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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순종하는 온전한 믿음으로 성숙하는 달☜
생명의 양식(진리의복음)을 등한히하면, 사탄에게 영생(永生)의 기쁨을 빼앗기게 됩니다.
행27:1-44절) 유라굴로 광풍(맞바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포기해야 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결국 삶의 위기가 발생했을 때,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주시는 영감(靈感)은 나의 생명을 살릴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목숨까지 살리는 복이 될 때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배(船)를 타고 바다로 나가는 것을 굉장히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로마 사람들은 오랫동안 바다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바다의 중요성에 일찍부터 눈을 뜬 사람들은 그리스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바다에 나가는 것이 위험한 일이기는 하지만, 다른 나라에서 많이 생산되는 물건들을 값싸게 사서, 또 다른 지역에 가서 팔면, 어마어마한 이익(利益)을 남길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배(船)를 타고 바다에 나간다는 것은 언제, 어느 때, 풍랑을 만나 죽을지 모르는 위험을 항상 감수해야만 했습니다. 처음 배(船)를 타고 바다에 나갈 때는 바다가 너무 잔잔해서 배가 미끄러져 나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배(船)가 움직이는 것조차도 느끼질 못합니다. 그러나 파도가 치고, 울렁거리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어지러워지기 시작하면서 잘못하면, 배에서 내릴 때까지 멀미와 구토로 고생을 심하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무서운 것은 태풍(颱風)을 만나면, 아무리 큰 배(船)라도 종이배 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큰 태풍을 만나면, 그 자리에서 침몰(沈沒)할 수도 있고, 바람에 밀려가다가 암초(暗礁)를 만나서 좌초(坐礁)되어 파선될 수도 있습니다.
파선(破船)한 배(船)에서 가까스로 살아남는다고 해도 혼자 망망대해에서 굶주림과 목마름과 졸음과 싸우면서 생존을 위한 사투(死鬪)를 벌여야 합니다.
원래 사도 바울은 로마에 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로마로 가게 되었지만, 결코 자신이 원하는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자유로운 복음 전도자의 신분으로 로마에 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유로운 복음(福音) 전도자(前導者)의 신분이 아니라, 로마 황제의 재판(裁判)을 받아야 하는 죄수(罪囚)의 신분으로 로마에 가게 되었습니다.
결국 사도 바울은 로마로 행선(行船)하는 배에 올랐고, 그가 승선한 배(船)는 항해하면서 유라굴로 라고 하는 무시무시한 태풍(颱風)을 만나, 표류하다가 파선당하는 바람에 그는 거의 죽음의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런 죽음의 위기 중에서도 주님이 주시는 음성(音聲)을 듣고, 그 배에 탄 사람들을 위로하고, 독려하여 한 사람의 생명도 잃지 않고, 모두 다 살리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아마 사도 바울이 자유로운 전도자의 신분으로 로마에 갔더라면, 이런 체험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죄수(罪囚)의 신분으로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끌려갔기 때문에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그 안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까지 모두 살리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죄수(罪囚)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그가 뭐라고 말해도 아무도 귀담아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국 바울의 말을 통하여 그 배(船)에 오른 모든 사람들의 생명을 건지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셨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다 살 수 있는 길로 인도해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이런 위기의 순간이 닥쳐오고, 어떤 절망(絶望)의 시간이 닥쳐와도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붙들고, 순종하여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위험에서 반드시 건져주십니다.
우리나라는 요즘 파도에 휩쓸려가는 배(船)처럼 지도력(指導力)을 잃고, 어디론가 표류하고 있습니다. 즉 유라굴로 광풍이 어디로 끌려가고 있는지? 이렇다가 갑자기 큰 파도를 만나거나, 암초(暗礁)를 만나 파선되지는 않을지? 심히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하셨던 것처럼,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우리들에게도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처럼, 항상 파선당하지 않도록 지켜달라*고 새벽 4-5시 마다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Ⅰ.로마로 가는 길
27:1-2절)우리가 배를 타고 이달리야에 가기로 작정되매 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을 아구스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에게 맡기니”
사도 바울은 로마 황제의 재판(裁判)을 받기 위해 로마로 압송(押送)되기로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 혼자만 압송된 것이 아니라, 다른 몇 명의 죄수(罪囚)들과 함께 로마로 이송됩니다.
요즘으로 치면 여러 명의 죄수들이 같은 교도소(矯導所)의 호송버스를 타고, 법정(法定)으로 이동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때 사도 바울의 신분은 이송중인 죄수(罪囚)였습니다. 그러나 성경 27:1절)우리*라는 표현으로 바울과 지칭한 사람과 함께 가게 됩니다. 그가 곧 이 사도행전을 저술한 의사 출신 누가입니다.
누가는 바울과 함께 승선(乘船)해서 항해를 했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일어난 자세한 일들을 일지(日誌)형식으로 적어서 남길 수가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가이사랴에서 배(船)를 타고 이달리아로 가기로 결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시아를 도는 배(船)는 아주 작은 배(船)였기 때문에 작은 배(船)를 타고는 이달리아까지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일정은 아드라뭇데노에서 오는 배(船)를 타고, 어느 정도 가서 이달리아로 가는 큰 배(船)를 갈아타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이번에 죄수(罪囚)들을 호송(護送)하는 책임자는 율리오라 하는 백부장이었는데, 이 사람은 바울에 대하여 아주 호의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연안(沿岸)배(船)가 시돈에 도착했을 때는 바울이 그곳 사람들에게 얼마든지 대접을 받을 수 있도록 허용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로 가는 길에서 신앙적인 친구들을 이렇게 만나서 함께 교제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큰 격려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사람이기 때문에 이 큰 영적(靈的)전쟁(戰爭)을 치르기 전에 격려가 필요했고, 위로가 필요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위로와 격려를 시돈에 있는 믿음의 형제자매들로부터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과 그 일행의 위기는 얼마가지 않아서 닥쳐오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배가 구브로를 지나 루기야의 무라 시에서 이달리야로 가는 배(船)를 만나서 갈아타게 됩니다.
이 배(船)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오는 배(船)인데, 아마 곡물(穀物)수송선이든지, 아니면 다른 무역선(貿易船)이었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 두 개의 섬이 나오는데, 하나는 구브로 섬이요, 다른 하나는 그레데 섬입니다.구브로 섬은 사도행전에서 이미 앞서 많이 나왔던 섬으로써 시돈 앞에 있는 섬입니다. 그런데 이미 구브로를 지날 때,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본래는 섬 아래로 항해(航海)를 할 계획이었으나, 바람을 피하여 바람이 덜한 섬 위쪽으로 항해하여 루기아의 무라 섬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여기가 곧 아시아요, 지금의 터키입니다. 그러나 바람이 점점 더 세어졌기 때문에 그레데 섬까지 와서 미항에 정박을 하게 되는데, 그레데는 지금의 그리스의 크레타 섬입니다.
여기서 이미 사도 바울은 항해의 위험을 느끼게 됩니다. 이에 따라 바울은 백부장에게 이번 여행의 위험성을 알리면서 더 이상 항해하지 말고, 여기서 겨울을 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습니다.
27:9-11절)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항해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그들을 권하여.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몰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하되.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어떻게 이 행선의 위험을 알 수 있었을까? 그것은 바울이 배(船)를 타고 선교 여행을 해온 경험에서 나온 것입니다. 바울은 이미 여러 번에 걸쳐서 복음 전파를 위해 항해해 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금식기간이 끝난 절기부터는 항해가 위험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대개 금식일은 티스리 월(7월 백중살이)부터 대 속죄일(9월20일)까지의 기간을 말합니다. 이 절기 이후에는 겨울에 태풍이 많아서 항해가 위험합니다. 우리나라는 여름에 태풍이 많은데 비해, 지중해는 겨울에 비가 많고, 겨울에 태풍이 많은 것이 특징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분명히 지금쯤이면, 태풍이 있을 것이니, 항해하다가 태풍을 만나면, 하물(何物)과 배(船)와 생명을 다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미리 알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어디까지나 죄수(罪囚)의 신분이기 때문에 이 항해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따라서 백부장은 한 편으로는 바울에 대하여 호의적(好意的)이었지만, 중요한 결정을 하는 데는 바울의 말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즉 백부장은 선주(船主)나 선장(船長)의 말을 더 믿었습니다. 일단 선장과 선주는 이 정도의 바람이면, 얼마든지 항해 할 수 있고, 바람이 더 불면, 뵈닉스 라는 곳까지 가서 정박(碇泊)하자고 했습니다.
아마 뵈닉스는 미항(微港)보다는 크고 상권(商權)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27:12절)그 항구가 겨울을 지내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봐닉스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쪽은 서남을, 한쪽은 서북을 향하였더라.”
아마 미항(微港)은 아주 작은 항구(港口)였기 때문에 장사는 전혀 할 수 없는 곳이었던 것 같습니다. 즉 겨울을 나는 동안 아무것도 못하고, 항구(港口)에 묶여 있어야만 하는 곳입니다. 거기에 비하여 뵈닉스는 같은 그레데 섬이지만, 항구가 훨씬 더 커서 기왕 겨울을 나면서 얼마든지 장사도 하고, 즐기면서 지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탔던 배(船)의 선장(船長)과 선주(船主)는 조금 더 많은 이익(利益)과 조금 더 편한 생활을 위하여 뵈닉스로 가는 길을 택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곳으로 가던 중에 유라굴로 라고 하는 무시무시한 태풍(颱風)에 휘말리게 됩니다.
사도 바울도 복음(福音)을 전하기 위하여 이 부근을 여러 번 다녔기 때문에 항해하는 것이 순조롭지 만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구브로를 지날 때도 바람을 피하여 북쪽으로 왔고, 미항까지 오는데도 시간이 많이 걸려서 왔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에게는 언제나 성령이 주시는 영감(靈感)이 살아 있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길로 가면,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먼저 거부반응을 보이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성령의 세미한 음성’이라고 말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로 하여금 불도 체험하게 하시고, 바람도 체험하게 하셨지만, 그 중, *하나님을 세미한 음성*을 발견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의 세미한 영감(靈感)*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福)이요, 재산(財産)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사도 바울의 영감(靈感)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사도 바울에게 우호적(友好的)이었던 백부장도 바울의 말보다는 선장(船長)이나 선주(船主)의 말을 더 믿었던 것입니다. 대개 사업(事業)하는 분들이나, 어떤 큰일을 하는 분들은 어느 정도는 모험(冒險)을 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모험(冒險)을 하지 않고는 결코 좋은 것을 손에 넣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개 여성들이나, 크리스천들은 모험(冒險)을 하는 것보다는 안전한 것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괜히 모험(冒險)해서 큰 손해를 보거나, 지금까지 갖고 있던 것까지 모두 다 날리는 것보다는 적은 것에 만족하면서 사는 것이 났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사람들도 어떤 경우는 모험(冒險)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대개 잘못된 길로 가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미리 막으실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길이 열리지 않을 땐 억지로 가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실 때는 담대하게 걸어가야 합니다.
Ⅱ.유라굴로 광풍
27:13-15절)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들이 뜻을 이룬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끼고 항해하더니. 얼마 안 되어 섬 가운데로부터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크게 일어나니.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좇아가다가”
문제는 처음 배가 출발할 때, 전혀 위기를 느낄만한 징후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남풍이 부는 것을 보고, 그들 생각대로 되는 것 같아서 기분 좋게 항해 했는데, 얼마가지 않아서 강한 맞바람(狂風)이 섬 가운데에서부터 불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 바람이 얼마나 강한 광풍(狂風)이던지, 도저히 항해할 수 없어서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배(船)가 바람에 떠밀리는 대로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이제부터는 모든 것을 광풍(狂風)에 내어 맡기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광풍(狂風)은 보름동안 쉬지 않고 몰아쳤는데, 배(船)가 뒤집히지 않은 것만 해도 하나님의 큰 은혜였습니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크레타 섬에 솟아 있는 해발 2,100미터 산(山)때문에 남풍이 갑자기 광풍(狂風)으로 변하면서 이다 산(山)에서 내려치는 동북풍에 배(船)들이 밀려 파선하거나, 아프리카 쪽 모래톱에 걸린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탄 배(船)는 *가우다* 라고 하는 작은 섬 옆을 지나갈 때, 겨우 끌고 가던 작은 배(船)를 잡아 올려서 잡아 맬 수 있었습니다. 여기 *거루* 라는 것은 배(船)가 파선되었을 때, 타는 구조선(救助船)을 말합니다. 그리고 파도에 배(船)가 부서지지 않도록 배(船) 전체를 밧줄로 동여맸습니다. 그러고 17절을 보면 *스르디스* 라는 것은 어마어마하게 큰 모래톱을 말합니다.
여기에 배(船)가 걸리면, 꼼짝 못하고 굶어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배(船)를 가볍게 하기 위해서 배(船) 안에 있는 무게가 나갈 짐들은 모두 바다에 던졌습니다. 배(船)가 파선되려고 하자, 모든 짐을 바다에 다 버리고, 사흘 째 되는 날에는 배(船)의 기구(器具)들도 자기들의 손으로 모두 다 바다에 버렸습니다.
27:20절)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해와 별이 있어야 날짜를 계산하고, 방향(方向)을 잡을 수 있는데, 망망대해에서 여러 날 동안 오직 바람과 파도만 몰아쳤기 때문에 배의 위치를 알 수도 없었고, 날짜도 계산할 수가 없었고, 오직 모두의 머릿속에는 *이제 죽는 구나*하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이런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위기 상황에서 가장 나타나기 쉬운 현상은 사람들이 모든 의욕(意欲)을 상실하고, 자포자기(自暴自棄)해 버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오직 자신만 살기 위해 재빨리 도망을 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경우는 위기 상황에 대해 서로 책임을 전가하며, 다투다가 엉뚱한 데, 화풀이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자포자기(自暴自棄)하는 것이나,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치는 것이나, 죄수(罪囚)들을 죽이지 못하도록 독려한 사람이 곧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그 말씀을 믿고,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다 해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에 순종하면, 절망을 넘어 소망 가운데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Ⅲ.사도 바울의 위로와 격려
모든 사람들이 큰 광풍(狂風)가운데 절망하고 있을 때, 바울이 일어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27:21절)...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여러날 계속되는 강한 광풍(狂風)속에서 배가 세차게 일렁거렸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심한 멀미와 정신적 혼미한 상태에서 먹지 못하고, 지내는 날이 여러 날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이제 이러다가 꼼짝없이 죽는구나.*하고 절망하고 있는 중에, 사도 바울이 흔들리는 배(船) 가운데서 일어나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내 말을 듣고 떠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뻔 했습니다*
이 말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은 것에 대한 비난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이 뒤에 나오는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전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즉 *처음 내 말을 듣지 않아도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하는 이 말은 꼭 믿어야한다.* 는 뜻입니다.
27:22-25절)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겠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참으로 놀라운 위로의 말씀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광풍(狂風)으로 지치고, 굶어서 절망하고 있을 때, 사도 바울은 가장 분명한 말로 *아무도 죽지 않을 것*을 확언(確言)했습니다.
지금 모두 죽을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이때, 생명을 보전할 수 있다는 것이 확실하다면 무엇을 걱정하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한 사람도 죽지 않는 근거를 제시했습니다. 즉 *어제 밤에 하나님의 사자(使者)가 내 옆에 서서 말을 하시는데, 너는 로마 황제 가이사 앞에 서서 말을 하게 될 것이고, 여기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너에게 맡겼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에 가는 목적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신(使臣)으로 로마 황제를 만나러 간다*는 것입니다. 비록 그는 표면적(表面的)으로 죄수(罪囚)의 신분이지만, 이면적(裏面的)으로는 *하나님이 보내신 사신(使臣)자격*으로 로마 황제에게 가는 것입니다.
아울러 하나님께서는 *함께 배에 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생명을 사도 바울에게 맡겼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포기하지 않는 이상 아무도 죽을 순 없는 것*입니다. 더불어 사도 바울은 배에 있는 사람들에게 *안심하라*고 하면서 *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어 질 줄 믿는다.*며 용기를 줍니다.
이것보다 더 반가운 조식이 없었습니다. 즉 *한 사람도 죽지 않고, 모두 다 산다*고 하니까 이것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 있을까? 그래서 위기를 만났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불안과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있는 믿음뿐입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붙들고 있을 때, 우리 중에 있는 모든 불안과 두려움은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단지 사도 바울은 *배는 건지지 못할 것* 이라고 했습니다. 배(船) 까지 건지려면, 죽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자신들이 갖고 있는 모든 것들을 다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만 믿고, 최선을 다하면, 일단 목숨은 건지게 되는 것입니다. 목숨만 건지고 나면, 그 이후에 살아가는 것은 또 다시 믿음으로 시작하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말을 언제 했는지는 알 순 없지만, 그 후에도 바람은 계속 불었습니다. 그러다가 열나흘 째 되던 날, 또 다시 위기가 발생했습니다. 그것은 사공들이 모두 작은 배(船)를 타고, 그들만 도망을 치려고 한 것입니다.
27:27-30절)열나흘 째 되는 날 밤에 우리가 아드리아 바다에서 이리 저리 쫓기다가 자정쯤 되어 사공들이 어느 육지에 가까워지는 줄을 짐작하고 물을 재어 보니. 스무 길이 되고. 조금 가다가 다시 재니. 열다섯 길이라. 암초에 걸릴까 하여 고물로 닻 넷을 내리고. 날이 새기를 고대 하니라. 사공들이 도망하고자 하여 이물에서 닻을 내리는 체하고 거룻배를 바다에 내려 놓거늘”
사도 바울의 예언(豫言)에도 아랑곳없이 바람은 계속되었는데, 사공들은 물의 깊이를 재어보다가 육지(陸地)가 가까워지는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왜냐하면 물이 점점 얕아지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선원들의 판단(判斷)은 맞았습니다. 결국 배(船)는 육지까지 가지 못하고, 침몰했는데, 사도 바울이 침착하게 사람들을 지휘해서 한 사람도 죽지 않고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원(船員)들은 사도 바울의 말을 끝까지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공들이 도망치려고 하는 것을 알고는 로마 군인들에게 *사공들이 도망을 치면, 우리는 살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군인들이 작은 배(船)를 맨 줄을 끊어버리는 바람에 사공들이 도망치는 것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무리 *하나님이 산다*고 약속하셨어도 우리도 최선을 다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일단 배(船)에서 내릴 때까지는 사공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위기 때, 가장 위험한 것은 자기 혼자 살려고 도망을 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두 다 죽게 됩니다.
인간들은 평소에는 자신이 아니면, 나라가 안 될 것처럼 큰 소리 치는 사람들이 많지만, 위기가 오면, 모두 꼬리를 감추고, 자기 살길만 찾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끝까지 자기 위치를 지켜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살 길을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고 하셨습니다.
사공들이 도망치려고 했던 때가 새벽이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사도 바울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지키기 위하여 애쓰고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사공들이 슬그머니 도망치려는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위기는 하나님은 분명히 *배를 건지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는데, 사람들이 모두 너무 굶어서 헤엄을 칠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는 먹을 것을 억지로 먹어야 허기를 면할 수가 있습니다.
27:33-38절)날이 새어가매 바울이 여러 사람에게 음식 먹기를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기다리고 기다리며 먹지 못하고 주린 자가 오늘까지 열나흘인즉 음식 먹기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의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카락 하나도 잃을 자가 없으리라 하고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그들도 다 안심하고 받아먹으니. 배에 있는 우리의 수는 전부 이백칠십육 명이더라. 배부르게 먹고 밀을 바다에 버려 배를 가볍게 하였더니”
14일 동안 광풍(狂風)이 몰아치는 바람에 사람들은 아무 것도 먹을 수 없었습니다. 아마 먹었던 것도 모두 다 토해내었을 것입니다. 이때 사도 바울은 먹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속은 비어서 메스껍고, 빵은 모두 물에 젖었고, 의식은 희미하지만, 사도 바울은 사람들에게 돌아다니면서 빵을 나누어주고 *먹으라.*고 권했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잘 먹으려고 하지 않자, 가운데 서서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사람들은 *머리 털 하나도 상하지 않고 모두 살 것*이라 하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자. 그때서야 모두들 안심이 되어 떡을 배불리 먹었습니다.
그런 후 모든 곡물(밀)을 바다에 버려서 배(船)를 가볍게 했습니다. 아침에 보니까 어느 땅인지는 모르지만, 해안으로 된 항만(港灣)이 눈에 보였습니다. 이제 그들은 사람이 사는 육지까지 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배(船)가 너무 커서 과연 항만(港灣)안에 들어갈 수 있는가가 문제였습니다. 배(船)는 그 작은 항구(港口)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일단은 배(船)를 항구(港口)에 밀고 들어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닺을 끊고, 돛을 달고, 해안을 향하여 들어가는데, 그만 배(船)가 두 물이 합치는 곳에서 좌초(坐礁)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배(船) 뒤쪽은 모래에 박혀서 움직이지 않고, 앞 쪽은 파도에 배(船)가 부서져 침몰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또 다시 위기가 발생하는데, 그것은 죄수(罪囚)들이 헤엄을 쳐서 도망 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죄수(罪囚)들을 미리 모두 죽이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이미 사도 바울의 인격(人格)에 깊은 감동을 받았기 때문에 사도 바울을 살리기 위해서 *죄수(罪囚)들을 죽이지 말고, 밖으로 헤엄쳐서 보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래서 헤엄을 칠 수 있는 사람은 헤엄을 치고, 헤엄을 칠 수 없는 사람은 널조각이나 배(船)물건을 타고, 헤엄을 쳐서 결국 한 사람도 목숨을 잃지 않고, 모두 다 살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배(船)에서 죄수(罪囚)의 신분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배(船)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생명을 사도 바울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로 인해서, 그 배(船)에 타고 있던 276명 전원이 다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코로나 패네믹 태풍 위기 때,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의 생명을 우리에게 붙여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포기하지 않는 한 모두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위기에 빠졌을 때,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성령의 세미한 음성이 얼마나 중요한가*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처음 배(船)가 떠나기 전에는 사실 사도 바울 자신도 자신의 영감(靈感)에 대하여 확신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단지 감(感)으로 이번 항해가 배(船)나. 물건이나. 사람들의 생명을 위태롭게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위기가 발생했을 때에는 단순한 감(感)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자(使者)가 바로 옆에 서서 모든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약속을 해주었습니다. 즉 *아무도 죽지 않을 것이지만 배는 버리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위기 중에서도 답(答)을 알고 있습니다. 단지 그 과정이나 기간을 몰라서 그렇지, 하나님은 반드시 이 위기의 상황에서 우리를 건져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기 중에서 자포자기(自暴自棄)하거나 절망하는 것 등은 죽음을 자초하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또 서로 책임을 전가하고, 회피한다거나, 아니면 자기 자신만 살려고 비겁하게 도망치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하나님이 *산다*고 약속(約束)을 하셔도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에게 산다고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에게 최선을 다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선원(船員)들이 작은 배(船)를 풀어서 도망치려고 했을 때, 그들이 도망치는 것을 보면서 그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군인들에게 *저 사람들이 도망치면 다 죽는다*고 하면서 밧줄을 끊어서 구명정(救命艇)을 버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먹지 못해서 모두가 지쳐 있을 때, 그들이 소진(消盡)해진 체력회복을 위해서 강권적으로라도 먹게 했습니다. 더불어 그들의 상한 마음을 위로해 주었습니다.
나중에 아무런 장치도 없이 배(船)를 몰아서 항구로 가다가 배(船)가 모래에 파묻혔을 때도 사도 바울은 가만히 두 손 놓고, 구경만 하고 있지 않고, 그들로 하여금 헤엄을 치거나, 널조각 같은 것을 타고 안전하게 모두 육지에 당도할 수 있도록 모든 조치를 강구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이 말씀이 중요한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믿지만,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經驗)이나, 또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더 믿고, 우리의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국가(國家), 종교(宗敎), 가정(家庭)의 위기가 계속 되고 있는 상황인데, 정치인들이나 지식인들 중, 어느 누구도 지금 이 위기를 헤쳐 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민생을 살리겠다*고 속이고, 오히려 영혼을 멸망케하고. 사기치고. 서로 책임을 전가(轉嫁)하면서 비난하는 데만 급급한 실정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누구를 믿어야 합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굳게 붙잡고,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만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매 순간 하나님이 하시는 세미한 음성을 따라 최선을 다한다면, 분명히 우리와 후손들은 물론이거니와 우리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열방의 소중한 사람들까지도 살릴 수 있을 것입니다.아-멘
찬송가 432장 *큰 물결이 설레는 어둔 바다*
◁가족같은 교회. 교회같은 가족▷
☞ 교갱원 설립할 創立member(마28:18-20/롬8:28)
37개 셀(cell)공동체는 열방의 죽어가는 소중한 생명을 멸망에서 구령할 사명있습니다.
20년 씨뿌리고. 잃은영혼찾고. 성례전과 수련회하기에 적합한 동탄 황금어장(漁場)에 교갱원을 설립할 創立member를 찾습니다. ※카톡회원들도 적극 동참합시다. 교갱원 주춧돌 동판에 創立member 이름을 새겨 후손들에게 영구적(永久的)기념이 될 것입니다.
순종하는 믿음으로 하늘에 보물 쌓을 創立member
▽교갱원 설립할 온라인 특별 헌금▽
농협 NH콕뱅크 302-8772-0191-01(헌금 종류)
대한 예수교 장로회(합동)교회갱신 성경연구원
정 의 영 목사 ☎ 010-8772-0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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