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0일 반메투오(Ban Me Thout)의 공격과 병행하여
남베트남군 제1군단 지역에서도 북베트남군은 전 지역에 걸쳐서 견제공격을 개시하였다.
북베트남군은 이 지역의 강력한 남베트남군의 전력을 고려하여
공세 전에 은밀히 제341사단을 이동시켰다.
공세 당시 남베트남군 제1군단 지역에 있었던 북베트남군은
베트콩 연대까지 포함하였을 때 남베트남군 제1군단보다 우세한 것 같이 보였으나
남베트남군의 지방군 대대와 민병대를 고려하면 병력은 남베트남군이 많았다.
3월 16일까지 견제공격만을 계속하도록 하였으나
19:00 경 남베트남군의 중부 고원 철수에 관한 결정적인 정보와
남베트남군 제1군단의 재배치에 대한 개략적인 첩보를 입수한 북베트남 전쟁 지도부는
이를 확인한 후 전선사령관 둥(Dung)에게 남베트남군 제2군단의 철수를 통보하여
즉각 추격토록 하고 남베트남군 제1군단 지역에 있는 북베트남군도
3월 19일부터 총공세를 개시하도록 하였다. 싸우지도 않고 스스로의 패주를 자초하는
남베트남군의 중부 고원 철수와 군 재배치계획은
제1군단의 운명도 단축시키는 재앙까지 초래한 것이다.
북베트남군의 공격 계획은 현재 남베트남군이 다낭 지역으로 철수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이 호기를 포착, 남베트남군이 철수하기 전에 적의 저항거점은 우회하는
과감한 돌진전법으로 신속히 1번 도로를 차단하여 주요 도시지역을 고립시킨 후에
분리된 적을 각개격파 한다는 것이었다. 이와 병행하여 전방에서는 전투력을 집중하여
남베트남군 제1사단을 섬멸하고 신속히 후에(Hue)를 해방하여 북베트남군에게
승리에 대한 확신을 심어 주면서 남베트남에게 심리적 충격을 춘다는 것이다.
북베트남군 제341사단과 1개 독립연대, 전차연대는 보병, 전차 협동으로
티우와 트룽이 철수계획을 논의하였던 3월 19일 공격을 개시하여
남베트남군 진지로 쇄도해 들어갔다. 북베트남군은 이러한 대규모의 정규전에
생소하였으나 공격자의 심리적 우월감에다 중부 고원지대에서 북베트남군이
대승하였으므로 자기네들도 승리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진격하였다.
남베트남군은 이와 반대로 패배의식, 방어자의 심리, 중부 고원지대에서의
제2군단 패배의 충격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되어 대규모로 공격해 오는
북베트남군에게 감히 대항할 생각을 못하였다.
오랫동안 준비해 왔던 방어진지에서 치열한 접전은 고사하고 원거리 사격도
별로 시도하여 보지도 않고 남베트남군은 무질서하게 쾅트리(Quang Tri) 성의
경계선인 미찬(My Chanh) 강 선으로 철수하였다. 쾅트리 성 전체가 포기된 것이다.
쾅트리 시에는 15만 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1972년도 북베트남군의 춘계공세 시에 피난을 하였던 경험이 있었다.
공수부대가 철수하고 해병사단도 이동하자 약 2만여 명은 후에로 이동하여 버렸다.
3월 19일 북베트남군의 공세가 시작되자 대부분의 쾅트리 시민들은 후에로 향하였다.
북베트남군 전차가 야간에 헤드라이트까지 비추어 주기도 하였다.
25마일 이상이나 걸어서 후에에 온 피난민들이 몰고 온 것은 공포라는 전염병이었다.
후에도 이미 적의 포탄이 떨어진고 있었다. 쾅트리에서 온 피난민과 후에 시민들은
다시 다낭으로 향하였다. 수천 대의 차량과 인파는 1번 도로를 완전히 메웠다.
3월 20일 아침 남베트남군 제1군단장 트룽 중장은 미찬 강 방어선의 해병여단 지휘소에서
상황을 파악하고 후에 지역 방어부대 지휘관들과
후에를 고수하기 위한 방어계획을 토의하였다.
3월 20일 13:30에 라디오 방송으로 그리고 20:00에는 TV로 티우는
중부 고원지대에서는 전투력을 보존하기 위하여 철수하였으나
후에와 다낭 그리고 제3, 4군단 지역은 끝까지 사수할 것이며
후에와 여타 지역을 포기한다는 유언비어가 있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혼란을 조장하기 위한 근거 없는 낭설이라고 발표하였다.
트룽도 후에에서 사수를 다짐하고 다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를 믿을 수 없었고 쾅트리를 북베트남군 대부대가 공격하였다는
소문을 들은 시민들은 계속 다낭으로 몰려갔다.
이날 오후 늦게 트룽은 티우로부터 후에, 다낭, 추라이 3개 지역을 모두 확보하기에는
전투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후에와 추라이는 군단장 재량대로 철수하여
다낭을 확보하도록 하고 1개 공수여단을 즉각 사이공으로 전환하라는 명령을 접수하였다.
일주일 동안에 철수-사수-철수로 결심이 바뀌어졌다.
북베트남군은 3월 21일 후에와 다낭 간의 1번 도로를 차단하기 위하여
후에와 다낭의 중간지점에서 도로상의 무수한 피난민과 차량에 대하여
무차별 포격을 가하면서 공격하였다. 남베트남군 제1사단 예하 1개 연대와
레인저 부대가 이를 저지하였으나 3월 22일 14:00 남베트남군은 패퇴하고
1번 도로는 차단되었다. 다낭으로 향하던 수많은 피난민과 차량은 후에로 되돌아가야 했다.
3월 23일 아침부터 북베트남군은 포위된 후에에 포격을 가하였다.
비행장도 포격으로 이미 무력화되었다. 이제 남은 철수로는 해상뿐이었다.
남베트남 해군은 중장비와 피난민을 다낭으로 후송하기 시작하였다.
해안으로 가는 도로로 전차, APC, 차량, 인파가 몰려들었다.
북베트남군은 이 도로에 포격만 하면 되었다.
군 기동장비, 민간차량, 군인과 민간인이 뒤엉켜 아수라장이 되었다.
서로 먼저 가려고 아우성이었다.
상호 총격전까지 벌어졌다.
3월 24일 제1군단 지역 쾅트리 성의 성도도 북베트남군 711사단에 의해
점령되어 다낭과 추라이 간의 1번 도로도 차단되었다.
북베트남군은 특공부대를 침투시켜 교도소를 점령하여 죄수들을 먼저 석방시켜
혼란을 조성해놓고 손쉽게 성도를 점령한 것이다.
수많은 피난민이 다낭으로 몰려들었다.
북베트남군들은 이 피난민들의 이동만은 방해하지 않았다.
3월 25일까지 후에, 다낭, 추라이 3개 지역으로 나머지 남베트남군은 집결하였다.
그러나 적과 끝까지 결전을 할 만한 부대는 없었다. 부대건제, 지휘체제는
명목뿐이었고 남아있는 병사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적과 싸워보겠다는 전의를 가진
병사들이 아니라 어떻게 하든 살아서 사이공 지역으로 가게 되기를
바라는 오합지졸에 불과한 부대였다.
티우는 후에와 추라이에 있는 병력들을 다낭으로 철수시켜 해병사단을
예비로 해서 다낭 지역을 방어하도록 군단장에게 지시하였다.
전부터 계획했던 대로 다낭 지역은 4개 사단, 레인저단, 1개 기갑여단이 방어하는
요새가 되는 것이다. 티우는 이 요새가 상당기간, 최소한 1~2개월은
지탱할 것이라고 판단하였을 것이다. 미 대사관 국방무관실도,
미 CIA 베트남 지부도 그렇고 다른 부서도 그런 가능성을 점쳤다.
그렇다면 남베트남은 북베트남과 협상을 할 수도 있고 해병사단을
사이공 지역으로 전환하여 사이공 방어능력을 보강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현지부대의 사정이 어떤지 모르는 사람들이 탁상에서 판단한 결과였고 희망사항이었다.
후에의 방어병력은 도망갈 병사들은 다 도망하고
민병대와 지방군 대대들은 아예 가족들을 보살피라고 합법적으로 해산시켰어도
25,000여 명이었다. 다낭으로부터 항공지원도 가능하고
175㎜ 평사포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북베트남군은 40,000여 명으로 결전을 시도한다면 해볼 만한 병력이었다.
그러나 병사들의 전의도 문제였지만 갈팡질팡하는 전쟁지도는 붕괴를 더욱 가중시켰다.
3월 25일 야간에 트룽은 후에의 제1사단과 기타 부대들에게 해상철수를 명령하고
추라이 지역의 제2사단 및 기타 부대들은 추라이로부터 약 20마일 떨어진 레(Le) 섬으로
철수하도록 명령하였다.
3월 26일 하룻 동안 후에는 광란의 도가니였다. 남베트남군의 철수를 간파한 북베트남군은
바짝 추격하여 포격을 계속하였다. 이날따라 높은 파도는 더욱 철수를 지연시켰다.
철수선이 도착하면 군인, 피난민이 몰려들었다. 해병대와 낙오자들 간에 서로 먼저
승선하려고 총격전도 벌어졌다. 제1사단 제1연대가 철수를 엄호하였다.
군 함선에 탈 수 없었던 피난민들에게는 삼판(Sampan)이라는 작은 거룻배가
유일한 탈출수단이었다. 그나마 너무 많이 타서 높은 파도에 많은 배가 전복되어 버렸다.
파도가 넘실거릴 때마다 수많은 시체들이 나무토막처럼 물 위에 둥둥 뜬 채로 흔들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