泣斬馬謖 (읍참마속, 소리없이 울며 마속을 베다)
오늘날에는 공정한 법 집행을 위해 사사로운 정을
버린다는 것을 비유 하는 단어 이다
이 읍참마속 이라는 단어의 유래를 살펴보자면
유비 사후 228년 20만대군을 이끌고 위나라를 침공한
제갈량의 1차 북벌을 이야기 하지 않을수 없다
1차 북벌의 이야기는 너무나 방대하여
독자도 글로 남기는데 부담을 느껴 포인트만
최소한으로 끄집어 내어보려 한다(그래도 길다;;;)
1차북벌 당시 제갈량은 위나라의 주요 도시중 하나인
장안을 우선 목표로 삼고 바로 진공해 들어가는 전략이 아닌
서량의 양주4군을 우선 점령한후 진창성 이라는 곳을
기점으로 쉽게 말해 장안 으로 뒷치기를 시도하는
전략을 세운다
양주4군을 차례로 점령하고 진창성에 거점을 마련한후
순조롭게 진행되는듯 했으나...
제갈량의 촉군은 장안으로 진격해 들어가는 통로인
가정 이라는 곳에서 사마의와 장합이 이끄는 위나라
대군을 맞이하게 된다
이때 제갈량은 촉군 본대가 전열을 정비하는동안
가정 에서 위나라 대군을 상대로 시간을 끌어줄
장수가 필요했으며 그래서 선택된 장수가
마속과 왕평 이라는 장수였다
제갈량은 약2만명(1만명 이라는 기록도 있다)의
병력을 내주어 마속을 대장 왕평을 부장으로 삼아
가정을 지키게 하며 마속에게 절대로 산위가 아닌
산 아래에 진을 구축하라 당부한다
그러나 마속은 전공에 눈이 어두운 나머지
제갈량의 당부를 무시하고 산위에 진을 치는
최악의 병크를 저지르게 된다
전선을 둘러본 마속의 논리는 이랬다
"낮은곳에 있는 자 보다 높은 곳에 있는 자가 유리하다
산위에 진을 치고 있다가 일제히 공격하면 승리할것이다"
병법의 기본을 따르는거 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그것도 상황을 봐가면서 해야 하는것이다
산맥과 이어진 산줄기 위에서야 병사들이 충분히
마실수 있는 식수도 확보하고 지형상으로도
아래에 위치한 적군을 상대로 일제히 공격하면
승산이 충분히 있겠으나...
마속이 진을친 그곳은 길 한복판에 위치한
바위산 이다
그곳은 병사들이 마실 식수가 전혀 없는데다가
오히려 역으로 포위당할 경우 전멸당할것이
불보듯 뻔했다
게다가 이를 알고있던 위나라군 장수 장합은
바위산으로 이어지던 물 줄기를 원천 차단하고
촉군을 고립시키던 상황 이었다
위나라가 대군이라고 해도 정예병사 수천명만 길목에
배치하면 쉽게 뚫지 못하고 시간을 벌어줄수 있었던만큼 그곳 바위산은 병력을 배치하고 진을 구축하는게 아닌
적들의 동태를 살피는 관측 장소 정도로만 이용했어야
했다...
부장으로 임명된 왕평은 승상(제갈량)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냐며 마속에게 불응해 일부 군사들만
데리고 산 아래 길목에 진을 구축했으나
대군을 상대 하기에는 역 부족 이었다
결국 순조롭게 진행되던 1차북벌은 가정에서 위나라군에 패배하며 결국 실패로 끝이난다
제갈량은 그토록 아끼며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던
마속을 항명죄로 눈물을 흘리며 참수 해야 했다
여기서 유래된 이야기가 泣斬馬謖 (읍참마속)이다
독자는 이릉대전 패배 직후 유비가 임종전
제갈량 에게 남긴 여러 유언들중 한가지를 떠올려봤다
"마속은 교만하기 짝이없으니 중요한 임무는 절대 맡기지말라"
다른건 몰라도 유비의 사람보는 눈은 제갈량 마저도
감탄했었던 만큼
울며 마속을 참수한건 아끼던 부하를 베어야 하는 슬픔이 아닌
주군의 유언을 듣지 않았던
제갈량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한 눈물이 아니었을까
독자는 생각해보며 이번 칼럼을 마칠까 한다
ps:긴글 읽느라 고생들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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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과 읍참 마속(천구기의 삼국지 칼럼 네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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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래서 군주는 인재를 두루 살피는 눈을 가져야 하고 군사는 전술 전략을 두루 살피는 눈이 필요한 것이겠지요..
제갈량은 그래서 군사로서는 으뜸이지만 군주가 되지 못한거라 생각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역시 읽어주시는 분은 성님 뿐이시네요 ㅠ
어흑~~ㅠ
@천국으로(뚜벅방장)
저에게는 엄청 잼나는 글이에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