濟州郡守 尹元求氏논 經費가 不足호야 停學之境을 當혼 私立義興普遞學校를 㪅히 成立하기 爲호야 有志人士롤 熱心勸勉호야
完全成立케 호얏더라
* 㪅興 (고칠 경,일으킬 흥) : 고쳐 일으키다
㪅히 : 새로이
1. 서설
제주도 교육사, 제주도지등 제주지역의 현대 문헌들은 구한말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에 가서 근대문물을 견문한 한석봉이 의연금을 모아 1906.4 조천리 연북정에 의흥학교를 설립하여 일본인 교사를 두고 일본어, 산수, 역사 등을 가르치다 재정난으로 폐교된 것으로 기술하고 의흥학교가 다시 재건되었던 사실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항간에서도 이를 거의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다분하다.
그러나 의흥학교에 대한 제주지역의 현대 문헌들의 기술은 그 근거를 알 수 없을 뿐더러 잘못된 부분들에 대해서는 불가피 지적하지 않을 수 없고, 크게 놓치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보완하지 않을 수 없다.
다른 글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필자는 본시 근거없는 추론이나 단정적으로 기술하는 재주가 없다.
2. 사립 의흥학교의 개설과 휴교
가. 개설 시기와 장소
제주도 교육사등은 의흥학교가 1906.4. 조천리의 연풍정에서 한석봉이 개설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있다.
여기서 필자가 말하는 근거는 당시의 사료를 말한다. 수십년이 지난 후 어느 누군가가 써놓은 글을 근거로 삼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석봉은 함덕리 출신으로 제주목 주사를 지냈다.(대한제국관보 제2197호 光武 6년 5월 12일. 月曜 1902년 05월 12일)
당시 발행된 대한협회의 월회보에는 의흥학교를 韓南極이 세운 것으로 기술하고 있으나( 1908.10.25 발행 대한협회보제7호는 대한협회제주군지회의 회무소식을 전하면서 지회평의회가 " 韓南極氏의 設立이얏다 廢止된 義興學校를 本會에 擔任호야 維持호기로 可決되야 渙散혼 學徒를 다시 上學케 호다"고 하였다).
한석봉과 한남극은 동일한 인물로 볼 것이다(전주사한공석봉공덕비.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당시 언론(대한매일신보 1908.10.6.義敎復完)은 의흥학교가 몇몇사람에의하여 설립된것으로 보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석봉은 설립대표자로 볼 것이다
그런데 의흥학교는 1906년 4월이 아니라 1908년 1월~2월에 창립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황성신문 1908.10.6. 의흥경흥,대한매일신보 1908.10.6.義敎復完). 그러나 연북정을 학교로 하였다는 것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연북정을 조천진(오늘날 일종의 해안 방어 부대)의 객사로 보는 견해도 있으 나 정자로 봐야한다. 정자에서 거의 매일 장시간 동안 아동들에게 수업을 하였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아래 사진은 1910년대 조천진의 연북정 모습이다(1913.7.18자 매일신보는 이와 동일한 사진을 게재하고 산저포 즉 오늘날의 제주항으로 설명하고 있으나 잘못된 것이다) 저런 높은 곳에 밭에 검질메레 가야할 아이들을 불러 모아 이녁네 어멍 아방 꽝 꺽어지게 고생허는 모습을 Ocean View 하면서 수업을 했다고 ?
나. 설립자 한석봉이 신사유람단원이었다는 것은 허구이다.
한석봉의 생몰년은 1865년∼1952년이다. 그리고 대한제국의 신사유람단 파견은 1881년이었고 그 인원은 전체 12개 반 62명으로 각 반별로 반장 1명과 통역사, 하인으로 구성되었다. 12명의 반장중 5명이 승지였다. 당시 한석봉의 나이 16세였다. 16세의 한석봉
이 참여했다 ? 반장으로 ? 통역사로 ?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닌 하인으로 ? 불행히도 62명의 명단 중에 한석봉의 이름은 들어있지 않 다.
그동안 우리는 아무런 근거도 없는 역사 소설을 마치 사실인 것 처럼 미혹에 빠졌던 것은 아닐까 ?
여기서 다시금 또 제주도 현대사 기록에 대한 제주출신 언론인 김종민의 지적을 되새기지 않을 수 없다.
언론인 김종민의 일갈,
“그 어떤 글도 그냥 믿으면 안 된다. 다른 글을 인용했다고 해서 책임을 피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동안 제주현대사를 공부해온 필 자의 경험에 의하면, 불과 50년이 안된 일에도 너무나 오류가 많아 일일이 사실관계를 검증해야 하는 게 우리나라 기록의 현실이 다. (”어떤 풍광보다도 더 아름다운 사람이 있구나“”
http://www.jejusori.net/?mod=news&act=articleView&idxno=167897“)
다. 한석봉 설립 의흥학교의 폐교 ? 휴교 ?
제주교육사등 현대의 제주지역 문헌들은 의흥학교가 져저운제로 폐교하였다고는 하면서도 그 시기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한석봉이 설립한 의흥학교는 폐교되었던 것이 아니라 재정문제로 1908년 8월 부터 휴교상태에 들어갔다.(황성신문
1908. 10. 6.의흥경흥,대한매일신보 1908.10.6.의교복완)
3. 의흥학교의 재건
이에 따라 당시 대한협회 제주군지회 조천리 회원들이 학교 운영자금을 공동으로 출연하여 의흥학교를 계속 시키되 학교기본금조합(오늘날의 학교 재단법인)사정이 극히 부실한 상태이기 때문에 회원 金厚植, 宋鍾曉, 金洪培, 金斗植등 4명이 발기인이 되어 동리 내외 유력인사들의 월연금(月捐金, 일종의 월부금 즉 월회비)과 기부금으로 운영비에충당키로 함으로써 학교가 재개되기에 이르렀다.(황성신문1908.10.6 의흥경흥)
이때 윤원구 제주군수도 10원을 출연하였다.
4. 濟州郡 新左面 朝天里 私立義興普通學校 趣旨書
김후식등 4명이 발기인이 되어 휴교상태인 의흥학교를 재건하면서 제정한 사립의흥보통학교의 취지서는 다음과 같다. 신규 설립취지문이 아니라는 점에 특히 유의할 필요가 있다. 참고로 본 취지서는 필자가 오래 전에 수집한 것으로, 아직 제주도내 문헌에 소개되지 않았다
해설은 생략한다.다만, 당시 대개의 사립학교들은 국민개화와 국권수호라는 양대 목표를 기치로 하였다는 점이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에는 모든 게 일제의 철저한 감시와 통제 속에서 식민정책의 산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맹목적이고 단편적인 반일사관으로는 역사를 올바로 보기 어렵다
이 취지문은 이보다 앞서 제주최초의 중등학교인 사립제주의신학교(현재 제주고등학교)를 설립한 당시 제주군수 윤원구의 의지도 상당부분 반영된 것으로 볼 것이다. 윤원구 군수는 최원순 판사 다음으로 당시로서는 거액인 10원을 출연했는뎌, 취지문도 안보고 돈만 내지는 않지않겠는가 ?
私立義興普通學校 趣旨書
大矣哉라 敎育也여
人而不學이면 與蠢蠢獸虫으로 何以異哉리오
方今列强이 砲烟丸雨로 弱肉强食ᄒᆞ니
此果何等時代乎아
噫라 我韓은 雖稱君子古國이나
末流之弊에 民國不幸이 於斯極矣니
當用何許方策이라야 挽回自由之權哉아
決不過敎育貳字니 何者오
使我貳千萬同胞로 各盡其敎育ᄒᆞ야
祖國精神을 灌注於人人腦髓
則可以進步文明之域ᄒᆞ고 凌駕列强之間ᄒᆞ야
堂堂國旗ᄅᆞᆯ 高揭于仙李樹下ᄒᆞ고
愛國歌ᄅᆞᆯ 拍手齊唱ᄒᆞ리니
方其時ᄒᆞ야 國民義務ᄅᆞᆯ 孰不欽慕哉아
本州ᄂᆞᆫ 海셔小島오 朝天島中僻村이라
人民未開ᄅᆞᆯ 何以贅說이리오
然ᄒᆞ나 亦爲國民之壹分子라 不受敎育이면
愛國思想이 感發無日故로 迺設壹塾ᄒᆞ고
名之以義興者ᄂᆞᆫ 盡吾義務ᄒᆞ야
觀感興起之謂也니
惟願靑年俊秀ᄂᆞᆫ 晝屑勤孜ᄒᆞ고 熱心受業ᄒᆞ야
自由活動則於國有補가 豈無인가
山不讓士ᄒᆞ야 能成其大之日也哉아
發起人 金厚植 宋鍾曉 金洪培 金斗植
(대한 매일신보1908.11.29)
국역은 다음과 같다
국역은 존경하는 김순택 님(제주고 51회졸, 전 세종의원 원장, 제주군 중면 면장-오늘날 북제주군 통합전의 제주시장-, 제주시 영평동 보성의숙 설립대표 겸 숙장 김기수의 2세손)께서 수고해 주셨다.
사립의흥보통학교 취지서
위대하도다, ‘교육’이여.
사람으로서 배우지 아니하면 꾸물거리는 저 짐승이나 벌레와 무엇이 다르리오.
방금 열강이 폭탄세례로 약육강식하고 있으니
이것이 과연 어떠한 시대인가.
슬프다, 우리 대한제국은 비록 군자의 옛 나라라 하나
시대말기(1890년대)의 말기적인 폐해에 들어 나라의 불행이 이처럼 극에 달하였으니
마땅히 어떤 방책을 써야만 자유권을 만회하겠는가
결국 ‘교육’이라는 두 글자에 불과하니 어찌 할 것인가,
우리 2천만 동포로 하여금 각각 그 교육을 다하도록 하여
조국정신을 사람사람 뇌수에 흘러들어가도록 한다면
가히 문명지역으로 진보하고 열강 사이를 넘어서
당당하게 국기를 이왕조(仙李) 오얏나무 아래에 높이 게양하고
애국가를 박수치며 제창할 것이니
※ 여기에서 "오얏나무 아래에"는 李(오얏나무 이)씨왕조. 즉 대한제국 황제 치하를 뜻한다.
바야흐로 그 시기라 국민의 의무를 누가 기쁜 마음으로 따르지 않겠는가,
본주는 바다의 작은 섬이요 조천은 섬 가운데 벽촌이라
인민의 미개함에 어찌 군말을 붙이리오,
그러나 또한 국민의 한 분자라도 교육을 받지 못 하면
애국사상을 느껴 발휘할 날이 없으므로 이에 의숙(작은 학교) 하나라도 세워서
의연(義捐)에 찬동하는 이들은 각자 제 의무를 다할 것이니
흥기하는 눈으로 보고 느낌을 말하노니
오직 준수한 청년을 원한다면 밤낮 부지런하고 정성으로 열심히 수업을 받아
자유활동을 하게 되면 어찌 나라에 도움이 없겠는가
산만큼 사양하지 아니한 선비라면 능히 위대한 그 날을 이루리라
발기인 김후식 송종효 김홍배 김두식
5. 學費 捐助錄(출연내역)
의흥학교는 김후식등을 주축으로 재건하면서 동리 내외 유력인사들의 월연금(月捐金, 일종의 월부금 즉 월회비)과 기부금으로 운영비에충당토록 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주목되는 점은 당시 제주재판소 판사 최원순과 사립제주의신학교 설립을 주도한 윤원구 제주군수가 거액을 출연했다는 점이다. 특히 윤원구 군수의 출연은 타인들의 참여를 독려하는 역할을 했을 것이 분명하다.
윤원구 군수는 재임중 각리를 순행하면서 학교 설립을 독려하였다( " 本郡守尹候元求莅氏三載에 躬行各里호야 勸農桑 勸學校에 治績이 隆隆호니 民歌五袴호고.... " 대한매일신보 1909.1.13)
그런데 당시 제주에 유배중이던 개화파의 거두 박영효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박영효는 사립제주의신학교, 신성여학교는 물론 함덕리 덕창학교(액수 미상) 설립시에도 다소나마 출연했었다.
▲ 月捐秩(월부금)
○ 金厚植 金洪培 金斗植 각 壹圜 五십 錢
○ 金秀鎬 臺圜 廿 錢
○ 金煕舜 七십 錢
○ 金膺中 黃祐邦 金時學 黃鎭슈 李仁汶 金宣鎬 金錫敦 각 壹圜
○ 宋文玉 宋鍾曉 金煕樹 金彦洙 金祉洙 金禧植 韓셕範 金仁準 金煕祚 金升植 李龍九 각 五십 錢
○ 張海松 金淳用 각 四십 錢
○ 李海元 三십 錢
○ 宋升玉 金희庸 각 십錢
▲寄附秩(찬조금)
○ 判事 崔元淳 七십圓
○ 郡守 尹元求 拾圜
○ 金宇培 金近植 韓石鎬 宋海玉 각 五圜
○ 金相鎬 四圜
○ 文秉順 金建鎬 金희龍 金南赫 金淳鎬 金允植 安道汝 洪鍾煥 각三圜
○ 金平彦 貳圜
○ 金和順 尹性大 金俊植 金應龍 尹信鳳 金日根 李道吉 각 壹 圜
濟州義興學校 告白
(대한매일신보 1908.11. 29)
6. 의흥학교의 폐교 , 그리고 근대 교육의 침체
당시 대한제국 정부는 근대교육의 확대를 위하여 관립 제학교를 설립하는 외에 사립학교의 설립을 장려하는 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이에 학부의 인가없이도 각종 형태의 사립학교 설립이 가능해지자 군소 사립학교들이 우후죽순처럼 설립되면서 부실운영되는 사례도 적지 않았고, 일부 학교는 병식 훈련을 실시하거나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창가와 교과서로 구국교육을 실시하고, 학교간 또는 학생간 연대를 꾀하는 등 구국운동적 차원으로 발전되는가 하면 정치교육장화하기도 했다.
이에 통감부 통제하에 있던 학부는 1908년 8월 사립학교령(시행 1908.10.1)을 제정 공포하고 사립학교를 정비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안녕질서를 문란케 하거나 풍속을 괴란할 우려가 있을 경우 등에는 학교를 폐쇄할 수 있게 했다.
또한 1909년 2월 <기부금품모집취체규칙>을 공포하여 기부금품을 모집할 때에는 관할 경찰서와 지방장관을 경유, 내부대신과 주무대신의 허가를 받게 하고 허가를 받더라도 내무대신은 언제든지 이를 정지 또는 금지할 수 있게 하여 사실상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당시 제주지역을 관할하고 있던 신응희 전라남도관찰사는 산하 각군에 훈령을 내려 각 공사립학교로 하여금 애국사상을 포함한 창가와 학교경비에 대한 기부 등의 행위를 금지토록 했다(황성신문 1909.7.8).
이로 인하여 열악한 재정환경 속에서도 구국활동을 전개하던 민족계 학교 등 수많은 사립학교가 재정난 등으로 폐교에 이르렀다("政府에셔 寄附金品取締規則을 領布혼 後로 規則의 相碍로 收金키 難호야 京鄕各 私立學校가 多至廢止..." 대한민보, 1910.3.24).
이러한 사정들은 의흥학교의 교육환경을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제주지역은 1908년 말 무렵부터 경제사정이 극도로 악화했다. 갑오개혁 이후 지세(地稅), 동포세(洞布稅, 戶稅), 해세(海稅), 장세(場稅), 공마대전(貢馬代錢), 선세(船稅), 포세(庖稅), 낙마세(烙馬稅), 관유지세(官有地稅) 등을 부과징수했고 1909년 2월 국세인 주세와 연초세를 신설한데 이어 조천 신촌 함덕 등 제주군 내 15개리를 특별히 가옥세 과세대상지역으로 신설했다.
더구나 정부는 1909년 4월 지방비 법을 제정하여 지방공공상 필요한 사업비용에 충당하도록 한성부와 각 관찰도에서는 지방비를 부과징수했다. 이에 제주에서도 지세부가세, 시장세, 도장세 등이 부과되어 주민들의 세부담이 가중됐다( “융희 3년에 고승천 등이 세제에 대하여 원한을 품고 폭민 다수가 관청에 가서 폭행하였고 같은 해에 강유검 등이 세제에 불평하여 화전민 다수를 이끌고 성내에 진입하여 소요를 일으켰다”「미개의보고 제주도」28쪽. 1914.7. 전남 제주도청).
이러한 가운데 극심한 흉년에다 호열자까지 창궐하여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하는가 하면(1909년 7월1일자 대한매일신보는 “남도에서 온 사람의 말을 들은 즉 제주군은 온 지방에 疫疾이 大熾하여 죽은 자가 삼천여명이나 된다더라”고 보도했고, 동지 1909년 7월 13일자는 "제주에 체류중이던 금릉위 박영효도 신병으로 위중하다"고 보도) 도민들의 주소득원이었던 어장도 일본인들의 노골적인 어장침탈로 말미암아 황폐하여 주민들의 생활고가 극에 달하고 있었다.
이무렵 황성신문(1909.10.15)은 ‘哀我島民呼訴無處’ 제하로 제주지역 참상의 일면을, 대한매일신보(1909.10.15)도 ‘제주의 참상’ 제하로 같은 내용을 보도하고 있다.
“ 제주도민들은 농공상업이 아직 완전치 못하여 어업을 생명처럼 여기고 있는데, 수년전부터 일본 연해의 어민이 다수 몰려와 제주도민들의 소득원을 빼앗아 가다가, 특히 금년도에 어업법이 반포되고 나자 일본인 어부의 수가 격증하면서 어장을 마구 점령하는데도, 제주도민들은 법령에 무지하고 제대로 가르쳐주는 관공리도 없어 어장을 신청하지도 못하고 앉아서 당하기만 하다가, 달리 생활방도가 전무하고 춥고 배고픔이 점점 심해짐에 따라, 보통학교 학생들은 동맹퇴교하고, 인민은 비분격앙하여 본업을 포기하고 방황하거나 통곡하며 길거리로 나아가 해메는가 하면, 가구 등을 매각하고 술에 의지할 뿐 아니라, 심한 경우에는 산꼭대기에 올라 하늘을 향하여 울부짖다가 절벽 아래로 뛰어내려 자살하는 등 일대 참극이 일어나고 있다.”
또한 황성신문(1909.10.16)은 '窮到極處' 제하에 “濟州島 慘劇事에 關호야 昨紙에 約報호얏거니와 更聞혼즉 一部의 漁民은 一處에 團集호야 或 木棒短刀를 揮호며 或 空拳赤手를 奮호면셔 城內一般 官衙를 一擧屠戮호랴 聚衆호논 中이라더라”고 보도하였다
이러한 정세하에 마을의 뜻있는 인사들의 월부금으로 운영하던 의흥학교의 구조적 재정모순은 극대화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결국 의흥학교는 재건의 위업을 달성하지 못한 채 문을 닫기에 이르게 된다. 이결과 사립학교의 민족교육은 암흑기에 접어들고 일부 교회와 성당의 종교계 학교에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1910년 한일강제 병합과 일제의 무단통치가 1919년의 3. 1 운동과 그예 따른 일제의 이른바 문화정책으로의 궤도수정, 비록 소규모이기는 하지만 점진적인 민족 자본 이 형성되기 시작한 1920년대 초반까지 지속된다.
그러나 그 사이 김명식, 김문준. 고순흠등 의흥학교 출신 걸출한 인사들은 암암리에 성장하고 있었고 암울한 시대를 걸머져 나가게 된다
윤원구 군수 존영
(정식 직함 : 從二品 全羅南道 濟州郡守 兼 濟州裁判所 判事 陸軍步兵 副領 勳四等)
첫댓글 1908년 7월 5일부터 사립 제주조천의흥학교 한문 부교사 任務 백일선 (조천리) ,1910.5.2.공립제주농림학교 1학년 입학 (1910년 공립제주농림학교 출범시에는
1학년외에 2학년도 있었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