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맹아 옥계도정공의 절의(絶義)를 숭모하는 논산 조정서원을 찾다
2015-12-02 오후 10:50:42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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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논산시 가야곡면 등길 129(조정리 산6)에는 논산시 향토문화유적 제23호로 지정된 조정서원(釣亭書院)이 위치하고 있다. 조정서원(원장 李德來)은 노성, 연산, 은진향교 유림들이 뜻을 모아 농맹아(聾盲啞) 옥계도정(玉溪都正) 이현동(李賢童)을 주향으로 하고 월파(月波) 이항래(李恒來) 를 종향으로 배향하고 있다.
옥계도정공은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선위하는 과정을 보고 세상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은둔생활을 하였다. 월파 선생은 한일합병에 대한 치욕에 분노하여 은둔생활을 하였다. 이곳에 배향되신 두 분은 모두 은둔생활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옥계도정공은 당대의 거유 김숙자 선생에게 사사하고 점필재 김종직 선생과 도의로서 교우하였다. 그의 절의는 백이와 숙제의 절개에 비유되었고, 율곡 이이 선생도 그의 절개를 찬양하여 공경하고 흠모하였다. 매산 홍직필(洪直弼) 선생은 도정공은 행실을 닦아서 이름을 세웠다고 칭찬하였다. 월파 이항래 선생은 경(敬;성리학에서 수양의 최고 방법)과 성(誠;수양의 최고 덕목)을 위주로 하여 일을 처리함에 어긋남이 없었다.
조정서원의 건물 배치는 2015년도에 신축된 사우(祠宇)와 강당인 경모재(憬慕齋), 외삼문으로 구성되어 있고 사우 앞에는 조정서원비가 있다. 서원에서 약 200m 거리에 국내에서 가장 크다고 알려진 조정서원 안내 입석이 세워져 있다. 춘향은 음력 3월 25일, 추향은 음력 9월 25일에 거행한다. 조정서원은 서원이 세워진 곳의 지명을 따서 지었다 한다.
주향 이현동(李賢童)의 호는 농맹아(聾盲啞), 품계는 명선대부(明善大夫), 직함은 옥계도정(玉溪都正), 본관은 전주다. 고조는 조선조 태조대왕, 증조는 조선조 태조대왕 제3남인 익안대군 안양공(安襄公) 이방의(李芳毅), 조부는 대광보국숭록대부 익평부원군(大匡輔國崇祿大夫 益平府院君) 이석근(李石根)으로 세종조 때 청백리에 선록되었고, 아버지는 숭헌대부(崇憲大夫) 백파도정(白波都正) 이상(李常)이다. 어머니는 현부인 인동장씨다. 배위는 신부인 가평이씨다.
숨어서 살았기 때문에 생졸을 알 수가 없고 족보에 의하면 기일은 2월 12일로 되어 있다. 슬하에 4남 3녀를 두었다. 묘는 충남 논산시 벌곡면 조령리 후록에 있고, 재실 승무재(繩武齋)는 충남 문화재 자료 제396호이며, 재실에서 200m 거리에 신도비가 있다.
1455년 단종이 숙부 수양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자 도정공은 여러 차례 울면서 불가함을 간청했으나 결국 윤6월 11일 왕위를 선위했다. 단종이 수양에게 선위를 하고 상왕이 되자, 1456년 6월 단종대왕 복위 사건이 일어나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으로 불리는 집현전 학사 출신들이 사형당하고, 단종은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 청령포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다음해인 1457년 6월 금성대군이 유배지 경상도 순흥에서 단종대왕 복위운동을 계획하다가 발각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단종대왕은 목매어 자살하였다고 세조실록은 적고 있다.
단종의 복위 과정에서 세종대왕 제3대군 안평대군 이용(李瑢), 제6대군 금성대군 이유(李瑜), 제1서자 화의군 이영(李瓔), 제4서자 한남군 이어(李王於), 제8서자 영풍군 이전(李瑔), 중추원부사 이양(李穰;의안대군 이화의 손자) 등 6명의 종영(宗英)이 죽었고, 죽지 않은 사람은 오직 옥계도정공 뿐이다.
단종대왕이 승하했다는 소식을 들은 옥계도정공은 산에 들어가 통곡하고 북극성(北辰)을 바라보고 피눈물을 흘리면서 탄식하여 말하기를 "지금의 세상일은 귀가 있어도 차마 들을 수가 없고(聾), 눈이 있어도 감히 볼 수도 없고(盲), 입이 있어도 도저히 말을 할 수가 없도다(啞)"라 하고, 귀먹고 눈멀고 벙어리 병을 핑계 삼아 서울의 동문 밖에 퇴거하여 농맹아(聾盲啞)로 자호하고 농맹아 석자를 현판화하여, 문틀 위에 써서 붙이고 문을 닫아걸고 세상과 관계를 끊었다. 그러고부터 종신토록 북쪽을 향해 앉지 않고 자식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옛 단종대왕(舊居)의 신하이니 두 가지 마음을 품고서 벼슬하여 녹을 먹지 말라" 하였다.
세조는 등극 후 영특하고 절개가 있다는 소문이 자자하고 사림으로부터 존경받는 도정공을 요직에 기용하고자 사자(使者)를 여러 번 보냈지만 매번 거짓으로 앞을 보지 못하는 청맹과니 행동을 하여 본래 자신의 뜻과 절의를 지키다 한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세조는 도정공이 거짓으로 눈이 먼 장님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사자를 시켜 "화살촉으로 눈을 찌르는 행동을 취해 보라"”고 명하였다. 도정공께서는 이러한 시험이 언젠가는 꼭 있으리라 생각하고 사자가 가지고 온 진짜 화살촉이 눈앞으로 다가와도 청맹처럼 전혀 눈을 깜박이지 않았다 한다. 또 불에 담금질한 인두를 눈앞에 대었으나 "눈의 껌벅임이 없이 왜 이렇게 뜨겁지"만을 외쳐 위기를 모면했을 정도로 의지가 매우 강한 분이셨다.
만년(晩年)에 장인이 살던 충청도 연산으로 내려와 집의 이름을 “맹암(盲巖)”, 출입문의 이름을 “아곡(啞谷)”으로 지어 자정(自靖)을 하다가 고종명을 맞이했다.
숨어 살면서도 절의를 지키고 남은 생애를 생육신 격으로 마치려고 노력하였기 때문에 사림의 유생들과 여러 현자(賢者)들이 도정공의 충정과 절의를 공경하고 사모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한다. 조정서원에 주향으로 배향되고 1819년(己卯)에 논산 충곡서원에 종향으로 배향되었다.
종향 이항래(李恒來) 선생의 본관은 전주, 호는 월파(月波)다. 고조는 홍원(弘源), 증조는 춘배(春培), 조부는 동제(東濟)다. 아버지 경순(敬純)과 어머니 경주이씨 사이에서 1882년(고종 19년) 10월 충남 논산시 가야곡면 삼전리에서 태어나 일제 강점기인 1943년 1월 10일 62세를 일기로 이 세상을 하직하였다. 배위는 진주임씨로 정교(貞敎)의 따님이다. 슬하에 5남 2녀를 두었다.
국치를 당한 것에 분노하여 은둔생활을 하면서 서당을 세워 수십년간 후진 양성에 온 정성을 다했다. 인의예지(仁義禮智)와 오륜(五倫), 삼강(三綱)을 제일의 법문으로 삼았다. 묘는 충남 논산시 가야곡면 조정리 산6번지에 있고, 기적비와 비각정(碑閣庭)이 있다.
연산 이덕래 기자(전북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