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가는 풍습 |
설날
- 설날은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이다. 본래 설날은 조상 숭배와
효(孝)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먼저 간 조상신과 자손이 함께 하는 아주 신성한 시간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
설날은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이다. 본래 설날은 조상 숭배와 효(孝)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먼저 간 조상신과 자손이 함께 하는 아주 신성한 시간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대부분이 도시 생활과 산업 사회라는 굴레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현대에 와서 설날은 또 다른 의미를 지니는데, 곧 도시 생활과
산업 사회에서 오는 긴장감과 강박감에서 일시적으로나마 해방될 수 있는 즐거운 시기라는 의미도 함께 지니게 된 것이다. 설날은 세속의 시간에서
성스러운 시간으로 옮겨가는 교체기라고 할 수 있다. 즉 평소의 이기적인 세속 생활을 떠나서 조상과 함께 하며 정신적인 유대감을 굳힐 수 있는
성스러운 시간이 바로 설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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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개인적인 차원을 떠나서
국가 전체적으로 보더라도 설날은 아주 의미 있는 날이다. 국민 대부분이 고향을 찾아 떠나고, 같은 날 아침 차례를 올리고, 또 새옷을 즐겨
입는다. 여기에서 우리는 같은 한국 사람이라는, 같은 한 민족이라는 일체감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 볼 때도 설날이 가지는
의미, 즉 공동체의 결속을 강하게 한다는 점에서는 단순한 명절 이상의 기능과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설이란 새해의 첫머리란 뜻이고
설날은 그 중에서도 첫날이란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설날의 어원에 대해서는 대개 세 가지 정도의 설이 있다. 우선, 설날을 '낯설다'라는 말의
어근인 "설"에서 그 어원을 찾는 것이다. 그래서 설날은 '새해에 대한 낯설음'이라는 의미와 '아직 익숙하지 않는 날'이란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한다. 즉 설날은 묵은해에서 분리되어 새로운 해에 통합되어 가는 전이 과정으로, 아직 완전히 새해에 통합되지 않았기 때문에 익숙하지 못한
그러한 단계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설날은 "선날" 즉 개시(開始)라는 뜻의 "선다"라는 말에서 '새해 새날이 시작되는
날'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선날"이 시간이 흐르면서 연음화(連音化)되어 설날로 와전되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설날을
"삼가다[謹愼]" 또는 "조심하여 가만히 있다"라는 뜻의 옛말인 "섧다"에서 그 어원을 찾기도 한다. 이는 설날을 한자어로 신일(愼日)이라고
표현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신일이란 '삼가고 조심하는 날'이란 뜻인데, 이는 완전히 새로운 시간 질서에 통합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언행을 삼가고 조심하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생긴 말이다. 한편 설날은 원일(元日)·원단(元旦)·정조(正朝)·세수(歲首),
세초(歲初)·세시(歲時)·연두(年頭)·연시(年始) 등의 한자어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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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이 언제부터 우리 민족의
최대 명절로 여겨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설날을 명절로 삼기 위해서는 우선 역법(曆法)이 제정되어야만 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설날의 유래는 역법의 제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 나라가 나름대로의 역법을 가지고 있었음은 중국인들도 진작
인정하고 있었다.《삼국지(三國志)》에 이미 부여족이 역법을 사용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고, 신라 문무왕 대에는 중국에서 역술을 익혀 와
조력(造曆)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미루어 보더라도 우리 민족은 단순한 중국 역법의 모방이 아니라 자생적인 민속력이나 자연력을 가졌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짐작할 수 있다.
또 신라의 독자적인 명절이라
할 수 있는 가위[嘉俳]나 수릿날의 풍속이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우리 민족이 고유한 역법을 가졌을 가능성을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현
단계에서는 중국 전래의 태양태음력이나 간지법(干支法) 이외에 우리 고유의 역법 제정에 관한 기록을 찾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므로 설날은
적어도 6세기 이전에 중국에서 태양태음력을 받아들인 이후 태양력을 기준으로 제정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한편 역사적인 기록을 통해서도 설날의
유래를 추측해 볼 수 있다.《수서(隨書)》를 비롯한 중국의 사서들에는 신라인들이 원일(元日)의 아침에 서로 하례하며 왕이 잔치를 베풀어 군신을
모아 회연하고, 이날 일월신을 배례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삼국사기(三國史記)》〈제사〉편에는 백제 고이왕 5년(238) 정월에 천지신명께
제사를 지냈으며, 책계왕 2년(287) 정월에는 시조 동명왕 사당에 배알하였다고 한다. 이때의 정월 제사가 오늘날의 설과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으나 이미 이때부터 정월에 조상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것으로 보아 오늘날의 설날과의 유사성을 짐작할 수 있다.
신라에서는 제36대
혜공왕(765∼780) 때에 오묘(五廟:태종왕, 문무왕, 미추왕, 혜공왕의 조부와 부)를 제정하고 1년에 6회씩 성대하고도 깨끗한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데, 정월 2일과 정월 5일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설날의 풍속이 형성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설과
정월 대보름·삼짇날·팔관회·한식·단오·추석·중구·동지를 9대 명절로 삼았으며, 조선시대에는 설날과 한식·단오·추석을 4대 명절이라 하였으니,
이미 이 시대에는 설이 오늘날과 같이 우리 민족의 중요한 명절로 확고히 자리잡았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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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의 세시풍속으로는 차례,
세배, 설빔, 덕담, 문안비, 설그림, 복조리 걸기, 야광귀 쫓기, 청참, 윷놀이, 널뛰기, 머리카락 태우기 등 그 종류가 상당히 다양하다. 이
중에서 대표적인 몇 가지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설날 차례:정월 초하룻날 아침 일찍이 각 가정에서는 대청마루나 큰방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제상 뒤에는 병풍을 둘러치고 제상에는 설음식[歲饌]을 갖추어 놓는다. 조상의 신주(神主), 곧 지방(紙榜)은 병풍에 붙이거나 위패일
경우에는 제상 위에 세워 놓고 차례를 지낸다. 차례상을 차리는 방법은 가가례(家家禮)라 하여 지방이나 가문에 따라 다른데, 대체로 차례상 앞
첫째 줄에는 과일을 놓는다. 이때 붉은 과일은 동쪽에 흰 과일은 서쪽에 놓는다. 둘째 줄에는 채(菜)나 나물류를 놓는데, 포(脯)는
왼편에 식혜는 오른편에 놓고, 또 마른 것은 왼편에 젖은 것은 오른편에 놓으며, 나물류인 김치·청장(淸漿)·숙채(熟菜)는 가운데에 놓는다. 세째
줄에는 탕(湯)을 놓는데, 다섯 가지 맛을 갖춘 탕으로 단탕(單湯)·삼탕(三湯)·오탕(五湯)·칠탕(七湯) 등이라 하여 어탕(魚湯)은 동쪽에
육탕(肉湯)은 서쪽에 소탕(蔬湯)은 가운데에 놓는다. 네째 줄에는 적(炙:불에 굽거나 찐 것)과 전(煎:기름에 튀긴 것)을 벌여 놓는데, 어류는
동쪽에, 육류는 서쪽에 놓는다. 이때 생선의 머리는 동쪽으로, 꼬리는 서쪽으로 향하게 한다. 다섯째 줄에는 밥과 국을 놓는데, 밥은 왼쪽에,
국은 오른쪽에, 또 떡은 오른쪽에 면(麵)은 왼쪽에 놓는다.
설날 차례를 마친 뒤
조부모·부모에게 절하고 새해 인사를 올리며, 가족끼리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절하는데, 이를 세배(歲拜)라 한다. 세배가 끝나면 차례를 지낸
설음식으로 아침 식사를 마친 뒤에 일가 친척과 이웃 어른들을 찾아가서 세배를 드린다. 세배하러 온 사람이 어른일 때에는 술과 음식을 내어놓는
것이 관례이나, 아이들에게는 술을 주지 않고 세뱃돈과 떡, 과일 등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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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 초하룻날 아침에는
남녀노소 구분 없이 모두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새옷을 갈아입는데, 이것을 설빔[歲粧]이라고 한다. 이 설빔은 대보름까지 입는 것이
보통이다.《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원일(元日)조에 따르면 남녀노소가 모두 새옷을 입는 것을 '세비음(歲庇陰)[설빔]'이라 한다 하였다.
덕담(德談)이란, 설날에 일가 친척들과 친구 등을 만났을 때 "과세 안녕히
하셨습니까?" "새해 복많이 받으십시오." "새해에는 아들 낳기를 빕니다." 등과 같이 그 사람의 신분 또는 장유(長幼)의 차이에
따라 소원하는 일로 서로 축하하는 것을 말한다.《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원일(元日)조에도 설날부터 사흘 동안 시내의 모든 남녀들이 왕래하느라고
떠들썩하고, 울긋불긋한 옷차림이 길거리에 빛나며, 길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면 반갑게 웃으면서 "새해에 안녕하시오?" 하고 좋은 일을 들추어
하례한다. 예컨대 아들을 낳으시라든지, 승진하시라든지, 병환이 꼭 나으시라든지, 돈을 많이 벌라는 말을 하는데 이를 덕담이라 한다고 하였다.
또《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원일(元日)조에 연소한 친구를 만나면 "올해는 꼭 과거에 합격하시오." "부디 승진하시오." "생남하시오." "돈을
많이 버시오." 하는 등의 말을 하는데, 서로 축하하는 이 말을 덕담이라 한다고 하였다.
설날에 여자는 세배를 하러
돌아다니지 않으나, 중류 이상 양반 가문의 부인들은 자기 대신으로 잘 차려 입은 젊은 여종을 일가친척이나 그 밖의 관계 있는 집에 보내어 새해
인사를 전갈(傳喝)하는데, 이때 새해 인사를 다니는 계집종을 일컬어 문안비(問安婢)라 한다. 문안을 받는 집에서는 반드시 문안비에게 세배상을 한 상
차려 주며, 또 약간의 세뱃돈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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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말까지의 풍속에, 설날
도화서(圖畵署:그림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서)에서 수성(壽星) 선녀와 직일신장(直日神將)을 그려서 임금에게 드리고, 또 서로 선물로 주기도
하는데, 이를 '설그림(歲畵)'이라고 한다. 이는 축수(祝壽)하는 뜻을 표시하는 것이다. 수성이란 장수를 맡은 노인성(老人星)을 말하는 것이고, 직일신장은 그
날을 담당한 신인데, 이는 모두 도교의 신이다. 한 사람은 도끼를, 한 사람은 절월(節鉞)을 들고 황금 갑옷을 입은 두 장군의 화상(畵像)을 한
자 남짓 되게 그려서 대궐문 양쪽에 붙이는데, 이것을 '문배(門排)' 또는 설그림이라고 한다.
또한 붉은 도포와 검은 사모를
쓴 형상을 그려 대궐의 겹대문에 붙이기도 하며, 종규(鐘 )가 귀신 잡는 형상을 그려서 문에 붙이고, 또 귀신의 머리를 그려 문설주에 붙이니,
이것들은 다 사기(邪氣)와 역신을 물리치는 뜻이다. 그러므로 모든 궁가(宮家)와 척리(戚里:임금의 內戚·外戚) 집 문짝에도 붙이니, 여염집에서도
이를 본받아 그림을 문에 붙였던 것이다.
설날 이른 아침 또는 섣달
그믐날 밤 자정이 지나서, 대나무를 가늘게 쪼개어 엮어서 만든 조리를 사서 벽에 걸어 두는 습속이 있는데, 이것을 복조리라고 한다. 전국에서 조리 장사가 이것을
팔기 위하여 초하루 전날 밤부터 밤새도록 인가 골목을 돌아다닌다. 이러한 풍속은 조리가 쌀을 이는 기구이므로 그해의 행운을 조리로 일어 취한다는
뜻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설날에 1년 동안 사용할 조리를 그 수량대로 사서 방 한쪽 구석이나 대청 한 귀퉁이에 걸어 두고 하나씩
사용하면 1년 동안 복이 많이 들어온다는 민간 신앙도 있다.
설날 밤에 야광(夜光)이라는
귀신이 인가에 들어와 사람들의 신을 신어 보아서 자기 발에 맞으면 신고 간다는 속설이 있는데, 만일 신을 잃어버리면 신 임자는 그해 운수가
나쁘다고 한다. 그러므로 아이들과 어른들이 모두 신을 방안에 들여놓는다. 이날 밤에는 모두 불을 끄고 일찍 자는데, 야광귀를 막기 위해 대문
위에다 체를 걸어 두니, 이것은 야광귀가 와서 체의 구멍을 세어 보다가 잘못 세어 다시 또 세고, 세고 하다가 신을 신어 보는 것을 잊어버리고,
새벽닭이 울면 물러가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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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새벽에 거리로 나가
방향도 없이 돌아다니다가 사람의 소리든 짐승의 소리든 처음 들리는 그 소리로써 그해 1년 중 자기의 신수(身數)를 점치는데, 이것을
청참(聽讖)이라고 한다.
까치 소리를 들으면 그해는 풍년이 들고 행운이 오며, 참새 소리나 까마귀 소리를 들으면 흉년이 들고 불행이 올 조짐이라고 한다. 그리고 먼 데서
사람의 소리를 들으면 풍년도 아니고 흉년도 아닌 평년작이 들고, 행운도 불행도 없이 지낸다고 한다.
설날의 음식을 통틀어
'설음식' 또는 '세찬(歲饌)'이라 하고 설날의 술을 '설술[歲酒]'이라고 한다. 설음식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떡국이다. 떡국은 흰쌀을 빻아서 가는 체로 치고 그 쌀가루를 물에
반죽하여 찐 후 안반에 쏟아 놓고 떡메로 수없이 쳐서 찰지게 한 다음, 한덩어리씩 떼어가지고 손으로 비벼 그것을 굵다란 양초가락만큼씩 길게
만든다. 이것을 타원형으로 얇게 썰어서 장국에 넣어 끓이고, 쇠고기·꿩고기로 꾸미하여 후추가루를 뿌린다. 이것은 정월 초하루 제사때에
제물(祭物)로도 차리고 또 손님에게도 낸다. 설날의 떡국은 지금은 쇠고기나 닭고기로도 끓이지만 옛날에는 꿩고기로 많이 하였다.
설날에 흰 떡국을 끓여 먹는
것은 고대의 태양숭배 신앙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데, 설날은 새해의 첫날이므로 밝음의 표시로 흰색의 떡을 사용한 것이며, 떡국의 떡을 둥글게
하는 것은 태양의 둥근 것을 상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설날에 마시는 술은 데우지 않고 찬 술을 마시는데,《경도잡지(京都雜誌)》에는
"술을 데우지 않는 것은 봄을 맞이하는 뜻이 들어 있는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사라져가는 풍습 |
정월대보름 - 정월 대보름날을 한자어로는
'상원(上元)'이라고 한다. 상원은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삼원(三元) 의 하나로, 삼원이란 상원(1월 15일), 중원(7월 15일),
하원(10월 15일)을 말한다. |
정월(正月)은 한 해를 처음
시작하는 달로서 그 해를 설계하고, 일 년의 운세를 점쳐보는 달이다. 율력서(律曆書)에 의하면 "정월은 천지인(天地人) 삼자가 합일하고 사람을
받들어 일을 이루 며, 모든 부족이 하늘의 뜻에 따라 화합하는 달"이라고 한다. 따라서 정월은 사람과 신,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하나로
화합하고 한 해 동안 이루어야 할 일을 계획하고 기원하며 점쳐보는 달인 것이다. 정월 대보름날을 한자어로는 '상원(上元)'이라고 한다. 상원은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삼원(三元) 의 하나로, 삼원이란 상원(1월 15일), 중원(7월 15일), 하원(10월 15일)을 말한다. 도가에서 이
날 은 천상(天上)의 선관(仙官)이 인간의 선악을 살핀다고 하는데, 그때를 '원(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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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 전통사회의
절일(節日)로서 정월 대보름(1월 15일)·7월 백중(7월 15일)·8월 한가위(8월 15 일) 등이 있는데, 이러한 명일(名日)은 보름을
모태로 한 세시풍속들이다. 대보름은 음력을 사용하는 전통사회에 있어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농경을 기본으로 하였던 우리 문화의 상징적인
측면에서 보면, 달은 생생력(生生力)을 바탕으로 한 풍요로움의 상징이었다. 음양사상(陰陽思想)에 의하면 태양을 '양(陽)' 이라 하여 남성으로
인격화되고, 이에 반하여 달 은 '음(陰)' 이라 하여 여성으로 인격화된다. 따라서 달의 상징적 구조를 풀어 보면 달-여신-대지로 표상되며,
여신은 만물을 낳는 지모신(地母神)으로서의 출산력을 가진다. 이와 같이 대보름은 풍요의 상징적 의미로 자리매김한다.
정월의 절일로는 설과 대보름이
있다. 태고적 풍속은 대보름을 설처럼 여기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의하면 대보름에도 섣달 그믐날의 수세하는
풍속과 같이 온 집안에 등불을 켜 놓고 밤을 세운다는 기록이 보인다. 한편 중국에서는 한나라 때부터 대보름을 8대 축일의 하나로 중요하게 여겼던
명절이었다. 또한 일본에서도 대보름을 소정월(小 正月)이라 하여 신년의 기점으로 생각하기도 하였다. 이는 대보름날을 신년으로 삼았던 오랜 역법의
잔존으로 보이며,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건대 대보름의 풍속은 농경을 기본으로 하였던 고 대사회로부터 풍농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유래되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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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사회의 농가에서는 정월을
'노달기'라 하여, 농군들은 휴식을 취하며 농사준비를 한다. 예컨 대 가마니짜기·새끼꼬기·퇴비만들기·농기구의 제작 및 수리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는 휴식으로만 일관되지는 않는다. 새해를 맞이하여 새로운 시간의 창조를 위한 신성의례와 건강하고 풍요로운 생활을 얻기 위한 다양한
제의(祭儀)와 점세(占歲) 및 놀이가 행해진다. 지방마다 차이가 있지만 농촌에서는 마을공동제의로 대개 대보름날 자정을 전후로 하여 동제
(洞祭)를 지낸다. 가가호호 성의껏 제비를 갹출하여 제비(祭費)를 마련하고, 정결한 사람으로 제관을 선출하여 풍요로운 생산과 마을의 평안을
축원하는 것이 바로 동제인 것이다.
또한 풍요다산을 기원하는
놀이로 줄다리기를 들 수 있다. 줄다리기는 줄당기기라고도 하며 주로 농촌에 전승 되어온 점세적 농경의례(農耕儀禮)이다. 볏짚을 이용하여 암줄과
숫줄을 만든 후에 마을단위 혹은 군단위로 양편으로 나뉘어 줄을 당기게 되는데, 암줄이 승리를 해야 풍년이 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이밖에도
풍농을 기원하는 풍속으로 지신밟기가 있는데, 지신밟기는 정초부터 대보름 무렵에 마을의 풍물패가 집집마다 돌며 흥겹게 놀아주고 축원해는 주는 것을
말하는데, 지역에 따 라서 마당밟기·매귀(埋鬼)·걸립(乞粒) 등으로 불리운다.
이와는 달리 개인적인
의례로서, 대보름날 아침 일찍 일어나면 '부스럼 깬다'하여 밤·호두·땅 콩 등을 깨물며 일년 열 두달 종기나 부스럼이 나지 않도록 축원한다. 또
아침 일찍 일어나 사람을 보면 상대방 이름을 부르며 '내 더위 사가라'고 한다. 이렇게 더위를 팔면 그 해 더위를 먹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한편 아침 식사 후에는 소에게 사람이 먹는 것과 같이 오곡밥과 나물을 키에 차려주는데, 소가 오곡밥을 먼저 먹으면 풍년이 들고, 나물을
먼저 먹으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아이들은 대보름날이 되면 '액연(厄鳶) 띄운다'고 하여 연에다 '액(厄)' 혹은 '송액(送 厄)' 등을 써서
연을 날리다가 해질 무렵에 연줄을 끊어 하늘로 날려 보냄으로써 액막이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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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부들은 단골무당을 청하여
가신(家神)과 여러 잡신들을 풀어 먹임으로써 가내의 평안을 기원하 는데, 이를 안택(安宅)이라고 한다. 대보름날 밤에는 달맞이 풍속이 있다.
달맞이는 초저녁에 높은 곳으로 올라서 달을 맞는 것을 말하며, 먼저 달을 보는 사람이 길하다고 한다. 아울러 달의 형체, 대소, 출렁거림,
높낮이 등으로 1년 농사를 점치기도 한다. 이와 더불어 달집태우기 풍속도 대보름날 밤에 행해지는데, 횃불싸움 과 쥐불놀이 등과도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짚이나 솔가지 등을 모아 언덕이나 산위에서 쌓아 놓 고 보름달이 떠오르기를 기다려 불을 지른다. 피어 오르는 연기와 더불어 달을
맞이하고, 쥐불놀이와 더불어 이웃마을과 횃불싸움을 하기도 한다.
이외에도 볏가릿대세우기,
복토(福土)훔치기, 용알뜨기, 다리밟기, 곡식 안내기, 사발점, 나무그 림자점, 달붙이, 닭울음점 등이 있다. 볏가릿대세우기는 보름 전날 짚을
묶어서 깃대 모양으로 만 들고 그 안에 벼·기장·피·조의 이삭을 넣어 싸고, 목화도 장대 끝에 매달아 이를 집 곁에 세워 풍년을 기원하는
풍속이며, 복토훔치기는 부잣집의 흙을 몰래 훔쳐다 자기 집의 부뚜막에 발라 복을 기원하는 풍속이다. 용알뜨기는 대보름날 새벽에 제일 먼저
우물물을 길어와 풍년을 기원하며, 운수대통하기를 기원하는 풍속이다. 다리밟기는 12다리를 밟으면 액을 면하고 다리 병을 앓지 않는다고 한다.
곡식 안내기는 경남지방의 풍속으로 농가에서는 정초에 자기 집 곡식을 팔거나 빌려주지 않는다. 이는 이시기에 곡식을 내게 되면 자기 재산이 남에게
가게 된다는 속신 때문에 행해진 풍속이다.
사발점은 대보름날 밤에 사발에
재를 담아 그 위에 여러 가지 곡식의 종자를 담아 지붕 위에 올려 놓은 다음, 이튿날 아침 종자들의 행방을 보아 남아 있으면 풍년이고 날아갔거나
떨어졌으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나무그림자점은 한자 길이의 나무를 마당 가운데 세워 놓고 자정무렵 그 나무 비치는 그림자의 길이로써 농사의
풍흉을 점치는 풍속이다. 달붙이는 대보름 전날 저녁에 콩 12개에 12달의 표시를 하여 수수깡 속에 넣고 묶어서 우물 속에 집어 넣어 콩알이
붙는가 안붙는가에 따라 농사의 풍흉을 점치는 풍속이다. 닭울음점은 대보름날 꼭두새벽에 첫닭이 우는 소리를 기다려서 그 닭울음의 횟수로써 농사의
풍흉을 점치는 풍속이다. 대보름날에 행해지는 놀이로는 사자놀이, 관원놀음, 들놀음과 오광대 탈놀음, 석전, 고싸움, 쇠 머리대기, 동채싸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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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보름날의 절식(節食)으로는
햅찹쌀을 찌고, 또 밤·대추·꿀·기름·간장 등을 섞어서 함께 찐 후 잣을 박은 약반(藥飯)을 준비한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정월조에 의하면 "신라 소지왕(炤智王) 10년 정월 15일 왕이 천천정(天泉亭)에 행차했을 때 날아온 까마귀 가
왕을 깨닫게 하여, 우리 풍속에 보름날 까마귀를 위하여 제사하는 날로 정하여 찹쌀밥을 지어 까마귀 제사를 함으로써 그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다"라
한 것으로 보아 약반절식은 오랜 역사를 지닌 우리의 풍속이다. 이 약반은 지방에 따라 오곡밥·잡곡밥·찰밥·농사밥 등을 그 대용으로 즐기기도
한다.
대보름날엔 세 집 이상의
타성(他姓) 집 밥을 먹어야 그 해의 운이 좋다고 하며, 평상시에는 하루 세 번 먹는 밥을 이 날은 아홉 번 먹어야 좋다고 해서 틈틈이 여러 번
먹는다. 또 대보름의 절식으로 복쌈이 있는데, 이는 밥을 김이나 취나물, 배추잎 등에 싸서 먹는 풍속을 말한다. 복쌈은 여러 개를 만들어 그릇에
노적 쌓듯이 높이 쌓아서 성주님께 올린 다음에 먹으면 복이 온다고 전한다. 그리고 대보름에 귀밝이술이라는 풍속이 있다. 동국세시기에는 "청주 한
잔을 데우지 않고 마시면 귀가 밝아진다. 이것을 귀밝이술이라 한다. 생각컨대 섭정규(葉廷珪, 中國 宋代人)의 해록쇄사(海錄碎事)에 춘분 전후의
무일(戊日)에 귀밝이술[治聾酒]을 마신다고 했으나 지금 풍속에는 이를 보름날에 행한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사라져가는 풍습 |
2월 할만네 - 제올리고 소원빌던 사라져가는
미풍양속 |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영등할미’의 전설이 전해지며 영등할미에게 한해의 풍어(豊漁)와 농사의 풍년(豊年)을 기원하는 제(祭)를
올렸다. 전설에는 영등할미가 음력 2월초하루날에 얼어 죽었다 하기도 하고 또는 영등할미가 있어 해마다 2월 초하루날이면 인간세상에 내려와 세상을
돌아보고 그달 20일께 상천(上天)한다고 전해지고 있다. 특히 영등할미는 세상에 내려올 때 딸을 데리고 내려오면 그 해 날씨도 좋고 만사 평온,
풍년과 풍어가 들지만 며느리를 데리고 오는 해는 반대현상이 나타난다고 전해지고 있다. 영등할미가 세상에서 천상으로 올라갈 때 까지 사람들은
부엌에다 대나무막대기의 끝을 쪼개 받침대를 만들어 세우고 그 위에 종지를 얻고 정화수(井華水)를 올리기도 했으며 대를 꽂은 땅에는 황토를 뿌리고
동백나무가지를 꽂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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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할미는 세 사람으로 10일에는 상등할미가 올라가고 15일에는 이등할미가, 20일에는 하등할미가 상천하며 세 번째의 마지막 할미가
상천할 때는 대부분의 가정마다 제를 지내 안택(安宅)과 풍연을 기원했다. 거제를 비롯한 통영 고성 등 남해안일대 지역에서는 이때를
‘할만네’라고 부르며 영등할미가 상천하는 날 마다 팥밥을 해 먹기도 했다. 특히 마지막 영등할미가 상천하는 날 정성껏 저녁상을 차리고
소지종이를 불살라 올리는 등 분신제를 지냈으며 특히 통영지역은 명정동 충렬사 앞마당에서 합동분신제를 지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때 여자들은
동백가지를 담은 물동이에 명정샘물을 길러 머리에 이고 충렬사앞마당을 돌았으며 이때만은 유일하게 가정의 규수들과 총각들의 어울림도 허락돼 남녀가
함께 어울려 마당을 돌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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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부르던 노래들은 영등할미를 우리의 삶과 연계시켜 소박한 소원을 비는 내용이었다. “영등 영등 할마시야 한바구리만 캐어다오/ 두바구리만 캐어주소 영등 영등 할마시야/ 비나이다 비나이다 이갯물이 많이나서/ 두바구리
캐고나면 바다물이 들어오소/ 비나이다 비나이다 영등할마시 비나이다.(한국구비문학대계 8-1. 8-2 수록)” “영등 영등 할마시
한바구리만 캐어주소/ 두바구리만 되어주소/ 영등 영등 할마시/ 비나이다 비나이다/ 영등 할마시 비나이다/(영등할마시 나물캐는 민요, 제보자:
거제시 사등면 성내리 신만순, 1926년생)” “영등 영등 할마시야 봄나물을 캐러왔소/ 많이도 하지말고 적기도 하지말고/ 한바구리만 불아주소/
영등 영등 할마시야(제보자:거제시 거제면 내간리 박또악. 1910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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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나물캐던 노래는 찢어지게 가난했던 우리네 살림살이에서 아낙네들이 이른 봄 나물을 캐며 아직 자라지 않은 나물들이 제대로 캐어지지는 않고 캔
나물들이 햇빛에 시들어 오히려 줄어들 때 나물캐던 칼을 땅에 꽂아두고 그 앞에 앉아 안타까운 마음에 바구니를 돌리면서 불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들 노래마저 채록(採錄)되지 않은 채 뇌리에서 사라져 완벽한 곡조조차 알길이 없어졌고 더구나 우리사회의 민도(民度)는 정치와
산업으로 치닫으며 문화에 대한 민도까지 더욱 낮아져 할만네의 세시풍속은 전설 속으로 묻혀가고 있다. 하지만 할만네는 수많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지역민이 함께 사랑을 나누게 하고 또한 아름다운 마음씨와 숭고한 정신세계를 창조해 선조와 우리들 후손의 단결된 민족성(民族性),
또한 순하디 순한 정신세계도 이어지게 했음은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성 싶다.
사라져가는 풍습 |
머슴날 - 머슴날은 농가에서 머슴들의 수고를 위로해 주기 위해서 음식을 대접하며 즐기도록 하는 날로,
노비일 또는 일꾼날이라고도 한다. |
머슴날은 농가에서 머슴들의
수고를 위로해 주기 위해서 음식을 대접하며 즐기도록 하는 날로, 노비일 또는 일꾼날이라고도 한다. 가을 추수가 끝난 다음, 머슴들은 겨울 동안
크게 힘든 일 없이 평안하게 지냈으나 2월에 들어서면 서서히 농사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그래서 고된 일이 시작되기에 앞서 일꾼들을 하루 쉬게
하여 즐겁게 놀도록 하는 것이다.
머슴들은 농악을 울리며 노래와
춤으로 하루를 즐기는데, 주인들은 머슴들에게 돈을 주어 쓰도록 한다. 많은 노비를 거느린 대가에서는 떡도 하고 많은 음식을
준비한다.《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의하면 정월 대보름에 세웠던 볏가릿대를 내려서 그 속에 넣었던 곡식으로 송편 등의 떡을 만들 머슴들로
하여금 먹게 하였다고 한다. 크게는 손바닥만하게 작게는 계란만하게 만드는데, 모두 반쪽의 둥근 옥모양으로 한다. 콩을 불려서 속을 만들어 넣고
시루 안에 솔잎을 겹겹이 깔고 넣어서 찐다. 푹 익힌 다음에 꺼내서 물로 닦고 참기름을 발라 먹었는데, 머슴들이 이 떡을 나이 수대로 먹으면
좋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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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경상남도 의령군이나
양산군에서는 머슴날이 성인식의 의미를 지니기도 하였다. 소년들은 신체가 건강해도 어른들과 노동력을 맞교환하는 품앗이를 할 수 없었는데, 그래서
그 해에 20세가 된 젊은이는 이 날 동네 어른들과 성인 머슴들에게 술과 음식을 한턱 낸다. 그러면 그 해부터는 어른으로 취급받아 성인과
품앗이를 할 수 있게 된다. 지방에 따라서는 20세가 되어도 머슴날 성인들에게 한턱 내지 않으면 성인 취급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머슴날에
이렇게 성인식을 하지 않았을 때에는 두레가 났을 때 하는 수도 있다. 이처럼 머슴날은 평소에 대접받지 못했던 머슴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어, 그
해의 농사에 전념하도록 하려는 의도에서 여는 농경 의례의 하나인 것이다.
그러나,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변해 가면서 농촌을 떠나는 젊은이들로 인해 머슴이라는 말은 언젠가부터 우리 주위에서 사라졌으며 자연히 머슴날이라는 풍습도 우리 곁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린 잊혀져 간 풍습중 하나가 된 것이다. 또한 머슴이라는 단어도 요즈음 신세대들에게는 생소한 단어가 되어 국어사전에서나 찾아볼
수 있게 되어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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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
삼짇날 - 삼짇날은 봄을 알리는 명절이다. 이날은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온다고 하며, 뱀이 동면에서 깨 어나 나오기 시작하는 날이라고도 한다. |
삼월 삼짇날의 어원을 살펴보면
음력 3월 3일을 삼월 삼짇날이라고 한다. 옛말에 '삼질'이라고도 하며, 한자로는 상사(上巳)·원
사(元巳)·중삼(重三)·상제(上除)·답청절(踏靑節)이라고도 쓴다. 삼짇날은 삼(三)의 양(陽)이 겹친다는 의미이다. 최남선에 의하면 삼질은
삼일의 자음(字音)에서 변질되어 파생된 것이며, 상사는 삼월의 첫 뱀날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삼짇날이 언제부터 유래하였는지
자세히 전하는 바는 없다. 최남선에 의하면 신라 이래로 이날 여러 가지 행사가 있었으며, 이 풍속은 조선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고 한다. 또
옛사람들은 3월의 첫 뱀날[巳日]을 상사(上巳)라 하여 명일(名日)로 여겼으나, 그후 상사일이 들쭉날쭉함을 불편히 여겨 마침내 3월 3일로
정착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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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짇날은 봄을 알리는
명절이다. 이날은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온다고 하며, 뱀이 동면에서 깨 어나 나오기 시작하는 날이라고도 한다. 또한 나비나 새도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경북 지방에서는 이날 뱀을 보면 운수가 좋다고 하고, 또 흰나비를 보면 그해 상을 당하고 노랑나비를 보면 길하다고 한다. 이 날
장을 담그면 맛이 좋다고 하며, 집안 수리를 한다. 아울러 농경제(農耕祭)를 행함으로써 풍년을 기원하기도 한다. 전국 각처에서는 한량들이 모여
편을 짜 활쏘기를 하기도 하며, 닭싸움을 즐기기도 한다. 사내 아이들은 물이 오른 버드나무 가지를 꺽어 피리를 만들어 불면서 놀이를 즐기고,
계집아이들은 대나무쪽에다 풀을 뜯어 각시인형을 만들어 각시놀음을 즐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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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 각 가정에서는 여러
가지 음식을 장만하여 시절음식을 즐긴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동국 세시기(東國歲時記)》에 의하면 이 날 "진달래꽃을 따다가 찹쌀가루에 반죽,
둥근 떡을 만들고, 또 그것을 화전(花煎)이라 한다. 또 진달래 꽃을 녹두 가루에 반죽하여 만들기도 한다. 혹은 녹두로 국수를 만들기도 한다.
혹은 녹두가루에 붉은 색 물을 들여 그것을 꿀물에 띄운 것을 수면(水麵)이라고 하며 이것들은 시절음식으로 젯상에도 오른다."라고 하여 화전과
국수를 시절음식으로 즐겼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시절음식으로 흰떡을 하여 방울모양으로 만들어 속에 팥을 넣고, 떡에다 다섯가지 색 깔을
들여, 다섯개를 이어서 구슬을 꿴 것같이 하는데, 작은 것은 다섯개씩이고, 큰 것은 세개씩으로 하는데, 이것을 산떡이라고 한다. 또 찹쌀과
송기와 쑥을 넣은 고리떡이 있다. 또한 이날에는 부두러운 쑥잎을 따서 찹쌀가루에 섞어 쪄서 떡을 만드는데, 이것을 쑥떡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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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식(寒食 : 동지 후 105 일째 되는 날) -
한식의 어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자의(字意)대로 풀이하면 '찬밥을 먹는다'로 요약될 수 있는데, 이는 한식의 유래와 관련이
깊다. |
한식의 어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자의(字意)대로 풀이하면 '찬밥을 먹는다'로 요약될 수 있는데, 이는 한식의 유래와 관련이 깊다. 한식에 대한 기록은 우리 나라의
여러 세시기(歲時記)에 나타난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동국세 시기(東國歲時記)》삼월조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산소에 올라가서
제사를 올리는 풍속은 설날 아침, 한식, 단오, 추석 네 명절에 행한다. 술, 과일, 식혜, 떡, 국수, 탕, 적 등의 음식으로 제사를 드리는데
이것을 명절 하례 혹은 절사(節祀)라 한다. 선대부터 내려오는 풍속을 쫓는 가풍에 따라서 다소간 다르지만 한식과 추석이 성행한다. 까닭에 사방
교외에는 사대부 여인들까지 줄을 지어 끊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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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하면 당나라
정정칙(鄭正則)의 사향의(祠享儀)의 글에 이르기를 옛날에는 산소에서 지내는 제사에 관한 기록된 문헌이 없었다. 그런데 공자가 묘를 바라보며 때에
따라서 제사 지내는 것을 채택했으므로 이른바 묘제는 이에서부터 나온 것이라고 하였다." 이로 보아 한식은 중국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것이
신라시대에 우리 나라로 전래되어 우리의 풍속에 맞게 사대명절에 속하게 되었다.
한식은 글자 자의대로 더운
음식을 피하고 찬 음식을 먹어 야 한다는 속신(俗信)이 있어, 한식 또는 한식날이라 하였다. 한식의 유래에 대해 중국에서는 두 가지 설이 전해
온다. 중국 고사에 이 날은 비바람이 심하여 불을 금하고 찬밥을 먹는 습관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다른 하나는 개자추전설(介子推傳說)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국 진(晉)나라 충신 개자추(介子推)가 간신에게 몰려서 면산(綿山)에 가서 숨어 있었는데,
진 문공(文公)이 개자추의 충성을 알고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다. 도리 없이 면산에 불을 놓았으나 개자추는 나오지 않고 불에 타서 죽고 말았다.
그 후부터 그를 애도하는 뜻에서 이 날은 불 을 쓰지 않기로 하고, 찬 음식을 먹었다."
경칩(驚蟄)과 춘분(春分)을
지나면서 음력 삼월(三月)이 되면 동장군(冬將軍)이 물러가고 겨우내 얼었던 대지는 서서히 녹아 들기 시작한다. 봄은 곡식을 파종하는 시기이며
겨울 동안의 움츠림을 풀어헤치는 계절이다. 삼월의 절기로는 청명(淸明:양력 4월 5일, 6일), 곡우(穀雨:양력 4월 20일, 21일)가 있다.
이 무렵이 되면 전통사회의 농가에서는 농번기에 접어들어 농사일을 서두른다. 이 시기의 농사일로는 가래질, 논둑 다지기, 논갈이, 못자리 만들기
등을 들 수 있다. 청명 무렵이 되면 논농사의 준비작업을 하는데, 겨우내 얼었던 논둑으로 논물이 새지 않게 가래질을 한다. 가래질을 마치고
쟁기로 논갈이를 하여 못자리를 만들면 곡우 무렵이 된다. 그 사이 볍씨를 일주일 가량 물에 담가서 싹을 틔우고 가래질과 못자리를 장만하면
논농사는 반은 한 것 이라고 생각하여 한숨을 돌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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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식은 동지(冬至)로부터
105일째 되는 날이며, 어느 해나 청명 안팎에 든다. 한식은 음력 2월 또는 3월에 들기도 하는데, 2월에 한식이 드는 해는 철이 이르고
3월에 한식이 드는 해는 철이 늦다고 한다. 이에 대해 '2월 한식에는 꽃이 피어도 3월 한식에는 꽃이 피지 않는다'는 옛 사람들 의 말이
전하여 온다. 이 날 비가 오면 '물한식'이라고 하여 그 해에 풍년이 든다는 속신이 있다. 또 한식날 천둥이 치면 흉년이 들 뿐 아니라 나라에도
불행한 일이 있다고 해서 매우 꺼려 한다. 한식의 유래와 관련하여 이 날은 더운 밥을 피하고 찬 밥을 먹는다고는 하나 잘 지켜지지 않았다.
한식은 조선시대에
설날·단오·추석과 함께 사대명절(四大名節)에 속했다. 이 날 각 가정에서 는 제사음식을 마련하여 제사를 지내는데, 이를 절사(節祀)라고 한다.
또한 여러 가지 주과(酒果) 를 마련하여 성묘를 하기도 한다. 이때 조상의 묘가 헐었으면 떼를 다시 입히고 봉분을 개수하기도 하는데, 이를
개사초(改莎草)라고 한다. 그러나 한식이 음력 2월에 들면 사초를 하지만, 음력 3 월에 한식이 들면 사초를 하지 않는 것이 관례이다. 조선시대
궁중에서는 한식날이 되면 내병조 (內兵曹)에서 버드나무를 뚫어 불을 만들어 임금에게 올리고 그 불을 홰에 붙여 각 관아와 모든 대신집에
나누어주는 풍속이 있었다. 이러한 풍속은 고대의 종교적 의미로 매년 봄에 신화(新火) 를 만들어 쓸 때에 구화(舊火)를 일체 금지하던
예속(禮俗)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있어서 한식은 조상을 위한 제례와 환절기 불조심을 위한 금화(禁火)의 의미가 강하다.
사라져가는 풍습 |
단오 - 단오는 일명 수릿날[戌衣日·水瀨日],
천중절(天中節), 중오절(重午節), 단양(端陽)이라고도 한다. 단오의 '단(端)'자는 첫번째를 뜻하고, '오(午)'는 다섯의 뜻으로 통하므로
단오는 '초닷새'를 뜻한다 |
단오는 일명
수릿날[戌衣日·水瀨日], 천중절(天中節), 중오절(重午節), 단양(端陽)이라고도 한다. 단오의 '단(端)'자는 첫번째를 뜻하고, '오(午)'는
다섯의 뜻으로 통하므로 단오는 '초닷새'를 뜻한다. 중오는 오(五)의 수가 겹치는 5월 5일을 뜻하는 것으로 양기가 왕성한 날로 풀이된다.
음양사상(陰陽思想)에 따르면 홀수[奇數]를 '양(陽)의 수' 라 하고, 짝수[隅數]를 '음(陰)의 수' 라 하여 '양의 수'를 길수(吉數)로
여겼다. 예컨대 전통사회의 절일(節日)로서 설(1월 1일)·삼짇날(3월 3일)·칠석(7월 7일)·중구(9월 9일) 등이 있는데, 이러한 속절은
'양수(陽數)'를 '길수(吉數)'로 여기는 기수민속(奇數民俗)들이다. 이러한 기수민속은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한편 수릿날이라고 부르게 된
유래는 조선 후기에 간행된《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5월조의 기록에 전한다. 그 기록에 의하면 이 날 쑥떡을 해 먹는데, 쑥떡의 모양이
수레바퀴처럼 만들어졌기 때문에 '수리'란 명칭이 붙었다고 한다. 또 수리란 고(高)·상(上)·신(神) 등을 의미하는 우리의 고어(古語)인데,
'신의 날', '최고의 날'이란 뜻에서 불리워졌다고도 하며, 일설에 의하면 단오의 유래와 더불어 중국의 초(楚)나라 사람 굴원(屈原)이
수뢰(水瀨)에 빠져 죽었다 하여 수릿날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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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오의 유래는 중국 초나라
회왕(懷王)때에 비롯되었다고 전한다. 굴원(屈原)이라는 신하가 간신들의 모함에 자신의 지조를 보이기 위하여 멱라수[汨羅水]에 투신자살하였는데,
그 날이 5월 5일 이었다. 그후 해마다 굴원을 위하여 제사를 지내게 되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단오가 되었다고 한다.
입하(立夏)와 소만(小滿)을
지나 음력 오월(五月)이 되면 태양의 열기가 뜨거움을 더해 간다. 오월의 절기(節氣)로는 망종(芒種)과 하지(夏至)를 들 수 있다. 절기는
태양의 운행에 기초를 둔 것이며, 농사력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예컨대 망종은 보리나 벼와 같이 까끄라기가 있는 곡식을 거두거나 모를 내는
절기이며, 하지는 낮 시간이 가장 긴 절기를 말한다. 이 시기의 농사력은《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오월조의 농사관련 부분에 잘
나타난다.
문앞에 터를 닦고
타맥장하오리라 / 도리깨 마주서서 짓내어 두드리니잠농을 마를 때에 사나이 힘을 빌어 / 누에섭도 하려니와 고치나무 장만하소 오월오일 단오날
물색이 생신하다. / 외밭에 첫물따니 이슬에 저 뮹만潁措齋穗? 자네하소 논심기는 내가 함세 / 들깨모 담배모는 머슴아이 마타내고 가지모
고추모는 아이딸 너 하여라. / 맨드람 봉선화는 네 사천 너무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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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은 여름철 세시풍속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데, 대표적인 명일로는 5월 5일 '단오날'을 들 수 있다. 단오날은 고려시대의 9대 명절에 속하였고, 조선시대에는 설날,
한식, 추석과 함께 4대 명절에 속하였다. 단오는 일년 중에서 가장 양기가 왕성한 날이라 해서 큰 명절로 생각하여 여러가지 풍속과 행사가
행해졌다. 전통사회에서 농가의 부녀자들은 '단오장(端午粧)'이라 하여 창포뿌리를 잘라 비녀로 만들어 머리에 꽂아 두통과 재액(災厄)을 막고,
창포를 삶은 물에 머리를 감아 윤기를 더하게 하였다. 또 단오날 새벽 상추밭에 가서 상추잎에 맺힌 이슬을 받아 분을 개어 얼굴에 바르면 버짐이
피지 않고 피부가 고와진다고 한다. 남자들은 단오날 창포뿌리를 허리에 차고 다니는데, 이는 벽사의 효험을 기대하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단오날 중에서도
오시(午時:오전 11시∼오후 1시)가 가장 양기가 왕성한 시각으로 생각하여 전통사회의 농가에서는 약쑥, 익모초, 찔레꽃 등을 따서 말려 두기도
한다. 말려둔 약쑥은 농가에서 홰를 만들어 일을 할 때에 불을 붙여놓고 담뱃불로도 사용하기도 한다. 또 오시에 뜯은 약쑥을 한다발로 묶어서 대문
옆에 세워두는 일이 있는데, 이는 재액을 물리친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 농가에서는 대추풍년을 기원하기 위하여 대추나무 가지 사이에 돌을 끼워
놓는 습속이 있는데, 이를 '대추나무 시집보내기'라 한다. 단오의 대표적인 놀이로는 그네뛰기와 씨름을 들 수 있다. 그네뛰기는 단오날 여성들의
대표적인 놀이이다. 조선 후기의 화가 신윤복의 '단오풍정'을 보면 한복을 차려 입은 부녀자들이 치마폭을 바람에 날리며 하늘로 치솟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와 쌍벽을 이루는 대표적인 남성들의 놀이로 씨름대회가 있다. 씨름대회에서 이기는 사람에게는 관례로 황소를 상품으로 주는데,
경기방식은 요즘과 같이 토너먼트식이 아니라 도전자들을 모두 이겨 상대자가 없게 되면 우승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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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지역민들의 일체감을
고취시키는 의례로서 '단오제'와 '단오굿'을 들 수 있다. 예컨대 강원도 강릉지방의 강릉단오굿, 경남 영산의 문호장굿, 경북 자인의 한장군놀이
등이 있는데, 이러한 의례들은 각종 놀이 및 행사들과 접목되어 지역민의 축제 형식을 띠고 있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5월
조의 기록에 의하면 "궁중의 내의원(內醫院)에서는 옥추단(玉樞丹)과 제호탕(題 湯)을 만들어 왕에게 진상하였다.", "공조(工曹)에서는
단오선(端午扇)을 만들어 왕에게 진상하였다."는 궁중풍속이 전한다. 제호탕은 한약재를 꿀에 섞어 달인 약으로 더위가 심한 여름철 건강을 유지하는
데 사용하였으며, 옥추단은 일종의 구급약으로 여름철 곽란이 났을 때 물에 타서 마신다. 부채는 더위를 식히기 위한 도구로 단오 무렵이면 더위가
찾아오니, 이날 부채를 만들어 왕에게 진상한 것을 '단오선'이라고 하였다. 전통사회에서 단오의 세시풍속은 더운 여름철의 건강을 유지하는 지혜와
신체단련을 위한 놀이, 재액을 방지하기 위한 습속, 풍농을 바라는 의례가 주를 이루고 있다.
단오의 시절음식으로는 수리떡과
약떡이 있다.《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의 기록에 의하면 "이 날은 쑥잎을 따다가 찌고 멥쌀 가루 속에 넣어 반죽을 하여 초록색이 나도록 하여
이것으로 떡을 만든다. 그리고 수레바퀴 모양으로 빚어서 먹는다."라는 풍속이 전한다. 이것이 바로 수리떡을 가리키는 것이다. 약떡은 전라남도
지역에서 전하는 시절음식이다. 전라남도 지역에서는 떡을 하는 예가 잘 없으나, 떡을 할 경우에 5월 4일 밤 이슬을 맞혀 두었던 여러 가지 풀을
가지고 단오날 아침에 떡을 해 먹는데, 이를 약떡이라고 한다. 앵두가 제철인 단오무렵이면 앵두화채를 만들어 먹기도 하며, 아이들의 주전부리로
옥수수나 쌀 등을 튀겨 주기도 한다. 또 이 날은 새 쑥을 넣어 만든 떡으로 차례를 지내는 것이 상례이다. 제주도에서는 보릿가루에 누룩을 썩어서
부풀게 만든 기루떡과 곤떡·새미떡·인절미·표적·율적·해어·실과 등을 제물로
사용한다.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