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달] 대야성 大野城(1권) 10. 野心의 陰謀

[⊙햇살⊙]

제 10 장 野心의 陰謀


1

육신(肉身)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도깨비 불처럼 날아 다니는 혼(魂)도 아니었다. 
극고(極高)의 무(武)의 정화(精華)로 이루어진 기(氣) 그 자체. 
단목천기는 군도맹의 총단 위를 날고 있었다. 
지금 그가 향하고 있는 방향은 바로 군왕천도 혁세겸이 머무르는 태진루
(太眞樓)였다. 
어둠 속 곳곳에 호위무사들이 보였으나 거칠 것이 없었다. 
일점 형체도 기척도 없이 단목천기는 그들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태진루(太眞樓).
군도맹 중앙에 위치한 거대한 칠층 누각. 
단목천기는 그 뒤에 우뚝 선 채 주위를 살펴보았다. 
언뜻 그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떠올리더니  미소와 함께 두터운 벽 속으
로 스미듯 사라졌다. 
칠층의 내실(內室),
가물가물 은촛대 위에 불빛이  타오르는 실내 한  구석으로 마치 무형의 
안개가 어리듯 단목천기가 스르르 나타났다. 
일순 실내를 향하는 그의 눈에 번뜻 이채가 어렸다. 
중앙에 거대하고 긴 그림자를 끌며 서성거리는 인물을 발견한 것이다. 
바로 군왕천도 혁세겸이었다.
한데 호쾌하던 그의 얼굴은 지금 뭔가 심각한 고민에 빠진 듯, 이마에 깊
은 주름살이 패였다. 
이윽고 어두운 기색으로 땅이 꺼질 듯한 한숨까지 몰아쉬는 것이었다. 
단목천기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하기야 알아차린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 아닌가!
이때였다.
"아무리 혼자일 때라도 긴장이 풀려선 안되오. 혁맹주."
음산하고 저미(低迷)한 음성이 깔려들며  실내에 한 명의 인물이  나타났
다. 날카롭고 번뜩이는 사목(蛇目)의 노인(老人)이었다. 
어깨까지 내리덮은 뻣뻣한 장발은  놀랍게도 푸른 머리칼이었고,  깡마른 
얼굴은 머리카락에서 물든 것처럼 푸르스름했다.
푸르죽죽하게 꺼진 얼굴에서 풍기는 것은 극히 음사(陰邪)하고 써늘했다. 
누구라도 그 번뜩이는 사목과 부딪히면  혈관이 얼어붙고 모발이 곤두서
고 말리라.
그를 발견한 혁세겸은 당황해 하며 극히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어서 오십시오. 대숙노야(大叔老爺)!"
단목천기는 가벼운 의혹을 느꼈다.
(대숙노야? 혁세겸이 저토록 쩔쩔매는 저 노인은 누군가?)
대숙노야라 불리운 노인은 차갑고 깊숙이  번뜩이는 눈으로 혁세겸을 응
시하더니 짧게 물었다.
"어떻소. 일은 잘 진행되고 있소?"
혁세겸은 포권을 풀지 않은 채 정중히 대답했다.
"염려마십시오. 열흘 이내에 다섯째  공자(公子)께서 군도맹의 새로운 후
계자로 탄생하실 것입니다."
"음."
사목의 노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번 일에 대해 제군(帝君)께선 큰  기대를 걸고 계신다오. 물론 그대의 
입신출세가 이번 일에 달렸음을 그대도 잘 알고 있겠지만……"
혁세겸은 칼칼하고 음랭한 목소리가 몸을  휘감아 드는 것처럼 미미하게 
전신을 떨었다.
"명심…… 하고 있습니다."
사목노인은 푸른 안색에 거의  알아보기 힘들 만큼  희미한 미소를 언뜻 
떠올렸다.
"이번 일만 잘 되면 그대의 출세는 맡아놓은 것이나 다름 없소. 제군께서 
크나큰 상을 내리실 것이오."
"감사하옵니다."
혁세겸은 매우 황송한 듯 허리를 굽혔다. 
그러다 문득, 그는 잠시 머뭇거리며 난색어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한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
"혁가 늙은 놈이 아직도 그 비도(秘圖)에 대해 입을 열지 않고 있습니다."
순간, 사목노인의 가느스름한 두 눈이 새파란 독광(毒光)을 뿜었다.
"무슨 소리요? 가장 중요한 건 바로 그 금마비도(禁魔秘圖)요. 그것을 얻
지 못하면 다른 것이 모두 성공한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소."
부르르……
혁세겸은 안색이 허옇게 질리며 진저리치듯 몸을 떨었다. 
사목노인의 한 마디가 보여준 위력이었다.
"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사목노인은 안색을 누그러뜨리지 않은 채 물었다.
"백수련, 그 계집아이는 어떻소?"
"의부의 생사(生死) 때문에 따라오는 듯은 하지만, 아무래도 요즘 행동은 
미온적입니다."
사목노인의 두 눈에선 음산무비한 안광이 끈끈하게 얽혀 나왔다.
"계집이란 언제 변할지 모르니 다른 방도를 취하시오!"
"어떤……"
혁세겸은 식은 땀을 흘리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방법까지 가르쳐 줘야겠소? 몸을 취하시오. 그 방면에 능통한 자를 시켜
서……"
"알겠습니다."
사목노인은 천천히 등을 돌리다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그리고…… 당신도 몸조심을 해두는 게 좋을거요. 얼마  전 야율격이 소
주(蘇州)에서 정체 모를 인물에게 크게 당했소."
"야…… 야율노사께서?"
혁세겸은 안색이 대변하며 불신에 찬 눈으로 사목노인을 응시했다.
"그렇소."
"믿…… 을 수 없는 일입니다. 당금 중원에 그  누가 있어 감히 야율노사
를……"
"그의 말을 들어보면 놈은 중년의 나이에 상상 불허의 무공을 지니고 있
다고 하오."
혁세겸은 심장 한 구석이 서늘히 식는 느낌이었다. 
사목노인의 말이 느리게 이어졌다.
"천하(天下)는 넓소. 또 어떤 강자(强者)가 어디에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
니 극히 조심하는 게 좋을 것이오."
"명심……"
하나 사목노인의 모습은 이미 연기처럼 꺼지고 없었다. 
혁세겸은 실내 중앙에 우뚝 선 채 무거운 한숨을 몰아 쉬었다. 
문득 그의 시선은 좌측 석벽을 향해 이글거리듯 내쏘아졌다.
갑자기 그는 석벽 쪽으로 다가가더니 길게 늘어뜨려진 족자를 밀었다. 그 
뒤에는 너비 두 뼘 정도의  공간이 있었고, 그 속에 둥근  쇠고리가 있었
다. 
혁세겸은 그 쇠고리를 당겼다. 
그러자 놀랍게도 석벽이 서서히 이동해 한 사람이 통과할 정도의 
공간이 생기지 않는가? 
직후, 혁세겸은 빨리듯 그 속으로 사라졌다.
통로(通路), 그것은 곤두박질치듯 급박한 경사의 돌층계였다.
혁세겸은 이미 보이지 않았지만 단목천기는  기민한 직감으로 그의 위치
를 감지하며 계속 신형을 날렸다.
(예상보다 일이 복잡하게 되어가는군! 짐작한대로 혁세겸이  가짜라는 사
실은 알아냈는데, 그의 뒤에 도사린 자들은 누구일까?)
단목천기는 계속 염두를 굴렸다.
(야율격 역시 이들과  연관이 있다.  한데 제군(帝君)……  그 자의 정체
는……?)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 인물이었다. 
한데,
(웃……!)
그는 갑자기 가슴 한쪽에 뜨끔한 고통이 엄습함을 느꼈다.
(벌써…… 시간이 절반이나 지났구나!)
초조감이 일었다. 
그렇다. 인간이 환매천술을 이용할 수  있는 시간의 한계는 한  시진이었
다. 반드시 한 시진 내에 육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氣)가 소멸되어 형체도 없이 죽게되는 것이다.
단목천기는 신형을 더욱 빨리했다.
이윽고 돌층계가 끝나자 몇  개의 미로를 거쳐  단목천기는 하나의 석문 
앞에 우뚝 섰다.
석실 안으로 들어선 순간 단목천기는 거의 본능적인 강한 느낌을 받으며 
한 곳에 시선을 못박았다.
괴물(怪物), 그렇게 밖에 형용할 수 없는 끔찍한 형상의 인물은 
바로 암흑같은 석실 한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
마구 헝클어져 늘어진 머리카락, 여기저기 찢겨 핏덩이와  함께 엉켜붙은 
옷자락……
게다가 비파골이 꿰뚫린 채 전신이 쇠사슬에 엉켜 있었다.
"흐흐…… 어떻소. 사형?"
혁세겸은 석실 한가운데에 우뚝 선 채 을씨년스러운 괴소를 흘렸다. 
웅크리고 있던 괴인은 천천히 고개를 쳐들었다.
순간, 단목천기는 자신의 직감이 적중했음을 깨달았다.
(진짜 혁세겸이다……!)
그렇다. 비록 초췌하고 증오에 일그러진 얼굴이었지만 그의  모습은 혁세
겸과 너무나 똑같았다.
그가 진짜 군왕천도라는 느낌은 한순간 확연하게 가슴에 와 닿는 것이었
다. 
눈으로 이글이글 원한의 불덩어리를 토해내며 진짜 혁세겸은 부서지도록 
이를 갈았다.
"좌응백(左應魄)…… 네놈이 감히 나를 배신하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흐흐…… 이 군도맹의 그 누구도  내가 혁세겸임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
다. 너무 완벽한 연기를 해내고 있으니까 말이다. 크흐흐……"
혁세겸은 주체치 못할 분노와 절망감에 몸을 떨었다.
"찢어 죽일 놈…… 과거 사부께서 네놈을 조심하라고 그토록 이르셨어도 
사제지간의 정리(情理)를 믿고 방심했더니……"
"크흐흐…… 크…… 크흐…… 하…… 하핫!"
좌응백은 전신을 흔들어대며 굉렬한 광소를 터뜨렸다. 
석벽이 무너질 듯 요란하고 섬뜩한 웃음이었다. 
문득 좌응백은 광소를 뚝 끊으며 두  눈을 가늘게 뜨고 혁세겸을 내려다 
봤다. 
"이제 더 이상 참아낼 의지는 남아있지 않을 것이오. 사형……"
"……"
"이제 금마비도만 내놓는다면 모든 것은 원상태로 회복될  수 있소. 물론 
군도맹의 맹주 자리도 말이오……"
순간, 혁세겸은 분노가 타오르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부드득 이를 갈았
다.
"크흐…… 좌응백! 노부를 함부로 여기지  마라. 노부의 입에서 금마비도
의 비밀이 열리지 않는 한…… 네놈은 영원히 나를 죽이지 못할 것이다."
"으…… 음!"
좌응백은 자신의 심중이 탄로나자 스산한 침음성을 흘렸다. 
그의 두 눈은 점차 짙푸른 살기를 띠고 번뜩였다.
"끝내…… 거절인가?"
"……"
혁세겸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그는 아예 두 눈을 감은 채 바위처럼 움직
이지 않고 있었다. 
좌응백의 얼굴은 경직되어 살기 띤 채 이지러졌다. 
엷은 절망의 빛이 분노와 함께 그 얼굴에 뒤얽혀 오르더니,
"후회하게 될 것이다, 혁세겸!"
그는 저주하듯 차가운 일갈을 남기며 밖으로 사라졌다. 
순식간에 깊은 강물 속 같은 괴괴한 정적과 눅눅한 습기가 한꺼
번에 떠밀리듯 석실을 메웠다.
느리게 혁세겸은 몸을 웅크리며 두 팔 속에 머리를 파묻었다. 
오랜 습관과 깊은 체념이 배인 움직임이었다.
하늘을 꿰뚫어 버릴 것 같은 분노와 증오, 저주는  어둠처럼 무겁고 힘겹
게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한데 그때였다.
"좌응백, 그자가 바로 혁맹주의 사제(師弟)였소?"
돌연, 턱 앞에서 나직하고도 담담한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순간 혁세겸은 심장이 무너져 내릴 만큼 놀라고 있었다.
"누…… 누구냐?"
그는 날카롭게 부르짖으며 벌떡 일어났다.
철그렁!
촤르르---- 르---- 륵!
그의 전신을 얽은 굵은 쇠사슬들이 일제히 아우성치듯  쩔그렁거렸다. 혁
세겸의 두 눈은 부릅떠진 채 어두운 석실을 훑고 있었다.
"나는 바로 맹주 옆에 앉아 있소. 하나 적(敵)은 아니니 안심하시오."
혁세겸의 두 눈이 더욱 부릅떠지며 은은히 경악으로 물들었다.
(곁에 있다고……?)
곁에 있다니…… 그건 도저히 불가능했다.
이곳은 겉으로 보기엔 단순한 석실처럼 보이나 사실 그 속엔 만년철강보
다 더 단단한 벽이 들어 있으며, 먼지 한 점 흘러들 틈이 없었다.
게다가 심오한 내공으로 트여진 그의 두  눈에는 벌레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또한 한 점 기(氣)조차도……
한데 상대의 목소리는 숨결까지 느껴질 만큼 가까운 지척에서 들리지 않
는가!
"당…… 당신은 지금 어디 숨어있소?"
단목천기는 나직한 웃음을 띄며 말했다.
"숨다니…… 나는 지금 당신 옆에  당당히 앉아 있소. 하지만  내 육신이 
여기 없으니 맹주의 눈에는 내 모습이 보이지 않을 것이오."
"……!"
혁세겸의 입에선 얼어붙은 듯 아무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단목천기의 음성은 조용히 이어졌다.
"내가 맹주를 찾은 것은 맹주와 한  가지 매우 중대한 거래를 하기 위한 
것이오."
"거래라니…… 육신이 없는 혼령과 거래를 한단 말인가?"
군왕천도 혁세겸, 그는 꿈을 꾸고 있는 기분이었다.
하나…… 이것은 너무나 확실한 현실이었다.


2

담운교는 보드라운 이부자락을 끌어안은 채 침상 위에 웅크리고 앉아 있
었다. 
이미 삼경(三更)이 넘은 시각, 하지만 잠은 커녕 밤이 깊을 수록 두 눈은 
점점 초롱초롱한 빛을 발했다.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요즘 들어 그녀는 도저히 밤잠을 이룰 수 없는 것이다.
누워도, 깨어 있어도…… 머리 속에, 눈 앞에 어른거리는 것은 오직 하나
의 얼굴 뿐이었다.
단목천기!
"후……"
그녀는 풀어내린 긴 흑발을 한쪽 목덜미로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분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깊은  잠을……? 아니면  내 생각을
……? 아이 참…… 내가 무슨 꼴이람. 자존심도 없이…… 
하지만 어떻게 해, 온통 그에 대한 생각으로 잠을 이룰 수 없는걸……
갑자기 담운교는 이부자락을 젖히며 발딱 몸을 일으켰다. 
얇고 하늘하늘한 야의(夜衣)가  미끄러지며 매끄러운 종아리가  가지런히 
드러났다. 
그녀의 두 눈은 새벽 별빛처럼 반짝였다.
(그래…… 한 번 찾아가 봐야지!)
하나 그녀는 이내 멈칫하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야밤에 웬일이냐고 물으면 뭐라고 해야하지? 만약, 만약에 그가 나를 어
떻게 하려들면……)
갑자기 그녀는 두 볼이 화끈거리며 심장이 세차게 뛰는 것을 느꼈다.
(어쩔 수 없잖아? 나는…… 그를 사랑하고 있단 말야……)
담운교는 불에 덴 듯 뜨거운 두 볼을 감싸쥐며 수줍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앙증맞은 두 발이 희고 보드랍게 빛났다. 갈빛 융단 위를 상
큼하게 움직이는 맨발…… 그것은 사랑을 시작한 여인의 발이었다.


3

언제부턴가?
차가운 야풍(夜風) 속에 한 명의 인물이 옷자락을 나부끼며  서성대고 있
었다. 어깨까지 늘어진 푸른 장발, 음침하고 날카로운 사목(蛇目)……
바로 가짜 혁세겸, 즉 좌웅백이 대숙노야라고 불렀던 그 인물이었다.
한데 그의 좁은 미간에 초조한 빛이 짙어지며 야공(夜空)을  응시하는 빈
도가 잦아졌다.
이때였다.
돌연, 야공에 한 개의  점(點)이 나타나더니 급속히  확산되며 그의 머리 
위로 쏘아왔다. 
깃털이 새까맣고 매우 날렵하게 생긴 검은 비둘기였다. 
비둘기 발목에는 조그만 죽통이 매어져 있었다.
사목노인은 급급히 허공으로 손을 뻗쳤다.
그러자 죽통이 스르르 그의 손아귀로 빨려 들어오며, 비둘기는 허공을 한 
바퀴 돌더니 이내 어둠에 묻히듯 야공 속으로 사라졌다. 
사목노인은 급히 죽통 속에서 얇게 말린 쪽지를 꺼내 펼쳤다.
다음 순간 그는 쪽지를  손아귀에서 가루로 만들어  버리며 허공을 향해 
득의만면한 미소를 머금었다.
"드디어 사검부(邪劍府)가 손에 들어왔다! 남은  것은…… 구마장과 환우
궁 뿐!"
굶주린 야수가 아껴두었던 먹음직한 먹이를 탐내듯, 어둠  속을 노려보는 
사목노인의 두 눈은 소름끼치도록 음사하게 번쩍거렸다.
"흐흐…… 흐흐흐……"
그는 오래도록 야수의 흐느낌 같은 괴소를  멈추지 않더니 돌연 어둠 속
에 신형을 번뜩여 사라졌다.
하나 그는 꿈에도 몰랐으리라. 
그림자처럼 자신의 뒤를 쫓고 있는 단목천기의 존재를……


4

어느 화려한 정실, 
정실의 분위기는 매우 적요(寂寥)로왔다.
은은한 향불이 타오르고 사방 구석에 거대한 네 개의 청동향로가 위풍있
게 자리해 있었다.
각각 청룡(靑龍), 백호(白虎), 주작(朱雀), 현무(玄武)가 그려진 사신(四神) 
향로였다.
한데 정실 한쪽엔 투명하고 하늘하늘한 휘장이 드리워졌고, 그 뒤에선 계
속 끈끈한 괴소성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크흐흐…… 흣흣……"
거대한 침상, 거기에는 지금 한 명의 벌거벗은 중이 비스듬히 몸
을 뉘인 채 희열에 달아오른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한데,
오! 오……!
그가 과연 인간이란 말인가?
인간의 몸은 대체 어디까지 부풀어 오를 수 있는가?
장정 세 명이 팔을 벌려 간신히 안을  수 있을 정도의 배와 허리…… 살
이 넘쳐 부풀다 못해 서너 겹으로 흘러내렸다.
얼굴은 너무나 살이 쪄서 오관을 구분하기 힘들 정도였고, 목은 턱 밑 살
집에 짓눌려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오…… 이 가공할 살(肉)들의 결집체!
게다가 엄청난 미륵돼지같은 몸 하반신에  손바닥만한 천조각 하나를 걸
친 모습은 실로 가관이었다. 
한데 이 비대한 중의 품 속에는 지금 한 명의 소녀가 안겨 있었다. 
얼핏 보아 십 사오 세, 아직 애티가 가시지 않은 소녀였다. 
실오라기 한올 걸치지 않은 발가벗은 나신은 슬프도록  희고 아름다웠다. 
덜 익은 풋과일처럼 보송보송한  솜털에 감싸여 있는 여린  여체(女體)였
다.
막 벙그러진 꽃망울처럼 수줍게 솟아오르는  두 육봉(肉峯), 하나 그것은 
너무 참담히 유린되고 있었다.
비대한 중은 소녀의 몸을 공기돌 갖고 놀 듯 주무르고 있는 것이다.
"아……"
체구와 어울리지 않게 희고 작은 손이 느리면서도 집요하게 움직일 때마
다 소녀는 가는 신음을 토하며 몸을 비틀었다.
한데 이때 문이 열리며 하나의 푸른 인영이 미끄러지듯 들어섰다. 사목노
인이다.
"어머……!"
소녀는 몹시 부끄러워하며 잔뜩 몸을 움츠렸다. 
그러자 중은 몹시 짜증 섞인 눈을 돌려 사목노인을 쳐다보더니 의외라는 
듯 물었다.
"웬일이냐? 아목태룡(阿目太龍)?"
"사검부가 손에 들어왔다, 호파……"
사목노인, 즉 아목태룡은 약간 들뜬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호파라 불리운 중은 짧은 순간 눈에 이채를 띠더니,  이내 기름진 이맛살
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따위 일은 네가 알아서 처리해라. 이 부처님은  그런 것까지 신경쓰기 
귀찮다."
그는 잔뜩 나신을 움츠리고 있는 소녀를 번쩍 안아 자신의 배 위에 올려 
놓았다. 
아목태룡은 발가벗은 소녀의 몸을 힐끗 쳐다봤다.
"예쁜 계집이군."
"좌가 놈의 선물이지."
호파는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야율격을 다치게 한 놈의 정체는 파악했나?"
아목태룡은 소녀의 나신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입가에 가느다란 냉소
를 떠올렸다.
"도목랑을 시켜 연옥미란 계집의 뒤를 추적 중이다.  조만간 어떤 결과가 
나타나겠지."
이때 실내 한 구석에 소리도, 형체도 없이 단목천기가 나타났다. 
그는 정실 안을 둘러보다 호파의 모습에 시선이 미치는 순간, 아연실색해
짐을 금치 못했다.
(저게…… 인간인가?)
한데 호파의 비계살 속에  파묻힌 가느스름한 두  눈이 갑자기 투명하게 
번뜩이지 않는가?
"귀신…… 냄새가 난다."
아목태룡이 의아해 반문했다.
"그게 무슨 소린가?"
호파는 소녀의 소담한 가슴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거대한 배를 출렁이
며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분명 느껴진다. 누군가…… 이곳에 들어왔다."
"누가……?"
아목태룡은 주위를 둘러보며 점점 곤혹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호파의 눈은 점점 가늘어지며 기이한 안광을 발했다.
"내 감각은…… 아무도  속이지 못한다. 영매(靈媒)의  냄새가 짙게 풍긴
다……"
단목천기는 내심 가슴이 뜨끔했다.
(보통이 아니다! 영매술을 파악할  정도라면 저자도 그  방면에 정통하단 
말인데……)
그는 힐끗 호파를 쳐다봤다.
"크흐…… 흐…… 이  부처님 앞에서 영매술법자  따위는 밥이나 다름없
지."
비로소 아목태룡도 긴장한 듯 안색이  더욱 파르스름하게 굳어지며 호파
의 표정을 살폈다.
"우선 놈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 영매술의 시간은 길어
야 한 시진."
호파의 얇은 입술꼬리를 흔들며 차가운 살기를 떠올렸다.
"그 정도만 잡아두면…… 놈의 본 육신은 죽는다."
그는 번쩍 손을 쳐들었다.
순간,
펑……!
사방 구석의 향로에서 흰 연기가 구름처럼 치솟았다. 
단목천기는 갑자기 몸이 움직여지지 않음을 느끼며 흠칫했다.
"크크…… 흐흐…… 놈이…… 덫에 걸렸다."
호파는 득의한 괴소를 날리더니 갑자기 품에  안고 있던 소녀의 목에 입
술을 박았다.
"아---- 악!"
소녀는 갑자기 창백하게 질리며 전신을 파들파들 떨었다. 
얼마 후 소녀는 가냘픈 사지를 늘어뜨린 채 축 늘어졌다.
"……!"
그것을 지켜보던 아목태룡은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소녀의 목에 얼굴을 박은 호파의 입가로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호파는 소녀의 목에서 입을 떼더니 허공에 피를 뿜었다.
"푸…… 우!"
순간, 드넓은 정실 안은 삽시간에  검붉은 피안개(血霧)로 뒤덮이지 않는
가?
(으윽……!)
단목천기는 전신에 엄습해드는 혹독한 고통을 느꼈다. 
설마 이런 곳에 영매술의 대가를 만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
던 것이다. 그는 죽은 소녀를 힐끗 쳐다봤다. 발가벗은 나신이 흥건히 핏
물에 젖고 있었다.
(잔인한 놈…… 소녀의 정혈을 모조리 뽑아 술법에 사용하다니……)
갑자기 그는 득의해 있는 호파를 노려보며 전음으로 싸늘히 내뱉았다.
"후후…… 과연 보통이 아니구나. 하나 이 정도 실력으로 나를 가두진 못
한다, 호파."
"……!"
갑자기 호파의 안색이 확 굳었다.
"다음에 만날 땐 나의 본체(本體)로서  너를 대하게 될 것이다. 그때…… 
오늘 네 잔인한 행동의 대가를 지불해 주겠다!"
단목천기의 안색이 급속히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촉박해진 것이다. 
그는 말을 마침과 동시 혈무 속으로 신형을 뽑아 올렸다.
찰나 사방에 있던 네 개의 사신향로가 일제히 박살나 버렸다. 
동시에 실내엔 무서운 혈무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휘우우---- 우웅----!
휘우---- 웅----!
순간, 아목태룡은 안색이 급변하며 호파를 쳐다보았다. 
한데 호파는 마치 바위처럼  굳어진 채 전신의  비대한 살집에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게 아닌가?
"호…… 파!"
"영매술…… 놈은 나후영제천급(羅侯靈帝天 )의…… 환매천술을 익혔다."
울컥! 
호파는 거구를 흔들며 입으로 피분수를 뿜었다. 전신의 피를 모조리 토해
내는 듯 엄청난 양이었다.
"가공할…… 영매술의 대가다……"
호파는 계속 피를 뿜었다. 
비릿한 피분수가 바닥, 천정을 적셨다. 
호파가 한 번씩 피를 토할 때마다 거대한 침상은 부서질 듯 진동했다.
이때,
슈우…… 우…… 욱!
실내의 혈무가 돌연 소용돌이 치며 밖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후후…… 후후…… 후……"
허공 어디선가 나직하고 차가운 웃음소리가  아목태룡의 귓속을 파고 들
었다. 
아목태룡은 갑자기 전신에 소름이 쫙 끼쳤다.
"으…… 천하에 이런 일이……"
공포, 그가 난생 처음 느끼는 질식할 듯한 공포였다. 
이윽고 그가 손아귀에 흥건한 식은땀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을 때 호파는 
이미 전신이 피범벅이 된 채 혼절해 있었다.


5

(으…… 이거야 원……)
염사봉은 속이 바짝바짝 타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죽은 시체같은 단목천기의 곁을 초조히 서성대는 것이 근  한 시진, 영매
술인지 뭔지에 대해 설명을 듣긴 했지만, 한 시진이 가깝도록 단목천기는 
여전히 시체 모습이니…… 속이 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단목천기다.
염사봉은 이 촌각의 시간이 자신의 생명을 갉아먹는 것처럼 초조했다.
그는 잔뜩 불안한 기색으로 단목천기를 쳐다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이러다가…… 영원히 저렇게 되버리는 게 아닐까?)
목이 타고, 전신에 피가 마르는 느낌이었다. 
그는 뒷짐을 진 채 더욱 서성거렸다.
한데 이때였다.
"단목공자님…… 소녀 담운교예요. 들어가도 되겠죠?"
'들어가도 되나요?' 가 아니라 '들어가도 되겠죠?' 다.
밖에서 들려온 담운교의 옥음에 염사봉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 계집애는 또 왜……? 더구나 이런 심야에……)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데,
"호호…… 늦은 밤에 미안해요."
짤랑짤랑한 교소와 함께 깜찍하게 눈웃음치는  담운교의 얼굴이 방 안으
로 쑥 디밀어졌다. 그러다 염사봉을 발견한 그녀는 깜짝  놀라 눈이 똥그
래졌다.
"어머…… 추노선배님…… 어인 일로 이곳에……"
그녀는 당황을 감추며 생글생글 웃었다.
추자송으로 변장해 있는 염사봉은 슬쩍  움직여 단목천기의 모습을 가리
며 느물느물 웃었다.
"흐흐…… 담소저야말로 이 야심한 시각에 웬일인가?"
"……"
담운교는 까아만 눈알을 깜박 굴리더니 배시시 웃었다.
"호호…… 소녀는 공자님께 한 가지 여쭤볼 말이 있어 왔어요."
"흐흐…… 노부의 제자는 재주도  많군. 한밤중에 수줍음을  타는 처녀로 
하여금 방에까지 찾아오게 만들다니……"
수치감을 유발시켜 그녀 스스로 돌아가도록 만들려는 것이다. 
하나 담운교도 보통은 아니었다. 그녀는 낯빛 한점 변하지 않고 새침하게 
말했다.
"어머……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죠? 소녀는 정말로 공자님께 긴히 드
릴 말씀이 있다구요."
그러다 문득,
"한데…… 공자님은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신거죠?"
그녀는 염사봉의 어깨 너머로 고개를 빼며 눈을 반짝거렸다.
"험…… 지금 심각한 운공 중이다."
"운공……?"
담운교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염사봉의 태도에서 이상함을 느꼈
다.
"그래…… 요?"
돌연 그녀는 번개처럼 재빨리 좌측으로 신형을 움직였다.
아차, 했으나 담운교는 이미 단목천기의 모습을 보아버리고 말았다.
"아…… 니!"
담운교는 숨 멎는 듯한 경악성을 터뜨리며  떨리는 두 손으로 자신의 입
을 감싸쥐었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단목천기는 안색이 파르스름하게 죽은  채 호흡 한점  내뱉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담운교는 눈을 부릅뜬 채 두 걸음이나 물러서며 입술을 더듬거렸다. 
"저…… 저것이 운공하는 모습이란 말인가요?"
염사봉은 약간 어색한 웃음을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 특이한 무공이라……"
"천하에 호흡도 멎은 채 운공하는 방법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어
요!"
담운교는 뭔가 느낀 듯 거의 발작적으로 부르짖으며 몸을 날렸다.
"제가 확인해 봐야겠어요!"
"안돼!"
염사봉은 당황성을 터뜨리며 재빨리 그녀를 가로막았다.
"왜…… 안된다는 거죠?"
"무조건 안된다."
담운교는 고운 아미를 치켜 올리며 숨가쁜 듯 부르짖었다.
"뭔가가 있군요!"
염사봉은 안색을 엄중히 굳히며 말했다.
"아이야, 노부의 제자에게 해를 끼치고 싶지 않거든 그냥 물러가다오."
그러나 담운교는 싸늘한 냉소를 머금고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꼭 봐야겠어요!"
돌연 그녀는 다시 비호같이 신형을 번뜩여 단목천기 쪽으로 쏘아갔다. 
순간 염사봉의 두 눈이 냉엄하게 굳어졌다.
"정말 겁을 모르는 아이로구나!"
그의 왜소한 몸이 공처럼 가볍게 퉁겨지는 순간, 담운교는 갑자기 벼락처
럼 몰아쳐드는 가공할 경력에 떠밀리듯 뒤로 일 보나 물러서고 말았다.
"……"
염사봉을 쳐다보는 그녀의 얼굴엔 차츰  새파란 독기가 비수처럼 번뜩였
다.
"공자님은…… 죽었지요?"
"무슨 소리냐?"
담운교는 염사봉을 노려보며 천천히 한쪽 손을 쳐들었다.
"아무리 추노선배님이라 해도…… 용서할 수 없어요!"
창백한 안색에 하얗게 질린 도톰한 입술과 그녀의 전신은 분노와 충격으
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염사봉은 내심 고소를 머금지 않을 수 없었다.
(이토록…… 성주를 좋아했는가?)
약간 우습기도 했으나 가슴이 찡해오는 것이었다. 
한데 문득 담운교의 하얀  소수(素手)에 시선이 마친  순간, 그의 안색은 
소리없이 굳어지고 말았다. 
마치 투명한 옥(玉)을 세공해 놓은 듯 희고 아름다운 손, 그 장심(掌心)에 
은은히 세 줄기 푸른 선이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염사봉의 두 눈도 굳어졌다.
냄새…… 그 특유의 예민한 본능으로 전신을 옭아오는 무서운 죽음의 냄
새를 느낀 것이다.
평생 그는 살수였다. 
지금껏 수도 없는 가공지학들을 두루 겪었다. 
하나 이런 두려움을 느끼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조심하시오, 염노인. 그것은 삼청맥혈수…… 부딪치면 끝이오!"
돌연 어디선가 단목천기의 약간 다급한 듯한 전음이 들리지 않는가? 
순간 염사봉은 부르르 떨며 내심 환호성을 터뜨렸다.
(성주다!)
단목천기가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염사봉은 일순간에 긴장과 초조감이 확 풀리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여유로와진 그는 느긋한 웃음을 띠며 담운교를 힐끗 쳐다봤다.
"아이야, 공연히 어려운 무공으로 노부를 겁주지 마라."
"왜…… 왜, 공자님을 죽였지요?"
담운교는 떨리는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염사봉은 그녀의 손에 점점 짙어지는 푸른 선을 응시하며 나직하게 탄식
했다.
"바보같은 계집이로군. 네가 아무리 그를 좋아한다 해도  지금의 네 행동
은 그에게 크나큰 화를 미치게 된다."
"흥, 당신의 말은 못믿겠어!"
담운교는 점점 눈에 살기를 띠었다.
"이제 됐소, 염노인. 그만 물러나시오."
단목천기의 전음이 다시 들렸다. 
염사봉은 내심 크게 안도하며 담운교를 힐끗 쳐다보았다.
"아이야, 너는 내일 아침 매우  미안하고 죄송한 눈으로 노부를  보게 될 
것이다."
그는 밖으로 나갔다.
"어딜 감히……"
담운교가 재빨리 손을 뻗으려는 찰나,
"야밤에 남의 방에 무단 침입해서  살인을 하려 하다니…… 대체 소저는 
나와 무슨 불구대천의 원한이 있소?"
돌연 등 뒤에서 단목천기의 냉정한 음성이 들리지 않는가?
담운교는 깜짝 놀라 급히 고개를 돌렸다. 
순간 그녀의 두 눈이 커졌다. 놀랍게도 죽은 듯  움직이지 않던 단목천기
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지 않은가?
"다…… 당신……"
단목천기는 가볍게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도대체 그 무슨 막돼먹은 행동이요?"
"죽지…… 않았나요?"
담운교는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 듯 입술을 떨며 물었다. 
단목천기는 멈칫하며 무심한 목소리를 반문했다.
"죽다니……? 소저는 혹시 내가 죽기를 바라고 있는 게 아니오?"
오오…… 이렇게 무정(無情)할 수가!
분하고, 억울하고, 원망스러움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담운교의 큰 눈망울에 그렁그렁하게 눈물이  고여오르며 긴 눈썹이 파르
르 떨렸다.
다음 순간, 
"흑……!"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쥔 채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단목천기는 멈칫했다.
"소저……"
"저는…… 정말 가슴이 찢어지도록 슬펐단 말이예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는데…… 흑!"
담운교는 가냘픈 어깨를 흔들며 더욱 서럽게 흐느꼈다.
"소저…… 진정하시오. 내 말이 지나쳤소."
단목천기는 난처하다 못해 식은땀이 날 정도였다. 이런 철부지(?)같은 소
녀는 대야성에서 겪어보지 못했던 것이다.
"흐흑…… 흑……"
담운교의 흐느낌은 좀처럼 그칠 기미가 없었다.
염사봉, 그는 빨간 불꽃이 오르는 곰방대를 뻐끔뻐끔 빨며  혼자 혀를 찼
다.
"쯧쯧…… 성주는 평생 여인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할거야.  그러고 보면 
인물이란 나처럼 조금은 못나야지 너무 잘나도 괴로운 법……"
그는 자신의 까칠한 턱 끝을 쓸며 희미한 고소를 머금었다.
"그래도…… 이 얼굴로도 소문난 미인 마누라를 얻었었지."
문득 그의 좁은 두 눈이 아스라한 상념에 젖어들었다.
"비록 딸 아이 하나만 외롭게 낳아놓고 훌쩍 가버리긴 했지만……"
그는 긴 한숨을 불어내며 멀리 어두운 야천(夜天)을 응시했다.
"그래…… 이번 일이 끝나면 소정, 그 아이를 찾아가 봐야지."
곰방대를 문 입술 끝이 감회의 물결에 휩쓸리듯 가늘게 떨렸다. 
"몸이 약한 아이였는데…… 어떨지 모르겠군."
그러다 문득 머금어지는 쓴웃음……
(염사봉, 이젠…… 너도 늙었구나!)
그는 다시 어둡고 망망(茫茫)한 야공(夜空)을  쓸어보며 힘차게 곰방대를 
빨아댔다.
바람(風), 전신으로 휘감겨드는 밤바람이 이 밤따라 유난히 싱그러웠다.


                              - 2권으로 이어집니다-

[여여풍]

즐감했습니다.

[덕산]

잘 보고 갑니다.

[슈퍼맨]

잼납니다

[얼음골]

즐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