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박2일}] 대마도 아리야케산행, 이즈하라~히타카츠까지여행,한국전망대,
대마도 여행 1박2일
산악회 |
장동건의여행과트레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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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사 |
대아고속 여행사 |
조 건 | 30명이상 예약조건 |
출발일 |
7월7일(토)-7/8일(일) [1박2일] |
입금가 (1인당) |
₩329,000 |
포 함 |
선박요금 (한/일)터미널이용료+유류할증료, 가이드/기사 봉사료, / 식사(1조, 2중, 1석식), 울산-부산왕복 버스요금 | ||
불포함 |
개인경비 | ||
REMARK |
선박 출항 시간 변경 시 집합 시간 및 현지 일정이 변경 될 수도 있음 상품 가격은 선박요금 할인율 변동에 따라 변경 될 수도 있음 환율 변동 시 상품 가격이 변경 될 수도 있음 천재지변으로 인한 선편 결항 시 현지 체류 비용은 손님 본인 부담임 아래 일정은 현지 사정에 의해 변경될 수 있음 현금 및 VAT별도 기준입니다.(현금 영수증, 카드 및 계산서 발행시 상품가 10%추가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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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 |
여행지 |
교통편 |
시간 |
일정 |
식사 |
5/12
(토) |
부산
이즈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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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 도보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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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30 09:30 11:00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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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진(7;30)태화호(8:10)무거로(8:30)출발 부산 국제여객터미널 1층 대아고속 카운터 앞 집합 부산 출발 / 중식(선내고급도시락) 대마도(이즈하라)도착 / 입국수속 ‣등반 - 아리아케(유명산)등반 - 558M, 약3시간 소요 - 대마 역사 민속 자료관, 조선 통신사비 - 조선의 마지막 왕녀 덕혜옹주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세워진 덕혜옹주 결혼 봉축비 숙소이동 및 도착 석식(해산물 BBQ 또는 현지식) 및 자유시간 |
중:도시락 석:현지식 |
숙소 : 쯔리노이에 펜션(3-4인실) 또는 동급 | |||||
5/13
(일) |
히타카츠 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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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용차량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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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0
16:30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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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식 후 숙소 출발 -대마도 전통의 창고 양식 이시야네 돌지붕 -러/일 전쟁에서 일본을 승리로 이끈 만관교와 만제키운하 -바다의 신을 모시는 신사 중 가장 오래된 신사 와타즈미 신사 -대마도의 자랑 아소만을 한눈에 조망하는 에보시타케전망대 -맑은날 부산이 보이는 한국전망대 중식(우동+스시 정식) - 러/일 전쟁 추모 우호비가 있는 도노자키 공원 - 일본 100경 중 하나인 미우다 해수욕장 히타카츠항 도착 / 출국수속 대마도(히타카츠) 출발 부산 국제여객터미널 도착 / 입국수속 / 해산 ** 수고하셨습니다 ** |
조:숙소식 중:현지식 |
** 대마도 여행시 유의사항 ** ‣ 날씨 : 부산의 날씨와 동일 합니다. ‣ 우산 : 섬이기 때문에 날씨가 변덕스럽습니다. 작은 우산을 챙기시면 좋으십니다. ‣ 일회용 커피 믹스 : 현지에는 커피 자판기가 없기 때문에 챙겨오시면 좋으십니다. ‣ 밑반찬 류 : 일본식이기 때문에 우리 입맛에 맞는 밑반찬류를 챙기시면 좋습니다.(김치, 깻잎, 장아찌류, 컵라면) ‣ 과일 : 깨끗이 씻어서 가져가셔야 합니다. ‣ 육류 : 육류는 통관이 되지 않습니다. (통조림, 소세지 포함) ‣ 엔화 환전 : 현지에는 신용카드 사용 매장이 극히 드문 관계로 엔화를 약간이라도 환전 하시면 좋으십니다. |
◆ 대마도:
대마도는---- 대마도는 울릉도의 10배, 거제도의 2배, 그러나 제주도의 40%정도의 섬으로
일본에서는 3번째로 큰 섬이다.
대마도는 크게 상도(上島)와 하도(下島)로 나누는데 상도는 하타카쓰항이 있고
하도에는 이즈하라항이 있다. 이 두 항이 대마도의 관문이다.
상도와 하도 사이에 일본이 자랑하는 리아스식 해안으로 대마도의 명산물인
진주가 양식되고 있는 아소만이 드리워져 있다.
109개의 크고 작은 섬들로 이루어진 대마도는 5개 섬에만 사람이 살고 있으며
이즈하라에 주민 대부분이 살고 있으며 인구는 4만5천명이다.
가는 길---- 부산에서 여객선으로 히타카쓰 항까지 1시간 40분이 걸리고 이즈하라 항까지는
2시간 30분이 걸린다.
우리역사--- 1) 1906(광무 10). 12. 30 일본 쓰시마 섬[對馬島]에서 순국한 최익현 선생.
대원군의 무리한 정책에 반대상소를 올리고 고종 재위시 일본에 굴복하는
데 반대 하는 상소를 올리는 등 한일합방이후 의병활동을 하다 일본의 쓰시
마에 유배되어 순국한 최익현선생을 수신사에 3일간 모신일로 순국비를 수
신사에 세웠다.
일본인이 주는 밥은 죽어도 안먹겠다고 하면서 단식을 하자 국내에서 제자들이
대마도를 가서 설득하였지만 결국 죽고 만다.
2) 덕혜옹주는 1912년 5월 25일 조선 제26대 임금 고종황제와 궁녀인 복녕당
양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종임금이 한갑이 넘어서 본 딸이라 특별히 예뻐하는 자식이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측실이었기 때문에 옹주라고 호칭했다.
양씨는 덕혜옹주를 낳고 복녕당이라는 당호를 하사받았다.
고종에게는 모두 4명의 딸이 있었지만 모두 1살이 채 되지 못해 사망하였기
때문에 덕혜옹주가 외동딸이었다. 1916년 즉조당에 유치원을 개설하였고
덕혜옹주는 이곳을 다녔다. 1925년 3월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며
강제로 일본으로 대려가 공부를 시켰지만 왕따를 당하고 외롭게 생활했다.
1926년 순종이 위독하자 오빠 이은과 함께 귀국하였다가 4월 25일 순종이
사망하자 국장에 참석하지 못하고 5월 10일 일본으로 떠났다.
1929년 5월 30일 생모인 양 귀인이 유방암으로 영면하였으며 덕혜옹주는 귀
국 하였지만 복상하지 못하고 다시 일본으로 가야했다.
망국의 황여인 덕혜옹주는 심한 스트레스와 우울증 그리고 고국에 대한 그리
움으로 인한 정신적인 고통으로 정신병자의 취급을 받게된다.
1931년 5월 쓰시마섬 도주의 후예인 소 다케유키와 정략 결혼하였고 다음해
인 1932년 8월 14일 딸 정혜(일본명 마사에)를 낳았다.
그러나 결혼 후 덕혜옹주의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으며 남편과 주변사람들의
간호에도 병세가 호전되지 않자 1946년 마츠자와 도립 정신병원에 입원하였
다.
결국 1955년 다케유키와 결혼생활을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렵게 되자 이혼하게
되었다. 어머니의 성을 따라 양덕혜로 일본호적을 만들었으며 약 15년 동안
마츠자와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다.
외동딸이었던 정혜가 1956년에 결혼하였지만 실패하였고 3개월 뒤 유서를
남기고 일본 남알프스 산악지대에서 실종되었지만 그녀가 현해탄에서 투신하
여 자살한 것으로 오해되고 있다.
1962년 1월26일 오후 김포공항을 통해 고국에 돌아왔으며 이후 국가로부터
보조금을 지급받으며 창덕궁에서 생활하였다.
그러나
기로 파란만장한 여인의 한많은 생을 마감했다.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홍유릉에 묻혔다.
산과 바다 펼쳐진 청정해역
부산에서 약 50㎞ 떨어진 곳에 위치한 대마도는 섬 전체가 산지로 이뤄져 있다. 해발 400m 내외로 낮은 편이지만 험준한 산과 계곡 덕분에 등산지로도 인기가 높다. 또 청정해역으로 이뤄진 섬 자체가 자연휴양국립공원으로 지정돼 있다.
부산에서 출발한 배가 도착하는 곳은 대마도의 히타카쓰항. 약 1시간10분이면 대마도에 닿으니 일본이 무척 가까운 나라임을 실감하게 된다. 입국심사를 끝내고 밖으로 걸어 나오면 조용하고 여유로운 어촌 마을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대마도를 여행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도시가 작은 만큼 걸어서 둘러볼 수 있고, 버스를 이용하거나 렌터카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 항구 밖으로 나오면 한글로 적힌 버스와 렌터카, 택시, 숙박 안내 등을 볼 수 있다. 부산과 지리적으로 워낙 가까워 많은 한국인 관광객이 찾는 만큼 관광지 곳곳에 한국어로 표기돼 있다.
대마도에는 여러 가지 관광지가 있는데 트레킹을 통해 녹음이 우거진 산과 청정해역 등 아름다운 자연을 체험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또 600년 전 조선통신사가 대마도를 다녀가며 그때의 발자취가 남아 있어 역사를 알아가는 여행지로도 좋다.
먼저 대마도의 멋진 풍광을 담을 수 있는 에보시타케 전망대를 찾아가보자. 대마도만의 독특한 풍경을 보여주기 때문에 꼭 둘러봐야 할 관광 명소 중 하나다. 아소만을 따라서 빼곡하게 자리 잡은 작은 구릉과 섬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아소만을 360도로 조망할 수 있으며 대마도의 아름다운 자연을 멋진 사진으로 담을 수 있다.
해발 358m 높이에 위치한 가마자카 전망대 역시 구릉지대에 위치해 아소만과 주변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또 이곳에는 포루가 구축돼 있는데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가 긴박했을 당시 세워졌던 것이다. 포대와 막사 등이 그대로 남아 있어 당시 분위기를 실감할 수 있다.
대마도에서 바라보는 한국의 모습도 색다를 것이다. '한국 전망대'는 대마도 최북단 와니우라에 위치하며 한국이 가장 잘 보이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부산과 남해안 지역까지 선명하게 보인다. 전망대 주탑은 기와지붕의 팔각정 형태로 세워져 한국적인 느낌을 주며 주변에는 넓은 잔디밭이 펼쳐져 있다. 또 전망대 앞으로 거친 파도가 치는 바다와 멀리 등대가 어우러져 멋진 풍경을 선사한다.
전망대 주변에 위치한 미우다 해수욕장은 신비로운 비취빛 바닷물로 유명한 곳이다. 고운 모래 해변과 깨끗한 바닷물 덕분에 마치 동남아시아 휴양지에 온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물속에 만들어진 도리이가 인상적인 와타즈미 신사도 필수 관광 코스다.
이즈하라에 남아 있는 역사 현장
대마도는 모두 6개 읍으로 이뤄져 있는데, 그중 이즈하라는 대마도의 중심지 역할을 한다. 또한 한국과 관련된 역사적인 유적지가 많아 한국 여행객이 많이 찾는 곳이다. 이즈하라에 위치한 슈젠지(수선사)에는 최익현 순국비가 세워져 있다. 슈센지는 백제 비구니 법묘 스님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절로 최익현의 유해가 잠시 보관돼 있던 곳이기도 하다. 구한말 대유학자였던 최익현은 항일투쟁의 상징이기도 했다. 의병운동이 실패하면서 대마도에 유배돼 1906년 숨을 거뒀다. 최익현 순국비를 찾아온 많은 사람들이 순국의 뜻을 기리고 애도를 표시한다.
조선통신사를 맞이하던 곳인 고려문과 조선통신사비에도 들러보자. 옛 선인들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높은 성벽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통신사 행렬을 성대하게 맞이했던 고려문을 만나게 된다. 고려문 왼쪽에는 조선통신사비가 세워져 있어 당시 조선과 일본의 우호적이었던 관계를 알 수 있다.
대마도에서는 덕혜옹주 결혼 봉축 기념비도 볼 수 있다. 고종의 막내딸 덕혜옹주와 대마도 소 다케유키 백작의 결혼을 축하하는 의미로 만들어졌지만 강제로 결혼한 후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덕혜옹주의 한이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기념비 앞에서 여행객은 숙연해지며 과거의 역사를 되짚어보게 된다.
대마도 자료 1-역사기행
태풍이 8월3일 오전 일본열도를 지나갔음을 확인하고 예정시간보다 늦게 대마도를 향해 출발하였다. 대마도는 정말 가까웠다. 쾌속선으로 1시간 남짓 가더니 고구마처럼 기다랗게 생긴 섬이 보인다. 놀라웠다 .이런 곳이 왜 우리 땅이 안 되었나? 일본에서 제일 가깝다는 후쿠오카와는 147km이다. 49km정도 떨어진 부산 보다 거의100km가 더 먼데……. 우리가 도착한 곳은 대마도의 소재지 이즈하라(嚴原)항구이다. 울릉도의 도동항같이 산을 병풍처럼 둘러친 바다사이에 겨우 자리 잡은 모양새이다. 10여 평짜리 2층 건물에서 출입국심사를 한다. 200명 정도 되는 입국자는 거의 전부 한국관광객이다. 그래서 그런지 공무원들도 간간히 한국어로 말한다. 대마도는 큰 섬과 작은 섬 109개로 이루어졌다. 300m 이상의 높은 산이 바다에 바로 접해져 파도와 깎아지른 절벽이 마주친다. 모래사장과 농사질만한 땅은 보이지 않는다. 대마도근해의 급한 해류ㆍ태풍과 같은 계절풍ㆍ굴곡 많은 리아스식 해안이 노략질하는 왜구들에게는 천연의 요새였을 것이다. 길도 좁은 산길이다. 도로에서 차가 마주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그저 기우다. 비껴 가기위해 100m는 족히 되는 후진도 그들은 전진만큼 잘한다. 대마도는 살아가기 위해서 일본과 조선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생존한다. 때로는 노략질ㆍ장사꾼ㆍ외교가로 카멜레온처럼 살아왔다. 생존을 위한 그들의 역사는 우리에게 그대로 역사 속에서 투영된다. | ||||
그 후 여몽연합군(麗蒙聯合軍)의 대마도칩입, 왜구들의 강원ㆍ삼남(三南)에 155차례의 노략질과 이에 대한 최영ㆍ이성계ㆍ박위의 토벌, 조선 세종때 이종무의 정벌과 경상도(慶尙道)로의 편입, 일본 무로마치(室町)막부의 항의와 속주(屬州)화 철회, 조선과 평화로운 대외관계유지, 임진왜란시 병참기지화ㆍ제1군으로 참가, 외교관계회복으로 12차례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 초빙교섭 및 막부의 대조선 외교대행, 그리고 1871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단행으로 나까사키현(長崎)에 편입하여 대마도의 독자성이나 정체성은 상실된다. | ||||
역사민속사료관(歷史民俗史料館)입구에 조선통신사를 맞이했던 이즈하라성문은 아직도 고려문(高麗門)으로 불리고 있다. 거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이즈하라항구의 모습이 한눈에 보이는 언덕기슭에 자리 잡은 세잔지(西山寺)가 있다. 이곳은 조선통신사가 머물렀던 절로 임진왜란전후 대조선 외교승 겐소(玄蘇)스님 부도와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선생의 비가 나란히 서있다. 두 사람은 어떤 관계였을까? | ||||
역사는 이들의 뜻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히데요시는 현소와 대마도주에게 대마도사람 전체에 해당하는 5000명의 징집과 제1군으로 출병할 것을 지시하고 제1군 총사령관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의 딸인 마리아와 정략결혼 시킨다. 김성일은 목숨을 걸고 의병활동과 진주성싸움에서 일본군과 사투를 벌인다. 전쟁후 대마도가 무척 어려웠던 것은 불문가지이다. | ||||
대마도는 우리에게 아픈 패배자로도 기록한 상처가 있다. 덕혜(德惠)옹주의 결혼기념비와 최익현(崔益鉉) 선생의 추모비이다. 식민지시대 대한제국의 마지막 왕녀 덕혜옹주를 과거 대마도주 소우 타케유기(宗武志)백작과 결혼시켰다. 황족도 아닌 대마도주를 왕녀의 배우자로 선택했다는 것은 한 민족의 자존심을 손상시키는 일이다. 슈센지(修善寺)절문을 들어가면 오른쪽에 유학자 최익현 선생의 비가있다. 의병을 일으켰다가 잡혀 징역 3년을 받고 대마도로 유배 되여 단식(斷食)끝에 순국하였다. 백제인 이 세웠다는 이절에 나흘간 시신을 안치했다가 부산으로 이송했다고 한다. 우리는 이 기념비앞에서 절을 올리며 선생의 인품과 우국충정(憂國衷情)을 기렸다. 대마도에도 박물관과 같은 성격의 역사민속사료관이 있다. 20폄 남짓 되는 아주 작은 공간이다. 조선통신사를 수행하는 대마도주와 수행원들의 행렬을 그린 그림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한마디로 대마도 역사의 전부이다. 준비 1년을 포함하여 3년 정도 걸리는 행사였다. 400~500명되는 통신사 사절들을 에도(江戶)까지 왕복안내하고 귀국할 때도 뱃길안전을 위해 조선까지 수행했다. 그림 속에서 우리사신들이 융숭한 대접을 받은 느낌이 베여 있다. 당시 일본에 머물렀던 영국무역관장 리처드 콕스는 「조선통신사들은 왕족과 같은 환대를 받았다」고 기술했을 정도이다. 매년 8월에 이 섬의 축제 아리랑 마찌리때도 조선통신사의 행렬을 재연한다. 들어간 지 10분도 안되었는데 우리 안내원이 볼 것이 없다며 그냥 나가자고 재촉한다. | ||||
그동안 수십 차례 이곳을 온 그로서는 무엇인가 불만이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말로는 얼마전에도 게시된 조선왕실의 대마도 수직왜인(受職倭人)에게 주는 관직임명장인 고신(告身)을 떼고 다른 것을 걸어 놓았다는 것이다.
붉은 색 도로가 대마도의 주도로이며 국도인 382번 도로이다 이 남북을 잇는 이 도로 1971년에 개통된 것이다. 그 이전의 교통은 모두 뱃길로 이어지고 있었다. 따라서 대마도 인은 배와 함께 운명을 다한 것이었다. 이 종관도로는 옛날의 사신로(使臣路)였다. 조선통신사가 지나던 길이다. 이 길 주위로 작은 관청들이 있었다
북단인 하타카츠에서 이즈하라까지는 50km-60km의 속도로 약 2시간 30분이 소요된다
제한 속도가 60km이며 구간에 따라 40km인 곳도 많다 길이 좁고 구비가 많으므로 속력을 더 낼 수도 없으며 도로가 2차선으로 된 곳은 사정이 아주 좋은 편이나 대부분의 도로가 일차선인데 그래도 용하게 마주 오는 차를 잘 피해다닌다. 때로는 좁은 길에서 서로 마주치면 후진하여 대피하였다가 다시 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래서 인지 660cc 이하의 경차가 대마도 전체 차량의 65%정도를 차지한다고 한다
삼나무(스끼)와 노송(편백-하노끼)나무가 울창한 도로
대마도 자료 2- 신사(神社) 와타즈미.팔번궁.코모다하마 신사
2003년 일본의 조사에 따르면 일본인의 70%는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고,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 30% 가운데 51%가 신도, 그리고 48%가 불교, 그리고 1%도 안되는 나머지가 기독교등으로 되어 있다.
신도는 기본적으로 애니미즘, 즉 만물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범신론에 근거를 둔 것으로서, 신화와 전설에 나오는 신, 전쟁영웅은 물론 각종 귀신이나 고양이나 말과 같은 동물은 물론, 죽은 자도 살아생전 또는 죽어서 영험을 떨칠 것으로 여겨지면 신사(神社)를 세워 모신다.
전국에 신사가 10만 여개가 넘으니 거의 동네마다 신사가 있는 셈이며 사찰의 수보다 더 많다. 신도는 교리는 없고 다만 신사에서의 의식을 중시하므로 신사의 예배는 개인적이지 교회처럼 집단적으로 하는 것은 없다. 특별한 의식은 없고 개인적으로 엄숙한 자세로 신사에 들어가서 합장을 하고 절을 한 다음에 본당 앞에 비치된 헌금함에 돈을 넣고 소원을 빌며 부적을 받는다.
와타즈미신사(和都多美神社)
물이 빠진 바다쪽에 있는 두 개의 도리이
대마도 해신신사 4곳 중의 하나로 에보시다케전망대를 오르는 길 왼쪽에 있다
토요타마쵸(지명 토요타마쵸는 바로 토요타마히메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 함)의 상징인 와타즈미 신사는 아소만의 리아스식 해변을 끼고 바다위에 서 있는 두개의 도리이(솟대.장대)를 포함한 총 다섯개의 도리이가 일렬로 바다를 향해 서 있는 해신신사이다.
일본 건국신화의 주역인 하늘신 ‘히고호호데미(彦火火出見)’와 용왕의 딸 ‘토요타마히메(豊玉姬)’를 제사지내는 해궁(海宮)으로 바다 신을 모시고 있는데 바다 신을 모신 신사로는 가장 오래된 신사이며 가야의 김수로왕의 자손이 대마도로 건너와 세웠다 는 설과 장보고 장군의 소가(小家)였다는 설 등이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일본 본토의 신사는 동쪽이 아니면 남쪽을 바라보게 지어져 있으나 이 신사만은 신라땅이 있는 서쪽을 보고 있다. 지형상 서쪽을 보고 지을 수 밖에 없었는지는 모르지만…
인위적으로 판 수로 위의 돌다리. 수로는 바다에서 본당까지 연결되어 있다
수로 옆의 건물은 곡물 창고 도구 창고로서 기둥이 땅속에 직접 박혀있고 마루는 공중에 떠있다. 대마도의 일반적 창고 형태이다 (대마도의 창고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신사에서 예전에 사용되었던 배로 보인다 20명은 넉넉히 탈 수 있는 규모이다
신사의 입구 왼쪽에 보면 바다에서 신사까지 이어지는 수로가 있다 해신(海神)신사라서 바다의 신이 쉽게 들어오라고 파놓았는지 모르지만 수로를 따라 만조시에는 본전(本殿) 마루 밑까지 바닷물이 들어온다고 한다. 그리고 바다 쪽에 있는 두 개의 도리이도 2m 정도가 물에 잠긴다고 한다.
죽어서 용이 된 신라 문무왕이 법당 아래까지 드나들 수 있게 수로를 파 놓은 경주 감은사와 같은 의미가 아닐까?
신사 바로 앞의 도리이
신사는 도리이(鳥居)에서 시작된다. 절이나 사찰의 대문이라고 보면된다 天이라는 글자모양의 문을 세우고, 새(鳥)는 천신(天神)의 뜻을 인간에게 전해주는 사신이라 믿어 새가 쉬어가도록 한다고 해서 '도리이'라고 부른다
변형된 것도 많이 있지만 대부분이 2개의 원통형 수직기둥 위에 직4각형의 들보가 가로로 2개 얹혀 있으며 위의 들보가 길다는 것이 특징이다. ‘도리’란 새라는 뜻의 일본어이다. 고스톱이란 화투에서 '고도리'란 새 다섯마리를 뜻하지 않는가 우리말로는 장대 또는 솟대로 표현되며 솟대 위에 새모양을 만들어 붙이는 우리의 전통신앙과 관계가 깊다고 할 수 있다
이 와다즈미 신사에는 5개의 도리이가 일렬로 서쪽을 향해 서 있는데 바깥쪽 두개는 바다에, 셋째 도리이는 바다와 육지의 경계선상에, 나머지 두개의 도리이는 육지에 서 있다
밑부분이 바닷물 속에 잠겨있는 또 다른 도리이는 다히로시마현(廣島縣) 미야지마(宮島)의 이츠쿠시마진자(嚴島神社)에도 있다
신사의 고마이누 중 유일하게 암수의 상징을 사실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숫컷-입을 벌리고 있다
암컷-입을 다물고 있다
신사의 도리 앞에는 반드시 위의 사진과 비슷한 두마리의 동물이 마주보고 있다. 이것을 '고마이누'라고 부른다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이 숫컷이고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암컷이다.
이 곳 대마도에서 유일하게 본 만송원의 대문 입구에 있는 인왕상과 경주 석굴암의 인왕상(금강역사상이라고도 함)을 보면 한명은 입을 벌리고 있고 다른 한명은 입을 다물고 있다.
입을 벌리고 있는 상을 아(阿)상, 오른쪽이 입을 꼭 다물고 있는 상을 훔(훔)상이라고 하는데 산스크리트어에서 '아'는 입을 벌리는 최초의 음성이고,'훔'은 입을 다무는 마지막 음성이라고 하여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을 상징한다
'고마이누'의 암,수컷의 입모양이 다른 것도 이와 같은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고마이누란 고려견(高麗犬)이다 '고마이누'란 말은 고구려를 의미하는 ‘고마’와 개를 지칭하는 ‘이누’라는 일본어의 합성어다. 일본어로 고구려는 구마, 다카쿠, 고라이, 구레 등으로 읽고 한자로는 高麗, 熊, 駒, 巨万, 許麻, 巨摩, 高來, 高良, 吳 등으로 쓰여졌다. 고구려를 고려라고 칭하는 것은 일본 뿐만 아니라 중국의 기록에도 많이 나타나므로 삼국시대 이후의 고려와 구분해야 한다. 고마이누(高麗犬)의 고마란 단어도 고려를 칭하는 고마에서 파생한 것이다. 고마의 원어는 ‘구마’이고, 구마는 한국어의 곰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곰(熊)이 구마로 다시 고마로 변한 것이다.(고구려와 왜의 문화 교류-이병로 참조)
한편에서는 고마의 의미를 달리 해석하기도 한다. 옛날 일본에서는 백제의 왕성인 웅진(熊津, 지금의 공주)을 구마(くま)또는 고마(こま)라 하였으며 지금도 ‘크다’ 또는 ‘강하다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고마이누(こまいぬ)의 고마는 여기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
신사나 사찰마다 있는 고마이누의 모습은 매우 다양하다. 뿔이 달린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으며, 귀가 선 것도 있고 서지 않은 것도 있다. 귀가 서지 않은 것은 흡사 사자와 비슷한 모양인데, 이것을 보고 삽살개에서 그 원형을 따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는 고마이누를 더욱 강력하게 보이게 하기 위해서 다른 수호영물인 사자나 해태의 이미지를 가미하여 형상화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고마이누는 신사뿐 아니라 사찰에도 있다. 일본인들이 세계에서 가장 큰 청동좌불상을 모셨다고 자랑하는 도다이사(東大寺)를 비롯해서, 나라와 교토의 주요 사찰 입구에는 거의 빠짐없이 고마이누가 있다 만약에 큰 사찰에 고마이누가 없다면 사찰 건물의 지붕을 살펴보라. 지붕의 추녀 끝에 고마이누들이 다양한 형태와 자세로 놓여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근래 일본의 학자들은 이 고마이누를 '가라이누'란 명칭을 쓰면서 중국 당(唐)나라 시대에 전해진 문화라고 이야기 하기도 한다 고마이누가 한국에서 전해진 개를 의미한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한 것이리라 이것이 겉다르고 속다른 일본인들의 본심일지도......
왜 고려견이 세워졌는지에 대한 밝혀진 학설은 찾지 못하였으나 쇼토쿠(聖德)태자의 스승이 된 고구려 혜자(慧慈)스님이 개를 데리고 오면서부터 개가 숭배되기 시작했다는 주장이 신빙성이 있지 않을까 싶다
세수대
신사에 들르면 손을 씻는 곳 세수대(洗手帶-테미즈야)가 반드시 있다. 우리 나라 관광객이 뭔지도 모르고 우리나라 사찰에 있는 감로수인양 물을 잘 마시는 곳이다.
일본인들은 이 물은 절대 마시지 않으며 국자를 입에 대지도 않는다 이 곳에서 손을 씻고 들어가는데 오른손으로 국자를 들어서 왼손에 물을 부어 씻고 그런 다음 오른 손을 씻는다. 그런 다음 왼손으로 물을 떠서 입에 넣어 입을 행구고 다시 왼손을 씻는다.
처음 왼손을 씻는 것은 전생에 지은 죄를 용서해 달라는 뜻이 오른손을 씻는 것은 현생에 지은 죄를 입을 행그는 것은 입(말)으로 지은 죄를 사해달라는 의미라고 한다
비록 형식이지만 신을 만나기 전에 가지는 마음자세는 본받을만 하다
돈을 넣은 뒤 줄을 쳐서 방울을 울린다(목탁은 결코 아님-절이 아니니까)
손을 씻은 뒤 배례전 안에 있는 돈 넣는 함(절이 아니니 불전함은 아닐테고 복전?)에 돈을 넣은 다음 배례전 앞에 늘어진 천을 흔들어 목탁모양의 방울(나무나 청동으로 따위로 만듬)을 친다.
방울을 치는 것은 내 정성을 바치니 봐 달라는 뜻이기도 하고 죄와 부정을 씻어낸다는 뜻도 함께 담겨 있다고 한다. 그런 다음 두번 합장 배례하고 두번 박수를 친다
신사를 들어갈 때는 가운데로 가지 않고 왼쪽으로 들어가며 나올 때는 오른 쪽으로 나오는데 이 풍속은 우리나라와 동일하다.
우리나라도 큰 사찰이나 사당. 서원, 왕릉 등에는 세개의 문이 있는데 가운데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들어갈 때는 왼쪽 문, 나올 때는 오른쪽 문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 가운데 문은 혼백만 출입을 하는 문이라 평소에는 열어놓지 않고 제(祭)을 올릴 때 혼백이 드나들게 만 열어 놓으며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 이외에는 출입을 하지 못한다 아마 우리나라의 풍습이 여기까지 미쳐 고착화 되었을것이라는 생각된다
위의 투입구에 동전을 넣으면 액운이 적힌 종이(오미구찌)가 아래 홈으로 빠져 나오는 자판기 복전함(?)이다. 경제 에니멀 일본인의 자판기 문화는 이미 신사에까지 침투하여 상술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보통 신사에서는 시주함에 돈을 넣으면 액운이 적힌 종이를 주는데 이 종이를 오미구치(御神籤) 라고 한다 오미구치를 펼쳐보고 좋지 않은 괘가 나오면 이 종이를 나무에 그냥 매달아 놓고 가고 좋은 괘가 나왔을 때는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간다.
이 곳에서는 자판기에서 부적을 판매(?)하고 있었다. 자판기 동전 투입구에 동전을 넣으면 아래로 부적이 나온다. 거스름 돈을 누르는 버턴이 없으니 이놈은 주는대로 다 소화시키나보다. 오미구치 자동 판매기는 이 곳 뿐 아니라 전국의 신사에 대부분 설치되어 있다고 한다
일일이 줄을 서서 돈을 주고 부적을 받는 번거러움과 인건비절약(관리인은 월급제)을 위한 일본인의 투철한 상술이 여기에서도 보인다.
대부분의 신사에서는 운세 같은 것을 점칠 수 있는 괘를 팔기도 하고 부적도 파는데 돈을 더 주면 소원을 적어서 매다는 작은 나무판을 따로 준다. 여기에 자기 소원을 적어서 매달아 놓거나 걸어놓는데 이 나무판을 에마(繪馬) 라고 한다.
요즈음은 일본인도 우리나라와 같은 석자 이름을 사용하는지 그 에마판에 적힌 이름이 어찌도 우리 이름을 닳은 것이 많은지... 일본의 귀신이 한국인의 소원을 들어준다던가? 한국인이 달아놓은 에마가 너무 많다. 관광은 좋지만 얼빠진 행동은 하지 말아야지....
(우리 나라는 대개 이름이 석자이지만 일본은 거의 넉자 이름이다. 고이즈미, 나까소네, 시마모또, 니까무라, 등과 같이...)
나무에 달아놓은 오미구찌
와타즈미신사의 배례전 위의 지붕을 보면 와타즈미 신사의 배례전은 팔작지붕 건축물의 측면이 정면으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가로는 짧고 세로는 직사각형 형태의 배례전(排禮殿)이 신을 모신 본전(本殿)과 연결된 형태의 모습이다 이는 모든 신사의 일반적인 구조이다
와타즈미신사 배례전의 내부 배례전(사전社殿)에는 바닥에 다다미가 깔려있고 벽에는 사진들이 걸려 있다. 일본 천황가의 사진이다. 본전으로 연결되는 곳에는 나무계단이 있다. 그리고 계단을 오르면 합문되어 있는 문이 보인다. 그 문 안에 신을 모시고 있는 것이다. (위 사진은 http://www.pyroshot.pe.kr에서 빌려왔습니다)
앞의 건물이 배례전이고 뒤의 별개 건물이 신물을 모셔둔 본전이다 <설명을 돕기위해 팔번궁신사의 모습을 가지고 옴>
신사의 건물은 신사의 규모에 따라 다르나 일반적인 경우 본전(혼덴)과 배례전(하이덴)은 두 개의 건물로 나누어져 있다. 본전에는 그 신사가 모시는 신물(神物)이 모셔져 있으며, 이 신물은 신의 현신으로서 누구도 볼 수 없는 신사의 깊은 곳에 보관되어 있다. 방문객들은 배례전에서 기도를 하거나 헌금을 한다. 신사 건물에서 항상 앞쪽이 배례전이고 배례전 안쪽에서 통로를 따라가면 별개의 건물인 본전이 있다. 대체로 본전은 배례전보다 조금 높게 위치하고 배례전은 대개 앞 뒤로 길기 때분에 건물의 측면이 정면이 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는 사찰이나 궁궐건물, 전통 건물, 심지어 가정 주택에서도 서까래를 둥근 통나무를 사용하여 미적감각을 살리는데 비해 이곳 대마도의 건물은 신사나 사찰이나 모두 서까래가 네모진 각목이며 주심포 건물에 공포 자체가 매우 단순하다. 우리나라 공포는 공작의 부리나 용과 같은 길상의 머리를 환조로 새겨 멋을 더하는데 여기의 건축물은 그냥 밋밋하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곡선의 우아함마져 거의 찾아볼 수가 없는데, 이는 건축기술의 미비함에서 온 것이라 볼 수 밖에 없다.
신사 뒷쪽 도요다마히메의 무덤으로 가는 길의 삼림
도요다마히메(豊玉?) 무덤 입구의 도리이 여기에도 和都多美神社라고 적혀 있다 오른쪽 기둥에 平成7년건립이라는 글로 보아 1995년에 건립한듯하다
신사 뒤로 돌아가면 삼나무가 울창한 삼림만이 이어진다 조금만 가면 또 하나의 도리이가 나오고 "도요다마히메지분묘(豊玉姬之墳墓)"라 새겨 놓은 지름이 40Cm는 족히 될 둥글넓적한 돌비석이, 돌무지 위에, 아주 단정히 올려져 있다 큰 금줄을 친 고목과 바로 그 옆에 대략 성인의 키만큼이나 큰 검고 둥근 큰 바위가 배경처럼 뒤에 서 있다
이 지방의 지명을 낳게한 '도요다마히메지'의 묘라고 하는 곳이다 돌비석의 색깔이 깨끗하고 주위의 석질과는 다른 것으로 보아 근간에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삼각형으로 세워진 도리이 형태의 나무
이소라에베스
신사 입구에 들어서서 왼쪽편 ,바닷물이 드나드는 수로의 폭이 넓은 곳에 위에서 보면 세모꼴이 되게 ‘도리이’ 세 개가 서로 모서리를 맞물고 서 있고, ‘이소라에비스(磯良比須)’라고 써 놓은 안내문이 세워져 있다.
이곳이 바로 ‘이소라에비스’가 놓여 있는 곳이다. ‘이소라’는 용궁의 장녀 ‘도요다마히메’의 아들 ‘우가야후기아에즈’의 별명이다.
기록에 보면 이 신사에는 ‘이소라에베스’라고 불리는 전면에 비늘 같은 균열(均裂)이 있는 바위가 있는데, 예로부터 금줄을 쳐서 신성하게 모셔왔다고 했다
이곳이 磯良(기량)의 묘라고 하는 전설이 있는데 이것은 조영되기 전 엣날 제사가 이루어지던 (이와구라)나 그렇지 않으면 神禮石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이 신사에는 특이하게 스모씨름 경기장이 있으나 신성한 곳이라 하여 출입을 못하게 한다 안내판에는 토표(土俵-도효)라고 적혀 있다. 도효란 스모경기를 하는 직경 4,55m의 둥근판을 말한다. 이 원 밖으로 밀려나거나 발바닥이 아닌 신체의 일부가 닿게 되면 패한다
신사 옆에는 평성5년(1989년) 125대 천황인 황태자부부가 결혼 후 방문하였음을 봉축하는 기념비가 있다. 그것은 그들의 뿌리가 이곳에서 시작됐다는 암시이며 이 신사가 황실과의 중요성을 나타냄이 아니겠는가
신사의 입구에는 각종 기부금을 낸 사람들의 이름과 기부금액을 비석으로 만들어 놓았는데 대충 50개는 넘어보였고, 기부금액의 액수에 따라 비석의 크기가 달랐다.
<와타즈미 신사의 유래>
일본 건국신화에 나오는 천신의 아들이 형의 낚시바늘을 찾으러 갔다가 용궁의 딸과 결혼하게 되고, 바닷속에서 3년을 살다가 만삭이 된 아내랑 육지로 나왔는데, 아이를 낳는 모습을 결코 엿보지 말라고 한 부탁을 어기고 이를 엿보다가 아내가 용의 모습(커다란 구렁이)으로 몸부림 치는 모습을 보게 된다. 화가 난 아내는 아이를 버리고 다시 바다로 돌아가는데, 그 아이가 일본 왕가의 시조인 텐무천왕의 아버지가 된다는 신화로서 결국 일본 왕가는 천신과 해신의 적자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뜻이고, 이 신사는 그 해신과 아들을 모시는 가장 오래된 신사라 한다
지금의 일본 황실계보는 천신의 부계와 해신의 모계로 된 혈통이라는 것으로 이것이 해양국가 일본의 국가상이다.
이 국가상의 발원지가 본토가 아닌 대마도 ‘니이’지역의 해변 ‘와다즈미(和宮)’라는 사실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니이’지역이야말로 세형동검, 말방울, 팔찌 등의 청동기와 철기 그리고 경질토기까지 다른 곳에서는 그 예가 없을 만큼 많은 우리 조상들의 유물들이 출토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팔번궁신사(八幡宮神社)-하치만구신사
이즈하라 시내에 있는 신사로 대마도의 대표격인 신사다. 신사에 궁(宮)자를 붙인 곳은 격이 높은 신사임을 말해주고 있다
맨 앞쪽의 도리이를 들어서면 넓은 주차장이 있고 그 주차장에서 신사앞으로 돌층계가 있으며 바로 신사로 연결된다. 이즈하라 하치만신을 모신 하치만구신사, 우노도신사, 천신 신사, 와카미야 신사가 함께 있다
하치만구신사는 일본의 덴진, 이나리신사와 더불어 일본 3대 개파의 신사로 일본 본토에서도 하치만구를 흔히 볼 수 있다 일본 전체에 하치만구신사가 3,000곳이나 된다고 한다
삼한에 임나일본부를 건설했다는 가상의 인물인 신공황후를 받들고 있어 일본인들의 역사왜곡의 증거를 엿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1274년 10월 5일 제1차로 여몽연합군이 들이칠 때 예언을 해 주 듯이 이곳에서 불길이 치솟았다고 하는데 확실한지 알 수가 없다
연중무휴에 입장료는 없으나 보물전 관람은 따로 돈을 내야 한다. 보물관에는 三十六歌仙 두루마리 그림이 장관이라고 하는데 이른 아침이라 관람을 하지 못하였다
음력의 8월 15일에 행해지는 팔번궁신사대제는, 옛부터 대마도 사람들의 활기를 불어 넣어주는 가을 축제이다
신사 앞에 있는 고마이누
팔번궁신사 정면-이곳도 건축물의 측면이 입구이다
나무에 매달아 놓은 오미쿠지
손과 입을 씻는 세수대-반드시 국자같은 도구를 이용해야 한다
신사 앞에 있는 말의 신(馬神)
석등과 청동등 지붕이 투구처럼 볼록하고 끝 귀가 말려올라간 것이 우리나라의 석등과 구별된다
팔번궁신사 뒷편의 보물전-300엔을 내어야 관람할 수 있다 (관람료를 받는 곳은 이곳과 만송원 두곳이다)
이 팔번궁신사는 최익현선생이 대마도로 유형이 되어 처음으로 감옥살이를 한 곳이다
최익현선생은 1906년 6월 11일 의병투쟁 중 전남 순창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8월 4일 서울 용산에서 열린 조선군주차사령부(朝鮮軍駐箚司令部) 헌병대 군법회의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대마도로 압송되어 이 팔번궁신사 경내 남측, 사족수산소(士族受産所) 자리에 있던 임시 수용소에서 유형이 시작되었다.
최익현선생이 이곳에 끌려 왔을 때 이미 붙들려 와 있는 한국인 의병 9명이 있었다. 이들은 쯔시마경비대 수용소가 지어질 때까지 3개월을 이곳에서 보냈다
단층짜리 임시가옥은 헌병대 관리하에 있었으며 선생은 감옥 안에서 매일 서쪽을 향해 재배(再拜)를 했다고 한다. 그쪽은 고종황제가 있는 곳이었다. 신하의 도리를 다한 것이다. 3개월 후 최익현선생과 일행은 대마분견대(현재 육상자위대) 내에 새로 지어진 수용소로 옮겨갔다
우노도신사
우노도신사 안내판 눈은 있어도 일본글은 모르니 뭐라고 써 놓았는지....... 신공왕후니,신라정벌이니, 대충 아는 글자를 조합하니 이게 바로 삼한에 임나일본부를 건설했다는 가상의 인물 신공황후를 받들고 있는 신사같은데.....
우노도신사의 배례전
우노도신사의 본전
우노도 신사 바로 왼쪽 옆에 포탄을 세워놓았는데 그 의미를 알 수없다. 코모다하마 신사에 가도 같은 포탄을 세워 놓았다. 그 곳에는 전리품이라고 적혀 있다 히치만이 전쟁의 신이라는데 두곳 모두 전쟁과 관련이 있긴하다 (이곳에 있는 의미를 아시는 분은 댓글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신사에 가면 자식의 합격을 비는 부적, 자동차 사고를 예방하여 준다는 부적, 사업을 번성케 하는 부적 등 다양한 부적이 있으며, 갖가지 기원문이 적힌 상징물들이 있다. 일본인들은 이것을 사서 집에 장식하거나 신사 내의 지정된 장소에 걸어 둔다. 일본인들은 매해 신년 1일에서 3일까지 80% 이상의 사람들이 신사를 방문한다고 한다. 또 일본에서는 '미야마이리.라 하여 남자어린이는 태어난지 32일째 날에,여자어린이는 33일째 날에 신사를 찾아 조상신에게 씨족의 후예임을 알리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어찌되었던 태어나서부터 신사와는 밀접한 관계가 맺어지는 것이다
첨단 산업으로 앞서가는 선진국 일본에 경전도 없고 사제도 없는 신도가 사람들의 기복(祈福)과 관련하여 제일의 종교로서 생활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도리이의 위에 보면 굵은 새끼줄에 흰 종이를 꽂아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을 '시메나와'라고 하는데 우리 나라 서낭당의 부적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마리아(이마미야)신사
이마미야 · 와카미야신사 (앞 건물은 배례전이고 뒷 건물이 본전이다)
하치만궁 경내의 좌측의 돌계단를 올라 가면, 거기에 코니시 마리아 부인과 그 아이의 제를 지내고 있는 今若 · 若宮神社[이마미야 · 와카미야신사]가 있다. 크리스찬으로 이름 높은 고니시유키나가의 딸로 「세례명:마리아」서, 쓰시마번이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조선에 건너 외교교섭으로 분주했던 大正18년(1590)에, 소우씨 19대 지방 영주의 아내로서 대마도에 안주했던 사람이다. 히데요시가 조선 정벌을 위한 전략으로서 신망이 두터운 고니시유키나가를 배치하기에 즈음해, 조선의 사정과 지리를 잘 아는 시모토(종의지-宗義智)의 힘을 빌리기 위해서 유키나가의 딸을 보내게 한 전략이다
宗義智는 그런 마리아 부인에 의해 크리스찬에 대해 눈을 뜰 수 있었고 극비리에 세례를 받아 「對馬展구리오」라고 불리우는 한 시기가 있었다
임진왜란은 히데요시의 죽음과 함께 종결되었지만 세키가하라의 전쟁에서 서군의 동맹인 마리아의 아버지 고니시유키나가가 살해당했으므로, 대마도로서는 대마도를 안녕을 지키기 위해서 마리아 부인과 이혼해 나가사키로 보냈고 5년 뒤에 사망했다고 하지만, 확증이 부족하며 사망시기는 지금도 확실하지 않다고 한다.
코모다하마 신사(小茂田濱神社)
이 곳이 일본에서는 외세에게 처음으로 점령을 당한 곳이다
려몽연합함대는 출항 이틀 후인 1274년 10월5일(이하 麗蒙연합군의 日本정벌 관련 날짜는 모두 음력) 오후 4시경, 대마도(對馬島 아랫섬의 사스우라(佐須浦)에 상륙했다. 사스우라가 바로 지금의 코모다이다
八幡愚童記」(팔번우동기)라는 일본 측 사료에 따르면 앞바다를 뒤덮은 異國船(이국선)의 출현에 놀란 사스우라의 촌민들은 급히 달려가 이즈하라의 國府館(국부관)에 외적의 침입을 고했다. 당시 대마도주는 소오 스케쿠니(宗助國)라는 68세의 무사였다. 그는 즉각 일족랑당(一族郎黨) 80여 기를 이끌고 그날 밤중에 사스우라로 진발했다. 전투는 10월6일 오전 6시부터 오전 8시까지 계속되었는데, 2시간 만에 대마도의 1만 병사들은 중과부적으로 패하여 전원 목숨을 잃었다.
특히 당시 도주 종조국은전쟁 후 목과 몸이 따로 발견되어 그 싸움의 치열함을 알 수 있었다 한다.
숨진 사람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코모다하마 신사에서는 전사한병사들의 위패를 받들고 있으며 매년 11월에 위령재를 지낸다.
동경의 야스쿠니 신사와 함께 일본에서 두 곳 밖에 없는 군인을 모신 신사이다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반대하는 우리 국민의 뜻이 무엇인지 알겠지요?)
도리이 기둥에 대나무를 묶어 놓았다
이곳에도 고마이누가 도리이 앞에 있다
신사 배례전의 내부
신사 내부에는 몽고군과의 전투도가 많이 걸려 있다
원구7백년평화지비 우리가 왜구라고 하듯 그들도 원나라의 침략을 원구라고 표현한다
평화지비 꼭대기의 비둘기상
신사 옆에 있는 포탄 전리품이라고 씌어 있으며 명치 30년(1897년)이라고 씌어 있다
려.몽 연합군이 상륙한 서해안의 해변
실지로 여.몽연합군이 출발한 시기에 왜 몽고군 자신들만이 일본을 치치않고 고려와 연합을 한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몽고는 기마민족으로 수군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고려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바다를 건너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이때 고려는 일본을 치는 것을 반대했는지도 모른다. 고려에서 여몽연합군이 출항했을때 신풍에 의해 침롤한 배는 거의 몽고군을 태운 함선 뿐이었고, 고려수군의 배는 되돌아 왔다는 이야기도 있는 것을 보면, 이 시기의 바다 사정을 고려는 잘 알고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사스우라 마을을 가로지르는 강의 상류로 올라가면 「카시네」라는 작은 마을 있고 거기에 <법청사>가 있다. 법청사에는 대마도주인 종조국(宗助國)의 찢긴 사지 중에 몸통을 모신 어동총(御胴塚)과 함께 경내에 머리를 모셔 놓은 <관음사>가 있다
온전하게 수습할 수 없었던지 후손들이 지금도 宗家의 합장묘로 이장을 하지 않은 채 방치하고 있다
(사진출처:안사연,2006년 대마도 원정기에서)
이 코모다하마神社로부터 약 200m 정도 남방의 해안에는 정조국(宗助國)의 부하인 사이토 스케사다(齊藤資定)라는 용사가 분전하다가 최후엔 스스로 자기 머리를 바위에 쳐박아 죽었다는 현장도 표시되어 있다고 한다.
가미가제(神風)
태평양 전쟁시 일본의 자폭 특공대 가미가제를 기억할런지 모르겠다
일본과 천황을 위해 편도분량(격침시키고 죽지 않으면 돌아올 수도 없도록)의 연료밖에 싣지않은 비행기에 폭탄을 잔뜩 싣고 당시 일본의 적인 미국의 함대에 쳐 박아 침몰시켰던 특공대 가미가제
그 특공대의 이름을 가미가제라고 붙였다
가미가제란 '신의 바람'이란 뜻으로 바로 이곳 려.몽연합군의 상류과 관계있는 사건이다.
려.몽연합군은 대마도와 이끼섬을 초토화시키고 곧장 규슈의 후쿠오카 상륙을 개시히기 위해 후쿠오카 앞 바다에 진을 쳤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태풍이 올 계절이 아닌데도 큰 태풍이 쯔시마해협을 덮쳐 려.몽 연합군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태풍에 큰 피해를 입고 본국으로 철수하고 만다. 일본은 이에 이 태풍을 일본을 구하기 위해 준 바람이라고 여기고 신풍(神風)이라 불렀으며 좋은 길상의 의미로 새기고 있다
가미가제특공대(가미가제 독고다이)
일본인들의 종교관은 뚜렷하지 않다. 즉 엄격하게 종교를 구분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인들의 대부분이 불교와 신도를 공유한다. '신도(神道)'는 일본의 고유 민족신앙으로, 선조나 자연을 숭배하는 토착 신앙이다. 따라서 종교라기보다는 조상의 유풍을 따라 가미(神:신앙의 대상)를 받들어 모시는 국민 신앙이기 때문에 집이나 회사 등에 자그마한 개인신사를 만들어 예배를 드리는 모습은 전혀 낯설지 않고 생활의 일부분으로 굳어져 있다
이것은 우리의 종교관으로 바라볼 때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모습이다. 신도들이 서로 자신의 종교에 대해 명확한 구분을 짓고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성향을 보이는 우리와는 분명히 대조되는 모습이다.
이즈하라 시내 십팔은행(十八銀行)주차장의 방화벽 앞에 있는 작은 사찰과 신사 왼쪽(흰색)이 사찰이며 오른쪽(주황색) 신사이다
작은 사찰
사찰을 의미한 작은 건물속의 불상
작은 신사 - 일반적으로 도리이는 주홍색을 칠한다
대마도 자료 3- 사찰(寺刹) 1 서산사. 수선사. 태평사
흔히 사찰이라고 하면 먼저 절의 입구인 일주문을 지나고 사천왕상을 지나 경내로 들어가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이며 대웅전이나 극락전 앞에는 탑이나 석등이 서 있는 것을 연상하게 된다. 이러한 우리나라의 사찰을 염두에 두고 대마도의 사찰을 둘러본다면 큰 실망을 하게 된다. 무언가가 빠진 것 같고 허전함을 느끼게 된다. 차라리 우리나라 사찰과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그 사찰에 있는 역사적 사실이나 우리나라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알아보려는 자세로 접근한다면 또다른 흥미로움이 될 것이다
서산사(西山寺-세이산지)
서산사 입구
세이잔지는 9세기 이전에 세워진 오래된 사찰로, 이즈하라 항구의 모습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고우다케(國府嶽)의 언덕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이즈하라 시내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382번 도로에서 조금 떨어진 골목 안, 서산사라고 적힌 패찰의 왼쪽 계단을 올라서면 대문이 나타나고 바로 앞에 사찰 건물이 눈앞에 닿는다. 물론 일주문이나 사천왕상 같은 건 없다. 가파른 산기슭에 위치하여 사찰 터는 좁으며 오히려 오른쪽으로 돌아서면 묘지가 훨씬 더 넓다. 하기는 묘지의 관리로 사찰 운영을 해가는 일본의 사찰이므로 신도보다는 묘지가 더 중요한지도 모른다
서산사
서산사의 원래 명칭은 대일암으로 1513년 10대도주 <소 사타쿠니>의 <니시야마(西山) 부인 보리사가 西山寺로 개칭하였다
서산사는 조선통신사가 대마도를 들렀을 때 유하던 장소로서 지금도 그것이 인연이 되어 특이하게도 유스호스텔을 운영하고 있는데 사찰이 운영하고 있는 대마도 유일의 유스호스텔이다.
대마출신의 승려 현소(玄蘇)가 개창한 절로 1611년에 건립되었으며, 임진왜란 이후 최악의 상태에 빠져있던 한·일 관계를 修復하여 평등한 우호관계를 유지하는데 큰 역할을 한 對조선국 외교기관이었으며 1611년 건립된 조선과의 외교를 담당한 장소인 이테안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지붕 위에서 아래로 길게 드리워진 줄은 빗물이 타고 내려와 지면 까까이에서 떨어지게 하는 장치한 것이다. 정원을 보호하기 위해서 설치한 것이다
서산사는 사찰로서보다 다른 이유로 해서 우리나라와 관련을 맺는다. 이 서산사는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통신사의 첫 기착지인 대마도 이즈하라의 조선통신사들이 묵었던 일종의 숙소이다. 대마도에는 조선통신사를 위해 이곳을 숙소로 하고 또 조선외교의 실무를 전담하는 관저로서 '이떼이안'이란 이름의 별도 건물이 있었다. 그런데 그 이떼이안이 1732년에 화재로 소실되고 만다 그 바람에 이떼이안이 세이산지로 옮겨오게 되고, 서산사(세이산지)는 조선과의 외교창구 겸 숙소로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대마도에 있는 일본의 사찰과 우리마라의 사찰이 다른 점은 많다. 그 중의 하나가 우리나라 사찰은 열려 있는데 일본의 사찰은 항상 닫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학술적인 연구를 목적으로 하거나 다른 특별한 목적으로 방문하여 사찰측의 허가를 받아야 가능하기 때문에 일반 관광객은 사찰의 내부를 쉽게 볼 수가 없다. 또한 일본의 불교가 대부분 대승불교이기 때문에 부인과 자식 을 두고 있으며 출퇴근을 하는 월급제 승려가 대부분이다.
예복을 입은 일본의 승려(서산사의 승려가 아님)
일본의 승려들은 불교행사 때를 제외하면 평상복을 입으며 머리를 깎지 않은 스님도 있기 때문에 겉모습만 보고는 승려인지 아닌지 구별이 어렵다. 먹는 음식에도 제한이 없어 술, 고기, 담배등을 마음껏 먹을 수 있다
스님이 되기 위한 일정한 수행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절 자체가 장례식이나 선조의 공양을 해주는 하나의 사업기관처럼 변해버린 것이다.
서산사의 종루-위에는 종이 매달려 있고 아래에는 창고 용도로 쓰인다
종루가 좁아서인지 종을 치는 막대가 밖으로 나와있다
우리나라의 불교사원은 화려한 단청으로 단장되어 있지만 하치만 사찰은 단청이 아예 없다.
탑은 당연히 없고, 사찰의 내부도 벽에 글씨와 사진 같은 것들이 있을 뿐이다. 불교사원의 독경소리도, 오가는 스님들의 모습도 볼 수 없다
(물론 나라의 동대사나 천수사 등 대사찰은 불상도 있지만 그런 곳과는 다르다)
이떼이안(以酊庵)으로 쓰였던 건물 건물 정면의 지붕끝에 있는 산 모양의 구조물은 당파풍(唐破風)으로 일본 고유의 건축 양식이다. 우리나라 전통 건축물에서는 박공이라 하는 것으로 에도(江后)시대를 전후하여 중국에서 전해져 일본 고유의 양식으로 변형되었다
이떼이안은 1611년에 세워져 조선외교의 실무를 담당하던 관서이다 1609년 4월(광해군 2년), 우리나라는 일본과 무역에 관한 을유약조를 체결한다. 국교도 회복되고 무역의 길도 열리므로 조선외교를 담당할 기관이 필요했던 일본은 '히요시(日吉-이즈하라 내의 지명)' 뒷편의 '우시로야마(後山)' 에 건물을 지었는데 (1611년 완공) 이것이 '이떼이안'이다.
'이떼이안'이라고 이름을 붙인 사람이 승려 '겐쇼'인데 '이떼이안'이란 이정유(以丁酉)로 丁酉年은 겐쇼가 태어난 해이다 1732년 화재로 인하여 이떼이안이 소실되자 이 곳 서산사로 옮겨오고 서산사는 '즈이세인(서천원瑞泉院)'으로 밀려났다가 메이지 원년(1868년) 이떼이안이 폐지되므로 서산사는 이 곳으로 다시 오게 되었다.
서산사의 묘지
대부분의 일본 사찰은 위패의 보관, 묘지 관리. 장례행사비 등을 받아 운영하며, 일본의 사찰주변은 거의 일본인 가족들의 납골묘가 가문별로 설비되어 있다.
묘지에는 각 가문의 묘비들이 따로 세워져있고. 그 아래 공간에는 화장한 분골을 항아리에 담아 넣어둔다. 그렇게 되면 여러 개의 항아리를 함께 넣을 수 있어 몇대가 한 무덤안에 같이 묻히게 되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태어나면 신사에 가서 그 조상신에게 참배로서 인사 하고, 결혼은 교회에서 서구식으로 치루고는 죽고 나면 장례 절차나 묘지 안장 등은 절에서 치루는, 우리로서는 선뜻 이해하기 힘든 복합 종교 문화가 일상화 되어 있다
고려 청동불상 서산사에 있는 본존불은 ‘대일여래(大日如來)’라 하는데 고려 청동불상이다.
서산사 대문 밖 옹벽 위에 있는 가레산스이 양식의 정원
우리나라는 주로 궁궐과 양반가에서 정원이 발달한 반면, 일본은 불교사찰과 신사를 중심으로 정원문화가 발달해 왔다
일본은 정원은 언덕식 정원과 枯山水(가레산스이)양식의 정원 두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언덕식 정원은 땅을 파서 연못을 만들고 파낸 흙을 쌓아 언덕을 만들며 다리를 놓고 정원수를 심는 일반적인 정원형태이고
다른 하나는 '가레산스'라고 해서 위의 사진처럼 바위와 흰모래(또는 매우 작은 잔자갈)로 표현하는 방식이다
흰모래는 흐르는 물을 상징하여 물결처럼 골을 지우고 바위는 산과 폭포를 의미하는데
무로마치 막부의 선종 사찰에서 시작되어 후대에 발전하여 지금은 독립된 하나의 정원 양식이 되었다
승려 겐쇼의 상 (본당에는 목조상이 있다고 하는데 볼 수는 없었다)
쓰시마가 조선과의 무역, 외교업무를 총괄하면서 국서를 개조한 사건이 있었는데
(柳川 사건, 외교업무를 함께 담당했던 柳川(야나가와)가 소오씨의 가신역활을 그만두고 막부의 하타모토가 될 수 있도록 허락해 주기를 원했으나 거절당하자 국서와 도장을 위조한 것을 막부에 폭로한 사건)
그 후 대마도의 요청으로 막부는 교토의 승려를 이테이앙에 파견하여 외교문서의 작성과 감독을 맡겼는데 , 이때 파견된 승려가 겐쇼이다.
승려 겐쇼는 하카다(博多) 세이후쿠사(聖福寺)에서 승려생활을 시작하여 임진왜란 때 조선 침략의 첩자와 같이 우리나라를 다니며 길잡이 역할을 한 사람이다
겐소는 대마도의 외교승으로 1580년 일본국왕사로 서울까지 왔었고 2번째는 1589년 고니시와 소오요시토시가 만들어낸 가짜 일본국왕사로 서울까지 오게 된다. 이것은 토요토미히데요시가 조선국왕을 내 앞으로 불러내라 명령 때문인데, 이를 통신사 파견으로 바꿔치기 한다.
1590년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서장관 허성(許筬)등의 통신사 일행이 풍신수길의 저의를 살피기 위하여 일본으로 갈 때 동행했으며 이듬해 다시 입국하여 조선의 국정을 살피고 토요토미의 명나라 침공을 위한 교섭활동을 하였다.
1592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가 이끄는 선봉군에 국사(国使)와 역관 자격으로 종군하였다.
이후 임진강을 사이에두고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과 대치할 때 고니시(소서행장)의 제의로 이루어진 중추부 동지사(中枢府同知事) 이덕형 등과 강화회담에 <야나가와 초신>과 함께 일본의 전시외교 활동에 종사하였다.
75세의 일기로 돌아가셨는데 그의 무덤은 이떼이안이 처음 세워졌던 '우시로야마(後山)' 에 있고 서산사 뒤 산기슭에 부도탑이 있다
이 곳에는 겐쇼의 목상이 남아있고, 부산 왜관 토코지(東向寺)에 모셔두었던 불상이 현재 이곳에 보관되어있다
(겐쇼의 업적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보는 학자도 있고
부정적시각으로 비판하는 학자도 있다)
서산사의 지장보살
서산사 뒷편의 대숲에는 제주 4.3 양민학살 사건 때의 억울한 영혼들이 묻혀 있다
제주도에서 영문도 모른 채 군경들에게 붙잡혀 사살되고 그대로 바다에 버려진 시체들이 해류를 따라 이곳까지 흘러왔는데 대마도 어민들이 수습하여 이곳 서산사와 태평사에 시신을 안치했다고 하며
1948년 제주 4·3항쟁 당시 많은 제주도민이 학살을 피해 이곳 쓰시마까지 도망쳐왔는데 조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죽자, 그들의 시신을 안치한 절도 바로 이 서산사라고 한다
또 이곳에는 조선의 명신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정사 황윤길과 함께 조선외교사절로 일본을 찾았던 김성일선생의 시비가 있다
김성일이 일본의 상황을 살피고 돌아왔던 역사적 사실은 모두 알고 있다. 정치적 의도가 깔렸다고 알려져 있기도 하지만, 일본의 침략이 없을 것이라는 그의 보고는 결국 임진왜란 초기에 조선군이 패전을 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 김성일선생에 대해서는 다음 "대마도 속의 우리 인물' 편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수선사(修善寺-슈센지)
백제 비구니 법묘스님이 창건하였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으며. 원래는 '규우홍인(九品院)이라고 불리던 비구니의 절이였다가 1573년경 남승의 절로 바뀌면서 이름도 '지유젠지'로 개칭하게 된 절로서 지금은 개인사찰이다
修善(수선)이라는 현판은 조선말 판서를 지낸 <김학진>선생님의 친필이다. 지금도 낙관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이곳에는 구한말 '을사오적'에 대한 상소문을 올리고 의병활동을 하다가 일본군에 잡혀 대마도에서 순국하신 최익현선생 순국비가 있다.
조선말 대원군의 장기집권을 탄핵하고, 민비 일족을 탄핵하고, 일본과 을사조약을 맺자 도끼를 들고 광화문앞에 엎드려 읍소를 했으나 이도 소용이 없자 의병들을 모은다. 결국은 같은 조선인의 희생을 불러일으킨 꼴이 되자 해산명령을 하고 당신은 그 자리에 꼿꼿이 앉아 한양으로 압송, 재판을 받고 쓰시마로 유배되어 결국은 단식 후 병사한다
그의 위정척사사상에 의한 항일 운동은 이후 항일 의병 운동과 민족 독립 운동의 지도이념으로 계승되었다
선생의 순국비는 높이 2.1m, 폭 0.45m, 두께 0.25m의 크기이다.
한국측의 황수영(黃壽永)박사가 쓴 비문의 전면에는 "大韓人崔益鉉先生殉國之碑"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고, 후면에는 "면암 최익현 선생이 1907년 1월 1일 대마도 경비대 억류지에서 사망하여 상여가 본국으로 운구될 때에 이 절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선생의 사적이 사라질까 두려워(근심되어) 이 비를 세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최익현선생에 대해서는 다음에 '대마도 속의 우리 인물' 편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사찰의 뒤에 있는 묘지에는 대마도 3대 성인이라고 추앙되고 있는 '스야마도우안(陶山納庵)'의 묘가 있으며 매년 4월 24일 '도우안'제(祭)가 이 곳에서 열리고 있다
수선사라는 표식판 뒤에 대마도 3대 성인 중 한명인 <수야마도우안>의 공적이 적혀있다
수선사의 대문과 계단
수선사 대문의 장식이 매우 섬세하다
수선사-개인사찰이라서인지 허술하다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라면 누가 이런 절을 찾겠는가?
대문 옆에 있는 지장보살상과 동자승들(석상)
일본인들의 지장보살의 원력(願力)에 대한 믿음은 사후 지옥의 고통에서 벗어나거나 영혼을 천도(遷度)하려는 희원(希願)과 자연스럽게 결합했다. 장례식이나 49재 등 죽음과 관련한 우리나라의 불교 의식에서도 염불의 중심은 지장경이다
사람은 죽어서 부처가 된다고 믿는 일본의 불자들은 그들의 가족인 영가가 부처가 되었다고 믿고 지장보살이 있는 사찰에 작은 돌불상을 조성한다고 한다.
사찰 불단의 지장보살상을 제외하고 야외에 놓인 지장보살상은 앞치마같은 턱받이를 두르고 있다. 지장보살이 지옥의 악귀의 손아귀에서 아이들을 구한다거나 동자승이나 아기의 모습으로 현신한다는 토속적인 믿음에서 정착된 습속이다
턱받이는 침이나 음식물을 흘릴 때에 대비한 것이라는 설도 있고 다른 이야기로는 49재가 지나야 영혼이 극락에 들어가므로 그전까지 떠돌아 다니는 영혼이 추울까봐 입혀주는 옷이라고 설도 있다.
가정집 담벼락에서 본 미즈코 지조 (담벼락에는 콩란(짜개란)이 파랗게 원령을 달래고 있다)
일반주택의 현관 앞에 있는 아기 모습의 ‘미즈코 지조’(水子地藏)
앙증맞은 아기 모습의 ‘미즈코 지조’(水子地藏)이다 ‘미즈코 지조’는 사시사철 예쁜 옷으로 갈아 입고 과자와 인형 등을 제물로 받는다. ‘미즈코’는 달수를 덜 채운 신생아나 사산된 아이를 뜻했으나 지금은 주로 임신중절 등으로 유산된 아이를 가리키는데 쓰인다. 그러니 ‘미즈코 지조’는 태어나지 못한 태아를 상징하는 아기 보살상이다. 얼핏 아기의 모습으로 지장보살을 연상해온 전통을 이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의 뿌리깊은 원령(怨靈)신앙에서도 태어나지 않은 생명의 원념(怨念)은 무시돼 왔다.
위로와 공양의 대상은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늘 살았던 존재에서 비롯한 혼령에 한정됐다. 더욱이 일본에서는 7살 이하의 아이는 아직 인간의 아이가 아닌 신의 영역에 속한 아이라는 믿음이 이어져왔다. 아이의 주검을 따로 모아 마을이나 묘지 한쪽의 경계 영역에 묻어 경계의 신인 지장보살에게 모여 들도록 한 것도 그래서였다. ‘미즈코 지조’를 만들어 공양하는 ‘미즈코 공양’은 죄책감이나 아기에 대한 사랑보다는 뒷탈에 대한 걱정에서 비롯했다. 태아의 혼을 달램으로써 건강과 행복을 얻으려는 의식체계는 일본 전통의 원령신앙과 구조가 같다
이곳에도 어김없이 묘지가 있다. 앞쪽에 받침없이 덜어져 있는 비석이 여럿 보인다. 오래되어 돌봐주는 후손이 없어 무연고비석이 된건가?
통일신라시대 금동불상이 봉안되어 있다고 하나 형태로 보아서는 불당이 아닌 납골묘일 가능성이 크다. 자물쇠로 굳게 닫혀 볼 수 없었다
5월인데도 수선사 경내에 있는 나무에 달려있는 오렌지. 별로 맛이 없어서 잘 먹지않기 때문에 지금도 달려 있다. 시내에서 많이 발견된다
수선사의 일본식 동종
일본은 종 제조 기술이 부족하므로 우리나라에서 주조된 종이 많이 건너갔는데 현존하는 것이 신라종 6개, 고려종 20개 등 70여개의 조선종들이 있다고 한다
일본종과 한국종의 구분 1. 우리나라 종은 종 윗부분의 용조각이 한 마리이고 일본종은 두 마리이다 2. 우리나라 종은 음관이 있으나 일본종은 없다 3. 우리나라 종은 유두(윗부분 네모 속에 젖꼭지처럼 생긴 것)가 9개인데 일본종은 16개이다 4.우리나라 종에는 비천상이나 연꽃 무늬가 있으나 일본종은 간결한 선으로 조각되어 있다
태평사(太平寺)
태평사 정문
팔번궁신사에서 382번 도로를 따라 하타카츠쪽으로 3분정도 가면 이즈하라 경찰서가 나오고 바로 옆 골목 안쪽에 태평사가 있다. 조동종파의 사찰이었다
이른 새벽에 답사코스에 없는 이 사찰을 찾은 까닭은 태평사 경내에 제주 4․․3학살의 무고한 영혼을 달래는 비석이 있기 때문이다
제주 4․3 양민학살사건 때 죄도 영문도 모른 채 학살당해 제주바다에 버려진 시신이 조류를 타고 대마도에 떠내려 온 것을 이 곳 어민들이 수습하고 영혼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워놓았다고 한다.
수습된 시신들을 서산선사 뒷산 대나무 숲과 태평사 뒷산에 안치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가와 치 쇼이치(남.70)씨는 말한다
대마도에서는 가장 크고 웅장하며 사찰다운 규모이다
이곳에도 빗물 낙수받이 쇠줄이 길게 드리워져 있다. 끝이 지면에 닿는 부분도 깔끔하게 해놓았다
대마도에서 유일하게 본 보살상이다 청동으로 만들어졌다
종각이다. 이곳 대마도에서 본 일본종은 모두가 작다. 종각의 크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으며 옛날 시골학교의 종처럼 줄로 추를 움직여 치는 종도 있다 종이 작다는 것은 일본의 종 주조기술이 부족함을 말해주는 게 아닐까?
묘지의 규모도 가장 크다. 수백기도 넘는 것 같다
무연지제영비(無緣之諸靈卑)
원한의 제주 4.3 양민 학살사건 ! 제주도에서 학살되어 물결따라 닿은 이 곳에서 그래도 고마운 어민들을 만나 쉴터를 얻은 양민들 고국에서는 진상규명을 하여 원한을 풀어준다고 하는데 이 곳에 잠든 영혼들의 억울함은 언제 풀리려나
대한민국의 제주도. 1948년 4월 3일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하여 제주도에서 일어난 무장봉기가 바로 제주 4.3사건이다. 미군정 초기부터 지속되어온 인민위원회 및 대중들과 경찰, 우익단체간의 갈등이 무장봉기로 폭발하였다. 1948년 11월과 1950년 사이에 군경에 연행된 양민들이 돌에 묶인 채 부근 바다에 던져졌다고 한다. 이들의 시신이 해류를 타고 이곳으로 흘러오지 않았을까? 수습한 시신들은 서산사 뒷편 대나무숲과 태평사 주변에 안치했다고 하는데 이 태평사에만 155구의 시신을 안치했다고 한다.
이들의 영혼을 모신 비석 앞에 누군인지도 모르지만 작은 불상을 모셔 놓았다. 조성된지 얼마되지 않은 것 같다
대마도 4무(無)
쓰시마에는 4가지의 없는 것이 있는데 야꾸자, 지진, 대학, 김(먹는)이라고 한다 빼앗아 먹을 것이 있어야 야꾸자도 생기지.. 지진이 없기 때문에 한국처럼 온천이 적고 수질 또한 아주 좋은 것은 아니므로 큰 기대를 말기를...
대학이 없어 이곳 출신학생들은 규슈나 본토로 가야하는데 근래와 와서 우리나라 부산으로 유학을 오는 학생이 많다. 특히 쓰시마고등학교의 국제교류과는 타 시도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어 이곳으로 지원해 오는 학생들도 있다고....
또 김(海苔)양식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데는 필연 무슨 사연이 있을텐데 알아보질 못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