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제지 : 경기도 의정부시 장암동 197(동일로 128-36)
서계(西溪)선생님의 생가(生家)가 있는 의정부시 장암동을 이루고 있는 용맥(龍脈)의 근원(根原)을 살펴보면 한북정맥(漢北正脈)에서 분형제(分兄弟)한 수락지맥(水洛枝脈)의 근간(根幹)을 이루고 있는 남양주시 별내면 청학리 수락산에서 북쪽으로 갈라진 일맥(一脈)이 낙맥(落脈)후 수차(數次) 대단과협(大斷過峽)을 형성하면서 기복(起伏)을 거듭한 후 도덕봉으로 오르기전에 태방(兌方)으로 재차(再次) 분지벽맥급락(分枝劈脈急落)한 수조(數條)의 용맥(龍脈)들이 진(盡)하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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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맥(落脈)하는 수조(數條)의 용맥(龍脈)들 중 선생님의 생가(生家)가 있던 곳으로 떨어진 용맥(龍脈)의 진처(盡處)를 살펴보면 주산(主山)에서 동조출발(同祖出發)한 개천(開川)이 앞에 도래(到來)하여 흘러가고 있어 용진(龍盡)할 수 밖에 없는 형상이고, 용(龍)의 줄기가 현재 존재하고 있는 사랑채 쪽으로 뻗어내려오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중심(中心)의 기운(氣運)은 현재는 터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안채가 있는 쪽으로 미끄러져 내려와서 넓은 육지(肉地)를 형성하고 있는 모습이 역역하다. 안채가 있던 곳은 뒤에 산에서 미끄러져 내려와 평(平)이 되는 곳 즉 음래양수처(陰來陽受處)에 해당하는데 산천(山川)의 정기(精氣)를 모아 양택혈(陽宅穴)을 맺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안채에서 보면 사랑채가 있는 곳으로 짧게 뻗어나갔지만 좌청룡(左靑龍)으로 볼 수 있고, 개울 건너 수락산에서 뻗어내린 지엽(枝葉)이 생가(生家)의 앞을 지나면서 역수지세(逆水之稅)를 이루고 있는 것은 외청룡(外靑龍)이다. 또한 내룡(來龍)에서 갈라진 가지맥이 길게 진출하여 우백호(右白虎)를 형성함으로써 작게는 좌단제(左單堤)의 모습이고, 크게는 주합용호(湊合龍虎)가 포전(抱轉)하여 원국(垣局)을 작국(作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외청룡(外靑龍)과 상교(相交)하여 지호(地戶)를 긴밀(緊密)하게 중중관쇄(重重關鎖)하여 불통주(不通舟)의 형국을 이루고 있다. 우백호(右白虎)가 외청룡(外靑龍)에 비해서 다소 낮지만 우수도좌(右水到左)하므로 납기(納氣)를 고려할 때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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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해설을 담당하고 계신 할아버지의 안내를 받아 사랑방에 모셔진 박세당선생님의 영정(影幀)을 담아 올립니다.(비록 복제한 영정이지만 모습이 세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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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채가 있던 곳에는 빈 터만 덩그렇게 남아 아쉬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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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채 뒤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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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채 뒤편 입수(入首)부분에는 바위가 줄지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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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채 정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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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 박세당(朴世堂, 1629~1703)
본관은 반남. 자는 계긍(季肯), 호는 잠수(潛叟)·서계초수(西溪樵叟)·서계(西溪). 할어버지는 좌참찬 동선(東善)이며, 아버지는 이조참판 정(炡)이다.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한 양반가문 출신이나 4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매우 곤궁한 환경에서 자랐다. 홀어머미 밑에서 원주·안동·천안 등지로 떠돌아다니다가 10세 때 비로소 글을 배웠는데도 재주가 뛰어나 주위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17세 때 남구만(南九萬)의 누이와 결혼하여 처가를 왕래하며 처남 남구만, 처숙부 남인성(南仁星)등과 함께 학업을 계속했다. 1660년(현종 1) 증광문과에 장원을 하고 성균관전적이 됨으로써 벼슬길에 올랐다. 그뒤 예조좌랑·병조좌랑·춘추관기사관을 거쳐 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병조정랑, 홍문관교리 겸경연시강관, 함경북도평마평사를 두루 지냈다. 1668년 서장관(書狀官)으로 베이징[北京]에 다녀오고, 1670년에는 잠시 통진현감을 지냈다.
그는 소론계열로서 노론계의 송시열과 개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대립관계에 있었다. 특히 당시 정치상의 주요사안이었던 대청(對淸) 문제에서 온건론자로 간주되어 송시열을 비롯한 강경론자들로부터 '오사'(五邪) 가운데 하나라고 지탄을 받기까지 했다. 이와 같이 당대의 대학자·대정치가이자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과 대립하게 되자 정치인으로서 그 뜻을 펴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관직에서 물러나 경기도 양주 석천동에 퇴거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강학과 연구에 몰두했다. 1694년(숙종 20) 갑술옥사(甲戌獄事)가 일어나 서인이 다시 득세를 하자, 사실상 야인이었던 그에게 호조참판·공조판서·대사헌·예조판서·이조판서·지중추부사 등 요직이 제수되었지만 취임하지 않았다. 그러는 가운데 1702년(숙종 28) 이경석(李景奭)의 비문을 지은 것이 계기가 되어 정치적인 박해를 받게 되었다. 그 비문에는 송시열의 인품이 이경석의 인품보다 못하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이 노론계를 자극하여 거센 반발을 일으켜 결국 김창협(金昌協)·김창흡(金昌翕) 형제를 위시한 김진옥(金鎭玉)·정호(鄭澔) 등과 성균관 유생 홍계적(洪啓迪) 등 180여 명의상소로 삭탈관직당하고 옥과(玉果)로 유배되었다. 이탄(李坦)·이익명(李翼明)·이인엽(李寅燁) 등 박세당의 문인들의 소청으로 유배에서 풀려나 석천동으로 돌아왔으나 귀환한 지 3개월 만에 죽었다.
박세당은 당시 통치이념으로서 확고한 권위를 확보하고 있던 주자학을 비판하면서 독창적인 학문세계를전개했다. 그의 반주자학적인 경학사상은 만년에 14년에 걸쳐 저술한 〈사서사변록 四書思辨錄〉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은 〈대학〉·〈중용〉·〈논어〉·〈맹자〉에 대한 주자의 주해에 반기를 들고, 주자의 견해와는 상반되는 자기 나름의 주해를 붙인 것이다.
반주자학적 경전 해석의 주요한 내용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주자가 '인물일체관'(人物一體觀)을 기초로 '천인상감'(天人相感)을 믿었던 데 반하여, 그는 '물아이분관'(物我二分觀)을 기초로 의인화된 하늘과의 상감(相感)을 부인했다. 인간과 분별되고 오직 인간의 역량으로만 영향을 줄 수 있는 자연을 말함으로써, 일종의 '물리학적인 자연관'을 공고히 했다. ② 본성(本性=天理)의 선험적 본구(本具=天命)를 믿음으로써 윤리 도덕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주자와는 달리 본성의 본구를 부인하여 윤리 도덕의 가변성·선택성에 대한 각성의 길을 열어놓았다. ③주자의 현실재론적(現實在論的) 시각을 배격하고 '주기적(主氣的) 경험주의' 철학을 견지했다. ④ 도심(道心) 못지 않게 인욕의 충족도 중요시했다. 이는 백성들의 안정을 위하여 명분론보다 의식주와 직결되는 실질적인 학문이 필요하다는 그의 실학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사서주해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반주자학적 경전이었으므로 그의 학문은 당시 노론계열로부터 "위로는 주자를 모멸하고 아래로는 송시열을 욕되게 했다"는 강한 비판을 받고 사문난적(斯文亂賊)의 낙인이 찍히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반주자학적인 경학사상은 정약용(丁若鏞)에게 이어져 다산경학(茶山經學)의 연원적인 역할을 했다.
그의 반주자학적인 사상은 노장사상(老莊思想)에 대한 관심으로도 나타났다. 그는 노장이 말한 '수신'과 '치인'이 유학에서의 의미와 같은것으로 보고, 그 내용을 설명하는 언설의 간결함과 의미의 심오함이 장점이라고 생각했다. 유학의 입장에서 노장을 재해석함으로써 새로운 사상을 끌어내고자 했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노장의 용어를 유학의 용어로 대치하여 설명하는가 하면 사상의 내용까지 유학의 의미로 해석했다. 예컨대 노자의 '도'를 '무'로 이해하면서 그것을 또 '이'(理) 즉 '태극'(太極)으로 설명하는 해석이라든지, '자연'이 '본성(천성)대로 하되 지나침이 없는 의미'라는 〈중용〉식의 해석 등이 그것이다. 그는 노장사상의 성격을 한마디로 말해 문(文)보다 질(質)을 중요시하는 것이라고 했으며 이러한 노장사상의 성격에 호감을 갖고 그것을 유학이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특히 노자의 〈도덕경〉에 대한 해석에 집약되어 있는데, 〈도덕경〉의 근본정신이 치자의 지배욕구 포기에 있다고 보고, '무위' 또는 장자의 '무위자연'이란 치자가 사사로운 지배욕구에 얽매이지 않고 무욕의 정치, 곧 백성들의 생활을 향상시키는 데 힘쓸 것을 강조한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었다.
이러한 실제성 추구의 경학사상은 경세론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일종의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을 제시하고 있다. 그의 문제의식은 정치·경제·국방의 문제에 걸쳐 다양하게 전개되었는데, 그 핵심은 무위도식하면서 당쟁에만 매달려 있는 지배세력인 양반들에게 일반 백성이 수탈당하며 비참하게 살아가는 사회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는 왕이나 대신들이 먼저 성실하고 근검해야 백성들이 살기 좋다는 전제하에서 횡렴(橫斂)의 방지와 조세의 균등화, 병제의 일원화 등을 주장했다. 그리고 백성을 구제하기 위한 정책들이 항시 '허문'(虛文)에 그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실효를 거두는 '무실'(務實)의 정책으로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실사구시의 현실 개혁사상이 잘 드러나 있는 것이 농서 편찬이었다. 그는 조선 전기와는 다른 새로운 농서의 편찬이 요구되던 17세기의 상황에서 한전농업(旱田農業) 중심의 농서 〈색경 穡經〉을 편찬했다. 이 책은 자신이 직접 농사를 지은 경험과 여타의 농서를 토대로 저술한 것인데,구체적인 작물의 재배기술 면에서뿐만 아니라 농업·농학을 보는 안목에 관해서 새로운 문제제기를 했다는 점에서 18세기 농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그의 농학은 〈농가집성 農家集成〉으로 대표되는 주자학적인 사유체계와 지주제 중심의 농업·농학을 벗어나 소농층이 위주가 되는 농업·농학을 수렴하고자 했다.
한편 대외정책에서도 당시 주자학자들이 주장하던 숭명배청론(崇明排淸論)과 대립하는 입장에서 중국대륙의 세력변동에 주체적으로 적응하는 실리주의 정책을 주장했다. 그는 역사 속의 예로서 현실주의적인 외교 정책으로 고대 삼국 가운데 국력이 가장 미약했던 신라가 당나라에 망하지 않은 것과, 고려말 원·명 교체기에 신흥 명나라를 섬기고 원을 배척한 것을 들어 이를 높이 평가했다. 그리하여 당시 숭명배청론자들이 명나라의 연호인 '숭정'(崇禎)을 사용할 것을 주장하는 것에 대해 연호란 왕조가 바뀌면 으레 변하게 마련이므로 청나라의 연호인 '강희'(康熙)를 사용할 것을 주장했다.
박세당은 노론에 사문난적으로 낙인 찍히면서 비참한 최후를 마쳤으나,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사고를 지녔던 윤증(尹拯)·박세채(朴世采)·남인성·남구만·최석정(崔錫鼎) 등 소론계열의 인물들과 교류하면서 쌓아올린 그의 학문적 업적은 조선 후기의 혁신적인 사상으로 계승되었다. 제자들로는 이익명·이인엽·이탄·이덕수(李德壽)·조태억(趙泰億) 등이 있으며, 소론의 거두인 박태보(朴泰輔)가 그의 아들이다. 저서로는 〈서계선생집〉·〈사변록〉·〈신주도덕경 新註道德經〉·〈남화경주해산보南華經註解刪補〉·〈색경〉 등이 전한다. 1722년(경종 2)에 문절(文節)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다음백과사전에서 옮김)
첫댓글 대단하신 어른이십니다. 권력과 타협하지 않고 백성들 편에 서서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주장하신 선생님!!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고맙습니다.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자료에 감사드립니다^^ , 수고 많아요^^,
2021.2.7일 공부합니다.
상세한 자료를 올려주신 수암 카페지님께 감사드립니다.
서계공(박세당) 이분은 저의 직계선조님이십니다.
서계공(박세당)고택의 안채는 6.25전쟁 때 소실되었습니다.
사랑채고택은<2007년 경기도 문화재 93호 사랑채>로 지정되고 소실된 안채는 2019.8.31 경기도에서 복원했습니다.
이건은 별도의 답 글로 올립니다.
서계 박세당은 1629년(인조7년) 음력 8월 10일 아버지의 부임지인 전라남도 남원부 관아에서 태어났다.
1703.5월 경기도 의정부 석천동(현 의정부시 장암동)으로 낙향하였다.
감사합니다. 오늘도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