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하나님의 영으로 거듭난 사람의 영(2-2)/ 영 안에서 경배함(요 4:24)
<죽었었으나 이제 다시 살아남>
에베소 2장 1절은 “또 그분께서 범법과 죄들 가운데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의 몸이 죽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육체적으로 말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생생하고 활동적이다.
또한 이것은 우리의 혼, 곧 생각, 감정, 의지가 죽은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혼 안에서 우리는 여전히 생생하다. 이것은 우리의 영이 타락으로 인하여 죽은 것이다. 아담의 범죄 이래, 우리 인간은 죄와 타락이라는 DNA가 유전되면서 영이 죽은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었을 때 신성한 영인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의 영을 소생시키고 다시 살아나게 하기 위하여 우리의 영 안으로 들어왔다. 하나님은 우리의 죽었던 영을 다시 살아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 자신을 우리의 영 안으로 넣으셨다.
이제 창조되지 않은 이 신성한 영이 우리 사람의 영 안에 있고 이 두 영이 하나로 연합되었다(고전 6:17). 이것은 단지 소생시키는 것일 뿐만 아니라 거듭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소생시키실 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자들을 거듭나게 하신다. 이제 우리의 영은 하나의 새로운 출발을 갖는다.
<영 안에서 경배함(요 4:24)>
요한복음은 우리에게 새로운 출생 후에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경배(예배, 접촉)하는가를 배워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우리는 그분을 경배할 때 반드시 영 안에서 경배해야 한다.
이것은 성령 안에서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람의 영 안에서 경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경배하는 자가 영 안에서 진실함으로 경배할지니라”(요한 4:24). 무엇이 진실인가? 진실은 실재(reality, 實在)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진실이란 사람의 영이 하나님을 접하는 것이다. 영이 하나님을 접하지 못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실재란 그림자 모조품의 반대말이다. 하나님과 관계되는 모든 것은 영 안에 있다. 진리의 영은 곧 실재의 영이다.
따라서 영적 실재는 성령 안에 있게 마련이다. 오직 성령 안에 있는 것만이 참이며, 이는 모든 영적인 것이 성령 안에서 자라나기 때문이다. 경배(예배, 접촉)의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과 가지는 모든 종류의 관계를 포함한다.
그분께 무릎을 꿇고 절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경배란(예배하는 것=접촉하는 것) 하나님께 영으로 기도하고, 영으로 찬양하고, 온전히 의지하고, 교통하고, 대언을 포함하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하나님과 접촉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경배는 모든 것을 포함한 문제로서 하나님을 접촉하려면 우리는 반드시 영 안에 있어야 한다. 구약의 하나님은 (1)하나님께서 자신의 처소를 위해 선택한 곳(신 12:5, 11, 13-14, 18)에서, (2)제물들(레 1-6장)로 경배를 받으셔야 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처소를 위해 선택하신 곳은 오늘날 하나님의 처소가 있는 사람의 영이다(엡2:22). 또한 이 제물들은 그리스도를 예표하는데,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경배할 때에 드린 모든 제물의 성취이자 실재이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 하나님을 영 안에서 진실함으로 경배하라고 가르쳤을 때에, 그분은 그녀가 어떤 특정한 장소가 아닌 그녀의 영 안에서, 또한 제물들이 아닌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 하나님을 접촉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신 것이었다.
여기서 진실함이라는 인간 미덕을 산출하는 실재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셨으므로(요4:25-26), 모든 그림자와 예표는 지나갔다. 진실함은 하나님께 대한 참된 경배를 위하여, 신성한 실재가 사람에게 참됨이 되고 성실함이 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부도덕한 사마리아인 경배자의 위선과 반대된다(요 4:16-18). 하나님께 경배하기 위한 구약의 모든 제물의 실재이시고(요1:29; 3:14), 믿는 이들이 참여하고 마신 생수의 원천, 곧 생명 주시는 영(요 4:7-15)으로서 믿는 이들 안에 실재가 되시는 분, 곧 그리스도이시다.
경배하는 것은 접촉하는 문제이다. 우리가 마음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우리는 반드시 영을 사용하여 그분을 접촉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접촉는가? 우리는 단순하게 우리의 영을 열어 주님의 말씀을 접촉하는 것이다.
주님은 성경 안에 계시고, 그분은 또한 영이시다. 게다가 그분은 구원받은 우리가 우리의 영 안에 그 영(성령)을 가질 수 있도록 우리 영을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영으로 성경을 접촉해야 한다.
우리의 영을 사용하여 성경을 받아들이고, 말씀을 음식으로 취하여야 한다. 생각을 사용하여 성경을 받아들일 때 성경은 선과 악의 지식나무가 된다. 마찬가지로 성경을 영을 사용하여 받아들일 때 그것은 생명나무가 된다.
곧 그것은 영을 사용하는지 아니면 생각을 사용하는지에 달려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영이요 음식이다. 생명의 영이신 주님께서 우리의 영 안에 들어오시어 우리가 우리의 영으로 그분을 접촉할 수 있도록 하셨다.
성경을 접촉하기 위해 우리의 영을 여는 한, 성령은 움직이실 것이고 성경을 우리 안으로 전달하실 길을 얻으실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성경과 성령이 안팎으로 서로 통하게 된다. 기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누림이 있게 된다.
그리스도는 생명주는 영으로 우리 영 안에서 실재가 되시고 이 실재는 결국 믿는 이들에게 참됨과 성실함이 되어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도록 한다. 영 안에서 성령에 의해 하나님을 실재적으로 알고 드리는 예배만이 참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4장 24절의 강조점은 성령에게 있다. 왜냐하면 성령에 의해 실재가 생기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 성경이 참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다. 그것은 단지 실재를 말할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영으로 예배드려야 한다.
영에서 나온 것이 실재요 영에서 나오지 않은 것은 실재가 아니다. 진실이란 무엇인가? 영이 하나님과 접촉할 때 진실이 있다. 왜냐하면 영에 속한 것은 참이지만 영에 속하지 않은 것은 참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의 영이 성령 안에 있는 실재를 접할 때, 그는 곧 생명에 접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적 실재란 살아 있고 생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소위 영적 예배라 불리는 거창한 예배도 아멘의 화답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새벽기도 시간에 예배당 한 구석에서 조용히 하나님께 예배하는 늙고 배운 것도 없지만, 온 존재가 평화와 빛으로 덮여있는 미소 띤 자매를 발견하고서, 아멘으로 화답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경우에 당신이 진실, 곧 실재를 접하였기 때문이다.
성령 안에 있는 영적 실재를 접한 사람은 역시 영적 실재를 접한 다른 사람을 만날 때마다 그 마음속으로부터 아멘으로 화답하게 된다(시편 42:7).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하도소이다”. 이 말씀이 그 말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사람의 영 안에 있지 않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교리다. 이 부분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열려있지 않다. 이것이 오늘날의 가련한 교회 상황이다. 그러므로 교회 생활의 회복을 위해서는 사람의 영의 회복이 필수적이다.
<소생시키고 거듭나게 하는 내주하는 영>
이 거듭남에는 세 단계가 있다. 첫째는 신성한 영이 우리의 죽었던 영을 소생시키기 위하여 우리의 영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 신성한 영은 우리의 영 안으로 그리스도, 곧 하나님을 넣어준다. 이것이 거듭남이다.
이제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내주함이다. 거듭남에 의해 우리의 영은 소생될 뿐만 아니라 거듭나고 내주함을 갖는다. 이것이 영생의 원리이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소유할 뿐 아니라 그 생명을 소유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할 뿐만 아니라 성령이신 그분 자신의 임재를 갖는다. 그분의 생명의 능력이 우리를 소생시키며, 그분의 생명 자체가 우리를 거듭나게 하고, 그분의 임재가 우리 영 안에 내주한다.
우리는 우리 영 안에 소생시키는 영과 거듭나게 하는 영과 내주하는 영을 가지고 있다. 이제 우리는 영 안에 있는 그 영, 곧 성령으로 주를 섬겨야 하며,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며, 그분의 일을 사역해야 하며, 그분과 상호 교통해야 하고, 다른 사람을 도와야 하며, 복음을 전해야 한다.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