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자(强者)의 조건(條件)
결진암(結塵庵).
언제 봐도 초라한 산사(山寺)이다.
암자 안에서는 목탁 치는 소리가 흘러 나왔다.
백무엽은 평상적인 걸음걸이로 천야농원을 나와 결진암 어귀에 이르렀다.
눈에 덮인 채미원(採薇園) 사이의 소로(小路)에도 눈이 덮여 어디가 길이고, 어디가 밭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지금은 새벽이었다. 아주 추운 새벽인데, 신기하게도 백무엽의 코와 입술 사이에서는 김이 피어 오르지 않았다.
숨이란 본시 뜨거운 법이다. 그래서 찬 공기 속에 토해지면 허연 김이 피어 오르게 마련인데, 백무엽의 숨결에서는 흰 김이 피어 오르지 않았다.
지극히 차가운 숨결.
아아, 백무엽은 이미 숨결의 온기(溫氣)마저 마음대로 조종할 경지에 이른 것이다.
딱- 딱-!
암자 안의 목탁 소리에는 박자가 있었다. 그것은 이상하게도 피를 끓어오르게 했다.
'나의 수양이 깊어지지 않았더라면… 이 소리만 듣고도 발광(發狂)했을 것이다.'
백무엽은 뇌리에 상당한 통증을 느꼈다.
살행의 대가로 받은 거금(巨金)을 전하곤 했던 결진암이다.
그런데 이 곳마저 인문의 한 장소였을 줄이야.
눈이 먼 노사태 천맹(天盲), 그녀는 백무엽이 태어나기 백 년 전 천하의 비구니계를 통솔했던 희대의 노사태였다.
아미산강룡(峨嵋山降龍).
입을 벌리면 천 권 불경(千卷佛經)을 줄줄 사자후(獅子吼)로 토하고, 자비스러운 처세로 활불(活佛) 소리를 들었던 백도계의 우상 강룡사태.
그녀는 마혼십가에 죽은 것이 아니라, 인문의 한 사람으로 살아 있는 것이었다.
"아미산(峨嵋山)은 본시 서천(西天)과 가깝지!"
목어(木魚) 소리 가운데 늙은 여인의 목소리가 흘렀다.
그 목소리는 바로 천맹사태로 알려진 강룡사태의 목소리였다.
과거 마혼십가에게 패한 인물, 다시는 강호에 이름을 내세우지 못할 정도로 철저히 패배한 인물이다.
당시 그녀는 백이십 나이인데도 서른 안쪽으로 보였었다.
뇌형불기공(雷形佛氣功)과 수미혜심공(須彌慧心功)에 능통한 덕에 반노환동(返老還童), 아니 아예 늙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그녀는 가장 지독한 치욕을 겪었다.
-늙은 계집중, 보기에는 처녀 같군!
-흐흐흐… 패배한 대가로 목숨을 바쳐야겠으나… 흐흐, 그 대신 다른 것을 바치고 목숨만은 건지거라!
-육체를 바쳐라, 우리 마혼첩(魔魂諜)들에게!
-저년의 투실거리는 젖퉁이를 봐라. 스물 안쪽의 미녀라도 저런 풍만한 젖은 갖지 못할 것이다.
무려 스물하나, 강룡사태는 승자(勝者)들에게 윤간(輪姦)을 당했다. 많은 아미산 제자들이 보는 자리에서 허벅지 사이가 피로 물들도록…….
그녀는 그 일 이후 미쳤고, 미친 후 절벽에서 몸을 날렸다.
그 때 그녀를 구한 사람이 인문의 창시자였다.
그리고 강룡사태는 죽고, 인문의 초창기 시절 가장 악랄한 살수(殺手)로 알려졌던 설매령(雪梅令)만 남게 되었다.
강룡사태, 그녀가 바로 인문(忍門)의 제사좌(第四座)였다.
그녀는 지금 복수심마저 잃었다. 그녀는 무상하다는 이치를 이즈음에서야 깨달은 것이다.
백무엽에게 무공을 전하고자 하는 것은 인문주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미산은 천축(天竺)에 가까운 덕에 천축의 라마들이 많은 무공들을 맡겨 왔다. 그 중 소뇌음사(少雷音寺)와 포달랍궁(包達拉宮)의 장교(掌敎)라마가 노승에게 천축의 불가무공을 전수했었다. 무화! 그것을 네게 전한다. 바로 지금!"
딱- 딱-!
한가로운 목탁 소리이다. 그러나 듣은 사람에게는 천둥치는 소리보다 더 크게 들리는 뇌음공(雷音公)이었다.
그것은 번뇌마(煩惱魔)를 몰아내고, 정신을 하나로 모으게 한다.
백무엽은 검산도림(劍山刀林)에 든 기분이 되어 강룡사태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 중 대밀수인(大密手印)이라는 것이 있었다. 노승은 그것을 최근에야 깨달았다!"
허공에서는 목어성(木魚聲), 하늘에서는 백설(白雪)의 춤이, 그리고 저도 모르게 꿇어앉은 백무엽의 백회(百會) 천령개(天靈蓋)에서는 흰 김이 피어 올랐다.
"문주(門主)는 너를 선택했다!"
"선택?"
백무엽이 가벼운 반응을 보였다.
"그 선택의 내면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
"하나는 너를 가장 강한 사람으로 만들 결심을 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문주의 사적 비밀(私的秘密)이다!"
"으음!"
"사적인 일에 대해서는 사적(私的)으로 알게 될 것이다! 짐작은 하나, 말하지는 않겠다!"
"……!"
"인문(忍門)은 피의 보복을 위해 뭉쳤다. 그것은 시한부로 피어난 한 송이 피의 꽃이다!"
"아……!"
"너는 천 일 간 시험되었고, 최근 들어 정식 제자로 발탁되었다. 너는 장차 문주와 힘을 합해 복수를 완성할 것이다."
"으음……!"
"노승이 지금 네게 할 수 있는 일은 문주의 뜻에 따라 무화령(無花令), 너를 가장 강한 사람으로 기르는 것이리라! 유가술을 전하는 뜻은… 그것뿐이다!"
딱- 딱- 딱-!
목어 소리가 더욱 급박해졌다. 그 소리는 백무엽의 오장육부를 뒤흔들었다.
백무엽의 얼굴은 시뻘겋게 물들었고, 허공 가득 메워지는 목어성은 더욱 커졌다.
"강자(强者)의 조건(條件)은 내외(內外)의 겸비에 있다!"
강룡사태가 말하는 것은 천축밀법(天竺密法)으로, 유가비전(瑜佳秘傳)이라는 것이었다.
천축국에는 두 가지 류(流)가 있다. 첫째는 내세극락도(內世極樂道), 둘째는 현세활신도(現世活神道).
내세극락도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사후세계를 믿는다.
그들은 현실보다는 미래(未來)에 모든 것을 건다.
반면, 현세활신도 사람들은 내세를 믿지 않는다. 그들이 믿는 것은 단 하나, 그것은 바로 현재 신(神)이 되어야 한다는 진리이다.
그들은 산(山)의 무한함과 천(天)의 공활함을 동경한다.
그리고 산 중 산(山中山)이라는 설산(雪山) 희마랍아(喜馬拉我)를, 천 중 천(天中天)이라는 설산의 하늘을 동경한다.
또한 그들은 산과 하늘이 되기 위해 고행(苦行)을 한다. 그 가운데 파생된 것이 바로 유가비전이었다.
"내(內)란 심(心)이고, 외(外)란 체(體)다! 너는 이미 극강한 내기(內氣)를 지녔다. 거기에다가 밀종대수인(密宗大手印)에서 파생된 외공(外功)마저 얻는다면, 너는 강자의 조건을 모두 다 갖춘 고수가 될 것이다!"
강룡사태의 구결은 한 짬의 쉬임도 없이 이어졌다. 밖에서 들리는 소리가 아니라, 내심에서 일어나는 목소리처럼 커다란 울림(鳴)으로!
"그것은 매우 힘든 것이고, 고통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고통?"
"극한 고통이다."
"……!"
"네게 강요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너도 인문의 노예가 아니라 당당한 인문의 사람이 되었기에!"
"다… 당당한?"
백무엽은 가볍게 움찔했다.
"그렇다. 너는 당당해졌다. 그래서 사람들은 네게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너는… 선택된 것이다."
강룡사태의 목소리는 아주 강했다. 하지만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백무엽뿐이었다.
그 소리는 만리전음술(萬里傳音術)에 따라 백무엽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바란다면 주겠다, 그 힘을! 그리고… 바라지 않는다면 구결로만 전수하겠다."
"으음!"
"구결로 익히면 백 년 걸리고, 대고행(大苦行) 가운데 얻으면 속성(速城)한다. 사실 속성한다는 것은 기적이나, 너라면 할 수 있다! 너는 독종(毒種) 중의 독종(毒宗)이니까! 나무관세음보살… 바란다면 암자 안으로 들어와라. 네가 늘 보시해 준 대가로, 네게 불사조(不死鳥)의 천력(天力)을 주겠다. 그것은 불가에서는 가장 강한 힘으로, 네가 이미 얻은 대유진력의 극성인 대파력(大破力)이다."
거종이 치는 듯 장엄한 목소리이다.
백무엽의 뇌리를 씻고 오장육부를 뒤흔드는 목소리, 그 목소리가 백무엽을 일어서게 했다.
"강자가 되고 싶지는 않으나, 그것이 무엇이든 알고 싶습니다. 사태, 하여간 들어가겠습니다!"
백무엽은 눈 속을 걷기 시작했다.
휘리리리- 링-!
눈은 장막처럼 내리 덮쳤다. 거대한 흰빛 장막이 떨어져 내리듯 모든 것을 휘감아 버렸다.
키가 꽤 큰 편인 백무엽이나, 눈의 장막 가운데 들어가자 아주 작고 왜소해 보였다.
지금 암자 일대는 기문진(奇門陣)에 뒤덮였다.
백무엽은 결진암의 문 앞에 이르렀다. 그가 문고리에 손을 댈 순간이었다.
"용감한 녀석, 너의 용기가 부럽다. 훗훗, 하지만 당분간은 네 자신의 결정을 후회할 것이다. 차라리 죽었으면 하고 바라게 될 것이다! 이것은 고문과는 다른… 진짜 아픔이다!"
목소리는 뒤에서 들렸다.
강룡사태는 암자 안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암자 밖에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기류(氣流)를 타고 비스듬히 떨어져 내렸다.
"어엇? 회풍무류(廻風舞柳)?"
백무엽이 그녀를 발견할 때였다.
"자, 후회하라! 너의 생존을!"
강룡사태는 설풍(雪風)에 몸을 휘감은 채, 허공 가득 무수한 환영을 뿌려 댔다.
스으으으… 스으으…….
잠불영(潛佛影),
구로불현(九路佛現),
연대구품(蓮臺九品).
불가비전의 이신술(移身術)이 잇따라 시전되더니, 허공 가득 연화(蓮花)가 피어나는 듯한 환상이 나타난다.
아아, 너무나도 아름다운 연꽃이여!
파아아- 파아아-!
허공 가득 무수한 그림자가 만들어졌다.
웃는 비구니(比丘尼), 수많은 비구니들의 손에는 같은 물건이 들려 있었다.
낭아혈편(狼牙血鞭)!
길이가 열두 자, 표면에는 다섯 치 길이의 침(針)이 숭숭 박혀 있고 그것의 빛은 칠채(七彩)로 현란히 빛나고 있었다.
백무엽이 낭아혈편(狼牙血鞭)을 보고 아차 할 때였다.
파파팟- 팟-!
강룡사태는 환영의 막(幕)으로 백무엽의 진퇴를 차단하며 백무엽의 전신 혈도(血道)에 채찍질을 하기 시작했다.
촤르르르- 륵-!
"흐윽! 진… 진짜 아프다!"
백무엽은 난도질당하는 아픔에 몸을 새우등처럼 꺾었다.
채찍질 자체도 아프거니와, 바늘 같은 침에 발린 마독(痲毒)마저 그의 피부를 쓰라리게 했다.
채찍은 풍차(風車)처럼 회전했고, 채찍이 그의 전신을 휘감을 때마다 점점이 혈편이 튀었다.
"흑……!"
그리고 백무엽은 영혼마저 으스러뜨릴 고통 가운데 의식을 잃고 말았다.
백무엽이 까무러쳤다는 것은 그가 지금 느끼는 고통이 정말 엄청나다는 것을 뜻한다.
강자(强者)에게는 조건(條件)이 있다.
그것은 강하기 위해 꺾여 봐야 한다는 것!
꺾인 자는 진짜 강자가 될 수 있다. 꺾여 봤기 때문에 그는 강자가 될 수 있다.
채찍질은 쉬임없이 계속되었다.
백무엽은 피를 한 말 이상 흘렸다.
그는 구더기처럼 떼굴떼굴 굴렀고, 그가 걸쳤던 옷은 완전히 피누더기가 되어 찢겨져 나갔다.
그의 피부는 천분만열(千分萬裂) 갈라졌고, 어떠한 곳은 백골(白骨)이 드러날 정도로 깊숙이 찢어졌다.
강룡사태는 그 때마다 기이한 분말가루를 백무엽의 피부 위에 살포한다.
그것은 천야농원에서 재배된 금창약으로, 바르는 찰나 살이 아무는 정말 좋은 약이었다.
그렇지만 그것 역시 백무엽에게는 지독한 쓰라림을 안겨 주었다.
파- 파- 파-!
채찍이 흔들리고 피보라가 튀어오른다.
백무엽은 피구덩이에 빠지고 말았고, 그래도 채찍질은 계속되었다.
삼 주야(晝夜) 동안, 강룡사태는 삼만 편(鞭)을 쳐냈다.
백무엽은 천 번 넘게 실신했고, 그 때마다 악착같이 깨어났다.
그리고 사 주야(晝夜)가 지난 후부터 그는 좀처럼 혼절하지 않았다.
또 이틀이 지났을 때, 백무엽은 처음으로 웃을 수 있었다.
"이제는 아프지 않습니다. 불행히도… 이 놈은 고통이라는 단어를 잊어버린 듯합니다."
그의 미소(微笑)는 쓸쓸해 보였다.
평범한 사람하고 달라진다는 것, 그것이 십구 세(歲)의 봄(春)에게는 조금 허무한 일일지 모른다.
"이제… 가도 된다. 여기 옷이 있다. 녀석, 네게 자꾸 정(情)이 든다. 녀석……!"
강룡사태가 채찍질을 멈춘 시기는 십 주야(晝夜)가 지났을 때였다. 암자 주위는 눈으로 인해 완전히 파묻혔으나, 두 사람은 그것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대설 가운데, 두 사람은 눈의 성 안에서 혈무(血舞)를 즐겼던 것이다. 앉아 있는 백무엽의 살색은 옥녀(玉女)의 살처럼 희고 보드라웠다.
강룡사태의 채찍질은 그의 진원지기를 모두 끌어냈다. 덕분에 백무엽은 가장 강한 내외공(內外功)을 얻게 되었으며, 그의 피부는 천잠사만큼 질기고 부드러운 피부가 될 수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합니까?"
백무엽은 백삼(白衫)을 걸치며 물었다.
결진암의 문은 이미 꽉 닫혔다.
강룡사태는 암자 안으로 들어가 안쪽에서 문을 걸었다. 아마도 그녀는 꽤 오랫동안 면벽(面壁)을 할 것이다.
피의 영상을 잊기 위해, 머릿속을 공허하게 만들기 위해 그녀는 백 일 넘게 면벽불공할 것이다.
"내려가라!"
"어디로요?"
"화림(花林)에 돌아가라! 제일좌(第一座)가 기다릴 것이다."
"결국 문주(門主)를 뵙게 되는 것입니까?"
"그렇다. 너는 선택된 것이다, 남자(男子)로!"
"으음!"
백무엽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강룡사태는 이후 말을 하지 않았다.
백무엽도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절을 한 후, 천천히 신형을 돌렸다.
일대는 황혼에 불타고 있었다. 눈이 그친 하늘은 붉게 물들었고, 서쪽에서부터 모진 바람이 불고 있었다.
휘이잉- 휘이이이- 잉-!
백무엽은 발자국을 남기지 않고 걸음을 내딛었다.
'문주(門主), 누구일까? 내 주위 사람일까?'
그는 인문제일좌에 대한 것을 생각하며 걸었다.
'그는 나의 은인(恩人)이다. 그는 나를 구했다. 나는 그에게 목숨의 빚을 지고 있다.'
백무엽이 그러한 생각을 하고 걸을 때였다.
"대숙(大叔), 각주(閣主)가 바둑 두고 가시랍니다. 대숙!"
누군가 큰 소리로 그를 불렀다.
청청(靑靑).
머리를 두 갈래로 땋아 내린 귀여운 소녀다. 그 소녀는 길이 휘어지는 곳에서 백무엽을 보고 있었다.
아주 귀여운 소녀, 그녀는 백무엽을 내심 짝사랑하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사랑을 하기에는 조금 어린 나이이나, 분명 눈빛은 사랑을 품고 있어 빛나고 있었다.
고아소녀(孤兒少女)의 눈에는 백무엽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일 것이다.
"각주는 철야대국(轍夜對局)하라 하시며 대숙께 이것을 전하라고……!"
군영각(群英閣)의 소녀가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청청(靑靑), 눈이 유난히도 큰 그 푸른 옷의 아이는 백무엽에게 작은 쪽지 한 장을 전했다.
<꼭 오게나, 무화(無花)!>
무화(無花)라고 적다니?
그렇다면……?
달 아래였다.
두 다리가 없는 석노인은 벌써 세 판째 흑(黑)을 쥐고도 바둑에서 졌다.
즉, 백무엽은 집백(執白)하고도 세 판 내리 불계(不計)로 이겼다는 것이다. 모여 서서 바둑을 구경하던 아이들은 이제 모두 잠자리에 들었다.
달(月)과 호수 위를 떠도는 부평초(浮萍草)와 석노야(石老爺)가 뻑뻑 피워 내는 담배 내음이 어우러진다.
"보통이 아니군?"
석노야는 세 판째마저 투석(投石)하고 웃는다.
"배운 솜씨지요."
백무엽의 목소리는 아주 차가웠다.
"훗훗… 말솜씨도 꽤 늘었군."
"가르침 덕이지요."
백무엽의 대답에는 한 점의 흐트러짐도 없다.
보통이 아니라는 것은 바둑 실력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더 깊은 뜻을 갖고 있다.
그 말은 백무엽의 정력(定力)이 초연적이라는 것을 뜻한다.
즉, 백무엽은 석노야가 바로 부평령(浮萍令)임을 알고 여기 왔으면서도 그것을 이제까지 내색하지 않았다.
그는 한 마디도 묻지 않았고, 바둑 세 판을 내리 이겼다.
바둑은 정신력의 기초 없이는 할 수 없는 놀이이다.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자신의 심마(心魔)마저 다스리지 않았다면 아마도 바둑에서는 졌을 것이다.
"자네 같은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면 우리는 인(忍)의 길을 걷지 않아도 될걸세! 자네는 큰 그릇이네, 독보적(獨步的)인!"
"과찬이십니다!"
"천만에, 자네는 선택(選擇)받아 마땅한 남자일세. 훗훗……!"
선택이라……!
그 말은 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새벽이 머지않았군. 그럼… 시작해 볼까?"
석노야는 웃으며 오른손을 쳐들었다. 그는 노학(老鶴) 다리마냥 앙상히 마른 손목을 갖고 있었다.
손가락이 유난히 긴 노문사의 손, 흑석(黑石) 한 알이 중지와 식지 사이에 쥐어져 있었다.
"노부는 던지는(投) 데 능하지. 노부는 던지는 법을 백팔 종(種)이나 알고 있다네!"
석노야(石老爺), 고아(孤兒)들을 기르며 한적하게 살고 있는 야학(野鶴) 같은 노인. 그 역시 인문 사람이었다.
인문제칠좌(忍門第七座) 부평령(浮萍令).
과거, 그는 무림제일의(武林第一醫)라고 불렸었다.
마의화타(麻衣華陀) 석중옥(石中玉).
그 역시 마혼십가(魔魂十家)에 패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활술(活術)과 점혈법(點穴法)에 지극히 능했다. 그리고 인문에 든 후부터는 한 가지 술법만 전적으로 연구했다.
그것은 바로 암기술(暗器術).
마의화타 석중옥은 고금무림계에 유명한 백팔 가지의 암기술만을 이십 년에 걸쳐 전적으로 연구했고, 그 결과 커다란 성취를 이룰 수 있었다.
"하나는 금강회선모니주(金剛廻旋牟尼珠)! 힘을 안에 갈무리한 채 바람(風)처럼 가볍게 날아가……."
슷-!
석중옥이 손가락을 퉁기자, 검은 돌 하나가 손가락 사이에서 퉁겨져 허공으로 쏘아졌다.
놀랍게도 그것은 아주 느릿느릿 허공을 가로질렀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手)이 흑석을 떠메고 가는 듯이.
흑석이 십 장 멀리 날아갈 때였다.
"뇌정(雷霆)의 힘을 터뜨리는 술법이네!"
석중옥은 중얼거리듯 말했고, 바로 그 순간 흑석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휘이이- 잉-!
흑석은 일순 흑섬(黑閃)처럼 빨리 떠오르기 시작했고, 가공할 파공성과 함께 흑석 주위에 선풍강기(旋風剛氣)가 일어났다.
뇌(雷)!
번개가 허공을 긋는 듯하더니 검은 바둑알은 가산(假山)의 허리 쪽으로 푹 파고들었고, 그 순간 무서운 우레 소리가 터져 나왔다.
콰아아- 쾅-!
오오, 이럴 수가?
아주 작은 흑석 한 알이 화약 만 관(貫)이 일제히 터지는 듯한 위력을 발휘해, 가산 가운데를 허물어뜨리지 않는가!
가산에서 산사태가 나며 흙이 호수 속으로 흘러내렸다.
'놀라운 수법이다. 아, 한 알의 신외지물(身外之物)에 혼신의 내공을 모두 다 실어 내던지는 수법이다.'
백무엽은 상체를 약간 휘청거렸다.
늘 온화하기만 하던 석중옥의 체내에 이 갑자의 공력이 숨어 있고, 그것이 금강회선모니주(金剛廻旋牟尼珠)라는 천축불가비전(天竺佛家秘傳)의 암기술(暗器術)에 따라 격발되어 가산을 허물어뜨릴 줄이야!
"……."
"두 번째 던지는 법은 회선비류(廻旋飛流)라는 것이지. 사천당가(四川唐家)에서 잃어 버린 중원 최고의 비탄식(飛彈式)이라네!"
석중옥은 다시 흑석 한 알을 손가락 사이에 끼어 들었다.
아주 느릿느릿, 그는 흑석을 쳐들더니 그것을 슬쩍 퉁겨 냈다.
흑석이 허공을 가르며 호수 쪽으로 갈 때였다.
"노부가 노리는 것은 저기 있는 노송(老松)이라네!"
석중옥 노인은 미소지으며 팔짱을 끼었다.
그의 말은 백무엽을 크게 놀라게 했다.
'각(角)이 맞지 않는다. 돌이나 나무라면 돌을 퉁겨 낼 것이나, 설마 물이 어찌 돌을 퉁길 수가?'
그의 마음 속 생각이 거기에 이를 때, 이게 어인 일인가?
휘이이이- 잉-!
파공성이 요란히 나더니, 흑석 근처에 회오리바람이 형성되지 않는가?
흑석은 물 표면에 닿았고 한순간 제비가 물을 차는 듯한 장면이 벌어지더니, 물 속으로 잠길 듯하던 흑석이 물에 퉁겨지며 본래 속도보다 삼 배 빨리 허공으로 튀어올랐다.
거의 소리도 없이 오직 한 줄기 검은 선이 가산의 비탈을 타고 날아오르더니, 둔중한 소리가 나며 가산 허리께에 자라고 있던 노송(老松)의 철갑피(鐵甲皮)에 오리알만한 구멍 하나가 파였다.
'무서운 암기수법이다. 아아, 금강모니주는 강(强)을 유(柔) 속에 숨기고 있고… 회선비류(廻旋飛流)는 변(變)을 쾌(快)와 더불어 나타낸다. 만에 하나, 양자를 한꺼번에 펼칠 수 있다면 가히 능풍나선비(凌風螺旋飛)의 최고 암기술을 시전할 수 있을 것이다.'
능풍암기술의 최고식이라는 능풍나선비!
그것이야말로 석중옥이 백무엽에게 전수하고자 하는 최후의 초식이었던 것이다.
능풍나선비는 암기를 허공에서 자유롭게 방향 전환시킬 수 있는 가공할 암기수법으로, 앞으로 던져 뒤로 나아가게 할 수가 있고 허공에서의 속도를 일곱 번에 걸쳐 자유롭게 바꿀 수도 있다.
다시 말해, 다른 암기수법은 암기가 손끝을 떠나는 찰나 이미 제어불능이나… 능풍암기술은 암기가 표적에 닿을 때까지 발출자의 내공에 따라 허공에서 자유자재로 법과 속도를 달리하는 것이다.
석노인은 새벽이 될 때까지 두 가지 암기술의 초식을 백무엽에게 전수했다.
"새벽의 찬바람은 노년에게는 해롭다네. 노부는 이만 취침해야겠네, 쿨룩… 쿨룩! 이 놈의 연초, 뚝 끊어야 하는데… 제기랄, 중독되어 버려 끊을 수가 없군. 그래서 새벽이 되면 늘 기침이 난단 말이야!"
"이제 어디로 가야 합니까, 저는?"
백무엽은 힐끔 얼굴을 쳐들며 물었다.
"화림(花林)으로 가게."
석중옥은 그를 보지 않았다. 그는 새벽 하늘을 보고 있었다.
이 밤(夜)따라 별빛이 애달프다!
강호(江湖)의 밤(夜)은 또 이렇게 지나갔다.
해가 뜨고, 이슬(露)은 풀잎 위에서 스러지리라!
지난 새벽에 그러했다. 이 새벽에도…….
석중옥은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천기(天機)가 나쁘다. 마성(魔星)이 가까운 곳에 떴다. 아아, 싸움을 피해야만 할 때다. 하늘의 기운은 의풍(義風) 대신 마풍(魔風)을 일으키려 한다! 쿨룩쿨룩……."
석중옥은 진짜 기침을 했다. 아마도 백무엽에게 암기술을 전수하느라 과거 마혼십가와 싸우다가 입은 내상이 도진 모양이었다.
"의(義)라는 외로운 등(孤燈)을 밝히는 사람은 드물고… 쿨룩쿨룩, 모든 사람은 악마의 꽃(惡魔花)을 따라다니고 있다. 불행한 일이나, 사실이다. 그것이 삶이다. 그것이……!"
석중옥은 진물 흐르는 눈길을 죽책 쪽으로 돌렸다.
백무엽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떠나버린 것이다.
"어쩐지 다시는 못 보게 될 듯하군. 물론, 운이 좋다면 다시 볼 것이나… 쿨룩쿨룩……!"
석중옥은 심한 기침을 했다.
그의 입술 사이에서 지독한 핏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마치 핏빛 꽃잎이 바람에 흩날려 떨어지듯이, 핏물은 그의 옷소매를 시뻘겋게 물들였다.
"자네는 강자(强者)이지. 하지만 적은 더 강하니, 어이하겠나? 아아, 밤이 우리를 지켜 줘야만 하는데……!"
석중옥은 자꾸만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늘! 더 이상 노부를 시험하지 마시오. 더 이상… 아아, 지금 노부는 의가 마를 이긴다는 것을 의심하고 있소. 의라는 것은 너무나도 고독한 투쟁이기에…….'
새벽은 눈에 파묻혔다.
백무엽의 어깨 위에도 눈이 한 치 넘게 쌓였다.
그는 잔뜩 찌푸린 얼굴을 하고 쾌활화림(快活花林) 어귀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상한 것은 일대가 너무나 조용하다는 점이었다.
마치 산사(山寺)의 어귀 마냥…….
백무엽은 평범한 걸음걸이로 눈을 밟고 나아간다.
쾌활화림의 정문이 보이게 될 즈음, 그의 눈가가 심하게 찌푸러졌다.
"폐쇄라니……?"
개문한 이래 한 번도 닫힌 적이 없는 쾌활화림의 문이 꽈악 닫혀 있지 않은가.
놀라운 것은, 닫힌 문 바로 아래 한 사람이 서 있다는 것이었다.
"재미 좋군. 큿큿……!"
백무엽을 알아보고 징그럽게 웃는 자. 그는 피비린내가 뚝뚝 돋는 피풍의(避風衣)를 걸치고 있었다.
아주 긴 장도(長刀)를 가슴에 품고 있는 모습은, 꼭 오십이 넘어 첫 아들을 본 홀아비 같은 모습이었다.
잘 웃지 못하는 도객(刀客), 혈도 마운(血刀馬雲)!
그가 쾌활화림 앞을 어정거리다니?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저 사람이 어이해 여기 와 있단 말인가?'
백무엽은 혈도 마운을 쾌활화림 앞에서 보게 되자, 야릇한 호기심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은 대문에 나붙어 있는 한 장의 붉은 방문(榜文)을 보는 찰나, 어처구니없이 풀리게 되었다.
<쾌활화림은 천진표행(天津 行)에 접수되었음.
림주되는 무정태공(無情太公)이라는 자는 천진표행주에게 거금 일백이십사만 냥(兩)을 빚졌고, 그것을 갚지 못했기에 이 곳을 차압하는 것임!>
쾌활화림은 봉쇄되었다.
역시 졸부(卒富)보다는 거부(巨富)의 자금이 막강했던가?
천진쌍부(天津雙富) 중 하나이던 무정태공은 며칠 사이 천진부에서 제일가는 빈털터리가 되고 만 것이다.
혈도 마운은 여전히 쇠사슬을 목에 걸고 있었다. 쇠사슬의 끝은 대문에 박힌 철주에 연결되어 있었다.
개(犬)처럼… 혈도 마운은 대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안에… 정녕 비밀스러운 것이 있다. 분명히…….'
그가 와 있다는 것은 정말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그것은 정녕 지켜야 할 어떤 것이 화림 안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혈도 마운, 그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그는 천하쌍도(天下雙刀) 중의 하나이다.
사막화접도(死幕火蝶刀),
천마성(天魔星).
누가 두 이름을 모르겠는가!
천마성, 그가 바로 혈도 마운의 전신이다.
과거 혈마방(血魔幇)을 이끌었던 인물, 이미 죽었다고 소문난 흑도계의 전설적인 영웅(英雄).
그는 천하에서 가장 비천한 모습으로 자신을 속인 채 장도를 가슴에 안고 어정거리고 있는 것이다.
"들어가라, 무화(無花). 문주(門主)는 제일특실(第一特室)에서 너를 기다리신다! 너는 행운아다."
백무엽은 창노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너는 선택(選擇)된 것이다, 인법(忍法)의 주인(主人)으로! 운(運)이 좋았다, 제십좌(第十座)."
의어전성(議語傳聲)으로 들리는 그 목소리야말로 혈마방주 천마성의 진짜 목소리였다.
"네가 선택된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은 네가 정말 아름답게 생겼기 때문이다. 사내가 반할 정도로……."
혈도 마운은 백무엽의 등에 대고 계속 전음을 보냈다.
남자로 선택되다니……?
그 말은 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일컬어, 님도 보고 뽕도 딴다는 것이지. 큿큿, 인법연성(忍法練成)도 좋고 운우지환(雲雨之歡)도 좋고… 큿큿……!"
혈도 마운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 때, 백무엽은 이미 후정(後庭)에 들어간 후였다.
눈은 쓸리지 않은 상태로 쌓여 있었다. 늘 마당을 쓸던 제노인(帝老人)도 비를 놓은 듯…….
백무엽이 결진암에서 외공(外功)을 단련하는 사이, 화림의 기녀(妓女)들은 모두 다 추방되었다.
화림은 환락의 장소로 보이지 않았다.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 화림의 모습은 너무나도 다르게 보였다.
상전벽해(桑田碧海)랄까?
'모든 것이 죽어 있다. 어쩌면… 이 곳은 이제야 진짜 모습을 찾았는지 모른다. 이 곳은 바로 인문의 장소가 된 것이다.'
백무엽의 입 안에 침이 가득 고였다.
인문제일좌(忍門第一座), 두견령(杜鵑令)!
그가 십 장 가까운 곳에 있다.
특제일실(特第一室), 그 곳은 바로 교방일화(敎坊一花) 설향(雪香)이 강호의 귀빈들을 접대하던 장소였다.
특실의 문은 조금 열려 있었다.
백무엽은 눈에 발자국을 찍으며 걸어갔다.
그는 자신이 왔음을 방 안의 사람에게 알리고 싶은 듯 일부러 큰 숨소리를 내며 걸어갔다.
'문주, 그는 누구일까? 어이해 내게만 특혜를 베푸는 것일까?'
백무엽은 파란을 만난 호수의 심정이 되어 있었다.
철저하게 인(忍)를 단련받은 초살수(超殺手) 무화령!
그를 놀라게 할 일은 인문의 일뿐이리라. 다른 일이라면 눈앞에서 천자(天子)가 죽는다 해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계단은 일곱 개였다. 일곱 계단을 밟고 올라서면 회랑(回廊)을 딛을 수가 있다.
회랑을 한 굽이 지나면 목문을 볼 수가 있다.
아늑한 정취를 자아내는 밀실(密室), 그 곳이 바로 제일특실이었다.
저벅-!
백무엽은 제일특실 바로 앞에 이르러 숨소리를 죽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방 안에서는 정말 놀랍게도 가는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기다렸다. 들어와라, 무화령! 들어와, 내게 배(拜)하라!"
차고 날카로운 목소리, 그 목소리는 바로 설향(雪香)의 목소리였다.
교방일화 설향, 그녀가 바로 인문제일좌였던 것이다.
j여자여……
여자(女子)!
그네들은 의복에 따라 자신의 모습을 철저히 화신(化身)하는 재간을 지니고 있다.
나삼(裸衫)으로는 요녀(妖女)가 되고, 법의(法衣)로는 정결한 비구니(比丘尼)가 될 수 있고, 궁장(宮裝)으로는 도도한 왕녀(王女)라도 될 수가 있다.
술 찌꺼기 묻은 짧은 소매옷을 걸친다면 주가(酒家)의 천녀로 불릴 것이고, 몸에 꽉 끼는 가죽옷을 걸치고 등에 쌍검(雙劍)을 멘 채 무릎을 꼬고 앉아 사나운 눈빛을 흘리고 있다면 그녀는 이미 여인(女人)이 아니라, 하나의 암흑(暗黑)이 되는 것이다.
설향(雪香), 그녀는 꽤나 오만하고 차가운 모습이었다.
대리석(大理石)같이 반듯한 얼굴은 정녕 돌 마냥 굳어 있었다. 사슴을 닮아 길게 뽑혀진 목덜미는 희고 가늘었고, 꽉 졸라맨 가죽 허리띠는 그녀의 허리를 개미 허리로 만들었다.
그 아래 풍만하고 둥그스름하게 이어지는 둔부의 등선은 여전히 고혹스러웠다.
허리 아래만은 옷차림으로도 감춰질 수 없었다.
천년우물(千年尤物), 설향은 그렇게 불려도 부끄러울 바 없는 여인이었다.
모든 사내가 바라는 육체와 옥용을 가진 여인.
그녀는 꽤나 자신만만하고 도도한 얼굴인데, 이상하게도 백무엽이 들아서자 눈꼬리를 파르르 떨고 있었다.
'문주는 나인데, 내가 너를 거느리고 있거늘… 항상 나는 네게 위압감을 느꼈다.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나, 늘 내 마음을 지배했다. 그림자마냥…….'
설향은 오만하고 도도해 보이나, 내심은 달랐다. 그녀의 심장은 강하게 박동하고 있었다.
신기(神氣)랄까?
전신에서부터 강렬한 열정(熱情)과 함께 차가운 살인미(殺人美)를 지닌 미청년 하나가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연약한 듯 보이나 사실은 강인한 몸뚱이.
휘청이는 자태만으로도 세상 모든 여인의 눈시울을 적시게 할 수 있는 미남자 백무엽!
그는 설향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에 크게 놀라 얼굴을 약간 붉혔다.
'설향이었을 줄이야…….'
백무엽은 뒷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표정이었다.
물론 그것은 그의 정말 지독한 교육에 의해 곧 표정에서부터 사라졌고, 그는 전과 다름없이 멀쑥한 표정이 되어 천천히 무릎을 땅에 댔다.
그는 아주 느릿느릿 절을 했다.
설향에게 하는 것이라기보다, 설향의 무릎 위에 올려져 있는 한 송이 두견화(杜鵑花)에 대고 절을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에게는 자신의 사문을 존경하고 사문 사람을 경배하는 마음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인문은 그를 살인병기(殺人兵器)로 만들었다. 비인간(非人間)의 혹독한 수련은 백무엽을 인간이 아닌 목석(木石)으로 만들었다.
그의 눈을 보라!
매우 맑고 아름답기는 하나, 거기에서 열정(熱情)을 찾아보기란 불가능하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이라고나 할까?
"……!"
백무엽은 석상이 되어 있었다.
'아아, 나는 무서운 힘(力)을 느낄 수가 있다. 이 사람의 몸 안에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할 힘이 깃들여 있다.'
설향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 있는 상태였다. 보란 듯이 그녀는 양 팔뚝을 걷어붙이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그녀의 오른팔뚝에 하나의 커다란 붉은 점이 박혀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일반적인 점과는 다른 어떤 부호였다.
홍보석(紅寶石)처럼 반짝이는 붉은 점, 그것은 놀랍게도 처녀성(處女性)의 상징이라는 수궁혈사(守宮血砂)인 듯했다.
설마… 뭇사내의 품안에서 놀아났던 설향이 아직 동정녀란 말인가?
정실(靜室).
설향은 백무엽의 눈을 오랫동안 들여다봤다.
백무엽은 눈을 반개(半開)하고 있었는데, 그의 눈빛에는 한 점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그의 눈빛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정한 빛을 유지했다.
호흡 소리 역시, 처음이나 끝이나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완전한 정(靜)의 상태!
그 경지는 인문주인 설향마저 떨게 할 만한 지고무쌍한 경지였다.
'하여간 모를 자다. 그러나 이 자의 과거는 분명 백지가 되었고, 이 자의 모든 것은 내게 바쳐졌다. 또 다른 것이 있을 수 없거늘… 분명히 있다.'
설향은 다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녀의 몸에서는 달콤한 내음이 풍겼다. 아침 햇살 속에서 맡을 수 있는 풋사과의 향내 같은…….
그것은 향유(香油)의 내음이 아니었다. 아스라한 향기는 바로 설향의 내음이었다.
"제십좌, 너를 여기 부른 이유는……!"
설향은 꽤 오랫동안 침묵했다가 입술을 떼었다.
"……!"
백무엽은 하나의 돌이 되어 그녀의 말을 들었다.
생명이 없는 나무나 돌과 같은 자세, 그 자세가 설향을 약간은 씁쓸하게 했다.
청춘(靑春)임을 망각한 일남일녀! 이들은 정확하게 일 장(丈)의 사이를 두고 있었다.
설향은 천하가 알아주는 달변가였다. 한데, 지금 그녀는 말을 더듬고 있었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인문의 비밀에 대해 처음으로 듣고 있는 백무엽의 자세가 지극히 단정했기 때문이다.
깊은 강(江)처럼,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쌓인 적설(積雪)처럼…….
백무엽의 영육을 모두 장악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인문 사람이라 하더라도, 백무엽의 마음 깊은 곳만은 어찌할 수가 없는 것인가?
'아아, 저 눈빛은 처음 보는 그 순간부터 나를 흔들리게 했다.'
설향은 주먹을 꽈악 쥐고 있었다.
그녀는 인문 사람으로서는 해서는 아니 되는, 하나의 금기를 깨고 있는 것이었다.
정(情)이랄까? 애(愛)라고 할까?
설향의 가슴 속에는 절세미남(絶世美男) 백무엽의 모습이 하나 가득 담겨지고 있었다.
'한데, 막상 모든 것을 밝히려 하니 오히려 말이 나오지 않는구나.'
설향의 손아귀에는 땀이 흥건히 쥐어졌다.
백무엽의 허무(虛無)함은 오히려 설향을 긴장시켰다.
그리고 설향은 너무나도 허무한 백무엽의 태도에 적이 반감을 느끼기까지 했다.
그녀는 눈에서 차가운 빛을 아주 강하게 쏘아 내며 입을 열었다.
"먼저… 한 가지 물을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너는 숨김없이 대답하라!"
"하겠소이다, 문주!"
백무엽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무화령, 그대의 활약은 탁월했다!"
"……!"
"그것은 문주된 입장에서 매우 고맙게 여기는 바이다!"
"고마워할 것 없소. 빚을 진 이상, 갚아야 했기에 그리한 것뿐이니까!"
백무엽의 대답은 냉소적이었다.
그는 인문을 비웃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자신도 그것을 모르고 있는지도.
모를 사람!
백무엽에 대해 가장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대는 모를 사람이야. 정말로……!'
설향은 이를 가볍게 악물었다.
"그대는 인문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자리서 물어 봐라! 알고 싶은 게 있다면 무엇이든 주저없이 물어도 좋다. 예를 들어, 내가 누구냐든가……!"
설향은 고개를 가볍게 으쓱거렸다.
천하에서 가장 신비한 살수집단(殺手集團)인 인문.
단 십 인(人)으로 이루어졌으나, 천 명의 고수로 이루어진 방파만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강호계의 변수(變數)조직.
누가 인문에 대해 알고 싶어하지 않겠는가!
하물며 백무엽처럼 인문에 몸을 두고 일천 일(一千日)을 산 사람이라면……!
그러나 백무엽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 나오는 목소리는 지극히 차고 담백하고 간결했다.
"본인이 이 자리에서 알고 싶은 것은… 문주가 왜 본인을 불렀느냐 하는 것뿐이오!"
지극히 간단한 물음이다.
설향은 그 말에 약간 격앙되고 만다.
"인문에 대해서는 알고 싶은 것이 없단 말인가?"
그녀의 말이 파르르 떨려 나왔다.
"그렇소."
"으음, 어째서이지?"
"훗훗… 그냥 그럴 뿐이오! 다른 것은 알기 귀찮소. 안다는 것은 짜증스러운 일이오."
"그냥 그렇다고? 짜증스럽다고?"
"훗훗… 나는 인문에 빚을 졌소. 그것은 목숨의 빚이오. 그래서 나는 그 빚을 목숨으로 갚을 결심을 했고, 그것을 천 일에 걸쳐 지켰소!"
"그리고……?"
"그뿐이오!"
"그… 그뿐이라고?"
"인문이 알아서 하리라 믿소."
"무, 무엇을?"
"내 목숨의 값이 얼마인지 계산해 주기를 바라오!"
"목… 목숨의 값?"
설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백무엽의 목소리가 지극히 냉소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소. 나는… 내 생명 값을 알고 싶고, 인문이 나의 목숨을 얼마로 쳐주는가 알고 싶소. 내게 가르쳐 준 무공의 값은 얼마이고, 내게 준 병장기며 영약의 값은 또 얼마인지 알고 싶소!"
"왜?"
"훗훗… 그 이유는 나눠 갚기보다 한몫에 갚고 싶기 때문이오."
백무엽은 힐끔 고개를 쳐들었다.
그의 눈빛은 정말 아름다웠다. 설향의 영혼이 거부하지 못할 정도로…….
설향의 혼을 뇌쇄(惱殺)시킨 아름다운 눈빛, 그 눈빛이 지금은 설향의 가슴을 비릿하게 만들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것이야 어쩔 수 없다고 하겠으나, 어쩌면 이 자는… 나의 외모마저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설향은 지금 상당한 충격을 받고 있었다.
그녀는 백무엽에 대해 다 알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과거는 지워 버렸고, 현재는 손바닥 위에 놓고 조종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막상 백무엽에 대해 생각하자면, 갖고 있는 것이 단 한 가지도 없었다.
눈빛 하나마저, 어투 하나마저 설향은 지배하고 있지 못했다.
설향은 그제야 그것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목숨의 값!
그 말의 깊은 뜻은 인문 사람들만이 알 것이다.
설향은 주먹을 쥐었다 펴다가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 대답을 하기 이전, 몇 가지 묻겠다! 약간은… 사적(私的)인 질문이다."
설향은 천천히 두건에 손을 댔다.
머리카락을 바짝 위로 졸라매고 있던 검은 두건은 그녀의 섬섬옥수에 의해 와락 벗겨졌다.
그리고 눈이 오는 소리가 나며, 삼단같이 검은 머리가 흐트러져 내렸다.
검은 숲이 무너져 내리듯이, 설향의 머리카락은 선정적으로 흘러내려 얼굴의 반을 가렸다.
오똑한 콧날과 요염하게 발달된 붉은 입술, 애원을 하는 듯한 눈빛.
가히 사내들이 꿈에서 찾고자 하는 그런 얼굴이었다.
"무화령, 내 얼굴을 봐라!"
"보, 보고 있소!"
백무엽은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그의 동공에는 설향의 얼굴이 도장 찍히듯 찍혔다.
아무리 봐도 싫증나지 않는 얼굴이다. 기녀의 복장을 하고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신비하고 성결한 아름다움을 설향은 강하게 퍼붓고 있었다.
남녀(男女)가 방에 있고, 창 밖에는 대설(大雪)이다.
눈이 두 사람만 남겨 두고 천지를 다 묻어 버린 듯했다.
"내 얼굴이… 어떠냐?"
설향의 질문은 몹시 묘했다.
그리고 백무엽의 대답은 꽤나 직선적이었다.
"그 얼굴은 매우 아름답소!"
백무엽은 시선을 설향의 얼굴에 고정시키고 있었다.
"어느 정도로 아름다우냐?"
"내가 만난 모든 여인 중에서 가장 아름답소!"
"정말이냐?"
"훗훗…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도록 교육받았소. 바로 문주에 의해서!"
백무엽은 싱긋 웃었다. 그리고 그 웃음은 또 한 번 설향을 뇌쇄시켰다.
'아아, 저 말을 이런 상황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상황에서 듣고 싶다.'
설향의 가슴 속에서는 파란이 일고 있었다.
몸을 쥐고 있는 쪽은 설향인데,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쪽은 설향이 아니라 백무엽인 듯했다.
백무엽은 설향에게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하고 있으나, 설향은 그를 오래 전부터 가슴 속에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인문의 다른 사람도 다 알고 있는 일이었다.
"내 얼굴을 보면 무슨 생각이 나느냐?"
"……!"
백무엽은 대답을 곧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이든 좋으니, 대답해라!"
"글, 글쎄……!"
"호호… 말해 봐라, 무화령!"
"사실 말하자면… 취(取)하고 싶소."
백무엽의 입가가 조금 일그러졌다.
그리고 설향의 볼은 일순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나, 나를 품고 싶단 말이냐?"
"지금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며칠 전까지 그랬다는 말이오!"
"며, 며칠 전이라니?"
설향은 약간 실망하는 듯했다.
"나는 기녀 설향이 안쓰럽다 여겼었소. 그래서 언제고 무정태공에게 말해 설향을 자유롭게 해 주라고 부탁할 예정이었소. 그렇지만 설향의 진면목을 안 이상, 그 마음은 사라졌소. 지금은 조금 다른 생각이오!"
"무슨 생각이냐?"
"……!"
"말해 봐라!"
"굳이 말하자면… 죽이고 싶소!"
백무엽의 눈빛이 일순, 번갯불처럼 사나워졌다.
"죽이고 싶다니……?"
설향의 얼굴이 흑자색으로 물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 역시 평범한 여인이 아니었다. 일순 흥분되었던 숨결과 표정은 찰나적으로 안정을 되찾았다.
"호호… 역시 솔직해 좋다. 너는 보기 드문 장부(丈夫)다!"
"고맙소! 칭찬이란 본시 기분 좋은 것이외다!"
"호호… 좋아, 무화령! 솔직히 대답해 주어서! 그리고 너는 여기서 나가기 이전, 모든 것을 새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런 이상, 과거가 어떠했느냐 하는 것은 상관이 없다!"
"……!"
"그리고… 네가 물은 것에 대한 대답은 이러하다!"
설향의 눈에서는 샛별의 빛이 쏟아져 나왔다.
그 빛은 그윽하다기보다는 정렬적이었다. 기녀 시절의 설향과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달랐다.
설향은 그가 귀빈으로 맞이했던 모든 강호고수보다도 뛰어난 여인이었다. 적어도 그녀는 허점이 없는 여인이었다.
"네 목숨 값은 굉장히 비싸다!"
"얼마요?"
"그것은 인문의 값 중 육 할이다!"
"흠……!"
"그리고 며칠 간의 특별수련으로 인해 그 값은 더 늘어났다. 너는 인문의 팔 할이 되었다!"
"팔, 팔 할!"
"그렇다. 너는 인문의 십 중 팔(十中八)의 힘을 한몸에 갖고 있다. 그러하기에 너는 인문의 한(恨)을 위해 열 중 여덟을 네 손으로 해야 한다! 그리고… 너는 이미 많은 것을 해결했다!"
"그렇다면 남은 부채는 얼마요?"
"글쎄, 따지기 나름일 것이나… 네가 굳이 바란다면 정확하게 일러 주겠다."
"……!"
"이 겨울 중 남은 겨울을 모두 팔라, 내게!"
"으음, 그… 그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새로운 나날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때가 되어도 나는 네가 우리와 선(線)이 끊어지지 않으리라 자신한다! 왜냐하면 너는 선택된 남자이기 때문에!"
"선택?"
"그… 그것은 말하기 야릇한 것이다. 그러나 인문을 위해 너는 선택되어야만 했고, 나는 너를 선택해야만 했다. 중대한 이유로 인해서."
설향은 몸을 움츠리며 말을 이었다.
"그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인문의 최고절기인 대인법(大忍法)을 터득케 하기 위함이다! 성공을 위해서!"
설향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무공을 전수한다는 말을 하는데, 말꼬리를 떨다니……!
대인법(大忍法)!
그것은 절전되었다고 알려진 강호비전(江湖秘傳)이었다.
가히 천 년(年), 중원인법(中原忍法)은 천하무림계에서 자취를 감췄었다.
은둔술(隱遁術)과 기환술(奇幻術), 장안법(藏眼法)과는 거리가 먼 대인법(大忍法)!
그것에 비교되는 수법은 동영병가(東瀛兵家)의 천인류(天刃流)와 대막비전(大漠秘傳) 환법(幻法)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문의 뿌리였단 말인가?
"대인법(大忍法)은 천 년 전 인마지존(忍魔至尊)에 의해 창안되었다. 그는 천 인(人)의 힘을 일으킬 수 있는 대인법을 창안해 한 권의 마경(魔經)으로 꾸몄었다."
"……!"
"그리고 그것은 지하(地下)에 묻혔고… 지금으로부터 사십여 년 전, 한 인물에 의해 발견되어 세상에 나타났다. 그분은 바로 인문을 세우신 분이고, 동시에 나와 지극히 밀접한 분이시다!"
설향의 눈빛이 유난히도 야릇했다. 가히 애처롭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녀의 눈빛은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흘러 나오는 목소리는 여전히 비수(匕首)처럼 날카로웠다.
"그분은 나의 친부이시고, 과거 백도계의 종주(宗主)이셨던 십화지존(十花至尊)이시다!"
십화지존!
그는 바로 천하제일궁(天下第一宮) 소리를 들었던 십화궁(十花宮)의 궁주이고, 구파일방 위에 군림했던 사람이다.
그는 삼십일대(三十一代) 혈화삼에게 모든 것을 잃었다.
그가 잃지 않은 것은 단 세 가지.
두 다리와 한 팔과 한 눈이 떨어져 나간 병든 몸뚱이 하나,
태산(泰山)보다 크고 창해(滄海)보다 깊은 한(恨)이 하나,
마혼십가가 찾으려 했던 대인경(大忍經) 하나.
그는 세 가지만 갖고 피신했다.
그리고 인문(忍門)을 세우느라 헌신을 했고, 그러는 가운데 한 명의 기녀(妓女)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설혼(雪魂)이었던가?
눈빛이 너무도 고왔던 그녀의 이름은?
그녀는 바로 지금의 설향을 낳은 여인이었다.
설향! 그녀의 피는 백도에서 가장 신성하다고 할 수가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녀가 지금 어둠의 딸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잔월광(殘月光)처럼 싸늘했다.
"그분은 천하의 모든 한을 풀 길은 하나, 대인경을 익히는 사람이 출현하는 길뿐이라 하시며 이 글을 내게 주시었다."
설향은 손을 가죽옷 속에 넣었다.
그녀는 젖가리개 속에서 네 번 접은 황지(黃紙) 한 장을 꺼냈다.
그녀의 체취가 듬뿍 묻어 있는 누런 종이 위에는 피로 쓴 글이 적혀 있었다.
<대인경은 절대적인 마공이다. 절대적인 근골에 절대적인 내공, 절대적인 단련을 거치지 않은 사람이라면 시전할 수도 없다.
그리고 대인법의 터득에 가장 중요한 것은 장한(長恨)이다. 위의 네 가지를 겸비한다는 것은 천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경우이다. 더욱이 대인법은 남자만이 익힐 수 있고, 그 자는 아직 동정이어야 하며, 본시 태양천골(太陽天骨)로 태어나야만 한다.
태양천골은 백 년에 하나 날까 말까 한 희귀한 체질이다. 태양천골로 태어나면 어떠한 무공이든 쉽게 익힐 수가 있다.
향아(香兒), 아비는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어 간다. 뜻이란 바로 한(恨)이다. 나는 네가 한을 풀어 주기 바란다.
천하 도처에 산재한 마혼십가(魔魂十家), 특히 절대마가(絶代魔家)를 처단하기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한 남자를 찾아야 한다.
향야(香兒), 남자를 찾기 위해 너는 기녀가 되어야 한다.
기녀가 되면 온갖 계층의 사내를 두루 접할 수 있으리라.
그 가운데 한 남자를 택하거라. 조심할 것은 절대 처녀성을 잃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너는 태양지골(太陽地骨)을 잃어서는 아니 되며, 언제고 태양천골 사내를 만나 너의 모든 것을 바쳐 그를 천하제일의 고수로 키워야만 하니까!
향아(香兒), 마혼십가의 뿌리는 너무도 깊다. 게다가 삼십일대 혈화 삼대에 이르러 마혼십가는 대일통이 되었다. 그는 마혼십가가 근 구백 년에 걸쳐 모은 보검(寶劍), 마경(魔經), 영약(靈藥)을 하나로 모았다. 그들은 절대자(絶代者)를 길러 낼 것이다.
그 이름은 마풍(魔風).
그는 나타나자마자 천하를 마로 뒤덮을 것이다. 모든 일은 그가 나타나기 전에 이루어져야만 한다. 마풍은 십대마류(十大魔流)를 정복할 것이고, 변황(邊荒)마저 정복할 것이며, 천하의 의풍을 없애 버릴 테니까.
마풍이 아직 안 나타난 이유는 절대마가와 나머지 구대마가 사이의 알력 때문이다. 그러나 머지않아 마의 세력은 알력 가운데 뭉쳐질 것이고, 그 때가 되면 하늘이라도 그들을 막지 못한다. 아니, 어쩌면 그들은 이미 막지 못할 세력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냥 꺾일 수는 없다. 그래서 네게 모든 것을 전하고 부탁하는 것이다. 천하를 위해 너의 모든 것을 바쳐라! 그것이야말로 너를 이대인문주(二代忍門主)로 삼는 뜻이고…….>
구구절절 한이 담긴 글이었다.
십화지존(十花至尊), 그는 실지(失地)를 회복하지 못하고 죽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인문제십좌를 창설한 사람이고, 백무엽을 제외한 여덟 명의 절세고수를 인문에 끌어들인 사람이었다. 그가 없었더라면 천하백도계는 그나마 존재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기억하라! 마가(魔家) 무리는 뿌리를 백도(白道)에도 깊이 박아 두고 있음을! 그리고 불확실한 정보에 따른 것이기는 하나, 그들의 그 뿌리는 자금성(紫禁城)까지 이어졌고 구파일방에도 깊숙이 박혀 있다.
그들은 변황(邊荒)마저 노린다. 변황의 일통마저…….
그들의 천년마고(千年魔庫)에는 그들이 천 년 간 천하에서 약탈한 전리품들이 가득 들어 있다. 그것이 한 사람에게 전해지는 날, 천하는 마풍을 만나게 될 것이다!>
십화지존은 마가의 뿌리를 자르기 위해 노력하다가 죽었다.
어디 그뿐이랴?
인문이 세워지고 나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
강호인들은 인문이 얼마나 많은 희생 가운데 오늘의 뿌리를 내렸는지 상상하지도 못할 것이다.
피(血)로, 뜨거운 혼으로 이룩된 방파가 바로 인문이었다.
인문이야말로 당세에 있어 마지막 정의라고 할 수 있었다.
백도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정법회(正法會)에도 마가의 손은 닿아 있다.
인문이 고독해지는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중요한 것은 지피지기(知彼知己)이다.
절대 문하 사람을 함부로 들이지 마라!
아버지를 도왔던 노기인들의 협조 아래 인문을 보호하라. 보호하지 못하면 너는 문주 자리를 잃어 마땅할 것이다. 그리고 당분간은 백도와도 손을 끊어라! 백도에는 믿을 자가 거의 없으니까!
백도에는 무수한 마혼첩(魔魂諜)이 있고, 어떤 방파는 그 자체가 바로 마가(魔家)이다. 힘이 달린다고 자칫 협조를 얻으려 하다가는 도리어 당하고 만다. 강호계의 정보에 대해서는 당분간 두 곳을 이용하라.
첫째 장소는 철부방(鐵斧幇). 그 곳의 주인은 바로 전대 개방주였던 풍진취개(風塵醉蓋)이시다. 그분은 인문의 연자령(蓮子令)이시기도 하다. 그분은 네게 많은 것을 알려 주실 것이다.
둘째 장소는 기루(妓樓)…….>
ꠑ황지 위에는 모든 것이 적혀 있었다.
그 안에는 인문의 창건비사에서부터 시작해 인문의 성장과정이 모두 적혀 있었다.
그리고 맨 끝에는 대인경(大忍經)이 적혀 있었다.
<인법제일결(忍法第一訣) 무흔(無痕),
인법제이결(忍法第二訣) 화허유영(化虛遊影),
인법제삼결(忍法第三訣) 비잠(秘潛),
인법제사결(忍法第四訣) 천둔지은(天遁地隱),
인법제오결(忍法第五訣) 인(忍).>
밤의 공포와 어둠의 전율과 사(死)의 미학 가운데에서 탄생된 다섯 가지의 절기, 그것은 모두 내공구결이었다.
그것을 모두 터득한다면 신체의 몇 가지 변화가 일어난다.
첫째, 전신의 기경팔맥(奇經八脈) 경락구조가 달라진다.
혈도(穴道)의 위치가 자유자재로 바뀌어져 어떠한 경우라도 혈도를 점혈당하지 않는다.
둘째, 오결을 모두 익히면 오관(五官)의 감각이 다섯 배로 늘어난다.
천이천안통(天耳天眼通)을 쓰지 않더라도 모든 것을 확연히 느끼게 되며, 상대의 살기(殺氣)를 가장 정확하게 느낄 수가 있게 된다. 그것은 금수(禽獸)의 능력을 인간의 몸에 심는다는 뜻과 같다.
셋째, 인법을 터득하면 사지(四肢)가 잘리고 수급(首級)이 잘리지 않는 한 살게 된다. 팔다리가 잘려져도 불가사리처럼 되살아나는 것이 바로 인마경의 전수자이다.
삶과 죽음의 한계를 초월하는 대인법!
그것이야말로 십화궁이 피에 젖은 진짜 이유였다.
삼십일대 혈화삼, 그는 후대를 위해 많은 것을 한 마왕(魔王)이었다. 그는 자기 다음 대에 이르러 중원은 물론이거니와 변황마저 거꾸러뜨릴 작정을 하고, 일단 천하의 모든 마경을 얻고자 했다.
무수한 희생을 치르면서까지 십화궁을 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는 십화지존을 놓치고 나서 하늘을 보고 외쳤다고 한다.
-하늘(天)! 아직도 마가(魔家)에 시련을 주는가? 이미 구백 년을 기다렸거늘… 하늘! 아아, 대인법을 우리가 얻었다면 그대마저 우리에게 처단되었을 것이다. 무참하게! 아아, 십화지존을 놓쳤기에 나의 후대에서 절대자가 태어나는 것은 백 년(年) 늦어지게 될 것이다.
절대마가주이자 전마도의 대총사(大總師)마저 꿈에 그리던 마경. 그것이 지금 백무엽의 눈 안에 들어오고 있었다.
한데, 백무엽의 눈빛은 아주 담담하기만 했다. 그는 욕(欲)이라는 것을 갖고 있지 않은 듯했다.
내공구결을 봐도 그의 눈빛에는 한 점 흐트러짐이 없다. 그저 담담하고 차분한 눈길일 뿐이다.
"좋군, 조금 어렵기는 하나!"
그가 중얼거릴 때 그가 놀라워하고 경탄하기를 기대하고 있던 설향은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아아, 놀라지도 않다니……!'
그녀는 고개를 가볍게 휘저었다. 그녀의 일생을 통해 이처럼 놀라기는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바로 눈 속에서 죽어 가는 백무엽을 구했던 때였다.
그 날, 유난히도 눈이 많이 오던 날이었다.
마치 지금처럼 산야(山野)는 눈에 감춰졌고, 들리는 것은 바람 소리뿐이었다. 그리고 백무엽은 눈 속에서 설향의 눈에 띄었었다. 과거(過去)를 갖고 있지 못한 백치(白痴)로…….
백무엽은 과거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달라진 것이라면 조금 더 아름답다는 것뿐이었다.
여자보다도 아름다운 사내 백무엽, 그는 설향을 힐끔 보며 입술을 떼었다.
"문주가 내게 바라는 것은 뭐요?"
"그, 그것은……!"
설향의 볼이 새빨개졌다.
잘 익은 과일마냥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양 볼.
설향의 용모는 그 빛깔로 인해 더욱더 고혹(蠱惑)스러워 보였다.
아아, 화광(火光)이 스며들 정도로 투명한 설백의 피부여.
쥐기만 하면 녹아 버릴 듯 작고 보드라운 섬섬옥수, 잘끈 졸라매어져 애처롭기까지 한 세류요(細柳腰), 그리고 몸매에 비해 풍만한 둔부며, 팽팽한 능선을 만드는 농염한 허벅지, 전신에서 풍기는 방향(芳香)…….
그러한 용모 앞에서 담담할 수 있을 사람은 백무엽뿐이었다.
기실, 설향을 두고 욕정을 일으키지 않는 사람은 백무엽뿐일 것이다.
설향은 천부적인 우물(尤物)이었다. 그리고 그 미모 덕에 오늘의 인문이 있다 할 수 있었다.
설향은 미혼술(迷魂術)의 달인이었다. 그녀는 마가와 선이 닿은 인물을 슬쩍 기루로 불러들인 다음, 온갖 방법을 다해 유혹했다. 그리고 그의 입을 통해 마가의 비밀을 알아내곤 했었다.
지금 인문이 갖고 있는 두 가지 병기, 그것은 백무엽의 손과 설향의 몸이라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