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장 의상
한민족의 모든 예절과 관습 중에서 그 어떤 것도 옷보다 국민들 자신의 특색으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는 것은 신기하고 흥미로운 사실이다. 단순히 의상이라 함은 그것이 주는 느낌과 거리가 멀다. 관습과 의상, 습관과 풍습은 우리가 지금 둘로 구별한 것이 얼마 전 공통의 뿌리에서 생겨났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떤 주제의 특정 분과의 중요성에 대한 언급은 이런 식의 통속적인 명칭의 채택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이러한 채택은 우리 역사에서 그로부터 수세기가 지난 지금, 의상 예술이 전에 없던 주의와 관심을 끌고, 그리고 어쩌면 다시는 실현되지 않을 수 있는 때에 나타났다. 세계적으로 무위가 정점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다.
의상 예술이 번창하는데 있어서, 부유함은 기회만큼 필요한 요소가 아니다. 아마도 이것이 우리가 의상 예술이 그리고 그것과 관련된 모든 것이 조선에서는 특히 사치스럽다는 것을 알게 된 이유다. 처음에는 우리가 그것을 탓하고 싶어 할만한, 그리고 실제로 오늘날 우리와 함께 그것을 지속 시키고 있는 원인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에서는 그러하다. 여성이 결코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곳, 즉 그녀 자신의 인격으로서는 예술을 배양할 수도 없고, 이성에 대한 동경에서 예술이 자라도록 장려할 수도 없는 곳에서는, 의상 예술은 시들해질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회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누가 허영에서 비롯된 열정으로 자신을 꾸미는 고통을 감수하겠는가? 특별한 시간이 따로 있을 때, 특별히 간헐적인 노력을 기울일 수 있다. 하지만 누가 최선의 노력을 다한 정점에 계속해서 남아 있을까? 요컨대, 발전시키는데 필요한 열정을 가지고 직업과 외양이라는 두 가지에 누가 주의를 동시에 기울일 수 있을까?
하지만, 조선에서처럼 사치스러운 것은 전제주의에 의해 절제된 사치다. 이것이 그것의 다양성을 최소한으로 줄인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제주의는 과실을 할당하고 분배한다. 사치규제법은 사소한 것까지 모든 것을 아우르고 있다. 조선인이 입을 수 있는 것은, 아니 꼭 입어야 하는 것은, 불문율이 아니라 구속력 있는 법령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 주어진 시간에, 주어진 인간에게 있어서 특정한 좁은 한계 안에서 변화가 가능할 뿐이다.
하지만 예식에 따라 그는 영원히 옷을 갈아입고 있다. 나이, 직위, 직업에 알맞게 옷을 다양하게 입어야 한다. 그가 처음으로 배내옷에 둘러싸인 때부터 흙더미 밑에 묻힐 때까지, 그는 쉬지 않고 새로운 옷을 입는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끝없는 주기적인 변화는 이러한 세속적인 변화 위에서 되풀이된다. 애도만이, 짧지만 한 가지 옷만 입어도 되는 기간이다. 모든 사안은 나라의 법률에서 매우 중요한 항목이다. 모든 의식의 한 갈래다.
이러한 예절의 질문에 귀를 기울이려면 국가의 재능의 6분의 1의 능력이 필요하다. 정부의 6개 부서 중하나인 예조의 의무는 의례를 규정하고, 조정하고, 통제하는 것이다. 조선인의 마음에는 전쟁이나 재정과 똑같이 중요하고, 이와 관련된 업무량도 훨씬 더 많다. 장사에 대한 혐오가 싸움에 대한 혐오보다 큰 사람들에게 왜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가?
이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이므로 복장이 왕조에 따라 변한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집권 세력의 몰락은 새로운 방식을 설정한 것과 같다. 그러나 그것은 원인이라기보다는 기회이며, 다소 먼 외국 상황과 연결된 사슬의 결과이다.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잠시 동안우리 눈을 중국으로 돌려야 한다.
그들의 관습의 명백한 영속성으로부터, 중국인을 항상 승리하는 정복자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중국인들은 수세기 동안 주기적으로 침략 - 연속적으로 성공한 - 의 먹이가 될 운명이었던 민족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아주 잦게 한 번씩, 야만인들의 정복의 물결은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밀물처럼 중국 땅을 휩쓸고 뒤덮었다. 파도는 이곳에서는 옛 표지물들을 지워버리고 다른 곳에서는 퇴적물을 남겼다.
전체적으로 옛 문명의 견고한 건축물들을 휩쓸었지만, 그들의 방문을 증명하기 위해 광범위한 파괴를 남기지 않고 지나갔다. 물질적 정복이 끝나자마자 전세가 역전되었고, 피정복자들은 정신적으로 정복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일부 개종일 뿐이었다. 정복자들은 어느 정도 그들 자신의 관행에 너무 집착하여 그것들을 포기할 수 없었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적어도 그들의 의상에 매달렸다.
반쯤 문명화된 사람들에게는 의상의 변화가 어느 정도 주술적인 방법으로 정체성의 상실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그 결과, 그들은 원주민들에게 그들의 의상의 일부를 강요했고, 모든 결과 중에서 이상한 것은, 원주민이 그들에게 첫 번째 사례에서, 노예의 표시로 부과된 것에 대해 자랑스러워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오늘날 중국인의 영광은 강제로 시행된 부산물들 중 원래 가장 굴욕적인 변발에 있다.
보통 중국을 제압하기 위한 준비 단계로 침략자들은 일시적으로 조선을 삼켜버리고 매년 조공을 바치도록 강요했는데, 직접적이든 내부의 불화의 결과이든, 조선에서 의상의 변화로 이어졌다.
마지막 복식의 도래는 약 500년 전으로 명왕조 수립의 결과였다. 우리가 원하면, 옷 색깔에서 빛깔의 영광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빛깔은 티끌 하나 없이 희고 파르스름한 빛깔을 띠며 맑은 날의 그림자 빛깔로 우리가 포착하는 하늘에서 반사되는 빛깔과 같다.
우리는 이제 발전에 관한 가장 흥미로운 일화, 즉 동아시아에서 여성이 의상에 영향을 미친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었다. 여성의 부재는 다른 곳에서의 존재감처럼 강력한 힘이 되어왔다. 내 생각에, 우리는 아시아 사상의 다음과 같은 특이한 특징이 간접적으로 여성 때문이라는 것을 인정해야한다.
극동 사람들이 옷을 보는 방식은 다소 특이하다. 우리가 암묵적으로 추정하건대, 정신과 육체의 연결만한 묘사적 인 직유를 생각할 수 없다. 우리는 평범한 삶에서는 상대방이 없는 존재라고 거의 생각하지 않고, 적어도 그 안에 있는 사람의 감각적 인상으로 상대방을 간주한다. 의상에 있어서도 그렇다. 그들의 눈에는 의상이 인간에 대한 그들의 관념의 필수적인 부분을 형성한다. 비슷한 방법으로 우리 자신도 옷에 감명 받았고, 우리 동료들의, 본 그대로의 관례적인 견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현실을 이상에 담는 데 있어 우리와 다르다.
이것은 그림에서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아마도 극동 회화의 가장 주목할 만한특징 중하나는 인물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일 것이다. 유럽인들 사이에서 항상 많은 관심을 받아온 그 분야에는 완전한 공백이 있다. 즉 나체 연구다. 그들에게 예술적으로 인간은 의복적인 의미에서 한 묶음의 습관에 불과하다. 그 관습은우리가 말하는 겸손의 과잉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아마도 겸손함을, 관습적으로 허가되는 노출을 제외하고, 개인적으로든 마음속으로든 우리 자신 모두를 대중적 시선으로부터 가리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관습성”을 ”필요성"으로 대체하면, 그것이 극동적 정의다. 관습이 아닌 편의가 예의의 시금석이다. 그들은 경우에 따라서는 그것을 요구하는 자연 상태에서 보여 지는 것에 대해 작은 거부감도 가지고 있지 않다.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것도 그들을 보여주기 목적으로 그들의 사람의 어떤 부분도 나타내도록 유도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옷을 입거나 옷을 벗는 것은 무관심의 문제다. 그것은 단지 일시적인 편안함의 문제일 뿐이다. 그들이 육체를 무시하는 이유는 이것 말고도 있다. 단지 그들은 결코 육체를 아름답다고 여기도록 이끌려온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여성의 낮은 지위에 기인한다. 여성은 미의 대상이라는 그 불쌍한 경탄의 수준까지 도달할 만큼 높이 평가된 적이 없다. 자연에 지참금으로 쌓아올린 게 여성의 타고난 권리다.
옷에 대한 연구는 그것이 감싸는 것을 희생함으로써 그 덕을 보았고, 감정의 표현에서도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다.
조선인이 몸을 감싸는 일련의 의복에 대한 자세한 설명에 앞서, 모든 사람에게 공통되는 한 가지 특징이 있는데, 바로 우리가 감탄할만한 점, 즉 매무새 방식이다. 단추와 단추 구멍은 그 문제에 거의 또는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 통옷에 어울리는 색상의 옷고름이나 적당한 조합으로 옷을 조여 맨다. 오른쪽 옷섶을 안쪽으로 해서 옷을 몸에 두르면, 각 옷섶 상부 모서리에 매단 옷고름과 옷섶에 부착된 해당 옷고름을 묶는다. 물론 안쪽을 먼저 묶고, 다른 한 쪽은 오른쪽 가슴 위에 나비 모양으로 묶는다. 지구 반대편에서도 우리가 오히려 반대로 묶는 것을 기대하기 쉬우나, 남자들이 우리 자신이 매는 순서대로 예복을 맨다는 것을 관찰해 볼 필요가 있다.
엄밀하게 말해서, 정통적인 옷은 쓰는 것 또는 신는 것과 달리 다양성이 적고 형태가 단순하다. 네 가지 이상의 종류를 구분할 필요는 없다. 이것은 짧은 조끼, 헐렁한 바지, 길게 흐르는 통옷, 그리고 일종의 어깨 옷이다.
처음 두 가지는 살에 닿고, 속옷을 대신한다. 통옷은 날씨와 착용자의 등급에 따라하나 또는 여러 개일 수 있다. 지위가 높을수록 더 많은 통옷을 입는다. 따라서 중요성에 따른 불편함은 소재의 얇음에 의해 상쇄된다. 같은 원리로 위아래 옷의 수를 줄이다보면 기약 분수처럼 두 개의 속옷이 된다.
외국인의 눈에는 이것들이 다른 옷들과 마찬가지로 겉옷들이다. "많게 혹은 적게 입은”이라는 표현은 조선인에게는 문자 그대로 엄격히 적용됨을 알 수 있다.
다음 관점은 색깔이다. 이런 면에서 조선의 의상은 확연히 아름답다. 이미 말했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흰색 또는 파란 기운이 도는 옷을 입는다. 그렇게 섬세한 빛깔을 고집하는 것은 어쩌면 불행한 일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것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 이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고요한 아침의 땅의 옅은 파란 빛은 세상의 흙과 접촉하면 곧 사라져 평범한 날의 회색으로 변한다.
상류층, 즉 관리들은 회색을 제외한 천하의 모든 색을 입는다. 빨강, 초록, 파랑, 그리고 이들의 조합은 가장 대담하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그들의 사람을 치장한다. 선명한 다홍색은 선명한 파랑색 속통 옷 위에 걸쳐, 군데군데 고운 보라색으로 조화를 이룬다. 종종 옷의 소매와 몸통이 가장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유일한 규칙은 어떤 것이든 다른 것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 같다. 조선인들은 특히 색을 좋아하는 민족이다.
병사들의 복장은 대부분 짙은 파란색이며, 군데군데는 진홍색으로 옷고름이 효과적으로 제 역할을 한다. 가슴 위에는 용맹을 상징하는 글자가 수 놓여 있다. 이 선동적인 글자는 의심의 여지없이, 재판을 한다면 그들이 누구이고 어떤 인간인지 상기시켜준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훌륭하지만 조용해 보이는 부류이므로 적절한 군사적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위험하다는 딱지가 붙어야 한다.
통옷에 구멍을 내는 것은 이상한 게 아니라 관례적이다. 허리가 겨드랑이와 일직선상에 있는 것으로 가정한다. 이것은 남성미란 관점으로 보기도 의심스럽지만, 여성의 경우에는 그 효과가 끔찍하고, 심지어 무관심한 일본인들도 익살맞게 언급하게 만든다.
여성 옷은 매우 짧은 조끼와 헐렁한 속바지, 그리고 바지 위에는 속치마로 이루어져 있어 서양의 기사를 연상시킨다. 속치마는 넉넉한 허리띠가 있으며, 몸 위에 최대한 높이 씌워져 있지만 해부학적 구조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이 없어, 때로는 윗옷과 2-3인치 정도 벌어져, 그 결과, 가슴 부분이 아슬아슬하게 드러난다. 이런 불행한 노출은 의도적인 것이 아니며, 우물에서 물을 긷는 여 인들에게서만 보인다.
남성의 경우, 절반은 흘러내린 의복을 구속하기 위한 목적으로 허 리 윗부분에, 반은 장식용 휘장으로 몸을 둘러 헐렁한 앞부분으로 묶고 두 발 아래로 내려가는 화려한 색의 끈을 사용한다. 그렇지 않으면 옷은 통짜라서 선을 가지런히 할 만한 것이 없다. 소매는 폭이 2피트 정도로 넉넉하며, 팔을 따라가다 끝부분 폭은 절반으로 줄여 꿰맨다. 이렇게 하면 가장 우수한 주머니로 변환된다. 팔을 들거나 휘두르더라도 소매의 일부가 항상 손아래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구색과 휴대품의 부피로 미루어 볼 때, 그것은 자연스러운 여행용 가방으로 여겨질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상인들은 그들의 상품을 운반하고, 학자들은 그들의 책과 필기구들을 운반하며, 관리들은 그들의 부채를 휴대한다. 담배만은 그런 식으로 휴대할 수 없다. 그것은 다른 물건들 중에서 그것을 찾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 반드시 한 번에 잡을 수 있는 곳에 있어야하기 때문에, 허리춤에 매달린 주머니를 사용한다. 이 주머니는 가장어린 시절부터 착용하며, 성인이 될 때쯤 겉껍질로 한 번 더 싼다. 어린이는 요람에서 나올 때부터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을 잘 닦아 미리 준비하는 예방조치다. 남녀 모두 흡연은 보편적이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남자나 여자는 사회에 사과할 필요가 있다.
통옷의 두 겹은 날카로운 각도로 만나는 대신 목둘레를 잘라 타원형으로 접합한다. 명주에는 안쪽 면에는 흰색 띠가 부착되어 있다. 이것은 유럽식 깃을 나타낸다. 여기서도, 우리가 느끼는 것과 같은 필요성, 즉 전시될 그림을 흰색 테두리 안에서 고립 시키는 것과 같은 필요성을 지켜보는 것은 흥미롭다.
면으로 만든 깃은 - 한편으로는 얼굴과, 다른 한편으로는 명주를 돋보이게 한다 - 옷감의 소재에 대해 한마디 하게 한다.
인간의 기억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전설이 뒤섞여 있던 이른 시기부터 누에는 이미 가축화된 상태로 존재했다. "동쪽”이라는 글자는 한자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자연의 오래된 간단한 초안을 뚜렷하게 추적할 수 있는 것으로 나뭇가지 사이로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나무는 뽕나무를 상징한다고 한다. 이 사상이 일본의 옛 전설적 이름과 연관되면서, 처음에는 신화적으로 그리고 점차 신화가 현실화되면서, 섬들은 이웃 대륙 주민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본토에서 온 이주자들이 뽕나무를 발견하였든, 아니면 뽕나무가 많은 곳으로 이주하였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그 나라를 부상이라고 불렀고, "뽕나무”를 의미하기 위해 그 글자를 썼고, 그 나무는 너무나 큰 축복으로 증명되었고, 그 나무는 신격화되어 그들에게 "신의 나무가 되었다.
사실, 극동 사람들에게 주는 자연의 선물 중 가장 큰 은혜는 이 비단이다. 우리도 무의식적으로 경의를 표한다. 우리는 비단과 함께 그 유서 깊은 이름을 채택했고, 우리 단어 "실크”는 우리 선조들이 중국어 소리를 낼 수 있는 발음에 가장 가깝다.
비단은 상류층의 복장의 재료였고, 삼베의 일종인 베는 서민들에게 제공되었다. 서민들에게 추천되는 색깔은 분명 항상 사용 가능한 진흙 색깔이었음에 틀림없다.
우리 시대의 약 2세기 무렵에 중화제국은 새로운 물질의 선물을 받았다. 그들이 처음목화를 알게 된 것은, 다소 변방이지만 우리 자신의 조상들 손에서였을 것이다. 그들은 목화와 함께 많이 끌려갔을 것 같다. 그 당시 중국 황제는 매우 기뻐하여 그 옷으로 만든 옷을 입고 국가 행사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들은 이웃인 조선에게 씨앗을 주는 것조차 거부하고 철저히 자기들에게만 지키려고 노력함으로써 강한 욕심을 드러냈으며, 이러한 방식으로 반도로 유입되는 것을 막으려고 노력했다. 그것을 얻으려는 시도는 헛수고였다. 마침내, 북경에서 3일간 머물렀던 연례대사 중 한 명이 겨우 씨앗 몇 개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 중 일부는 붓 뚜껑 속에 숨겼고, 그 다음 성공을 두 배로 늘리기 위해 왼쪽 다리 살갗 아래에 조금 더 넣었다. 그는 검사를 피하는데 성공했고, 이렇게 특이한 방법으로 면화가 조선에 들어왔다. 그것은 비단옷과 베옷 사이에서 모두가 좋아하는 중간치로 밝혀졌고, 곧 많은 사람들이 입는 옷의 재료가 되었다.
모직은 조선반도 어디에도 양이 없기 때문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따뜻함을 고려한다면, 비록 부피가 다소 크긴 하지만, 솜이 똑같이 좋은 역할을 한다.
이와 관련해 조금의 관심만 있어도 모직물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비단의 다양한 형태에도 불구하고, 즉 생사, 완제 비단, 물결무늬 비단 등이 많이 사용됨에도 불구하고, 모직물 형태의 비단은 결코 없기 때문에, 조선 옷에 고급스러움이 별로 없다.
위에서 베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것을 다시 언급한다. 본질적인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 지금은 그 용도를 위해서다. 그것은 애도의 재료다. 소재가 그러하듯이 그 명분을 지키는데 특이하게도, 풍습이 같은 중국을 여행한 사람들이 이제는 널리 퍼진 오해로 번진 이야기를 국외로 퍼뜨리기 위해서는 이 둘의 조화가 그리 인상적이지 않았어야 했다는 것은 다소 놀랍다. 우리가 천제국에 대해 알게 된 첫 번째 사실 중하나는 검정이 아니라 하양이 비애의 증표라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관습보다도 자연이 허락한 것을 반영하는 관습을 뒤집는 것에 대해 당연히 당황할 수 밖에 없다. 인위적인 연관성의 문제를 넘어, 하양은 기쁨과, 까망은 슬픔과 연관된다. 역설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그런 뒤집기는 없다. 애도하는 사람들의 옷 색깔을 흰색이 라고 하는 것은, 특히 무색은 모든 색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것처럼, 단어의 오용이다.
조선에서는 특히 이 정의가 계층을 식별하는 데 불가능한 수단이 되고있다. 내게 알려 준 말에 현혹되어, 그리고 조선인들 자신이 나에게 반복한 같은 설명에 현혹되어, 처음 며칠 동안은 열심히 상주를 찾았지만 헛수고였다. 모두가 흰색 옷을 입고 있었고, 그러한 정의에 합당한사람을 보는 것은 그야말로 터무니없었다. 내가 나중에 알게 되었듯이, 내가 찾던 사람들은 극소수였고, 사실은 그것도 예의상 그렇게 부를 뿐이다. 사실은, 그 물건들은 천연 탈색되지 않은 색깔, 마른 풀의 중성색이다. 내가 상상했던, 성경에 나오는 참회복과 똑같았다. 그것은 거칠고, 불쌍하고, 슬퍼 보인다.
상복의 질감과 색조는 이 세상의 기쁨, 아름다움을 차단한다. 당분간, 그리고 법에 의해 오랫동안, 사람은 삶과 공유점이 없다. 삶은 그에게 아름다움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멀리서도 쉽게 구별할 수 있다면, 그 옷의 복식으로 보아 부적절하게 접근될 위험은 피할 수 있고, 이것은 상복을 입은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상당히 격리시킨다. 모자는 꽤 크고 꼭지에서 사방으로 휘어져 그 안의 사람 얼굴을 가린다.
상주는 모자 외에 침울한 옷감으로 만든 얼굴가리개를 들고 다닌다. 이것은 폭이 넓고 손잡이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붐비는 거리를 거닐면서도 그는 다른 사람과 같이 살지 않는 것처럼 혼자였다. 그는 더 고독하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우울한 자기성찰로부터 그를 산만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그는 사는 것이 무엇인지 거의 알지 못한다.
이러한 얼굴가리개는, 보이는 그대로 추운 겨울날에 일부러 의도한 바는 아닐지라도 감탄할 정도로 사용되며, 의복의 다른 부분 못지않게 복장의 중요한 부분이다. 그것들은 상주에게 독특한 것이 아니다. 단지 재료가 독특할 뿐이다. 그것은 관리 계층의 특권이다. 관리를 태운 남여가 앞뒤로 나란히 정렬된 네 명의 남자에 의해 서둘러 지나갈 때, 마치 매우 불편하거나 극도로 수줍은 듯 목을 길게 빼고 앉은 고위 관리가 유일하게 들고 있는 것은 얼굴 아랫부분 앞의 얼굴가리개 손잡이 중 하나다. 그것을 지탱하는 노동은 품위 있는 은둔의 사치에 대한 값진 대가임에 틀림없다. 즉시 사용하지 않을 때는 두개의 막대기를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 사이에 끼운다. 이 행동처럼 하찮은 일에도 일의 옳고 그른 방법이 있는데, 다음 설화에서 알 수 있듯이, 때때로 중요한 일이 될 수 있다. 이 이야기는 하층민인 한 남자가 좋은 옷을 입고 상류층 사람 흉내를 내려고 노력한 이야기다.
그는 대장장이였고, 시골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그가 원하는 만큼 인정받을 때쯤 - 조선도 그렇지만 이 세상 다른 곳에서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 강에 도착했다. 현재, 조선에서 개울을 건너는 수단은 나룻배다. 오직 도시에서만 다리가 있다. 나룻배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그는 얼굴가리개를 내려 손에 쥐었다. 뱃사공은 그의 멋진 옷차림과 가식적인 태도를 통해 그를 단번에 알아챘다. 그의 얼굴 생김새가 아니라, 그가 얼굴가리개를 들고 있는 모습에서 말이다. 그는 대장장이였고, 일상 젓가락 일에 종사한 터라 큰 젓가락을 다루는 데 익숙했다. 그의 손가락은 그것들의 정교함을 기억하고 있었고, 그의 가르침을 받은 적 이 없는 마음은 예절을 몰랐고, 습관은 제 2의 천성인지라, 그는 아무 생각 없이 젓가락 잡는 식으로 얼굴가리개를 잡고 있는 것을 들켰다.
조선에서 신는 것은 낮은 신발, 실내화 형태와 딱딱한 장화, 그리고 두툼한 솜버선으로 대표된다. 신발은 가죽으로 만들어졌으며, 소재 준비 과정에서 유감스럽게도 연화 과정이 부족했음을 시사할 정도로 매우 질 버선기다. 발끝을 제외하고 위는 넓게 터져 있는데, 발끝은 약간 뾰족하고 둥글게 위쪽으로 말려 올라가, 뱃머리를 연상시킨다. 발가락의 이러한 곡면과 가죽의 유연성 부족 때문에 양말을 신고 신발을 신을 때 처음에는 매우 괴롭다.
아무리 철저히 길을 들여도 신발은 결코 편안해지지 않는다. 여기 솜버선이 잘 어울린다. 이것은 추위와 신발의 딱딱함을 완화하는 완충제 역할을 한다. 하얀 버선과 위가 넓은 신발의 조합은 겉보기에는 여름이 연상되지만, 겨울의 혹독한 날씨에는 우리 자신 것보다 훨씬 더 선호될 것 같다. 특히, 2피트 반의 입방체가 전부인 가마 안에서는 발을 움직이지 않아 경련이 날 정도인데, 이런 경우 정말로 그렇다.
이 신발은 중국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이며, 사실 그렇듯이 현재 중세 왕국에서 착용하고 있는 신발은초기의 것이고, 덜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꾸밈이 적고 단단 하지만 견고하지 못하다. 그 색은 검은색이지만, 때때로 다른 색깔도 보이며, 변덕스럽게 일시적으로 유행을 탄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파란색이 선호되었다.
바닥은 일직선으로 되어 있으며 두께는 4분의 1인치 정도이며 길이 전체에 걸쳐 균일하다. 그러므로 그것은 굽이 없다. 반면에, 현대 중국 신발은 전체에 굽이 있다고 할 만큼, 신발 바닥이 두껍다.
특히 신발 바닥은 현재 중국식과 다르다. 조선 신발은 징이 박힌 반면 중국인은 완벽하게 매끄럽다. 그 기원을 다룬 어떤 설화가 이 세련되지 않은 솜씨를 추앙하게 한다. 이 이야기는 중국의 많은 반도 침략 중 하나이며, 때는 겨울이다. 침략군이 80만 명이나 되었으니, 그들의 평안강 도강을 저지하기 위해 모여든 적어도 5천 명의 조선 군인들이 공포에 질린 눈으로는 그렇게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군은 얼음 위로 진군했다.- 중국군은 강을 건너려고 했고, 조선군은 더 멀리 있는 둑 근처로 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그들을 격퇴하려 했다.
중국군은 늘 그랬듯이 신발이 매끄럽지만, 조선군은 얼음길 여행에 익숙했던 것처럼 징이 박힌 특이한 종류의 신발을 신었는데, 마치 얼음이 마른 땅인 것처럼 뛰어다녔다. 불쌍한 중국군인들은 미끄러지고, 비틀거리고 넘어졌고, 이는 조선인들에게 쉬운 먹잇감으로 그들은 수천 명의 중국 군인들을 도륙했다. 승리의 결과로 행운의 신발은 거의 숭배 대상이 되었다. 이후 모든 신발은 이런 형식으로 제작되어야 했으며, 그 때부터 현재까지 국민 신발에는 징이 박혀 있다. 신발은 문 밖에서만 신으니, 거친 발바닥은 집안의 마루턱과 매끈매끈한 마루와 잘 어울린다.
옷차림은 많을수록 더 좋다는 조선의 기본원칙에 상당히 부합하게, 관화(官靴)는 왕의 접견실 대신 혹독한 날씨에 대해 발밑을 완벽하게 보호하기 위해 추천되지만, 일반적인 복장에서도 보이며, 평상복의 경우, 통옷과 신발사이의 흰 자락을 숨기는데 효과적이다.
다음, 신발과 정반대인 노동자 계급의 짚신이 있다. 짚신은 위에서 언급한 신발과 정반대다. 즉, 열린 부분은 닫히고, 닫힌 부분은 열려 있다. 그것은 신발에 대한 일종의 풍자다. 그것을 사용하는 계층은 겉보기 보다는 실용성 때문에 신는다.
조선 의상은 그 목적에 잘 적응되어 있다. 겨울에는 헐렁하고 두껍고, 여름에는 헐렁하고 얇다. 더위와 추위에 관한 기후가 우리 기후와 매우 흡사하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옷이 한 계절에는 특이하게 따뜻해야 하고 다른 계절에는 특이하게 통풍이 되어야 하는 이유의 일부를 알 수 있다. 따뜻함의 나머지 절반은 사람들의 천재성에 있다. 동양 사상에서 서두름이란 없다. 유일하게 가치 있는 헌신은 공부다. 그것은 분주함이 아니라 명상을 필요로 한다. 품위 있는 행동은 그들의 이상적인 행동이다.
그들은 운동을 잘 모른다. 운동이란 서양 세계에서 한편으로 열정적인 추구 대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골칫거리 의무다. 걷기나 말타기는 일부 즉각적인 목적에 필요하기 때문에 수행된다. 옛날엔 귀족들 사이에서 활쏘기가 유행했는데, 지금은 이마저도 사라졌다. 그러므로 그들의 목적은, 보여주기와는 별도로 의복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다. 그들의 체계와 우리 자신의 체계를 개인적으로 경험해본 후에, 얻을 수 있는 편안함을 비교해 보면 이것을 알 수 있다고 나는 단언한다.
부채에 대한 몇 마디로 이 간단한 개요를 마무리해야겠다. 극동인을 실용적으로 구별하는 미묘한 차별은 아마도 아닐지라도, 독자는 분명 한 가지 이상의 부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고도로 전문화된 어휘가 부족한 것은 비교적 부채가 없는 나라에서 태어나서 비롯되는 불행이다. 현재 극동지역의 경우, 매우 다르다. 흔히 볼 수 있는 일상 부채에는 크게 두 가지로 접히는 부채와 접히지 않는 부채가 있다. 즉 논리학의 ”a”와 ”not a”와 같이, 극동의 보편적이고 근본적인 분류 방법이다. 접히지 않는 것은 조선어로 "꼬리부채”라 하는데, 막대나 꼬리 부속물을 손잡이로 쓰는 형식이다.
다른 것들은 간단히 "접이식 부채”라고 불린다. 일본과 조선에는 각각 고유한 이름이 있는데, 잘 몰라서 실수로 하나를 달라고 하면 다른 하나를 얻지 못할 것이다. 부채 종류 외에도, 남자용, 여자용, 그리고 아이용으로 구분한다. 접이식 부채는 사용하지 않을 때 접을 수 있는 편의성이 크기 때문에 꼬리부채보다 더 많이 찾는다. 접은 다음, 그냥 소매 속으로 사라진다. 부채 선물은 극동 사람들이 서로에게 끊임없이 만들어주는 작은 선물들 중 가장 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