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대포장된 일본 검객, 미야모토 무사시 / 추신구라
아수라팔팔 24.05.20
일본의 역사나 문화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도, 일본 검객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藏 1584~1645년)의 이름은 한 번쯤 들어 보았을 것입니다.
일본의 문화적 상징이 칼 든 무사인 사무라이고, 그 칼을 쓰는 법을 연구하는데 평생을 바친 검객이 무사시인 관계로 그만큼 일본의 전통 문화와 역사에서 무사시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무사시가 썼다는 책인 '오륜서(五輪書)'는 아직도 일본의 많은 학생과 직장인들이 즐겨 읽는 베스트셀러로 남아있을 정도이니까요.
그런데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일본에서는 오래 전부터 미야모토 무사시에 대한 비판적인 분석이 상세하게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것에 관련된 내용은 이렇습니다.
우선 무사시는 1600년에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와 1614년 겨울에 벌어진 오사카 겨울의 전투와 1615년 여름에 벌어진 오사카 여름의 전투, 그리고 1637년에 벌어진 시마바라(島原)의 난 등 6번의 대규모 전투에 참가했으나 승리를 증명하는 증명서인 감장(感状, 간죠)를 단 한 번도 받지 못했습니다.
일본 역사에서 간죠란 전투에 실제로 참가하여 무공을 세운 군인한테 장수가 주는 표창장인데, 이런 표창장을 대규모 전투에 6번이나 참전했으면서 한 번도 못 받았다면 과연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설마하니 무사시 반대편의 적군들이 무사시한테 공적을 주는 것이 싫어서 일부러 그만 피해서 다녔다고 봐야 할까요?
무사시가 소설, 영화 같은 대중매체에서 마치 귀신 같이 무시무시한 검술을 지닌 초인처럼 묘사되는 것과는 달리, 실제 그의 검술이나 싸움 실력은 그리 대단하지 못했다고 봐야 적합하지 않을까요?
여기에 대해 무사시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무사시는 사실 출세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검술을 통해 도를 닦고 정신 수양을 하려는 사람이었다.”라고 반박하기도 하지만, 도를 닦고 정신 수양을 하려는 사람이 무엇하러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위험한 전쟁터에 6번이나 참전했을까요?
게다가 무사시가 출세에 관심이 없었다는 주장도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무사시는 그의 나이 56세가 되던 해인 1640년, 구마모토 번의 영주인 호소카와 다다도시(細川忠利 1586~1641년)를 찾아가서 관직을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또한 미야모토 무사시의 출생 이력에 관련된 내용도 의문투성입니다. 그가 오카야마현(岡山縣) 오하라쵸(大原町)에서 태어났다거나 아니면 효고현(兵庫縣) 타이시쵸(太子町)에서 태어났다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명색이 일본을 대표한다는 검객인 미야모토 무사시는 그 고향조차 제대로 알 수 없는 신세인 것입니다.
아울러 무사시는 정정당당한 대결이 아니라, 검술 시합에 일부러 늦게 오는 지각을 해서 상대방의 긴장감을 늦추게 하는 치사한 전략까지 썼습니다.
한 예로 무사시라고 하면 으레 떠오르는 숙명의 라이벌인 사사키 고지로(佐佐木 小次郞)가 무사시와 싸운 이른바 간류지마의 결투 때, 무사시는 예정된 시각보다 일부러 2시간이나 늦게 나타나는 비겁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심지어 누마타가기(沼田家記)라는 문헌과 간류지마 현지에 전해지는 전설에 따르면, 무사시가 고지로를 이기자 무사시의 제자 4명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고지로를 죽였다는 내용까지 언급됩니다.
아울러 무사시가 일본 각지를 돌아다니며 여러 고수들을 만나 모두 싸워서 이겼다는 내용들 또한 지나치게 과장된 것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한 승리를 주장하는 근거들이 대부분 오륜서나 이천기(二天記), 무공전(武公伝) 같이 무사시를 찬양하는 자들이 쓴 일방적인 기록들 뿐입니다.
한 예로 무사시의 양아들인 이오리는 1654년에 세운 고쿠라 비문(小倉碑文)에서 자신의 양아버지이자 스승인 무사시가 쇼군한테 검술을 가르칠 만큼 뛰어난 검술을 지닌 요시오카 가문과 대결을 벌여 요시오카 가문의 주인인 요시오카 세이주로를 비롯하여 무려 70여 명의 요시오카 가문 제자들을 전부 죽여 버렸다고 기록했으나, 이는 고쿠라 비문이나 무사시를 찬양하는 자들이 남긴 기록에서만 발견될 뿐, 다른 문헌이나 유적에서는 전혀 그러한 내용이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일본인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대중들이 갖고 있는 천하무적의 검객 무사시라는 이미지는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요?
이는 일본의 소설가 요시카와 에이지가 1935년 8월부터 1939년 7월까지 일본 '아사히 신문'에 '소설 미야모토 무사시'를 연재하면서, 무사시에 대한 역사적 자료가 별로 없자, 자신의 상상력으로 흥미 위주의 내용들을 창작하여 마치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마구 덧붙여서 각색한 것이 큰 인기를 끌면서부터였습니다.
결국 오늘날 미야모토 무사시의 이미지는 다분히 소설가가 만들어낸 허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출처: <일본의 판타지 백과사전> / 도현신 지음/ 262쪽
https://cafe.daum.net/sisa-1/mArf/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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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이 사랑하는 작품 《주신구라》의 진실은?
아수라팔팔 24.05.22
1천 년 동안 무사들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와서인지, 일본인들은 복수를 하는 이야기를 정말 좋아합니다. 그리고 그런 복수를 다룬 이야기들 중에서 아직까지 일본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작품은 바로 추신구라입니다. 추신구라의 줄거리는 대략 이렇습니다.
1701년 3월 14일 아코오의 성주인 아사노 나가노리는 자신을 모욕하는 관리인 키라 요시히사를 칼로 베어 죽이려다 실패하여 그 죄로 할복자살을 강요당하고 영지를 빼앗기며 가문을 단절당하는 처벌을 받자, 오이시 구라노스케를 비롯하여 나가노리의 부하들 47명이 1년 10개월 동안 복수를 하겠다는 뜻을 숨긴 채 틈을 엿보고 있다가 결국 1702년 12월 15일 요시히사의 집을 습격하여 그를 죽이고 목을 잘라 나가노리의 무덤에 바친 후, 에도 막부의 명령에 따라 47명 모두가 할복자살을 하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이 추신구라는 한국의 흥부전이나 춘향전 같이 일본에서는 세월을 뛰어넘어 인기를 누리고 있는 고전 문학입니다.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사무라이들의 명예와 복수를 핵심 주제로 다루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소설 삼국지연의가 실제 역사인 중국의 삼국시대 이야기들을 각색한 것처럼, 추신구라 역시 실제 사건을 흥미 위주로 각색하여 역사적 진실을 덮어버렸습니다.
우선 추신구라에서 나가노리는 공명정대하며 자비로운 주군으로 묘사되지만, 실제로 그가 다스리던 지역인 아코오번의 주민들은 나가노리가 죽고 그의 가문이 문을 닫았다는 소식을 듣자 떡을 만들어 나누면서 기뻐했다고 합니다. 나가노리가 살아생전에 지나치게 많은 세금을 거두었던 탓에 민심을 잃었던 것입니다.
아울러 나가노리는 평소에 화를 잘 내는 성격이라서 그와 가까운 부하 몇 명을 제외하면 그리 평판도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일각에서는 나가노리가 에도 막부의 고위 관리인 요시히사를 칼로 죽이려 내리친 것이 그한테서 모욕을 받아서가 아니라 그저 화를 잘 내는 그의 성격 탓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게다가 나가노리의 부하들 중 대표인 오이시 쿠라노스케가 1년 10개월 동안이나 치밀하게 복수를 꿈꾸면서 요시히사의 눈을 속이기 위해 일부러 교토 외곽의 유곽인 이치리키쟈야에서 여자와 술에 빠져 방탕하게 사는 척 했다는 추신구라의 이야기 또한 거짓말입니다.
왜냐하면 나가노리가 할복자살을 하자, 오이시는 복수가 아니라 나가노리의 동생인 나가히로를 새로운 주군으로 모시기 위해 에도 막부에 1만 냥이라는 막대한 돈을 바치며 로비를 하느라 바빴습니다. 또한 이치리키쟈야는 그 무렵에 있지도 않았 습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이시의 로비가 끝내 실패하여 나가히로가 형의 가문을 잇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자, 절망에 빠진 나가노리의 부하들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요시히사의 집으로 몰려가 칼부림을 벌인 것이었습니다. 오이시가 그런 복수극에 동의하게 된 시점은 요시히사 습격 사건이 벌어지기 고작 3개월 전이었습니다.
1702년 12월 15일 새벽에 요시히사의 저택을 오이시를 비롯한 나가노리의 부하들 47명이 습격했는데, 그 날 오이시가 북의 일종인 진다이코를 쳤다거나 눈이 내렸다는 추신구라의 이야기도 모두 거짓말입니다. 실제 습격에 가담한 나가노리의 부하들은 46명이었고, 그 날에는 진다이코도 없었고 눈도 안 내렸습니다.
또한 추신구라에서 비열하고 음흉한 악역으로 묘사된 키라 요시히사는 자신이 다스리는 지역의 주민들이 홍수로 고생을 하자, 자신의 돈으로 홍수를 막기 위한 제방을 쌓아줄 만큼 자비로운 인물이었습니다.
아울러 요시히사가 나가노리더러 자신한테 뇌물을 바치지 않았다고 괴롭혔다는 추신구라의 내용도 완전한 엉터리입니다. 요시히사는 궁중의 규칙과 절차를 모르는 사람들한테 그것을 가르쳐주는 강사였고, 그 가르치는 일에 대한 보답으로 수고비를 정당하게 받아갔던 것입니다. 그것은 법으로 금지된 범죄도 아니었으며, 일상적인 관례였습니다.
헌데 그런 요시히사로부터 강의를 받으면서 수고비 즉 강의료를 주지 않은 나가노리야말로 잘못했던 것입니다. 대학교 교수로부터 강의를 들으면서 수강료를 한 푼도 안 주겠다고 하면, 그게 과연 정당한 일일까요?
심지어 요시히사는 나가노리의 아코번 사람들한테 소금을 만드는 기술까지 가르쳐 줄 만큼, 동정심이 많았습니다. 이렇게 선량한 사람을 완전히 파렴치한 악인으로 만들어 버린 추신구라는 역사왜곡의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출처: 일본의 판타지 백과사전/ 도현신 지음/ 생각비행/ 271쪽
https://cafe.daum.net/sisa-1/mArf/372
첫댓글 한때 젊은 날의 우상이었던, '검으로 도를 이루었다'는 무사시도 일본놈덜이 만들어낸 가짜였군요.
세상에 믿을 놈이 '별로' 없는가 봅니다. 허허
소위 사무라이 정신이라는 것도 그 무슨 숭고한 사상철학이 결코 아니라, 이렇듯 저들이 조작해 낸 몽상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