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석사 조사당 [浮石寺祖師堂]
종 목 |
국보 19호 |
명 칭 |
부석사조사당 (浮石寺祖師堂) |
분 류 |
사찰건축 |
수 량 |
1동 |
지정일 |
1962.12.20 |
소재지 |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8 부석사 |
시 대 |
고려시대 후기 |
소유자 |
부석사 |
관리자 |
부석사 |
봉황산 중턱에 있는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들어 화엄의 큰 가르침을 펴던 곳이다. 『삼국유사』에 있는 설화를 보면,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그를 흠모한 여인 선묘가 용으로 변해 이곳까지 따라와서 줄곧 의상대사를 보호하면서 절을 지을 수 있게 도왔다고 한다. 이곳에 숨어 있던 도적떼를 선묘가 바위로 변해 날려 물리친 후 무량수전 뒤에 내려 앉았다고 전한다. 그래서인지 무량수전 뒤에는 ‘부석(浮石)’이라고 새겨져 있는 바위가 있다. 또한 조사당 앞 동쪽 처마 아래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는 의상대사가 꽂은 지팡이였다는 전설도 있다. 조사당은 의상대사의 초상을 모시고 있는 곳으로 고려 우왕 3년(1377)에 세웠고, 조선 성종 21년(1490)과 성종 24년(1493)에 다시 고쳤다. 앞면 3칸·옆면 1칸 크기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를 기둥 위에만 설치한 주심포 양식이며, 건물 자체가 작은 크기이기 때문에 세부양식이 경내에 있는 무량수전(국보 제18호)보다 간결하다. 앞면 가운데 칸에는 출입문을 두었고 좌우로는 빛을 받아들이기 위한 광창을 설치해 놓았다. 건물 안쪽의 좌우에는 사천왕상·보살상 등 고려 후기에 그려진 벽화가 있었다. 이것들은 고려시대 회화 가운데 매우 희귀한 것으로, 고분벽화를 제외하면 가장 오래된 채색 그림 중 하나였다. 지금은 보호각을 지어 보관하고 있으며, 원래 벽화가 있던 자리에는 본떠 그린 그림을 놓아 당시 벽화의 모습을 잘 전해주고 있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9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이며 맞배지붕 주심포계( 柱心包系) 건물이다.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국사( 義湘國師)의 초상화를 모시고 있다. 건물은 석재( 石材)를 난적( 亂積)한 낮은 기단( 基壇) 위에 서 있으며, 중앙에 석계( 石階)를 두었다. 고려시대의 다른 건물에 비하면 기둥에 나타난 배흘림이 약화되었고 기둥머리에 헛첨차를 끼워 두공( 枓栱 )을 받치고 있다. 주두( 柱頭)와 소루( 小累)에는 굽받침이 없고, 외목도리( 外目道里) 밑의 장설( 長舌)도 단장설( 短長舌)이 아닌 통장설로 되어 있어 조선 전기의 주심포계 건물과 같은 점이 많다. 앞면 가운데 칸에는 출입문이 있으며, 좌우로는 창을 설치해 놓았다. 1916년의 수리공사 때 발견된 묵서명( 墨書銘)으로 미루어 건립연대는 1377년(고려 우왕 3)으로 추정되며, 조선 성종 21년(1490)과 성종 24년(1493)에 다시 고쳤다. 또한 이 건물 내부에는 보살상· 사천왕상( 四天王像) 등이 그려진 벽화(국보 46)가 있었는데, 현재는 이 벽면 전체를 그대로 떼어내어 안전장치를 한 후에 부석사 무량수전( 無量壽殿) 안에 보관하고 있다.
부석사는 676년(문무왕 16) 의상(義湘)국사가 왕명으로 창건한 사찰이다. 이절의 본전인 무량수전은 1916년 해체 수리 시 발견된 묵서명에는 1376년에 재건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다. 부석사에는 선묘(善妙)낭자와 부석(浮石)에 얽힌 전설이 있다. <삼국유사>에 있는 설화를 보면,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그를 흠모한 여인 선묘가 용으로 변해 이곳까지 따라와서 줄곧 의상대사를 보호하면서 절을 지을 수 있게 도왔다고 한다. 이곳에 숨어 있던 도적 떼를 선묘가 바위로 변해 날려 물리친 후 무량수전 뒤에 내려앉았다고 전한다. 그래서인지 무량수전 뒤에는 ‘부석(浮石)’이라고 새겨져 있는 바위가 있다. 의상대사는 태백산맥 일대의 대찰들을 대부분 창건한 것으로 전하여지는데, 대표적인 사찰로써 부석사(浮石寺), 봉정사(鳳停寺), 불영사(佛影寺) 등을 들 수 있다.
부석사는 깊은 산중임에도 앞이 터진 넓은 형국의 구릉지에 입지한다. 국(局)의 주축이 정남향이 아니고 일직선이 아니어서 사찰 전체의 주축도 중간에 17˚ 정도 꺾어진다. 배치 뿐 아니라 공간 구성 방법도 지형을 최대한 이용한 전형적인 산지사찰이다. 일제 때 발견된 묵서명에 의하면 조사당의 건립연대는 1373년(선광 7), 1377년(홍무 10)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조사당 어간 도리에 명기된 조사당 중창기에는 홍치 3년 경술(弘治)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1493년(성종 24)에 개체하였고 1573년(선조 6)에 서까래를 다시 걸었다고 하지만, 정확한 건립연대에 대해서는 확실치 않다. 조사당(祖師堂)은 고승대덕의 영정을 모시는 전각으로써, 부석사 조사당에는 개창자인 의상의 진영이 봉안되어있다. 조사당의 내부바닥은 전돌을 깔고 정면 어간에 쌍여닫이문을 내고 좌우협간에 광창을 두었다. 평범한 맞배집으로 겹처마이고 7량집이지만 규모가 작아서 서까래를 장, 단연으로 구분하지 않고 하나의 통 서까래를 쓴 점과 4분변작법으로 가구한 점등은 재치 있는 처리이며, 부재를 다듬는데 있어 뛰어난 솜씨를 보여주는 것이다. 본 조사당의 건축기법은 도갑사 해탈문(道岬寺 解脫門)이나 송광사 국사전(松廣寺 國師殿)과도 유사한 점도 있지만 나름대로의 독특한 수법이 더욱 이채로운 건물이다. 조사당 전면 처마 아래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는 의상대사가 꽂은 지팡이였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으며, 건물 안쪽의 좌우에는 사천왕상·보살상 등 고려 후기에 그려진 벽화가 있다. 이것들은 고려시대 회화 가운데 매우 희귀한 것으로, 고분벽화를 제외하면 가장 오래된 채색 그림 중 하나였다. 원본은 보호각에 보관되고 있으며, 지금의 그림은 본떠 그린 그림으로써, 당시 벽화의 모습을 잘 전해주고 있다. 부석사 조사당은 무량수전과 더불어 몇 안 되는 고려시대의 건축문화재로써, 간결한 구조를 보여주고 있으며, 첨차 밑 단면을 2단으로 사절한 포작기법은 아직까지도 그 예를 찾아보지 못할 정도로 건축사적으로 중요한 건축 문화재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