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일본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35년 전인 1977년이다. 삼성중공업 사원이던 나는 일본 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아 IHI라는 중공업 회사의 연구소에서 산업연수를 받았다. 당시 일본 연구원들은 내가 생전에 들어본 적도 없었던 연료전지(SOFC)를 연구하고 있었다. 또 유조선 탱크 속의 유황 성분을 잡아먹는 박테리아에 대한 연구까지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2004년 내가 일본삼성 사장으로 부임하자 세상은 엄청나게 변해 있었다. 그해 삼성전자가 일본 전자업계 톱10보다 무려 2배나 많은 이익을 낸 것이다. 큰 충격을 받은 일본에선 처음에는 시기심과 두려움에 기반한 것으로 보이는 삼성 견제와 압력의 여론이 일어났다. 하지만 몇 년 후부터는 ‘한국 기업에 배워야 한다’는 차분한 반성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삼성의 대표적 ‘일본통’인 이창렬 삼성사회봉사단 사장은 일본과의 인연을 소개하는 것으로 말문을 열었다. 전자업계 세계 1위로 부상한 삼성의 이건희 회장은 올 초에 “겉모습만 보면 삼성전자가 일본을 앞선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아직 멀었다”는 화두를 던졌다. ‘일본의 엄살과 불편한 진실’을 언급한 이 사장의 강연은 그에 대한 화답인 셈이었다.
“일본경제가 과거의 고성장 시대와 비교하면 장기불황이라고 할 만한 상황에 빠져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유럽 등 선진제국과 비교하면 그렇게 나쁜 상황은 아니다. 실제로 지난 20년 동안 아무리 경기가 나쁘다고 해도 일본은 아시아 경제위기와 미국발 금융위기 때를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마이너스 성장을 한 적이 없다. 한국경제 규모의 10배인 일본경제가 장기침체를 말하면서도 마이너스 성장을 하지 않고 현상을 유지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더 중요한 것은 삼성전자의 제품이 글로벌 시장에서 통하면 통할수록 그 제품을 만드는 데 활용되는 소재, 부품, 장비를 공급하는 일본기업의 실적도 동반상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반도체와 LCD 재료 중 60~70%를 일본기업이 장악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일본 산업사는 벤치마킹의 역사
이 사장의 설명에 따르면, 일본은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의 R&D 투자국이다. 일본은 매년 GDP의 3% 이상을 투자하고 있는데, 한국의 7~8배에 해당하는 액수이다. 심지어 시마다 하루오 전 게이오대 교수는 “1990년대는 일본 역사상 가장 혁신적 시기였다”고까지 평가했다. ‘잃어버린 10년’이 무색해지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일본의 경쟁력은 어디서 왔을까?
“장인정신(匠人精神)부터 거론해야 한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위계가 엄격했던 조선과 달리 에도시대의 일본에선 한 분야의 능력만 뛰어나도 사회적 인정을 받았다. 예컨대 칼을 잘 만들거나 물고기를 잘 기르는 사람이 일가를 이루면 대(代)를 물려 가업을 이었다. 덕분에 일본에는 1000년 이상 된 기업이 20개, 200년 이상 된 기업이 3900개나 된다. 참고로 독일에는 200년 이상 된 기업이 1850개 있다. 각 지방의 통치자인 다이묘가 수도인 에도에 나와서 1년 동안 살아야 하는 참근교대제(參勤交代制)도 결과적으로 산업사회 발달의 바탕이 되는 교통, 숙박, 화폐, 신용 등 사회적 인프라 확충에 기여했다. 일본이 일찍이 철도나 도로 같은 사회간접자본(SOC)에 눈을 뜬 것도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선진문물에 대한 적극적 수용을 가능케 했던 일본인의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도 빼놓을 수 없다. 나중에 임진왜란 때 조총으로 불렸던 철포(총)가 1543년 일본에 전래된 사연은 이와 관련 유명하다. 당시 큐슈(九州) 남단 작은 섬의 17세 도주는 포르투갈 선원에게 비싼 돈을 주고 철포를 샀고, 대장장이는 딸을 주면서까지 기어이 철포 제작 기술을 습득했다.
“선각자의 리더십과 인재의 육성도 부국강병의 견인차가 되었다. 특히 메이지 유신의 양대 축이 된 가고시마현의 사쓰마(?摩)와 야마구치현의 조슈(長州) 지역에선 일찍부터 서양과의 접촉이 빈번했다. 사쓰마에만 영어에 능통한 사람이 이미 500명이나 있었고, 일본에 들어와 살고 있던 외국인이 1천명이 넘었다고 한다. 두 지역에서 1860년대부터 자체적으로 미국과 유럽에 유학생을 파견하기도 했는데, 나중에 정부의 지도자가 된 조슈의 이토 히로부미, 사쓰마의 오쿠보 도시미치, 재계의 리더가 된 시부사와 에이이치 등이 이때 배출됐다. 라이벌 의식이 유독 강했던 두 지역을 중재했던 인물이 바로 ‘일본의 3대 영웅’으로 불리는 시코쿠의 도사(土佐) 출신 사카모도 료마이다. 야마구치현은 지금까지 9명의 총리를 배출했다.”
한편 이 사장은 철저한 벤치마킹, 군(軍)을 통한 기술 확보, 핵심역량에 대한 집중을 ‘일본 산업계의 3대 유전자’로 꼽았다. 그런데 벤치마킹과 관련해 이런 유명한 말이 있다. 2등 전략은 같은 분야의 1위를 배우면 되고, 1등 전략은 인접한 다른 분야의 1위를 배우면 된다. 하지만 슈퍼 1등 전략은 전혀 다른 분야의 1위를 배우거나 새로운 것을 창조해야 한다.
“일본은 세 번째 방법을 선택했는데, 일본 산업사는 벤치마킹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메이지 유신 직후 조직된 ‘이와쿠라(岩倉) 사절단’은 벤치마킹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데, 무려 2년 동안 12개국 132개 공장을 견학했다. 특이하게도 신정부와 구정부의 인사들 수십 명이 공동으로 참여한 사절단은 1871년 11월 12일 요코하마 항구를 출발해 미국(8개월), 영국(4개월), 프랑스(2개월), 독일(3주일), 러시아(2주일), 벨기에, 네덜란드, 덴마크, 스위스, 중국 등을 순방하며 공장과 학교는 물론이고 의회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관, 제도, 관행을 꼼꼼하게 살폈다. 귀국한 사절단은 약 100권에 이르는 방대한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이후부터 일본에 경찰, 대학, 우체국, 중앙은행 등 서구형 공공기관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노벨상 수상자 18명 배출의 비결
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일본은 벤치마킹의 위대한 전통을 이어갔다. 1955년 조직되기 시작한 일본생산성본부의 산업시찰단은 경영자, 근로자, 전문가 등 12명으로 구성됐는데, 발족한지 2년 만에 45회에 걸쳐 약 540명을 파견하는 혁혁한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이들은 철저한 사전 준비와 사후 공유를 통해 외국에서 넓힌 견문을 일본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군을 통한 기술 확보도 일본의 성장 동력이 됐다. 실제로 일본 동해도 신칸센은 해군 항공기술의 역량이 결집된 성과물이었다. 니콘(군함 거리측정기의 광학 기술), 전자시계(대포 신관 기술), 자동차(항공기 엔진 기술), 자동제어(함포 사격반의 장치 기술)도 비슷한 경로를 밟아서 빛을 볼 수 있었다. 해군기술사관학교를 비롯한 군 기관은 사실 산업 엘리트의 양성소 역할을 맡았는데, 소니의 창업자인 모리타(盛田)부터 해군 기술중위 출신이었다. 전방에서 싸우지 않고 후방에서 연구와 개발에 집중한 덕분에 사관학교 출신 7400여 명 중 178명만 전사한 것도 큰 도움이 됐다. 패전 이후 강제로 전역된 약 6000명은 민간 기업에 근무하게 됐는데, 패전은 일본 기업에 고급 기술인력을 확보하는 전화위복의 기회가 됐다.”
이 사장은 마지막으로 핵심역량에 대한 집중을 언급했다. 그러면서 소개한 것이 니콘, 울박, TDK, 후지필름 등 한 우물을 판 기업이다. 이들은 핵심역량을 기반으로 사업다각화에도 성공했다고 한다. 항산화 기술을 발전시켜 피부에 바르면 세포가 늙지 않는 화장품과 의약품을 신규 개발한 후지필름이 대표적 사례다. 이런 일본에게 우리가 배울 것은 무엇일까?
“기본과 기초부터 충실히 다지는 것을 배워서 확실한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 일본의 노벨상 수상자는 18명이나 된다. 특히 화학상 수상자 7명을 비롯해 거의 모두 수학, 화학, 물리, 의학에 집중돼 있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세밀한 작업에 능한 일본인의 특성도 한몫을 했지만 국가의 역할이 컸다. 산업화에 꼭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고급인재를 집중적으로 육성한 결과였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문부과학성은 향후 25~30년의 과학기술 동향을 전망한 보고서(‘2035년의 과학기술’), 경제산업성은 신산업 창출에 필요한 기술목표와 제품?서비스 수요창출 방안을 제시한 보고서(‘기술전략 맵’)를 발간했다. 그러면 중소기업은 이 로드맵을 바탕으로 장기적인 사업계획을 수립한다. 우리가 빨리 배워야 할 일본의 강점이다.”
정리=정지환 인간개발연구원 편집위원/감사나눔신문 편집국장 lowsaejae@gamsa.or.kr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