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일흔을 맞은 어느 시인이
'아침 묵상'이라는 짧은 코너를 통해
이런 말을 해줍니다.
‘꽃들은 짧게 피어나고 곧 사라지지만
봄이 오는 것을 알려주고 희망도 선사한다.
내가 봄꽃들과 눈 맞추며 터득한 것이다
무릇 배움을 얻는다는 것은 생명을 더 깊이
이해하고 자기 자신과 더 평화롭게 지내는 걸
의미한다.
우리는 이 배움을 통해 삶을 완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삶을 받아들일 줄
알게 된다. 일흔 번의 봄을 맞이하고 배웅하는
동안 이런 삶의 이치를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것을 발견하는 것은 나만의 여행이었다’
삶이 깊어지고 익어진다는 것은
비단 세월의 도움만으로 이뤄지는 건 아닙니다.
시인이 썼듯 무릇 배움을 얻는다는 것은
생명을 더 깊이 이해하고 사랑을 통해
자기 자신과 더불어 마주하는 모든 것과
평화롭게 지내는 법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내 삶을 완벽하게 만들려고 하기 보다는
성찰과 묵상을 늘 가까이 함으로써,
있는 그대로의 삶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는 바른 눈,
세상을 이루는 법과 이치에 대한 바른 견해인
정견(正見), 그것이 사람이 사는 동안 찾아가야
하는 지혜의 빛을 향한 첫 내디딤이기도 합니다.
일흔 번의 봄을 맞이하고 보내는 동안
이러한 삶의 이치를 알려주는 사람이 없어
스스로의 여행을 통해 발견해야 했노라고
그 시인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진리에 대한 바른 가르침을 주는 이 하나 없는
와중에 그만한 깨침이라도 스스로 얻기까지
지나왔을 삶의 굽이진 여정이 오죽 아리었을지
어슴푸레 느껴봅니다.
그나마 공부하는 종교인들, 수행자들, 철학자들이
사실은 다 그러한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진리이신 신을 만나 더없이 크신
가르침과 지혜로써 놓아주신 길 덕분에 단숨에
험로를 뛰어넘게 된 우리의 복이 얼마나
한량없음인지 다시금 머리를 숙이고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공부하는 이의 눈으로 보면
만상의 채움과 비움이,
사물의 들고 남이,
산야의 나고 짐이 곧 세상사의 이치로서
공부 아닌 게 없다 하는데
알면서도 못하고, 하면서도 모르고..
제 마음 하나 그렇게 제대로 건사 못하는
사람들이 온갖 세상을 탓하고 자연을
우습게 대합니다.
제 어리석음이 바로 보일 때 비로소
다른 것도 바르게 볼 수 있는 눈이
생기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