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다 죽는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생명과의 만남도 중요하지만 생명과 이별하면서 죽음과의 만남도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내가 죽게 되면 후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 할 것인지 아니면 어떻게 무슨 말들을 할 것인지 한번쯤은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기에 생명과의 만남보다 죽음과의 만남이 그래서 더욱 중요한 것이다 .
공자는 어느 날 사랑하는 제자가 죽음이란 무엇이냐고 묻자 삶을 모두 살아보지 않은 내가 아직 삶도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데 어찌하여 죽음이 무엇인지 알겠는가 하고 반문하였다 그렇다 우리가 어떻게 생(生)과 사(死)를 알 수 있겠는가 엽불견화(葉不見花) 화불견엽(花不見葉)이라 자연의 질서 속에서 삶과 죽음의 공간이 있듯 인간은 삶을 통하여 죽음의 실체를 보지 못하고 또한 죽음을 통하여 삶의 실체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죽음이 눈앞에 다가온 정만수에게 여보게 임종이 가까워지는데 좀 어떠한가 하고 친구가 슬픈 표정으로 비장하게 묻자 글쎄 처음 죽는 것이라서 아직은 모르겠네. 죽어봐야 알 것 같다며 태연하게 말을 한다.
생과 사는 같기에 모른다는 이야기인지는 모르나 아무튼 마하마트 간디도 매일 잠자리에 들었을 때 나는 죽는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잠에서 깨어나면 나는 다시 태어난다고 했으며 버나드쇼도 인생이란 눈물과 미소사이를 왕복하는 시계추와 같다고 했다 이것 역시 생과사를 동일시하는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과사를 동일시한다 해도 엄연하게 삶과 죽음은 구별이 되며 아름다운 삶이 있듯 죽음이라는 것도 아름다움 죽음이 있다 인생은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으니 ~지나간 인생 돌이 킬 수 없다~는 유행가처럼 우리의 삶도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현재가 다르며 내일이 다르다 그러기에 죽음이라는 것도 죽어보지 못하여 모르는 것이요 사는 것도 아직은 살아가고 있기에 사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면 아름다운 죽음이란 무엇인가 어찌하여 죽는 것도 아름다움이 있을까 병들어 고생고생하면서 죽으나 불우의 사고를 당하여 비참한 모습으로 죽으나 수명을 다하여 편안한 마음으로 죽게 되나 죽음이라는 것은 모두가 마찬가지일진데 무엇이 아름답단 말인가 어떠한 죽음이 아름답고 어떠한 죽음이 불행한지는 죽은 자도 모르고 산자도 모르나 다만 아름답다 불행하다는 것은 남아있는 가족과 세상 사람들의 몫이다.
가수로 대성하여 7~80년대 많은 사랑을 받던 여가수 장 0의 갑작스런 자살이나 현대그룹의 정00씨의 자살. 전(前)부산의 북구 청장을 끝으로 37년간 공직생활을 했던 최00씨. 전(前)대법원의 수장인 유00씨. 2007년인가 자살했던 20대 여배우 오00씨 가수 유00씨 2년 전에 노무현 전 대통령 그리고 2008년에 자살한 배우 최00과 올해 또 자살한 동생 최00씨등 수많은 자살들!
이러한 죽음은 아무리 이유가 분명하다 하더라도 아름다움 죽음일수가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고통 없이 살다가 편안하게 임종을 맞이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병환으로 모진 고통 속에서 지내다가 숨이 멈추는 시간까지 가족들을 애태우다 가는 사람이 있다 또한 어떤 사람은 명줄이 고래 힘줄같이 질겨 살아생전 갖은 고생은 다하면서도 병치레 한번 없이 잘도 버티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으며 .
반대로 어떤 사람은 병치레가 힘들어 죽고 싶어도 그렇게 내 마음대로 되지를 않아 모진 고통을 겪다가 죽는 사람도 있다. 그러기에 죽는 복도 타고 태어나야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한다는데 아무튼 죽는 형태도 다양하다.
어느 날 갑자기 조용히 눈을 감는 참으로 복이 많은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불행하게도 어쩌다 사고를 당하여 도매금으로 참사를 당하는 일. 남의 죽음을 보다 못하여 타인의 목숨을 구하고 대신 죽음을 당하는 일. 천제지변으로 갑자기 죽음을 당하는 일. 등.등 참으로 수없이 많은 이유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인생사다.
그래서 옛말에 인무백세인(人無百歲人) 왕작천년계(枉作千年計)라 사람은 백년도 살지 못하면서 부질없이 천 년의 계획을 세운다는 이야기로 사람이 짧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루지도 못하는 계획을 세워 헛된 걱정과 고통 속에서 살지 말라는 것이다 주어진 삶 열심히 살면 되는 것이지 상상(想想) 속에서나 생각이 되는 것을 현실로 만들려면 모두가 헛되고 부질없는 일이다는 것이다.
예로부터 우리는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이 불만인지 걸핏하면 한 많은 인생살이라고 한탄하지만 어찌하여 인생살이가 한 많은 세상이란 말인가 . 근심과 두려움은 애욕과 탐욕에서 생기며 애욕과 탐욕이 있으므로 방종하고 그렇게 함으로 화를 자초한다는 성현들의 말씀들이 우리의 생활에 대한 성찰의 기회가 될 수만 있으면 모든 만사를 근심걱정하며 살아야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사람이 태어나 인생의 고단한 짐을 내려놓고 편안한 극락으로 들어가는 것과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천국으로 향하는 것이다 .
즉 인간은 누군가에게 자신의 생명을 맡겼다가 되찾아 가는 것을 죽음이라 표현한다.
그러기에 사람이란 누구를 막론하고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현자(賢者)든 우자(愚者)든 남자건 여자건 꼭 가야할 곳 그곳이 바로 죽음이라는 것이다 다. 그래서 생자필멸 회자정리(生者必滅 會者定離)란 말이 생겨났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 죽게 되는 것이고 헤어진 사람은 반드시 만나고 만나는 사람 또한 반드시 헤어진다는 것이다 한나라 양웅(揚雄)이 만물의 법칙에 대하여 시작이 있으므로 끝이 있고 끝이 있음은 시작이 있다는 유시유종(有始有終)이란 말과 같은 이야기로 어찌 보면 윤회(輪廻)다.
세상의 모든 만물의 자연 이치는 돌고 돌아 태어나면 죽게 되고 죽음으로서 다음세대가 태어나는 것인데 그럼에도 사람들은 죽음에 직면하게 되면 모질게도 죽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그러나 인간의 생명이라는 것이 그렇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기에 결국은 죽고 마는 것이 우리네 인생사다.
사람의 죽음이란 자살이나 타살 아니면 갑작스런 사고로 죽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개가 노환이나 병이 들어 죽는 것인데 어차피 누구든 한번은 꼭 가야할 길 먼저 감과 늦게 감의 차이일 뿐인데도 말기(末期) 암 같은 불치의 병에 걸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불가능한 삶인데도 남아있는 가족들의 의식은 그렇지가 않다.
어떻게 하면 살려 보겠다는 혹시나 하는 마음 그리고 떠나보내는 안타까움과 슬픔 때문에 조금이라도 더 생을 연장 시켜주는 것만이 효(孝)요 망자에 대한 도리(道理)인 것으로 생각을 하기에 그렇고 환자 역시 좀 더 살아 보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결국은 살지도 못하고 재산은 재산대로 탕진하고 죽음은 죽음대로 찾아온다는 것이다.
하기야 요즘은 안락사라는 화두가 고개를 들고 있으니 지켜볼 문제다. 종교적 측면에서는 죽음도 하나에 거룩한 의식이기에 아름답고 겸허하게 기쁨으로 맞이하라고 현자들은 말한다. 죽는 것을 불교에서는 열반(입적) 그리고 기독교에서는 영면(하느님에 부름)이라 하는데 불치의 병인 말기 암 환자 같은 경우에는 본인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을 위해서 경건하게 열반이나 영면을 맞이해야지 어떻게 하면 더 살아 보려고 한간 힘을 쓰지만 어차피 가는 인생 본인의 고통을 감해주고 남은 가족에게 무거운 짐을 덜어주자는 것이 바로 안락사의 취지다.
인간이 죽고 사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다 원래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자기가 태어난 본래의 고향(本故鄕)(흙)을 잠시 떠나 머물고 있는 것뿐이며 필히 고향으로 되돌아 가야할 곳이며 거부하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생전에 우리의 육신은 그저 대자연에서 잠깐 빌려 사용하는 것뿐이다.
그러기에 차용기간이 지나면 자연으로 돌려주어야만 한다 이렇게 차용해 쓰는 인생 돌려 줄때가 되면 미련 없이 돌려주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빌려주는 자연의 입장에서는 되돌려 받는 기간이 그렇게도 길지만 차용한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세월의 빠름이란 한없이 짧게만 느껴지기에 인생의 허무를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인생의 허무함을 붓다는 우다나바가에 이렇게 적어놓고 있다 아침에는 많은 사람들이 눈에 띄었지만 저녁에는 어떤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또한 저녁에는 많은 사람이 눈에 띄지만 아침이면 어떤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공자도 냇가에 흐르는 시냇물을 바라보며 덧없는 인생의 흐름을 비유하면서 " 냇가의 탄식(川上之歎)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탄식한다. 흘러가는 냇물도 앞뒤를 다투지 않으며 유유히 흐르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인생사와 같은가 밤낮으로 쉬는 일이 없구나. 사람이 사는 것이 이렇게 냇가의 물 흐름 같이 소리 없이 쉼 없이 흐르는구나.
그렇다 바라보는 사람도 없는데 시냇물은 이렇게 밤낮 없이 쉼없이 흐르며 한번 흐르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자연의 무한한 행위 앞에서 사람도 물 흐름처럼 세월이 흘러 지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인생! 그저 흘러가는 물과 같이 아쉬움만 쌓인다는 이야기다.
역시 도연명도 세월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고 인생의 무상(無常)함을 노래한다. 원기 왕성한 나이는 다시 오지 않고 /하루에 두 번 새벽은 오지 않는다 때에 따라 열심히 노력하라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편안한 죽음이란 저녁에 잠이 들어 고통 없이 떠나는 즉 와석종신(臥席終身)이 제일 아름다운 죽음이다 그러나 태어나는 것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듯 죽음이라는 것도 내 마음대로 죽지 못하는 것이 우리들의 인생사다.
그러기에 죽는 것도 사람마다 여러 형태로서 어떤 사람은 노인 학교에 가서 재미있게 강의 듣다가 눈을 감아 주위에서 복 받은 운명이라는 소리를 듣는가 하면 어떤 이는 고스톱 치다가 광 팔아 선불 받고 잠시 쉬는 사이에 운명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등산 갔다가 중턱에서 쉬는 동안 눈을 감고 어떤 이는 저녁 잘 먹고 아침에 일어나지 않아 밤새 안녕 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남녀관계 도중에 복상사하는 경우도 더러는 있다.
옛날 봉암사를 창건한 지증 대사(헌강왕이 지선(智詵)이란 이름을 하사함)는 저녁공양을 마치고 제자들과 도란도란 얘기하던 중 가부좌를 튼 채 열반에(死)들고.
평생을 침묵으로 지낸 진묵대사는 제자들을 불러놓고 "애들아 내가 곧 떠날 터이니 물어 볼 것 있으면 빨리 다 물어나 보아라" 하자 제자 한사람이 스님! 스님께서 열반하신 후에는 우리는 어떤 스님의 법통(法統)을 이을까요. 하며 묻자 한참 뜸을 들인 다음"비록 세간의 명리에 대한 집착에서 초탈하지 못한 스님이라 할지라도 휴정(休靜)노장의 문하로 하라하고 지극히 평화로운 모습으로 입적하고.
만공 스님은 저녁 공양 후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면서 만공! 자네는 나와 함께 70여 년을 동고동락했지 그동안 수고했네! 라고 말을 마친 후 열반하고.
서산대사는 운명직전 자기 초상화를 가지고 와서 80년 전에는 네가 나였는데 80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 하고 죽음을 맞이했는데.
이러한 죽음들은 모두가 죽음을 예견하한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한 이야기지만 이러한 것들이 저절로 깨달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부단한 노력과 고통의 감내 그리고 뼈를 깍는 수행의 결정체이며 몸과 마음의 정진이 해탈의 경지에 이를 때 즉 깨달음의 경지에 이를 때에 가능하며 여기에 도달하기 위하여는 마음을 통한 자기반성과 끝임 없는 수행뿐이다.
새들도 날을 때는 앞뒤를 서로 양보하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도 먼저 바람을 맞이하지 않고 순서대로 맞는데 사람들은 어찌하여 냇가에 흐르는 심오한 냇물의 뜻을 깨달지 못 하는가 어차피 인생은 문틈으로 백마가 달려가는 것을 보는 것과 같이 일순간에 지나지 않는 것을!
하루하루 지나는 우리들의 생활은 마치 포수가 당기는 화살과 같이 번개처럼 지나가고 또한 독수리가 먹이를 낚아채는 것과 같이 빠르니 언제 인생의 슬픔과 즐거운 것은 맛을 볼 수 가 있으리! 살아가는 동안 예수님. 부처님 찾으며 수행과 본분을 찾아 향기로운 인생을 살다가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한다면 그 향기가 만년을 가련만 사람이란 그렇게 향기롭지가 않아 오래가지를 않는다 했다.
~~유방백세 유취만년(流芳百世 流臭萬年)이라~
향기로운 이름은 백년을 가나 더러운 이름은 만년을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