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1-8
왜 낙심하십니까? / 백장흠 목사
어느날 사단이 물건을 세일하고 있었습니다. 상품이 무엇인고 하면 걱정, 두려움, 욕망, 슬픔 그리고 자만심과 같은 물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상품진열대 한쪽 편에 ‘이것은 세일하지 않음’ 이라는 낡아빠진 꼬리표를 단 물건이 있었습니다. 왜 그 물건을 세일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다른 물건은 아직도 여분이 충분히 있는데 이 물건은 여분이 없습니다. 이 물건만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유용하면서도 아주 쓸모 있는 물건입니다. 이 물건이 없이는 나는 일할 수 없습니다. 이 물건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 들어가야 내가 일하게 됩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바로 낙심이라는 물건입니다” 라고 말 하더랍니다. 낙심이 들어오면 마귀는 일하기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낙심이 들어오면 아름다운 꿈과 비젼이 사라져 버립니다. 의욕이 상실됩니다.
이 낙심이라는 게 능력의 종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에게 찾아왔습니다.
엘리야가 누구입니까?
선지자 중에 선지자입니다. 가난한 사람의 대표로 어깨에 털옷을 걸치고 허리에 가죽띠를 차고 다니면서 바알 숭배와 아세라 목상 경배를 타도하기 위해 부르짖은 사람입니다(왕하1:1-8). 그의 결정적인 사역은 갈멜 산에서 바알의 선지자들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과의 대결에서 승리한 사람입니다. 기도하여 불이 떨어지게 하였고 기도하여 비가 오게 한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낙심하였습니다. 낙심할 때에 사람들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사람이 왜 낙심하게 됩니까?
1. 피곤하면 낙심이 됩니다.
사람들이 낙심하면 건강에도 해가 된다고 합니다. 눈이 어두워 집니다. 눅24:13에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는 눈이 어두워졌습니다. 예수님과 같이 길을 가면서도 예수님인 줄을 몰랐습니다. 사람이 병들거나 피곤하다고 하는 게 육체적으로 피곤하거나 몸이 약해서 정신적으로 재미가 없을 때 피곤해지고 병들게 됩니다. 그래서 가정교육도 열 가지 이상의 과외를 시켰다고 그가 성공하는 게 아니라 정서적으로 풍요롭게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아버지하고 팔씨름도 하고 같이 뛰기도 하면서 같이 대화하고 같이 보내는 시간이 많아야 그들이 명랑하고 건강하게 자란다고 합니다.
우리들의 자녀들이 집에만 들어오면 부탁하는 말이 있습니다. “얘 공부 좀 해라.” 공부 잘 한 사람이 정서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무어라고 말합니까? 소위E.Q를 높이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자녀들과 함께 유머를 하고 웃고 지내라고 말합니다.
알아도 모르는 것처럼 하고 묻기도 하고 웃어주고 그들과 함께 웃음으로 즐겁게 만들어가야 합니다. 어느날 저의 손녀가 “할아버지, 옷 위에 걸어 가는 게 뭔지 아세요?”, “글쎄, 무엇이지?”, “그것도 모르세요?”, “할아버지는 모르는데.”, “제가 가르쳐 드릴께요. 옷 위로 걸어가는 게 옷걸이에요”, “그래. 너 참 잘 아는구나.”
칭찬합니다.
자녀들의 E.Q를 높이는 열 가지 계명을 말하는데
1) 자녀들과 유머를 나누라.
2) 자녀들에게 책을 읽어주라.
자녀들에게 큰 소리로 책을 읽어달라고 주문하라.
3) 자녀들에게 집안일을 거들게 하라.
책임감과 봉사정신 그리고 문제해결 능력을 주기 위함입니다.
4) 자녀들에게 집안에서 만든 음식을 먹게 하라입니다.
이런 말을 합니다. 자녀들에게 사료를 주지 말고 요리를 주라고 말합니다. 요리는 정성을 다해 부모가 만들어주는 것이고 사료는 사먹는 게 사료라고 말합니다. 정성어린 음식이 그들의 영양을 책임진다는 것입니다.
5) 자녀들과 잦은 신체접촉을 하라 입니다.
자주 껴안고 볼을 맞추세요.
6) 노는 것을 가르쳐주라.
제기차기, 땅 따먹기, 자치기, 숨바꼭질 등의 놀이가 어린 자녀들의 스트레스를 해소하여 준다고 합니다.
7) 때로는 힘든 과제를 수행할 기회를 제공하라.
왜? 세상을 사는데 항상 쉽게 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개 집을 만들어보라, 무엇을 해 보라. 그럼으로 본인이 성취감을 느끼게 하는 겁니다.
8) 끊임없이 격려하여야 합니다.
격 려만큼 좋은 촉진제가 없다는 겁니다. 실패했을 때 더 가까이 하고 따뜻한 용기를 북돋아 주어야 합니다.
9) 그들과 함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여행도 하고 여러 사람과 어울릴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합니다.
10) 기도를 가르치세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는가를 알게 하여야 합니다. 피곤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여야 합니다.
2. 계속되는 시련이 낙심하게 만듭니다.
한 시간의 고통은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래 계속되는 고통은 견디기 어려운 것입니다. 고난이란, 사람에게 유익이 됩니다. 어려움을 극복하는 훈련이 되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계속되는 시련은 모든 것을 포기하게 만듭니다. 어려움이 생겼습니다. 신자들은 무엇을 합니까? 기도합니다. 나름대로 특별기도를 합니다. 철야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고통이 계속됩니다. 기도의 응답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 때 낙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직 그 시간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좀 더 기다리자” 라는 생각을 하여야 합니다. 고통이 계속되는 일이 있더라도 조금만 더 견딜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합니다. 낙심해서는 안됩니다. 실패감, 무력감을 갖지 않아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아주 비참하게 됩니다.
아놀드 파머라는 유명한 골퍼가 있습니다. 아놀드 퍼머 대회를 열었습니다. 거기에는 자격규정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참석할 수 있습니다. 한 맹인이 그 대회에 참여했습니다. 그가 1등을 하였답니다. 그리고 아놀드 파머가 그 우승컵과 상금을 전달하면서 축하한다고 악수를 했습니다. 그때 이 맹인 골퍼가 아놀드 파머에게 자신있게 도전합니다.
“파머씨, 나랑 시합 한번 해 봅시다.” 파머는 선뜻 응합니다. “언제든지 좋습니다. 날짜만 정하십시요. 제가 당신과 상대해 드리겠습니다.” 맹인은 “선생님께서 정하십시요.” 합니다. 서로 예의를 갖추면서 이렇게 주고받는 중에 맹인 골퍼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제가 정하겠습니다. 언제냐 하면 언제든지 좋은데 밤에 야광 등을 켜 놓지 않고 하십시다.” 이래서 수상식장에 폭소가 터졌다는 실화입니다. 자기의 약점이나 어려운 형편에서도 유머로 자신감으로 극복하였다는 겁니다.
3. 욕망은 있으나 방법이 없을 때 낙심하게 됩니다.
무엇인가 하고 싶은데 할 방법이 없으면 낙심하게 됩니다. 쉽게 말하면 하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꿈이 있습니다.
20대 목사님들이 기도할 때에 “이 세상을 내가 한번 변화시켜 보겠나이다” 라는 꿈을 갖고 산답니다. 그러다가 40대가 되면 세상을 바꾸기는 커녕 자기 주변조차 바꾸지 못하고 기도가 바꾸어집니다. “주여. 내 주위 사람들만이라도 변화시킬 수 있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옵소서.”
그러다가 70대가 되면 주위를 보아도 전혀 달라진 게 없습니다. 그제야 기도하기를 “주여. 내가 먼저 변해야 되겠나이다. 주여. 나를 변화시켜 주옵소서.”
그러다가 나중에는 실망 가운데서 인생은 무능하고 세상은 허무하구나 이것을 깨닫게 된다고 합니다. 이상이야 누구라도 갖고 있습니다. 그 방법이 없을 때 낙심하게 됩니다.
4. 환경 때문에 오는 낙심이 있습니다.
엘리야가 바로 그런 형편에서 낙심하였습니다. 아무리 봐도 자기 혼자인 것 같습니다. 심한 고독감에 빠집니다.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아니한다. 나는 버림받았다” 라는 생각이 자기를 지배합니다. 몸이 불편하면 신체장애자라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 정신적으로 병든 사람을 정신장애자라고 합니다. 정신장애, 인격장애자는 다른 이들과 함께 어울리지를 못합니다. 친밀한 관계를 바라지 아니합니다. 모든 활동을 혼자 하려고 합니다. 마음을 터 놓고 대화할 수 있는 친구가 없습니다. 항상 냉담하고 단조로운 기분과 감정상태를 보입니다.
주변에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대적자 같이 느낍니다. 아무리 선한 일을 했어도 알아주지 아니합니다. 그때 의욕을 상실하게 되고 마음으로부터 낙심이 찾아옵니다. 낙심하면 모든 게 하기 싫어집니다. 현실을 도피하게 됩니다. 나중에 낙심의 정도가 심해지면 죽고 싶어집니다. 삶에 대한 의욕이 사라진다는 말입니다. 낙심된 사람이 기도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이들은 충성하지 못합니다. 부정적인 사람이 됩니다. 낙심 되었을 때 이를 극복하고 새 힘을 얻어야 합니다.
어떻게 낙심된 상태에서 새 힘을 얻게 될 수 있습니까?
첫째,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확신하여야 합니다.
낙심 되어 있던 엘리야를 찾아오신 하나님께서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사랑이 어떻게 표현되어야 가장 깊은 사랑임을 보여주는 것입니까? 어려움이 전혀 없게 해준다고 믿는 이들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데 어려움이 오면 “세상에. 하나님은 나를 버렸나봐” 그럽니다. 물론 평안하게 해주는 것도 사랑입니다. 그리스도 인들은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느날 유명한 촬스 스펄전 목사님이 농촌을 방문하게 되었답니다. 농장 건물 꼭대기에 세워 놓은 바람개비가 있어서 보았더니 뱅뱅 돌아가는 바람개비 꼬리에다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글을 써 붙여놓았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바람개비같이 변덕스럽다는 말이요? 어찌 저기에다가 그런 글을 붙여 놓았습니까?” 물었더니 농부는 기겁을 하면서 “아닙니다. 바람이 어느 방향에서 불던지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는 말입니다” 라고 하더랍니다. 나에게 어떤 바람이 불어오더라도 그 속에도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바울이 말하는 대로 “누가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라고 말합니다. 환난이나 곤고,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라도 사랑을 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끊을 수 없는 사랑, 막을 수 없는 사랑관계 입니다. 사람은 나를 버릴 수 있습니다. 자식이 부모를 버립니다. 어느 부모는 자식을 버립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이 낙심된 엘리야를 찾아오셔서 어루만지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힘드십니까?
고독하십니까?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을 해보지 아니한 사람은 사랑을 알지 못합니다.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더 슬펐습니까?
자식이 죽었을 때가 더 슬펐습니까?” 라고 묻는 왕의 질문에 인생을 오래 산 노 재상이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어느쪽이 더 슬펐는가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신이 차이점을 말한다면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에는 눈물의 안개 속에 가끔 뽀얗게 남산 끝머리가 보일락말락 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식이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남산이고 무어고 아무것도 보이지 아니하였습니다.” 이게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표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자녀같이 사랑하신다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위로의 사랑입니다. 먹을 것을 주십니다. 네가 숯불에 구운 떡과 물을 준비하여 주셨습니다. 하늘의 위로를 받는 사랑입니다. 사랑을 깨달을 수 있다면 성숙한 사람입니다. 자식들이 부모의 사랑을 모릅니다. 어린 시절에는 부모에게 덤비고 좋은 말을 할 때에 듣기 싫어 합니다. 그러다가 부모님이 세상에 계시지 아니하면 그때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 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다면 성숙한 그리스도 인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을 갖고 어떤 경우라도 낙심하지 맙시다.
둘째, 아직도 동지가 남아 있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엘리야가 낙심한 것은 자기 혼자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헌신하고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즉, 고독하다고 하였습니다. 고독에서 오는 낙심이었습니다. 현대인들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 살면서도 외롭습니다. 사람이 왜 고독을 느낍니까? 삶에 회의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내가 왜 이 일을 하여야 하나? 왜 살아야 하나? 이런 회의를 느끼면 고독하게 됩니다.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칼 융이라는 사람은 내 마음속에 Shadow가 있는데 이것을 바로 처리하면 만족하게 살 수 있고 처리하지 못하기에 고독과 불안 속에서 산다고 말하였습니다. 불만이라는 shadow입니다.
어느 직장에서 조사하여 보았습니다. 780명 중에 어렸을 때 원했던 일에 종사하는 사람은 불과 5%뿐이고 다른 이들은 먹고 살기 위해 원하지도 아니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미움이라는 그림자가 있습니다. 다 보기 싫다는 마음이 있으면 그 사람은 불행합니다. 사랑할 게 있어야 행복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비관적으로 봅니다. 세상에 좋은 사람 없습니다. 믿을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친구에게 속은 사람이 하는 말입니다. 그렇습니까? 그러나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많습니다. 믿음을 지키는 사람이 엘리야 혼자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 게 아닙니다. 아직도 믿음의 지조를 지킨 사람이 칠천 명이나 남아 있었습니다. ‘나만 남았 나이다’ 여러분들이 하고자 하는 일을 반대하는 이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찬성하고 도와주려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동지로 만들 줄 알아야 합니다.
1) 섬기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한 마디로 얌체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얻어만 먹고 대접할 줄 모르는 사람, 남에게 신세를 지면서 고마운 줄 모르는 사람을 얌체라 합니다. 그런 이들은 관계를 맺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2) 칭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말을 들을 때 귀를 기울이고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 “그것 좋은 생각인데요” 그래 보세요. 공감대를 형성하려고 하면 동지가 됩니다.
3) 친절한 태도를 취하려고 하여야 합니다.
말 한마디로 천량 빚을 갚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친절한 말 한마디 하고 미소를 지어주는 일입니다. 피스 메이커가 있습니다. 대인 관계에 있어서 갈등의 요소에 대하여 사전부터 예방하려고 합니다. 며느리 되는 분에게 시어머님이 섭섭하실 것 같은데 내일 모시고 냉면 한 그릇 대접해 보세요. 사전에 힌트를 줍니다.
4) 겸손하여야 합니다.
‘나만 남았나이다’ 이게 교만입니다. 자기만 순결을 지켰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나보다 나은 사람이 많다, 상대방 앞에서 겸손한 자세를 취해야 친구 되기 쉽습니다. 잘난체 하고 모든 것을 아는 체 하면 싫어합니다. 나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을 배려하려고 합니다.
5) 용서하는데 인색하지 않아야 합니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어준다고 하였습니다. 용서 하는 게 사랑입니다. 이렇게 하여서 동지가 7천명이나 있다고 생각하면서 새 힘을 얻고 낙심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셋째,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왕상19:11-14절에 엘리야가 영적인 체험을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지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그 가운데도 하나님이 계시지 아니하였습니다. 지진 이후에 불이 나타났습니다. 그 곳에도 하나님이 계시지 아니 하였습니다. 그 후에 세미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세미한 음성을 통하여 낙심 되었던 엘리야 는 힘을 얻었습니다. 세미한 소리가 무엇인가, ‘고요한 작은 소리, 마음을 충동하는 소리 혹은 마음을 움직이는 소리, 마음을 부수는 소리’ 라는 의미입니다. 주님의 음성이 마음을 움직였고 충동을 주었습니다.
그러면 무슨 음성이 들렸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알 수 없어 궁금한 게 있습니다. 예수께서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정죄하는 많은 무리들 앞에서 땅에 글을 썼다는 말씀이 요한8:3-11 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땅에 무어라고 썼느냐 알 수 없습니다. 엘리야가 호랩 산에서 들은 세미한 음성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그러나 그 음성이 낙심한 엘리야에게 새 힘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리니 담대하라 하셨을 겁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음성입니다. “너는 내 종이다. 너를 혼자 두지 아니한다.” 그런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독일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인간이 가져야 할 네 가지 감각을 말했습니다.
첫째는 소속감입니다.
나는 어디에 속해 있는가? 어디에 속해 있어야 행복한가?
둘째는 인간의 한계성입니다.
인간은 한계가 있습니다. 사는 것도 수 백년 수 천년을 사는 게 아닙니다. 미모도 재능도 명예도 권세도 모두 끝이 있다고 하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마지막이 있으니 소신 것 살고 후회할 게 없고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감각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셋째는 유일성입니다.
‘세상에 육십억의 인구가 살아도 나 같은 사람은 하나 뿐이다. 나는 독특한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라고 인정되어져야 합니다.
넷째는 정체성입니다.
나는 누구이며 무엇하는 사람인가?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 사람인가? 이것을 알고 준비하고 사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결국 영적으로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이것을 영적 감각이라고도 합니다.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 “너는 내 종이다. 나는 너와 함께 한다. 담대하라. 용기를 가져라.” 이 음성을 들었습니다. “너는 할 일이 많다. 이 자리에서 힘을 내라.” 이런 음성을 들었음이 확실합니다.
지금까지 사람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세벨의 위협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렇게 능력을 많이 행하던 엘리야도 사람인지라 낙심하였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힘을 얻었습니다. 귀는 간사합니다. 듣는데 따라 태도가 달라집니다.
환경을 보고 사람의 말을 들을 때 낙심하였으나 주의 음성을 들을 때에 새 힘과 용기를 얻었습니다.
신앙인의 적이 있습니다. 적은 물리쳐야 합니다.
1) 두려움입니다.
공포심이 영적인 적입니다.
2) 의심입니다.
믿어야 합니다. 믿고 시작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가장 강한 적은 낙심입니다.
왜 낙심하십니까?
기도하여야 합니다. 낙심하지 맙시다.
새 힘을 얻어 해야 할 일을 수행하고 기쁨과 감격 속에서 힘 있게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