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08
11월13일 [연중 제33주일(세계 가난한 이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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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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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주보》**
http://pf.kakao.com/_xhGxjBxb/97355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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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가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과 함께 있다면 우리는 바로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제정하신 가난한 이들을 위한 주일입니다. 왜 우리가 가난의 영성을 살아야 합니까?
답은 너무나 명료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가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당신을 추종하려는 모든 사람들에 가난을 살 것을 당부하셨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쭉 묵상해 보면 예수님처럼 가난하게 사신 분이 또 없습니다. 여러 정황을 고려해봤을 때 마리아와 요셉의 가정은 절대로 부유하지 않았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부를 축척하려면 한곳에 오래도록 터를 잡아야 하는데, 그래야 땅값도 올라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마리아와 요셉은 신혼 초부터 헤로데의 영아 살해 사건을 피해 이집트로 삶의 기반을 옮겨갑니다.
거기서 꽤 머물렀는데, 이집트에서 공짜로 밥 먹여줬겠습니까? 요셉은 외국인 근로자로 열심히 일하셨을 것입니다. 마리아도 아기 예수님을 등에 업고 갖가지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헤로데가 세상을 떠나자 나자렛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새롭게 거주지를 옮긴 두 분은 또다시 원점에서 시작해야 했습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의 삶도 절대 부유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 마디로 노숙인의 삶이었습니다. 예수님 스스로도 자신이 노숙인이라고 밝혔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명확히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저기 돌아다니시면서 굶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가끔씩 기회가 닿으면 양껏 드시는 장면이 종종 목격됩니다.
가진 것이라곤 몸뚱이 하나, 그리고 사랑밖에 없었던 분,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 누군가를 대신하여 당신 목숨을 내어놓는 일 밖에 없었던 사람이 예수님이셨습니다.
유유상종이란 말이 있습니다. 노숙인으로 사셨던 예수님이시다 보니 또 다른 노숙인들과 스스럼없이 잘 어울리셨습니다. 나병 환자들, 거지들, 갖은 종류의 병자들, 죄인들, 어린이들, 창녀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복음서 전체를 한번 훑어보면 이 사실은 명백하게 입증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아주 드물게 고관대작의 집에 초대도 받으셨지만,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가난하고 소외받은 민중들 사이에서 지내셨습니다.
또한 선택의 기로에서 예수님은 언제나 주도권이나 기득권을 쥔 사람들 편이 아니라 가난한 백성들 편에 서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 불행한 사람들 편이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과 함께 있다면 우리는 바로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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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HedryjWiqa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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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말하는 법: 그리스도의 말을 하라>
영화 ‘게임 플랜’(2007)의 줄거리입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조 킹맨은 영화 내에서 유명한 미식축구 선수입니다. 실력이 뛰어난 선수이기는 하지만 다른 선수들을 믿지 않고 독립적인 플레이를 계속해 우승 트로피는 따내지 못한 상황입니다. 그리고 파티를 즐기며 솔로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이 딸이라며 한 아이가 찾아옵니다. 예전에 이혼했던 아내는 딸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었습니다. 조는 크게 당황합니다.
딸 매디슨 페티스는 어머니가 갑자기 아프리카에 봉사하러 가서 어머니가 아빠 집에 있으라고 했다고 말합니다. 조 킹맨의 메니저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조는 인기 절정의 미식축구 선수이기 때문입니다. 조 킹맨도 갑자기 나타난 딸의 존재로 생활에 균열이 생기게 되어 이러한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페티스는 아빠 조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이 언제였느냐고 끊임없이 묻습니다. 하지만 아빠는 대답할 수 없습니다. 지금 또 다른 여자를 사귀고 있었기 때문이고 당장인 인기와 돈과 명예가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페티스는 언론 앞에서 아빠를 옹호하는 말을 해주기도 하고 또 그러는 가운데 조도 페티스를 조금씩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며 조는 조금씩 더 솔직해집니다. 페티스 때문에 애인과 헤어질 위기에 처하자 조는 페티스가 엄마와 똑같다고 말합니다. 항상 불평만 했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페티스는 엄마의 말을 전합니다. 아빠는 언제나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자였다고 말합니다. 페티스가 울자 조는 기타를 쳐 주며 페티스를 위로해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다. 나는 아버지다”를 외우며 이상한 복장을 하고 딸이 원하는 발레도 같이 해 줍니다.
그러다 일이 발생합니다. 아이가 분명 땅콩 알레르기가 있다는 것을 말해 주었는데도 디저트에 땅콩이 들어간 것을 모르고 페티스가 그것을 먹고 알레르기 발작을 일으킵니다. 병원에 입원시키고 다행히 딸이 안정을 되찾자 페티스의 이모가 찾아옵니다. 사실 엄마는 6개월 전에 교통사고로 죽은 뒤였고 아프리카에 간 것은 이모였습니다. 이모는 페티스를 미식축구에 미친 아빠에게 맡길 수 없다며 아빠의 양육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페티스도 아빠의 커리어를 망치고 싶지 않아 이모의 집에 머물겠다고 합니다.
조는 점점 진지해집니다. 딸의 양육권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제 딸보다 사랑하는 건 없습니다. 축구를 포기해도 좋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슈퍼 볼 경기가 열리는 당일 매니저는 만약 경기에서 이기면 기자가 이제 무엇을 할 것이냐고 질문할 때 “전 이제 패니 버거를 먹으러 가겠어요”라고 말하라고 합니다. 패니 버거가 스폰서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페티스 생각에 좀처럼 경기에 집중하지 못하던 조는 결국 갈비뼈에 금이 가는 부상을 당하고 맙니다. 이번 경기를 포기하려고 할 때 페티스가 나타나 아빠에게 힘을 줍니다. 아빠는 솔직하게 말해 줍니다. 지금까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딸 페티스를 만난 것이라고. 그리고 경기에 나가 우승합니다. 기자의 질문에 “우리 딸을 데리고 집으로 갈 겁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조 킹맨의 삶은 그 자체로 거짓이었습니다. 그가 솔직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딸을 받아들여 아빠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딸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더는 할 수가 없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지막 때에 가짜 그리스도가 많이 나타날 것이라고 하십니다. 왜 거짓 그리스도들이 많이 나타나게 될까요? 프랑스 속담에 험담꾼은 듣는 이들이 만든다고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거짓말을 들어주는 이들이 있기에 재림 예수들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의 교리를 몰라서 사이비로 빠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거짓말을 받아들이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왜 뱀의 거짓말에 넘어갔을까요? 그들이 거짓말쟁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니아스와 사피라는 왜 재산의 절반을 교회에 바쳤음에도 죽었을까요? 거짓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내가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가 나에게 속삭이는 말을 받아 전하고 있습니다. 나의 자아는 사탄의 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7)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 내 뜻대로는 예, 아니요, 말고는 한마디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진리이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말을 하는 것 외에는 다 악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위 이야기에서 조 킹맨은 자신이 아버지라는 믿음을 가지기 전까지는 진실할 수 없었고 남에게 힘이 되는 이야기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진실 하려 해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리스도가 되었음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임에도 그리스도가 되었음을 믿지 못하면 인간으로 하는 모든 말은 거짓이 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너희는 내 이야기를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가 내 말을 들을 줄 모르기 때문이다. 너희는 너희 아비인 악마에게서 났고, 너희 아비의 욕망대로 하기를 원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로서, 진리 편에 서 본 적이 없다. 그 안에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거짓을 말할 때에는 본성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가 거짓말쟁이며 거짓의 아비기 때문이다.”(요한 8,44-45)
우리의 말은 이제 그리스도를 통해 변한 나의 정체성으로 나오는 말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하는 말이 됩니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더욱 명확히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 10,19-20)
오늘 복음에서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루카 21,14-15)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말씀을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그렇게 진리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을 그대로 전해야 진리입니다.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참되시기에, 나는 그분에게서 들은 것을 이 세상에 이야기할 따름이다.”(요한 8,26)
마지막 때에는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들은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짓말쟁이가 되면 그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게 됩니다. 하지만 진실한 사람이 되면 그들의 말은 거북해서 들어줄 수가 없습니다. 진실한 사람이 되는 유일한 길은 내가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은 그대로 전하는 사람이 되는 길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루카 18,8)
내가 그리스도의 계시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사라질 때 세상은 거짓 예언자들로 가득 찰 것입니다. 지금 사이비를 공부할 때가 아닙니다. 성체성사로 내가 진리에 참여하느냐가 관건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들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말을 할 수 없습니다.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 나를 버리고 그분의 말을 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이것만큼 좋은 공부는 없습니다. 내가 말하며 내가 듣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거짓 예언자들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가 조금씩 더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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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어릴 적의 기억입니다. 자주 이사를 가야 했습니다. 우리 집을 마련할 때까지 9번 이사를 갔습니다. 주인집이 있고 작은 공간에 세를 들어 살았습니다. 세를 들어 살면 알게 모르게 주인집의 눈치를 보기 마련입니다. 장독대로 있고, 등나무도 있고, 다락방도 있고, 작은 마당도 있던 새 집으로 이사 갔을 때는 기분이 좋았습니다. 저는 형들이 쓰던 가방, 옷도 물려받았습니다. 당시에는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가족들을 돌보기 위해서 참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쌀가게, 연탄가게, 마트, 밥장사를 하였습니다.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지시하고 권고합니다. 묵묵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벌어먹도록 하십시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수고와 고생을 하며 밤낮으로 일하였습니다. 우리에게 권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여러분에게 모범을 보여 여러분이 우리를 본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어머니는 바오로 사도의 권고를 충실히 지키며 살았습니다.
오늘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정한 ‘세계 가난한 이의 날’입니다. 가난해서 굶주리고, 가난해서 병들고, 가난해서 배우지 못하고, 가난해서 제대로 입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날입니다. 그런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꺼이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누도록 권고하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을 우선적으로 선택하고 도와야 한다고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부자가 자신만을 위해서 재물을 창고에 쌓아놓지만 그렇게 해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부자가 아브라함의 품에서 편히 쉴 수 없었던 것은 집 앞에 머물던 가난한 라자로를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지금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도와주는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최후의 심판 날에 하느님 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배고팠을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었고, 내가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묻습니다. 언제 저희가 그렇게 했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가장 배고프고, 가장 목마르고, 가장 헐벗은 사람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이다.”
가난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발적인 가난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부유함보다 가난함을 택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수도자들은 ‘독신, 순명, 청빈’을 서약합니다. 부유함 때문에 하느님께 대한 열정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 부유함 때문에 가난한 이들의 아픔을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 부유함 때문에 갈등과 분열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유해진 나라들의 교회는 비어가고 있습니다. 부유해진 나라들의 성소는 줄어들고 있습니다. 제국주의는 그들의 부유함을 채우기 위해서 식민지를 만들었습니다. 식민지의 역사는 약탈과 침략의 역사입니다. 교회는 권력을 가지고 부를 축적했을 때 분열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발적인 가난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다른 하나는 구조적인 가난입니다. 흙수저로 태어나서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하는 가난입니다. 궁핍한 지역에서 태어나서 굶주리는 가난입니다. 부정과 부패가 만연한 사회에서 태어나서 기회는 박탈당하고 있는 것 마저 빼앗기는 가난입니다. 국제사회는 구조적인 가난 때문에 굶주리고, 병들고, 배우지 못하는 이들을 돕기 위해서 연대하고 있습니다. 교회도 선교사를 파견하여 병원, 학교, 보육원을 만들었습니다.
교회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의 모범을 보여 주신 예수님을 본받아, 모든 공동체와 그리스도인이 가난한 이들을 향한 자비와 연대, 형제애를 실천하도록 일깨우고 촉구합니다. 우리들 또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발적인 가난을 실천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구조적인 가난에 내몰린 사람들과 연대하며 그들을 도우면 좋겠습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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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11월13일 [연중 제33주일]
오늘 전례는 영광중에 오실 그리스도의 마지막 오심, 즉 야훼의 날, 세상의 마지막 날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분의 오심은 하느님의 사랑의 힘의 결정적 승리를 의미한다. 말라키는 주님의 날에 있을 의인들의 승리를 예언하고 있다. 불이라는 상징적 개념은 주님의 날을 묘사할 때 많이 사용되는 개념이다. 교만한 자들은 풀무 불처럼 불이 타오르는 날 검불처럼 타서 없어지고 말 것이며, 야훼께 충실한 사람들에게는 심판의 불이 빛나는 태양으로 나타날 것이다. 심판이 드러나게 될 주님의 날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날이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께 가치를 인정받게 된다.
복음: 루카 21,5-19: 너희가 참고 견디면 생명을 얻을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루살렘 성전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보고 놀라는 것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예루살렘 성전은 너무나 아름답고 웅장하여 “예루살렘의 찬란한 모습을 다 보지 못한 사람은 아름다운 것을 보았다고 할 수 없고, 그 성소의 눈부신 장식을 보지 못한 사람은 예루살렘이라는 도시의 매력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신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6절). 그래서 제자들이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나고, 그 징조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7절), 예수께서는 광신적인 헛된 소리를 조심하라고 하신다.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따라가지 마라.”(8절) 오류를 믿게끔 하는 것은 기만이다. 모든 것이 복음인 양 떠들어대는 것은 사기이다.
그러한 징조를, 위기를 의식하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믿는 마음으로 차분하게 기다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신다. 마지막 때의 모든 불길한 징조 가운데서 한 가지 독특한 사실은 그때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박해를 당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바로 이때가 복음을 증언할 때라고 하신다. 그리스도인은 참으로 종말론적 삶을 살면 살수록 그만큼 강해질 수 있다.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13-15.17-19절) 그리스도인은 전쟁과 박해 속에서도 항상 희망을 품어야 한다. 그때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참으로 종말론적 기다림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하느님 나라의 마지막 한 조각까지 건설하기 위해 그들의 불행과 고뇌와 모순에 철저히 파고 들어가 함께 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마지막 때에야 충만히 완성된다는 것을 굳게 믿고 우리 신앙인들이 현재의 삶에 충실해야 한다. 그 때문에 현세의 삶의 순간들은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는 구원을 체험하는 구체적인 장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 그리고 누룩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주님이 오심이 가까웠다고 이 지상의 현실을 멀리하며 계속 불안감 속에서 게으른 생활을 하지 않도록 사람들에게,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2테살 3,10) 말하고 있다. 바오로 사도는 이 말을 당시의 신자들에게 자주 하였으며, 자신이 그 모범을 보였다. 정말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기다리는 자세는 모든 사람이 더욱 그분의 사랑에 마음의 문을 활짝 열 수 있도록 이 세상의 일에 더 열렬히 참여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이 항상 자신이 처한 위치와 상황에서 자신이 맡은 책임을 항상 성실히 수행하기를 원하신다. 그러한 삶 속에서 언제나 다가오시는 주님을 그 마음에 맞아드릴 수 있기를 바라신다. 우리는 이러한 깨어있는 삶 속에서 언제나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다. 지금 내가 있는 자리에서 하느님의 자녀로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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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주보》 생명의 말씀
[서울대교구 조성풍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사목국장)]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의 주님입니다>
남성 그룹 지오디(6세)의 가요 <어머님께>는 '어렸을 때부터 우리 집은 가난했었고. . 라는 가사로 시작합니다. 이 노래를 들을 때면 저는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떠울립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그 시절의 체험은 제가 사제이자 사회복지사가 되는데 적잖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저는 지금 제가 가난한 이들 안에 계신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 그들을 잘 섬기기 위한 역량을 키우라는 주님 부르심에 이끌려 사제이자 사회복지사 또 교구 사회사목국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Caritas seoul)의 부회장으로 일하고 있다는 점을 굳게 믿고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사회복지란 개인이 스스로나 가족의 힘으로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어려울 때 사회가 나서서 도와주고 보호해주는 사회적 장치입니다. 사회복지 활동은 종교적 가르침에 부합하여 참된 종교는 빈민, 병자, 고아, 과부 등 자립능력이 없는 이들을 보호하는데 적극적입니다. 가톨릭의 사회복지는 사회적 약자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채워주는 사랑을 실천하고 그들을 속박하는 부조리한 사회구조를 정의롭게 만드는데 현신합니다. 그 활동을 통한 사랑, 정의의 실천은 가난한 이들과 나누는 것에서부터 그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사회 환경의 개혁까지 아우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2017년부터 매 연중 제33주일을 '세계 가난한 이의 날'로 지내도록 선포하셨습니다. '복음의 핵심은 가난'이라고 한 교황님은 이날 교회 전체와 선한 의지를 가진 모든 사람을 가난한 이들의 부르짖음에 귀 기울이는 기도 중심의 연대와 형제애의 삶으로 초대하십니다.
오늘 복음(루가 21.5-19) 속 예수님은 아름다운 돌, 자원 예물로 꾸며진 성전도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인데 아무리 전쟁, 지진, 기근, 전염병, 박해, 무서운 일이 발생할지언정 인내하며 당신의 가르침에 합당하게 살면서 자신을 잃지 말고 생명을 얻으라고 우리에게 당부하십니다. 교회 본연의 모습은 이 세상에서 가난한 이들을 함한 사랑을 실천하신 예수님 모습율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만큼. 가톨릭교회를 이루는 우리부터 기꺼이 고통받고 있는 가난하고 소외된 우리 주변의 사회적 약자들을 향해 우선적인 관심과 도움을 투철히 전하는 예수님의 손과 발이 됩시다.
모든 인간은 주 하느님의 자녀로서 가난한 이돌의 인간다운 삶을 외면할 수 없기에, 지금 여기에서 주님 사랑의 기적이 우리 모두의 적극적이고 아름다운 나눔을 통해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빈센트 성인의 말씀을 끝으로 글을 마집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의 주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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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오늘날 우리는 다양한 문제들에 직면해 있습니다. 감염병의 세계적 유행(팬데믹), 기후 위기, 세대 간 갈등, 성 평등, 빈부 격차, 물가 상승 등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이처럼 다양한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오늘 성경 말씀은 어떤 메시지를 던져 줍니까?
제1독서에서는 “화덕처럼 불붙는 날이 온다.”와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라.” 같이 대조적인 내용의 예언을 듣습니다. 악인에게는 종말의 대심판이 내려지겠지만, 선인에게는 메시아를 통하여 치유와 구원이 실현되리라는 위로의 말씀입니다. 제2독서는 예수님의 재림이 이미 이루어졌다고 잘못 이해하던 이들을 경계하고자 쓰인 편지입니다. 종말에 관하여 그릇되게 이끄는 이들에게 바오로 사도는 일상 속 노동의 가치를 거듭 강조합니다. 한편 복음은 성전 파괴 예고와 종말에 닥칠 재난과 표징에 관한 예수님의 예언입니다. 특별히 거짓 메시아와 종말에 대하여 그릇된 가르침을 전하는 이들에게 속아 넘어가지 말라는 경고와 함께 닥쳐올 박해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인류 역사 속에서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이루신 구원 업적을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우리 신앙인은 하느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선포합니다. 우리 신앙인은 종말을 희망 속에서 기다립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재림과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위하여 우리에게 저마다 맡겨진 일상 속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창조주 하느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지어진 자연 생태계와 화해하고, 나와 다른 이들에게 주의를 기울이며, 인간의 존엄성을 물질로 환산하려는 유혹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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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허영엽 마티아 신부님]
임종을 앞두고 한 할머니는 자식들에게 자신이 녹음한 테이프를 건네주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들들은 어머니가 주신 테이프를 들었다. 그 테이프 안에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그분은 오랫동안 직접 복음서를 읽어서 녹음했다.
그 할머니는 자녀들에게 좀 더 가치 있는 것을 남겨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분은 세상에 남은 자식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녀들은 떠듬거리며 성경 말씀을 읽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어머니가 왜 그 테이프를 유산으로 남겨 주셨는지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오늘 복음(루카 21,5-19)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 종말에 대해 말씀하신다. 세상 종말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결론은 한 마디로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다.
11월은 위령성월로 죽은 모든 이들의 영혼을 특별히 기억하며 보내는 은총의 시기이다. 교회는 이 기간 동안 우리보다 세상을 먼저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함과 동시에 죽음을 자주 묵상하도록 권고한다.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분명히 슬픈 일이다. 그러나 역설적이지만 우리는 죽음을 통해 오히려 삶의 가치를 더 깊이 깨달을 수 있다. 어둠 속에서 빛이 더 빛나고 분명해지는 이치이다. 세상 종말과 심판은 우리의 몫이 아니라 하느님의 몫이다. 그래서 우리는 미래를 걱정하지 말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겨야 한다. 우리가 할 일은 그저 최선을 다해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가는 것이다.
예수님 시대에 유다인들은 정치적이고 현실적인 메시아를 고대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다인들만을 위한 구세주가 아니셨다. 또한 유다인의 기대처럼 예수님은 결코 세속적인 왕이 아니셨다. 예수님은 스스로 고난의 잔을 받아 마시고 죄인들의 발을 씻겨 주셨던 겸손의 왕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예수님에게 열광했던 유다인들이 실망해서 예수님을 배척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신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하느님의 구원을 이루셨다. 주님의 부활은 정의가 불의를, 생명이 죽음을, 선이 악을 결국 이긴다는 것을 보여 준 사건이다. 이처럼 죽음을 넘어서는 믿음이 바로 부활 신앙이다. 부활신앙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준다.
주님은 분명하게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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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장광민 요셉 신부님]
<내가 지금 속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흔히 사물을 볼 때 ‘있는 그대로 본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즉 자신은 늘 합리적이고 공정하며 객관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과 판단은 늘 옳고 자신은 웬만하면 착각하지 않는다는 ‘착각’을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착각이 아무리 신중하게 생각해도 잘 고쳐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혹시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논쟁을 벌이다가 내 말을 못 알아듣는 상대방이 머리가 나쁘다거나, 가치관이 이상하다거나,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느껴본 적이 있는가?
하지만 그 순간 상대방도 나와 똑같이 나에게 답답함과 한심함을 느낄 것이다. 가치관과 관점의 차이는 서로의 주관적 판단이 충돌한 것이기에 접점 없이 평행선만 그릴 때가 많다.
실상 우리는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주변상황에 영향을 받고 환경과 삶에 의해 조절된 자신의 주관적 입장에서 본다. 우리들은 각자 스스로가 가진 독특한 경험의 렌즈를 통해 자신들의 방식대로 사물을 보는 것이다.
자신이 주체적으로 판단하거나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주입된 대로 생각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지금 아랍에서 태어났다면 ‘모든 여자들은 머리에 수건을 쓰고 얼굴을 가리고 다녀야 한다’고 굳게 믿으며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라고 하신다. TV에서 하는 말은 무슨 신주단지 모시듯 하고, 어떤신문에서 하는 말은 어떻게 토씨하나 의심하지 않고 잘도 믿고, 어느 논평가의 얘기는 절대 신봉을 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은 별로 ‘먹히지가’ 않는다.
믿음의 기본은 ‘주님을 따라가는 것’임에도 정작 주님 뒤는 따라가지 않고 엉뚱한 것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잘도 믿고 따라가고 있지 않은지 늘 돌아봐야 한다.
루카 복음의 다른 곳에 이런 말씀이 있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우리 믿는 이들에게는 ‘나의 생각’이나 ‘세상의 시각’이나 ‘어떤 전문가의 판단’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오직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복음의 시각으로 나를 성찰하고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 태초의 인간이 뱀에게 속아 금단의 열매를 먹고 원죄를 범했듯이 우리가 얼마나 잘 속아 넘어가면 예수님께서 ‘속지 말라’고, 제발 엉뚱한 것 좀 ‘따라가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시겠는가?
이 번 한 주간 스스로에게 자주 물어보자. ‘내가 지금 혹시 속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지금 무얼 따라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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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황창연 베네딕토 신부님]
<노년 = 종말 = 행복>
11월은 위령 성월입니다. 위령 성월을 생각하면 죽음을 생각하게 되고 죽음을 생각하다보면 삶을 더 진지하게 반성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11월에 듣는 복음 말씀은 종말에 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현대인들에게 종말이라는 단어는 참 생소한 단어라는 것 입니다.
공자님 시대의 평균 연령은 38세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100년 전만 하더라도 평균 연령이 46세 였다고 합니다. 불과 100년 전만 하더라도 삶이 어느 순간에 마감할 줄 모르는 시대에 살았기 때문에 종말에 대한 이야기는 어느 정도 위력을 발휘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2002년 평균 수명이 여성을 기준으로 보면 80세가 넘었습니다. 이 통계는 우리에게 많은 점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사회가 초고령 사회로 진입한다면서 국가적인 준비를 해야 한다고 온갖 매스컴에서 앞다투어 보도를 하고 있습니다. 노인의 고령화 문제는 비단 사회의 문제뿐 아니라 우리 교회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너무 오래 살다 보니 종말신앙도, 죽음을 준비하는 신앙도 서서히 사라져 가는 경향이 짙습니다. 90세까지 살다보면 생명의 존엄성이 상실되어 삶과 죽음의 의미가 크게 부각되지도 않는 지경에 이르기도 합니다.
이제 죽음만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사는 것 자체가 하느님의 축복이고 은총이라는 신앙이 강조되어야 할 때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각 성당에 노인대학이 활성화되어야 하고, 노인에 대한 교회의 시각이 전향적으로 바뀌어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도 현대인들에게는 그리 충격적인 복음은 아닌 듯 싶습니다. 왜냐하면 시대적으로 보면 지금처럼 많은 사람들이 사람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면서 행복하게 사는 시대도 드물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왕 하나만 주인이고 모두가 종인 시대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왕족과 귀족의 시대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업하는 사람들이 폭력을 휘둘러도 노동자들은 숨도 쉬지 못하는 시대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공식적으로 노예를 사고파는 시대도 있었습니다.
공산주의가 판을 치던 시대에는 세상의 반이 하느님을 모르고 지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노동자와 장관이 같은 자리에 앉아서 권리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지난 2,000년의 역사를 보면 지금처럼 많은 사람들이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시대도 없다고 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하나가 되는 세상으로 나아가는 희망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분명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축복이고 행운입니다. 더욱이 이렇게 인간의 능력이 판을 치는 세상에 겸손되이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는 사람들이야말로 마지막 날에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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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이름 없는 사람>
루카 21,5-19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시다, 재난의 시작)
그때에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큰 지진이 발생하고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앞서,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너희를 회당과 감옥에 넘기고, 내 이름 때문에 너희를 임금들과 총독들 앞으로 끌고 갈 것이다.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너희를 넘겨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이름 없는 사람>
이름으로
속이는 사람들과
이름에
속는 사람들
얽히고설킨
사람세상에서
이름에
매이지 않고
이름마저
내려놓으며
이름으로
속이는 사람을
꾸짖고
이름에
속는 사람을
깨우치는
이름 없기에
참된 사람
이름 없기에
알찬 사람
이름 없기에
오롯한 사람
아! 가난한 사람
그런 사람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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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믿음과 인내로 얻는 생명>
오늘 주님께서는 성전의 아름다움에 대해 감탄하는 것을 보시고, 그것들이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라고 얘기하십니다. 이에 제자들이 그때가 언제인지 그리고 표징이 있는지 묻습니다.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
이 지점에서 우리는 질문하게 됩니다. 허물어질 때는 정해져 있을까? 그때는 누가 정하고 누가 허물까?
그때를 정하시고 허무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라고 믿는 것이 우리 믿음입니다. 그런데 그때를 정하고 허무는 것이 실은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 인간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불을 내리신 것은 하느님이시지만 실은 소돔과 고모라의 죄가 파멸을 불러온 것이지요. 스스로 자기 몸을 파괴하고 공동체를 파괴하는 것이 우리 인간이고 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전쟁이 일어날 것이고 전쟁의 파괴가 있을 거라고 얘기하는데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인간이지, 하느님이 아닙니다. 핵폭탄을 만든 것은 인간이지 하느님이 아니며 그것을 사용하는 것도 인간입니다. 대자연도 인간이 파괴하지, 하느님은 파괴하지 않으시며 술, 담배를 먹고 마약을 하는 것도, 우리 인간이지 하느님이 아니며 그러므로 우리 자신과 공동체를 파괴하는 것도 우리 인간이지 하느님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사랑에 따라 우리와 세상을 창조하시고
정의 따라 심판하시는데 그것이 그분의 진리입니다.
이 사랑과 정의와 진리를 따를 때 창조된 모든 것은 유지되지만, 인간이 이것을 따르지 않을 때 모든 파괴가 일어납니다. 곧 인간뿐 아니라 모든 것의 파괴가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거듭 말하지만, 우리의 공동체가 언제 허물어지고, 우리의 지구가 언제 파괴되는지는 우리에게 달렸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희망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합니다.
우리 자신에게 절망하고,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희망을 놓지 않고 자신과 공동체를 구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망할 때 아브라함은 하느님과 흥정을 합니다. 의인 몇 명이면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지 않으실지.
이것은 의인 몇이라도 있으면 하느님이 전체를 멸망시키지 않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의인 몇이 프란치스코처럼 허물어져 가는 공동체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공동체와 우리가 사는 지구에 지금 프란치스코와 같은 의인 몇이 필요한데 그것이 너 아닌 나이고 우리여야 합니다.
그런데 나와 우리가 나서지 않고 누군가 나 아닌 사람이 나와야 한다고 할 때 그때 가짜 그리스도가 나타나 내가 그리스도라고 하고 자기를 따르라고 할 것이고, 그때 믿음이 약한 사람은 그 가짜 그리스도를 따랄 갈 것입니다.
이것은 몸에 병이 들고 마음과 정신까지 약해진 사람이 의사의 말을 믿지 않고,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아가거나 이 돌팔이 저 돌팔이를 찾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믿고 하느님을 믿어야 합니다. 나와 우리 공동체를 살리는 것은 너 아닌 나이며 하느님임을 믿고,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처럼 모든 어려움과 혼란 가운데서도 인내로서 생명을 얻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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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아들,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말에 대한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들의 삶의 태도를 성찰케 하십니다. 이 시간 하느님의 성전이 된 우리의 마음가짐을 새롭게 해 주시도록 성령께 기도합시다.
세례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새 성전이 된 우리의 삶은 주님께서 약속해 주신 영원한 삶으로 완성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풍부하고 담을 그릇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은총을 받고도, 감사하지 못하고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그 은총을 잃어버릴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깨어 준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종말에 앞서 겪게 될 환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헛된 예언자가 나타나고, 자칭 ‘그리스도’라고 하는 자가 등장하며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큰 지진과 기근, 전염병이 생길 것이라 했습니다. 세상의 종말은 결국, 혼란을 겪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결코 헛된 예언에 속는 일이 없도록 하고 큰 표징들에 무서워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변해도 좋습니다. 주 하느님 당신 안에 뿌리내리면”(십자가 성요한). 내가 믿음으로 굳건하면 바깥바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주님을 믿고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진 대 어떤 표징이 일어나면 어떻고, 종말이 오면 어떻습니까? 그저 오늘을 그분과 함께 사는 것이 소중합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이 근심 걱정 없이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작은불은 바람 앞에서 쉽게 꺼지지만, 큰불은 바람 앞에서 활활 탑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이 큰 사람은 환난 앞에서 그 진가를 드러냅니다. 믿음의 사람은 이런저런 소문으로 휘둘리지 않습니다. 소문의 사실과 진실을 살핍니다. 이렇쿵저러쿵 쉽게 판단하고 단정 지으며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세상 종말에 앞선 외적인 혼란을 두려워 말고 오히려 내 마음 안에 평화가 없음을 염려해야 합니다. 세상의 종말이 어떻게 오느냐를 걱정하기보다 현재의 내 삶의 상태가 주님의 마음에 드는가? 아닌가를 살펴야 할 때입니다. 우리의 삶은‘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지금 예수님을 만나 영원한 생명을 여기서부터 사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살고 있는 모습 속에 미래에 내가 맞이하게 될 영원한 삶의 모습이 담겨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잘 살아야 합니다. 오늘을 천국처럼 사는 사람은 내일도 천국을 살게 되어있습니다.
사람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진면목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야말로 그 사람의 크기를 볼 수 있습니다. 어려움을 처리하는 과정 안에서 진실된 모습을 보게 되고 하느님의 사람인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사람에게는 선을 이룰 수 있게 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든 선을 지향하는 사람은 곧 하느님의 사람이요,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의 눈에 드는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신부인 저도 일상생활 안에서 하느님의 사람이 아닌 상태로 지낼 때가 종종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아마 누군가 제 속을 알면 큰 실망을 할 것입니다. “천국으로 향하는 가장 안전한 방법은 작은 선, 사랑이라도 수없이 행하는 것입니다. 수없이 징검다리를 놓다 보면 길이 되는 것처럼, 내가 놓은 수천, 수만의 징검다리를 밟고 안전하게 천국의 풍요로운 아름다움 속으로 옮겨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 때문에 박해와 비난을 받게 됩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도 주님을 따라야 하지만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미리 당신의 제자들에게 위로와 힘을 주십니다.‘박해를 당하고 감옥에 갇히게 되고… 그때야말로 너희가 나의 복음을 증언할 기회이다……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12-15) 박해는 그리스도를 증언할 기회라고 했지만, 어디 그것이 말같이 쉬운 일입니까? 일상 안에서도 변명과 합리화시키려고 하는 마음이 얼마나 많은데…
이태원참사와 같은 세상의 혼란을 접할 때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조심해야 할 것은 어지러운 상황이 아니라 그 속에서 벌어지는 ‘속임수’입니다. 그리고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는 길은 참 진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 상황 속에서 거짓말과 속임수가 난무하고 또다시 생명을 앗아가는 현실을 보면서 속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섭리를 믿는 우리는 두려움 없이 진실을 봐야 합니다.
사도행전 4장13절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최고 의회에서 증언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의회 의원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또 이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놀라워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6장 10절에도 의회에 끌려간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이는데 “그의 말에서 드러나는 지혜와 성령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 “최고 의회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모두 스테파노를 유심히 바라보았는데,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처럼 보였다.”(사도행전 6,15)고 말합니다. 믿음을 지닌 제자들은 인간적인 말재주와 인간적인 지혜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과 지혜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믿음을 간직하고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로움인지를 체험하려면 주님의 말씀대로 실천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사람으로 서있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됩니다. 혹 지금 힘들더라도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6) 하시는 우리의 구세주 예수님의 말씀에 위안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어려움 속에서 진정한 나의 모습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는 버려진 자식이 아니고 하느님의 보호 속에 있는 사랑받는 자녀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사실, “이 지상의 순례 생활에는 유혹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유혹을 당하지 않고는 아무도 자신을 완전히 알지 못합니다”(성 아우구스띠노). 우리에게 다가오는“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야고1,12) 모두가 생명의 화관을 쓰고 기뻐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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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사전에서 어른을 ‘다 자란 사람, 또는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으로 정의합니다. 다 자랐다는 것은 성인이 되었다는 것으로, 그렇다면 만 19세가 넘으면 어른일까요? 여기에 자기 일에 대한 책임까지 질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분명 외형적으로는 어른인데, 하는 모습은 철부지 애 같은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서른이 훨씬 넘었음에도 어머니 치마폭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도 점점 늘어난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어른이 되기 위해 겪어야 할 것을 힘들겠다고 부모가 대신해 줬기 때문입니다.
정신 분석가 제임스 홀리스는 진정한 어른이 되려면 다음 세 가지를 경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1) 고통을 겪는 일.
2) 자신의 의지보다 더 큰 힘이 있음을 깨닫는 일.
3) 자신과 다른 누군가를 아끼고 사랑하는 일.
이를 경험하지 못하면 자기중심적인 모습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합니다. 어른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통’을 무조건 피하고 볼 것이 아닙니다. 자신보다 더 큰 힘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믿어야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실천으로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른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과연 어른답게 살고 있나요?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종말론적 훈계를 하십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유다인들의 민족적인 자부심이 담겨있습니다. 그런데 이 성전이 모두 허물어진다는 것이지요. 성전의 멸망은 과거의 역사를 되돌아볼 때 조국의 멸망을 뜻합니다. 이를 알고 있었던 제자들은 두려워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종말은 성전의 파괴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바로 정신적인 혼란을 맞이하게 됩니다. 즉,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에 의해 큰 혼란에 빠집니다. 또 이와 같은 혼란 뒤, 민족적인 혼란으로 전쟁과 반란이 온다고 말씀하시지요. 그리고 큰 지진이 발생하고 기근과 전염병이 생긴다고 하십니다. 고통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이럴수록 정신 차려야 한다면서 “무서워하지 마라.”고 하십니다.
이제 제자들은 박해를 받게 됩니다. 하지만 이는 예수님의 기쁜 소식이 온 세상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는 계기가 됩니다. 새 생명이 태어나려면 산고를 겪어야 하는 이치처럼, 제자들의 박해는 새 나라인 하느님 나라가 태어나는 고통의 시작이 됩니다. 그래서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라는 말씀을 새기고, 정신을 바짝 차려서 참고 견뎌야 합니다. 인내로서 진정한 어른의 모습으로 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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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시련과 혼란, 위기의 시대>
-이를 타개打開하기 위한 구원의 6대 요소-
“그리스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가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2코린 8.9참조)
오늘은 연중 제33주일이자 제6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입니다. 다음 주일은 ‘온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이요 한해도 막바지에 이른 느낌입니다. 참 절묘한 위치에 있는 세계 가난한 이의 날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2코린8,9참조) 제하로 시작되는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담화문이 감동적입니다. 다음 대목이 깊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지난 5월15일, 저는 샤를 푸코 수사를 시성하였습니다. 푸코 성인은 부유하게 태어났지만 예수님을 따르고자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예수님처럼 모든 이에게 가난한 형제가 되어 준 사람입니다. 다음 푸코 성인의 말을 묵상해 보면 좋겠습니다.
“가난한 이들, 작은 이들, 노동자들을 업신 여기지 맙시다. 그들은 하느님 안의 우리 형제자매일뿐 아니라, 외형적 삶에서 예수님을 가장 완벽하게 닮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나자렛의 노동자 예수님을 완벽하게 보여줍니다.
그들은 뽑힌 이들 가운데 맏배들이며 구세주의 구유로 부름받은 첫 번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탄생부터 죽음까지 그분과 어울리곤 하였던 친구들입니다. 그들을 공경합시다. 그들 안에 계신 예수님과 예수님의 거룩한 양친을 공경합시다. 끊임없이 모든 것에서 가난해져서, 가난한 이들의 형제자매,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됩시다.”-
인간의 본질이 가난이요 깊이 들여다 보면 우리 모두가 가난한 이들입니다. 병고病苦나 죽음 앞에 참으로 얼마나 가난하고 가련한 존재의 인간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참으로 시련과 혼란, 위기의 시대입니다. 인류 역사가 언제나 시련과 혼란, 위기의 시대였지만 작금의 시대는 기후위기와 더불어 노령화, 그리고 증가하는 자살자들, 여전히 생존경쟁 치열한 삶에다가 끊임없는 전쟁, 빈부격차의 심화, 온갖 분열과 갈등으로 시련과 대혼란의 위기 시기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위기를 타개할 수 있을까요? 타개를 위한 구원의 6대 요소를 제시합니다.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맞이하여 참으로 가난한 마음 안에 다음 처방을 마음 깊이 새기기 바랍니다.
첫째, 희망의 삶입니다.
종말은 심판과 더불어 구원의 희망을 보여줍니다. 말라기서에서 제시되는 종말은 우리의 천박한 삶에 회개를 촉구하면서 동시에 구원의 희망에 우리 마음을 열어 줍니다. 심판과 구원이 엇갈리는 묘사가 실감나게 마음에 와 닿습니다.
“보라, 화덕처럼 불붙는 날이 온다. 거만한 자들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은 모두 검불이 되리니, 다가오는 그날이 그들을 불살라 버리리라. 그날은 그들에게 뿌리도 가지도 남기지 않으리라.”
새삼 우리를 회개와 더불어 한없이 가난한 존재, 겸손한 존재가 되어 살게 하는 말씀입니다. 이런 심판과 더불어 주님은 우리를 구원의 희망에로 눈길을 향하게 합니다. 바로 우리가 향해야 할 궁극의 희망입니다.
“그러나 나의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라.”
주님의 이름을 경외하며 주님께 궁극의 희망을 두고,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구원의 삶을, 지상천국의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둘째, 질서의 삶입니다.
무질서가 아니라 질서의 삶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 자연스럽게 따라 오는 기도와 노동의 질서 있는 삶입니다. 영성생활의 원흉이 무질서의 게으른 태만한 삶입니다. 무질서의 삶중에 점차 내적으로 무너지고 망가지는 사람들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충고가 참 적절합니다.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 무질서하게 살지 않았고, 아무에게도 양식을 거져 얻어 먹지 않았으며, 오히려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수고와 고생을 하며 밤낮으로 일하였습니다. 사실 우리는 여러분 곁에 있을 때, 일하기 싫어하는 자들은 먹지도 말라고 거듭 지시하였습니다.
그런데 듣자 하니 여러분 가운데 무질서하게 살아가면서, 일은 하지 않고 남의 일에 참견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람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지시하고 권고합니다. 묵묵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벌어 먹도록 하십시오.”
참으로 묵묵히 제 소임에 충실하며 건강하고 질서있는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중국 당나라의 선승 백장 선사의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라는 말씀도 바오로 사도의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셋째, 영원의 삶입니다.
피상적 삶이 아니라 본질 직시의 본질적 깊이의 영원한 삶입니다. 보이는 외관의 것들에 마음 뺏겨 허영과 교만의 헛된 삶을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서두,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 아름다움에 감탄할 때 주님은 이들의 환상을 깨며 지나는 것들에 마음을 두지 않도록 경각심을 줍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것이다.”
안이 깨끗하고 진실하면 겉은 저절로 깨끗하고 빛나기 마련입니다. 참으로 영원을, 영원한 하느님을 향할 때 저절로 거짓과 위선이 없는 가난과 겸손, 순수와 단순, 진실과 투명의 삶입니다. 보이는 것들의 외관 넘어 영원하신 하느님께 눈길을 두며 본질 직시의 영원의 삶, 부단한 자아초월自我超越의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건강도 그렇습니다. 한결같은 건강이 아니라 세월과 더불어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경우도 비일비재합니다. 참으로 영원하신 하느님께 희망을 둘 때 튼튼한 영혼으로 당황하지 않고 최대한 의연하고 품위있게 대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넷째, 정주의 삶입니다.
언제나 거기 그 자리 하느님 중심 안에 뿌리 내린 안정과 평화의 삶, 정주의 삶입니다. 웅덩이에 고인 썩은 물 같은 안주가 아니라, 밖으로는 산같은 정주의 삶이지만 안으로는 끊임없이 하느님 향해 맑게 흐르는 강같은 삶입니다. 바로 다음 주님 말씀대로 주변의 이런저런 말들에 경거망동, 부화뇌동하지 말고 제자리에 깊이 뿌리 내리는 정주의 삶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이들이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하루하루가 좋은 날입니다. 그러니 내일 세상의 종말이 오더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 나무를 심겠다는 정신으로, 하루하루의 일상에 충실하고 결과는 하느님께 맡기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다섯째, 증언의 삶입니다.
오늘 복음은 박해의 상황입니다. 이런 박해받는 일이 제자들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니, 미리부터 겁먹지 말고 주님께 맡기라 하십니다. 물론 오늘의 우리에게 이런 노골적인 박해는 없을 것입니다만 주님께 대한 한결같은 신망애信望愛의 정신으로 매사 단단히 영적 무장할 일입니다.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한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파스카의 예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언변과 지혜를, 필요로 하는 모두를 주실 것이니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을 증언하는 삶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여섯째, 인내의 삶입니다.
인내하는 자가 마지막 영적승리를 거둡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법, 참으로 하느님께 궁극의 믿음을, 희망을, 사랑을 둘 때 한결같이 기다릴 수 있고 인내할 수가 있습니다. 인내의 믿음, 인내의 정주, 인내의 겸손, 인내의 사랑, 인내의 희망, 참으로 인내의 덕이 모두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마디가 절정의 결론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인내로써 생명을 얻습니다. 이 말씀 마음 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 그 무엇도 우리 영혼을 다치지 못하리라는 주님의 확산에 넘치는 말씀입니다. ‘아무 것도 너를 어지럽게 하지 마라’는 모든 수도자들이 좋아하는 아빌라의 대 데레사의 영시가 생각납니다.
“아무것도 너를 어지럽히지 않게 하라.
아무것도 너를 놀라게 하지 마라.
모든 것이 다 지나가지만
하느님은 변치 않으시는 분.
인내가
모든 것을 얻게 하리니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오직 하느님으로 넉넉하도다.”
오늘날이야말로 시련과 혼란, 위기의 시대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시간, 강론을 통해 이를 타개하기 위한 구원의 6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참으로 가난한 우리의 빈 마음에 가득 채워 지는 미사은총의 선물입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루카 6,2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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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9)
연중 제33주일인 오늘은 '제6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입니다. 그리스도의 이 지상 대리자이신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2코린8,9 참조) 라는 제목의 담화를 통해 '샤를 드 푸코 성인'(예수의 작은 형제회 수사, 2022년 5월15일 시성)의 말을 묵상해 보자고 하십니다.
"가난한 이들, 작은 이들, 노동자들을 업신여기지 맙시다. 그들은 하느님 안의 우리 형제자매일 뿐만 아니라 외형적 삶에서 예수님을 가장 완벽하게 닮은 사람들입니다. 끊임없이 모든 것에서 가난해져서 가난한 이들의 형제자매,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됩시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가난한 이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이들이 됩시다. 또한 그분처럼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고 가까이 합시다."
그리고 이어서 "양심성찰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이 우리의 충실한 친구가 되었는지 자문해 보자"고 하십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2코린8,9)
가난은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셨고, 우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이들이 바로 당신이시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마태25,40 참조)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는 모습,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지 않는 모습이 오늘날 전쟁과 폭력과 기후위기 등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의 모습인 자연재해와 기근과 전염병 등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루카21,5-19)은 그 끝은 멸망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라는 큰 병폐와 치열한 경쟁과 먹고 살기가 힘든 현실 앞에서 가난이 되고,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된다는 것은 믿음 없이는 불가능 할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믿음을 구하고, 믿음 안에서 불가능이 가능이 되는 기적을 만들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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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bysT7WGT40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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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 19)
어느덧
한 해의 끝자락에
와 있습니다.
한 해를 사랑으로
이끌어 주신
하느님의 힘을
믿습니다.
우리가 진정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시는
사랑입니다.
종말은
사랑입니다.
삶의 마지막에는
연습이 없습니다.
사랑이
우리 삶의
본질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소중한 구원이
있습니다.
사랑으로
생명의 길을
열어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사랑은
인내가 필요하고
사랑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시작되는
가장 소중한
기쁨입니다.
생명은 기다림과
인내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이 여정의 끝에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삶의 방향을
알게하시는
하느님의
인내와
사랑입니다.
인내는 우리를
자기중심과
자기만족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자기의 것을
다 내려놓는 것이
탄생이라면
종말은 가장 좋으신
생명의 하느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것을
내려놓고
비우는 것이
거듭 우리를
새롭게 하는
은총입니다.
매일의 생활 속에서
만나게 되는
창조이며
종말입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해야 할
하느님께서는
최상의 길을 먼저
걸어가셨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길입니다.
인격의 반성으로
한 해를
마무리합니다.
사랑은 실천의
기쁨이며
성장의
변화입니다.
결코 정지된
개념이 아닙니다.
사랑은
새로운 삶의
뜨거운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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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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