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 속의 고사성어 -60
심통주작(心通酒酌)
[요약] (心: 마음 심. 通: 통할 통, 酒: 술 주. 酌: 따를 작)
마음이 서로 통하여 술잔을 주고받는다는 말로, 서로 뜻이 통하면 어떤 일도 함께 할 수 있다는 의미. 사돈(査頓)이라는 말이 유래 된 이야기라 함.
[문헌] 한국오천년야사(韓國五千年野史)
[내용] 고려 제16대 예종(睿宗. 재위1105~1122) 때의 윤관(尹瓘·1040∼1111년)은 고려의 문신이며 군인이다. 본관은 파평이고 자는 동현(同玄)이며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처음 시호는 문경(文敬)이었으나 뒤에 문숙으로 개시(改諡 : 시호를 고침)됐다. 파평 윤씨의 시조 윤신달(尹莘達)의 4대손으로 아버지 윤집형(尹執衡)은 검교소부소감을 지냈으며 외가는 신라의 왕족이었다. 숙종 때 2차 여진족 토벌 당시는 원수로 출정했으나 실패, 강화(講和)회담을 하고 되돌아왔다.
그 뒤 특수부대 별무반을 창설해 오연총과 함께 병력을 훈련시켰다. 1107년(예종 2년) 3차 토벌 때 대원수에 임명돼 별무반을 이끌고 여진 정벌군의 원수(元帥)가 돼 부원수 오연총(吳延寵)과 척준경·왕자지 등과 함께 17만 대군을 거느리고 여진족을 토벌한 뒤 북방에 9성을 쌓고 여진족이 재침략하자 이를 진압하고 1108년(예종 3년) 개선했다. 여진족을 북방으로 몰아내고 동북 9성을 공략했으며 북방을 방비하는 데 기여해 국가, 특히 국방에 큰 공로자였다.
부원수 오연총(吳延寵. 1055~1116)과는 전쟁에서 생사를 같이 할 만큼 마음을 주고받는 평생의 친구였다. 그래서 여진족을 토벌하고 돌아온 뒤에 두 사람은 자녀를 결혼 시켜 사돈 관계를 맺었고, 함께 대신의 지위에 올랐다. 관직에서 물러나 고령에 들어서는 작은 시내를 가운데 두고 인근에 살면서 종종 만나 전날에 고생하던 회포를 주고받았다.
어느 날, 윤관이 자기 집 술이 잘 익어 오연총과 한잔 나누고 싶어졌다. 그래서 하인에게 술을 지워 오연총을 방문하려고 가던 중 냇가에 당도했다. 그런데 갑자기 소나기가 내려 물이 불어 건너갈 수 없어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냇물 건너편을 보니, 오연총도 하인에게 무엇을 지워 가지고 오다가 윤관이 물가에 서 있는 것을 보고 큰소리로 물었다.
“대감, 어디를 가시는 중이오?”윤관이 대답했다.
“술이 잘 익어 대감과 한잔 나누려고 가지고 나섰는데 물이 많아서 이렇게 서 있는 중이오.”
오연총도 역시 잘 익은 술을 가지고 윤관을 방문하려던 뜻을 말했다. 그러자 피차에 그냥 돌아서기가 안타까워서 몇 마디 환담을 하다가, 오연총이 윤관에게 말했다.
“우리가 말로 정담을 나누기는 했지만 술을 한잔 나누지 못하는 것이 정말 유감이군요.”
이에 윤관이 웃으며 말했다.
“정히 그러시다면 이렇게 하십시다. 대감이 소생에게 한 잔 들라고 하면 소생이 가지고 온 술을 대감의 술로 알고 한 잔 마시고, 소생이 그같이 대감에게 권하면 대감께서도 같은 방법으로 한 잔 드시면 되지 않겠소?” 오연총도 그렇게 하면 되겠다고 찬동했다.
이에 두 사람이 나무를 베어낸 등걸((査.사)에 자리를 잡고 앉아 이편에서 ‘한 잔 드시오!’ 하고 술잔을 들고 머리를 숙이면(頓首.돈수) 저편에서 한 잔 마시고 ‘한 잔 드시오!’ 하고 머리를 숙이는 일을 반복하면서 밤이 깊도록 가져간 술을 다 마시고 돌아왔다.
이 일이 당시 고관대작들에게 풍류화병(風流話柄. 멋있는 이야깃거리)으로 알려져서 서로 자녀를 결혼 시키는 것을 ‘우리도 사돈(査頓: 나무 등걸에 앉아 깊이 생각하면서 머리를 숙임)을 해볼까’ 라는 말로 회자되기 시작했고, 그 말이 오늘날 사돈(査頓. 혼인한 두 집의 부모가 서로 부르는 말)이라는 말의 어원이 되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다보니 양가 집안의 여러 촌수를 좀 더 세분해서 지칭하는 용어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양가의 부모, 즉 같은 항렬끼리는 사돈, 또는 맞사돈, 아내 되는 사람은 안사돈, 사부인(査夫人), 사돈의 부모, 또는 형님은 사장(査丈), 사돈의 조부모는 노사장(老査丈), 노사부인(老査夫人)이라고 호칭하게 되었다. 이외에 사돈의 사촌형제 등의 친척은 통칭하여 곁사돈이라고 부르는 것이 통례이다.
**고사(故事)에 따르면 사돈(査頓)이란 말은 중국 동진(東晋)시대부터 쓰였다. 당시 국가 행정을 이끌어 가는 주(朱)씨와 진(陣)씨 양가(兩家)가 대대로 혼인을 맺어 왔다. 그 중 대표적인 가문(家門)으로 주사(朱査)와 진돈(陣頓) 양가를 꼽았다. 그래서 두 사람의 이름을 따서 사돈지간(査頓之間)이란 말이 후에 '사돈'이라는 보통명사로 굳어졌다. <이무영 엮음/예절바른 우리말 호칭 중에서>
**생성시기고려, 1231년(고종 18년)유래혼인한 두 집의 부모 혹은 항렬이 같은 사람끼리 서로 부르는 호칭이다. 만주어는 ‘사둔’, 몽골어는 ‘사든’이다. 이로 보아 고려 때부터 쓰여 온 말인 듯하다.따라서 몽골어가 들어온 최초 시기는 앞서 나온 설명대로 1231년(고종 18년)으로 잡는다. 사돈은 중국에서는 쓰지 않고 우리나라에서만 쓰이는 말이다.
(뜻도 모르고 자주 쓰는 우리말 어원 500가지)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와 기타자료를 토대로 재구성함)
윤관 [尹瓘, ?~1111] 고려시대의 명신·명장. 본관 파평(坡平). 자 동현(同玄). 시호 문숙(文肅).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습유(拾遺)·보궐(補闕)을 거쳐 1095년(숙종 즉위) 좌사낭중(佐司郞中)으로 요나라에 파견되어 숙종의 즉위를 알렸다. 추밀원지주사·어사대부·이부상서 등을 거쳐 1104년 추밀원사로서 동북면 행영병마도통사(東北面行營兵馬都統使)가 되어 여진을 정벌하다가 실패하였다.
그뒤 별무반(別武班)을 창설하여 군대를 양성, 1107년(예종 2) 여진 정벌군의 원수가 되어 부원수 오연총(吳延寵)과 17만 대군을 이끌고 동북계에 출진, 이때 함주(咸州)·영주(英州)·웅주(雄州)·복주(福州)·길주(吉州)·공험진(公?鎭)·숭녕(崇寧)·통태(通泰)·진양(眞陽)의 9성을 쌓아 침범하는 여진을 평정하고 이듬해 봄에 개선, 그 공으로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문하시중(門下侍中)·상서이부판사(尙書吏部判事)·군국중지사(軍國重知事)가 되었다. 그뒤 여진은 9성의 환부를 요청하며 강화를 요청해오자, 조정은 9성을 지키기 어렵다 하여 여진에게 돌려주었다. 정세가 바뀌자 여진정벌의 실패로 모함을 받아 벼슬을 빼앗기고 공신호마저 삭탈되었으나, 예종의 비호로 1110년 수태보(守太保)·문하시중(門下侍中)·병부판사(兵部判事)·상주국(上柱國)·감수국사(監修國史)가 되었다. 예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오연총 [吳延寵, 1055~1116] 고려시대의 문신. 본관 해주(海州). 시호 문양(文襄). 문과에 급제하고 1096년(숙종 1) 요(遼)나라의 천안절(天安節)에 축하사절로 다녀와서 1098년 기거랑(起居郞)에 이어 병부낭중(郞中)이 되었다. 1100년 상서(尙書) 왕하(王)와 함께 송제(宋帝)의 등극 축하사신으로 갔다가 희귀본 《태평어람(太平御覽)》을 구해 가지고 돌아와 왕에게 칭찬을 받고 특별히 중서사인(中書舍人)에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외직(外職)을 청하여 전주(全州)목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치적을 올렸다. 예종 초에 추밀원지사 ·어사대부 ·한림학사 ·승지를 역임하고 동북면병마사 겸 행영병마사로 나갔다가 검교사공 ·행부상서로 전임되었다. 1107년 부원수가 되어 윤관(尹瓘)과 함께 여진을 소탕하여 협모동 덕치원(協謀同德致遠)공신으로 상서좌복야 ·참지정사가 되었다.
그 후 웅주성(雄州城)에 침입한 여진을 격퇴하였으나 1109년 길주성(吉州城)에서는 실패하여 화의를 맺고 돌아왔다. 이를 재상 최홍사(崔弘嗣) 등이 문제삼아 탄핵하여 파직되었다가 다시 회복되어 1110년 수사공(守司空) ·중서시랑평장사로 기용, 수사도(守司徒) 수태위(守太尉), 감수국사 상주국(監修國史上柱國)을 거쳐서 이부 ·예부 ·병부의 판사를 지냈다.
첫댓글 심통주작(心通酒酌), 마음이 서로 통하여 술잔을 주고받는다는 말로,
서로 뜻이 통하면 어떤 일도 함께 할 수 있다는 의미.
사돈(査頓)이라는 말이 유래 된 이야기라 함.
공부 잘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곧 닥아올 사돈댁!
공부합니다.
감사합니다. 즐거운 시간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