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 1992년 7월 11일
'훈증요법' 명의 박재양 옹
제목: 훈증약으로 악성 종양·염증·궤양 치료
요점 : 전통 '훈증요법'의 마지막 명맥을 이어와 유방암ㆍ축농증ㆍ신장결석치질 등에도 효과. 옆구리에서 피고름 쏟아내고 15년 꼽추병 나아 절대절명의 병 고친 환자 은혜 잊지 않고 찾아와...
오늘날의 질병은 화학물질과 공해물질의 독성에 의한 암·당뇨병·고혈압 등 기혈순환 이상의 질병이 대부분이지만, 예전에는 세균의 감염과 타박에 의한 종기·염증·응혈 등의 질환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오늘날에도 이런 질환들이 질병의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오늘날엔 이런 질환을 대부분 화학약품ㆍ항생제ㆍ외과수술 등양의학적 방법에 의존하여 치료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전통의술에는 이들 질환을 치료하는 방법으로 '훈증요법(熏蒸療法)'이라는 독특한 의술이 있었다. 이 '훈증요법'은 약을 태울 생기는 연기나 약을 끓일 때 생기는 김을 몸에 쏘이는 치료법이다. 치료가 가능한 질환은 태우는 약재에 따라 다르지만, 종창·화농·외상·피부병·치질 등 외과질환은 물론이고 골수암·골수염·척수염·관절염·치주염·축농증 등 내부의 염증질환이다. 이 '훈증요법'에 대한 문헌이나 기록은 그 어디에도 없고 명맥 또한 끊어져 언제부터 민간에서 써 왔는지, 그 약물로는 어떤 것들을 썼는지, 그 장단점은 무엇인지, 그 면모는 어떠어떠한지 자세히 알 길이 없다. 다만 <동의학사전>을 보면 '훈증요법'에 대한 부분적인 설명이 나와 있어 그 일단을 짐작케 해주고 있다.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훈법은 외치법의 하나이다. 약물을 태울 때 생기는 연기나, 약물을 끓일 때 생기는 증기를 몸에 쏘여서 치료하는 방법이다. 주리를 소통시키고, 기혈순환을 잘 하게 하여 부은 것을 삭이고, 아픔과 가려운 것을 멎게 하며, 풍을 없애준다. 주로 종양ㆍ궤양ㆍ종기ㆍ치질ㆍ피부병 등에 쓴다. 훈증법으로는 열기훈법과 연훈법이 있다. 열기훈법은 주둥이가 좁은 단지에 약을 넣고 끓여 증기가 날 때 병변부위를 단지 주둥이에 대고 직접 더운 연기를 쏘이는 것이다. 연훈법은 병증에 따라 약을 골라서 부드럽게 가루를 내어 참지에 발라 비빈다음, 기름에 담갔다가 불을 붙여 연기를 병변부위에 쏘이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 민족이 언제부터 이런 '훈증요법'으로 질병치료를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단지 그 주된 재료가 약쑥이란 점에서 쑥뜸과 역사를 같이 했다고도 할 수 있고, 연기를 쏘이는 치료법이란 점에서 불이 발명된 원시시대로까지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하겠다.
그리고 '훈증요법'에 쓰이던 재료도 간혹 민가에서 수은 등으로 훈증을 했다는 말이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약초 외에도 다양한 광물성 물질이 재료로서 이용되었다고 보여지며, 수은이 독성이 강한 물질이란 점에서 때로는 약리에 밝은 사람을 중심으로 쓰이던 치료법이라고도 보여진다.
아무튼 전통 '훈증요법'의 면모는 이제 명맥이 끊어져 우리에게 생소한 치료법이 되었다. 굳이 그 흔적을 찾자면 약쑥을 이용한 간접 뜸 정도라 할 수 있겠다. 이렇게 우리 곁에서 전통 '훈증요법'이 사라진 오늘날, 천만 뜻밖으로 '훈증요법'이란 전통 '의술종자'의 마지막 맥을 이어오고 있는 사람이 있으니, 바로 충남 예산의 박재양(朴再陽 취재 당시 70세) 옹이다. 박 옹은 집안에서 내려오는 훈증요법'을 이어받아 지난 50년 간 주위의 아픈 사람들에게 훈증을 해주어, 소위 '첨단의학'이라고 내세우고 있는 서양의학에서도 난치 내지는 불치라고 여기고 있는 나병ㆍ꼽추병ㆍ골수암ㆍ골수염ㆍ척수염ㆍ관절염ㆍ신경통ㆍ피부병ㆍ유방암ㆍ임파선염ㆍ임파선부종ㆍ갑상선염ㆍ연주창ㆍ버거씨병ㆍ축농증ㆍ치주염ㆍ구강염ㆍ치질ㆍ신장결석ㆍ자궁염ㆍ성병ㆍ독사독 등을 고쳐 오고 있다. 그는 비록 의사면허는 없지만, 이제 그의 의술의 경지와 명성은 인생의 나이테만큼이나 더해져 수많은 난치병 환자를 완치시킨 구료담과 함께 예산을 중심으로 온양ㆍ 당진ㆍ서산ㆍ홍성 등지에 용한 의사로 소문나 있다. 보통 예산 사람들은 박 옹을 '훈하는 할어버지'라 부르고 있다. 필자가 박 옹을 알게 된 것은 민속비방을 발굴하기 위해 1992년 5월에 인천에 머물던 중, 한 시민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부터이다. 그 시민의 이야기는 수 년 전에 그의 아들이 골수염에 걸려 병원에 가서도 낫지 못하고 여러 해 고생했었는데, 박 옹의 훈치료를 받고 나았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사라진 것으로만 알았던 우리 전통 '훈증요법'의 맥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반가운 마음부터 들었다. 그래서 서울에 돌아온 즉시 부랴부랴 '훈증요법'에 대한 관련자료를 찾아보고, 취재계획을 세워 예산에 내려갔다. 예산에 도착한 시간은 점심 무렵. 식사도 할 겸 초행길의 막막한 마음도 달랠 겸해서, 시장 근처에 있는 식당에 들어가 주인인 듯한 아낙에게 박 옹에 대해 물어 보았다. 그녀는 박 옹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예산 장날이 되면, 시장 근처에 방을 얻어 놓고 몰려드는 많은 환자들에게 훈을 해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자세히는 모르지만 뼈가 썩어 들어가는 사람, 등이 굽은 사람, 목과 다리가 퉁퉁 부은 사람 등 어려운 병에 걸렸던 사람들이 많이 나아갔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바로 옆에 있는 방앗간 주인이 박 옹의 훈치료를 받고 골수염을 나은 사람이니 박 옹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알려주었다. 식사를 다 마친 후 식당 아낙이 일러준 방앗간에 가서 사실 여부를 물어 보았다. 방앗간 주인의 이름은 안영호(취재 당시 42세 남자). 그가 골수염에 걸린 것은 20여 년 전이라고 한다. 운동을 하다가 왼쪽 어깨를 심하게 다쳤는데, 며칠 지나자 물이 차오르면서 퉁퉁 부어 올랐다고 한다. 약 3년 동안 좋다는 데를 다 다니며 치료를 받았지만 낫지 않더니, 나중엔 생명이 위태로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몸이 쇠꼬챙이처럼 말라 움직이지도 못하였는데, 박 옹이 1년 동안 수시로 와서 훈치료를 해주었다고 한다. 훈을 하자 처음엔 진물과 고름이 한없이 쏟아져 나오더니, 나중엔 하얀 물뼈가 팔뚝 여기저기서 수십 개 빠져 나왔다고 한다. 그게 다 빠져 나오자 그뒤론 아무런 재발도 없이 골수염이 말끔히 사라졌다고 한다. 그의 말이 사실인지 궁금하여 왼쪽 어깨의 옷을 걷어보니 20년 전의 흔적이 아직도 뚜렷이 남아 있었다. 어깨에서부터 팔꿈치에 이르기까지 물뼈가 빠져 나왔다는 곳이 5군데 있었는데, 한결같이 마치 폭탄 맞은 것처럼 움푹움푹 패여 있었다. 그 선연한 흔적을 보니 당시의 상황이 짐작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안영호씨가 말하는 물뼈는 의학적 용어로 부골(附骨), 또는 부골(腐骨)이라 하는데 만성골수염이나 골결핵 때 상해서 나오는 뼈를 말한다. 대개 풍한습열독과 같은 사기(邪氣)가 뼈에 침습하거나, 외상과 타박으로 기혈순환장애가 생기고 어혈이 염증으로 변하면 생긴다. 치료를 해도 뼈와 살이 자꾸 썩어 들어오기 때문에 의학계에서는 난치병의 하나로 분류하고 있다. 예산읍내에서 박 옹의 훈에 대한 효과를 어느 정도 확인하고, 박 옹의 집을 찾아 나섰다. 예산읍내에서 박 옹이 사는 동네까지는 30여리. 2~3시간에 한 번 꼴로 하루에 5차례밖에 시내버스가 다니지 않는 오지였다. 막연히 오랜 시간을 기다릴 수 없어 걷기로 작정을 하고, 물어물어 박 옹이 사는 집을 찾아갔다. 박 옹은 불쑥 찾아온 외지 사람을 경계하며, 전에도 여러 군데에서 취재를 하겠다고 왔지만 지금껏 거절
해 왔다면서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경계심이 풀어지자 필자는 먼저 그의 훈 치료방법과 훈약의 재료가 궁금하여 물었다. 박 옹은 자신이 훈으로 치료하는 방법은 약을 태워 거기에서 나는 연기를 코로 들이마시는 비훈법(鼻熏法), 병이 있는 해당부위에 직접 뜸을 뜨듯이 연기를 쏘이는 당훈법(當熏法), 입으로 연기를 빨아들이는 식훈법(食熏法)이라고 한다. 기본 방법은 연기를 코로 들이마시는 비훈법이고, 독사에 물렸다든지 급성의 독기로 인체가 썩어 올 때는 병이 있는 부위에 직접 뜸을 떠 연기를 쏘이는 당훈법을 겸하고, 치주염이나 구강염의 경우에는 입으로 연기를 빨아들이는 식훈법을 겸한다고 한다. 훈약의 재료는 약쑥·수은·개신뼈(=狗腎骨)로 간단하다. 단 수은의 독성을 없애기 위해 한 가지 재료가 더 들어가나, 그것은 알려줄 수 없다고 한다. 배합 비율은 약쑥이 99% 이상 차지하고, 수은과 개신뼈는 가루 내어 재티만큼 극미량 들어간다. 이를 한지에 싸 담배처럼 말아 사용한다. 비훈(鼻熏)은 대개 하루에 2차례 하는데, 아침ㆍ저녁 식후에 담배처럼 생긴 훈약을 4cm 가량 잘라 태우면서 연기를 코로 들이마신다. 반면 당훈(當熏)의 경우에는 급성으로 독종이 몸 전체에 퍼져나가고 있기 때문에 신속히 독종을 뽑아내기 위해 병 부위에 연기를 쏘이는 걸 자주 한다. 훈을 하면 뻐근하게 담이나 염증이 한 쪽으로 뭉치기도 하는데, 그럴 때는 사흘 쉬었다가 다시 한다. 그렇지 않고 무리하게 하면 독종을 밀어내는 강한 힘때문에, 독종이 과도하게 터져 나오고 어지럼증이 생긴다. 가능한 한 자신의 체력에 맞게 세기를 조절하는 게 좋다. 또한 처음부터 훈약의 힘에 비해 체력이 달리는 사람은 비훈을 할 때 2cm가량으로 훈약을 줄여 사용한다.
박 옹이 직접 보여주는 훈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먼저 담배처럼 말아진 훈약의 가운데를 못 으로 관통시켜 구멍을 내었다. 구멍을 뚫는 이유는 공기를 잘 통하게 하여 불이 잘 타고 연기가 잘 빠져 나가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리고 이것을 3등분으로 토막을 내어 비훈을 할 때는 소주병을 거꾸로 세워 놓고 그 위에 훈약 한 토막을 풀로 붙여 올려 놓은 다음, 신문지로 만든 깔때기를 씌워 그 끝으로 나오는 연기를 들이 마셨다. 당훈을 할 때는 은박지로 둥글게 만 도구에 훈약 한 토막을 끼워 병이 있는 부위에 갖다 대었다. 그러면 연기가 구멍을 타고 밑으로 내려가 병이 있는 부위에 스며들게 된다. 식훈을 할 때는 담배 빨대에 역시 훈약 한 토막을 끼워 입으로 연기를 빨아 들였다.박 옹은 이러한 자신의 훈약은 소(小) 종양약이 아니라, 대(大) 종양약이라고 말한다. 다른 건 몰라도 세균의 감염으로 생긴 종기나, 응혈로 인한 독종을 빨아내는 데는 훈 이상의 약이 없다는 게 그의 평가다. 따라서 간단한 피부병에서부터 골수암에 이르기까지 악성 근종ㆍ염증ㆍ궤양의 병에는 두루 쓰일 수 있다고 한다.
"골수암과 골수염은 타박에 의해 골피(骨皮)가 상해 병이 뼈를 먹어 들어가 생기는데, 큰 뼈가 다칠 경우에 그런 병이 생겨. 잔뼈를 다칠 경우에는 그런 병이 생기지 않고 삐게만 되지. 코로 훈약 연기를 들이마시고 있으면 신경선을 따라 퍼져 나갔던 염증이 원래 시작했던 자리로 되돌아 뭉쳐서 진물로 흘러 나와. 그러다 나중엔 조그만 물뼈가 피부를 뚫고 여러 개가 빠져 나오는데, 그게 다 나와야 완전히 나을 수 있어." 관절염도 코로 훈 연기를 쐬면 골수염과 마찬가지로 염증이 처음 시작한 곳으로 모이는데, 불에 데인 자리 등 신경이 단절된 곳이 있으면 돼지 비계를 붙여 놓아야 한다고 한다. 돼지 비계는 염증이 막힌 곳을 잘 지나가도록 도와주는 작용을 한다. 염증이 완전히 모이면 진물이 흘러 나오기 시작하는데, 처음에는 검은 딱지가 앉다가 차츰 노한 딱지가 앉고 나중에는 서릿발 같은 하얀 딱지가 생기면서 완치된다고 한다. 주로 류머티스 관절염과 결핵성 관절염에 효과가 크다고 한다. 그리고 살과 뼈가 썩어 들어가는 버거씨병도 훈약을 코로 들이 마시면서, 썩은 부위 위쪽의 성한 부위에 훈약 연기를 쐬면 완치가 가능하다고 한다. 처음엔 생살이 '빠개질듯이 아프다가 진물이 다 흘러나온 후, 제살이 생겨나온다고 한다. 훈약의 강한 힘이 막힌 기혈을 뚫어주기 때문에 치료가 가능하게 된다고 한다. 치근염과 치질의 경우는 해당 부위에 연기를 쏘이면 근종이 빠져 나오고, 성병으로 음부가 썩어오는 경우와 자궁염은 코로 연기를 들이마시는 한편 해당 부위에 연기를 쏘이면 음독이 쏟아져 나온다고 한다. "한 번은 부산에서 온 처자가 매독에 걸려 음부가 썩어 들어가는데, 병원에서는 죽길 바라지 치료방법이 없다고 하는 겨. 그래서 사흘만에 한 번씩 오라고 하여 한 달 간 훈을 해주면서 앞으로 허칠허칠한 게 막 쏟아질 거라고 그랬지. 그뒤 하루는 와서 실제 그런 게 쏟아졌다고 해. 그걸로 다 나은 거지." 한편 박 옹은 그간 여러 명의 나병환자도 고쳐주었다고 한다. 나병은 코로 훈을 하면 온 몸에 퍼져 있던 균종이 약기운에 밀려 땀구멍을 통해 불긋불긋하게 터져 나오는데, 훈약은 미는 힘이 굉장히 강하기 때문에
나병약으로 병이 나았다는 사람도 훈을 쏘여 보면 잠복해 있던 균종이 터져 나온다고 한다. 따라서 나병약을 쓴 사람도 훈을 해야 병 뿌리를 다 뽑을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나병을 고쳐준 사람만도 온양에서 온 사람, 홍성 나환자촌에서 온 사람 등 여럿 된다는 것이다.나병과 같은 어려운 병을 고쳤다니, 그게 사실이라면 훈약의 위력에 대해 새삼 생각치 않을 수 없는 일 이라 하겠다. 그 사실을 취재기간 중 직접 환자를 만나 확인할 수 없었지만, 꼽추병을 고쳤다는 주변 사람들의 말을 통해 훈약의 위력은 어는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예산읍에 사는 전인식(취재 당시 45세 남자) 씨는 그의 어머니가 마흔 살 무렵 척추 결핵이라는 병에 걸렸다고 한다. 척추에 결핵균이 침투한 병인데, 병원에서는 치료 불가능이라고 하였다. 병이 심해지면서 허리는 완전히 굽어지고 한쪽 다리는 자꾸 당겨 올라가 동네 사람들도 모두 그의 어머니를 죽을 사람이라고 인정하였다. 당시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박 옹에게 훈약을 사다 코에 쏘여 주었다. 박
옹은 그의 어머니 상태를 보더니 일 년 정도 하면 나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뒤 실제로 열 달 만에 옆구리에서 고름이 두 대접 정도 터져 나오더니 말짱히 일어설 수 있었다. 전씨는 그제야 훈약이 참으로 좋은 약인 걸 느꼈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박 옹을 "의학이 발달한 병원에서도 못 고치는 병을 훈약으로 어떻게 고치냐. 의사면허도 없는 돌팔이"라고 무시하기도 하지만, 알고 보면 병원에서 못 고치는 병을 훈약으로 고쳐줘 저승길 가는 사람 잡아준 것만도 헤아릴 수 없다고 말한다.
당진군에 사는 김규수(취재 당시 52세 남자) 씨는 그의 아들이 3살 때부터 18살 때까지 척수염을 앓아 반 꼽추 상태였다고 한다. 박 옹이 1년 반 정도 훈치료를 해보자고 하여 시작했는데, 1년 정도가 되자 옆구리로 고름이 쏟아지면서 나았다고 한다. 그는 죽은 아들이 살아온 기분이라 박 옹에게 쌀 7가마니를 사례하였다고 한다. 그 뒤 그의 아들은 허리도 펴지고 키도 커져 정상적으로 생활하고 있다고 한다.
예산군 대술면 사는 한 농부는 10년 전만 해도 박 옹이 사는 마을은 리어카 길도 없고 지게 지고 다녀야 할 만큼 산간 벽지였는데, 정강이가 퉁퉁 부은 사람, 여기저기 짓무르고 썩어 냄새 지독히 나는 사람들이 숱하게 업혀 그의 집을 찾아 다녔다고 귀띔한다. 지금도 하루 대여섯 차례 다니는 버스 승객 중 상당수는 그의 집을 찾아가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한편 박 옹은 독사독을 빼내는 데도 훈약의 효과가 큰데, 독사에 물려 다리가 통통 붓고 다리를 잘라 내야 할 처지의 사람은 코에 훈을 쏘이면 독물이 훈의 힘에 밀려 터져 나와 이내 부기가 내린다고 한다. 이때 뱀 이빨 자국이 난 주변을 칼로 째어 해당 부위에 연기를 쏘이면 나머지 누런 독물이 흘러 나와 아무 이상 없이 나을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박 옹은 예전부터 유방염이나 유방암도 훈약으로 고친 적도 있다고 한다. "예전엔 여자들에게 젖유종(=유방염)이 많았어. 유종이 많았던 건 속옷을 가슴에 꽉 조여 입어 유독(乳毒)이 뭉쳐 그렇게 되었지. 이런 젖유종 환자를 고친 것만도 숱하게 되지. 젖꼭지 아랫부분을 칼로 째서 잔등에 무릎을 대고 순간적으로 누르면 뭉쳤던 고름이 확 터져 나와. 그러고 나서 코로 훈을 쐬면 근종이 완전히 물러 나오지." 그런데 박 옹은 지금은 여자들이 헐렁한 옷을 입기 때문에 유종이 없는 대신에, 허리를 꽉 조여 입어 신
장 부분에 혈액순환이 안 돼 남녀를 불문하고 신장결석증 환자나 자궁염과 방광염 환자가 많다고 한다. 특히 신장에 결석이 생겨 그것이 신경선을 꽉 누르고 있으면 대소변이 잘 안 나가고, 변비가 심하게 되고, 점차 담이 고여 넓적다리도 커지고, 나중엔 디스크에 걸리게 된다고 한다. 신장결석의 경우에는 파리 머리 정도의 결석을 찾아내어 뭉친 데를 훈으로 쑥뜸을 뜨듯 몸 앞쪽과 그리고 같은 위치의 뒤쪽을 뜨고, 코로 연기를 쐬면 완전히 결석이 풀려 나온다고 한다. 이쯤 되면 그를 민간의 외과의사라 칭해도 좋을 듯하였다. 그러나 그의 치료 도구는 대통에 든 작은 칼과 훈약, 그리고 성냥 정도가 전부이다. 그렇다면 훈약의 재료가 되는 약쑥과 수은과 개신뼈에는 어떤 약성이 있기에 이토록 엄청난 효과를 내는 것일까. 약쑥은 경맥을 잘 통하게 하고, 풍한을 없애며, 아픔을 멈추게 해주는 효능이 있다. 수은은 벌레를 죽이고, 담을 삭이며, 적취를 없애고, 대소변을 잘 통하게 하는 효능이 있다. 그러나 독이 있어 함부로 쓰면 위험하다. 개신뼈는 숫컷 개의 성기에 들어있는 막대기 같은 뼈를 말한다. 이 개신뼈의 약성에 대한 설명은 어느 문헌에도 없고, 약으로 썼다는 얘기도 없다. 박 옹은 그의 훈약에 개신뼈가 들어가는 게 비방인데, 개신뼈는 수은독을 없애주는 작용을 한다고 한다. 예전의 비방서에 보면 훈약을 만들 때 우황과 사향이 들어가는데, 그렇게 하면 너무 비싸 약을 제대로 만들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의 간단한 재료로도 충분한 효과가 있으니, 비싼 약을 넣을 필요가 없다고 한다. 이런 그의 말을 종합해보면 결국은 약쑥과 수은의 작용이 악성 근종을 풀어내는 힘을 발휘한다고 볼 수 있다. 그가 밝히지 않는 한 가지 약재 역시 수은독을 없애기 위해 넣는 것이라는 걸 보아 모든 효능은 약쑥과 수은에서 나온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약성으로 보아 약쑥은 수은을 전신의 경맥에 순환시키는 역할을 하고, 수은은 강한 힘으로 악성 근종과 담을 풀어 밖으로 밀어내는 역할을 하면서 그토록 엄청난 효과를 발휘한다고 설명할 수 있겠다. 독을 제독해서 쓴다면 큰 약이 된다는 말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데, 그의 약을 보면 그 말이 정녕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하겠다. 아무튼 그의 훈약은 앞으로도 연구해볼 가치가 있으며, 수은의 효능 또한 밝혀져 나갈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한편 이렇게 훈약에는 그 재료로서 수은이 들어간다는 점에서, 예전부터 입이 터지고 코피가 나오는 등의 부작용으로 말썽이 많았다. 따라서 훈약이 좋긴 하나 무서운 약으로도 인식된 것도 이때문이었고, 훈증요법이 요즘 널리 쓰이지 않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가 적지 않게 작용했으리라 본다. 예산 인근에는 박 옹 이외에도 훈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 그러나 박 옹의 훈약은 한약방이나 약국을 경영하는 사람들도 사다 쓸 만큼 다른 집과는 달리 부작용이 없기로 유명하다.
손자의 중이염 치료를 위해 홍성에서 왔다는 김인순(취재 당시 63세 여자) 씨는 예전에 다른 집의 훈약을 썼을 때는 수은의 독성 때문에 코피도 터지고 입이 허는 등 부작용이 심했는데, 박 옹의 훈약은 오래써도 아무런 부작용이 없었다고 말한다. 취재 중에 만났던 사람들 역시 1년 가까이 박 옹의 훈약을 사용했어도 전혀 부작용을 경험하지 못했다고 말하였다. 박 옹의 훈약값은 1개에 1천원이다. 난치병을 고치는 약값치고는 초라하기 그지 없다. 그러나 이것도 대부분은 거저 주는 경우가 많고, 아픈 사람이 오라고 해서 가도 차삯만 받아 가지고 오는 게 전부라고 한다. 그는 병을 고쳐 주는 건 남에게 봉사하는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술 한 잔 대접 받으면 그걸로 족하다고 한다. 지금껏 그가 환자의 병을 고쳐 주고 받은 최고의 대가는 10년 전 당진군에 사는 김규수 씨 아들의 꼽추병을 고쳐 주고 받은 쌀 7가마니이라 한다. 대신 손발이 썩어 절단될 지경에 이르렀다 고친 사람이나, 죽을 병에 걸렸다 살아난 사람들이 그의 은혜를 잊지 않고 수양아버지로 삼아 인간적으로(?) 보답하고 있어 흡족하다고 한다. 얼마 전에도 예산 원풍리에 사는 부인이 손을 자르지 않고 낫게 해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갔다고 한다. "내 약이나 의술은 하급이라, 병원에서 못 고친 병을 고칠 수 있다고 하면 약 팔아 먹으려는 욕심에서 거짓말한다고 생각할 거야. 그러나 분명히 나을 수 있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그대로 둘 수는 없지. 그냥이라도 갖다 쓰게 해서 낫게 하는 게 목적이지. 고치는 게 간판이고, 인정이 도덕이야. 돈보다는 병을 낫고 서로 은인이 되는 게 중요하지." 그의 의술관에는 풋풋한 인정이 배어 있다. 약종상하는 사람이 그의 훈약을 대량으로 팔아 주겠다는 걸 매번 거절했던 것도 돈을 생각치 않는 그의 의술관 때문이다. 그는 먹고 사는 건 농사 지으면 그만이라고 말한다. 거북등처럼 투박하고 거친 그의 손과 발은 의술보다는 농사로 뼈가 굵은 인생 역정을 말해 준다. 그런데 박 옹은 의사면허가 없다는 이유로 시비에 휘말려 곤욕을 치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한다. 또한 돈을 목적으로 협박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고 한다. 그때마다 주변 사람들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박 옹에게 치료를 받은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박 옹은 돈에는 전혀 개의치 않고 어려운 병에 걸린 사람이 있거나 돈이 없는 사람을 보면 "돈 없다고 약을 못 쓰는 일 없이 그냥이라도 갖다 써서 꼭 병을 나으라"고 당부하며 훈약을 거저 퍼 준다고 말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를 '무면허의료행위자'로 구속시키려 해도 주민과 환자들이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구속시키지 못한 것도 여러 번 된다고 한다. 간혹 박 옹은 무면허 의료업자 단속이 시작되면, 예산을 떠나 유랑생활 아닌 유랑생활을 하기도 한다. 유랑지는 대개 전에 팔을 잘라야 될 사람이나, 골수염ㆍ자궁물혹 등을 낫게 해주어 수양아들 또는 딸로 삼아 달라고 한 사람들의 집이다. 대개 홍성ㆍ광천ㆍ당진 등지로 가는데 그는 비록 면허없이 단속의 대상이 되는 몸이지만, 그곳에서는 잘 담은 술로 융숭한 대접을 받고 그가 간 날은 그곳의 환자들이 명의가 왔다고 몰려 들기도 한다고 한다. 박 옹은 경찰에 붙들려 구류 18일 간을 살고 나온 적도 있다. 그때 환자는 5~6년 간 피부병을 앓고 있던 할머니였는데, 훈약기운으로 속에 뭉쳐 있던 병독이 확 터져 나오자 더 번진 것으로 알고 간호사였던 딸이 훈약 부작용이라는 병원의 진단을 받아 그를 고소했다. 면허를 가진 의사의 증명이었으니 그로서는 꼼짝 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집안 식구들도 그가 의료행위를 하는 것을 결사 반대하고, 환자가 찾아오는 것도 탐탁치 않게 여긴다고 박 옹의 장남 박승준(취재 당시45세)씨는 말한다. 박 옹도 그런 곤욕을 치르고 집에 돌아오면,앞으로 절대 않겠다고 맹세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에는 찾아오는 환자를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고 한다. "않겠다고 하면 그럼 나는 어떻게 하냐고 달라 붙어요. 뻔히 손쓰면 나을 수 있는 걸 안 할 수도 없고,맹세가 노상 헛일이라. 결국 의술은 고치는 게 간판이여." 더구나 대개 종양 등 염증성 질환에 잘 걸리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이기에 그냥 돌려보낼 수 없었다고 그는 말한다. 이런 그의 마음이 있었기에 환자가 그에게 끊이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하얀 가운 속에 번득이는 '메스'보다는, 그의 투박한 손에 잡힌 대통 속의 작은 칼과 훈약이 더욱 친근하고 심리적으로 위안을 주는 것도 이 때문이리라. 박 옹이 훈법을 배운 것은 스무 살 무렵으로, 그보다 스무살 위인 셋째 형으로부터이다. .박 옹의 고향은 예산군 덕산면이며, 그는 9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형은 항상 훈법과 치료방법을 연구하고, 정성을 들였는데 어디서 훈법을 배워 왔는지는 모른다. 그는 형과 고향 덕산에서 찾아오는 환자를 돌봐 주었다. 특히 예전에는 영양부실로 각종 피부 부스럼이나 종기 등이 특히 많았고, 농경생활인지라 뱀에 물린 사람, 농기구에 다쳐 독종이 오른 사람, 타박상으로 염증이 심한 사람이 많았다. 당시 의약이 제대로 없는 상황에서 훈법은 독종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유용한 치료수단이었다. 그러다 광복이 되던 이듬해에 그의 형이 병으로 죽자, 그는 그때 배운 방법대로 혼자서 환자가 찾아오면 치료를 했다고 한다. 그의 형은 늘 환자들을 지극 정성으로 대하고, 자기 몸을 돌보지 않을 정도로 열심이었다고 한다. 그의 형은 종기치료를 많이 하였는데, 종기를 칼로 째고 고름을 입으로 빨아내는 일을 자주 하여 그 때문에 위장병에 걸려 40세의 아까운 나이로 죽었다고 한다. 형이 죽자 그렇다고 그는 한가하게 환자만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고 한다. 열한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스무 살에 어머니를 여윈 그로서는 찌든 가난을 해결하는 게 급선무였다. 그는 당시에 어깨 품팔이를 해 겨우 생계를 유지했는데, 부잣집에서 쌀 1가마를 가져오면 10일 가서 일해 주어야 했다. 이불 보따리 하나와 냄비짝을 들고 이리저리 이사 다닌 것만해도 수도 없고, 어느 때는 하루에 두 번씩 이사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렇게 가난했지만 그의 의술은 남들이 다 알아줘 독종 난 사람은 그를 찾아왔고, 길을 걸어가다가도 낫에 베이거나 농기구에 다쳐 동티 난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그 자리 앉아 훈약으로 치료해 주었다. 따라서 누구도 그를 가난뱅이라고 무시하지는 못했다. 그의 학력은 왜정 때 야학당 다닌 게 고작이다. 그것도 사흘 만에 국문을 깨치고는 더 이상 교육을 받지
않았다. 의서나 의학 공부를 한 적도 없다. 모든 건 경험으로 터득하여 오늘의 의학경지를 이루었다. 그는 의술이란 주술의 성격이 강해 비단 배워서만 되지는 않고, 환자를 구하려는 정성스런 애정과 성심을 다한 수양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박 옹은 3년 전 중풍에 걸린 뒤로 거동이 불편하다. 박 옹의 몸이 불편한 것은 오랜 동안 수은을 임상 실험하다 얻은 결과라 생각되니, 그의 험난했던 인생을 보는 듯하여 마음이 무거웠다. 취재를 다 마치고 돌아 나오는 필자를 배웅하며, 박 옹은 이제는 모든 게 때가 지났다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훈증요법'이란 우리네 '의술종자'의 마지막 맥을 잇고 있는 박재양 옹. 농부는 비록 굶어죽을 망정 종자씨는 베고 죽는다고 했는데, 우리는 그간 우리의 '의술종자'에 대해 얼마나 무관심한 채 살아왔던가. 그리고 그러는 사이에 소리도 없이 사라진 우리 '의술종자'는 또 얼마이런가. '훈증요법'의 명맥이 박 옹의 대에서 끊어지지 않길 간절히 바라면서 덜컹거리는 시골버스에 몸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