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론
인간화된 사물과 대화하기
-신현배 작품론
전병호
1. 들어가며
1981년 <시조문학> 시조 추천 완료. 1982년 월간 <소년> 동시 추천 완료. 198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 199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 제11회 창주문학상 동시 당선 등으로 이어지는 신현배의 등단 경력은 누구 못지않게 화려하다. 2008년 10월 현재 그의 문단 경력은 27년을 넘는다. 그런데 현재까지 그가 펴낸 동시집은 단 두 권이다. 거미줄(시간과 공간사, 1996)과 매미가 벗어 놓은 여름(홍진 P&M, 2005)이 그것이다.
필자는 그가 첫동시집 거미줄을 펴냈을 때 이렇게 썼다.
그는 15년만에 첫 동시집 거미줄을 펴냈다. 참 무던한 사람이다. 그의 동시집을 읽으니 어렴풋이나마 시작 태도를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 또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많은 그의 생각들과 만나게 된다. 거미줄에 게재된 67편의 시는 대부분 완성도가 높고 수준이 고르다. 오랫동안 갈고 다듬어 쓴 많은 작품 중에서 선별하여 동시집을 엮었다는 것을 알겠다. 동시집을 많이 펴냈다는 것이 곧 훌륭한 시인의 척도가 될 수는 없겠지만 시에 대한 열의는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신현배 시인도 마음만 먹었다면 벌써 몇 권의 동시집을 펴냈을 것이다. 시적 역량에 비추어 볼 때 충분하다. 그런데도 그는 자그마치 15년 만에 첫 동시집을 펴냈다.
지나친 과작이기 때문인가. 아니다. 시작의 열의가 부족하기 때문인가. 그것은 더욱 아니다. 신현배는 두 번째 동시집 매미가 벗어놓은 여름』도 10년 만에 펴냈다. 이번에도 10여년 동안 써온 작품 중에서 고르고 골라 묶어냈다. 다른 것이 있다면 『거미줄』은 동시․동시조집이라면 『매미가 벗어 놓은 여름』은 순수 동시조집이라는 점이다. 총 83편. 적지 않은 분량이다. 그는 이 동시집도 처음엔 두 권으로 나누어 펴낼 계획이었다고 한다. 그것을 한 권으로 압축해서 펴냈다.
신현배는 ‘쪽배’ 동인이다. ‘쪽배’는 어린이가 이해할 수 있고 감상할 수 있는 격조 높은 동시조를 많이 지어 보급하자는 취지로 결성된 동시조 동인 모임이다.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에 만나 작품 합평회를 개최한다. 한 번이라도 참석해본 사람이라면 쪽배 합평회가 얼마나 치열한지 알 것이다. 1992년에 결성되었으니까 2008년 올해로 16년째 이어오고 있다.
앞에서도 밝혔지만 그는 중앙일간지에서 실시하는 신춘문예에서 동시와 시조부문에서 당선했다. 그 정도라면 문학적 수준을 객관적으로 인정받았다고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16년 동안 단 한 달도 거르지 않고 ‘쪽배’의 합평 모임에 참가해서 시 정신과 작품을 갈고 닦았다. 그리고 두 권의 동시집을 펴냈다.
2. 체질화된 전통율격
신현배는 이제 동시조 시인으로 이미지를 굳혀가고 있다. ‘신현배’ 하면 자연스럽게 ‘동시조’가 연상되기 때문이다.
첫 동시집 거미줄에는 단시조 또는 연시조 형태의 동시조, 정형적 형태의 동시, 자유동시, 산문동시 등 다양한 형태의 시들이 실려 있다. 그렇지만 이들은 모두 전통율격의 틀에 담겨 있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다람쥐 잠든 숲속/ 나무 구멍에/
청설모 자지 않고/ 겨울을 나네./
창문 하나 없는 방/ 바람이 찬데/
불씨 한 점 없이/ 겨울을 나네.
- 「청설모」 1연
「청설모」는 7․5조의 음수율을 갖고 있다. 7․5조나 8․5조를 세밀하게 나누면 3․4․2․3이 된다. 즉 4 음보이다. 이 시는 2행이 하나의 진술을 완성시키므로 결국 최소 단위 4개가 모여서 1행을 이루는 셈이다.
「지렁이」도 표면상으로 드러난 형태는 자유 동시이다. 이 작품도 다음과 같이 시각적으로 재구성하여 놓으면 전통율격을 사용하고 있는 사실이 한 눈에 파악된다.
지렁이는/ 땅 속을 달리는/ 지하철이다.//
간 밤에 잠을 설친/ 이슬 방울들이/
지난 밤의 꿈과 함께/ 부푼 맘을 실으면/
무지개처럼 깔리는/ 태깔 고운 흙길.//
두더지가 뚫어놓은/ 널따란 굴을 지나,/
땅강아지 숨어 사는/ 비좁은 굴을 지나,/
땅말벌이 모여사는/ 시끄러운 굴을 지나/
오늘의 종착역인/ 밑뿌리에 닿으면//
이슬이 있던 자리마다/ 들꽃이 핀다./
지렁이 빛깔같은/ 들꽃이 핀다./
한편, 산문동시 「설문대 할망」도 4음보를 기준 율격으로 하여 재구성해 놓으면 재미있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라산과 일출봉은 겨우 한 걸음 거리.
한라산을 베고 누워 제주도 앞바다 관탈섬에
두다리를 걸쳤다는 설문대 할망.
깊다는 물은 전부 찾아다니며
자나깨나 키 큰 자랑.
용담동 용소물은 겨우 발등에 차고,
서귀포 홍리물은 무릎까지 찬다며 뻐기다가,
한라산 물장오리 맨발로 들어가
이제까지 안 나오는 설문대 할망.
설문대 할망은 언제 돌아오실까.
설문대 할망을 불러낼 수 없을까.
깨끗한 명주 속옷 백 벌 만들어주면,
다리를 육지까지 놓아 준다는데.
필자가 임의로 재구성해 본 이 산문동시도 음보가 넷이 모여 한 행을 이루고 있으며, 이로서 전통율격을 가진 정형시임이 드러난다.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해 신현배는 자유동시와 산문동시에서도 우리의 전통 시가처럼 2내지 4음절을 최소 단위로 하고 이 최소 단위 넷이 모여 한 행을 이루는 전통율격을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시는 전통율격이 체질화되어 있다. 간혹 1음절, 또는 5, 6음절이 음보를 이루는 최소 단위의 구실을 하기도 하지만 이는 변조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1음절이 최소 단위를 이룰 때에는 길게 발음하고, 5음절이나 혹은 그 이상일 경우에는 그만큼 빨리 발음하면서 4음보에 맞추게 된다. 이렇게 길게 혹은 짧게 발음하여 4음보의 규칙에 적용하도록 하는 것이 전통율격에 대한 우리의 감각인 것이다. 이런 변조는 조선 시대의 시조는 물론이고, 가사에도 있었다. 현재도 정형시나 자유시에서 기본 율격을 4음보 1행으로 하는 전통율격과 변조를 사용하고 있는 예를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필자가 생각하기를, 시조를 쓰는 사람은 먼저 우리 가락이 몸에 배어있어야 한다고 본다. 우리 가락이 몸에 배어있는 사람이 아니면 절대로 좋은 시조를 쓰기 어렵다. 그만큼 시조 창작에서는 가락이 중요하다. 신현배는 선천적인지 후천적 노력에 의해서 길러졌는지 아직 파악하지 못했으나 전통 율격이 체질화된 사람임에 틀림없다.
동시조는 시다. 다시 말하면 동시조는 우리 가락을 가진 동시이다. 그렇다면 동시조는 다음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동시조는 시이며 동시이고 시조이어야 한다. 이와 같은 조건을 충족시키는 작품을 쓰기는 쉽지 않다. 거칠게 표현하면 엄청난 노력에 비해 성과는 미미하다고 생각될 때가 많다.
동시조는 아직도 안과 밖으로부터 너무나 많은 도전을 받고 있는 장르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준 높은 작품을 지속적으로 내놓지 않으면 장르 자체가 존폐 위기로까지 내몰릴 수 있는 가능성이 항시 존재한다. 그래서 특히 동시조를 쓰는 사람들은 문학적으로 뛰어난 작품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 전통의 계승 발전이라는 측면에서도 동시조에 대한 관심은 범 문단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동시를 쓰는 시인이라면 기본적으로 훌륭한 동시조를 쓸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대화를 나누어보면 동시조의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동시조를 쓰는 시인은 몇 명 되지 않는다.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동시조를 쓴다는 것은 참 외로운 작업이다. 그럼에도 일부에서는 오랜 세월 변함없이 동시조에 전념해오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신현배는 그 중의 한 사람이다.
3. 신현배의 시 세계
초기의 시 세계는 향토서정이나 자연친화적 세계를 중점적으로 그리고 있다. 향토 서정을 전통 율격이라는 틀에 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첫 동시집 『거미줄』에 실린 시들이 대부분 그러하다.
꽃가마 할머니 가마, 오십 년 전 쪽두리 가마
서낭당 고갯길에서 연지곤지 떼어내어
돌처럼 던지셨다지, 아들 낳게 하옵소서.
장날 어스름이면 서낭당까지 나와
여우 고개 무서움도 돌로 눌러 버리고
장터 간 할아버지를 기다렸다는 할머니.
홍역 앓던 어린 나를 굽은 등에 업고서
장승님 발 밑에서 눈물로 빌던 소원,
내 손자 뜨거운 열 빼어 여우에게 주옵소서.
-「서낭당」 전문
이 시는 요즘 어린이들에게는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이겠지만 어른이면 누구나 유년 시절에 한두 번쯤은 듣고 자랐을 것 같은 향토 민담을 소재로 하고 있다. 전래 동화, 야담, 우화, 전설, 신화, 세시 풍속 등을 전통 율격에 담아낸 그의 시는 많다.
전통 율격은 형식적이면서도 추상적인 ‘틀’이라고 할 수 있다. 전통율격을 차용한 그의 작품은 나름대로 독특한 리듬을 가진다. 전통 율격을 차용했다고 해도 내용, 쓰인 낱말, 어조, 분위기에 따라 각각 리듬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리듬은 이미 태어나면서부터 몸에 밴 우리 고유의 가락이다. 따라서 그의 시는 몸에 밴 가락에 얹어 향토 서정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자연 친화적 세계를 그려낸 순수 서정시들도 마찬가지이다.
겨우내 가슴 열어/ 산이 품은 동물 식구
첫눈이 지은 이불을/ 다함께 덮고 자네.
드르렁 코고는 소리에/ 꿩이 놀라 푸드덕!
- 「겨울잠」 전문
한겨울 눈 내린 깊은 산 속의 정경이 눈앞에 선하게 펼쳐진다. 동물 식구들이 드르렁 코고는 소리에 ‘꿩이 놀라 푸드덕!’ 날아오름으로써 산 속의 정적을 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은 산의 정적을 느끼게 해주는 묘미를 이 시는 갖고 있다. 이 자연 친화의 공간은 시인이 그리고자 하는 동심의 세계를 구체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첫동시집 거미줄에 나타난 시 세계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솔직하게 밝히자면 작품으로는 뛰어나지만 독자 수용 미학적 입장에서는 재고해야 할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의 동시는 향토서정과 자연친화적 세계를 중점적으로 그리고 있기 때문에 현대의 아파트촌에서 살아가는 도시 어린이들의 정서를 폭 넓게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 향토서정은 더 이상 현대를 살아가는 어린이들의 지배적인 정서가 아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새로운 도시 서정이 필요하다. 지난 시대의 향토 서정은 이미 누군가 정리해 놓았어야 할 과거의 시세계일 수도 있다.
자연친화적 세계를 그린 그의 시도 나름대로 높은 문학성을 내세울 수 있지만 현실의 어린이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 깊은 산속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는 점이 불만이다. 또 어른 시조의 분위기를 완전하게 벗어버리지 못했다는 느낌도 떨쳐버릴 수 없다.
이에 대한 자각 때문일까. 두 번째 시집에서 그의 시 세계는 많은 변모를 꾀한다. 우선 눈에 띄는 가장 큰 변화는 어린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간 시를 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비유하자면 깊은 산속에서 도시 아파트 단지로 내려왔다고 할까. 산에서 이사 와서 이제는 동네 어디에서나 쉽게 만날 수 있는 아저씨 같은 이웃이 되었다고 할까. 일상생활에서 자주 만나는 사물과 장면들이 시적 소재로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가 일상에서 시적 사물과 마주쳤을 때 의식적으로 시도하는 작업은 사물을 인간화하는 것이다. 사물을 인간화한다는 것, 그것은 곧 사물을 의사소통이 가능한 유기적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는 인간화된 사물과 대화를 시도하는 한편 마음에 비친 사물의 모습을 시로 형상화하여 보여준다. 그때 사물들은 시인 앞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도식적이고 관념적인 모습을 벗어버리고 동심의 눈에 비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새로움을 안겨준다. 즉, 신현배가 새롭게 인식한 시작 방법은 ‘인간화된 사물과 대화하기’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신현배 시를 읽은 독자들도 일종의 심리적 해방감을 맛본다. 신현배 시를 새롭게 형성하는 주된 원리는 동심의 눈으로 낯설게 바라보기임을 알 수 있다.
그가 이런 시작 방법을 도입함으로써 얻은 것은 무엇인가.
우리 집에 팔려 온/ 피아노 저 녀석은/
전 주인이 음대생,/ 연습벌레였다지?
날마다 모차르트를/ 강물처럼 풀어놓는.
그만큼 노래했으면/ 외우는 곡 많을 텐데
피아노는 어쩌면/ 저렇게 능청맞을까?
주인이 바뀌었다고/ 「산토끼」도 떠듬떠듬.
- ‘피아노’ 전문.
「피아노」에서 얄미울 정도로 시치미를 뚝 떼고 ‘주인이 바뀌었다고/「산토끼」도 떠듬떠듬.’ 한다고 넉살을 보이는데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그 넉살이 시를 빚게 하는 힘이 되고 독자와의 거리를 좁히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외에도 이 작품이 갖고 있는 장점은 많이 거론할 수 있다. 우선 동시조이면서 동시가 되어있다. 또 가락을 맞추기 위해 무리하게 글자수를 가감해서 어색함을 주는 그런 생뚱맞은 작위성이 없다. 시조로서의 가락이 훌륭하게 살아있다는 말이다. 시상과 가락이 상충할 때는 먼저 가락을 취하는 것이지만 이 시에서는 충분히 숙성시킨 시상을 표출하고 있기에 가락과 시상이 절묘하다싶게 잘 어우러진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어린이들의 생활에 친숙한 소재를 찾아내어 시화했다는 것이 변화라면 가장 큰 변화이다.
신현배의 시적 경향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하나는 이미지를 중시한 시들이고 또 하나는 일상생활 속에서 시적 소재를 찾아내어 메시지와 이미지의 조화를 이루고자 한 시이다. 전자의 시들은 비교적 초기작에 속한다. 후자는 최근작에 속한다. 최근작들이 훨씬 더 독자들과의 공감대가 크다. 즉, 그의 시는 이제 어린이들의 일상생활도 담기 시작했다.
햇빛을 베개 삼아/ 잠만 자던 헌 우산이//
후드득 빗소리에/ 반가워 눈을 뜬다.//
오늘은 철이 손잡고/ 학원에 가겠구나.
기지개를 활짝 켜고/ 거리로 나선 우산이//
목말탄 아이처럼/ 우쭐우쭐 길을 간다.//
접었다 펼친 마음이/ 무지개를 그린다.
- ‘우산’ 전문.
이 작품도 신현배 시의 장점을 고루 갖추고 있다. 첫 연에서는 인간화된 사물을 친구처럼 바라보고 생각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둘째 연에서 시적 화자는 관찰자적 입장을 취하면서도 인간화된 우산의 모습을 그린다.
신현배 시의 특징으로 파악되는 여러 요소들, 이를 테면 사물을 인간화하여 낯설게 바라보기, 능청스러움과 해학으로 표출되는 재미성,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시상과 어울리는 유연한 가락 등으로 그만의 독특한 색깔을 가진 시를 빚어낸다.
그런데 이 시에서 그는 한 가지 덕목을 더 덧붙였다. 동요적 요소를 적극 차용한 것이다. 이는 독자 수용 미학적 측면에서 볼 때 독자에게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가는 성과를 거두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까지 그의 작품에 대한 독자는 고학년이거나 청소년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시도에서 성공적인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독자층을 넓혔다.
신현배 시는 최근까지도 전통적인 소재에 대한 관심은 여전하다. 그렇지만 작품의 표현 기법에서는 많은 변화를 보였다.
고려 청자 가득 싣고 해남을 떠난 배가
완도 바다 밑에 바위처럼 잦아들어
한 천 년 잠을 잤대요, 한 점 섬도 아니면서.
오고 가는 뱃길이 얼마나 고단했으면
청자를 다 풀어 놓고 단잠 들었을까요.
그 덕에 완도 바다가 비췻빛으로 푸르지만.
세월도 눈감아 준 배를 흔들어 깨워서
해양 유물 박물관 전시실에 모셨어요.
바다를 떠난 하루가 천 년만 같겠어요.
- ‘완도배’ 전문
완도배는 고려 11세기 후반의 장삿배이다. 해남의 도요에서 개성으로 청자를 실어날랐던 배이다. 풍랑을 만나 바다에 가라앉은 것을 1983∼1984년에 인양해서 해양유물전시관에 모셔놓았다. 이 배는 현재, 우리 전통 한국 배의 실물로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완도배’는 제목을 읽고 나서 어쩌면 내용이 고루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우려를 말끔히 씻어준다. 1연 종장에서 ‘한 천 년 잠을 잤대요, 한 점 섬도 아니면서’라든가 2연의 ‘얼마나 고단했으면/ 청자 다 풀어 놓고 단잠 들었을까요.’와 3연 초장에서 ‘배를 흔들어 깨워서’와 같은 구절은 어린이의 눈으로 보고 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표현이다. 또한 ‘완도 바다가 비췻빛으로’ 푸른 까닭을 감각적으로 표현해서 보여주고 있는 점도 인상적이다. 그는 전통을 나타낼 수 있는 소재를 즐겨 다루면서도 이를 현대 감각적으로 재현해 냄으로써 오늘의 어린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을 빚고 있는 것이다.
4. 나가며
그의 제1동시집 『거미줄』은 수준 높은 작품집이 틀림없다. 그러나 독자들의 호응도는 그리 높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필자로서도 독자 수용 미학적 측면에서 오랜 동안 가졌던 의문이었다. 작품 창작 방법상의 문제점은 없는 것일까. 필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문학을 위한 문학의 추구는 독자층을 알게 모르게 한정짓게 된다는 점이다. 더구나 제1동시집 『거미줄』에 실린 작품에는 어른 시조와 구분이 안 될 정도의 시적 사유를 요구하는 작품도 많았다고 기억한다. 또한 산사의 스님 같은 정적인 생활 중심의 소재를 상당 부분 시화해 온 것도 많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파악한다.
제2동시집 매미가 벗어 놓은 여름에 나타난 그는 산사에서 도시로 내려와 아파트와 골목을 걷는다. 아파트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어린이도 보고 어린이들이 잃어버리고 간 우산에도 눈길이 머문다. 그의 작품에서 사람 냄새, 땀 냄새가 풍기기 시작한다. 술주정하는 이웃집 아저씨도 등장하고 늦은 밤에 속상한 일이 있는지 담배 피우는 아저씨, 이른 새벽에 아파트를 순찰하는 경비 아저씨도 나타난다. 건강한 사람이 흘린 땀 냄새는 맡기 좋다. 가난하지만 웃음과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들 즉,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통 사람들의 삶이 많은 공감대를 형성한다. 문학작품이라면 잠시라도 현실의 삶을 외면할 수 없는 것인데 아직도 문단에는 자신들만 어린이의 삶을 표현한다고 우기는 사람들도 있다. 편향적인 시선으로 모든 어린이의 삶을 포옹할 수는 없다.
신현배는 오랜 동안 순수 서정시를 써 온 솜씨로 도시 어린이들의 삶을 조화롭게 담아낼 것으로 믿는다. 더구나 그것이 우리 가락에 담는 작업을 하나 더 거쳐야 한다. 쉽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의 시작에 많은 기대를 거는 것도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