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6/07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2002 월드컵축구대회, 1999년 발행
2009 - 한국, 월드컵 축구대회 7회 연속 본선 진출 확정
허정무 감독이 이끄는 한국 축구대표팀이 2009년 6월 7일 월드컵 본선 진출을 확정지었다. 이날 새벽(한국시간) 아랍에미리트연합(UAE) 두바이 알 막툼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0 남아공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에서 한국은 2-0으로 UAE에 승리하며 4승 2무 승점 14점을 기록해 남은 경기 결과에 관계없이 본선에 올라가게 됐다. 한국 축구대표팀은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출전을 시작으로 7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이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임광희 동아닷컴 기자 oasis@donga.com /동아닷컴TV 2010-06-04 16:48:16
http://etv.donga.com/view.php?category=002013
- 박세리 (공중전화카드)
2007 - 박세리 명예의 전당 최연소 가입!
[앵커멘트]
박세리 선수가 세계 골퍼들에게 최고의 영예로 꼽히는 LPGA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습니다.
미국 진출 10년 만에 이룬 쾌거로 최연소 가입이라는 새로운 역사까지 쓰게 됐습니다.
배성준 기자의 보도입니다.
[리포트]
박세리와 유독 인연이 깊었던 맥도널드 LPGA 챔피언십!
메이저대회 최초 우승이자 3승을 안겨줬던 이곳은 약속의 무대가 됐습니다.
박세리선수가 LPGA 진출 10년 만에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 것입니다.
입회에 필요한 우승 포인트를 지난 2004년 미켈롭울트라오픈에서 채웠던 박세리에게는 3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습니다.
'투어 10년 규정'을 충족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한국인 1호, 아시아 최초이면서 최연소 가입자인 박세리는 이제 새로운 시작이라고 각오를 밝혔습니다.
[인터뷰:박세리, LPGA 프로골퍼]
"팬들 덕분에 제가 있었고 더욱 열심히 해서, 이제가 시작이라고 생각하고요 더욱 열심히 하겠습니다."
명예의 전당에 24번째로 이름을 올린 박세리는 이미 새로운 목표를 정했습니다.
안타깝게 못이뤘던 커리어 그랜드슬램의 달성입니다.
맥도널드LPGA 챔피언십과, US 오픈, 브리티시오픈까지 석권한 박세리 앞에 남아 있는 메이저 대회는 나비스코 챔피언십뿐!
지난달 대회에서 중반 라운드까지 선두를 달렸지만 갑작스런 샷 난조로 꿈을 접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나비스코마저 정복하겠다는 것이 박세리의 목표입니다.
여기에 다승왕 등극으로 올해의 선수상까지 차지하겠다는 포부도 가지고 있습니다.
골퍼에게는 최대의 영예인 '명예의 전당'에 입회한 박세리!
지금까지 새로 써 온 것 보다 더 많은 것을 골프 역사에 올리겠다는 야심찬 도전은 이제 시작입니다.
YTN 배성준입니다.
/YTN 2007-06-08 08:24
- 금강산 관광 기념 (1998.11.18. 발행)
2005 - 금강산 관광객 100만 명 돌파
금강산을 방문한 남측 관광객의 수가 2005년 6월 7일 100만 명을 넘어섰다. 현대아산은 1998년 11월 18일 금강산 관광선 ‘금강호’의 첫 출항 이후 이 날까지 바다를 통한 관광객 55만7681명, 2003년 9월부터 본격화된 육로 관광객 44만3345명이 금강산을 찾아 금강산 관광 개시 6년 6개월 20일 만에 전체 관광객 수가 100만 명을 넘어섰다고 밝혔다. 이날 현대아산 측은 관광객 100만 명 돌파를 기념해 강원 고성군 통일전망대 앞에 있는 남북출입사무소에서 기념행사를 가졌다.
임광희 동아닷컴 기자 oasis@donga.com /동아닷컴TV 2010-06-04 16:48:16
2001 - 볼리비아의 대통령 파스 에스텐소로(Paz Estenssoro, Victor) 사망
파스 에스텐소로 [Paz Estenssoro, Victor, 1907.10.2~2001.6.7]
볼리비아의 정치가.
타리하 출생. 산안드레스대학 졸업하고, 1932년 파라과이와의 차코전쟁에 참전한 뒤, 변호사와 모교의 경제학 교수를 거쳐, 1941년 혁신정당인 민족혁명운동(MNR)을 결성하였다. 1943년 비자로에르정권의 재무장관이 되었는데, 1946년 정권이 무너지자 아르헨티나로 망명하였다.
1952년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을 일으켜 MNR이 정권을 장악하자 대통령이 되어 3대 재벌이 지배하던 주석(朱錫)광산을 국유화하고, 토지개혁 ·산업의 다각화 ·문맹자에게 선거권 부여 등의 혁명적 개혁을 단행하였다. 1956년 실레스수아소에게 대통령직을 양보, 1964년 재선되었으나, 그 해 11월 군사쿠데타로 대통령에서 물러났다. 그 후 장기간에 걸친 망명생활로부터1980년에 귀국, 1985년 선거에서 기적의 부활을 이룩해 세번째 대통령이 되었다. /naver
2000 - 미국 연방지법, 마이크로소프트사(MS)를 두개로 분할하라고 판결
최대의 소프트웨어 업체인 미국 마이크로소프트(MS)가 컴퓨터 운영체제(OS)와 소프트웨어 분야를 각각 담당하는 2개 회사로 분할하라는 미국 법원의 판결을 받았다. 미국 워싱턴 연방지법은 이날 오후 반독점법을 위반한 MS에 대해 컴퓨터 산업의 균형적 발전을 위해 2개 회사로 분할하도록 명령했다. 토머스 펜필드 잭슨 판사는 미 법무부및 17개 주정부가 MS사의 향후 독점행위 방지를 위한 시정조치로 제안한 분사안을 받아들여 이같이 판결했다. MS는 지난 4월 OS시장의 독점적 지위를 이용,기본 프로그램인 윈도에 인터넷 실행용 소프트웨어 익스플로러를 끼워팔아 넷스케이프 등 경쟁사를 배제하는 등 부당경쟁을 해왔다는 판결을 받았다. 잭슨 판사는 4개월 이내에 회사 분할 계획을 제출하고 1년 내 분할을 완료하도록 명령했지만, 빌 게이츠 회장은 이날 판결에 대해 즉각 항소했다. /조선
1995 - 리덩후이[李登輝] 대만 총통, 대만 역사상 최초로 미국을 방문
이등휘 대만 총통이 1995년 6월 7일 대만 지도자로는 처음 미국을 방문했다. 그의 방미는 모교인 코넬대학 동창회 참가를 위한 개인자격으로 이루어졌으나 탈냉전 이후 달라지고 있는 미-중관계를 선명히 드러냈다. 이 총통의 이날 방미는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대만의 노력이 국제적인 인정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며 중화민국의 존재를 부각시켰다는 데 의의가 있다.
이등휘 총통은 중국이 대만의 외교를 방해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자신의 미국 방문이 달나라에 가는 것 만큼이나 어려웠다고 말함에 따라 미-중, 중-대만간의 갈등이 크게 심화됐다.
중국은 실전을 방불케하는 대규모의 군사훈련을 통해 대만을 위협했으며 또한 미국에 대해서도 주미대사소환으로 항의함에 따라 미국은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가입의 방해와 인권시비로 맞서는 결과를 낳았다. /조선
1982 - 모부투 자이르 공화국 대통령 방한
"자이르 공화국의 대통령 겸 국민혁명당(MPR) 총재인 모부투 세세 세코(Mobutu Sese Seko, 1930~1997) 대통령 내외분이 전두환 대통령의 초청으로 1982년 6월 7일부터 10일까지 4일간 우리나라를 공식 방문한다.
중부 아프리카에 위치하여 콩고, 중앙 아프리카 공화국, 카메룬 등 9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자이르는 1960년 6월 30일 독립하였고, 인구는 약 1900만, 면적은 2344855Km로 아프리카에서는 수단에 이어 두번째로 큰 나라이다. 자이르는 다이아몬드. 코발트, 동, 주석 등의 세계적인 산지임과 동시에 풍부한 농산자원과 산림자원을 보유하고 있어 아프리카 최대의 잠재력을 갖고 있다. 공용어는 불어를 사용하고 있다. 자이르는 비동맹 중립 외교를 표방하고 있으며 아프리카 국가들에 대해서는 물론, OAU(아프리카 단결기구) 및 비동맹 회의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뿐만 아니라 유엔에서도 제3세계 그룹에 대하여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우리나라와는 1963년 외교관계를 수립한 이후 통상, 경제 협력, 문화 및 인적교류 면에서 양국 간의 관계를 급속히 발전해 오고 있으며, 유엔 및 국제 무대에서 우리나라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이번 모부투 대통령의 방문은 양국 간의 기존 우호협력 관계를 재확인함과 동시에 이를 더 높은 차원으로 발전 및 심화시키는 양국관계 역사의 새로운 장을 전개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체신부에서는 모부투 대통령 내외분의 방한을 진심으로 환영하면서 이 기념우표를 발행한다."
(우표발행안내) /k-stamp
1981 - 이스라엘, 이라크 핵시설 공습
[어제의 오늘]1981년 이스라엘, 이라크 핵시설 공습
ㆍ‘노벨 평화상’ 베긴 총리의 선택
이스라엘 6대 총리 메나헴 베긴은 1978년 이집트와의 협상을 통해 평화조약을 이끌어냈다. 그는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당시 이집트 대통령 안와르 사다트와 함께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평화주의자라기보다 강경한 극우주의자로 통한다. “어떤 경우에도 이스라엘 국민을 위협하는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는 적을 용서하지 않겠다”는 ‘베긴 독트린’은 그의 강경한 면모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베긴 독트린을 낳은 직접적인 계기는 이라크의 핵시설이었다. 이라크는 70년대 중반부터 프랑스의 기술을 수입해 핵시설을 건설했다. 바그다드로부터 18㎞ 남동쪽에 핵발전소가 세워졌다. 발전소는 ‘오시라크’라 불린 40MW급 원자로를 보유했다. 베긴은 오시라크를 자국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했다. 베긴 정부의 한 고위 관리는 “오시라크가 만들어낼 수 있는 핵폭탄은 히로시마에 떨어진 것에 필적한다”며 “이스라엘 국민에 대한 치명적인 위험이 증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스라엘은 프랑스를 상대로 갖은 외교전과 첩보전을 동원해 오시라크 건설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오시라크 건설 방해공작은 수포로 돌아갔다.
베긴 정부가 선택한 최후의 카드는 공습이었다. 일명 ‘오페라 작전’을 실행에 옮기기로 한 것이다. 81년 6월7일 이스라엘 남부 에치온 공군기지에서 F-15, F-16 전투기 여러 대가 이륙했다. 이들은 사우디아라비아 상공을 가로질러 핵시설까지 날아갔다. F-16기에서 폭탄 16기가 투하됐고, 오시라크는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다. 공습에 참가한 이스라엘 전투기는 무사 귀환했다. 핵시설 공습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다행인 것은 폭격에도 핵 누출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오시라크가 완성을 앞두고 있던 탓에 핵연료가 채워지지 않았던 것. 공습 3주 후 베긴은 총리로 재선됐다. 하지만 국제사회는 일제히 이스라엘에 비난을 퍼부었다. 이라크와 프랑스는 오시라크가 핵무기 용도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그해 말 만장일치로 이스라엘에 대한 제재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오시라크는 프랑스 기술력으로 재건되던 중 걸프전 때 다시 수차례 폭격당했다. 결국 오시라크는 미군 공격으로 폐허가 됐다. 이스라엘의 오시라크 공습으로 말미암아 이라크는 핵억지력을 상실했고 이후 걸프전에서 속절없이 당했다는 분석도 있다.
서영찬 기자 /경향신문 2010-06-06 17:53:39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1006061753395&code=100100&s_code=ap005
1979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아우슈비츠 방문
1979년 오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폴란드에 있던 나치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방문한다.
유대인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에서 입었던 복장으로 교황을 맞이한다.
바오로 2세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찾아 유대인 희생자들을 추모한 첫 교황이 됐다.
그는 이처럼 가톨릭교와 유태교의 반목을 끝내기 위해 노력했다.
폴란드 출신으로 처음 교황이 된 요한 바오로 2세는 1년 전 교황으로 선출되기 직전까지 아우슈비츠에서 가까운 크라코우(Krakow)에서 대주교로 사역했었다. /YTN
1979 - 최초의 유럽의회 직접선거 실시 (7일~10일)
1965년 3월 유럽철강공동체(ECSC), 유럽경제공동체(EEC) ,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 3개의 기구를 EEC 이사회에서 통합하기로 결정 되었다.
1967년 6월 집행기관과 이사회의 통합이 이루어지고 명칭도 EC 로 바뀌었다. EC는 기본이념 달성을 위해 관세동맹, 공동시장, 공동농업정책을 우선적으로 추진하였으며 1973년 1월 1일 영국, 아일랜드, 덴마크를 새로운 회원국으로 받아들였다. 1979년 3월 유럽통화제도 ( EMS )를 발족하였으며, 1979년 6월 7~10일에는 최초로 유럽의회의 직접선거를 실시하였다. EC 회원국들은 역내 시장완성을 위해 1986년 2월 단일 유럽의정서를 채택했다.
http://report.dreamwiz.com/biz/view.hcam?no=10721457&menu_key=EXAM&top_cate=exam
1975 - 필리핀의 마르코스 대통령, 중국 방문
필리핀은 독립 후 공화국과의 외교는 1960년대까지 친미(親美) 외교정책으로 일관하여 66년에는 베트남 전쟁에도 참전하였고,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에도 가입하고 있다. 1973년에는 신외교정책을 선언, 1975년 6월 마르코스가 중국을 방문하고 국교를 수립한 데 이어 이듬해 6월에는 소련과도 수교하였다. 카터 행정부의 인권정책으로 한때 미국과의 관계에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으나 레이건 행정부가 들어선 뒤 정상화되었다. 1998년 6월 집권한 에스트라다 대통령은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어 정치적안정을 유지하고 있으며 인권과 민주주의에 비중을 두고 미국, 일본 및 ASEAN과의 기존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필리핀 해외 근로자의 권익보호에 중점을 두고 있다. /naver
1975 - 미국의 프로 농구선수 앨런 아이버슨(Iverson, Allen) 출생
아이버슨 [Iverson, Allen Ezail, 1975.6.7~ ]
앨런 아이버슨(Allen Ezail Iverson, 1975년 6월 7일 ~ )은 NBA 농구 선수이다. 주 포지션은 슈팅가드로서, 신장 183cm, 체중 74.8kg의 신체조건을 지녔다. 조지타운 대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96년 NBA드래프트 1라운드 1순위로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에 지명되었다. 데뷔 첫 해, 리그 신인왕에 올랐으며, 총 4차례(98/99시즌, 00/01시즌, 01/02시즌, 04/05시즌)에 걸쳐 리그 전체 평균 득점 1위를 차지하였고, 00/01시즌에는 리그 MVP로 선정됨과 동시에 소속팀을 NBA final 준우승으로 이끌기도 하였다. 06/07시즌 중에 덴버 너게츠로 트레이드 되었고, 08/09시즌 중 다시 디트로이트 피스톤즈로 트레이드 되었으나 시즌 이후에는 팀에서 방출되었으며, 09/10시즌을 앞두고는 멤피스 그리즐리스와 계약을 맺었지만 다시 3경기만에 방출되었다. 이에 한때는 은퇴를 선언하기도 하였으나 현재는 원 소속팀이었던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로 복귀하여 활약 중에 있다.‘The Answer’라는 애칭을 갖고 있다.
1996년 NBA 신인드레프트에서 당당하게 1순위로 지명된 아이버슨은 NBA 역사상 최단신 득점왕이자 최단신 MVP 수상자이기도하다. 183cm(그나마 농구화를 신고 측정한 키)의 최단신 축에 끼는 아이버슨은 데뷔후 최고의 스코어러 반열에 단숨에 올라서며 주목을 받기 시작했으며, 신인 그리고 소포모어 시절에는 인터뷰에서 수차례 자신감을 피력했다가 버릇없는 신인선수로 오인받기도하였다.
그의 NBA 입성에 맞추어 소속팀 필라델피아는 명장 레리브라운 감독을 영입하면서 리빌딩을 시도하게된다. 브라운은 아이버슨이 최단신임에도 불구하고 슈팅가드로 기용하는 파격적인 팀운영을 하였으며, 다소 득점본능이 높고 슈퍼스타기질이 넘치는 아이버슨의 성향을 고려, 수비력 좋은 롤플레이어들 위주로 팀을 바꿔나가며 단시간내에 플레이오프 진출 팀으로 바꿔놓는다.
98/99시즌 아이버슨은 NBA 역사상 최단신으로 득점왕에 오르며, 성공적인 포지션 전향을 하였고, 처음 진출한 플레이오프 무대에서 앤퍼니하더웨이가 이끄는 올랜도매직을 이기며 2라운드까지 진출하게 된다.
98/99시즌과 99/00시즌 플레이오프에 성공하였지만 2라운드의 벽을 못넘던 필라델피아와 리더 아이버슨은 언론의 도마에 오르며, 레리브라운의 지도력 그리고 아이버슨의 훈련 태도등에 관한 여러가지 불화에 휩싸이게 된다.
00/01 시즌을 앞두고 아이버슨은 비교적 부상이 적은 몸으로 시즌을 시작하였고, 필라델피아는 연승행진을 이어가며 시즌을 시작한다. 이시즌에 아이버슨은 다시한번 득점왕에 오르며, 필라델피아를 동부컨퍼런스 1위로 끌어올리며 팀을 한 단계 더 도약시키는 한편 자신은 정규시즌 MVP와 올스타전 MVP를 수상한다. 한편 필라델피아는 올스타전이후 이전까지 활약하였던 테오라틀리프를 부상을 이유로 애틀랜타의 수비형 센터 디켐버 무톰보로 트레이드 하였으며 이는 단기적으로 우승에 도전하려는 구단의 승부수였다.
00/01 플레이오프에 들어서면서 아이버슨은 몸에 10군데가 넘는 골절, 타박상등을 입고서도 프로선수가 보여줄수있는 극한의 투혼을 부여주며 농구팬들에게 다시 한번 어필을 하게 된다. /위키백과
1973 - 브란트 서독 수상, 2차대전후 처음으로 이스라엘 방문
1969년 독일 수상에 선출된 빌리 브란트(1913~1992)는 2차대전 피해 국가들을 방문하여 독일과의 관계를 회복시키고 분단된 독일 통일의 초석을 다진 뛰어난 수상으로 평가 받는다. 당시 2차대전을 일으킨 독일에 대한 세계의 시선은 싸늘했다. 하지만 브란트는 온갖 시련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의지로 '유럽 통합'과 '독일 통합'에 기초를 쌓았다.
1970년 브란트는 먼저 폴란드를 방문해서 유대인 학살 기념비를 찾아 나치의 만행에 대해 사죄했다. 헌화 도중 브란트는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오랫동안 참회의 묵념을 올렸다. 각본 없는 수상의 행동에 외교관들은 당황했지만 세계는 수상이 보여준 진심어린 사죄의 눈물과 용기에 찬사를 보냈다. 나치시대 때 브란트는 오히려 반나치 투쟁을 했었고 나치를 피해 망명 생활을 했던 사람이었다. 브란트는 이듬해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1973년 브란트는 서독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이스라엘을 방문하였다. 당시 독일에 대한 유대인의 격앙된 감정으로 수상의 방문 자체가 껄끄러웠지만 브란트는 솔직하고도 정중하게 나치가 유대인들에게 가했던 만행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하고 용서를 청했다. 이스라엘 수상은 멋진 말로 화답했는데 이 말이 유명한 말이 되었다. "우리는 용서한다. 그러나 잊지는 않을 것이다." 이 방문이 독일과 이스라엘의 화해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어 브란트는 분단된 독일의 통합을 위해 온 힘을 다했다. 브란트의 정책은 '동방 정책'이었다. 동·서독이 냉전을 버리고 화해 협력으로 돌아서게 한 것이다. 당시 독일의 보수적인 사람들과 정적들은 브란트의 정책을 맹비난하였다. 브란트에 대한 인신 공격에서부터 좌파 공산주의자, 동독 퍼주기 등 온갖 비난이 난무했다. 수많은 비난에도 불구하고 브란트는 흔들리지 않고 동·서독의 통합을 추진해나갔다. 그리하여 브란트 시대에 동·서독은 함께 유엔에 가입하였고 이산가족 방문, 우편과 통신 교류, 무역을 통한 상호 화해와 발전을 이루었다. 1970년 브란트는 독일 분단 이후 처음으로 역사적인 동·서독 정상회담을 성사시켜 상호간에 경제와 여행, 스포츠 등의 분야에서 활발한 교류를 활성화시켰다. 이후 독일은 1989년에 통일을 이루었으니 브란트의 용기가 밑거름이 되었다. 정치에 혐오감을 갖고 있는 독일 젊은이들도 브란트 만큼은 가장 존경하는 정치가로 생각하고 있다. (발췌)
전광진(천주교 대구대교구 사목기획실장) /매일신문 2009년 03월 30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13957&yy=2009
1971 - 소련의 3인승 우주선 소유즈 11호, 사상 처음으로 유인우주정류장 조립
지금까지 건설된 우주정거장에는 옛소련이 쏘아올린 살류트와 미르, 그리고 미국이 만든 스카이랩이 있다. 그리고 현재 미국, 러시아, 유럽우주기구(ESA), 일본 등 15개 나라가 참여한 국제우주정거장(ISS) 건설계획이 추진되고 있으며, 그 첫번째 모듈에 대한 시험이 수행되고 있다.
최초의 우주정거장은 옛소련의 소유즈 우주비행체였다. 소유즈는 3백26일의 우주공간 체류기록을 세웠다. 그후 소유즈는 반영구적인 우주정거장인 살류트에 연결돼 우주비행사를 전송하거나 귀환시키는 임무를 맡고 있다. 살류트가 미르로 대체된 현재까지도 소유즈는 계속 그러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다만 소유즈 T15, 소유즈 TM1에서 TM26 등 그 명칭과 약간의 특성만 바뀌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우주정거장의 역사는 살류트로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살류트는 1971년 4월에 무인으로 발사돼 2백60km 상공의 지구궤도에 진입했다. 살류트에 처음으로 승무원이 거주한 것은 그해 6월이었다. 소유즈 11호를 타고 올라갔던 조르지 도브로볼스키, 브라디슬라프 볼코프, 그리고 빅토르 파챠예프가 첫번째 살류트 승무원이 됐다. 그러나 이들은 우주정거장에서 임무를 마치고 지구로 귀환하는 도중 밸브가 열려 불운하게 생명을 잃었다. 그후 살류트는 2호(1973년), 3호(1974년)를 비롯해 7호(1982년)까지 발사됐다.
우주정거장의 어제와 오늘, 살류트에서 미르까지
과학동아 1997년 12월, 김진철/한국항공우주연구소 위성본체그룹장
http://www.n2n.pe.kr/php/pds/pds5_files/donga-0029.htm?menu_n2=3&sub_k=0
1955 - 네루 인도 수상 소련 방문
[인도 약사]
1947.08.14 - 파키스탄 독립
1947.08.15 - 인도, 영연방 자치국으로 독립
1948.01.30 - 인도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 과격파에 피살
1950.01.26 - 인도, 영국식민지에서 벗어나 공화국으로 독립
1950.09.24 - 북한, 인도를 통해 휴전조건 제시
1951.09.10 - 인도, 대일 전쟁종결 선언
1952.06.09 - 일본-인도 평화조약 조인
1954.02.25 - 캐시미르국회, 인도와의 통합을 가결
1954.08.10 - 인도반도 휴전 성립
1955.06.07 - 네루 인도수상 소련방문
1957.01.25 - 캐시미르 신헌법 발표, 인도에 편입
1957.05.21 - 인도서 아시아 최대의 우라늄광 발견
1957.11.09 - 캄보디아 중립법 공포 / 소련-인도 경제협력협정 조인
1958.01.03 - 뉴질랜드 힐라리탐험대 남극정복 / 영령 서인도제도 독립
1961.12.18 - 인도정부, 포르투갈령 고아 접수완료
1962.09.24 - 인도-중국 국경전투 재발
1962.10.12 - 네루 인도수상, 동북국경지대 중공군 축출 명령
1962.10.20 - 중공군, 인도국경 전면공격
KCM/세계선교정보/인도
http://kcm.co.kr/mission/map/asia/India/id002.html
- 대전충남적십자혈액원 (공중전화 카드)
1954 - 국립중앙혈액은행(국립중앙혈액원) 발족
혈액원(血液院, blood center)은 수혈에 필요한 혈액을 채혈, 조제, 보존하고 공급하는 기관이다. 1937년 미국 시카고의 쿡카운티(Cook County) 병원에서 처음 시작되었고, 혈액은행(Blood Bank)이라고 불렀다. 한국에서는 6 ·25전쟁 후 군에서 수혈부(輸血部)로 시작되었고, 민간에서는 국립중앙혈액원이 1954년에 창설되었으며, 1958년 대한적십자사에 이관되었다. 1970년 혈액관리법이 공포되면서 매혈로 충당하던 혈액수급을 헌혈혈액으로 전환하기 시작하여 지금은 모든 혈액수요를 헌혈로 충당하고 있다. /naver
1954 - 영국의 수학자, 논리학자 앨런 튜링(Turing, Alan) 자살
튜링 [Turing, Alan Mathison, 1912.6.23~1954.6.7]
현대 컴퓨터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튜링 머신`을 1937년 세계처음으로 고안한 영국의 수학자 앨런 튜링이 1954년 6월 7일 청산가리가 든 사과를 먹고 자살했다. 동성연애가 알려져 풍기문란죄로 기소된 압박감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다.
1912년 런던에서 태어난 튜링은 케임브리지대를 졸업하고 1935년 이 대학의 연구원을 거쳐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영국정부에 의해 모처에서 비밀 개발작업에 매달렸다. 2차 대전 발발로 영국정부가 과학자들을 비밀장소에 모아놓고 암호를 해독하기 위한 컴퓨터를 개발하려 했기 때문이다.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끝에 1943년 12월 거인을 뜻하는 세계최초의 연산컴퓨터 `콜로서스`가 탄생됐다.
콜로서스는 흔히 세계최초의 컴퓨터라고 불리우는 에니악보다 2년이나 먼저 탄생한 셈이다. 튜링은 이 공로로 1946년 훈공장을 수상했고, 1951년에는 영국 학사원 회원을 지냈다. 튜링은 영국정부가 그의 자살후 20년이 지난 1975년에서야 콜로서스의 사진을 공개하는 바람에 세계최초의 컴퓨터 개발자라는 명예을 놓쳤다. /조선
- Libya, 1 Dinar (Banknote)
1942 - 리비아의 군인, 정치가 카다피(Qaddafi, Muammar al-) 출생
카다피 [Qaddafi, Muammar al-, 1942.6.7~]
리비아의 군인, 정치가.
수르트 출생. 1963년 벵가지의 리비아대학을 마쳤다. 1965년 리비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이집트의 나세르를 본받아 자유장교단을 결성하였다. 1969년 9월 국왕 이드리스 1세가 해외여행을 하는 틈을 타서 쿠데타를 결행하고, 혁명평의회 의장에 취임, 대령으로 승진되어 군 사령관을 겸임하였다.
영국과 미국의 군사기지를 철폐하고, 이탈리아인과 유대인을 추방하였다. 또한 석유가격을 일방적으로 공시(公示)하여 주요 석유생산국들의 시장독점 폐단을 타파하였고, 전체 석유회사를 국유화(國有化)하였다. 한편, 1970년부터 총리 ·국방장관을 겸임하다가, 1972년 총리직을 소령 자르드에게 물려주고, 그 자신은 사회체제의 이슬람화(化)를 꾀하는 문화혁명을 지도하였다. 뿐만 아니라 중동지역에 단일 아랍국가를 건설하여 이 지역에 대한 강대국의 영향력을 배제하려고 하였으나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1972년8월 이집트의 사다트와 아랍연합의 결성에 대한 합의를 보았으나, 10월 제4차 중동전쟁 후의 사다트의 평화정책에 반대하여 양국관계는 긴장상태에 들어갔으며, 사다트가 암살된 후에도 긴장관계는 계속되었다. 한편 1980년 9월 시리아와의 합의로 양국의 합방을 발표하였으나, 뒤이어 발발한 이란이라크전쟁으로 실현을 보지 못하였다. 그는 엄격한 이슬람 율법에 입각하여 음주와 도박을 금지시켰으며, 이슬람공동체에 의거한 독자적인 직접민주제를 지향하고 있다. 그의 사상은 저서 《녹색서 The Green Book》(1976, 1980)에 밝혀져 있다. /naver
- 진 할로와 마릴린 먼로, 뤼미에르 형제
1937 - 미국의 영화배우 진 할로(Harlow, Jean) 사망
할로 [Harlow, Jean, 1911.3.3~1937.6.7]
[1937년 6월 7일] 육체파 여배우 진 할로우 사망
1937년 오늘, 백인 육체파 여배우 진 할로우(Jean Harlow)가 26살을 일기로 사망했다.
할로우는 심각한 방광염을 앓았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적 신념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치료를 거부해 끝내 죽음을 맞이했다.
16살의 어린 나이에 재벌 아들과 결혼한 뒤 배우인 친구를 촬영세트장에 데려다 주면서 영화 관계자의 눈에 띄어 배우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그녀는 '헬스 엔젤스', '퍼블릭 에너미' 등 영화에 출연해 마릴린 먼로보다 먼저 탄생한 이른바 '섹스 심벌'의 원조가 됐다. 할로우는 유흥가나 군대의 병영 등 가는 곳마다 그녀의 사진이 걸려 있을 만큼 인기가 대단했다.
진 할로우는 남자 배우들과 숱한 염문을 뿌리고 다녔다.
할로우는 숨지기 전까지 영화의 상대역으로 나온 남자 배우와 함께 지냈다. /YTN
1929 - 바티칸 시국(市國) 탄생
[책갈피 속의 오늘]1929년 바티칸 市國탄생
1929년 6월 7일 오전 이탈리아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 앞 광장. 무솔리니 총리가 사절단을 이끌고 바티칸으로 들어서자 몰려 있던 군중은 환호했다.
무솔리니는 곧장 가스파리 추기경을 만나 라테란 조약 비준서를 교환했다. 바티칸시티가 독립국가인 바티칸 시국(市國)으로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당시 미국 뉴욕타임스에 실린 기사.
‘비준서가 교환되자 교황청의 스위스 근위대는 이탈리아로부터 넘겨받은 영토를 향해 행진했다. 굳게 닫혀 있었던 바티칸의 한쪽 성문도 활짝 열렸다.’
바티칸의 한쪽 성문은 이탈리아 왕국이 로마를 강제로 합병하고 교황권을 박탈한 1870년부터 굳게 닫혀 있었다. 이른바 ‘로마문제’의 시작이었다. 세속적 국가인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와 신의 지배를 받는 교황령(領)의 정신적 수도 ‘로마’의 충돌이었다.
라테란 궁전에서 양측이 조약에 서명한 것은 이보다 4개월 앞선 2월 11일. 교황청은 이탈리아를 국가로 승인하고, 이탈리아는 바티칸시티에 대한 교황의 절대적 주권과 독립을 보장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조약으로 60년에 걸친 ‘로마문제’는 해결됐다. 교황청의 정치적 지원이 필요한 무솔리니 정권과 세계 가톨릭교회의 상징으로서 신권(神權)을 회복해야 할 교황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교황 비오 11세는 “이탈리아는 하느님에게 돌아왔고, 하느님도 이탈리아에 돌아왔다”며 만족감을 표시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월드 팩트북’은 바티칸 시국을 이렇게 소개한다. ‘세계에서 가장 작은 국가. 면적은 0.44km². 국경 길이는 3.2km. 인구는 821명으로 추정.’ 국가로 보기에는 보잘것없는 수치들이다.
그러나 바티칸은 작고, 적기에 더 위대하다.
바티칸의 영향력은 2005년 4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서거했을 때도 증명됐다. 교황의 시신을 알현하기 위해 찾아온 조문객만 400만 명. 로마 인구 300만 명보다 많았다.
당시 발터 카스퍼 독일 추기경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바티칸이 세계 11억 가톨릭 신자의 ‘정신적 수도’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는 기적이다. 모든 길은 로마가 아닌 바티칸으로 통했다.”
비록 로마에 둘러싸여 있지만 로마 위에 군림한다는 바티칸의 자존심이 읽힌다.
차지완 기자 cha@donga.com /동아닷컴 2007-06-07 03:00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
70030000000134/20070607/8451192/1
- 청산리전투(1920.10.21~26)
1920 - 봉오동 전투
1920년 6월4일, 홍범도와 최진동이 이끄는 연합 독립군 30여명이 두만강을 건너 함북 종성군 강양동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국경초소를 급습했다. 일본군 남양수비대 1개 중대가 이들의 뒤를 쫓았으나 독립군은 이미 근거지인 북간도 화룡현 삼둔자에 몸을 숨기고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6월 6일 오전 10시, 매복해 있던 독립군의 일제사격으로 60여명이나 사살됐다. 약이 오른 일본군이 대대적인 독립군 토벌에 나섰지만 독립군은 이미 험준한 고려령의 산줄기가 병풍처럼 둘러쳐진 계곡지대 봉오동에 은신, 요소요소에 병력을 배치해놓은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