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한 상업 체계가 제대로 기능하려면 모종의 화폐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화폐 경제하의 제화공은 다양한 종류의 구두에 매겨지는 가격만 알면 족하지,
신발과 사과, 신발과 염소의 교환율을 암기할 필요가 없다.
사과 재배 전문가도 돈만 있으면 사과를 좋아하는 제화공을 찾을 필요가 없는데,
돈은 모든 사람이 원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마도 돈의 가장 기본적 속성일 것이다.
사람들이 항상 돈을 원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 역시 항상 돈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당신이 원하거나 필요로 하는 모든 것과 돈을 교한할 수 있다는 말이다.
제화공은 당신에게서 돈을 받으면 언제나 만족할 터인데,
그가 실제로 원하는 것이 사과든 염소든 이혼이든 무엇이든 돈을 주고 그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돈은 거의 모든 것을 다른 거의 모든 것으로 바꿀 수 있게 해주는 보편적인 교환수단이다.
전역군인이 자신의 군인수당으로 대학수업료를 낸다면 체력이 지력으로 바뀐 경우다.
공작이 자신의 신하들을 멱여 살리기 위해 재산을 판다면 땅이 충성심으로 바뀐 경우다
의사가 진료비를 받아 변호사를 고용하거나 판사에게 뇌물을 준다면 건강이 재판으로 바낀 경우다.
심지어 성관계를 구원으로 바꾸는 것도 가능하다.
15세기에 창녀들이 남자와 자는 대가로 받은 돈으로 가톨릭 교회의 면죄부를 사곤 했으니 말이다.
이상적인 형태의 돈은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것은 다른 것으로 바꾸게 해줄 뿐 아니라 부를 축적할 수 있게도 해준다.
세상에는 저장이 되지 않는 귀중한 것이 많은데,
가령 시간이나 미모(美貌)가 그렇다.
어떤 것은 짧은 시간만 저장이 가능하다, 딸기가 그렇다,
내구성이 더 좋은 것들도 있지만, 공간을 많이 차지하고 비싼 시설이 필요하며 손이 많이 간다.
예컨대 곡물은 몇 년씩 자장할 수 있지만 그러려면 커다란 창고를 지어야 하고
쥐와 곰팡이, 물, 불, 도둑을 막을 필요가 있다.
돈은 그것이 종이든, 컴푸터 비트든, 혹은 별보배고등껍데기든, 이런 문제를 해결해 준다.
별보배고등 껍데기는 썩지 않고, 쥐의 입맛에 맞지도 않으며,
불에 타지 않고, 금고에 넣어둘 수 있을 정도로 작다.
부를 이용하려면 단순히 저장해두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이 장소에서 저 장소로 이동시킬 필요가 있다.
어떤 형태의 부, 예컨대 부동산 같은 것들은 전혀 이동할 수 없다.
밀과 쌀 같은 재화는 어렵사리 운반이 가능하다.
화폐가 없는 세상의 부유한 농부가 먼 지방으로 이주한다고 상상해보자.
그의 부는 집과 논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농부는 이 중 어느 것도 가지고 갈 수가 없다.
이것을 많은 양의 쌀과 바꿀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많은 쌀을 수송하기는 쉽지 않으며, 수송비도 비싸게 들 것이다.
돈은 이런 문제를 해결해 준다.
농부는 재산을 팔고 별보배고등 껍데기 한 자루룰 받아서 어디든 쉽게 가지고 갈 수 있다.
돈은 부의 전환과 저장, 이동을 쉽고 값싸게 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복잡한 상거래망과 역동적 시장이 출현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만일 돈이 없었더라면 상거래망과 시장의 규모와 복잡성, 역동성은 매우 제한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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