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3 장 마군자(魔君子)의 눈물
①
"노부는 천외천의 팔대봉공(八大奉公) 중 다섯째로 사승(死僧)이라 하네."
칠흑처럼 검은 가사를 입은 노승이었다. 안색은 대조적으로 창백했으며, 눈은 실처럼 가늘어 감았는지 떴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였다.
"......!"
살막(殺幕).
중원에서 가장 신비한 곳이라 일컬어지는 곳이다. 청부살인을 의뢰하려면 독특한 절차를 밟아야 한다. 동정호(洞定湖) 변의 악양루(岳陽樓) 근처에서 국화(菊花)바구니를 물에 띄우면 된다.
물론 바구니에는 청부내용과 금액을 함께 넣어두어야 한다. 국화바구니는 물의 흐름을 따라 어디론가 흘러가고, 청부자는 돌아가 기다리면 된다.
청부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반드시 다음날 그 자리에 국화바구니가 되돌아온다. 살막은 이런 독특한 방식으로 청부업을 행해왔으므로 세인들은 살막이 어디에 있는지, 살막의 살수가 얼마나 되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런데... 신비에 싸여있는 살막이 처음으로 외부에 노출되고 말았다.
"으아악!"
"크악!"
단말마의 비명이 들리기 시작했을 때 백야무정객은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홀로 바둑판을 놓고 복기(復碁)하던 그는 고개를 들어 창밖을 내다보았다.
살막은 동정호의 한 갈대섬 속에 있다. 빽빽하게 우거진 갈대숲으로 인해 외부인은 이곳에 전설적인 청부집단 살막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살막의 살수들은 세상에 버림받은 인물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도합 사십구 인(四十九人). 그들은 피로 결의형제를 맺은 사이다.
"으아악!"
가까운 곳에서 십삼살(十三殺)의 비명이 울렸다.
백야무정객은 대살(大殺)로 막주이기도 하다. 그는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이제 삼살과 이살만 남았군.......'
"흐아악!"
"크윽!"
두 마디 비명이 좀더 가까운 곳에서 울렸다. 백야무정객은 벌떡 일어났다.
'마흔여덟 명의 아우들이 전멸하기까지 걸린 시간이 고작 반각... 대체 어떤 인물들이길래?'
그의 안색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는 대나무로 엮은 정자에서 밖으로 걸어나갔다. 연못에서 금잉어가 펄쩍 뛰어올랐다.
슉!
금빛이 스친 순간 잉어는 눈알이 관통된 채 허연 배를 드러내고 물위에 드러누웠다.
'염주.......'
백야무정객은 잉어의 눈알을 관통한 것이 한 알의 금빛 염주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염주알이 연못 바닥에 반짝이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자네가 살막의 막주인가?"
건조하다 못해 시체의 음성과도 같은 칼칼한 음성과 함께 죽림 속에서 흑색 가사를 입은 중이 걸어나온 것이다.
백야무정객은 그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천외천은 상상 이상으로 엄청난 곳이군. 귀하 같은 자가 수뇌도 아니고 여덟 명 중 한 명이라니......."
그렇다.
그는 사승(死僧)이 나타났을 때 그의 전신에서 풍기는 기도를 접하고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그 정도면 자신의 상대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그만큼 강한 기도를 풍기는 자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고작 팔대봉공 중 일인이라니.
"오제(五弟)! 이제 마무리 짓고 돌아가세. 이십 년만에 세상에 나왔는데 바람 좀 쐬고 가야 할 것 아닌가?"
죽림으로부터 또 한 사람이 걸어나왔다.
그는 폭이 좁은 한 자루의 괴도(怪刀)를 어깨에 꽂은 키가 칠 척이 넘는 비쩍 마른 노인이었다. 회색의 장삼을 펄럭이고 있었다.
"셋째형, 잠시 기다리시오. 이제 다 끝났소이다."
사승은 수중의 선장(禪杖)을 만지작거렸다. 그의 목에는 순금으로 된 염주가 반짝이고 있었다.
백야무정객은 회의노인을 바라보며 내심 탄식했다.
'머지않아 무림에 엄청난 혈겁이 일어나겠구나. 이들이 이토록 강하니 과연 누가 상대할 수 있단 말인가......?'
그의 뇌리에 청수한 학자풍의 인물이 떠올랐다.
'친구여, 자네가 그토록 장담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나?'
백야무정객은 처연한 눈길로 두 괴인을 바라보았다.
"팔대봉공이라면... 귀하들은 혹 지난 날 파천황교(破天荒敎)의 십이마존과 어떤 사이인지 말해 줄 수 있소?"
놀라운 일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삼십여 년 전, 무림사상 유례가 없었던 혈세천하를 만들었던 파천황교가 거론되다니!
사승의 실눈에서 섬광과도 같은 안광이 번쩍 솟았다가 사라졌다.
"흐흐흐! 과연 살막의 막주답군. 한눈에 우리의 연원을 알아내다니 말이야. 좋아, 곧 지옥에 갈 몸이니 속시원히 말해주지. 자네 말이 맞다. 천외천의 팔대봉공은 파천황교의 십이마존의 맥을 이어받았지. 네 분의 마존께서는 우리 여덟 명에게 진전을 나누어 주셨으므로 그 수가 좀 줄었을 뿐이라네. 이제 됐나? 그럼 자네 목을 가져가야겠네."
백야무정객은 정자로부터 들고 나온 검을 서서히 뽑았다.
"자, 가네!"
스스스!
사승의 신형이 백야무정객의 시야에서 돌연 사라져버렸다. 이미 사승의 극랄함을 알아본 백야무정객은 눈을 감고 호흡을 멈추며 사승의 체온을 감지하려 애썼다.
적막!
숨막힐 듯한 적막이 한순간에 깨졌다.
위이이잉!
선장이 가공할 기세로 그의 정수리에 떨어진 것이다. 거의 같은 순간 백야무정객의 검이 화려한 빛살을 토하며 원을 그렸다.
"윽!"
모습을 드러낸 사승의 입술 사이로 비명이 새어나왔다. 그의 가슴을 덮고 있는 흑색 가사가 두 치 길이로 베어져나가 펄럭였으며, 그 사이로 선혈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패자는 백야무정객이었다. 그는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했다. 사승의 선장이 그의 심장을 정확히 갈라버린 것이다.
'자네가 이 악마들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이미 인간의 한계를 초월해버린 이자들을......?'
마지막 순간에 백야무정객은 관운빈을 떠올렸다. 그는 눈을 감았다. 지면에 엎어지는 순간까지도 그의 눈은 감겨지지 않았다.
"가세."
팔짱을 낀 채 관전하고 있던 회의노인이 등을 돌렸다. 사승은 가슴의 상처를 지혈한 뒤 그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죽림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무림에서 가장 신비한 곳으로 알려진 살막이 영원히 막을 내린 순간이었다.
②
흑루(黑樓)는 칠층 누각이다.
관운빈과 황보수선은 조심스럽게 흑루에 올랐다. 두 사람은 무사히 칠층까지 오를 수 있었다. 의외로 가로막는 자가 없었던 것이다.
칠층에 오르는 순간.
"후후, 배짱 한번 좋구나. 이곳까지 들어오다니."
두 사람의 귓전을 울리는 음침한 소리가 있었다.
관운빈은 눈썹을 모았다. 칠층의 대전은 바닥이 단단한 흑오석(黑烏石)으로 깔려 있었고, 삼면의 벽에는 작은 창이 나 있었다. 별다른 장식이 없는 대전 안쪽에 태사의(太師倚)가 있었고, 그곳에 흑색장포를 걸친 노인이 앉아 있었다.
그의 뒤에는 네 명의 하나같이 음산한 인상의 괴인들이 서 있었다.
"귀하가 천리신마 혁세기요?"
흑삼노인은 백발백염의 칠순 가량 되어 보이는 노인으로 흑삼만 아니었다면 인자한 노인으로 보이는 인상이었다.
"허허, 그렇네. 자네가 바로 괴수신의인가?"
관운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남들이 그리 불러주고 있소."
"이 악적......! 불공대천지한을 갚으러 왔다!"
윙!
황보수선이 검신합일이 되어 덮쳐갔다.
"허허! 성급한 계집아이로군."
혁세기는 태사의에 앉은 채 수염을 쓰다듬었다.
"소저!"
관운빈은 흠칫 놀라며 즉시 신형을 날렸다. 그녀의 무공이 아무리 높다해도 흑련사의 괴수를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킬킬킬! 너는 우리들이 상대해 주마!"
문득 그의 앞을 가로막는 네 그림자가 있었다. 혁세기의 뒤에 서 있던 사 인의 괴인이었다.
그들은 전대의 노마두들로 냉면수라(冷面修羅)와 상문객(喪門客), 혼세인마(混世人魔), 유령도부(幽靈刀夫)였다. 그들은 구천마교주인 혁세기와 동일한 배분의 노마들로 신주사마(神州四魔)란 외호를 갖고 있는 가공할 마공의 소유자들이었다.
쾅!
폭음이 울렸다. 관운빈은 사마가 동시에 쳐낸 잠력(潛力)에 기혈이 거꾸로 흐르는 것을 느끼며 주르륵 뒤로 칠팔 보나 밀려나갔다.
"......!"
그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한 명도 아니고 네 명을 동시에 상대한다는 것은 그만큼 승산이 희박한 일이었다. 그는 힐끗 황보수선 쪽을 바라보았다.
혁세기는 고양이가 쥐를 희롱하듯 소매를 펄럭이며 여유있게 황보수선을 상대하고 있었다. 황보수선은 악에 바쳐 사생결단을 낼 듯 검을 휘두르고 있었으나 그의 옷자락 하나 건드리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속전속결하지 않으면 위험하겠구나.'
관운빈은 공력을 끌어올렸다.
이때 두 명의 노마가 좌우에서 각각 음풍(陰風)를 날렸다. 냉면수라와 상문객이었다. 그들이 익힌 신공은 음한지공(陰寒之功)에 속한 듯했다.
"부끄러움도 모르는 늙은이들!"
그는 추나신공을 운용하여 혈(穴)를 이동시켰다. 각각 좌우로 그들의 공격을 받아 방향을 돌려 신형을 빙글 돌리며 쳐냈다.
"엇!"
경악성이 울렸다. 앞뒤로 공격해 들어오던 혼세인마와 유령도부는 동료들의 장력이 그대로 밀려오자 당황하며 급히 장력을 쳐냈다.
쾅!
"우욱!"
그들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엉뚱하게도 자신들끼리 장력을 주고받은 꼴이 된 것이었다. 그들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방금 전 관운빈이 펼친 무공은 듣도 보도 못한 것이었다.
한편, 천리신마 혁세기는 힐끗 그 광경을 살핀 후 내심 중얼거렸다.
'놀라운 놈이다! 고작 이십여 세에 불과한 놈이 어디서 저런 무공을 익혔단 말인가?'
"죽어라! 원수!"
파파파팟!
돌연 눈부신 검광이 밀려왔다. 황보수선이 그의 목을 노리고 검을 날린 것이다. 혁세기는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상기된 옥용에 구슬 같은 땀방울을 매달고 덮쳐오는 모습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그는 소매를 빙글 돌렸다.
"앗!"
갑자기 기이한 경력이 밀려나와 검의 방향이 틀어지는 바람에 황보수선의 몸도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혁세기는 손가락을 뻗었다가 잡아당겼다. 그것은 허공섭물의 일종인 흡혈마강(吸血魔 )이란 무공이었다.
"악!"
황보수선은 일시에 몸의 중심을 잃으며 그에게 딸려갔다. 혁세기의 손가락이 갈고리처럼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어 오고 있었다.
'아아!'
그녀는 혼신을 힘을 다해 끌려가지 않으려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불가사의한 흡인력이 그녀의 몸을 잡아당겼고, 기혈(氣血)이 거꾸로 흘러 정신이 아득해지고 만 것이다.
구천마교의 교주인 혁세기의 무공은 그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것이었다.
찌이익!
천 찢기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가슴 옷자락이 길게 뜯겨져 나갔다. 그 바람에 눈부시게 흰 속살이 드러나고 말았다.
"허허, 이리 오너라, 계집아이야."
혁세기는 다시 손가락을 움켜주었다.
"아아!"
황보수선은 절망의 신음을 발하며 비틀비틀 그에게 끌려갔다. 이제 한 자만 더 끌려가면 여지없이 그의 포로가 되고 마는 것이었다. 그녀는 눈앞이 아찔했다. 복수는커녕 자칫하면 노마의 손에 잡혀 어떤 치욕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도와줘요! 관공자님!"
그녀는 날카롭게 구원을 호소했다.
"허허! 안됐구나, 계집애야. 유감스럽게도 너의 공자님은 널 돌볼 겨를이 없을 것이다."
마침내 황보수선은 허리춤이 뜨끔하는 것을 느끼며 쓰러지고 말았다. 혁세기는 그녀의 혈도를 제압한 후 손을 뻗어 허리를 받쳤다.
그의 눈에는 만족의 웃음이 어렸다. 품에 떨어진 것은 아름다운 전리품(戰利品)이었다. 그는 비록 칠순이 넘었으나 아직도 왕성한 정력을 자랑하고 있었으므로 황보수선과 같은 미인을 품에 안자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뻤다.
"너무 겁먹을 것 없다, 아이야. 노부가 널 귀여워해 줄 테니......."
그는 황보수선의 얼굴을 쓰다듬다가 그녀의 가슴을 더듬어갔다. 바로 그때였다.
꽈르르릉!
"으악!"
"케에에엑!"
뇌성과 같은 폭음에 이어 처절한 비명이 일어났다. 동시에 칠층의 누각 한쪽 벽이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자욱한 먼지가 실내를 메운 가운데 한 줄기 강기가 뻗어왔다.
"헛!"
혁세기는 헛바람을 들이키며 왼손으로 강기를 받아쳤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그는 뒤로 두 걸음 밀려나고 말았다. 그 순간 손이 허전해졌다. 허리를 안고 있던 황보수선을 빼앗긴 것이다.
먼지가 가라앉자 그는 눈을 부릅떴다.
"천리신마! 늙어도 곱게 늙지 못했구나! 부끄럽지도 않느냐?"
관운빈이었다.
그는 황보수선을 품에 안은 채 신광이 감도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혁세기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관운빈의 뒤에 네 구의 시신이 누워있는 것이 보였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과 동배(同輩)로 구천마교의 원로들이었다. 무공으로 치자면 그 자신도 사마의 합격(合擊)를 받아낼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모두 황천으로 떠나다니.......
'이... 이 놈의 무공은 대체 얼마나 높단 말인가?'
눈알을 굴리던 그는 무너져 내린 한쪽 벽을 보고 반짝 이채를 빛냈다.
사위는 조용했다. 그는 가슴이 철렁했다.
'모두... 당했단 말인가?'
그는 무림군왕성과의 대회전에서 패배하리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충분치는 않았으나 어느 정도 자신감도 있었다. 그러나 관운빈이 여기까지 들어왔을 때는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노마, 달아날 생각은 포기하는 게 좋을 것이다."
관운빈은 그의 눈동자가 굴러가는 것을 보고 눈치챘다.
스르릉!
청명한 울림과 함께 누각 안에 눈부신 검광이 일어났다. 관운빈이 용명검을 뽑은 것이다.
"흐흐, 누가 달아난단 말이냐?"
천리신마 혁세기는 음소를 흘리며 소매를 펄럭였다.
우웅!
소매로부터 시커먼 장영이 뻗어나갔다.
카캉!
불꽃이 퉁겼다. 관운빈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혁세기의 소매로부터 발출된 것은 사람의 손 모양을 한 거무칙칙한 괴병(怪兵)이었다.
용명검은 쇠를 무 베듯 하는 천고의 신병이었다. 그런데 괴병은 멀쩡했다.
"흐흐흐, 애송이놈! 받아라!"
쏴아아!
허공에 검은 그림자가 가득 메워졌다. 상대의 괴병이 수십 갈래로 뻗어온 것이다. 관운빈은 눈을 가늘게 하며 용명검을 수평으로 뻗었다.
차창!
불꽃이 우박처럼 떨어져 내렸다. 그는 손목이 찌르르 울리는 것을 느끼며 재차 공격을 가했다.
두 사람은 단숨에 십여 초를 주고받았다. 그야말로 불꽃튀는 접전이었다. 한 덩어리가 된 두 사람은 눈 깜짝할 사이에 위치를 세 번이나 바꾸며 얽혔다.
"......!"
두 사람은 마주보고 대치했다. 혁세기의 안면이 일그러졌다. 그의 괴병이 반 토막밖에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노마, 이제 갈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느냐?"
관운빈은 무겁게 말하며 검을 좌로 비낀 채 수평으로 뻗었다. 특이한 자세였다.
"그것은......?"
혁세기의 눈에 경이의 빛이 떠올랐다. 그런 자세를 언젠가 본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디서 보았는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우우우웅!
관운빈의 검극으로부터 묘한 진동음과 함께 검기류가 흘러나왔다. 그 기류는 검신을 싸고 돌더니 마치 한 마리의 용(龍)과 같은 현상을 만들며 허공으로 꿈틀거리며 뻗어 올랐다.
"헉......!"
혁세기의 안색이 급변했다. 그 순간 관운빈의 신형이 떠올랐다. 혁세기는 눈이 부시는 것을 느끼며 혼신의 힘을 다해 쌍장을 뻗었다.
꽈르르릉!
천번지복하는 굉음이 울렸다.
"크아아아악!"
처절한 비명.
그리고... 검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끄으으......."
혁세기는 신음을 발하며 비틀거렸다. 그의 가슴에 용명검이 박혀 있었다. 관운빈은 그의 앞에 우뚝 서 있었다. 그의 가슴 앞 옷자락이 검게 타들어가 있었다.
"관공자님!"
황보수선은 놀라 부르짖었다. 관운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기이한 신광(神光)이 감돌고 있었다. 그는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혁세기의 가슴에 꽂혀 있는 용명검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놈은... 천룡대제와 어떤 관계냐......?"
혁세기의 입술이 달싹였다. 그는 눈에는 온통 경악과 회의가 담겨져 있었다.
"네놈이 사용한 검법은... 천룡무극검법(天龍無極劍法)이... 아니더냐?"
"그렇소."
관운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수가... 태화천(太華天)의 후예가... 살아 있었단... 말이냐......?"
희대의 마인(魔人) 천리신마 혁세기. 그의 무릎이 서서히 꺾어지고 있었다.
쿵!
그는 마침내 무릎을 꿇었다. 그는 두 손으로 가슴에 박혀 있는 용명검을 뽑아내려 했으나 힘이 미치지 못하는 듯 손을 부들부들 떨기만 할 뿐이었다.
관운빈은 고개를 들어 황보수선을 바라보며 말했다.
"소저, 미안하지만 내 검을 회수해 주지 않겠소?"
황보수선은 입술을 잘근 깨물더니 신형을 날려 혁세기의 앞에 떨어졌다. 그녀는 검자루를 잡은 후 야멸차게 말했다.
"노마! 이제 지옥으로 갈 때가 왔구나."
혁세기의 눈알이 서서히 뒤집혔다. 그러나 그는 죽기 전에 한 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흐흐....... 다행한 일이다. 너같이 아름다운 계집의 마지막 인사를 들으니......."
"가거라. 악마!"
츄아악!
검을 당기자 혁세기의 심장으로부터 시뻘건 선혈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황보수선은 급히 신형을 날려 핏줄기를 피했다.
쿠웅!
혁세기는 힘없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의 몸은 더 이상 움직일 줄 몰랐다.
사사련과 연합하여 마도천하를 이룩하려던 구천마교의 교주는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황천으로 간 것이다.
"흐흑흑! 아버님......!"
황보수선은 참고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부친 황보일학의 원수는 갚은 셈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이 풀리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오열했다.
어느새 다가왔는지 관운빈이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리고 있었다.
"진정하시오, 소저."
"흐흑! 공자님......."
그녀는 더욱 큰 울음을 터뜨리며 그의 품으로 몸을 던졌다.
흑련사의 혈겁으로 인해 천하는 도탄에 빠졌었으나 무림군왕성과의 대회전으로 인해 흑련사는 몰락하고 말았다.
난세영웅(亂世英雄)이 탄생했다.
흑련사의 수괴인 천리신마 혁세기를 황천으로 보낸 것은 괴수신의 관운빈이었다.
무림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일개의 의원으로 알았던 그가 무림최대의 흉적을 잠재울 줄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로 인해 관운빈의 이름은 중천에 뜬 태양처럼 빛나게 되었다.
혁세기가 죽자 흑련사의 마도인들은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무림군왕성의 연합군은 승기를 잡고 그들을 단숨에 몰아쳐 마침내 흑련사는 대패하고 말았다.
살아 달아난 자는 소수에 불과할 정도의 대승이었다.
전무림이 환호했다.
드디어 무림은 평화를 되찾은 것이었다.
다만... 그 와중에서 눈물을 흘리는 비운의 여인이 있었으니, 그녀는 바로 화산파의 연채령이었다.
그녀는 흑련사에 납치된 후 여인으로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치욕을 당해야 했다. 더구나 그녀의 가문인 화산파 또한 몰살하고 말았다. 이제 그녀는 천애고아나 다름없는 몸이 된 것이다.
여인으로서의 순결과 명예를 철저히 짓밟히고 가문마저 몰락한 그녀가 갈 곳은 없었다.
그녀는 군웅들이 내지르는 승리의 함성을 뒤로 하고 쓸쓸히 어딘가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후, 그녀를 보았다는 사람은 없었다.
③
"환령(幻令), 누구의 소행인지 아느냐?"
"군사, 잊으셔야 합니다."
"아느냐고 물었다."
"그것이... 주군의 뜻임을 모르신단 말입니까?"
"마지막으로 묻겠다. 누구냐?"
"......삼존(三尊)과 오존(五尊)께서 집행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그는 넋을 잃었다. 그의 청수한 얼굴은 온통 혼백이 달아난 듯했다.
마군자(魔君子) 사마을지였다.
그는 갈대로 이루어진 동정호의 한 섬에서 불타버린 죽옥(竹屋)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발치께에는 열일곱 구의 시신이 누워있었다.
그의 눈길이 한 노인의 사체로 떨어졌다. 그는 바로 살막의 막주인 백야무정객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사마을지는 억양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음성으로 말했다.
"먼저 가거라."
그의 뒤에는 갈의(葛衣)를 입은 중년인이 서 있었다. 기이한 것은 그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분명 얼굴을 가리고 있지 않았는데도 흐릿한 기운이 안면을 덮고 있어 용모를 알 길이 없었다.
"......함께 있고 싶습니다. 군사."
"그럼 좋을 대로......."
사마을지는 허리를 굽혀 백야무정객을 안았다.
그는 눈을 감았다. 감은 눈까풀 사이로 눈물이 비어져 나와 백야무정객의 회색빛으로 변한 늙은 얼굴에 떨어졌다.
그는 후들거리는 발걸음을 옮겼다. 몇 번을 휘청거리며 걷던 그는 잠시 후 멈추었다.
그의 앞은 시야가 탁 트여있었다. 갈대밭이 끝나는 곳이었다. 잔잔한 동정호의 수면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사마을지는 평생의 벗이었던 백야무정객의 시신을 내려놓고 땅을 파기 시작했다.
퍽! 퍽!
그는 연장도 쓰지 않고 맨손을 뻗어 땅을 파헤쳤다.
"제가 하겠습니다."
갈의인 환령이 다가오자 그는 손을 저었다.
"물러서라!"
그의 음성에는 노기가 서려 있었다.
"알겠... 습니다."
환령은 그의 처참한 기분을 이해한 듯 뒤로 물러섰다.
잠시 후 구덩이가 생기자 그는 백야무정객의 시신을 구덩이 속에 안치했다. 땅 속에 반듯이 누워있는 백야무정객의 모습을 내려보는 그의 눈썹이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석양(夕陽)이 지고 있었다.
마침내 봉분이 완성되었다. 마군자 사마을지는 봉분 앞에 무릎을 꿇었다.
"친구여.... 편히 가게나."
사마을지의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