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조화花鳥畵는 글자 그대로 꽃과 새, 즉 날개가 달린 짐승들과 식물류를 조합하여 그린 그림들이다. 하지만 털이 있는 짐승인 영모, 곤충류, 물고기와 갑각류를 그린 어해까지 이 영역에 포괄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화조화는 〈농경문청동기〉에서 솟대로 보이는 나뭇가지 위에 앉은 새를 그 시초로 삼기 때문에 아주 오랜 연원을 가지고 있다. 나무 위에 다닥다닥 앉아 있는 새들을 표현한 고구려 고분벽화는 생명의 나무라는 신화적 의미에 더하여 실제 나무와 가지에 앉아 있는 새의 사생적인 모습마저 보인다. 하지만 본격적인 감상용 화조화가 등장한 것은 다른 그림과 마찬가지로 고려시대부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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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상벽|암탉과 병아리 견본담채|94.4×44.3cm|국립중앙박물관 |
조선시대는 회화의 시대인 만큼 화조화도 시대와 작가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보인다. 조선 초기의 신사임당(1504~1551)이나 중기의 김제(1524~1593), 조속(1595~1668) 등의 화조화는 그림 그리는 법을 알려주는 『화보』를 많이 보고 자꾸 베껴 그리되, 사물의 본질을 표현하는 사의寫意를 담았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진경산수의 경험이 화조화에서도 나타난다. 즉, 축적된 사생을 통해 사물의 본질에 이르는 정신은, 『화보』를 통해 대상을 그리는 법을 파악한 연후에, 실물을 보고 세부묘사를 자꾸 연습하여 대상을 진정으로 표현해내는 전통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림의 대상도 화보에 등장하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물들로 확대되었다. 표현에서도 곤충도감이나 식물도감 같은 관념적인 표현에서 벗어나 사실과 핍진한 식물, 실제 곤충의 습성이 화면에 나타났던 것이다. 변상벽卞相壁은 이러한 사생을 바탕으로 한 화조화를 많이 남겼는데 〈암탉과 병아리〉는 주변의 식물, 어미 닭과 병아리의 세밀한 관찰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변상벽은 고양이를 잘 그렸기 때문에 ‘변고양’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몸을 둥그렇게 움추리고 털을 곤두세운 채 한 곳을 응시하는 고양이 그림을 보면 왜 그가 ‘고양’으로 불렸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는 또한 닭을 잘 그려서 ‘변계卞鷄’라고도 불렸다고 전해진다. 영조 말에서 정조 때까지 활동한 변상벽의 호는 화재和齋이며 조선의 왕립 아카데미라 할 만한 도화서圖畵署 출신의 직업화가였다. 두 번이나 영조대왕의 진영을 그리는 일에 참가하였을 정도로 인물 초상에 뛰어나 국수國手로 불렸으나, 현재 그가 그린 초상화는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동물 그림이나 화조화를 통해 그의 세밀한 묘사력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은 변상벽의 닭 그림을 보고서는 뛰어난 화가는 진실성을 표현할 수 있다며 「변상벽의 어미닭과 병아리 그림을 보고(題卞相壁母鷄領子圖)」라는 글을 지었는데, 정약용의 문집인 『여유당전서』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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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미닭의 꽁지 쪽에는 꽃나무의 잎새 사이로 아주 작은 벌을 그려 넣음으로써 작가는 자신의 기량을 뽐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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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슬이 있는 닭은 부리로 작은 벌레를 잡아 새끼들에게 주는데 벌써 여섯 마리가 먹이 주위에 둘러서 있고, 다른 병아리들도 어미닭의 뒤에서 배 밑에서 먹이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 |
흰 그릇 안에서는 병아리 두 마리가 물을 먹고 있는데, 이들 병아리가 들어가 물을 먹는 그릇은 비록 구연부가 깨어져 떨어졌지만 백자白磁이다. 이 그릇은 전체 화면에서 가장 밝은 색을 띠고 있는데, 18세기 최전성기 백자의 정제된 형태와 밝고 화사한 색상을 볼 수 있다. |
“변상벽을 변고양이라고 부르듯이 고양이 그림으로 널리 이름이 알려졌네. 이번에 다시 닭과 병아리 그림을 보니 마리마다 살아 있는 듯하네. 어미닭은 괜히 노해 있고 안색이 사나운 표정. 목덜미털 곤두서 고슴도치 닮았고, 건드릴까 봐 꼬꼬댁거리네. 방앗간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땅바닥을 후벼 파면서 낟알을 쪼는 척하는데 배고픔을 참아내는 어미 마음이야. 보이는 것도 없는데 놀라 푸닥거리는데 숲 가에 얼핏 올빼미가 지나가네. 정말로 자애로운 그 모성, 천부로 타고난 것 그 누가 빼앗으랴. 옹기종기 어미를 따르는 병아리들 황갈색 연한 털. 주둥이는 이제 여문 듯 닭벼슬은 아직도 제 색을 내지 못했네. 그 중에 두 마리는 쫓고 쫓기며 황급히도 어디를 가는지. 앞선 놈의 주둥이에 물려 있는 것을 뒷놈이 따라가서 빼앗으려는구나. 두 놈의 병아리 지렁이를 서로 물고 놓으려 하지를 않네. 한 놈은 어미 뒤에서 가려운 곳을 비비고 한 놈은 혼자 떨어져 배추 싹을 쪼고 있네. 형형이 세세하고 핍진하니 도도한 기운이 살아 있는 듯. 후문에 듣건대 처음 그릴 때 수탉이 오인할 정도였다네. 역시 그가 고양이를 그렸을 때 쥐들도 마찬가지였을까. 뛰어난 솜씨, 그런 경지에 이르니 떠나고 싶은 생각 없네. 덜떨어진 화가들이 산수를 그리면서 거친 필치만 난무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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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의 배경이 봄임을 알려주는 노랑나비와 호랑나비 두 마리는 벌들 사이에서 꽃을 향해 날아들고 있다. |
정약용은 변상벽의 어미닭과 병아리 그림에 빗대어 시대를 말한 것이었다. 일찍이 선인들은 닭에게는 다섯 가지 덕이 있다 하였다. 닭벼슬은 문文, 발톱은 무武, 적에게 용감한 것은 용勇, 먹이를 보고 꼭꼭거리며 무리를 부르는 것은 인仁, 때를 맞추어 새벽을 알리는 것은 신信이라 하여 오덕을 갖추었다고 일컬었던 것이다. 또한 날개가 있으면서 땅에 사는 동물인 닭은 지상과 천상, 밝음과 어두움의 경계를 의미하였다. 『시경』의 「정풍」에 나오는 ‘계명鷄鳴’이 ‘아침이 왔다’는 뜻으로 해석되는 것은 바로 닭이 『주역』의 방향에서 손巽괘에 속하기 때문이다. 동남쪽인 손괘에 닭이 있으니 새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닭이 울면 새벽이기 때문에 귀신이 모두 도망간다 하여 닭은 영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닭 그림은 복을 불러오고 귀신을 물리치는 벽사초복?邪招福의 부적과 같은 영험이 있다 하여, 새해에는 닭 그림을 선물하거나 문에 붙여 놓기도 하였다. 민화에 닭 그림이 비교적 많은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닭의 모성이 강하게 드러난 변상벽의 〈어미닭과 병아리〉는 화조화로서 훌륭한 기량을 보이는 그림이다. 화면에는 크게 닭과 병아리, 바위와 꽃, 나비와 곤충이 등장한다. 어미닭의 부드러운 깃털과 풍만한 몸집에 비해 꺼칠한 털이 돋아나기 시작한 조그마한 병아리들이 화면의 중심 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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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를 잘 그리고 또 많이 그려 ‘남나비’라 불렸던 남계우의 나비는 이 시기 도시문화의 화려함을 보여준다. 중국에서 수입한 분당지에서 나풀거리는 나비는 환락과 호사의 극치로 여겨질 만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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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의 제일 하단 왼쪽, 하늘을 쳐다보아야 물을 삼킬 수 있는 가금류의 특성을 표현하였다. 그릇은 환하게 밝고 짙은 흰색이고 굽이 크고 굽다리 바닥도 깨끗하다. 임진왜란 이후 분청사기에서 백자로 완전 이행된 이후 영조대에 설치된 분원 초기에는 설백자를 생산하였던 것이다. 즉, 그릇을 만드는 흙인 태토도 순백색이고, 유약도 흰색을 입혔고 태토와 유약이 식는 과정에서 온도차에 의해 생긴 빙렬도, 유약이 흘러내려 울퉁불퉁한 흔적도 없다. 입부분이 조금 깨져서 닭 모이그릇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이 그릇은 기벽이 얇고 그릇을 구울 때 굵은 모래를 놓고 구워서 굽다리 밑이 깨끗하게 처리되었으며, 입술부분이 부드럽게 외반된 분원 초기의 우수한 백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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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계우|호접 지본채색|127.9×28.8cm|국립중앙박물관 |
짙은 색의 바위, 화사한 꽃, 빛나는 털의 가금류 사이에서 작디작은 벌은 언뜻 눈에 띄지 않지만 날개를 파닥이며 꽃을 향하고 있다. 꽃송이는 분홍빛으로 만개하였는데 화면 전체에서 꽃보다 화사한 것은 바로 나비이다.
변상벽의 나비는 19세기 화가 남계우의 나비와는 다르다. 하지만 변상벽의 나비는 조촐하며 단아한 일개 곤충의 모습을 견지하고 있다. 고양이나 동물 등의 표현 기량으로 보아 세밀한 일상의 관찰력이 높았던 것을 알 수 있지만, 나비는 두 날개를 똑바로 편 것이나 종이 다른 두 마리가 함께 나란히 비교되는 것 등은 그가 『화보』를 통해 나비를 관찰하였음을 증명한다.
개혁자 정약용은 변상벽의 닭 그림에서 먹을 것이 없어 꼭꼭거리는 어미닭을 보았다. 이 그림의 어미닭은 자기를 생각하지 않고 새끼에게 먹을 것을 나르는 모습이다. 우리가 살지 않아 모르는 시대, 작가가 살았던 영조 임금과 정조 임금이 다스리던 시대는 적어도 밝고 빛나는 백자가 생산되었고, 어미닭의 덕성이 살아 있고, 나비가 서로 희롱하는 시대였다.
조은정|미술평론가 겸 미술사학자. 1962년생이며 이화여대 서양과 및 동 대학원 미술사학과를 졸업했다. 저서로 『한국 조각미의 발견』, 『비평으로 본 한국 미술』 등이 있으며, 현재 한남대 겸임교수로 재직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