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학당은 논산시 노성면 병사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52호로 지정되어있다...종학당은 윤순거가 파평 윤시 종중과
문중의 자녀들을 교육하기 위하여 1643년[인조 21년]에 건립한것이다
이때 제정된 종약을 새긴 현판이 현재 내부에 걸려있다.현재의 건물은 화재로 소실된것을
1970년 윤선거의 5대손인 윤정규가 재건축 한으로 알려져있다.정면에 3칸...측면에 2칸의
건물로 중앙에 1칸은 대청을 겸한 통마루이고 양쪽칸은 온돌방으로 꾸며져있다.
지붕의 형태는 팔작지붕을 올렸다.부속건물로서는 학문을 토론하고 시문을 짓던 정수루.와
숙사가 있다.이 종학당은 서원이나 서당에서 볼 수 없던 교육 과정과 교육목표인 학칙을
정하여 실학적인 교육을 실시했던 교육장으로서 1910년 일제시대 이전까지 운영되었으나
그후 폐쇄되었다 당시의 학사건물은 근래에 다시 지었고 지난 1985년에 파평윤씨 종중에서
종학 활동을 추진하여 1988년에는 새로운 종학강당을 설립하였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144BA474FDF5BE105)
종학원은 4개동인 종학당,정수루,백록당,보인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수루는
학문을 토론하고 시문을 짓던 장소로 이용하였고,
보인당은 현재 문중의 교육 장소로 활용하고 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12078474FDF5BE22B)
윤순거(尹舜擧)는 자는 노직(魯直)이고,호는 동토(童土)이며, 대사간 윤황(尹煌)과
당대의 학자로서 이름을 날린 성혼(成渾)의 딸 창녕성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성문준(成文濬)에게서 학문을, 강항(姜沆)에게서 시를, 김장생(金長生)에게서 예를 배웠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82499474FDF5BE228)
1633년(인조 1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 아버지 윤황이 척화를 주장하다가 귀양가고, 작은 아버지 윤전이
강화도에서 순절하자 고향에 내려와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43A98474FDF5BE30F)
입구에서 걸어올라가 왼쪽으로 보이는 보인당의 모습이다.
내부의 모습은 볼수가 없었고
현재 이 보인당은 종인들의 훈강장소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13376474FDF5BE316)
![](https://t1.daumcdn.net/cfile/blog/143DD6474FDF5BE40C)
정수루는 종학당에서 서북쪽으로 50m 떨어진 곳에 있으며, 정면 중앙에는 현판 ‘淨水樓’가,
오른쪽과 왼쪽에는 ‘香遠益淸’‘吾家白鹿’이 각각 걸려 있다. 종학당과 비슷한 시기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한다.
서재 마루와 누각이 연결되어 있으며, 학문을 토론하고 시문을 짓던 장소로 이용하였다.
정수루 남쪽에 강당이 있는데, 파평윤씨 자녀들이 해마다 여름에 예절교육을 받는 곳이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83665474FDF5BE411)
![](https://t1.daumcdn.net/cfile/blog/194C864F4FDF5BE50D)
이 누각(樓閣)의 정면에 정수루(淨水樓)라는 현판이 걸려있고,
좌우로 향원익청(香遠益淸)과 오가백록(吾家白鹿)이라는 현판이 함께 걸려 있다.
건물은 "ㄱ" 자 형으로 전체 7칸인데 정면이 6칸이고,
측면 1칸은 이 건물 뒤에 있는 백록당(白鹿堂)의 뜰과 연결 되어있고 이곳이 정수루의 입구가 된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930024F4FDF5BE52D)
![](https://t1.daumcdn.net/cfile/blog/1544514F4FDF5BE617)
윤순거(尹舜擧)는 자는 노직(魯直)이고,호는 동토(童土)이며, 대사간 윤황(尹煌)과
당대의 학자로서 이름을 날린 성혼(成渾)의 딸 창녕성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성문준(成文濬)에게서 학문을, 강항(姜沆)에게서 시를, 김장생(金長生)에게서 예를 배웠다.
1633년(인조 1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 아버지 윤황이 척화를 주장하다가 귀양가고,
작은 아버지 윤전이 강화도에서 순절하자 고향에 내려와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645년 대군사부가 되어 벼슬길에 오르고 이어 상의원주부,형조좌랑,안음현감,의령현감등을 지냈으며
의령현감으로 재직할 때에는 이황(李滉) 과 남효온(南孝溫)의 사우를 건립하기도 하였다.
1655년(효종 6)에 종부시주부.공조정랑을 거쳐 금구현령으로 나갔다.
1660년(효종 1)에는 영월군수로 재직하면서 단종과 관련된 모든 기록을 수집하여
노릉지(魯陵誌)를 편찬함으로써 조선의 유교적 사회질서인
군신관계를 전제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정신을 기리고자 하였으며,
단종의 사묘인 지덕암(旨德庵)을 중건하기도 하였다.
1665년에는 사헌부 장령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그 뒤 사직서령,세자익위사익위, 군자감정,예빈시정,상의원정 등을 지냈다.
[이상 명재고택 자료실 자료]
첫댓글 논산여행에서는 빼놓을수 없는 곳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