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책임추궁
여양산 기슭에 이르렀을 때 한 사람이 바삐 그를 향해 달려왔다.
"앗!"
주호는 우뚝 걸음을 멈추고 그 사람을 보았다. 실로 오랜만의 상봉이었다. 그 사람은 바로 무림 삼선 중의 한 사람인 타선이었다. 타선은 그를 본 순간부터 입가에 연방 미소를 띠고 있었다.
"주소협, 그 동안 내 자네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소문을 들었지. 그토록 놀라운 일들을 거뜬히 해내다니 정말 감탄하지 않을 수 없군 그래."
주호는 쓴웃음을 지으며 겸손을 부렸다.
"노선배께서는 칭찬이 지나치십니다."
타선은 이내 가라앉은 목소리로 본론을 꺼냈다.
"주소협, 그러잖아도 내 이 곳에서 여러 날을 두고 자네를 기다리고 있었다네."
"아니,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가영령에 관계된 일이야."
가영령에 관련있는 일이라 하자 주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가영령이 어떻게 됐습니까?"
"그녀가 자네의 부인인가?"
"그렇습니다. 헌데……"
"죽었네……"
"넷?"
주호의 두 눈이 크게 부릅떠졌다.
"죽었다니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주호는 타선을 똑바로 응시하며 되물었다. 타선은 그 위세에 눌렀음인지 의식적으로 한 걸음 뒷걸음질쳤다.
"아직 완전히 숨이 끊어지지는 않았으나 거의 죽어가지."
"노선배님, 그녀가 왜 죽게 되었습니까?"
타선은 장탄식을 하면서,
"자살을 기도했네……"
"자살이요?"
"그래. 그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던 거야."
"무엇 때문에 자살을 해야 한단 말입니까?"
주호는 잔뜩 들뜬 목소리로 마구 채근했다.
"글쎄, 가보면 자연 알게 될 거야."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불로옥산(不老玉山)."
너무도 충격적인 말을 듣고 보니 주호는 뭐가 뭔지 눈앞이 아찔하기만 했다. 도대체 가영령이 무엇 때문에 자살을 기도했는지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노선배님, 빨리 그녀를 만나게 해주십시오."
"그럼 가세."
두 사람은 산고개를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고개를 넘고, 또 고개를 넘었다.
그리고는 어느 조그마한 집 앞에서 타선과 주호는 걸음을 멈추었다. 두 사람이 문 앞에 당도하자 안에서 이십팔구 세 가량의 청의소녀가 걸어나왔다.
청의소녀는 주호를 흘끗 보고 나서 타선에게 물었다.
"타노인, 이 분이 바로 손님인가요?"
주호가 얼른 그녀의 말을 받았다.
"소생 주호라 하외다. 아가씨, 처음 뵙겠소이다."
타선이 껄껄 웃으며,
"소옥선(哨玉仙), 남이 아가씨라 불렀으니 시집을 가도 될 것 같군."
하는 말에 주호와 불로옥선은 동시에 얼굴을 붉혔다.
"오, 알고보니 공선배님이셨군요. 후배의 무지와 당돌한 죄를 너그러이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하고 주호가 인사를 차리자 불로옥선은 더욱 얼굴이 붉어졌다.
"인사는 그만 하고 어서 안으로 들어갑시다."
주호는 타선의 뒤를 따라 대청 안으로 들어가던 중 흘끗 불로옥선을 보았다. 그런데 마침 불로옥선도 그를 보던 중이었다. 주호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녀의 시선은 매우 강했다. 샛별같이 초롱초롱 빛나는 눈이었다. 이 여인을 어느 누가 사십대 중년 여인이라 할 것인가. 그녀는 구혼녀와 흡사하리 만큼 풍만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자기 나름의 개성이 있었으니 그것은 곧 사내의 애간장까지 다 녹여버리는 뇌쇄적인 힘 바로 그것이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이나 멍하니 서로의 얼굴만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비로소 제정신으로 돌아서자 불로옥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주소협, 제가 사는 곳은 그다지 좋지 않지요?"
"아닙니다. 매우 아름답습니다."
주호의 이 대답에 불로옥선의 얼굴은 다시금 붉게 물들었다. 그런 모습이 한결 아름다웠다. 주호는 그녀의 나이가 사십이 넘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사랑을 경험해보지 않은 앳된 소녀의 순결미와 젊은 부인의 성숙미, 그리고 중년 부인의 세련된 아름다움을 한꺼번에 모두 갖추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그런 여러 유형의 아름다움 속에서 추호도 음탕한 빛을 찾아볼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주호는 자기가 완전히 그녀의 아름다움에 홀렸구나 싶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속으로 열심히 자기를 부정하며 자제하려 했으나 그 정도로는 용솟음치는 감정을 억제하기에 너무도 미흡했다.
그런 모습이 타선에게는 그가 가영령 때문에 몹시 괴로워하는 줄로만 비쳤던 모양이다.
"주소협, 너무 상심하지 말게나. 어쩌면 생명에까지는 지장이 없을 것도 같으니까."
불로옥선이 주호를 향해 불쑥 물었다.
"당신이 바로 가낭자의 남편 되시나요?"
"아……"
주호는 그녀의 말소리를 듣고 크게 당황했다. 까닭 모를 자기 태도였다.
"그렇습니다. 헌데 그녀가 왜 자살을 기도했는지 아시겠습니까?"
"그 점은 나도 잘 모릅니다. 내가 그녀를 발견했을 때는 이미 그녀 스스로 세 군데나 요혈을 찌른 다음이었는데 반 시각이 빨라서 그녀를 살려낼 수가 있었던 거랍니다."
"지금 당장 만나게 해주시겠습니까?"
"저를 따라오세요."
주호가 불로옥선을 따라 나서려는데 타선이 말했다.
"나는 따로 볼 일이 있어 그만 떠나겠네. 사월 사일 혈문에서 다시 만나세."
주호는 문득 생각나는 바가 있어 물었다.
"노선배님, 한 가지 불운한 일을 말씀드려야겠습니다."
"무슨 일인가?"
"무림옥자와 창해검선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무엇이라구?"
타선뿐 아니라 불로옥선도 그 말에는 크게 놀라는 눈치였다.
"아니, 그들 두 사람이 무슨 일로 죽었지?"
"왕검에 의해……"
주호는 그들이 죽게 된 사정을 낱낱이 들려주었다.
다 듣고 난 타선이,
"그렇다면 나도 그 계집을 찾아가서 두 사람의 복수를 해주어야겠군."
주호가 얼른 그의 말을 받았다.
"아닙니다. 이 일은 저로 인해 야기된 만큼 마땅히 제가 찾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이미 죽이지 않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구천에 계신 두 분이 어떻게 생각하실지……"
"그럼 이대로 내버려두어야 한단 말인가?"
불로옥선이 말참견을 하고 나섰다.
"원수는 풀어야지 맺어서는 안 되는 법. 이 사건을 그대로 방치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주호가 거들어 한 마디 더 했다.
"그리고 노선배님은 사월 사일 혈문에 가실 필요가 없습니다."
"왜?"
"구혼녀는 이미 내 손에 죽었습니다."
"그래 ? 그럼 어서 가서 그 사람들에게 통지해 주어야지."
하고 말하고는 타선이 몸을 돌리자 불로옥선이 그의 등뒤에 대고 일렀다.
"타선, 시간이 있거든 종종 놀러오세요."
"당신이 시집만 안 가고 있다면야 날마다라도 찾아오지."
"쳇! 타선은 너무 자기 좋은 대로만 말해서 탈이에요."
"하하하……"
마침내 타선은 웃음소리를 길게 끌고 사라져버렸다.
주호는 불로옥선의 인도로 뒤뜰로 들어갔다. 주호는 그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이상야릇한 향기에 취하여 자기도 모르게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또 두 사람의 눈길이 마주쳤다.
주호는 자기의 가슴이 쿵쿵 소리 내며 뛰고 있음을 의식했다. 그는 결코 호색한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의 미색에 자꾸만 이끌려 들어가는 데야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당장에라도 양팔을 벌려 그녀를 와락 끌어안고 정열에 불타는 입맞춤을 하고 싶었다.
아, 이 얼마나 무서운 생각인가? 주호가 이렇듯 흥분과 억제,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서 번민하고 있을 무렵 불로옥선의 얼굴에도 한 가닥 회한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그들의 걸음은 느릿느릿했다.
그러나 길이 멀지는 않아서 그들은 이내 뒤채에 이르렀다. 불로옥선이 문을 밀고 들어서면서 말문을 열었다.
"그녀는 바로 이곳에 있습니다."
주호는 그녀가 이르는 대로 들어가 보았다. 과연 침상 위에는 가영령이 누워 있었다.
"들어가 보십시오 나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하고 나서 불로옥선은 앞에서 문을 닫아주었다. 주호는 침상 위에 누워 있는 가영령의 얼굴이 몹시 창백해졌다고 생각했다. 순간 심한 고뇌와 쓰라림이 가슴속에 느껴졌다.
(너는 가영령을 사랑하는가?)
그는 이렇게 속으로 물었다.
(사랑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오늘과 같은 결과를 가져온 원인은 당초에 한 마디 말을 잘못한 데에 있다. 여기에는 진정한 사랑이 존재할 수 없다. 사랑이 싹트기 전에 이미 원한이 불타오르지 않았던가?)
주호는 이런 식으로 자기 자신에게 대답하고 있었다. 두고두고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일. 그것은 바로 용보의 일흔네 명이 자기 때문에 죽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가영령이 어찌 그를 용서하겠는가?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 때 가영령이 살며시 두 눈을 떴다.
"누구세요?"
모기 소리 같이 미약한 중얼거림이었다. 주호는 침상 곁으로 가까이 다가섰다.
"영령……나요……"
슬픔에 목이 메어 말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가영령의 시선이 서서히 옮겨지다가 주호의 얼굴에서 멎는 순간, 그대로 못 박혔다. 주호는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영령, 왜 그런 짓을 했지?"
가영령은 다시 두 눈을 감아버리더니 주르르 눈물을 흘리며,
"마침내…… 당신이 왔군요……"
애절한 그녀의 말에 주호도 눈물이 났다. 그녀를 향해 참회의 눈물이라 해도 좋을 눈물.
"정말 할 말이 없구려."
순간 가영령의 얼굴빛이 크게 변하는가 싶자 몸을 벌떡 일으켜 앉았다. 그녀의 얼굴에 싸늘한 바람이 불고 지나갔다.
"주호, 당신 이곳에 왜 왔죠?"
주호는 그녀의 노여워하는 모습을 대하자 안절부절을 못했다.
"나……"
"내가 죽어버린 줄로만 알고 찾아왔죠?"
"아니오, 영령……"
"흥! 누가 당신의 아내란 말인가요? 구질구질하게 아내, 아내 하지 말란 말예요."
"오오, 가낭자……"
주호는 어떻게든지 그녀의 기분을 돌이킬 양으로 말투까지 바꾸어 버렸다.
"가낭자, 사실 당신네 집안에 대해 뭐라 사과의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소. 그런 내 마음을 가낭자라도 이해해주시기 바라오"
가영령은 그의 말을 묵살해 버리듯 큰 소리로,
"주호, 당신이 우리 집안 사람을 위해 이미 복수를 했다는 사실을 나는 다 알아요. 자, 어서 이곳에서 나가 주세요."
"아니 왜? ……"
주호는 다시 어떻게 해야 좋을는지 몰랐다.
"보기도 싫으니 어서 내 눈앞에서 꺼지란 말예요!"
주호는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는 듯 아팠다.
"가낭자, 아직도 나를 이해해줄 수 없겠소?"
가영령의 대답은 그의 부드러운 물음에 상관없이 시종 쌀쌀맞기만 했다.
"주호, 우리에게는 부부란 하등의 명분이 없어요 당신은 함부로 나를 당신의 아내라 생각하지 마세요. 나가요! 빨리 나가지 않으면 나도 가만 있지 않겠어요!"
주호는 무엇 때문에 갑자기 그녀가 흥분해서 날뛰는지 알 수 없었다. 비록 가영령에게 죄를 저지른 자이지만 이렇게까지 심하게 나올 줄은 실로 천만 뜻밖이었다.
"좋소! 때려서 화가 풀린다면 얼마든지 때리시오."
"때리라면 내가 못 때릴 줄 아시나요?"
하면서 가영령은 주호의 가슴팍을 향해 세차게 일장을 쳤다.
주호는 일장이 아니라 천장이라도 맞을 각오로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
퍽!하고 그녀의 앙상하게 야윈 손바닥이 그의 가슴에 닿으며 둔탁한 소리가 일어났다. 순간 주호는 비록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으나 입으로 선혈을 토하며 비틀비틀 뒤로 물러섰다. 가영령은 그가 시뻘건 피까지 토할 줄은 몰랐던지라 더 이상 손을 쓰지 못하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나는 당신과 단 하루, 단 한 시간, 아니 단 일각이라도 당신을 만나 같이 있고 싶었소. 그래서 이렇게 찾아온 것이오."
가영령은 묵묵히 그의 말을 다 듣고 나서 힘없이 물었다.
"주호, 당신은 조금도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생각은 없죠?"
"나, 나는……"
"나를 속이지 말아요. 나는 누구보다 당신의 속을 잘 알아요. 당신은 나를 아내로 맞이한다고 말함으로써 나의 모든 것을 망쳐놓았어요. 아마 이 엄연한 사실만큼은 당신도 외면하지 못할 거예요. 당신의 마음속에는 가영령이란 여인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아요. 설사 있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당신의 의부의 영혼을 위로해주기 위해서였죠. 그럼 나는 뭐예요. 내가 그렇게도 가치 없는 인간이란 말인가요?"
가영령은 말을 할수록 자기 자신이 처량해져서 견딜 수가 없었던지 일단 끊고 사이를 둔 뒤 다시 말을 이었다.
"돌아가신 내 집안 사람들을 위해 복수를 해주셔서 고맙긴 해요. 그러나 이제 모든 일은 끝났어요. 당신은 나를 만나기 싫으니까 은밀하게 숨어 지내면서 실종당한 척 연극을 꾸몄죠. 왜 내가 그렇게도 만나보기 싫은 거죠? 내가 만약 당신의 아내라면 과연 남편 되는 사람으로서 아내를 그런 식으로 대해야 했을까요?"
주호는 할 말을 잃고 더듬더듬 말을 더듬었다.
"가낭자,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소이다."
"그렇겠죠. 나를 만나기가 두려운 것은 바로 나를 아내로 생각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에요. 나의 부모는 모두 돌아가셨어요. 그러나 당신은 실종당한 척 연극을 하면서 나를 만나려 하지 않았어요. 나에게는 위로해주어야 할 사람이 필요한 데도 말이에요. 그 때부터 당신을 향한 원한이 싹트기 시작한 거예요."
주호는 소리 없이 사내로서의 뜨거운 눈물을 흘렀다. 그를 사랑하던 여인, 검은 미인은 죽었다. 비혼녀도 갔으며 가영령도 이제 그의 곁을 떠나려 하고 있다.
가영령에 대해서라면 말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죄스러운 심정이었다. 그렇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도 없고 단순한 사과의 말 따위로는 통할 것 같지도 않았다. 가영령은 다시 입을 열어,
"나 혼자 나와서 당신을 찾다가…… 마침내…… 마침내 그 무서운 일을…… 당하고……"
하더니 말을 계속하지도 못한 채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주호는 얼른 물었다.
"가낭자, 어떤 무서운 일이었소?"
그러나 가영령은 대답은 않고 계속 흐느껴 울기만 했다. 아무튼 무서운 일을 당했음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러기 때문에 심지어는 자살까지 기도했던 게 아닐까.
주호는 일단 이 정도로 생각해 두고 그녀가 울음을 그치기만 기다렸다. 이윽고 가영령은 눈물을 거두고 다시 말을 꺼냈다.
"주호, 이제 우리는 결말을 지어야겠어요. 여태까지의 일은 공교롭게 일어난 활극(活劇)이었다고 생각해요. 이제 그 활극에 막을 내려야 되겠는데 결국 우리만 불행히도 희생자가 되고 만 셈이에요. 나는 이 일은 영원히 잊을 거예요. 당신도 잊으세요. 잊을 수 있으리라 믿어요."
"이제 모든 것은 끝났어요. 어서 그만 가 보세요."
"가낭자, 도대체 어떤 무서운 일을 당했소?"
"좌우간 모든 것이 끝난 이 마당에 새삼스레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어요. 나는 당신의 아내도 아니고 그런 만큼 당신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으니까 어서 이 방에서 나가 주세요."
"그러나 나는 당신이 어떤 무서운 일을 당했는지 꼭 알고 싶소."
"그럴 필요가 없다니까요……"
가영령은 신경질이 났던지 날카로운 소리를 내질렀다.
주호는 이를 악물어 자신의 감정을 억눌렀다.
"가낭자, 낭자가 내게 기회만 준다면 나는 당신을 사랑하게 될 것이오."
"그러나 이제 늦었어요"
"늦다니? 어째서 늦었단 말이오?"
가영령은 다시금 발끈했다.
"주호! 어서 나가요 내가 한 말이 안 들려요?"
"가겠소. 그러나 가낭자, 마지막으로 내게 기회를 주기 바라오. 나는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소. 당신이 내게 기회만 준다면 나는 다시 찾아오겠소."
주호는 조심스럽게 방문을 밀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안에서 엉엉 목을 놓아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호는 기분이 매우 불쾌했다. 그것은 가영령의 고집 때문도 아니요, 울음 소리가 듣기 싫어서도 아니었다.
가영령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굳이 부인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가영령을 오늘날과 같이 처량하고 측은하게 만들어 버린 데 대해 도저히 책임을 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