들이 그를 붙잡자, 52 그는 아마포를 버리고 알몸으로 달아났다.
53 그들은 예수님을 대사제에게 끌고 갔다. 그러자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과 율법 학자들이 모두 모여 왔다.
54 베드로는 멀찍이 떨어져서 예수님을 뒤따라
대사제의 저택 안뜰까지 들어가, 시종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고 있었다.
55 수석 사제들과 온 최고 의회는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려고 그분에 대한 증언을 찾았으나 찾아내지 못하였다.
56 사실 많은 사람이 그분께 불리한 거짓 증언을 하였지만, 그 증언들이 서로 들어맞지 않았던 것이다.
57 더러는 나서서 이렇게 거짓 증언을 하기도 하였다.
58 ▣ “우리는 저자가, ‘나는 사람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허물고,
손으로 짓지 않는 다른 성전을 사흘 안에 세우겠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59 ○ 그들의 증언도 서로 들어맞지 않았다.
60 그러자 대사제가 한가운데로 나서서 예수님께 물었다.
● “당신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소? 이자들이 당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데 어찌 된 일이오?”
61 ○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입을 다무신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대사제는 다시 물었다.
● “당신이 찬양받으실 분의 아들 메시아요?”
62 ○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 “그렇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이 전능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63 ○ 대사제가 자기 옷을 찢고 이렇게 말하였다.
● “이제 우리에게 무슨 증인이 더 필요합니까?
64 여러분도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듣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 그들은 모두 예수님께서 사형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단죄하였다.
자식이 잘되면 부모의 자랑거리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박수갈채를 받거나 잘 했다고 상을 받으면 어린이나 어른이나 기분이 참 좋습니다.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면서 상을 받으면 그 부모들이 더 좋아합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학교에서 상장을 받으면 사진을 걸어두는 액자에 잘 붙여서 벽에 걸어두고 손님이나 사람들이 집에 오면 자랑을 하는 것이 부모님들의 가장 큰 즐거움이었습니다. 자식들이 잘되고 무슨 일이든지 잘하면 가장 기뻐하고 가장 행복해 하는 것이 그의 부모들입니다. 자식의 잘못도 잘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자식들의 일에 긍지를 가지고 삶의 희망을 찾으며 그 속에서 생의 전부를 걸고 있는 것이 어버이들입니다. 마찬가지로 제자들이 잘되고 제자들의 행동이나 학문이 탁월하면 가장 반갑고 좋아하고 제자를 둔 것을 크게 자랑으로 생각하는 것이 제자들의 스승입니다.
한 나라의 임금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충신을 두어서 나라의 정치를 잘하고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들으면 그 모든 공로는 임금에게 돌아가고, 임금은 그 충신들을 극진한 예로 대접하는 것이 동서고금(東西古今)을 통해서 한결 같은 원칙입니다. 그래서 효경에서는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신체발부는 수지부모라 불감훼상이 효지시야요 입신행도하여 양명어후세하여 이현부모가 효지종야니 부효는 시어사친이오 중어사군이오 종어입신이니라.”
身體髮膚는 受之父母라 不敢毁傷이 孝之始也요 立身行道하여 揚名於後世하여 以顯父母가 孝之終也니 夫孝는 始於事親이오 中於事君이오 終於立身이니라.
이 말은 우리가 많이 듣고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신체와 머리털과 피부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라 감히 훼상하지 않음이 효의 시작이요, 입신하여 도를 행하고 이름을 후세에 날려, 이로써 부모를 드러나게 함이 효의 마침이니, 대저 효는 부모를 섬기는데서 시작하여 다음으로 임금을 섬기고, 끝으로 입신하는 것이니라.>라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행도입신(行道立身)이라는 말은 '도를 행하여 자랑스러운 자녀가 되고 제자가 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정말 이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완벽한 자녀이며, 완전한 크리스천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하느님의 사랑 받는 자녀가 되는 것이 효도의 마지막입니다. 자녀와 제자가 그러해야 하며, 신하된 자가 당연히 그렇게 입신(立身)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가슴이 무너지는 아픔을 겪으십니다. 제자들로부터 배신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정치적이든 경제적이든, 사회적 현실이든, 배신은 정말 뼈아픈 일입니다. 특히 사랑하는 자식들이나 제자로부터의 배신은 정말 견디기 어려운 아픔이며 도저히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아픔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유다의 배신은 예수님 구원사업의 결정적인 계기를 만 들어준 사건일 뿐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사탄은 쾌재를 불렀을 것입니다. “봐라, 예수의 제자까지도 내 유혹에 넘어갔다. 너희들의 신앙이 아무리 기고만장(氣高萬丈)하여도 나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라고 자신만만하게 자랑할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베드로의 배신도 한 몫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목숨까지 버리면서 주님을 지키고,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베드로의 약속도 결국은 사탄의 유혹 앞에서 물거품처럼 사라질 수 있습니다. 주님을 아프게 한 사실은 제자들의 호언장담입니다. 아무 것도 모르면서 큰소리치는 호언장담을 주님은 안타깝게 생각하시고 주님을 아프게 하였습니다. 신앙인으로 살면서 겸손하게 크리스천이 되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 모든 것을 잊고 교만한 마음으로 언제나 주님을 따를 수 있다고 장담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겸손하게 주님을 따르겠다고 안으로 결심하고 말없이 실천하는 사람은 정말 복될 것입니다. 나는 주님께서 얼마나 아파하실지 알지도 못하면서 교만하게 장담하기도 합니다. 하루에도 셀 수 없을 만큼 주님을 배반하면서 얼굴을 버젓이 들고 뻔뻔스럽게 살아갑니다. 이런 내 모습이 주님 보시기에 얼마나 가증스러워하실까? 이제는 마음을 다스려 다시는 쓸데없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결심해봅니다.
저희의 호언장담에 항상 마음 조리시며 걱정하시는 주님!
하루에도 수없이 배반하고 사탄의 유혹에 빠져 살고 있는 불쌍한 저희들을 어여삐 여기소서! 당신의 사랑 안에 살면서도 그 사랑이 얼마나 따뜻하고 포근하게 느끼지 못하고 순식간에 의심하고 외면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당신의 십자가의 길이 영광의 길임을 깨닫게 하시고 저희도 그 길을 올곧게 걸을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어 이제 저희가 사랑스러운 당신의 효자로 새로 나게 하시어 진정한 크리스천으로 감사의 기쁨을 찾게 하소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말씀입니다. 2,6-11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6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7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8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9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10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11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축일3월 24일 성 오스카 로메로 (Oscar Romero)
신분 : 대주교, 순교자
활동 지역 : 산살바도르(San Salvador)
활동 연도 : 1917-1980년
1970-80년대 남미 군부 독재 저항운동의 상징이 된 성 오스카 아르눌포 로메로(Oscar Arnulfo Romero y Galdamez)는 1917년 8월 15일 엘살바도르(El Salvador) 동부 산미겔(San Miguel)의 시우다드 바리오스(Ciudad Barrios)에서 산토스 로메로(Santos Romero)와 과달루페 데 헤수스 갈다메스(Guadalupe de Jesus Galdamez)의 6남 2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3년간 공립학교를 다니고, 지역 가정교사의 지도를 받은 후 목공 일을 배우던 그는 목수가 되길 원하는 아버지를 설득해 1930년, 열세 살의 나이로 사제가 되고자 산미겔에 있는 소신학교에 입학했다. 소신학교를 졸업하고 산살바도르에 있는 국립 신학교에 입학해 수학한 후 1937년 이탈리아 로마의 그레고리안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1942년 4월 4일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그의 가족들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여행 제한 때문에 서품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로마에 머물며 수덕 신학 박사과정을 밟던 중 엘살바도르에 사제가 필요하다는 교구장의 부름을 받고 1943년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아나모로스(Anamoros)에서 본당 사제로서 첫 사목활동을 시작한 후 산미겔로 이동해 교구장 비서, 교구 신문 편집장, 주교좌본당 주임, 소신학교 교장 등을 역임하며 20년 이상을 보냈다. 주요 직책을 수행하면서 그는 가톨릭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수호하는 일에 전념하며 상당히 보수적인 인물이 되었다. 1966년 엘살바도르 주교회의 사무처장으로 선출되었고, 1970년에 산살바도르 대교구의 보좌주교로 임명되었으며, 1974년 가난한 시골 지역인 산티아고 데 마리아(Santiago de Maria) 교구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이때까지도 그는 조용하고 학구적인 성품의 보수적인 주교였다.
1977년 2월 23일, 로메로 주교가 산살바도르 대교구의 교구장 대주교로 임명되었을 때 정부와 기득권 세력으로부터 환영받았지만,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위해 헌신하던 많은 사제들은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다. 당시 엘살바도르는 열네 가문의 지주들이 전체 경작지의 60%를 소유했고, 이 지주들은 대통령과 국회의원, 국가방위군과 경찰의 보호를 받았다. 이들에게 방해가 되는 이들은 무참히 학살당하거나 실종되기 일쑤였다. 그중에는 가난한 소작농들뿐만 아니라 불의를 고발하고 정의를 외치던 사제와 수녀들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로메로 대주교는 아주 특별한 사건을 경험하기 전까지 이러한 비참한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러던 중 그가 산살바도르 대주교로 임명되고 3주도 지나지 않은 3월 12일, 가난한 소작농들을 변호하고 그들을 위해 헌신했을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오랜 우정을 나누던 예수회의 루틸리오 그란데(Rutilio Grande) 신부가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란데 신부가 아길라레스(Aguilares) 성당에 미사를 봉헌하러 가던 중 암살단에 의해 피살된 것이다. 이 사건은 로메로 대주교의 삶에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정부의 신속한 수사를 촉구했지만 그의 요구는 무시되었고, 검열을 받는 언론은 조용하기만 했다.
그란데 신부의 장례미사가 열리던 날, 그의 교구에서는 단 한 대의 미사만 봉헌되었다. 산살바도르 대교구의 사제들과 신자들이 주교좌성당에 모였다. 그는 강론 중에 “살인한 형제들이여, 당신들에게 말하고자 하노니, 우리는 당신들을 사랑하며 하느님께 당신들의 마음을 대신해 참회를 빈다. 왜냐하면 교회는 증오할 수 없으며 어떠한 적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했을 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모인 사제 가운데 한 명이라도 건드리는 것은 곧 나를 건드리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정부의 면담 제의도 거부하고, 전국에 방송되는 라디오를 통해 주일마다 고문당한 이들과 살해당한 이들, 투옥된 이들과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강론을 했다. 그는 더욱 용감하게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폭력에 맞섰다. 하지만 군사정권의 만행과 박해는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이를 지켜볼 수 없었던 로메로 대주교는 주저 없이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 편에 섰고, 빈곤의 문제와 사회 정의에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교구장 재임 기간 내내 살해 협박에 시달리면서도 위축되지 않았다. 그럴수록 미사 강론과 교회 언론을 통해 정부의 부당함을 고발하며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의 기둥으로 우뚝 섰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듯 피살되기 얼마 전 한 기자에게 털어놓은 말은 그의 유언이 되었다. “그들이 나를 죽인다면, 엘살바도르 민중 가운데 부활할 것이다. 살해 위협이 현실로 드러난다면, 그 순간 엘살바도르의 구원과 부활을 위해 내 피를 하느님께 기꺼이 바칠 것이다. 내 피를 희망의 표지와 자유의 씨앗으로 삼으소서!”
피살되기 하루 전에도 그는 강론을 통해 엘살바도르의 군인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고, 인권에 대한 억압과 폭력을 저지르는 정부의 뜻에 따르지 말 것을 호소했다. 그는 1980년 3월 24일 저녁, 산살바도르의 ‘하느님 섭리의 병원’ 성당에서 암 환자를 위한 미사를 집전하며 강론을 마치고 제단 중앙에 섰을 때, 성당 앞까지 자동차를 타고 온 무장괴한으로부터 가슴에 총을 맞고 숨을 거두었다. 그를 암살한 무장괴한들의 정체는 후에 밝혀졌는데, 미국 특수전 사령부에서 군사 훈련을 받은 예비역 장교들이 군사정권의 사주를 받아 저지른 만행이었다. 3월 30일 산살바도르 대교구 주교좌성당에서 거행된 그의 장례미사에는 25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석했고, 그의 시신은 주교좌성당 지하에 안치되었다.
로메로 대주교의 시복 절차는 1990년대 초반부터 시작되었지만, 그가 신앙 때문에 순교한 것인지 정치적인 이유로 살해된 것인지에 대한 의견이 엇갈려 시복 재판이 한때 중단되기도 했다. 그 후 2007년 5월 베네딕토 16세(Benedictus XVI) 전임 교황이 “로메로 대주교는 그리스도의 미덕을 실천한 위대한 신앙의 증인”이라고 평가하면서 새 전기가 마련되었고, 프란치스코(Franciscus) 교황이 2015년 2월 로메로 대주교의 죽음을 순교로 인정하고 그를 순교자로 선포하면서 시복 일정이 확정되었다.
2015년 5월 23일, 산살바도르 시내 광장에서 교황청 시성성 장관 안젤로 아마토(Angelo Amato) 추기경 주례로 로메로 대주교의 시복 미사가 거행되었다. 시복식을 주례한 안젤로 아마토 추기경은 “로메로 대주교의 정신은 현재에도 살아 숨 쉬며 지구상에서 소외당하는 이들에게 위로를 전해주고 있다”고 언급하고, “가난한 이들을 향한 그의 선택은 이념적이지 않고 복음적이었다”며 “로메로 대주교는 분열이 아니라 평화의 상징이며, 아메리카 교회를 빛낸 별”이라고 말했다. 이날 시복 미사에는 주변 남아메리카 대통령들과 추기경들을 비롯해 30여만 명이 모였다. 제단은 로메로 대주교가 피살 당시 입었던 혈흔이 묻은 주교복과 꽃과 초로 꾸며졌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2018년 3월 7일 교황청 시성성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로메로 대주교의 전구로 인한 여성의 치유 기적을 승인한 시성 교령을 발표했다. 이는 시성에 필요한 마지막 단계인 기적심사가 통과되었음을 의미한다. 엘살바도르의 한 신문에 따르면, 임신중독증에 용혈, 간 기능 장애, 혈소판감소 등의 합병증이 더해진 헬프증후군(HELLP Syndrome)을 앓던 산모가 로메로 대주교의 전구로 살아났다고 한다. 체칠리아로 알려진 이 산모는 2015년 8월 헬프증후군을 앓아 간 기능 손상으로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의사는 그녀의 남편에게 “아내가 죽게 되었으니 주님을 믿는다면 기도하라”고 당부했다. 기도하러 집에 돌아온 남편은 할머니가 전해 준 성경을 펼쳤는데, 성경 속에는 할머니가 보고 기도하던 로메로 대주교의 상본이 있었다. 남편은 로메로 대주교에게 아내를 살려달라며 전구(轉求)를 청했고, 혼수상태에 빠졌던 아내는 다음 달 깨어나 완전히 회복되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8년 10월 14일, 제15차 세계주교대의원회의 기간 중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그의 시성 미사를 집전했다. 전 세계에서 7만여 명의 신자들이 참례한 시성식에서 로메로 대주교뿐 아니라 바오로 6세(Paulus VI, 9월 26일) 교황을 포함해 모두 7명의 성인이 새로 탄생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강론에서 로메로 대주교와 바오로 6세 교황에 대해 성덕을 삶을 살아가면서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교회의 증거자였다고 극찬했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모든 위험을 무릅쓰는 용기 있는 선택을 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할 것”이라며 “오늘 시성된 성인들은 이 길을 따랐다”고 덧붙였다. 교황은 이날 시성식 미사에서 로메로 대주교의 혈흔이 남아 있는 띠를 매고, 바오로 6세 교황이 사용하던 팔리움과 목장, 성작을 사용했다. 두 성인은 서로 개인적으로도 연결되어 있는데, 바오로 6세 교황은 로메로 대주교를 주교로 뽑았고, 후에 산살바도르 대교구장으로 임명했다.
오늘 축일을 맞은 오스카 로메로 (Oscar Romero)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