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님(이룻)의 자전 소설(自傳小說) '노을을 품고 흐르는 강'
제2편 1장. 해방, 그리고 이별
사진->이정님(이룻)作家
새롭고 낯선 생활의 체험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린 마음에도 기대 못지않게 두려움이 앞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설아가 입학한 초등학교는 학교가 조선 왕조시대의 관아 터였던 관계인지
수령이 500여 년에 가까운 아름드리 느티나무 수십여 그루가
학교 교문을 중심으로 양쪽 담장을 끼고 둘러져 있었다.
그 까닭인지 교실이 나무 그늘 밑에 단층으로 자리했는데
전체적으로는 꽤나 아늑한 감을 주었다 담임선생님은
‘미지꼬’라는 이름의 일본인 여선생님이었다.
설아는 동무들이 많이 생겨서 신이 났다.
마침 미지꼬 선생님이 자기 집에 거처를 정하게 되어 더더욱 신이 났다.
미지꼬 선생님은 언제나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러잖아도 예쁜 얼굴이 더 돋보였다. 농투성이로 자라나는 새까만 아이들 사이에서
미지꼬 선생님은 하얀 날개를 고이 접어서 숨겨놓은 천사 같았다.
더 호기심을 끄는 것은 선생님이 그때까지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이상한 양말을 신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아이들이 궁금해서 양말의 이름을 물었더니 ‘스타킹’이라고 했다.
스타킹, 스타킹, 하면서 설아는 입속으로 뇌어보았다.
참으로 요상한 이름이었다. 뱀 허물 같았지만 신기하기 짝이 없는 물건이었다.
신은 전지 안 신은 건지 살색하고 똑같은 긴 양말의 정체를 만져도 보고
쭈 우욱 늘려도 보고했지만 신기한 건 늘어만 갔다.
설아는 이다음에 선생님이 되어서 저런 양말을 꼭 신어 볼 것이라고 속으로 다짐했다.
아침이면 미지꼬 선생님은 설아의 손목을 잡고 등굣길에 올랐다.
그럴 때면 설아는 기분이 너무 좋았다.
앞에서 가던 아이들이 연신 흘낏흘낏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서 따라오는 아이들에게는 설아가 뒤돌아보면서 연신 작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매일매일 참으로 신나는 하루의 시작이었다.
설아는 체구는 작았지만 반장이 되었다.
입학 적령기를 놓쳐 나이가 많은 채 입학한 아이들은 덩치가 커서 말을 잘 안 들었다.
그때마다 미지꼬 선생님이 반장인 설아 편을 들어주었고,
때로는 혼을 내 주기도 했다.
설아는 나날이 즐겁고 신이 났다. 어른들이 모이면 곧
해방이 온다느니 뭐니 수런거려도 알 바 아니었다. 조국이니,
광복이니, 자유니 하는 것들을 알기에는 설아는 아직 너무 어렸다.
말이 무서워서 그랬는지 어른들은 아이들이 듣는 데서는 말을 하다가도
이내 그치는 일이 많았다.
그래도 그중에 제일 많이 듣는 얘기는 왜놈들이 저렇게
남의 나라에 쳐들어와서 있는 대로 극악을 떠니 곧 망할 것이라는 얘기였다.
색시 공출을 해간다고 해서 어떤집에서는 어린 딸을 부엌 한켠 짚단 사이에 숨겨 놓기도 하고
적령기가 아닌데도 일찍 시집을 보내기도 했다.
일본 경찰이 와서 딸을 내놓으라고 윽박지르면서 심할 때는
총 끝에 달린 칼로 집안 여기저기를 쑤셔댔다고 했다.
그런 저런 얘기를 듣게 되면 설아는 뭔가 무서움이 느껴졌지만
곧 자신의 놀이터인 언덕에 올라가서 학교에서 배운 것에다 말을 보태 노래를 불렀다.
“이찌니 산 시 짠지 먹고 물 켜라.”
박자에 맞추어 팔짤팔짝 뛰었다.
“뽀뽀뽀 하도 뽀뽀…….
뜻은 몰라도 노랫말이 재미있어서 더 신이 났다.
집에 와서는 퇴근 해 온 미지꼬 선생님과 방에서 뒹굴며 놀았고,
뱀 허물 같은 스타킹을 맘껏 신어보기도 했다.
어린 설아는, 두 발을 다 넣어도 쭉쭉 늘어나는 신기한 스타팅을
신고 벗을 생각을 하면 가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였다.
그러면서 설아는 이다음 커서 반드시 선생님이 될 것이라는 꿈을 거듭 꾸곤 했다.
일요일에 설아네 마당 한구석에 놓인 디딜방아를 찧으려고 동네 사람들이 오면
재미로 미지꼬 선생님이 대신 찧어주기도 했다.
그 바람에 동네 처녀들은 미지꼬 선생님의 주변을 돌며 지대한 관심을 표시하기도 했다.
이 노인과 아버지는 설아가 미지꼬 선생과 가까이 지내는 것을 별로 달갑지 않게 여겼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미지꼬 선생이 설아네에 거처를 정하게 된 것은
할아버지와 관련하여 읍내 경찰서장의 은근한 강권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방을 내주게 된 것인데, 어린 설아로서는 그
러한 사정을 알 리 없었다. 게다가 남들보다 집이 컸고,
디귿자로 생긴 집에는 여분의 방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설아는 방이 더 있다는 사실이 마냥 좋았고, 방을 비운 고모가
잘살든 말든 시집을 간 것은 정말 잘된 일이라 여겼다.
--- 제2편 1장 끝 ---
제2편 2장. 해방, 그리고 이별
미지꼬 선생님과 손잡고 즐겁게 학교에 다니다 보니
어느덧 봄 한철에 여름 더위가 막바지에 오른 8월 15일이었다.
드디어 이 땅에 올 것이 온 것이있다.
이날 라디오에서 급하게 전해온 것은 히로히토 일본 천황의 꺼져가는 듯한 항복 선언이었고,
우리 민족에겐 광명 천지의 해방의 날이었고. 민족의 앞날에 새로운 서광이 비친 날이었다.
거리엔 화색이 도는 사람들이 몰려나와 만세를 외쳤고
분명 무슨 큰일을 맞이한 것은 분명했다.
그날따라 미지꼬 선생님이 학교에 밀린 일이 있으니 먼저 가라고 하여
설아는 혼자 집에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 보니 놀랍게도 할아버지가
대청마루에 거나하게 걸터앉아 특유의 호탕한 웃음을 지으며 웃고 계셨다.
할머니는 그런 할아버지 옆에 앉아 연신 부채질을 해주고 계셨고,
할아버지는 이따금 안마당을 한 바퀴 겅중겅중 뛸 듯이 걷다가는
다시 마루에 걸터앉곤 하셨다.
설아로서는 할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처음 보았다.
설아는 그때마다 눈이 둥그레지면서도 할아버지가
애들 같다는 생각에 웃음이 나올 뻔 했다. ‘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저리 기뻐하시는 걸까?’
설아가 속으로 생각하고 있을 때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향하여 환하게 웃으시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여보, 우리나라가 해방이 되었소. 광복이 되었단 말이오.
꿈에도 그리던 해방이 말이오…… 아하하하…… 어흠.”
“영감의 평생의 소원이 이루어졌구려.”
할머니도 감격한 듯이 활짝 웃으며 화답했다.
집안에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그 웃음의 이면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남달리 자존심이 강했던 이 노인의 가슴 속에는 주권을 빼앗긴
식민지 백성으로 살아야 했던 굴욕감이 뼈에 사무쳤을 것이다.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에 보이게 혹은 보이지 않게 골 깊은
갈등이 만만치 않았을 것임이 분명했다.
그날 아버지는 술을 조금 마시고 들어왔다. 좋으리만치 홍조 띤 얼굴은 땀으로 가득했다.
아버지는 다짜고짜 할아버지 앞에 가 서더니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 오늘 아버지께서 그렇게 기다리셨던 해방이 되었습니다.
너무나 기쁜 날입니다.”
“오냐, 그렇구나. 우리 민족에겐 더 없이 좋은 소식이다.”
할아버지는 아들의 손을 잡아주며 한 손으론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아버지는 대청마루 끝에 걸터앉았다. 이번에는 고개를 푹 숙이고
한참을 침묵으로 앉아 있더니 갑자기 대성통곡을 하는 것이었다.
설아는 깜짝 놀랐다.
왜 할아버지는 웃고 아버지는 우는지 알 수가 없어서
우는 아버지 곁에 앉아 말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아범아, 이 좋은 날 울긴 왜 우느냐?”
할머니의 걱정 어린 말이었다.
“어머니, 너무 기쁘면 웃음이 울음이 된다는 거 잘 아시잖아요?”
“어허, 딴은 그렇다. 네 아버지께서 얼마나 가슴 조이며 이날만을 고대해 왔더냐.”
“하늘이 무심치 않을 것임을 내 진즉부터 알았느니라.”
할아버지의 들릴 듯 말 듯한 독백 속에는 사필귀정임을 되뇌는 듯 했다.
설아는 어른들의 희비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대단히 좋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너끈히 짐작할 수 있었다.
엄마도 우는 아버지가 걱정스러웠던지 부엌에서 하던 일을 멈추고 나와 보았다.
그랬다. 큰일이 일어났다. 이 땅에 막혔던 강물이 확 뚫렸다.
삼천리 금수강산에 수십 년 무겁게 드리워졌던 일본제국주의의
검은 구름이 걷히고 활짝 갠 것이었다. 시들어가던 우리 민족의 정기가
되살아나는 엄청난 축복이 터진 것이었다.
이필주는 같이 기뻐하는 아내를 돌아보며 일렀다.
“여보, 거 뒤란 장독대 밑에 묻어두었던 놋그릇도 꺼내 깨끗이 닦아 놓구려.
이 기쁜 소식을 조상님께 제를 올려 고해야 하지 않겠소.
해방이라니 이렇게 고마울 데가…….”
이튿날 설아가 학교에 가려고 가방을 챙길 때였다.
아버지의 정감있는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설아야, 오늘 학교는 쉴 게다. 해방이 되어서 당분간은 쉴 게야. 헛걸음하지 말거라.”
가방을 다시 넣어두려고 벽장문을 열 때였다.
열린 방문 사이로 미지꼬 선생님이 고개를 폭 숙인 채 대청을 지나
안방 쪽으로 건너가는 모습이 보였다. 선생님의 모습이 평소와는 달랐다.
어린 설아 눈에도 잔뜩 풀이 죽어 있고 조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어린 설아 눈에도 잔뜩 풀이 죽어 있고 조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설아로서는 미지꼬 선생님의 그런 모습이 불쌍해 견딜 수가 없었다.
언제나 명랑하고 행동도 발랄했는데 그날 아침의 미지꼬나 선생님은
비에 흠뻑 젖은 참새 같았다. 어디 몸이 아프신 걸까?.
설아의 마음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몰려왔다.
책가방을 벽장 속에 집어넣자마자 뛰어나가 선생님 곁에 바짝 붙어 섰다.
선생님이 안방으로 들어서자 설아도 덩달아 방으로 들어갔다.
안방에는 이미 할아버지를 비롯해서 할머니 아버지, 엄마, 승우 오빠까지
온 가족이 할아버지를 중심으로 빙 둘러앉아 있었다.
미지꼬 선생님은 말없이 이 노인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공손히 앉았다.
설아도 미지꼬 선생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미지꼬 선생님 이 잘못한 일이 있어서 벌을 받는다면 같이 받으리라고 생각했다.
이때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동네 사람들이 지게 작대기를 손에 들고 '미지꼬 나와! 미지꼬 나와!
이 원수 같은 나라의 딸년아!"하며 아우성들이었다.
당장 엄청난 일이라도 벌어질 것 같은 살벌한 광경에 설아는
자신도 모르게 안방 문을 후다닥 닫아 버렸다.
한편, 할아버지는 쉽게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모두 석고상이 된 듯 경직된 자세로 까만 눈만 껌벅거릴 뿐이었다.
할아버지는 들고 있는 쥘부채의 대나무 마디를 헤아리고 있다는 듯이
시선을 아래로 향하고 있다가 한참만에야 고개를 들었다.
기침을 한 번 한 후 무겁게 입을 열었다.
“미지꼬 선생도 아시겠지만 우리 조선이 해방이 되었소.
해방 말이요. 이제 당신네들은 당신들 나라로 돌아가야 할 것이오.”
할아버지의 말은 단호했지만 음성만큼은 약간 떨리는 것 같았다.
“참으로 길고도 긴 삼십육 년이란 세월을 우리 조선은
당신네 나라의 일방적인 강압 속에 국권을 빼앗기고 살았소.
우리의 고유한 언어도 빼앗긴 채 모든 것을 수탈당하며 살았소. 아니 그렇소?”
미지꼬 선생님이 기어들어가는 모깃소리로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삼십육 년 동안 치욕스런 목숨을 부지하면서 가슴 아픈 것이 많이 있었지만
그 중에도 제일로 가슴 아픈 것은 선생 같은 꽃다운 어린 나이의 이 나라 처녀들이오.”
할아버지는 잠시 오르는 더위를 쫓기라도 하려는지 말을 쉬었다.
부채질을 좀 더 자지게 하였지만 이내 하던 말을 이어갔다.
“전쟁터에 강제로 끌려가 당신네 군인들에게 모진 고초를 당했단 말이오.
정절을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이 나라 처녀들이 말이외다.”
그 부모들은 생병이 나서 죽은 사람도 많단 말이오!"
“네, 정말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머리를 연신 조아리며 말하는 미지꼬 선생님의 마음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상황에서 그렇게 대답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터였다.
“사실 미지꼬 선생과 우리 가족 사이에 무슨 원한이 있는 게 아니니
미워할 일은 없는 것 같소. 그래서 내가 말하기가 더 어렵긴 하지만…….”
이 노인은 ‘으흠’ 하고 헛기침을 한 번 더 하였다.
미지꼬 선생님은 눈치가 빠르고 총명한 여자였다.
높은 교육을 받은 만큼 교양이 있었다. 아무리 쪽바리라고 멸시를 해도
성실 근면했으며 겸손하고 상냥했다.
이 노인은 그간에 안 보는 척하면서도 낱낱이 지켜보았던 모양 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이 노인의 말은 또 한 번 끊어졌다.
설아는 무릎 꿇은 다리가 아파서 어서 할아버지의 말이 끝나기만 바랐다.
그때 이 노인은 다시 쥘부채를 한 번 쭉 폈다가 힘차게 오므리고 나더니
미지꼬 선생님을 다시 한 번 더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미지꼬 선생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네, 잘 알겠습니다. 곧 방을 비워드리겠습니다.”
“어흠.”
이 노인은 무겁게 입을 다물었다. 빙 둘러앉은 가족들은 여전히 말 없이 앉아 있기만 했다.
무거운 침묵을 깨고 미지꼬 선생님의 말소리가 이어졌다.
“안녕히 계십시오. 그동안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미지꼬 선생님은 떨리는 목소리로 정중하게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 한 후 방을 나갔다.
설아가 선생님이 앉았던 자리를 보니 눈물이 떨어져 있었다. 설아는 마음이 아팠다.
밖에서는 여전히 사람들이 웅성거렸고 미지꼬 선생님을 향한 야욕에 찬 고함이 방 안까지 들려왔다.
할아버지는 밖을 내다보시더니 사람들이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미지꼬 선생은 당장 이 나라를 떠나시오!
기한은 이틀이오! 이 나라 백성들의 분노가 당신 머리 위에 어떤 불똥을 놓을지 모를테니까!"
"미지꼬 선생은 내가 알아서 조치를 취할 떼니 모두 집으로 돌아 들 가시오!"
하며 방문을 쾅! 열었다 닫으셨다.
설아는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할아버지가 하는 얘기를 설아는 다 이해하진 못했지만
그것이 미지꼬 선생님의 잘못이 아니라는 점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왜들 저러시는 걸까.
착하고 상냥한 미지꼬 선생님을 울게 만드는 할아버지가 미웠다.
설아는 아픈 다리를 절뚝거리며 일어나 미지꼬 선생님 방 앞으로 다가갔다.
예전 같으면 선생님이 방문을 열지 않아도 설아가 먼저 “선생님!”
하고 방문을 열었으련만, 이번만큼은 왠지 목구멍이 잠겨 말이 나오지 않았다.
강아지 멍구가 남의 속도 모르고 설아 곁으로 다가와 꼬리를 흔들었다.
때가 때인 만큼 설아는 조심스러워하면서도 발로 멍구를 걷어찼다.
그러자 방문이 조용히 열리며 미지꼬 선생님이 어서 들어오라고 손 신호를 보냈다.
설아는 공연히 누구에게 들켜서는 안 될 것 같은 마음이 들어
힐끗 뒤를 돌아보고는 잽싸게 방 안으로 들어섰다.
미지꼬 선생님은 설아를 자신의 품안에 끌어안더니 숨죽이며 다시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설아도 따라 울었다.
그렇게 한참을 같이 울다가 미지꼬 선생님이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오늘로 설아의 이름을 마지막으로 불러보게 되네요.
나의 막내 동생과 같은 또래여서 난 언제나 설아를 남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그리고 그동안 일본에 있는 동생이 보고 싶을 때는 설아를 보면서 그리운 마음을 달랬었지요.”
설아의 눈에서는 더 많은 눈물이 쏟아졌다.
설아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는데 미지꼬 선생님이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가방에 들어갈 물건이래야 별것이 없는 둣 보였다.
입을 옷 몇 가지뿐 일본어로 된 책이 대부분이었다.
한 책을 펴 보이더니 고개를 갸우뚱하며 설아를 보면서 말했다.
“이것은 재미있는 동화책이긴 한데 일본 글자라서 설아를 주어도 읽을 수 없을 거예요.”
그러면서 방 한쪽 구석으로 밀쳐놓았다.
설아는 냉큼 그 책을 주워 표지를 본 후 자신의 가슴에 안았다.
표지엔 예쁜 그림이 있는데 왕자 같기도 하고 공주 같기도 했다.
고운 색깔로 그려진 그림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저어…… 선생님, 가지 마세요. 제가 선생님 동생 할게요.”
“설아, 이다음에 설아가 다 자라면 선생님이 왜 떠나야 했는지 알게 될 거예요.
그리고 설아가 자라서 그때 다시 우리는 반갑게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정말로요? 그런데 선생님은 어디로 가시는 거예요? 제가 놀러 갈게요.”
“선생님 집이 있는 일본으로 가야지요. 배를 타고 가야 하는 먼 나라랍니다.”
설아는 자신의 작은 가슴에서 아주 소중한 무엇인가가 빠져나감을 느낄 수 있었다.
병아리 같은 작은 가슴에 저항할 수 없는 그 무엇이었는데
그것이 운명이라는 것임을 설아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이 어린 설아가 만난 최초의 이별이었다.
또한 미지꼬 선생님을 좋아한 것이 타인을 향한 최초의 사랑이었다는 것도 몰랐다.
떠난다는 말을 들으면서 제일 먼저 설아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단순한 생각 그 자체였다.
‘비 오는 날 우산은 누가 씌워주나?’
하는 걱정과 ‘이제 학교 갈 때 누구와 함께 가야 하나?’였다.
그때 미지꼬 선생님이 무엇인가를 설아 앞에 내밀었다.
설아가 보니 작은 쇳덩이로 된 것이었는데 자세히 보니 인형 같았다.
“이거 설아에게 줄게요.”
“이게 뭐여요?”
“구리로 만든 인형이에요. 여기 잘 보아요. 가슴에 무엇을 안고 있지요?
여기 키가 조금 큰 인형이 안은 것은 첼로라는 악기고요
작은 인형이 안은 건 바이올린이라는 악기랍니다.”-
똑같이 줄을 타거나 켜서 나는 소리를 가졌고
남과 여의 성정을 닮은 듯한 첼로와 바이올린을 설아가 알리가 없었다.
“이것은 인형이지만 실제로 이만큼 큰 첼로와 바이올린은 활로 켜거나
거문고처럼 줄을 당기면 예쁜 소리가 나지요. 아주 예쁜 소리가요.”
손동작을 하며 즐겁게 웃는 선생님은 떠나는 사람 같지가 않았다.
“거문고는 저도 좀 알아요. 하지만 활로 어떻게 소리를 내요?
활은 사냥할 때 쓰는 거잖아요.”
미지꼬 선생님은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것도 설아가 크면 저절로 알게 되지요. 이 인형들은 내 생일날
선물로 받은 건데 오늘 선생님이 설아에게 헤어지는 선물로 주고 갈게요.”
설아는 구리 인형 두 개를 받아들고 또 한 번 콧등이 시큰해왔다.
이윽고 미지꼬 선생님은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점심때가 거의 되었다.
설아는 얼른 부엌으로 갔다. 엄마가 자기 몫으로 뭉쳐놓는 누룽지를
가져다가 선생님에게 안겨주었다. 밖으로 배웅을 나갈 참이었다.
미지꼬 선생님은 대문을 나서다가 안채를 향하여 돌아서더니 고개를 최대로 숙여
공손히 인사를 했다. 엄마 외에는 내다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까 미지꼬 선생은 엄마를 빼고는 마루라든가,
기둥이라든가, 방문에 대고 절을 한 셈이었다.
아니, 마당 한쪽에 있는 디딜방아라든가 조그만 지붕을 쓰고 있는
우물에 대고 한 것일지도 몰랐다.
설아는 잠시 생각했다.
'선생님이 되면 헤어질 때 눈에 보이는 저런 여러가지에게도 절을 하는가 보다'라고.
설아는 선생님의 그 모습이 그렇게 애처로워 보일 수가 없었다.
미지꼬 선생님은 집 앞마당을 천천히 걸어 나갔다. 혹시 행패를 부리던 사람들이 몰려오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설아는 선생님의 걸음이 빨랐으면 하는 생각도 하였다.
다행히 동네는 조용했다.
설아는 날마다 놀고, 나물을 뜯기도 하던 언덕으로 올라가
미지꼬 선생님이 사라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고 싶었다.
언덕을 넘어 조금 더 가면 시내로 나가는 버스정류장이 있는데 그리로 가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또 한 남자가 미지꼬 선생님처럼 양손에 가방을 들고 그쪽을 향하여 걷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다른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로부아라라는 선생이었다.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그 자리에 잠시 서서 뭔가 얘기하는 것처럼 보였다.
로부아라 선생은 설아네 동네에서 고개 하나 너머 안골이라는 동네에
하숙을 하고 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두 사람은 이제는 별일이 없었다는 듯이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면서 가고 있었다.
설아는 그 모습에 기분이 언짢아져 혼자 중얼거렸다.
‘내가 여기서 이렇게 보고 있는데 어쩜 둬도 안 돌아보는 거야.
선생님 나빠! 미워. 손이라도 한번 흔들어주지.’
설아는 제 성질에 못 이겨 갖고 있던 구리인형을 냅다 내동댕이쳤다.
바이올린을 안고 있는 인형이 큰 돌에 부딪히더니 그만 고개 쪽이 댕강하고 부러지고 말았다.
그래도 첼로를 안고 있는 인형만은 깨어지지 않았다.
설아는 그것만을 냉큼 주워들고 집안으로 들어왔다.
---제2편 해방, 그리고 이별 끝---
곧 이어서 제3편 '부자간의 갈등과 이념의 대립'이 연재 되오니 많은 구독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18년12월21일(금)
캐나다 몬트리올 累家에서
청송(靑松) 카페지기 베드로 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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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닉네임/실명 답변 예) 베드로 문/문신범
5. 가입 인사 글 보냄
2021년8월6일(금)
캐나다 몬트리올 累家에서
청송(靑松)카페지기
베드로 문 拜上
첫댓글 오늘도 소중한 영상주셔서 노고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무더위 건강하십시요.
고마워요.
수고하셨습니다
@남 진희 cafe
고마워요.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