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야의 사역(2024년 7월 3일 수요일 설교)
성경 : 이사야 42:1-25(구약 1018)
41장은 이스라엘을 바벨론 포로로부터 구원할 한 구원자에 대해 중점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단락은 우상들은 미래에 올 구원자에 대해 알지 못하는 신이 아닌 고 오직 하나님만이 참신이심을 강조하였습니다.
42장에서는 그 동일 인물(구원자)을 종으로 부르면서 41장에서는 알려지지 않았던 또 다른 속성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즉 여호와의 종은 신적 권위의 소유자로서(1,5) 겸손과 사랑(2,3,7)을 통치 원리로 삼고 승리와 기쁨의 나라를 건설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아를 통해 완성될 이상적인 공동체를 보다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42장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보다 완전하게 묘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42장의 강조점을 보면
1) 여호와의 종의 사역의 핵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41장에서 하나님의 구원자가 큰 용사로 나타날 것을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동일 인물에 대해 힘없고 초라한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2절)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자를 강한 용사이면서도 동시에 힘없는 존재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이중성은 백성들의 죄를 대신 짊어져야 할 메시아의 독특한 사역에 기인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므로 죄를 간과하실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심각한 범죄를 자행하였습니다.(24절 뒷부분을 보면 - 우리가 그에게 범죄하였도다 그들이 그의 길로 다니기를 원하지 아니하며 그의 교훈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의 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징벌을 받는다는 사실이 결코 죄의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습니다.(25절 -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맹렬한 진노와 전쟁의 위력을 이스라엘에게 쏟아 부으시매 그 사방에서 불타오르나 깨닫지 못하며 몸이 타나 마음에 두지 아니하는도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죄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종은 죄가 없는 존재로서 죄의 징벌을 대신 받음으로써 인간의 완전한 구원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2) 여호와의 종의 사역의 범위: 여호와의 종은 단지 이스라엘 민족만을 위하여 사역하지 않고 온 인류를 구원으로 인도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여호와의 종이 이방의 빛으로 묘사된 사실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6절 -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42장을 자세히 나누어서 살펴보면
첫째로 여호와의 종의 품성과 그 사역(1-9)을 볼 수 있습니다. 41장의 마지막 부분과 비교해서 현저한 차이가 나는데 앞에서 구원의 문제에 관한 한 이방 우상의 무능함을 설명하고 있다면 여기서는 반대로 하나님의 능력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이방 우상은 이스라엘의 구원자에 대해 전적으로 무지한 반면 하나님은 그 구원자를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종의 성품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할 만큼 신중하고 온유한 존재입니다.(2절) 또한 쪼개져서 반쯤 부러진 상태에 있는 갈대를 꺾지 않을 뿐 아니라 약하게 타고 있어 마치 꺼져가는 듯한 등불도 끄지 않으시며(3절) 반면에 여호와의 종은 자신의 사역을 다하기까지 결코 쇠하거나 낙담하지 않는 존재입니다.(4절) 하나님의 종의 사역은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며(6절) 갇힌 자를 해방시키는 분입니다.(7절)
둘째로 종의 사역에 대한 인류의 반응 및 포로 귀환(10-17)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10-17)여호와의 종의 품성과 사역에 이어서 종의 사역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될 인류가 보일 반응과 함께 종의 사역에 발단이 될 이스라엘 포로 귀환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종의 사역은 우주적인 결과를 가져옵니다.(10,11) 또한 종의 사역은 포로 귀환을 통해 예표적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셋째로 종의 출현이 요청되는 이스라엘의 형편(18-25)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현재 상황은 여호와의 종이 오셔야만 하는 상황이라는 것을 부여 지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종이 오셔야 할 이유에 대해서 먼저 이스라엘의 무책임과 영적 무지함을 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특권을 누리지 못하고 우상 숭배에 빠져 있는 어리석은 이스라엘을 위해서 하나님의 종이 오셔야 한다고 말하고 있으며, 징벌을 당하면서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종이 와서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그리스도는 모든 것에서 해방시키셔서 기쁨과 즐거움을 주십니다.
오늘 말씀 안에서 메시아의 사역에 대해서 묘사한 내용들을 중심으로 해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성경에 나타난 메시아의 사역은
1. 세상에 정의를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1,3-4절까지를 보면
42:1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42:3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42:4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그리스도는 세상에 정의를 세우시는 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정의를 세우신 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누리게 될 축복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정의는 우리가 세상에서 이해하고 있는 그런 정의가 아닙니다.
사람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불완전한 존재들이 완전한 세상을 만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상적인 세상은 에덴동산입니다. 그곳은 죄도 없고 악도 없으며 불의도 없었습니다. 그곳은 천국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범죄함으로 낙원을 잃어버렸습니다. 범죄한 인간은 이 세상에서 이상적이고 완전한 정의를 실현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믿음의 사람이라고 볼 수 있는 아브라함도 완전한 정의를 실현한 사람은 아닙니다. 모세도 다윗도 역시 그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믿음의 사람들이고 정의로운 삶을 살려고 애를 쓰기는 했지만 그들을 통해서도 완전한 정의는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을 받고 은혜 가운데 사는 성도라고 해도 완전한 정의를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완전한 정의는 천국에서 즉 다시 오시는 주님께서 세우실 나라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정의를 세운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미래에 임할 정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정의를 세우는 것은 유대인들에게만 해당 되는 것이 아니라 이방 더 크게 보아서 세상에 하나님의 정의가 세우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의를 세운다는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말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의 은총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님의 정의가 실현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정의라는 측면에서 볼 때 우리가 누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으로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며 믿음으로 사는 성도들에게 은혜와 축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은 공평하고 정의롭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편견이나 차별을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시고 믿음의 분량대로 축복하시는 것 입니다.
정의를 세우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그 은혜를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의 열정적인 믿음의 반응이 필요한 것입니다. 정의로우신 하나님이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역사하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믿음으로 반응하는 대로 믿음의 열정을 가진 대로 그에 합당하게 공평한 은혜와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2.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십니다.
42:2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한다는 말은
첫째로 여호와의 종으로서 일을 수행할 때 요란하게 떠들지 않을 것이다. 자기 앞에 나팔을 울리게 하거나 뒤에 수행원을 대동하지 않을 것이다. 현대는 자기 피알 시대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자기가 하는 일을 남에게 알리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현대인들의 마음인데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시고 조용하고 그리스도의 사역을 감당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같으면 예수님께서 명함을 만드시고 동영상을 만들어서 예수님의 사역하시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나를 따라 오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오늘날 같은 발달된 영상 매체와 음향 시설을 사용하시면서 자신을 드러내시고 온 세상에 나타나셨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언제나 조용히 자신을 드러내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복음을 전하고 병든자를 치료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성경적 원리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알려야 된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세상적인 요란함으로 하나님을 드러내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하나님을 드러내시는 것 입니다.
오늘날 주님을 위해서 헌신할 때 자신이 드러나지 않는 것을 서운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가끔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직분을 드러내고 자신이 한 일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 하고, 내가 어떤 사람인데 내가 모든 것을 다 하고 있다는 것을 요란하게 드러내려고 합니다.
그리스도는 그렇게 요란하게 자신을 드러내시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신앙고백을 했을 때도 이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오셔서 자신을 드러내신 분이 아니라 겸손하고 섬기는 자로 오신 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우리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섬김과 같이 겸손하게 섬기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겸손하게 섬기는 믿음이 없다면 그것은 주님의 일꾼으로서 바른 신앙적이 자세가 아닙니다. 우리가 일꾼이라는 것은 섬김을 받기 위하고 나의 직분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라 철저하게 섬기기 위한 것임을 주님께서 모범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두 번째 의미는 그는 반대자들을 만나더라도 그들과 다투지 아니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격렬한 분쟁 중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큰 소리나 분노한 목소리를 내지 않는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즉 말로 다투지 않고 분쟁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다툼을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라 화해와 평화를 위해서 세상에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다툼이 아닌 평화와 화해와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는 다투는 사람이 아닙니다. 큰 목소리로 남을 억압하고 싸움에 있어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성도의 모습이 아니라 손해를 보더라도 평화를 찾는 것이 성도의 올바른 모습입니다.
3. 약한 자를 일으켜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3절을 다시 보면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는다는 말은 쓸모없어 보이는 것도 결코 버리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등불은 이제 더 이상의 희망이 없는 상태이며 또한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것을 비유적으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무짝에도 쓸데없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다시 일으켜 세우신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우리는 죄악으로 인해서 상한 갈대요 꺼져가는 등불의 신세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이 땅에 오셔서 상한 갈대와 같은 나를 꺼져가는 등불과 같은 나를 치료하셔서 새로운 생명을 부어 주셨습니다.
5-7절을 보면
42:5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내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영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42:6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42:7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이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실 일에 대한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상한 갈대 같은 우리를 손잡아 보호하시며, 꺼져 가는 등불 같은 우리를 다시 이방의 빛이 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9절에 “보라 전에 예언한 일이 이미 이루어졌느니라 이제 내가 새 일을 알리노라 그 일이 시작되기 전에라도 너희에게 이르노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에게 새 일을 행하실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말씀입니다.
주 안에서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 은혜 가운데 사는 삶이 복된 삶입니다. 우리가 비록 지금은 이렇게 약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일으켜 세우사 세상의 빛이 되게 하시고 절망 속에 희망을 나타내는 축복된 사람들로 세워주실 것입니다.
4. 쇠하지도 낙담하지도 않습니다.
4절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그가 '다 이루었다' 라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참으실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과 사역자들이 실패하거나 좌절하지 않도록 붙잡아 주시고 그들이 자신들의 사역을 완수할 수 있을 때까지 그는 세상에 공의를 세우실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으심에도 불구하고 쇠하신 것이 아니라 부활의 은총을 통해서 오히려 세상을 구원하는 강한 능력의 하나님으로 역사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쇠한 자가 아니라 오히려 강한 자입니다.
또한 그를 따르는 사람들로 하여금 낙담하지 않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결코 낙심하고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것을 바라본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실패한 것으로 생각했지만 다시 부활하심으로 사망 권세를 깨뜨리셨습니다. 우리가 주 안에 산다는 것을 바로 이런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시련과 역경에서도 결코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부활하신 주님 승리하는 주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시청 앞 교통 사고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거지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그보다 더 충격적인 일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불완전하고 사탄이 공중권세를 잡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전혀 예측하지 못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런 불확실성 시대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더욱더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언제나 내 편이 되어 주시고, 나를 붙잡아 주시고, 버리지 않으시고 감싸주시고 다시 일으켜 세워주시는 주님을 의지함으로 날마다 감사로 제사 드리며 살아가는 복된 삶이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