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머리길’ 좋지요?
‘갯가길’은 바닷가를 걷는 길이다.
여기서 ‘개’라는 것은 포구를 말하는 우리말이다.
아파트가 많이 들어서 여수시민이 많이 살고 있는 곳이 쌍봉동이다.
쌍봉에 사는 사람들이 운동 삼아 밤늦은 시간까지 많이 걷는 길이 선소에서 소호요트장까지 길이다.
겨울철에는 진객인 겨울철새 청둥오리가 떼로 몰려와 장관이다.
사람들이 걸어가면 어떻게 아는지 먼 바다 쪽으로 푸드득 수제비를 치면서 금세 멀어져간다.
가까이는 볼 수 없어도 철새가 날아와서 심심하지가 않다.
소호요트장까지 걷기가 조금 짧게 느껴지면 더 걸을 수 있는 길이 있다.
바로 그럴싸하게 이름 붙인 갯가길 ‘여우머리길’이다.
송소마을에서 바닷가로만 걸어서 호두를 거쳐 용주리로 가는 길이다.
소호동은 소제마을과 항호마을, 송소는 송현마을과 소제마을
요트장을 지나면 ‘소제마을’이다.
소제를 옛날에는 ‘소지개’라고 불렀다.
‘물이 고여 있는 개, 포구’라는 뜻이다.
소호동은 소제마을에서 ‘소’와 소호초등학교 앞 항호마을에서 ‘호’를 땄다.
‘소제마을’은 387.8m 높이 안심산자락에 있고, 건너 ‘음달마을’은 175.3m 높이 사방산자락 끝에 있다.
두 산 가운데 널따란 들을 안창몰이라고 한다.
사방산을 ‘안찰방’이라고도 불렀다.
그래서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 같다.
앞으로 여수시가 택지를 개발한다고 해서 논란이 되고 있다.
안심산과 사방산을 잇는 고개를 ‘걸맹이재’라고 한다.
지금은 관기로 넘어가는 도로와 생태터널이 뚫려 있지만 다니는 차들이 많지 않다.
디오션리조트 옆 자동차학원 뒤 마을을 ‘송현마을’, ‘솔고개’라고 한다.
‘송소’가 더 알려져 있는 것은 ‘송현마을’ ‘송’과 ‘소제마을’ ‘소’를 따서 ‘송소’가 되었다.
1986년까지는 화양면 용주리에 속하였다가 여천시로 변경되었다.
가막만 용주리 바닷가 갯돌
‘송소마을’에서 새로 난 도로를 넘으면 바로 용주리이다.
그 길이 아닌 옛날 길을 따라 걸으면 송소 횟집들이 줄줄이 나타난다.
계절에 따라 굴구이, 새조개, 전어회 등이 유명하다.
이제 길을 벗어나 바닷가 길로 들어선다.
차는 다닐 수 없어도 사람들은 걸어 다닐 수 있다.
채석장 아래 널따란 부지가 조성되어 있다.
용주리 목장성으로 가는 성고개 ‘성치’에서 내려다보면 움푹 들어간 포구가 나온다.
이 골짜기를 ‘지름잡지골’이라고 불렀다.
자녀들과 함께 걷기 좋은 갯가길로 들어선다.
활 모양의 포구를 걸으면서 갯돌이 발바닥 간지럼을 태우는 느낌에 절로 흥이 난다.
눈앞으로 드넓게 펼쳐진 가막만, 호수 같은 바다에서 어머니 자궁 속 양수에 잠긴 듯 편안함을 느껴본다.
걸어갈수록 자갈보다는 조금 큰 돌들이 박혀있다.
걷기가 힘들지만 혹시나 그 돌 틈 사이에 조개와 게가 다닐 것 같아 돌을 들어보지만 밀려온 청각이 보일 뿐이다.
이인직의 ‘혈의 누’가 아닌 영화 ‘혈의 누’ 촬영세트장
파도가 더 거센 데를 지나면 역시 큰 바위가 보이고, 바위들이 날카로워 조심조심 걷는다.
생김새가 이름 붙이기는 어렵지만 뭔가 어떤 모양일 것 같은데 좀체 생각이 나지 않는다.
가막만 너울이 감싸 안은 바위에서 우리들은 가져온 간식을 먹고 사진을 찍는다.
이곳이 바로 여수를 배경으로 찍은 영화 ‘혈의 누’ 촬영장이다.
지금은 영화 세트가 철거되어서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
시 예산을 투입하였는데 아쉽다.
‘혈의 누’는 신소설 ‘혈의 누’가 아니다.
차승원, 박용우, 지성 주연의 영화이다.
19세기초 천주교와 실학에 대한 탄압이 심했던 시절,
‘동화도’라는 외딴 섬 포구 앞에서 발생한 공납 제지품 수송선 화재와 이에 얽힌 연쇄살인극을 추적해 가는 추리극이다.
‘영화 세트장’이었다는 표지판이라도 세워두었으면 좋겠다.
봄 바다에 흠뻑 빠져서
고민이 생겼다. ‘쉽게 마을로 들어서는 길로 갈 것인가?’ 아니면 ‘바닷길로 계속 갈 것인가?’
바닷길을 걸으면서 후회되지 않을 길을 계속 걸었다.
풀이 시들어서 누렇게 변하였는데도 그 색깔이 주변의 바다와 잘 어울렸다.
노란색 등대까지 더해서 화려한 봄의 잔치가 시작된 것 같다.
그 사이를 엉금엉금 기어가는 ‘거북바위’가 지나는 우리를 보고 놀라지도 않는다.
바닷가에는 파도와 너울에 씻기고 씻긴 자갈이 매끄러운 엉덩이를 드러내놓고 있다.
밀려오는 파도가 이들을 씻기려고 물을 퍼부을 때 화들짝 놀라는 조약돌 소리가 난다.
지금은 목욕을 하고서 햇볕에 말리는 시간이라 반사되는 빛에 눈이 부시다.
꾸들꾸들 말리면 또 세상의 때를 벗기기 위해 몸을 내놓을 조약돌, ‘깻돌’을 밟고 지나간다.
멀리 보이는 바다도 좋고, 바위도 좋고, 혹시나 하는 호기심에 갯가를 들여다보는 사람들도 좋고,
더 멋지게 보이려는 여심도 좋은 풍경을 만든다.
갯가길을 걷는 재미는 바로 이것일 것이다.
날카로운 돌을 딛고 걸어야 하는 불편함도 있지만 자연을 닮아가는 포근함도 있다.
호두는 호랑이가 아닌 여우머리
용주리 튀어나온 반도가 꼭 여우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여우 ‘호(狐)’자를 따서 ‘호두마을’이 되었다.
여우에 대해서 사람들은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아서 호랑이 ‘호(虎)’이기를 바란다.
여우를 여수에서는 ‘여시’, ‘여수’, ‘여깽이’ 등으로 부른다.
한 때는 여수를 여우에 본 따 이야기를 하면서 폄하하였다.
‘호두마을에서는 개를 키우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 여우모양의 신이 밤마다 개를 잡아먹었다는 이야기 때문이다.
건너에는 왜가리가 많이 살아 섬의 색깔이 하얗게 보일 정도였던 ‘죽도’가 보인다.
호두에서 용주리로 넘어가는 골짜기를 ‘동문골’이라고 한다.
옛날 ‘고돌산진성’이 있을 때 4대문 중 동문이 있었던 곳이다.
여우 머리를 지나 언덕마루에 오르면 용주(龍珠)리이다.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모습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의 형태로 보아서는 그럴 것 같지 않다.
용주리는 크게 ‘고진마을’과 ‘고외마을’로 나뉜다.
‘고돌산진성’ 안에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고진’, 바깥에 있다고 해서 ‘고외’라고 한다.
큰 마을인 ‘고외’를 ‘용주마을’이라고도 부른다.
전라좌수영보다 먼저 생긴 수군기지 고진
고돌산진은 옛날 돌산만호진이 있었던 곳이다.
전라좌수영이 생기기 전 조선초에 설치된 ‘만호진’이다.
만호진에는 종4품 만호가 최고 책임자이고, 지금의 대대장 중령급이다.
전라좌수영 수군절도사 수사는 정3품으로 지금의 사단장급이다.
고려말 왜구의 침입이 잦아서 공민왕과 우왕 때 피해가 컸다.
전함을 만들고 수군들을 도만호, 만호, 천호 등 체계를 세워 운영을 하였다.
조선 초 수군의 조직은 그대로 넘어와 여수에는 태조 5년에 지금의 낙포에 ‘진례만호’를 설치한다.
이후 지금 용주리인 돌산포에 ‘돌산만호’를 설치한다.
세종 5년에 ‘진례만호’를 폐지하고 지금의 국동에 ‘내례만호’를 설치한다.
성종 10년 1479년에 다시 ‘내례만호’를 폐지하고, ‘전라좌수영’을 만든다.
1522년 ‘돌산포진’의 만호가 없어지고, 대신 권관을 둔다.
‘돌산포만호’는 돌산읍 군내리 방답진으로 옮기고 종 3품 첨절제사, 지금의 준장 여단장급을 둔다.
따라서 ‘돌산포진’은 ‘고돌산진’으로 변경되고, 종 9품 별장이 지휘하는 소모진으로 개편되었다.
1895년 갑오개혁으로 군제가 개편되면서 모든 수군 진은 없어진다.
저것이 고돌산진 성벽일까?
용주리에 있는 ‘돌산만호진성’은 언제 만들어졌을까?
성종 16년 1485년에 쌓기 시작하여 성종 21년 1490년 6월에 완성되었다.
그 규모는 성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고돌산진성은 남향에 그 주위가 1313척, 높이가 13척, 성안에 우물 3개소가 있다.
민가가 성안에 82호, 성밖에 62호, 동헌 4칸 등 총 53칸 11동의 건물이 있다는 기록이다.
성은 고내에서 고외마을로 넘어가는 수박등에서 바닷가 완만한 경사진 곳에 성곽을 만들었다.
성에는 4대문이 있었는데 서문과 북문, 수구문밖이 바다로 연결되어 있다.
그곳에 전함을 수리하는 굴강을 두었다.
지금은 성과 굴강의 옛 모습을 찾기가 어렵고, 고진 입구에 ‘3개의 별장기념비’만 남아있다.
고진마을에 큰 기와집이 보인다.
그곳은 진성여고 김재호 이사장의 집안 ‘영광 김씨’ 제각이 있다.
우리들은 제각의 위치와 크기에 놀랐다.
마을과 바다를 내려다보면서 드나드는 사람들을 다 지켜볼 수 있다.
맛과 가격에 놀란 용주리맛공간
여수의 바닷가를 찾아다니면서 제일로 애로가 맛있는 식당이 드물다는 것이다.
바닷가에 가면 그 지역에서 잡았느냐를 떠나서 해산물 음식점이 있어야 한다.
용주리에는 식당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오래 전 여수 미평에서 ‘백림원’을 운영하고,
화양면 오천마을에서 ‘머그네’, 무선에서 식당을 하던 분이 ‘용주리 맛공간’을 개업하였다.
식당 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경치도 아름답지만, 고깃배들이 정박해 있는 포구가 더 정겹다.
바다 내음이 풍기는 어촌에서 해산물 요리를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려고 한다.
더 반가운 것은 가격이 그리 비싸지 않고, 매주 점심 때 먹는 가정식 백반의 반찬과 국물이 다르다는 것이 좋다.
선어와 같은 조금 비싼 것도 있지만, 1인분에 7천원하는 백반은 그리 큰 부담이 없다.
우리가 간 날은 가오리회를 뜨고 남은 껍질과 창자 등을 무우 시레기와 함께 넣어서 홍어애국 같이 푹 끓여서 냄새가 코끝을 자극하였다.
여수에서 많이 나는 가오리를 꼭 홍어회처럼 떠서 예쁜 접시에 놓아 그 붉은 색깔이 젓가락을 끌어당긴다.
음식의 맛은 주인장의 손맛에서 나온다.
직접 만들어 내놓은 반찬은 여러 차례 더 달라고 한다.
바다가 미치도록 푸르른 여, 그 바닷가를 걷고서 싸고 맛있는 식사까지 했으니 부러울 리가 없다.
우리는 버스를 타지 않고 더 걷기로 하여 용주마을을 거쳐서 송소까지 걸었다.
길과 음식, 꽃, 나무, 사람 사는 동네를 잇는 여수풀꽃사랑의 ‘여수의 길’은 매주 토요일마다 15년째 여수 곳곳을 다니고 있다.
첫댓글 사진 보고 눈 호강하고 싶은데 저는 안보여요...
잉... 컴으로 보세요
즐감하고 갑니다
넵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