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서(姜景敍)
[요약정보]
UCI G002+AKS-KHF_13AC15ACBDC11CB1443X0
자 자문(子文)
호 초당(草堂)
생년 1443(세종 25)
졸년 1510(중종 5)
시대 조선 전기
본관 진주(晉州)
활동분야 문신 > 문신
부 강순민(姜舜民)
저서 《초당집》
[관련정보]
[문과] 성종(成宗) 8년(1477) 정유(丁酉)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0위(30/33)
규106본·규귀본·장서각본에는 “춘장방(春場榜)”으로, 국도본에는 “식년방”으로 나온다. 모든 방목에 윤2월 20일에 실시했다고 나오는데, 실록에 의하면 19일에 전시를 실시하였고, 20일에 합격자를 발표하였다. 장서각본에는 신계거가 처음에 8위였는데, 임금이 뽑아서 장원으로 하였다고 적혀있다.
성종실록에 문과 신계거(辛季琚)등 33인을 뽑았다. 신계거는 처음에 8등을 차지하였는데, 임금이 뽑아서 제일(第一)에 두었다고 나온다.
[문과] 연산군(燕山君) 3년(1497) 정사(丁巳) 중시(重試) 병과(丙科) 6위(8/10)
실록에 의하면 9월 10일에 인정전에서 책문으로 문과를, 모화관에서 무과를 시험하였다. 무과는 당일에, 문과는 12일에 출방하였다. 17일에 앞에 나오는 별시 문무과 급제자와 함께 방방하였다.
연산군일기에 문과중시에서 삭녕군수(朔寧郡守) 윤장(尹璋)등 10명을 뽑았는데, 인망에 많이 부합되지않았다.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눈에 티가 든 성지사(成知事)요, 탈을 바꾼 윤장원(尹壯元)이라.”하였는데, 이때 고시관(考試官) 정문형(鄭文炯)등이 다 글 잘하는 사람이 아니고, 유독 지사(知事) 성현(成俔)만이 문명(文名)이 있었다. 그런데 뽑은 것이 이러했으므로 지목된 것이다고 나온다.
[이력사항]
전력 진사(進士)
관직 대사간(大司諫)
전력 집의(執義)
타과 성종(成宗) 3년(1472) 임진(壬辰)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규106본·규귀본·장서각본에는 “춘장방(春場榜)”, 국도본에는 “춘식년방(春式年榜)”으로 나온다. 국도본에서는 신묘년 식년시를 어떤 이유에서 퇴행(退行, 연기하여 실시)하였다고 적고 있다. 실록에 의하면 3월 6일에 인정전에서 책문으로 문과를, 모화관에서 무과를 실시하였다. 무과는 당일에, 문과는 7일에 합격자를 발표하였다. 13일에 문무과 방방을 거행하였다.
성종실록에 문과에서 안양생(安良生)등 33인을 선발하였다고 나온다.
[가족사항]
[부]
성명 : 강순민(姜舜民)
[조부]
성명 : 강중선(姜中善)
[증조부]
성명 : 강원우(姜元佑)
[외조부]
성명 : 윤인경(尹仁卿)
[처부]
성명 : 박숙창(朴叔暢)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상세내용]
강경서(姜景敍)에 대하여
1443년(세종 25)∼1510년(중종 5).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자문(子文), 호는 초당(草堂).
부친은 강순민(姜舜民).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77년(성종 8)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자가 되고, 1489년 홍문관교리로서 전라도암행어사가 되었다.
1497년(연산군 3) 중시에 병과로 급제, 사헌부집의가 되고 이듬해 무오사화로 결장(決杖) 1백, 유(流) 3천리, 봉수군정노우정역(烽燧軍庭爐于定役)의 처벌을 받아 회령에 유배되었다.
1501년 방환되어 직첩이 환급되었으나, 당시에는 대간‧홍문관에는 서용(敍用)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뒤 대사간으로서 사간 김당(金璫), 헌납 김숭조(金崇祖)와 더불어 시정(時政)을 논하면서 납간(納諫)‧친현사(親賢士)‧흥학교(興學校)등 12개항을 건의하였다. 그는 남효온(南孝溫)‧권경유(權景裕)등과 더불어 사장(詞章)‧정사(政事)‧절의‧효행등으로 이름이 높았다.
저서로는 《초당집》이 있다.
[참고문헌]
成宗實錄, 燕山君日記, 中宗實錄,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冲齋集
[집필자]
이병휴(李秉烋)
2005-11-30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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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16권, 3년(1472 임진/명성화(成化) 8년) 3월 6일(임인) 1번째기사
인정전에 나아가 선비들을 책문하다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선비들을 책문(策問)2082)하였는데, 좌의정(左議政) 최항(崔恒)·좌찬성(左贊成) 노사신(盧思愼)·예조참판(禮曹參判) 어세겸(魚世謙)으로 독권관(讀卷官)을 삼았다. 그 책문(策文)에 이르기를,
“내가 과덕(寡德)하고 우매(愚昧)한 몸으로 큰 왕업[丕基]을 계승하여 지키게 되었다. 우러러 전대(前代)의 시절의 순화(順和)함을 생각하여 지치(至治)에 이르기를 도모하고,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권장하기에 밤낮으로 경계하고 두려워하였건만, 어찌하여 근년 이래로 흉년이 서로 잇따르고 지금도 또한 봄농사[東事]가 바야흐로 한창인데, 천기[元陽]가 때를 넘겼는가? 아니면 나의 형정(刑政)이 마땅함을 잃어서, 정성이 위로 〈하늘에〉이르지 못하고, 은택(恩澤)이 아래로 〈백성에게〉다하지못하여, 원망이 화기(和氣)를 손상시켜 그의 감응(感應)으로 이를 부른 것인가? 어떻게 하면 이 몸이 덕(德)을 잃지않고 조정의 정사(政事)가 궐(闕)함이 없이 중화(中和)2083)하고 위육(位育)2084)의 지극한 공효(功效)를 거둘 수 있겠는가?
수령(守令)은 백성의 부모(父母)이므로, 이를 임용할 때에는 인재를 널리 자문[疇咨]하여 신중히 선택[愼簡]해서 어질고 유능한 사람을 힘써 구하여 수령[字牧]을 맡겼거늘, 어찌하여 청렴하고 공평한 자는 적고 탐오(貪汚)한 자만이 자주 들리는가? 어떻게 하면 열읍(列邑)이 모두 현향(賢良)한 관리를 얻어서 삼이의 정사[三異之政]2085)를 오늘 날에 다시 볼 수있게 되겠는가?
군사는 국가의 간성(干城)이므로, 내가 일찍이 진념(軫念)하여 그 번(番)들고 쉬는 것을 고르게 하고, 그 첩정(帖丁)2086)을 넉넉히 하여 때때로 점고하고 열병[簡閱]해서 훈련(訓鍊)이 태만하지 아니하였으며, 그 액수(額數)를 감하여 필요하지않은 인원을 제거하였거늘, 어찌하여 군사가 정강(精强)하고 용력(勇力)있는 자는 적고 파리하고 약한 자가 많은가? 만약에 급한 일이 생긴다면, 장차 이들을 어디에 쓰겠는가? 어떻게 하면 군사가 모두 정강(精强)해서 다투어 나아가고 과감(果敢)하게 굳세어지겠는가?
국토(國土)를 넓히고 백성을 많이 모으는 것은 왕정(王政)에서 먼저 해야할 바다. 삼봉도(三峯島)는 우리 강원도 지경에 있는데, 토지가 비옥하고 백성들이 많이 가서 거주하기 때문에 세종조(世宗朝)때부터 사람을 보내어 이를 찾았으나 얻지못하였다. 어떻게 하면 그 땅을 얻어서 거민(居民)을 많게 할 수 있겠는가? 혹자는 말하기를, ‘해도(海道)가 험조(險阻)하여 비록 〈그 땅을〉 얻는다 하더라도 무익(無益)하니, 버려두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는데, 이 말은 어떠한가?
무릇 이 몇 가지 일은 경제지책(經濟之策)2087)이 아닌 것이 없으니, 이런 것은 그대들 대부(大夫)들도 또한 일찍이 강구(講究)하여 진달(陣達)하고자 한 것일 것이다. 각기 마음을 다하여 대답하라. 내 장차 쓸 만한 인재가 있는가를 볼 것이다.”하였다.
註2082]책문(策問): 관리 등용 시험에서 문제를 내어 시문(試問)하는 일.註 2083]중화(中和): 한쪽으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알맞게 조화됨.註2084]위육(位育): 상하귀천(上下貴賤)이 모두 그들의 위치에 만족하고 만물이 모두 충분히 육성됨.註2085]삼이의 정사[三異之政]: 후한(後漢) 때 중모령(中牟令)의 노공(魯恭)이 선정(善政)으로 나라를 다스려서 세 가지 기이(奇異)한 일이 일어난 고사(故事). 즉 해충(害蟲)이 국경을 범하지아니하고, 덕화(德化)가 조수(鳥獸)에게 미치고, 어린아이에게까지 인심(仁心)이 일어났다고 함.註 208 6]첩정(帖丁): 인정(人丁)을 붙여준다는 뜻으로, ‘보정(保丁)’을 이르는 말. 註2087]경제지책(經濟之策): 백성을 다스려서 구제하는 계책.
○壬寅/御仁政殿策士, 以左議政崔恒、左贊成盧思愼、禮曹參判魚世謙爲讀券官。 其策曰:
予以寡昧, 嗣守丕基。 仰惟前代時若, 圖臻至理, 敬天勤民, 夙夜兢惕。 乃何比年以來, 凶歉相仍, 今又東事方興, 亢陽踰時歟? 豈予之刑政失宜, 誠未上格, 澤未下究, 致怨傷和, 有以感召耶? 若之何, 則己德不爽, 朝政無闕, 以收中和、位育之極功乎? 守令, 民之父母也, 故任用之時, 疇咨愼簡, 務得賢能, 以委字牧。 乃何廉平者寡, 而貪汚者屢聞歟? 若之何, 則列邑皆得其良吏, 而三異之政復見於今歟? 兵者, 國之干城也, 故予嘗軫念, 均其番休, 優其帖丁, 簡閱以時, 訓鍊不怠, 減其額, 而刷其冗。 乃何軍士精力者少而羸弱者多乎? 儻有緩急, 將焉用之? 若之何, 則士皆精强, 而競迪果毅乎? 廣土衆民, 王政之所先也, 三峯島在我江原之境, 土地沃饒, 民多往居之故, 自世宗朝, 遣人尋之, 而未得。 若之何, 則得其地, 使居民衆乎? 或言: “海道險阻, 雖得無益, 不如置之。” 此說何如? 凡此數事, 莫非經濟之策, 子大夫亦嘗講究, 而欲陳者也, 其各悉心以對。 予將觀有用之才。
성종 16권, 3년(1472 임진/명성화(成化) 8년) 3월 7일(계묘) 2번째기사
문과에서 안양생 등 33인을 선발하다
문과(文科)에서 안양생(安良生) 등 33인을 선발하였다
○取文科安良生等三十三人。
성종 77권, 8년(1477 정유/명성화(成化)13년) 윤2월 19일(정사) 2번째기사
인정전에 나가 선비들에게 학문의 이치를 구하는 책문을 하다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선비들을 책시(策試)7288)하였는데, 독권관(讀卷官)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조석문(曺錫文)·이조판서 홍응(洪應)·예조 판서 이승소(李承召)와 대독관(對讀官) 도승지(都承旨) 현석규(玄碩圭)·우승지(右承旨) 임사홍(任士洪)등이 입시(入侍)하였다. 그 책문(策問)에 이르기를,
“군자(君子)의 학문(學問)은 이치를 궁구(窮究)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 능히 이치를 궁구하면 천하(天下)의 일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예컨대, 해가 처음에 뜰 때에는 크게 바라보이고, 하늘의 중간에 이르면 작게 보인다. 이와 같으면 해가 뜰 때에는 마땅히 더워야 할 터인데 도리어 서늘하고, 점점 멀어지면 마땅히 덥지않아야 할 터인데 도리어 더운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해의 운행(運行)은 상도(常度)가 있는데, 멀고 가까움에 따라 춥고 더움의 다른 것을 또한 말할 수 있는가? 해는 양(陽)의 정(精)이고, 달은 음(陰)의 정(精)인데, 해에는 볼 수있는 형상(形象)이 없고, 달의 가운데에는 그림자가 있으니, 무엇 때문인가? 모든 물건은 반드시 의지하는 바가 있는데, 천지(天地)의 지대(至大)한 물체가 어디에 의지하였기에 영구히 허물어지지 않는가? 그대들 대부(大夫)들은 각기 단서(端緖)를 찾아내어 대답하라. 장차 궁리(窮理)의 학문을 보리라.”하였다.
註7288]책시(策試): 책문(策問).
○上御仁政殿策士。 讀券官領中樞府事曺錫文、吏曹判書洪應、禮曹判書李承召、對讀官都承旨玄碩圭、右承旨任士洪等入侍。 其策曰: “君子之學, 莫先於窮理。 能窮其理, 則於天下事何有? 至如日初出望之大, 而至於天中則小。 若是則日之出也, 宜乎熱而反寒, 漸遠也, 不宜熱而反熱何歟? 日之行有常度, 其遠近寒熱之異, 亦可言歟? 日陽精, 月陰精, 日則無象可見, 月中有影何歟? 凡物必有所倚, 天地, 物之至大者, 何所倚而終古不毁歟? 子大夫其各紬繹以對。 將以觀窮理之學。”
성종 77권, 8년(1477 정유/명성화(成化)13년) 윤2월 20일(무오) 1번째기사
문과 신계거등 33인을 뽑다
문과(文科) 신계거(辛季琚)등 33인을 뽑았다. 신계거는 처음에 8등을 차지 하였었는데, 임금이 뽑아서 제일(第一)에 두었다.
○戊午/取文科辛季琚等三十三人。 季琚初居第八, 上擢置第一。
강경서(姜景敍) 자문(子文) 초당(草堂) 1443 ~ ? 진주(晉州) 병과(丙科)20위
연산 27권, 3년(1497 정사/명홍치(弘治) 10년) 9월 10일(무신) 1번째기사
인정전에 나가 친히 문과중시의 책제를 내다
인정전(仁政殿)에 납시어 친히 문과(文科) 중시(重試)의 책문(策問) 글제를 냈는데, 그에 이르기를,
“예로부터 천하 국가를 다스리는 길은 백성을 편안히하고 풍속을 바르게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당우(唐虞)·삼대(三代)1783)는 백성이 편안하고 물건이 풍성하며 풍속이 아름답고 순박하였으니, 이는 무슨 도(道)를 행하여 그렇게 되었던가? 그 사이에도 민심(民心)과 속상(俗尙)1784)이 의논할 만한 것이 있었는가? 삼대 이하에도 능히 옛 도를 행하여 착한 정치를 한 자가 누구인가? 나는 박덕한 몸으로 밤낮으로 다스리기를 도모하여 백성을 편안히하고 풍속을 바르게하는데에 마음을 다하지않는 것이 아닌데, 혹은 등문고(登聞鼓)1785)를 치고, 혹은 가전(駕前)1786)에서, 혹은 법사(法司)에서 부산하게 진소(陳訴)를 하니 이는 백성이 편안해서 그러겠느냐? 그리고 첩(妾)이 적처(嫡妻)를 해치는 자도 있고, 혹 형제간에 서로 해치는 자도 있고, 혹 노비(奴婢)가 상전을 살해하는 자가 있고, 혹 고의로 사람을 불에 태워 죽인 자가 있으니, 이는 풍속이 아름다워서 그러겠느냐? 나의 정교(政敎)가 떨치지 못한 바가 있느냐? 세속이 점차 흐려서 다시 떨칠 수 없느냐? 그 세도(世道)를 만회하여 당우·삼대의 정치를 회복하는데는 어떠한 설(說)이 있느냐? 각자가 숨김없이 모두 진술하라.”하였다.
그리고 모화관(慕華館)에 거둥하여 무과(武科) 중시를 시험보여 최한홍(崔漢洪)등 15명을 뽑았다.
註1783]삼대(三代): 하(夏)·은(殷)·주(周)를 말함 註1784]속상(俗尙): 세속의 기호(嗜好).註1785]등문고(登聞鼓): 신문고(申聞鼓)임.註1786]가전(駕前): 임금의 수레
○戊申/御仁政殿, 親策文科重試曰: “自古爲天下國家, 不過安民、正俗而已。 唐、虞、三代, 民安物阜, 風醇俗美, 行何道而致然歟? 其間抑有民心俗尙之可議者歟? 三代以下, 能行古道, 以臻善治者誰歟? 予以涼德, 宵旰圖治, 安民正俗, 靡不盡心, 而或擊登聞鼓, 或於駕前, 或於法司, 紛紜陳訴, 是豈民安而然耶? 或有以妾害嫡者, 或有兄弟相殘者, 或有奴婢殺主者, 或有故燒人死者, 是豈俗美而然耶? 予之政敎, 有所未振歟? 俗漸澆漓, 不可復振歟? 其挽回世道, 以復唐、虞、三代之治, 抑有說乎? 其各悉陳無隱。” 遂幸慕華館, 試武科重試, 取崔漢洪等十五人。
연산 27권, 3년(1497 정사/명홍치(弘治)10년) 9월 17일(을묘) 2번째기사
왕이 인정전에서 문무과의 초시·중시 합격자에게 증서를 주다
왕이 인정전(仁政殿)에 납시어 문무과(文武科)의 초시(初試)·중시(重試) 합격자에게 방(榜)1800)을 주었다.
註1800]방(榜): 증서.
○王御仁政殿, 放文武科初重試榜。
강경서(姜景敍) 자문(子文) 초당(草堂) 1443 ~ ? 진주(晉州)병과(丙科) 6위
성종 112권, 10년(1479 기해/명성화(成化)15년) 12월 12일(계해) 8번째기사
이창신이 대간의 논핵을 당한 것을 이유로 사직을 청했으나 허가하지 않다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이창신(李昌臣)이 글을 올려 사직(辭職)하기를,
“이 달 초9일에 시독관(侍讀官)으로서 경연(經筵)에 입시(入詩)하니, 심회(沈澮), 이승소(李承召), 채수(蔡壽), 박안성(朴安性), 구치곤(丘致崐), 김응기(金應箕), 유인유(柳仁濡), 강경서(姜景敍)가 신(臣)의 좌우(左右)에 있었습니다. 신이 진강(進講)하기를 마치자, 구치곤(丘致崐)은 김견수(金堅壽)가 서모(庶母)에게서 노비(奴婢)를 선물로 받은 일을 처리하는 것을 가지고서 고신(告身)을 회수하고 그 사유를 끝까지 국문(鞫問)하기를 청하니, 성상께서 이승소(李承召)를 돌아보고 묻기를, ‘경(卿)의 의사(意思)는 어떠한가?’하므로, 이승소는 즉시 추문(推問)하기가 어렵다고 대답했습니다. 또 두번 세번 여러 사람의 의사(意思)가 어떠한지를 물었는데, 신(臣)은 혼자서 생각하건대, 심회(沈澮)는 당연히 피(避)해야할 것이고, 이승소(李承召)는 이미 대답하였으며, 채수(蔡壽)는 당초부터 왕명(王命)을 출납(出納)한 사람이고, 대간(臺諫)은 그때 바야흐로 논박(論駁)하는 사람인데 신(臣)이 차대(次對)10282)를 맡았던 까닭으로 감히 입을 다물고 잠잠히 있을 수가 없어서 갑자기 계달(啓達)했던 것입니다.
신(臣)이 망령되이 생각하건대, 김견수(金堅壽)는 서모(庶母)에게 비록 귀하고 천한 것은 다름이 있지마는, 이 또한 어미와 자식의 지친(至親)이니, 그 노비(奴婢)를 비록 서모(庶母)에게서 얻었지마는 이것은 그 아비의 물건이며, 또 그 증거는 심회(沈澮) 한 사람뿐이니, 비록 천합(天合)10283)의 친척(親戚)은 아니지마는 또한 이것이 형제(兄弟)의 사이이기 때문에 모두 서로가 숨겨주어야할 사람으로서, 하루아침에 함께 법정에 불러들이게 되면 일이 밝히기 어려운 면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반드시 마지못해서 형장(刑杖)을 사용하게 되는데, 분변을 구하는 한 가지의 일이 실로 대체(大體)를 손상(損傷)시키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신(臣)은 다만 마음속에 품고있는 바를 계달(啓達)했을 뿐인데, 어찌 다른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지금 대간(臺諫)은 제가 대신(大臣)에게 아첨하여 심술(心術)이 부정(不正)하다는 이유로써 쟁론(爭論)하기를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경연(經筵)은 중요한 지위(地位)로서 논사(論思)를 맡고, 홍문관(弘文館)은 직책이 사륜(絲綸)10284)을 맡고 있는데, 신(臣)은 앉아서 소찬(素餐)10285)만 허비하고 오랫동안 현로(賢路)10286)를 방해하고 있으므로, 매양 사퇴(辭退)하려고 하였습니다. 다만 미천한 신(臣)의 진퇴(進退)로써 우러러 성청(聖聽)을 모독할 수가 없으므로, 어름어름 일시 미봉(彌縫)으로 지금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신(臣)은 비록 관직이 보잘것없고 관계(官階)가 낮지마는, 성상의 측근에서 가까이 모시고 외람되게 고문(顧問)의 반열(班列)에 있게 되었으니, 아는 것이 있으면 말하지않는 것이 없어서 성상(聖上)의 양육(養育)하는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기를 희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사헌부(司憲府)의 기강(紀綱)을 범(犯)하여, 도리어 심술(心術)이 부정(不正)하다는 평판을 받게 되었으니, 신(臣)은 실로 대단히 상심(傷心)하여 부끄러운 얼굴로 관직에 종사(從事)할 수가 없습니다. 바라건대, 신(臣)의 관직을 해임(解任)시키소서.”했으나, 허가하지 아니하였다.
註10282]차대(次對): 매월 여섯차례 정부당상(政府堂上), 대간(臺諫), 옥당(玉堂)들이 입시(入侍)하여 중요한 정무(政務)를 상주(上奏)하던 일.註10283 ]천합(天合): 천륜(天倫)으로 합쳐짐.註10284]사륜(絲綸): 조칙(詔勅).註102 85]소찬(素餐): 공로 또는 재능이 없이 지위에 앉아 녹만 받아먹음.註10286]현로(賢路): 어진 사람을 등용하는 길.
○弘文館校理李昌臣, 上狀辭職曰本月初九日, 以侍讀官入侍經筵, 沈澮、李承召、蔡壽、朴安性、丘致崐、金應箕、柳仁濡、姜景叙, 在臣左右。 臣進講訖, 致崐將堅壽庶母處奴婢受贈事, 請收告身畢鞫其由, 上顧問承召曰: “卿意何如,” 承召卽以難推爲對。 又賜問再三, 僉意何如, 臣竊料, 沈澮當避, 承召已對, 蔡壽當初出納者也, 臺諫時方論駁者也, 臣當次對, 故不敢含默, 卒然啓達。 臣妄度堅壽於庶母, 雖貴賤有異, 而亦是母子之親, 其奴婢雖得於庶母, 而是其父之物, 且其所證, 沈澮一人而已, 則雖非天合之戚, 而亦是兄弟之間, 皆以相爲容隱之人, 一朝同引訟庭, 事在難明。 必不得已加之刑杖, 求辨一事, 實傷大體。 故臣只達所懷, 豈有他心哉, 今臺諫, 以阿附大臣, 心術不正, 爭論不已。 經筵重位論思, 弘文館職掌絲綸, 臣坐費素餐, 久妨賢路, 每欲辭退。 第以微臣進退, 不可仰瀆聖聽, 因循至今。 臣雖官微秩卑, 昵侍左右, 濫叨顧問之列, 庶幾知無不言, 少答聖上卵育之恩。 而觸犯臺綱, 反受心術不正之名, 臣實痛心, 不可靦面就職。 乞解臣職。不許。
성종 179권, 16년(1485 을사/명성화(成化) 21년) 5월 20일 기사 2번째기사
문과 시험의 응판관 강경서가 조성에 대해서 아뢰다
문과(文科) 일소(一所)의 응판관(應辦官) 강경서(姜景敍)가 시관(試官)의 뜻을 가지고 와서 아뢰기를,
“비록 조성(趙成)에서 부시(赴試)하도록 명하시었으나, 이름을 기록하지 않고 함부로 장옥(場屋)에 들어왔는데, 그의 제술(製述)도 아울러 고시(考試)해야 하겠습니까?”하니,
전교하기를,
“이미 부거(赴擧)를 허락하였는데, 다시 무엇을 의심하겠는가?”하였다.
○文科一所應辦官姜景叙將試官意來啓曰: “雖命趙成赴試, 然不錄名而濫入場屋, 其所製述亦幷考試乎,” 傳曰: “旣許赴擧, 復何疑也,”
성종 229권, 20년(1489 기유/명홍치(弘治) 2년) 6월 9일(병신) 1번째기사
윤필상등에게 술을 하사하여 위로해주다
영돈녕(領敦寧) 이상과 의정부(議政府)및 육조(六曹), 한성부(漢城府)의 각 1원(員)과 좌승지(左承旨) 한건(韓健)에게 명하여 동교[東郊]에 가서 농사를 보게하고, 술과 풍악을 제천정(濟川亭)에 내려주게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윤필상(尹弼商) 등이 하직하니, 전교하기를,
“지금 특별히 당(唐)나라의 고사(故事)에 의하여 경등을 명해 교외로 나가서 농사를 보게하는 것은, 백성들로 하여금 나라에서 백성의 일을 중하게 여기는 것을 알게 하도록 하려는 때문이다.”하였다.
윤필상등이 이미 떠나자, 또 도승지(都承旨) 김극검(金克儉)과 내관(內官) 김자원(金子猿)에게 명하여 선온(宣醞)20960)을 가지고 가서 하사하게 하고, 또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 민사건(閔師鶱), 부교리(副校理) 강경서(姜景敍),수찬(修撰) 박증영(朴增榮)에게 명하여 선온을 가지고 가게하는 한편, 어서(御書)를 내리기를,
“예로부터 제왕(帝王)으로서 백성의 일을 중하게 여기지 아니하는 이가 없었다. 때로 수재와 한재가 있으면 오직 마땅히 두려워하여 몸을 닦고 마음을 살펴서 공경히 천심(天心)에 응답하였던 것이다. 얼마 전 기후를 보건대, 아침저녁으로 서늘하여 가뭄의 징조가 이미 나타났으니, 근심하는 마음이 경경(耿耿)20961)하였던 바, 다행히 하늘의 은혜를 입어 때에 맞추어 비가 들에 흡족하게 내렸다. 이제 특별히 대신을 보내어, 당(唐)나라의 고사(故事)에 의해 교외에 나가 농사를 보게하여 백성에게 농사를 중히 여김을 보이게 하고, 거듭 근신(近臣)을 보내어 대신을 위로하게 하니, 그대들은 모두 내 뜻을 체득하여 극진히 즐기다가 돌아오라.”하였다.
註20960]선온(宣鶱): 신하에게 술을 내려주던 일, 또는 그 술.註20961]경경(耿耿): 마음이 편안하지 아니한 모양.
○丙申/命領敦寧以上、議政府及六曹、漢城府各一員, 左承旨韓健往東郊觀稼。 賜酒樂于濟川亭。 領議政尹弼商等辭。 傳曰: “今特依唐朝故事, 乃命卿等往觀于郊, 所以使民知國之重民事也。” 弼商等旣行, 又募承旨金克儉、內官金子猿齎宣醞賜之。 又命弘文館應敎閔師騫、副校理姜景叙、修撰朴增榮齎宣醞往, 下御書曰:自古帝王莫不重民事, 時有水旱, 惟當恐懼修省, 敬答天心。 頃觀氣候, 朝暮淒涼, 旱徵已著, 憂心耿耿, 幸蒙天貺時雨洽野。 今特遣大臣, 依唐朝盛事, 出郊觀稼, 示民重農; 疊遣近臣, 宣慰大臣。 爾等咸體予意, 極歡乃歸。
성종 229권, 20년(1489 기유/명홍치(弘治) 2년) 6월 27일(갑인) 3번째기사
대간등에게 임금이 불교를 숭상한다고 믿는 까닭을 말해보도록 하다
임금이 대간(臺諫)과 홍문관(弘文館)관원을 인견(引見)하고 이르기를,
“경들이 요즈음 나를 불씨(佛氏)를 숭신(崇信)한다고 하였으니, 내가 숭신한다는 까닭을 각각 들어 말하라. 내가 듣고자 한다.”하니,
대사헌(大司憲) 박건(朴楗)이 아뢰기를,
“부처는 족히 믿을 것이 못되니, 신이 눈으로 본 바입니다. 세조(世祖)께서 부처를 좋아하시어 새로 원각사(圓覺寺)를 짓고 복전(福田)21083)을 구하셨는데, 신등이 생각하건대 부처가 만약 신령함이 있으면 세조께서 마땅히 백년의 수명을 누려야하실 것인데, 원각사가 겨우 이루어지자 세조께서 안가(晏駕)21084)하셨으니, 신민(臣民)이 누가 원각사를 허물어뜨리고 승도(僧徒)를 쫓아내려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성상께서 즉위하신 처음에 크게 하시려는 뜻을 가지시고 승인(僧人)의 방납(防納)21085)하는 법을 금하고 원각사의 문을 지키는 군사를 파하시니 온 나라 사람이 전하의 뜻을 밝게 알고는 말하기를, ‘인심을 바로잡고 요사한 말을 종식시키는 것이 바로 이때다’라고 하였는데, 근년 이래로 점점 처음과 같지 아니하여 유생(儒生)과 승도(僧徒)가 서로 다투면 유생을 가두어 곤욕(困辱)시키고 그 길을 막아서 끊었으며 절이 허물어지는 것이 있으면 선공감(繕工監)에 명하여 군졸을 거느리고 역사를 감독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숭상하고 믿는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하고, 부제학(副提學) 허계(許誡)는 아뢰기를,
“주상(主上)께서 처음 정치하실 때에는 진실로 훌륭하셨습니다. 단지 요즈음 유생과 승도가 서로 다툰 것으로 인하여 흥덕사(興德寺) 뒷길을 막도록 명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창경궁(昌慶宮)의 청룡(靑龍)21086)은 풍수설(風水說 )에서 꺼리는 바이므로 막지아니할 수 없다’고 하시고, 원각사는 공해(公廨)21087)가 아니므로 비록 허문다하더라도 괜찮은데 반드시 군졸(軍卒)을 써서 수리하시니, 《춘추(春秋)》에 무릇 흥작(興作)이 있으면 반드시 기록한 것은 백성의 힘을 소중하게 여긴 것입니다. 이제 부처의 집을 위하여 역사를 감독하는 것이 이에 이르니, 신은 아마도 소민(小民)이 성상께서 불교에 뜻을 두신다고 말할 듯합니다. 태종(太宗)께서 사사(寺社)를 혁파(革罷)하여 후세를 위한 계책을 남기셨는데, 원각사는 바로 세묘(世廟)21088)때 세운 것입니다. 어찌하여 태종의 만세의 계책을 버리시고 세묘의 한때의 잘못된 거사(擧事)를 따르십니까? 태종께서 절을 혁파하시면서도 오히려 말씀하시기를 ‘후세에 부처에게 아첨하는 임금이 있어서 금하지못함이 있을까두렵다.’고 하셨으니, 이 말은 후세의 자손이 마땅히 깨우치고 살펴야할 바입니다. 태종의 이 말씀을 본받으시면 과실[過擧]이 없을 것입니다.”하고,
응교(應敎) 민사건(閔師騫)은 말하기를,
“성상께서 일찍이 이르시기를, ‘내가 부처를 좋아하지 아니한다’고 하셨는데, 신은 생각하건대 ‘성중(城中)에서 높은 상투를 좋아하면 사방에서 상투의 높이가 한 자가 된다’고 하였으니, 위에서 좋아하는 바가 있으면 아래에서는 반드시 더 심함이 있으니, 그 동기(動機)가 두려워할 만합니다. 이제 흥덕사(興德寺) 뒷길을 막았으니 소민들이 이를 보고는 성상께서 불교에 뜻을 두신다고 하면서 서로 바람을 따라 휩쓸릴 것입니다.”하고,
직제학(直提學) 이세광(李世匡)은 말하기를,
“전하께서 일찍이 신등의 말을 옳다고 하셨는데, 그 말을 옳다고 하시면서 그것을 채용하지 아니하시는 것이 옳겠습니까?”하자,
말을 아직 마치지도 아니하였는데, 임금이 노(怒)한 음성으로 말하기를,
“여러 말이 가리키는 바를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옛사람이 주(紂)21089)를 논하기를, ‘말은 그릇된 것을 꾸미기에 충분하고 지혜는 간(諫)하는 말을 거절하기에 충분하다’고 하였으니, 내가 이제 경등과 더불어 서로 변명하는 것은 미덕(美德)이 아닐 듯하다. 그러나 바야흐로 말하려고 하는데 어찌 갑자기 그칠 수 있겠는가? 지금 홍문관(弘文館)의 상소에 이르기를, ‘이제 흥덕사 뒷길을 막고 흥판(興販)하는 중을 금하지말게 하고, 해인사(海印寺)를 수리하고 안암사(安巖寺)를 짓는다’고 하였으니, 나는 이 말이 어떤 일을 근거로 하여 말하는 것인지를 알지 못하겠다. 그리고 흥판하는 중은 금할 수 없다. 임금은 하민(下民)의 주인이 되었는데 무릇 백성으로서 부모가 있는 자는 모두 길러서 편안하게 하려고 하는데 중만은 우리 백성이 아닌가? 부모 있는 자가 가난하여 기를 수 없으면 흥판이 아니고 무엇에 의뢰하겠는가? 만약 엄하게 금하고 막으면 저들이 장차 그 곤궁함을 견디지못하여 일어나서 도둑이 될 것이니 그 해가 됨이 어찌 크지 아니하겠는가? 만약 사리(事理)를 따지지도 아니하고 그 실정(實情)을 용서하지 않으면서 일체로 금단하면 사세(事勢)에 방해되는 것이 있을 뿐만 아니라, 소요(騷擾)하는 폐단이 있을 것이다. 흥덕사 뒷길은 궁궐을 범함이 있어서 이 때문에 막은 것인데, 마침 유생(儒生)을 가두고 국문하는 때를 만났기 때문에 사람들이 의심하였을 뿐이며, 불교를 숭상하고 믿어서 그러한 것이 아니다. 해인사를 중창(重創)한 것은 부득이한 것이다. 이 절은 바로 세조(世祖) 때 대장경판(大藏經板)을 간직하고 정희왕후(貞熹王后)께서 학조(學祖)에게 위임하셨는데, 전일에 학조가 와서 아뢰기를, ‘세조께서 대장경판을 이 절에 간직하셨는데 정희왕후께서 「대장경판은 선왕(先王)께서 판각(板刻)하신 바이고 왜사(倭使)가 구하는 바이므로 잘못 간직하여 파손되도록 할 수 없다」고 하시며 노승(老僧)에게 명하여 이 절을 감수(監守)하게 하셨는데, 이제 장차 허물어지려고 하니 노승의 힘으로는 수리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생각하기를, 《대장경》은 왜인이 요구하는 것인데 만약 판본(板本)이 없으면 요구에 응할 수 없다고 여겨 특별히 수리하도록 명한 것이니, 경판을 위해서이다. 이것이 어찌 그만둘 수 있는 일인가? 안암사(安巖寺)를 짓는 것은 내가 본디 알지 못하였는데 그대들이 무슨 근거로 이를 말하는가? 《대전(大典)》에 이르기를, ‘옛터가 있는 것은 중수(重修)하는 것을 허락한다’고 하였는데, 사람들이 이 법에 의거하여 중수함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어느 때에 일을 시작해서 어느 때에 일을 마쳤는가를 알지못하는데 내가 하지아니한 일을 가지고 경등은 불교를 숭상해 믿는다고 하니, 내가 비록 이런 마음이 없더라도 숭상하며 믿는 자취가 경등의 귀와 눈에 나타난 것이 아닌가?”하였다.
이세광이 아뢰기를,
“안암사를 중수할 때에 관에서 재목과 기와를 주시므로, 홍문관에서 그 불가함을 간하였으나, 면대해 주시기까지 하였습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단지 재목과 기와만 주었는데 경영하였다고 하는 것이 가하겠는가? 그러나 이 일은 내가 본래 알지못하였고, 또 옛터에 중수할 수있는 법이 《대전》 에 실려있으니《대전》의 법은 조종조(祖宗朝)로부터 비롯된 것이다”하였다. 헌납(獻納) 황계옥(黃啓沃)이 아뢰기를,
치의(緇衣)21090)의 무리는 갑자기 그 뿌리를 영구히 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중이 되는 자에게 정전(丁錢)을 바치고 송경(誦經)을 시험한 뒤에 그 자신에게 도첩(度牒)을 주도록 허락하였으니, 중이 되는 길을 어렵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 창건하는 것을 금하는 것은 새로 창건하지 못하게 하려고 하는 것이며, 옛터에 반드시 중수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안암사를 중수하는 것은 국가와 관여됨이 없는데, 경등이 이처럼 말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하자,
수찬(修撰) 박증영(朴增榮)이 아뢰기를,
“안암사를 지을 때에 관(官)에서 재목과 기와를 주었으니 국가에서 영건(營建)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대간(臺諫)과 홍문관(弘文館)의 뜻은 자기가 말한 바가 옳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받아들이지 아니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원각사(圓覺寺)는 선왕께서 깊이 뜻을 기울이신 바이고 정희왕후께서 늘 하교하시기를, ‘마땅히 허물어지는대로 따라 보수하여 끝내 황폐하여 허물어지는데 이르게 할 수는 없다’하셨다. 내가 왕후의 명을 받아 말이 아직도 귀에 남아 있는데, 이제 허물어진 것을 보고서 수리하지 아니하는 것은 마음에 진실로 차마 하지못하겠다. 만약 부제학(副提學)이 말한 바와 같이 태종(太宗)께서 사사(寺社)를 혁파하신 뜻을 마땅히 본받아야 옳다고 하면, 나는 생각하기를, 태종께서 절을 혁파하시면서 이종(二宗)21091)은 남겨 두었는데, 이종이 만약 허물어져서 수리하고자하면 경등은 또한 나를 태종을 본받아야 한다고 하면서 잘못이라고 여기지 아니하겠는가?”하였다.
박건(朴楗)이 아뢰기를,
“처음에도 잘하고 마지막에도 잘하여야 이것이 아름다운 덕(德)인 것입니다. 이제 전하께서는 크게 처음과 같이 아니하시니 실망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이제 종묘(宗廟)를 수축(修築)하는 때를 당하여 백성을 동원하여 부역(赴役)하게 하는데, 군졸을 활용하여 불우(佛宇)를 수리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하고,
민사건(閔師騫)은 아뢰기를,
“신이 지난해에 충청도도사(忠淸道都事)가 되어 괴산(槐山) 지경을 지나는데 어떤 중이 소와 말 10여필을 가지고 행상(行商)을 하면서 길가에서 쉬고있었습니다. 승인(僧人)의 흥판(興販)이 매우 성하게 유행하니, 금하는 것이 온당합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옳으나, 감사(監司)가 마땅히 다스릴 것이니 어찌 갑자기 이를 위해 별도로 한 가지 법을 세우겠는가? 한 가지 법을 세우면 한 가지 폐단이 생기는 것이니, 이제 승도(僧徒)로 하여금 소나 말을 몰고 다니면서 물건을 팔지못하게 하면 소요(騷擾)가 일어나지 아니하겠는가?”하였다.
박증영이 아뢰기를,
“불교는 청정(淸淨)한 것을 종(宗)으로 삼는데 어찌하여 흥판(興販)을 하여야 합니까?”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먹을 것이 넉넉한 연후에야 청정한 교(敎)를 닦을 수 있다. 만약 그대의 말과 같다면 중은 장차 먹지아니하고 굶어죽어야 하겠는가? 또 중은 우리 백성이 아닌가? 중이 만약 장가들어 아들을 낳으면 이것도 우리 백성인데 어찌 굶어죽게 할 수 있겠는가?”하였다.
부교리(副校理) 강경서(姜景敍)가 아뢰기를,
“전하께서 즉위하신 처음에는 불교를 믿지 아니하시고 세종(世宗)께서 세우신 내불당(內佛堂)을 특별히 명하여 옮기게 하였으므로, 온 나라 신민(臣民)이 모두 하례하기를 장차 큰일을 하실 임금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제 끝까지 잘하지 못하시고서 불우(佛宇)를 수리하고 창건하는 것이 없는 해가 없으니, 신등이 시종(侍從)하는 반열에 있으면서 우리 임금으로 하여금 요(堯), 순(舜)같은 임금이 되게하려는 뜻이 어찌 옛사람에게 뒤떨어지겠습니까? 신이 생각하기에, 원각사는 비록 조종(祖宗)께서 세운 바라고 하더라도 조종의 세운 바가 어찌 옳다고 하겠습니까? 이제 비록 반드시 허물어뜨릴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 허물어진대로 두고 수리하지말게 하는 것이 가합니다. 예전 송(宋)나라 진종(眞宗)이 옥청궁(玉淸宮)과 소응궁(昭應宮)을 창건하였는데, 재(災)가 있자, 인종(仁宗)이 그대로 두고 수리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송나라 3백년 사이에 훌륭한 임금과 어진 임금이 많지않은 것이 아니지만 인종을 첫번째로 일컬으면서 이제까지 아름다움을 칭송하기를 그치지 아니합니다. 이제 전하께서도 그 허물어지는 대로 두고 수리하지 않으신다면 어찌 인종 혼자만이 아름다움을 앞에서 오로지하겠습니까?”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종께서 세운 바를 어찌 감히 차마 허물어지게 하겠는가?”하였다.
수찬(修撰) 김준손(金駿孫)이 아뢰기를,
“신이 해인사를 수리하는 것을 보니, 백성의 노력을 활용하는데 몹시 어수선하며 소요스럽습니다. 모르기는 하겠습니다만, 예조에서 전교를 받아서 하는 것입니까?”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참으로 이런 일이 없었다. 승지(承旨)는 상고하여 아뢰라.”하였다.
민사건(閔師騫)이 아뢰기를,
“옛사람이 이르기를, ‘만일 그 도리가 아니면 어찌 3년을 기다리겠느냐?’고 하였습니다. 선왕(先王)께서 이 절을 잘못 창건하였으니 따라서 수리할 수는 없습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들은 생각해 보라. 이제 양전(兩殿)이 위에 계시면서 정희왕후의 유교(遺敎)를 들으시고 여러번 말씀하시는데, 내가 차마 그렇게 하지못하겠다”하였다. 이세광(李世匡)이 아뢰기를,
“관에서 재목과 기와를 주어서 이미 안암사(安巖寺)를 지었고, 해인사(海印寺)를 일찍이 판당(板堂)만 수리한다고 들었는데 이제는 온 절을 수리하며, 또 승인의 흥판(興販)을 금하지아니하여 그 무리들로 하여금 민간에 두루 돌아다니게 하였으니, 유(儒)와 불(佛)이 성하고 쇠하는 기틀[機]이 오늘에 있으므로 삼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승인의 흥판(興販)을 금함이 예전에도 있었는가? 중만이 홀로 우리 백성이 아니어서 그 흥판을 금하려고 하는가?”하였다.
이세광이 아뢰기를,
“부역(賦役)을 도피하고 노는 자가 어찌 백성이 되겠습니까?”하고,
박증영(朴增榮)은 아뢰기를,
“사민(四民)21092)의 밖에 있으며, 부자(父子)와 군신(君臣)이 없는 자인데 어찌 우리 백성이라고 이를 수 있겠습니까?”하고,
민사건은 아뢰기를,
“어제 상교(上敎)를 듣건대 내일 마땅히 불러보겠다고 하시기에, 신등은 생각하기를, 반드시 천심(天心)21093)을 돌이킬 수 있다고 여겼는데, 이제 그렇지 아니하니 크게 실망됩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들은 깊이 생각해 보라. 생각을 깊이하지 아니한 때문에 말한 바가 모두 이와 같은 것이다.”하였다.
장령(掌令) 표연말(表沿沫)이 아뢰기를,
“깊이 생각하면 능히 정미(精微)한 극치에 이르는데, 신등이 말한 바는 정사와 정미한 것이고 생각의 깊은 것입니다. 다시 생각할 바가 없으니 곧 성명(成命)을 기다릴 따름입니다.”하고,
황계옥(黃啓沃)은 아뢰기를,
“대간(臺諫)과 시종(侍從)이 여러날 뜰에 서서 간하기를 그만두지 아니하였는데 두 대비(大妃)께서 어찌 듣지 아니하셨겠습니까? 장차 반드시 ‘주상께서 불교에 관한 것때문에 간(諫)함을 들음이 이에 이르렀다.’고 여기시면서 반드시 불안한 마음을 가지실 것이니, 이것도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반드시 신등의 말을 따르소서.”하고,
허계(許誡)는 아뢰기를,
“오늘과 같은 날은 두번 만나기 어려운데 오도(吾道)21094)와 이단(異端)의 성쇠(盛衰)를 결정하는 것이 오늘에 달려있으니, 오늘에 만약 간하여 그치게 하지아니하면 내일에는 곧 구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원하건대 성명(成命)을 내리소서.”하고,
강경서(姜景敍)는 아뢰기를,
“옛날의 현명한 임금은 흥작(興作)을 함부로 일으켜서 재물을 손상하고 백성을 해롭게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한(漢)나라 문제(文帝)는 장차 노대(露臺)를 수리하려고 하다가 백금(百金)의 비용을 아껴서 그쳤고, 당(唐)나라 태종(太宗)은 장차 낙양(洛陽)의 궁실(宮室)을 수리하려고 하다가 간하는 말을 듣고는 곧 그쳤습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반드시 신등의 말을 따르소서.”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이미 밝지못하여 깊이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 실수를 이룬 것이다. 그러나 그대들도 마땅히 생각해야할 것이다.”하였다.
정언(正言) 이수공(李守恭)이 아뢰기를,
“신이 보건대 동학(東學)21095)이 허물어졌는데 재사(齋舍)만 겨우 짓고 원장(垣墻)은 아직 쌓지못하였습니다. 전하께서 불우(佛宇)에 뜻을 두시는데 학궁(學宮)21096)의 퇴폐(頹廢)가 이와 같으니, 빌건대 해조(該曹)에 명하여 빨리 수리하게 하소서.”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해조(該曹)의 책임인데 어찌하여 내게 말하는가? 해조로 하여금 검거(檢擧)하게 하라.”하였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원각사(圓覺寺)를 수리하면서 유사(有司)가 일을 감독하기를 매우 급하게 하였는데, 언관(言官)이 항의하여 아뢰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나, 사간(司諫) 김전(金琠)만 홀로 침묵하고 한마디 말도 없었으므로, 이때 사람들이 비루하게 여겼다. 임금이 처음 즉위하여 승도(僧徒)의 방납(防納)하는 법을 금하고 원각사의 파문군졸(把門軍卒)21097)을 혁파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흥덕사(興德寺)의 길을 막게 하고 절에 올라간 유생(儒生)을 가두었으니, 위정공(魏鄭公)21098)이 십점(十漸)21099)을 상소한 것은 진실로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하였다.
註21083]복전(福田): 부처를 공양하여 얻는 복(福)을 말함 註21084]안가(晏駕): 승하(昇遐). 21085]방납(防納): 백성들이 그 지방에서 산출되는 토산물로 공물(貢物)을 바치는데, 그 지방에서 생산할 수 없는 가공품이나 토산(土産)이 아닌 공물을 바쳐야할 경우에 공인(貢人)들의 공물을 대신 바치고 값을 백성에게서 갑절이나 불려받던 일.註21086]청룡(靑龍): 주산(主山)에서 왼쪽으로 뻗어나간 산맥을 이르는 말.註21087]공해(公廨): 공청(公廳).註210 88]세묘(世廟): 세조(世祖).註21089]주(紂): 은(殷)나라의 폭군(暴君).註2109 0]치의(緇衣): 중이 입는 검은 물을 들인 옷. 곧 중을 이름.註21091]이종(二宗): 교종(敎宗)과 선종(禪宗).註21092]사민(四民): 사(士),농(農),공(工),상(商).註21093]천심(天心): 임금의 마음.註21094]오도(吾道): 유교의 도(道). 註21095]동학(東學): 조선조 때 유생(儒生)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서울에 둔 사부 학당(四部學堂)의 하나. 사부 학당은 중학(中學), 동학(東學), 남학(南學), 서학(西學)임.註21096]학궁(學宮): 학교(學校).註21097]파문군졸(把門軍卒): 문을 지키는 군졸.註21098]위정공(魏鄭公): 당나라 현신(賢臣)위징(魏徵).註21099]십점(十漸): 위징(魏徵)이 당태종(唐太宗)에게 올린 10가지의 경계. 군주(君主)가 소홀히 하면 작은 일이 점점 커져 큰 화(禍)가 되는 일로서, 검소(儉素)하고 덕음(德音)을 듣는 것등 10가지 일임.
○上引見臺諫、弘文館, 謂曰: “卿等近日謂予崇信佛氏, 予之所以崇信之義, 其各歷言之。 予欲聽焉。” 大司憲朴楗啓曰: “佛不足信, 臣所目覩。 世祖好佛, 新作圓覺寺, 以求福田, 臣等謂佛若有靈, 世祖當享百年, 圓覺纔成, 世祖晏駕。 臣民孰不欲毁圓覺而逐僧徒也? 聖上卽位之初, 奮大有爲之志, 禁僧人防納之法, 罷圓覺守門之卒, 一國之人, 洞知殿下之意, 曰: ‘正人心、息邪說, 此其時也。’ 近年以來, 漸不如初, 儒僧相校, 則囚儒生而困辱之, 塞其路而防絶之, 寺宇有毁, 則命繕工監領卒燐役之, 此非崇信而何?” 副提學許誡曰: “主上初政固善, 但近因儒僧相校, 命塞興德後路, 而曰: ‘昌慶宮靑龍風水所忌, 不可不塞。’ 圓覺寺非公廨, 雖毁之可也, 而必用軍卒以修之。 《春秋》凡有興作必書, 重民力也。 今爲佛宇董役至此, 臣恐小民謂聖上, 留意於佛氏矣。 太宗革罷寺社, 貽謀後世, 而圓覺寺乃世廟時所建也。 奈何棄太宗萬世之謀, 而遵世廟一時之謬擧乎? 太宗革寺社, 而猶曰, 恐後世有佞佛之主, 而無以禁之, 此言後世子孫之所當警省也。 法太宗此言, 則無過擧矣。” 應敎閔師騫曰: “上嘗云予不好佛。 臣謂城中好高髻, 四方高一尺, 上有所好, 下必有甚, 其機可畏也。 今塞興德後路, 小民觀此, 以上留意於佛, 相與隨風而靡矣。” 直提學李世匡曰: “殿下嘗以臣等之言爲是。 是其言而不用之, 可乎?” 言未畢, 上厲聲曰: “群言之所指, 予豈不知乎? 昔人論紂曰: ‘言足以飾非, 智足以拒諫。’ 予今與卿等相辨, 似非美德。 然方欲言之, 安得遽止哉? 今弘文館上疏云: ‘今塞寺後之路, 勿禁興販之僧, 修海印, 營安巖。’ 予未知此言, 據何事言之歟? 興販之僧不可禁也, 君爲下民之主, 凡民之有父母者, 皆欲其養而安之, 僧獨非吾民乎? 有父母者貧乏無以養之, 則非興販何所賴哉? 若嚴其禁防, 則彼將不堪其窮, 起而爲盜矣, 其爲害, 豈不大哉? 若不究事理, 不恕其情, 而一切禁斷, 則非但有妨事勢, 抑有騷擾之弊。 興德後路有犯宮闕, 是以塞之, 而適會於儒生囚鞫之時, 故人疑之耳, 非爲崇信佛氏而然也。 重創海印, 在所不得已也。 此寺乃世廟時藏《大藏經》板, 貞熹王后屬諸學祖。 前日學祖來啓云: ‘世祖以《大藏經》藏于此寺。’ 而貞熹王后以爲經板乃先王所刊, 而倭使所求, 不可慢藏以致破毁, 乃命老僧, 監守此寺, 而今將頹毁, 老僧力不能理。 予聞此言, 以爲《大藏經》者倭人之所嘗求, 若無板本, 則無以應求, 特命修之, 爲經板也。 此其得已之事乎? 營安巖寺, 予本不知, 爾等據何而言此也? 《大典》云: ‘有古基者, 許令重修。’ 人有據此法而重修矣。 予則不知其經始於何時而訖功於何時也。 以予不爲之事而卿等謂之崇信釋敎, 予雖無是心, 無乃崇信之跡, 見於卿等之耳目耶?” 世匡曰: “安巖寺重創時, 官給材瓦, 弘文館諫其不可, 而至賜面對矣。” 上曰: “但給材瓦而已, 謂之營可乎? 然此事予本不知。 且重修古基之法, 載在《大典》, 而《大典》之法, 自祖宗朝始矣。” 獻納黃啓沃曰: “緇衣者流, 不可卒然永絶根本。 故其爲僧者, 納丁錢、試誦經, 然後許度其身, 所以難其爲僧之路也。 其禁新創者, 所以欲其毋得創新, 非所以必修其古基也。” 上曰: “安巖重創, 無與國家, 而卿等如此言之何也?” 修撰朴增榮曰: “營安巖時, 官給材瓦, 非國家營建而何?” 上曰: “臺諫、弘文館之意, 以爲己之所言是矣, 而予不聽納, 故如此云耳。 然圓覺寺先王所深注意,而貞熹王后每敎曰當隨毁隨補, 不可終至廢毁。 予受命於王后, 言猶在耳。 今見頹毁不修, 心實不忍。 若如副提學所言, 太宗革罷寺社, 宜可法之。 予意謂太宗革寺社而存二宗, 二宗若毁而欲修之, 則卿等其亦謂我法太宗而不以爲非乎?” 朴楗曰: “有始有終, 斯爲美德。 今殿下大不如初, 不勝缺望。 今當宗廟修築, 括民赴役, 而用軍卒以理佛宇, 何也?” (師蹇)〔師騫〕曰: “臣往年爲忠淸都事, 過槐山境, 有僧持牛馬十餘, 行商而休道傍。 僧人盛行興販, 禁之爲便。” 上曰: “爾言則是矣。 然監司自當治之, 何遽爲此別立一法哉? 一法立, 一弊生, 今使僧徒毋得牽牛馬行販, 不其騷擾乎?” 增榮曰: “佛敎以淸淨爲宗, 何用興販爲哉?” 上曰: “食足然後可以修淸凈之敎矣。 若如爾言, 則僧將不食而餓死乎? 且僧非吾民乎? 僧若娶妻而生子, 則是吾民也, 安可使之餓死乎?” 副校理姜景叙曰: “殿下卽位之初, 不信佛敎, 世宗所建內佛堂, 特命移之, 一國臣民皆賀, 以爲將大有爲之君也。 今不克終, 修創佛宇, 無歲無之。 臣等居侍從之列, 而使吾君爲堯、舜之君之意, 豈下於古人哉? 臣謂圓覺寺雖祖宗所建, 而祖宗之所建, 豈爲是哉? 今雖不可必毁, 因其毁而勿修之可也。 昔宋眞宗創玉淸、昭應宮而災, 仁宗因而勿修。 有宋三百年間, 聖君賢主不爲不多, 而以仁宗爲稱首, 至今誦美不置。 今殿下亦因其毁而勿修焉, 則仁宗奚獨專美於前哉?” 上曰: “祖宗所建, 安敢忍毁之哉?” 修撰金駿孫曰: “臣見海印寺修理, 用民力甚紛擾。 未知禮曹受敎而爲之歟?” 上曰: “固無是事。 承旨其考以啓。” 師騫曰: “古云: ‘如其非道, 何待三年?’ 先王謬創此寺, 不可從而修之也。” 上曰: “爾等其思之。 今兩殿在上, 聞貞熹王后之敎而屢言之, 予不忍之耳。” 世匡曰: “官給材瓦, 已營安巖、海印寺。 曾聞只修板堂, 而今則擧一寺而修之。 又不禁僧人之興販, 使其徒遍於閭閻之間。 儒佛盛衰之機在於今日, 不可不愼也。” 上曰: “僧人興販, 古亦有禁耶? 僧也獨非吾民, 乃欲禁其興販歟?” 世匡曰: “逃賦而游手者, 安得而民之哉?” 增榮曰: “居四民之外而無父子君臣者, 豈可謂之吾民乎?” 師騫曰: “昨聞上敎, 以爲明當召見, 臣等以爲必得回天。 而今不爾也, 大失所望。” 上曰: “爾其深思之。 思之不深, 故所言皆如是爾。” 掌令表沿沫曰: “深思則能造於精微之極致。 今臣等所言, 政事之精微, 而思之深者也。 更無所思, 直待成命而已。” 啓沃曰: “臺諫侍從累日立庭, 諫諍不置, 兩大妃豈不聽聞哉? 將必以爲主上以佛之故聞諫至此, 必有不安之心矣, 此亦不可不慮也。 願殿下必從臣等之言。” 許誡曰: “今日難再遇, 吾道異端盛衰, 決在今日。 今日若不諫止, 則明日便不可救也。 願賜成命。” 景叙曰: “古之明君不妄興作, 以傷財害民。 故漢文帝將修露臺, 惜百金之費而止之; 唐宗將修洛陽宮室, 而聞諫卽止。 願殿下, 必從臣等之言。” 上曰: “予旣不明, 不能思之深, 故以致此失。 然爾等亦當思之。” 正言李守恭曰: “臣見東學頹廢, 僅營齋舍, 而垣墻未築。 殿下留意佛宇, 而學宮頹廢如此, 乞命該曹亟擧修理。” 上曰: “此該曹之責, 何以言於予乎? 其令該曹檢擧。”
【史臣曰: “圓覺之修, 有司董役甚亟, 而言官抗奏不已, 司諫金琠獨默無一言, 時人鄙之。 上初卽位, 禁僧徒防納之法, 革圓覺把門之卒; 至是塞興德之路, 囚上寺之儒。 魏鄭公疏十漸, 良有以夫!”】
성종 233권, 20년(1489 기유/명홍치(弘治) 2년) 10월 3일(정해) 1번째기사
국가의 은밀한 국문에 사관을 들어오지못하게 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아뢴 기사관 이주, 남궁찬을 사헌부에 내려 국문하게 하다
기사관(記事官) 이주(李胄), 남궁찬(南宮璨)이 아뢰기를,
“요사이 국가에서 비밀로 국문(鞫問)하는 일에 있어 주서(注書)나 사관(史官)이 모두 들어가지 못했었는데, 이제 주서는 들어가지만 신(臣)들은 유독 들어가지 못하니, 까닭을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하니,
전교하기를,
“국가의 비밀된 일을 뭇사람이 듣는 것이 합당하지못하기 때문에 단지 한건(韓健)으로 하여금 국문하게한 것인데, 그대들이 사관(史官)이 전(傳)해야 할 것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으로 말을 하므로, 한건으로 하여금 사항을 기록하여 사관에게 주도록 한 것이다. 그대들이 여러 차례 말을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렇다면 그대들이 전해들은 일도 사책(史冊)에 쓰지않는가? 또 주서(注書)는 서사(書寫)해야하는 일이 있기 때문에 부득이 들어가 참여하는 것이다.”하매,
이주 등이 아뢰기를,
“신들은 직(職)이 사관인데 보거나 들은 일을 어찌하여 쓰지 않겠습니까? 비록 시골 사람들이 하는 말이나 복례(僕隷)들의 말이라 하더라도 만일 기록할 만한 일이 있으면 빠짐없이 써서 후세에 전해야 합니다. 다만 한건은 춘추관(春秋館)의 직을 띤 사람이 아니므로 사료(史料)를 지을 수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사관이 기록한 일이 아닌 것을 신들이 전해받아 기록하여 국사(國史)를 만든다는 것은 마음에 실로 평온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하기를 그치지 않는다면 신들은 장차 사람사람마다 사필(史筆)을 잡게될까 싶습니다.”하니, 임금이 윤필상(尹弼商), 홍응(洪應), 노사신(盧思愼)을 명소(命召)하여 전교하기를,
“이주등이, 한건은 문신(文臣)이 아니므로 사건을 기록할 수 없다는 것을 들어 여러 차례 분부한 뜻을 거역하였으니, 추국(推鞫)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또 전번에 한건이 도승지(都承旨)가 되었을 적에 대간(臺諫)의 논박(論駁)이 하나만이 아니었을 때, 이주등이 대간의 말에 따라 아랫사람으로서 윗사람을 능멸했었으니, 어찌 사체(事體)에 합한 짓이겠는가?”하매,
윤필상등이 아뢰기를,
“이 선비들이 직책을 다하려 한 것이지 어찌 딴 심정이 있었겠습니까?”하니, 전교하기를,
“이주등이 나의 말을 받들지 않았으므로 놔둘 수 없으니, 사헌부(司憲府)로 하여금 국문하게 하라.”하고,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정경조(鄭敬祖), 조지서(趙之瑞), 강경서(姜景敍)에게 명하여 대신 일을 기록하게 하였다.
○丁亥/記事官李冑、南宮璨啓曰: “近來國家有密鞫事, 注書、史官皆不得入。 今則注書入而臣等獨未入, 未審所以。” 傳曰: “國家秘密之事, 不宜衆聽, 故只令韓健鞫之。 爾等以史失其傳爲言, 故使韓健記其事, 以畀史官, 爾等屢言之何也? 然則爾等傳聞之事, 不書史冊乎? 且注書有書寫之事, 故不得已入參耳。” 冑等啓曰: “臣等職在史官, 見聞之事, 何以不書乎? 雖村野之諺、僕隷之語, 如有可記之事, 悉書以傳於後。 但韓健非職帶春秋, 其不可撰史也明矣。 非史官所記之事, 臣等傳錄以爲國史, 心實未穩。 若此不已, 則臣等將恐人人秉史筆也。” 上命召尹弼商、洪應、盧思愼, 傳曰: “李冑等以韓健非文臣不可記事, 屢違敎旨, 推鞫何如? 且前者韓健爲都承旨, 臺諫駁之非一, 李冑等因臺諫之言, 以下陵上, 豈合事體乎?” 弼商等啓曰: “此儒欲供其職爾, 豈有他情?” 傳曰: “冑等不奉予言, 不可置也。 其令司憲府鞫之。” 命弘文館校理鄭敬祖、趙之瑞、姜景敍代記其事。
성종 233권, 20년(1489 기유/명홍치(弘治)2년) 10월 23일(정미) 1번째기사
윤필상, 노사신등을 참시관으로 삼아 유생들에게 책문으로 시험을 보게하다
윤필상(尹弼商), 노사신(盧思愼), 신승선(愼承善), 유순(柳洵), 성현(成俔), 권건(權健)을 시관(試官)으로 삼고, 이승건(李承健), 조지서(趙之瑞), 강경서(姜景敍), 황계옥(黃啓沃)을 참시관(參試官)으로 삼아, 유생(儒生) 2백70여인을 대궐뜰에 모아 책문(策問)21549)으로 시험을 보이도록 명하였다.
그 책문에 이르기를,
“왕(王)은 말하노라. 선비가 세상에 나서 학업(學業)을 부지런히 하여 효과를 거두는 것은 임금을 보좌(補佐)하여, 옹희(雍熙)21550)한 정국(政局)을 이루어놓고 인수(仁壽)21551)한 나라로 만들어 놓기를 누가 마음가져보지 않겠는가? 그러나 일삼는 업(業)이 다르게 되고 다스리는 도리가 같지않아, 천하(天下)를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나그네로 죽어간 이가 있기도 하고 공명(功名)에 뜻을 두다가 마침내 실의(失意)속에 죽어간 이도 있었으니,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타고난 명(命)이 모두 트이지못하여 그런 것이겠는가? 하는 말이 맞지않는 것이어서 그런 것이겠는가? 임금이 밝지못하여 참소하는 말이 잘 터지게 되어 그런 것이겠는가? 재상(宰相)이 현명한 사람이 없어 공정한 도리가 행해지지않아 그런 것이겠는가? 임금과 신하가 잘 만나게 되기가 어찌 그리 어려운지, 옛적의 유자(儒者)들은 말만하면 경(經)이 되고 발만 움직여도 법이 되었지만 세상을 만나지 못했었으니, 교룡(蛟龍)21552)이 흙탕에 서려있고 난봉(鸞鳳)21553)이 가시덤불에 있는 것과 같은 이들의 일을 하나하나 들어 갖추 그 까닭을 들려줄 수 있겠는가?
내가 부덕(否德)한 몸으로 큰 왕업(王業)을 이어받아 지켜오느라 어진 고굉(股肱)21554)의 비호(庇護)를 힘입으며 익히 제시(濟施)21555)하는 방법을 들어보았는데, 요체(要諦)는 힘만 쓰기에 있지않고 인재를 구득하는데 있었다.
지금의 다사(多士)들 중에 어찌 옛적과 같은 사람이 없겠는가마는, 현철(賢哲)한 사람을 알아보기 어려움은 성인(聖人)들도 면하지못한 일인데, 과인(寡人)과 같은 몸으로 인재를 구득했다는 이름이 있게 되겠는가? 비록 그러하나 알아보기 어렵다고만 여기어 자방(咨訪)21556)하지 않는다면 어찌 임금이 된 도리이겠는가? 너희들은 성학(聖學)을 강송(講誦)하여 평소에 도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비록 벼슬자리에 있어보지 않았더라도 정사를 행해가는 도리를 진실로 일찍이 찾아보았을 것이니 범범하게 하지도 말고 소략하게도 하지말고서 마음을 다해 대답하라. 내가 장차 친히 보겠다.”하였는데, 어제(御製)한 것이었다.
註21549]책문(策問): 경의(經義) 또는 시정(時政)등에 관한 의견을 물어 적게하는 문과(文科)시문(試問)의 한 가지.註21550]옹희(雍熙): 화락 註21551]인수(仁壽): 인덕(仁德)이 있고 명(命)이 긺 註21552]교룡(蛟龍): 때를 만나지못해 뜻을 이루지 못하는 영웅호걸의 비유 註21553]난봉(鸞鳳): 덕이 있는 현인, 군자의 비유.註21554]고굉(股肱): 임금이 가장 신임하는 중신(重臣)을 뜻함.註21555]제시(濟施): 제중박시(濟衆博施). 제중은 모든 사람을 구제하는 것이고, 박시는 널리 혜택을 편다는 것인데, 자공(子貢)이, “제중하고 박시한다면 어떻겠습니까?”하니, 공자가 “요순(堯舜)같은 성인들도 오히려 다하지 못했다고 여긴 일이다.”했었음.註21556]자방(咨訪): 물음.
○丁未/命以尹弼商、盧思愼、愼承善、柳洵、成俔、權健爲試官, 以李承健、趙之瑞、姜景叙、黃啓沃爲參試官, 會儒生二百七十餘人于闕廷試策。王若曰: 士生於世, 勤業致效, 佐人君致雍熙之政, 開仁壽之域, 孰不有其心也? 然而事業有殊, 治理不同, 有轍環天下而卒老于行者, 有志掛功名而竟死于落者, 其故何歟? 命皆有不達而然耶? 言皆有不中而然耶? 人君不明讒說易興而然耶? 宰相無賢, 公道不行而然耶? 君臣之際會, 何其難也? 古之儒者, 辭出爲經, 擧足爲法, 而不遇于世, 若蛟龍蟠泥、鸞鳳棲棘者, 可歷擧而備聞其故耶? 予以否德, 嗣守丕基, 庇賴股肱之良, 習聞濟施之方, 其要不在於務力, 在乎得人。 今之多士, 豈無古之人? 而知哲之難, 聖人不免, 其以寡躬而有得人之名乎? 雖然以謂知難而莫之咨訪, 豈是爲君之道哉? 爾等講誦聖學, 楣有素, 雖不在位, 行政之道, 固嘗求之。 毋泛毋略, 悉心以對。 予將親覽焉。御製也。
성종 233권, 20년(1489 기유/명홍치(弘治)2년) 10월 25일(기유) 1번째기사
판한성부사 김연지의 유언에 따라 막내 김견수를 적자로 삼게 하고 각 시험의 초장에 강경을 하는 것에 대해 의논케 하다
고(故) 부령부사(富寧府使) 김익수(金益壽)의 아내 송씨(宋氏)가 상언(上言)하기를,
“지아비 김익수는 곧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김연지(金連枝)의 적자(適子)인데 일찍이 부령부사로 있다가 정해년의 난(亂)21558)에 죽었습니다. 그 때 김덕흥(金德興)이라는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바야흐로 강보(襁褓)에 있으므로, 시아비가 ‘덕흥은 나이가 어려 뒷일을 부탁할 수 없다’하여, 막내아들 김견수(金堅壽)로 적자를 삼아 선대의 제사를 받들도록 했었습니다. 이제는 김견수가 이미 죽고 김덕흥이 또한 이미 장성했는데 본 종가(宗家)의 적손(嫡孫)으로서 선대의 제사를 받들지못하게 됨은 인정과 법에 어그러지는 일이니, 법에 의거하여 후사(後嗣)로 세우게 해주시기를 청합니다.”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이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을미년21559) 무렵에 송씨가 이를 들어 상언하였기에 본조(本曹)에서 아뢰기를, ‘김연지가 손수 유서(遺書)를 써 김견수로 후사를 삼으며 뒷일을 부탁하되 말뜻이 정녕(丁寧)하게 하였으니, 진실로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서 명한 것도 아니요 또한 사정에 따르느라 적자를 폐한 것도 아닌데, 그의 유언한 뜻을 어기고 관(官)에 고하여 적자를 다투는 것은 자손의 도리에 어긋나는 짓이니, 마땅히 김연지의 정원(情願)에 의해 시행해야합니다.’하니, 이미 윤허(允許)를 받았었습니다. 이번에 다시 거듭 소청(訴請)하는 것은 매우 불가하니, 청리(聽理)하지 말기를 청합니다.”하니,
영돈녕(領敦寧) 이상 및 의정부(議政府)에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윤필상(尹弼商), 홍응(洪應), 이극배(李克培), 노사신(盧思愼), 윤호(尹壕), 이철견(李鐵堅), 손순효(孫舜孝)는 의논하기를,
“아뢴 대로 시행해야 합니다.”하고,
이숭원(李崇元)은 의논하기를,
“장자 김익수의 아들이 승계(承繼)를 감당하지못할 까닭이 없는데도 차자 김견수로 적자를 삼았으니, 사랑과 미움때문에 적통(適統)을 빼앗고 종계(宗系)를 어지럽힌 것이 분명하여 진실로 개정(改正)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다만 송씨가 허물을 시아비의 명에 돌리며 적자다툼을 하는 것은 진실로 대체에 방해로우니, 예조로 하여금 다른 자손이 있는지 없는지를 고찰하도록 하여, 만일 다른 자손이 있다면 다시 세워 적자를 삼아 사랑과 미움때문에 적자를 다투게 되는 폐단을 끊어버리게 해야 합니다.”하고,
정문형(鄭文炯)은 의논하기를,
“적자 세우기를 법에 어그러지게 한 일은 율(律)에 규정한 조문(條文)이 있습니다. 그러나 김견수가 제사를 받들게 된 일은 국가에서 벌써 이미 상의하여 확정한 것이므로, 이제 다시 개정할 수는 없습니다.”하였다.
또 육조(六曹), 한성부(漢城府), 대간(臺諫)에게 의논하도록 하니, 정괄(鄭佸), 원중거(元仲秬)가 의논하기를,
“맏이로 적자를 세움은 고금의 공통된 법이기 때문에 율(律)에 ‘적자 세우기를 법에 어그러지게 한 것[立嫡子違法]’이란 조문이 있는 것입니다. 김연지 의 장자 김익수가 비록 죽었지만, 그의 아들이 있었으니, 따로 제사를 맡을 수없는 까닭이 없다면 이 사람이 진실로 마땅히 적자가 되어야하는데, 김연지가 마음대로 차자 김견수로 하여금 제사를 받들게 하였으니, 이는 김연지의 잘못입니다. 지난번에 예조(禮曹)에서 김연지의 법에 어긋나는 유서(遺書)에 따라 김견수로 적자삼기를 청했었는데, 이런 길이 한 번 열리면 사랑과 미움때문에 서로 쟁탈(爭奪)하느라 윤리(倫理)를 망치고 풍속을 어지럽히게 되어 손상되는 바가 많을 것입니다. 신들은 예조의 이런 계달(啓達)은 진실로 불가하다고 여깁니다. 만일 ‘전번에 이미 아뢰어 결정해놓고 이제 또 개정한다면 경솔하게될 듯하다.’고 한다면, 무릇 일이란 중(中)을 얻는 것이 귀중한 법인데, 어찌 자주 변경하기를 혐오할 수 있겠습니까?”하고,
한치례(韓致禮)는 의논하기를,
“김연지의 아들 김익수는 미욱하거나 용렬한 사람이 아닌데, 이시애(李施愛) 의 난에 죽은 뒤에 김견수를 적자로 삼았으니, 신은 사랑과 미움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라 여깁니다. 가령 적자가 비록 어리석다하더라도 손자가 계승할 수 있는 법이니, 큰 손자를 버려두고 제사를 맡지못하게 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합니다.”하고,
신승선(愼承善), 권건(權健)은 의논하기를,
“김연지는 사리를 아는 재상(宰相)이었습니다. 어찌 적자를 방치하여 종통(宗統)을 어지럽히는 것이 불가한 줄을 알지 못하였겠습니까? 생각하건대, 반드시 그 때에 김덕흥(金德興)이 강보(襁褓)를 면하지못하고 있어 살게될 것인지 죽게될 것인지를 알기어려운데, 김견수는 벼슬길이 이루어지고 명성(名聲)이 서있어 자신의 죽은 뒤의 일을 맡길 수 있으므로 제사를 맡도록 결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길이 한번 열리면 부자(父子), 형제(兄弟)의 사이에 사랑과 미움에 끌리어 마음대로 지자(支子)로 하여금 적자의 자리를 빼앗게하는 자가 있게될 것입니다. 법에 어그러지게 적자를 세운 것에 관한 율이 정해진 조문이 있으니, 율대로 논단해야 합니다.”하고,
유순(柳洵), 박안성(朴安性), 윤은로(尹殷老), 권정(權侹), 김제신(金悌臣)은 의논하기를,
“맏이로 적자를 세움은 고금의 공통된 의리이요, 맏이를 폐하는 죄는 율(律)에 일정한 조문이 있으니, 만일 부득이하여 서자(庶子)로 세우려면 사유를 갖추어 관에 신고해야 합니다. 김연지는 장자의 아들 김덕흥(金德興)을 버리고 마음대로 차자 김견수(金堅壽)를 세워 종통(宗統)의 법을 어지럽혔으니, 마땅히 금해야할 일입니다. 만일 정탈(定奪)한 지 이미 오래인 것때문에 그대로 하고 고치지않는다면 종통의 법이 무너져 장차 폐단을 바로잡기 어려울 것이니 고치지않아서는 안됩니다. 다만 송씨가 시아비의 명령을 그르게 여기며 신소(申訴)하여 적자를 다투는 것은 또한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하고,
이평(李枰), 김전(金琠), 윤긍(尹兢)은 의논하기를,
“맏이로 적자를 세움은 고금의 공통된 의리이요 법에 어그러지게 적자를 세우면 율에 정해진 조문이 있습니다. 김연지가 장자 김익수는 일찍 죽고 손자 김덕흥은 유약(幼弱)하지만 차자 김견수는 벼슬이 재상에 이르렀는지라, 김연지가 한때의 사랑과 미움만으로 법에 어그러지게 적자를 세워 부자와 형제간에 그야말로 서로들 싸우고 다투게 하였으니, 이는 작은 일이 아닙니다. 하물며 김견수(金堅壽)가 또한 법에 어그러진 것임을 알아차리고서 김덕흥 으로 하여금 신주(神主)곁에 이름을 쓰도록 하였으니, 그의 뜻이 가상합니다. 적손(嫡孫) 김덕흥이 제사를 받들게하는 것이 사리에 합당합니다.”하고,
이종윤(李從允)은 의논하기를,
“종손(宗孫)이 제사를 받드는 것은 천하의 공통된 예법입니다. 이러므로 선왕(先王)들이 예를 제정할 적에 종손과 지손의 구분에 있어 근엄(謹嚴)하게 하여, 종손인 다음에야 제사를 받들 수 있은 것입니다. 김연지(金連枝)의 장자 김익수는 죽었고 지자(支子) 김견수는 생존했었으니, 그렇다면 김연지가 제사맡는 일을 김견수에게 옮긴 것은, 만일 사랑과 미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반드시 김견수는 살아있고 김익수는 죽은 것에서 나왔을 것입니다.
지금은 김익수와 김견수가 모두 이미 죽었고 김익수의 아들 김덕흥이 건장하게 자랐으니, 마땅히 공통된 예법대로 제사를 받들게 해야 합니다.”하니, 전교하기를,
“맏이를 적자로 세우는 것은 고금의 공통된 의리이다. 김연지가 장자의 아들로써 적손을 삼지않고 차자 김견수로 적자를 삼은 것은, 반드시 그 때에 김덕흥은 어렸지만 김견수는 입신(立身)도 하고 공명(功名)도 이루어 종가(宗家)의 제사를 맡길만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이제는 김덕흥의 나이가 장성하였으니, 김덕흥으로 적손을 삼아 적사(嫡嗣)를 바로잡는 것이 어떻겠는가?”하매, 윤필상이 의논하기를,
“천하에 옳지않은 부모는 없는 법인데, 이번에 자부(子婦)가 소청(訴請)한 것 때문에 경솔하게 김연지(金連枝)의 유명(遺命)을 고친다면, 이는 아들된 사람들의 제 아비를 그르게 여기는 마음을 열어주는 것이어서 강상(綱常)이 문란하게될 것입니다. 유독 김연지만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조말생(趙末生)도 역시 끝에 아들 조근(趙瑾)으로 제사를 맡게하여, 이와 같은 유(類)가 또한 많이 있으므로 만일 개정(改正)하는 단서를 열어놓는다면, 조씨(趙氏) 가문의 자손들도 또한 반드시 봉기(蜂起)하여 소청하게될 것입니다. 어찌 하나하나 뒤따라 고칠 수 있겠습니까? 종손을 중히 여기는 법을 지키려다가 도리어 강상을 어지럽히는 일을 열어놓게될 것이므로, 신은 이를 위해 두려워합니다.”하고,
홍응(洪應), 이극배(李克培), 노사신(盧思愼), 이철견(李鐵堅)은 의논하기를,
“맏이로 적자를 세우는 것은 고금의 큰 법이지만, 적자를 놓아두고 서자(庶子)로 적자를 세운 것은 아비의 유명(遺命)에서 나온 것인데 이를 고칠 수 있겠습니까? 안되는 일이니, 아비의 유명을 중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지금 김연지가 적자를 놓아둔 것은 한 가문의 불행한 일이기는 합니다마는, 부모의 유명(遺命)을 어기지못하는 것은 만세토록 지켜야 하는 예법[禮防]입니다. 만일 한 번 고치게 된다면 장차 적자(賊子)21560)들이 아비가 하는 것을 엿보아 두었다가 하나하나 고발하게 될 것인데, 국가에서 그대로 들어준다면 이는 천하만세의 인륜(人倫)에 관한 교화(敎化)를 무너뜨리고 그들의 악역(惡逆)한 마음을 길러주게 될 것이니 그 화를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선 김연지의 유명대로 해야합니다.”하고,
한치례(韓致禮), 정괄(鄭佸), 박안성(朴安性), 권건(權健), 권정(權侹)은 의논하기를,
“적자(嫡子)를 폐하여 종통(宗統)을 어지럽히는 짓은 개정하지 않을 수 없으니, 앞서 의논한 대로 시행하소서.”하고,
이숭원(李崇元)은 의논하기를,
“김연지가 사랑과 미움때문에 김견수(金堅壽)를 세워 적자를 삼은 것이니 이번에 김익수의 아들로써 적자를 삼는 것이 바른 예에 합치됩니다. 다만 김익수의 아내 송씨(宋氏)가 감히 아비의 유명을 어기고 신소(申訴)하여 적자 세우기를 다투었으니 이는 아비를 안중(眼中)에 두지않은 것이어서 그의 아들로 적자를 삼을 수는 없습니다. 다시 다른 자손을 세워 적자를 삼는 것이 명분(名分)도 바르고 말도 순탄하여 바로 대체(大體)에 합치하기 때문에 앞서 의논할 적에도 언급했었습니다.”하고,
정문형(鄭文炯)은 의논하기를,
“김연지(金連枝)가 법에 어그러지게 적자를 세운 것도 진실로 불가하지만, 송씨(宋氏)의 죄는 더욱 중합니다. 이에 앞서 예조(禮曹)에서 김연지의 일에 관하여 논계(論啓)하기를, ‘김견수로써 적자를 삼은 것은 관(官)에 고하여 정탈(定奪)해야하는 법의 이전에 있은 일이니, 김연지의 뜻대로 하기를 청합니다’했었으니, 지금 송씨의 소청에 따라 고치는 것은 공평하지못합니다. 또한 법을 세우기 이전의 오랜 날에 적자로 세운 것이 또 있을 것인데, 어찌 감히 하나하나 개정할 수 있겠습니까?”하고,
윤긍(尹兢), 조구(趙球), 이수공(李守恭)은 의논하기를,
“김연지가 김견수로 적자를 삼은 것은, 반드시 김익수는 일찍 죽고 그 아들은 미약하여 제사를 받들지못하게 된 때문이었으니, 이는 특히 한때의 사정으로 한 일입니다. 이제는 김견수(金堅壽)는 죽고 김익수의 아들이 장성하여 제사를 받들 만하니, 마땅히 김익수의 아들로 적사(嫡嗣)를 삼아야할 것입니다.”하고,
정석견(鄭錫堅), 곽심(郭諶), 민상안(閔祥安)은 의논하기를,
“《대전(大典)》내용에 ‘사당(祠堂)을 세운 가옥[家舍]은 제사를 맡는 자손에게 전해준다’고 한 것은 진실로 선왕(先王)들께서 맏이로 적자를 세우는 뜻에 근본한 것입니다. 어찌 김연지(金連枝)의 한 가문의 편애(偏愛)한 사정을 따라주느라 만세의 떳떳한 법을 폐할 수 있겠습니까? 김익수의 아들로 제사를 맡게하는 것이 합당합니다.”하니,
전교하기를,
“김연지의 유명(遺命)대로 하여 그전대로 김견수를 적자로 삼으라.”하였다.
또 영돈녕(領敦寧) 이상과 의정부(議政府), 육조(六曹), 한성부(漢城府)에 명하여 유생에게 향시(鄕試), 한성시(漢城試), 관시(館試)의 초장(初場)에 강경(講經)을 하는 것이 편리한지의 여부를 의논하도록 하니, 심회(沈澮), 윤필상(尹弼商), 한치례(韓致禮), 정괄(鄭佸), 박안성(朴安性), 권건(權健), 성숙(成俶), 권정(權侹), 송철산(宋鐵山), 이집(李諿)이 의논하기를,
“《대전(大典)》대로 시행해야 합니다.”하고,
홍응(洪應), 이극배(李克培), 노사신(盧思愼)은 의논하기를,
“근래에 유생(儒生)들이 거관(居館)21561)하면서 글을 읽지않는 것이 염려되기 때문에 임시변통의 방법에 따라 지난해의 관시(館試), 한성시, 향시에 강경을 하게하여 한때의 폐단을 바로잡은 것이니 이제는 《대전》대로 거행해야할 것이 진실로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하니,
전교하기를,
“ 《대전》대로 하는 것이 가하다.”하였다.
또 최충(崔沖), 최유선(崔惟善), 조간(趙簡)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는 것이 편리할지의 여부를 의논하였는데, 홍문관(弘文館)도 또한 참여하였다.
심회(沈澮), 윤필상(尹弼商), 홍응(洪應), 노사신(盧思愼), 이철견(李鐵堅), 정괄(鄭佸), 박안성(朴安性), 권건(權健), 성숙(成俶), 권정(權侹), 송철산(宋鐵山), 정석견(鄭錫堅), 곽심(郭諶), 민상안(閔祥安), 민사건(閔師騫), 홍한(洪瀚), 민보익(閔輔翼), 성희안(成希顔)은 의논하기를,
“예조(禮曹)에서 아뢴 대로 하소서.”하고,
손순효(孫舜孝)는 의논하기를,
“전(傳)21562)에 이르기를, ‘한 가정이 인(仁)하면 온 나라가 인에 흥기(興起)하게되고 한 가정이 겸양(謙讓)하면 온 나라가 겸양에 흥기하게 된다.’고 했는데, 대개 사람의 천성(天性)은 모두 착하므로 감동하여 흥기함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고려사(高麗史)》를 고찰하건대, 최충(崔沖), 최유선(崔惟善), 조간(趙簡)은 모두 글을 잘하고 도덕이 있어 울연(蔚然)하게 한 시대의 모범이 되었으므로 한때는 공자(孔子)라 칭하기도 하고 더러는 정문(旌門)을 세워 표하기도 했었습니다.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는 것이 비록 사전(祀典)에 실리지는 아니하였지만, 그 때의 조정공론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설총(薛聰), 최치원(崔致遠), 안유(安裕)는 모두 우리 동방(東方)의 문헌(文獻)21563)의 선비로서 문묘에 배향(配享)되었는데 중국 조정에서는 알지못하는 일입니다. 중국 조정에서는 알지도 못하는 것인데 우리 조정에서 종사(從祀)하게된 것은 특히 그 사람들이 우리 동방의 준칙(準則)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최충과 조간등도 또한 온 나라 온 고을의 어진 선비로서 시대의 소망(所望)이 되어 사람들이 감동하고 흠모하게 되었고, 문묘에 종사한 그 유래가 이미 오래 되었던 것도 반드시 소이연(所以然)이 있는 것입니다. 만일 이번에 사전(祀典)에 실리지않은 것때문에 제거해버린다면 고을 백성들의 선(善)을 흠모하는 마음을 저해(沮害)하게되고 정혼(貞魂)의 의탁할 데가 없어 아예 여제(厲祭)21564)받는 영혼만도 못하게될까싶습니다. 신의 마음에는, 설총등이 중국의 문묘에 종사(從祀)하기는 부족하지만 우리 동국(東國)의 문묘에 종사하기엔 넉넉하고, 최충등이 국학(國學)의 문묘에 종사하기는 부족하나 향묘(鄕廟)에 종사하기에는 넉넉하다고 여기오니, 아직은 그전대로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하고,
이숭원(李崇元)은 의논하기를,
“최충, 최유선, 조간등은 사전(祀典)에 실려있는 사람들이 아니니, 문묘에 있게 되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그러나 이 세 사람은 제사한 지가 이미 오래 되었는데 지금 와서 제사지내지않는 것은 미안하니,《고려사(高麗史)》를 고찰해보아 만일 과연 그 고을에 공덕이 있었다면 오현당(五賢堂)의 예에 의해 따로 사당을 세워 제사하게 하소서.”하고,
정문형(鄭文炯)은 의논하기를,
“사전(祀典)에 실리지못한 사람은 문묘에 들어가는 것이 합당치 않습니다. 다만 옛적의 여릉(廬陵), 유주(柳州)등의 사당21565)은 모두 그 고을에 공덕이 있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스스로 사사로이 사당을 세워 제사한 것이니 해주(海州)와 김제(金堤) 사람들이 만일 이에 의해 하게된다면 금하지않는 것이 가합니다.”하고,
이집(李諿)은 의논하기를,
“고려(高麗)때에 설총(薛聰), 최치원(崔致遠), 안유(安裕)등 몇 사람만 문묘 에 종사했습니다. 우리 동방(東方)이 삼한(三韓) 이래에 학문과 사장(詞章)으로 당세에 이름이 현달한 사람들이 어찌 두어 분에만 그치겠습니까? 그러나 단지 두어분만 취한 것은 반드시 모두 성문(聖門)에 도움이 있었고 문장(文章)과 덕업(德業)이 전배(前輩)들보다 뛰어난 분들 이어서입니다. 최충(崔沖) 같은 분은 제자들을 교육시켜 우리 동방에 문학(文學)이 왕성해진 것이 최충 부터 시작되었으므로, 당시에 해동공자(海東孔子)라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고려로부터 아조(我朝)에 이르기까지 문묘에 종사하기를 거론(擧論)하지못했던 것은 어찌 공론이 없는 것이겠습니까? 또한 최유선(崔惟善)과 조간(趙簡)은 역시 최충보다도 못하여 이들은 모두 사전(祀典)에 실리지않는 사람들인데 어찌 문묘에 종향(從享)할 수 있겠습니까? 옛사람들도 더러는 그 사람의 특이한 정책을 사모하고 더러는 그 사람의 공명(功名)을 흠모하여 사당을 세워 제사하기도 하고 비(碑)를 세워 기록하기도 한 것이 있으니, 만일 해주(海州)나 김제(金堤) 사람들이 옛적처럼 따로 사당을 세워 제사하는 것은 법에 금할 바가 아니지만, 문묘에 종사하는 것은 신은 되지못할 일인 듯싶습니다.”하고, 윤긍(尹兢), 조구(趙球), 이수공(李守恭)은 의논하기를,
“최충, 최유선, 조간은 사전(祀典)에 실린 사람들이 아니니 문묘에 배향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고을에 공덕(功德)이 있는 사람들이어서 만일 고을 사람들이 사사로이 스스로 사당을 세워 제사하는 것은 금할 것이 없습니다.”하고,
강경서(姜景敍), 허집(許輯), 김전(金詮), 신용개(申用漑)는 의논하기를,
“예조(禮曹)에서 아뢴대로 하는 것이 공편합니다. 그러나 옛말이 ‘고을 선생이 돌아가면 사(社)에서 제사해야되는 것이다’했으니, 만일 고을 사람들이 스스로 딴 사당을 세워 제사하기를 오현당(五賢堂)의 예처럼 하는 것은 금하지 말아야할 뿐이고, 국가에서 따로 사당을 만들어 제사하게 하는 것은 합당하지않습니다.”하니,
전교하기를,
“문묘에 종사(從祀)하지말도록 하라.”하였다.
註21558]정해년의 난(亂): 조선조 세조(世祖) 13년(1467)에 길주(吉州)의 호족(豪族) 이시애(李施愛)가 그 아우 이시합(李施合)과 더불어 지방 세력을 배경으로 하여 북도(北道)의 수령(守令)을 남도(南道)사람으로써 삼는 것은 부적당하다고 북도인을 선동하여 일으킨 반란을 말함. 이시애(李施愛)의 난(亂).註21559]을미년: 1475 성종 6년.註21560]적자(賊子): 어버이를 반역하는 불효한 자식.註21561]거관(居館): 성균관의 재방(齋房)에 들어가있는 일. 註21562]전(傳): 《대학(大學)》註21563]문헌(文獻): 글과 법도.註21564]여제(厲祭): 여귀(厲鬼)에게 지내는 제사 註21565]여릉(廬陵), 유주(柳州)등의 사당: 여릉(廬陵)은 중국 고대의 고을 이름. 곧 지금의 강서성(江西省) 길안현(吉安縣)의 남쪽지방으로 구양수(歐陽脩)의 출생지. 유주(柳州)는 유종원(柳宗元)이 벼슬하다 좌천(左遷)되어 자사(刺史)로 나갔던 곳. 곧 구양수와 유종원의 사당을 가리키는 것임.
○己酉/故富寧府使金益壽妻宋氏上言曰:夫益壽卽判漢城府事連枝適子也, 嘗爲富寧府使, 死於丁亥之亂。 時有一子曰德興, 方在襁褓, 舅以德興年幼不足托後, 以末子堅壽爲適, 許奉先祀。 今堅壽已死, 德興亦已長成, 以本宗適孫, 不得奉先世祭祀, 有乖情法。 請依法立後。禮曹據此啓: “在乙未年間, 宋氏以此上言, 本曹啓云: ‘連枝手草遺書, 以堅壽爲嗣, 屬以後事, 辭意丁寧, 則固非亂命, 亦非徇私廢適之比。 而拂其遺意, 告官爭適, 有違子道。 當依連枝情願施行。’ 已蒙允可。 今更申訴, 甚不可。 請勿聽理。” 命議于領敦寧以上及議政府。 尹弼商、洪應、李克培、盧思愼、尹壕、李鐵堅、孫舜孝議: “依所啓施行。” 李崇元議: “長子益壽之子, 無不堪承繼之故, 而以次子堅壽爲適, 其以愛憎奪適亂宗明矣, 固宜改正。 但宋氏歸咎父命而爭適, 實妨大體。 令禮曹考他子孫有無, 若有他子孫, 更立爲適, 以絶愛憎爭適之端。” 鄭文炯議: “立適違法, 律有正條。 然金堅壽奉祀事, 國家已曾商確, 今不可更改。” 又議于六曹、漢城府、臺諫, 鄭佸、元仲秬議: “立嫡以長, 古今通法, 故律有立嫡子違法之條。 連枝長子益壽雖死, 其子在矣, 而別無不可主祀之故, 則是固當爲嫡矣。 連枝擅使次子堅壽奉祀, 此則連枝之誤也。 前者禮曹從連枝違法遺書, 請以堅壽爲嫡, 此門一開, 則以愛憎相奪, 敗常亂俗, 所損多矣。 臣等以爲禮曹此啓, 固爲不可。 若曰: ‘前已啓定, 而今若改之, 似爲輕矣。’ 則凡事貴於得中, 何可嫌於屢變?” 韓致禮議: “金連枝子益壽, 非迷劣人, 死於李施愛之亂, 後以堅壽爲嫡, 臣以爲出於愛憎而然也。 假令嫡子雖愚, 其孫可繼, 棄長孫而不主祀, 未穩。” 愼承善、權健議: “連枝識理宰相, 豈不知廢嫡亂宗之爲不可也? 想必其時德興未免襁褓, 生死難知, 而堅壽宦成名立, 可以寄托身後之事, 定爲主祀也。 然而此門一開, 父子兄弟之間, 牽於愛憎, 擅使支子奪嫡者有之。 立嫡子違法律有正條, 依律論斷。” 柳洵、朴安性、尹殷老、權侹、金悌臣議: “立嫡以長, 古今通(議)〔義〕, 廢長之罪, 律有常條。 如不得已而欲立庶子者, 則具由告官可也。 連枝廢其長子之子德興, 而擅立次子堅壽, 以亂宗法, 在所當禁。 若以定奪已久, 因仍不改, 則宗法毁而弊將難救, 不可不改也。 但宋氏以父命爲非, 申訴爭嫡, 亦不可不治。” 李枰、金琠、尹兢議: “立嫡以長, 古今通義, 違法立嫡, 律有正條。 而金連枝長子益壽早死, 其孫德興幼弱, 次子堅壽致位宰相, 連枝以一時愛憎, 立嫡違法, 使父子兄弟之間, 乃至於相殘, 此非細故。 況堅壽亦知違法, 使德興題名神主之傍, 其意可嘉。 以嫡孫德興奉祀, 理當。” 李從允議: “宗子奉祀, 天下之達禮。 是以先王制禮, 謹嚴於宗支之分, 宗子然後得以奉祀。 連枝宗子益壽身死, 支子堅壽生存, 然則連枝移主祀於堅壽, 若不出於愛憎, 必出於生亡。 今者益壽、堅壽皆已身死, 而益壽之子德興壯長, 宜遵達禮而奉祀。” 傳曰: “立嫡以長, 古今通義。 連枝不以長子之子爲嫡, 而以次子堅壽爲嫡, 必以其時德興幼少, 堅壽則立身成名, 可托宗祀而然也。 今德興年壯, 以德興爲嫡, 以正嫡嗣何如?” 尹弼商議: “天下無不是底父母。 今因子婦之訴, 輕改連枝之命, 則是啓人子非其父之心, 而綱常紊矣。 不獨連枝爲然, 趙末生亦以末子趙瑾主祀, 如此之類, 亦多有之。 若開改正之端, 趙家子孫亦蠭起而訴之, 豈可一一追改乎? 欲重宗子之法, 而反開亂常之事, 臣則爲此懼也。” 洪應、李克培、盧思愼、李鐵堅議: “立嫡以長, 古今大法。 而廢嫡立庶, 出於父之命, 則是可改之乎? 不可也, 以父命爲重故也。 今連枝之廢嫡, 一家之不幸也, 不能違父之命, 萬世之防也。 若一改之, 將賊子窺覘父之所爲, 一一發告, 國家從而聽之, 是毁天下萬世彝倫之敎, 而長其惡逆之心矣, 其禍可勝道哉? 姑依連枝所命。” 韓致禮、鄭佸、朴安性、權健、權侹議: “廢嫡亂宗, 不可不改正。 依前議施行。” 李崇元議: “連枝以愛憎立堅壽爲嫡, 今以益壽之子爲嫡, 正合於禮。 但益壽之妻宋氏敢違父命, 申訴爭嫡, 是不有其父, 不可以其子爲嫡。 更立他子孫爲嫡, 名正言順, 正合大體。 故前議及之。” 鄭文炯議: “連枝違法立嫡, 固不可, 宋氏之罪尤重。 前此禮曹論連枝事, 以爲: ‘以堅壽爲嫡, 在告官定奪之法之前, 請從連枝之意。’ 今從宋氏之訴改之, 未便。 且立法前久遠立嫡者亦有之, 安敢一一改正乎?” 尹兢、趙球、李守恭議: “連枝以堅壽爲嫡者, 必以益壽早死, 其子微弱, 未得奉祀, 是特出於一時之私耳。 今堅壽死而益壽之子長, 可以奉祀, 當以益壽之子爲嫡嗣。” 鄭錫堅、郭諶、閔祥安議: “《大典》內: ‘立廟家舍, 傳於主祭子孫。’ 云者, 實原先王立嫡以長之意, 豈可從連枝一家偏愛之私, 廢萬世經常乎? 使益壽之子(立)〔主〕祀爲當。” 傳曰: “從連枝之命, 仍舊以堅壽爲嫡。” 又命領敦寧以上、議政府、六曹、漢城府, 議儒生鄕、漢城、館試初場講經便否。 沈澮、弼商、致禮、鄭佸、安性、權健、成俶、權侹、鐵山、李諿議: “依《大典》施行。” 洪應、克培、思愼議: “近者患儒生不居館讀書, 故從權宜, 去年館、漢、鄕試講經, 以救一時之弊。 今依《大典》擧行, 固無疑也。” 傳曰: “依《大》典可也” 又議崔冲、崔惟善、趙簡從祀文廟便否, 弘文館亦與焉。 沈澮、弼商、洪應、思愼、鐵堅、鄭佸、安性、權健、成俶、權侹、鐵山、錫堅、郭諶、閔祥安、閔師騫、洪瀚、閔輔翼、成希顔議: “依禮曹所啓。” 舜孝議: “傳云: ‘一家仁, 一國興仁: 一家讓, 一國興讓。’ 蓋人性皆善, 有感而興起者如此。 考之《高麗史》, 崔冲、崔惟善、趙簡皆有文章道德, 蔚爲一世儀範, 或時稱孔子, 或立標旌門。 其從祀文廟, 雖不載於祀典, 一時朝廷公議, 未可知也。 薛聰、崔致遠、安裕俱印方文憲之士, 配享文廟, 中朝所不知也。 中朝不知而我朝從祀, 特以其人爲東方之準則也。 崔冲、趙簡等亦以一國一鄕之善士, 爲時所望, 使人感慕, 以至從祀文廟, 其來已久, 必有所以然者。 今若以祀典不載而去之, 則恐沮鄕民慕善之心, 貞魂無依, 曾不如厲祭之魂矣。 臣心以謂薛聰等於中國文廟則不足, 而優於東國之廟: 崔冲等於國學從祀則不足, 而優於鄕廟之祀。 姑且仍舊何如?” 李崇元議: “崔冲、崔惟善、趙簡等非祀典所載, 不宜在文廟。 然此三人祀之已久, 今不致祀未安。 考《高麗史》, 若果有功德於其邑, 依五賢堂等例, 別立廟致祭。” 鄭文炯議: “祀典不載者, 不當入文廟。 但古之廬陵、柳州等廟, 皆有功德於其邑, 邑人私自立祀耳。 海州、金堤人若依此爲之, 勿禁可也。” 李諿議: “高麗薛聰、崔致遠、安裕等數人從祀文廟, 吾東方自三韓以來, 學問詞章顯名於當世者, 豈止數子哉? 然只取數子, 必皆有補於聖門, 而文章德業, 高出前輩者也, 若崔冲則敎授子弟, 東方文學之盛, 自冲始, 時稱海東孔子。 然自高麗迄于我朝, 不得擬從祀於文廟者, 豈無議乎? 且崔惟善、趙簡則又下於崔冲, 此皆非祀典所載, 安可從享於文廟乎? 古人或慕其異政、或慕其功名, 立廟以祀之、立碑以記之者有之。 若海州、金堤之人, 依古別立廟而祀之, 法所不禁, 從祀於文廟, 臣恐未爲得也。” 尹兢、趙球、李守恭議: “崔冲、崔惟善、趙簡非祀典所載, 不宜入文廟。 然有功德於一邑, 若鄕人私自立廟祀之, 則不必禁。” 姜景叙、許輯、金詮、申用漑議: “依禮曹所啓爲便。 然古云: ‘鄕先生沒, 可祭於社。’ 若鄕人自立別廟以祀, 如五賢堂例, 則勿禁而已, 不宜國家爲別廟祀之也。” 傳曰: “勿令從祀文廟。”
성종 233권, 20년(1489 기유/명홍치(弘治) 2년) 10월 26일(경술) 4번째기사
시독관 강경서가 이주, 남궁찬을 체직하지 말 것을 청하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시독관(侍讀官) 강경서(姜景敍)가 아뢰기를,
“옛적에는 공장(工匠)들이 맡은 공예(工藝)를 가지고도 간했었습니다. 이주(李胄)와 남궁찬(南宮璨)은 그들의 직책을 다하려 했을 뿐입니다. 신진(新進)의 선비들이 어찌 조정(朝廷)의 사체(事體)를 알고 있었겠습니까? 비록 말이 맞지않았더라도 어찌 우악(優渥)하게 용납하여 더욱 직언(直言)하는 길을 열어놓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어찌 사관(史官)들로 하여금 끝내 그 일을 듣지 못하게 하려하였겠는가? 기밀(機密)한 일은 비밀로 하지않을 수 없는 법인데, 이주 등이 한건(韓健)은 춘추관(春秋館) 관원이 아니므로 일을 기록할 수 없다고 했었다. 이것이 어찌 신하된 사람의 도리이겠는가? 그러나 이주 등은 과연 사체를 알지 못한 것이니 마땅히 그대의 말대로 하겠다.”하였다.
○御晝講。 講訖, 侍讀官姜景叙啓曰: “古者工執藝事以諫。 李冑、南宮璨欲盡其職而已, 新進之士, 安知朝廷事體? 言雖不中, 盍加優容益開直言之路乎?” 上曰: “予豈欲令史官, 終不聞其事乎? 機事不可不密, 而冑等以爲韓健職非《春秋》不可以記事, 是豈人臣之道乎? 然冑等果不知事體, 當依爾言。”
성종 234권, 20년(1489 기유/명홍치(弘治) 2년) 11월 7일(신유) 1번째기사
영돈녕 이상, 육조, 한성부등과 지방 수령들의 탐오를 막을 방도에 대해 논의하다
영돈녕(領敦寧) 이상과 육조(六曹), 한성부(漢城府), 대간(臺諫), 홍문관(弘文館)을 명소(命召)하여 전교하기를,
“아들이 부모에게, 백성이 수령(守令)에게는 그 의리가 오직 한결같은 것이기 때문에 부민(部民)으로서 수령을 고소(告訴)하는 자는 죄를 당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곧 좋은 법이므로 마땅히 금석(金石)처럼 굳게 지켜야하는데, 다만 부민들이 금령(禁令)에 구애되어 수령들을 고소하지 못하니 백성이 원통함을 펴지못하게 될까싶다. 의논하는 사람들이 누구나 말하기를, ‘감사(監司)를 적합한 사람으로 얻게 되면 수령들의 탐오(貪汚)는 검거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감사들의 이목(耳目)이 또한 두루 보지못할 점이 있으니, 비유하건대, 키우는 고양이가 동쪽에 있으면 쥐가 서쪽에서 날뛰고 서쪽에 있으면 쥐가 동쪽에서 날뛰게 되는 것과 같은데, 감사가 어떻게 수령들의 탐오를 다 알 수 있겠는가? 지난날에 일찍이 추첨(抽籤)하여 조신(朝臣)을 보내어 수령들의 불법을 규찰(糾察)하고 탄핵(彈劾)하게 했었는데, 의논하는 사람들이 모두가 가혹(苛酷)하고 자잘한 짓같다고 하기때문에 폐지하고 거행하지 않는다. 수령들이 탐오하고 잔학(殘虐)한 짓을 이전처럼 자행(恣行)하니, 먼 외방(外方)의 영세(零細)한 백성들이 어찌 조정의 자무(字撫)21620)하는 뜻을 알게될 수 있으며, 수령들의 불법을 감사들도 오히려 다 알지못하고 있는데 하물며 조정이겠는가? 옛사람의 말이, ‘가혹한 행정은 호랑이보다도 맹렬하다.’고 했었다. 어떻게 하면 수령들의 탐오를 모조리 알아내어 우리 백성이 잔학한 행정에 시달리지않게 할 수 있겠는가? 좋은 계책을 들어보고 싶으니, 각기 품은 바대로 말해 보라.”하자,
심회(沈澮), 윤필상(尹弼商), 윤호(尹壕), 신승선(愼承善)이 의논하기를,
“백성들의 피해를 염려하여 고소하게 하는 발단(發端)을 열어주는 것은 곧 《대전(大典)》의 법을 무너뜨리는 것이어서 할 수없는 일입니다. 지금의 계책은 조종조(祖宗朝)의 고사(故事)대로 순안어사(巡按御史)를 더러는 한 해에 두 차례 보내기도 하고 더러는 한 해씩 띄워 보내기도 하여 범법하는 자를 적발하여 준엄하게 다스린다면 탐오하고 백성에게 잔학한 짓을 하는 자들이 거의 두려워할 줄 알게 될 것입니다. 옛사람의 말이 ‘산에 맹호(猛虎)가 있으면 여곽(藜藿)21621)도 캐러가지않게 되는 법이다.’고 했으니, 성상께서 재량하여 하소서.”하고,
이철견(李鐵堅), 정괄(鄭佸), 이숭원(李崇元), 정문형(鄭文炯)은 의논하기를,
“수령의 불법을 관찰사(觀察使)는 규탄(糾彈)하여 들어내고 사헌부(司憲府)는 풍문(風聞)에 의해 탄핵하고 부민(部民)들에게 자기의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스스로 고소하게 하며, 또한 농사틈이 되면 때없이 대관(臺官)을 보내 규찰하게 한 것이 곧 조종(祖宗) 때의 고사인데, 근년(近年)에는 폐지하고 거행하지 않았습니다. 청컨대 때없이 강직(剛直)하고 올바른 조사(朝士)를 가리어 대관(臺官)의 직을 부여하여 제도(諸道)에 나누어 보내 규찰한다면 비록 수령들의 불법을 다 찾아내지는 못한다하더라도 범법하는 관리들이 거의 스스로 그만두게 될 것입니다.”하고,
손순효(孫舜孝)는 의논하기를,
“무릇 민간의 풍습이나 한 나라의 풍속이란 이루어지기는 백년도 부족하지만 무너뜨리기는 하루로도 남는 것입니다. 아랫사람이 윗사람 고소하는 것을 선왕조(先王朝)에 잠시 그 발단을 열었다가 전해질 폐단을 깊이 알게 되자 정지하고서 원통한 일을 고소해야 할 사람들로 하여금 서울은 맡아보는 관원에게 고소하고 외방(外方)은 관찰사에게 고하여, 그래도 원통한 것이 있으면 사헌부(司憲府)에 고하고 그리고도 원통한 것이 있으면 신문고(申聞鼓)를 치게 했던 것입니다. 종사(宗社)에 관계되는 것과 불법으로 사람을 죽인 것이거나 자신의 원통함을 고소하는 것이 아니면 고소를 허락하지 않았고, 만일 몰래 무고(誣告)하도록 부추긴 자가 있게 되면 죄가 도류(徒流)21622)에 이른 것은 풍속을 도타이 하고 간사와 허위를 막기 위한 것입니다. 외방관원의 범죄는 또한 사헌부로 하여금 풍문에 의해 들추어 탄핵하게 하니, 백성들이 원통한 일을 또한 펼 수 있었습니다. 이 밖에는 다시 계책이 없으니 다만 그 때에 어사를 보내 간사한 짓을 들추고 숨은 일을 적발해야 합니다”하고, 유지(柳輊)는 의논하기를,
“탐오하고 범법하는 수령들을 사헌부에서 풍문에 의해 규찰(糾察)하게될 것이고, 자기의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고소하는 법이 또한 《대전》에 실려있으니, 다시 다른 법을 세울 것이 없습니다. 다만 수시로 어사를 보내 적발하게 한다면, 이른바 ‘고양이를 기르는 집에서는 쥐가 함부로 다니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 이를 이른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민정(民情)은 생업(生業)에 안정되면 원통한 일이 없게되고 원통한 일이 없으면 고소하는 일이 없게 된다는 것인데, 민정의 안정과 불안정은 수령들에게 달린 것이어서 수령들이 청렴(淸廉)과 간소(簡素)를 스스로 지켜가면 터무니없는 징수도 생기지 않고 부역도 공평해지는 법이니, 되도록 오리(汚吏)를 제거하고 청렴 간소한 사람을 가리어 임용(任用)하여 장구한 효과를 내도록 책임지우는 것만 못합니다.”하고,
노공필(盧公弼), 이세좌(李世佐), 권건(權健), 송철산(宋哲山), 이집(李諿), 윤탄(尹坦)은 의논하기를,
“부민(部民)이 수령을 고소하지 못하는 것은 조종(祖宗)의 좋은 법이니, 결단코 고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원통한 일과 억울한 일은 고소를 허락하고 있으니, 원통함을 펴는 길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지금 성상(聖上)의 분부를 받고 반복해서 생각해 보건대, 다시 다른 방책이 없고, 다만 감사(監司)를 신중하게 가리어 그 소임에 전력하게 하고 수시로 명망이 있는 조관(朝官)을 가리어 어사의 직을 부여하여 나누어 보내 검찰(檢察)하게 하는 것이 또한 하나의 계책입니다.”하고,
권정(權侹), 이평(李枰), 구숙손(丘夙孫), 이승녕(李承寧), 최호(崔浩), 조구(趙球)는 의논하기를,
“조정(朝廷)에서 자목(字牧)을 맡는 관원의 선발(選拔)을 중히 여겨 주의(注擬)하고 출척(黜陟)할 적에 지극히 자상하고 세밀하게 하지만, 더러는 탐묵(貪墨)하는 관리가 있어 침해하여 빼앗고 턱없이 징수하여 거듭 백성을 곤궁하게 만듭니다. 이는 책임이 감사에게 있는데 감사가 더러는 미처 알지 못하고 백성들은 부민고소(部民告訴)의 율(律)에 구애되어 하소연하지도 못하여 범법하는 관리들이 기탄없이 자행하고 있게 하니, 매우 작은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백성들에게 고소를 허락하는 것은 진실로 시행할 수 없는 일이고 추첨(抽籤)하여 적발하게 하는 것도 대체를 손상하는 것이어서 또한 시행할 수 없습니다. 신 등은 모름지기 감사를 적임자로 얻도록 하고 또한 수시로 어사를 보내어 고을들을 순찰(巡察)하며 간사한 짓을 들추고 숨은 일을 적발하게 한다면 거의 탐묵(貪墨)한 자들이 스스로 없어지고 민생들이 자연히 안정되리라 여깁니다.”하고,
이세광(李世匡), 민사건(閔師騫), 이승건(李承健), 조지서(趙之瑞), 황계옥(黃啓沃), 강경서(姜景敍), 민보익(閔輔翼), 허집(許諿), 김전(金詮), 성희안(成希顔), 신용개(申用漑)는 의논하기를,
“국가의 법에 부민고소(部民告訴)를 받지않기로 한 것은 풍속(風俗)을 유지해가기 위한 것이요, 자신의 원통한 일을 호소하도록 허락한 것은 백성들의 피해를 제거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고을이 무려 수백이나 되는지라, 수령들을 모두 적합한 사람으로 얻을 수가 없어 청렴하고 공평한 사람은 적고 탐오 잔학한 자는 많아 자기만 살찌우고 백성은 여위게 하기를 하지 않는 짓이 없이 합니다. 비록 원통한 일을 펴주는 법이 있기는 합니다마는, 그러나 먼 외방(外方)의 어리석은 백성들이 어찌 하나하나 스스로 알 수 있겠습니까? 만일 스스로 펴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만 부민고소라는 법으로 몰아붙이므로, 이 때문에 원통한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돌아갈 데가 없습니다. 조정에 비록 방백(方伯)21623)에게 책임을 지우고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의 이목(耳目)이 또한 두루 미치지 못하는 데가 있는데 어찌 실정을 다 알 수 있겠습니까? 추첨(抽籤)하여 적발하는 것은 대체를 손상하게 될 듯하여 거행하는 것이 마땅치 않습니다. 신들의 생각에는, 마땅히 한(漢)나라 와 당(唐)나라의 고사에 의거하여 강직하고 총명한 조사(朝士)를 가려 어사(御史)의 직을 부여하여 시골을 돌아다니며 민간의 병폐를 묻게 하여, 수령들로 하여금 경계할 줄 알게 만들고 민간의 원망이 조금이라도 풀리게 하는 것이 편리하고 유익할 듯합니다.”하고,
홍한(洪瀚)은 의논하기를,
“감사와 수령들이 더러는 방자하게 흘겨보며 법을 벗어나는 짓을 하는 자가 있는데, 다름이 아니라 조정에서 법을 씀이 한결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이 듣건대, 중국 조정에서는 한결같이 《대명률(大明律)》대로 하여 조금도 더하거나 덜함이 없기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법을 두려워하여 범하는 자가 자연히 적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조정에서는 사정과 법을 가지고 논하여 낮추었다높였다하는 일이 많기 때문에 감사나 수령으로 죄를 지은 사람들이 거개 허다히 요행으로 면하려 하니, 신은, 한결같이 법대로 하고 조금도 말감(末減)21624)하지 말아 경계하게 되도록 하기를 바랍니다. 또한 감사는 임금의 덕화를 받들어 전해야 하므로 그 소임이 매우 중하니, 이제부터는 3품 당상관(堂上官)을 보내지말고 언제나 벼슬이 높고 명망이 두터운 사람을 가려서 보내어 수령들로 하여금 풍채(風采)만 바라보고도 두렵게 여기게 한다면, 탐오하고 용렬한 무리들이 마음을 씻고 생각을 바꾸게 될 것입니다.
도사(都事)는 또한 감사에 다음 가는 것인데 요사이 조신(朝臣)들이 모두 도사를 외방(外方)의 관원이라 하여 싫어하고, 전조(銓曹)에서는 또한 수령들을 정밀하게 가려서 임명하지 않는데, 어디를 두려워하고 꺼리어 근신하게 되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감사는 전하(殿下)의 근심을 분담하는 것이고 도사는 감사의 이목인 것이니, 모름지기 모두를 지위와 명망이 있고 강직총명한 사람을 가려서 보내되, 만일 법을 범하는 자가 있게 된다면 한결같이 율(律)대로 결단하고, 또한 수시로 총명하고 강단한 사람을 보내어 민간의 병폐와 고통을 묻게 한다면 되리라고 여깁니다.”하니,
전교하기를,
“내가 알겠다.”하였다.
註21620]자무(字撫): 아끼고 돌보는 것.註21621]여곽(藜藿): 명아주와 콩의 잎 註21622]도류(徒流): 도형(徒刑)과 유형(流刑).註21623]방백(方伯): 관찰사(觀察使).註21624]말감(末減): 가장 가벼운 죄로 감해 주는 것.
○辛酉/命召領敦寧以上、六曹、漢城府、臺諫、弘文館, 傳曰: “子之於父母, 民之於守令, 其義惟一。 故以部民而訴守令者抵罪, 此是良法, 當守之堅如金石。 但部民拘於禁令, 不得告其守令, 恐民冤之不申也。 議者皆曰: ‘監司得人, 則守令貪汚, 可以糾擧。’ 然監司耳目亦有所未周, 譬如畜猫, 吊則鼠恣於西, 在西則鼠亂於東, 監司安能盡識守令之貪汚乎? 曩者嘗抽籤遣朝臣, 糾劾守令之非法, 議者皆謂近於苛細, 故廢而不行。 守令恣行貪虐如舊, 遠方細民, 豈識朝廷字撫之意? 守令之不法, 監司尙未盡知, 況朝廷乎? 古人云: ‘苛政猛於虎。’ 何以則能盡知守令之貪汚, 而使吾民, 不困於虐政乎? 願聞良策, 各以所懷陳之。” 沈澮、尹弼商、尹壕、愼承善議: “慮百姓之弊, 開告訴之端, 則是毁《大典》之法, 不可爲也。 今計遵祖宗朝故事, 巡案御史, 或一歲再遣、或間歲一遣, 發不法者深治之, 則貪汚虐民者, 庶幾知所畏。 古人云: ‘山有猛虎, 藜藿爲之不採。’ 上裁。” 李鐵堅、鄭佸、李崇元、鄭文烱議: “守令不法, 觀察使糾擧, 司憲府風聞擧劾, 自己冤抑則許部民自訴。 又當農隙, 無時遣臺官糾察, 是祖宗故事, 近年廢而不行。 請無時擇剛正之士, 職帶臺官, 分遣諸道糾察, 則雖不能盡得守令不法, 不法之吏庶自戢矣。” 孫舜孝議: “凡民風國俗, 成之百年而不足, 毁之一日而有餘。 下之訴上, 先王朝暫開其端, 深知流弊乃止。 而令訴冤者, 京則告主掌官, 外則告觀察使, 猶有冤則告憲府, 又有冤則擊申聞鼓, 非關係宗社及非法殺人, 自己訴冤者, 勿許告訴, 如有陰嗾誣告者, 罪至徒流, 所以厚風俗而防奸僞也。 外官所犯, 又令憲府風聞擧劾, 而民冤亦可伸矣。 此外更無他策。 但當時遣御史, 發奸擿伏爾。” 柳輊議: “貪汚不法守令, 憲府風聞糾察, 自己冤抑告訴之法, 又載《大典》, 不必更立他法。 但時遣御史發擿, 則所謂 ‘畜猫之家, 鼠不恣行’ 者此也。 臣聞民情安業則無冤, 無冤則無訴。 民情之安不安, 在乎守令, 守令以淸簡自守, 則橫斂不生, 賦役均平。 莫若務去汚吏, 擇淸簡之人用之, 責以悠久之效耳。” 盧公弼、李世佐、權健、宋哲山、李諿、尹坦議: “部民不得告守令, 祖宗令典, 斷不可改。 然自己冤抑則許其陳訴, 不可謂無伸冤之路。 今承聖敎, 反覆思之, 更無他策。 但愼擇監司, 以專其任, 時擇有名望朝官, 帶御史分遣檢察, 亦其一策也。” 權侹、李枰、丘夙孫、李承寧、崔浩、趙球議: “朝廷重字牧之選, 其注擬黜陟, 至爲詳密。 間有貪墨之吏, 侵漁橫斂, 重困吾民, 是則責在監司。 而監司或未及知, 百姓拘部民告訴之律, 未得赴遡, 使不法之吏恣行無忌, 甚非細故。 然許民告訴, 固不可行, 抽籤擿發, 傷於大體, 亦不可行。 臣等以謂監司須得其人, 又時遣御史, 按行州郡, 發奸擿伏, 則庶幾貪墨自戢, 民生自安矣。” 李世匡、閔師騫、李承健、趙之瑞、黃啓沃、姜景叙、閔輔翼、許輯、(金銓)〔金詮〕、成希顔、申用漑議: “國典勿受部民告訴, 所以維持風俗, 其許訴己冤者, 所以除民瘼。 然郡邑無慮數百, 守令未能盡得其人, 廉平者少, 貪虐者多, 肥己瘠民, 無所不至。 雖有伸冤之法, 然遠方愚民, 安能一一自達? 如有自伸者, 輒捃以部民告訴之法, 由是抱冤者無所歸。 朝廷雖委任方伯, 然其耳目亦有所未周, 豈能盡知其情? 抽籤發擿, 似傷大體, 不宜擧行。 臣等以謂當依漢、唐故事, 擇剛明朝官, 職帶御史, 巡歷田里, 咨訪民瘼, 使守令知戒, 民怨少弛, 似爲便益。” 洪瀚議: “監司守令, 或有恣睢而逾於繩墨者, 無他, 朝廷用法不一故也。 臣聞中朝一遵《大明律》, 無少加減, 故人皆畏法而犯者自少。 我朝論以情法, 多所低昻, 故監司守令之有罪者, 率多倖倖得免。 臣願一從法律, 無少末減, 使之懲警。 且監司承流宣化, 其任至重。 自今勿遣三品堂上, 常擇位高重望者, 使守令望風畏懾, 則貪庸之徒, 洗心易慮矣。 都事又亞於監司, 近者朝臣, 皆珥事爲外官而厭之, 銓曹又不精擇, 守令何所畏憚而謹愼乎? 臣謂監司, 分憂殿下, 都事, 監司之耳目。 須竝擇有位望剛明者而遣之, 如有犯法者, 一以律斷之。 又時遣明斷者, 問民疾苦可矣。“ 傳曰: “予知之。”
성종 234권, 20년(1489 기유/명홍치(弘治)2년) 11월 11일 을축 3번째기사
시독관 강경서가 왜구의 침략이 있은 전라도에 조관을 보내어 피살된 수를 고찰해 보기를 청하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시독관(侍讀官) 강경서(姜景敍)가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전라도(全羅道)에 수적(水賊)의 변이 있었다는데, 바야흐로 지금 태평한 날이 오래되어 안일에 빠져 있으므로 만호(萬戶)가 수비(守備)하고 방어(防禦)하는 일을 일찍이 마음을 쓰지 않아, 당령(當領) 선군(船軍)을 모두 내놓아 돌아가게 하고 현재 있는 사람은 2, 30명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에 요사이의 변은 반드시 군사가 적었기 때문이라 여기니, 청컨대 한 조관(朝官)을 보내어 피살된 수를 고찰해보도록 하소서.”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래서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순천부사(順天府使), 돌산만호(突山萬戶)를 이미 잡아다가 추문(推問)하도록 했다.”하였다.
강경서가 또 아뢰기를,
“이에 앞서 고성(固城) 수적의 변때는 계문(啓聞)한 말이 크게 서로 맞지않았었습니다. 이번의 일도 또한 어찌 숨기고 계문하지 않았는지를 알겠습니까? 조관(朝官)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임금이 도승지(都承旨) 한건(韓健)에게 이르기를,
“조관을 보내어 자세히 조사하게 하는 것이 가하다.”하였다.
○御晝講。 講訖, 侍讀官姜景叙啓曰: “臣聞全羅道有水賊之變。 方今昇平日久, 溺於宴安, 萬戶備禦之事, 曾不致意, 當領船軍悉令放還, 見在者不過二三十人而已。 臣意以謂近日之變, 必以軍少故也。 請遣一朝官, 考驗被殺之數。” 上曰: “然。 水軍節度使、順天府使、突山萬戶, 已令拿來推問矣。” 景叙又啓曰: “前此固城水賊之變, 所啓之辭大相牴牾。 今者之事, 又安知匿不以聞乎? 遣朝官何如?” 上謂都承旨韓健曰: “遣朝官審覈可也。”
성종 234권, 20년(1489 기유/명홍치(弘治) 2년) 11월 23일(정축) 3번째기사
전한 성세명, 응교 민사건등을 각도로 보내어 민정을 살펴보게 하다
전한(典翰) 성세명(成世明)을 경기(京畿)에, 응교(應敎) 민사건(閔師騫)을 경상도에, 교리(敎理) 강경서(姜景敍)를 전라도에, 응교 조지서(趙之瑞)를 충청도에, 예조좌랑(禮曹佐朗) 하윤(河潤)을 영안도(永安道)에, 주서(注書) 강혼(姜渾)을 강원도에 보내어 민간의 병폐와 고통을 물어보도록 명하였다.
그들이 가지고 가는 사목(事目)에,
“1. 환상(還上)21678)을 수납(收納)할 적에 곡두(斛斗)를 법에 있는대로 바로잡았었는지, 바로잡지 않았었는지,”
1. 무릇 공물(貢物)은 경작(耕作)의 다소(多少)대로 균일(均一)하게 나누어서 배정(排定)했었는지, 그러지 않았었는지,
1. 관아(官衙) 안의 말[馬匹]과 노비(奴婢)의 수효를 더 두었었는지, 그러지 않았는지,
1. 사행(私行)21679)의 접대는 어떻게 되었고, 각기의 지경안 촌락(村落) 사이에 도둑이 일어나서 멋대로 다니는지,
1. 부역(賦役)은 공평하고 학교(學校)는 다스려지고 밝아졌는지, 그러지 않았는지,
1. 교활한 아전을 조종하여 권력을 농간하고 폐단을 부리는지,
1. 일체의 불법과 민간의 폐해는 어떤지,
1. 송사를 처결한 건수는 얼마인지,”
註21678]환상(還上): 춘궁기(春窮期)에 백성에게 대여한 곡물을 추수 후에 일정한 이자를 붙여 받아들이는 것을 말함. 환자(還子).註21679]사행(私行) : 사사로운 여행.
○命遣典翰成世明于京畿, 應敎閔師騫于慶尙道, 校理姜景叙于全羅道, 應敎趙之瑞于忠淸道, 禮曹佐郞河潤于永安道, 注書姜渾于江原道, 問民疾苦。 其齎去事目:一, 還上收納時斛斗依法校正與否。 一, 凡貢物以所耕多少, 均一分定與否。 一, 衙中馬匹奴婢加數與否。 一, 私行接待各其境內, 村間盜賊興行。 一, 賦役平均、學校修明與否。 一, 縱令猾吏弄權作弊。 一, 一應不法民間弊瘼。 一, 決訟道數。
성종 236권, 21년(1490 경술/명 홍치(弘治) 3년) 1월 11일 갑자 4번째기사
강경서가 전라도 나주등 여러 고을의 불법한 일을 아뢰다
전라도문폐사(全羅道問弊使)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강경서(姜景敍)가 와서 복명(復命)하였는데, 나주(羅州) 등 여러 고을의 불법한 일은 사헌부(司憲府)에 국문(鞫問)하기를 명하였다
○全羅道問弊弘文館校理姜景敍, 來復命, 羅州等諸邑不法事, 命司憲府鞫之。
성종 236권, 21년(1490 경술/명홍치(弘治) 3년) 1월 24일(정축) 9번째기사
예조와 이조에서 의논하여 뽑은 자들이 사유에 합당한가를 의논하게 하다
예조(禮曹)와 이조(吏曹)에서 같이 의논하여 사유(師儒) 반우형(潘佑亨), 표연말(表沿沫), 김응기(金應箕), 최부(崔溥), 이문흥(李文興), 안팽명(安彭命), 강경서(姜景敍), 이달선(李達善), 정성근(鄭誠謹), 유숭조(柳崇祖), 정석견(鄭錫堅), 김심(金諶), 김계행(金係行), 장강(張綱), 손번(孫蕃), 권경우(權景祐), 이점(李坫), 권빈(權璸), 이창신(李昌臣), 이유청(李惟淸)등을 골라뽑아서 아뢰니, 전교하기를,
“이 사람들이 사유(師儒)에 적당할만한가 아니한가를 영돈녕(領敦寧) 이상에게 의논하게 하라.”하니,
심회(沈澮)는 의논하기를,
“모두 이름이 있는 문신(文臣)인데 어찌 우열(優劣)이 있겠습니까?”하고,
윤필상(尹弼商)과 윤호(尹壕)는 의논하기를,
“이조와 예조의 아뢴 바에 의하여 시행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하고,
홍응(洪應)은 의논하기를,
“이른바 사유라는 것은 경학(經學)에 밝고 행실을 닦는 것을 이르고 장귀(章句)를 아는 선비를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골라뽑은 자로서 반우형, 김응기, 이문흥, 정성근, 김심 등과 같은 몇 사람은 학문이 가장 정밀하고 익숙한 자입니다.”하고,
이극배(李克培)는 의논하기를,
“사유록(師儒錄)에 간혹 실상이 없는 자가 있으니, 의정부(議政府), 육조(六曹), 관각당상(館閣堂上), 성균관(成均館), 홍문관(弘文館)의 여러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다시 의논하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하고,
노사신(盧思愼)은 의논하기를,
“지금 선택한 사유에도 본래 알지못하는 자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조와 예조에서 같이 의논하여 골라뽑았으니, 반드시 모두 합당할 것입니다”하였는데, 이극배의 의논에 따랐다.
○禮曹、吏曹同議, 揀選師儒潘佑亨、表沿沫、金應箕、崔溥、李文興、安彭命、姜景叙、李達善、鄭誠謹、柳崇祖、鄭錫堅、金諶、金係行、張綱、孫蕃、權景祐、李坫、權璸、李昌臣、李惟淸等以啓, 傳曰: “此人等師儒可當與否, 議于領敦寧以上。” 沈澮議: “皆有名文臣, 有何優劣?” 尹弼商、尹壕議: “依吏、禮曹所啓, 施行何如?” 洪應議: “所謂師儒者, 經明行修之謂, 非章句儒之謂也。 今之揀擇者, 若潘佑亨、金應箕、李文興、鄭誠謹、金諶等數員, 於學問最精熟者也。” 李克培議: “師儒錄, 間有無實者, 令議政府、六曹、館閣堂上、成均館、弘文館諸儒, 更議何如?” (虜思愼)〔盧思愼〕議: “今擇師儒, 亦有素所不知者。 然吏、禮曹同議揀(倖)〔擇〕, 則必皆可當。” 從克培議。
성종 237권, 21년(1490 경술/명 홍치(弘治) 3년) 2월 4일(병술) 4번째기사
사유로 합당한 자에 대한 대신들의 의논
사표(師表)에 합당할 만한 사람을 다시 의논케 하니, 한치례(韓致禮)가 의논하기를,
“신(臣)은 무신(武臣)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사유(師儒)로서 합당한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신이 들으니, 반우형(潘佑亨), 김응기(金應箕), 정성근(鄭誠謹), 김심(金諶)이 뛰어난 자라고 합니다.”하고,
신승선(愼承善), 이숭원(李崇元), 노공필(盧公弼), 송철산(宋鐵山)은 의논하기를,
“이조(吏曹)와 예조(禮曹)에서 택한 바가 모두 사유로 합당할 것입니다”하고, 송영(宋瑛), 권건(權健), 윤민(尹慜)은 의논하기를,
“지금 기록하여 아뢴 사유등은 비록 혹 한두 사람 자세히 알지못하는 자가 있다하더라도 같이 의논하여 간택(揀擇)한 것은 대개 옳은 것일 것입니다. 다만 유루(遺漏)됨이 있을까 두렵습니다.”하고,
유순(柳洵)은 의논하기를,
“이조와 예조에서 택한 바가 대체로 좋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 뛰어난 자를 뽑아서 그 소임을 오래도록 전담하게 한다면 훈회(訓誨)21954)와 표솔(表率)21955)에 거의 효험이 있을 것입니다.”하고,
이집(李諿), 윤탄(尹坦)은 의논하기를,
“반우형(潘佑亨), 표연말(表沿沫), 김응기(金應箕), 이문흥(李文興), 안팽명(安彭命), 강경서(姜景敍), 정성근(鄭誠謹), 정석견(鄭錫堅), 김심(金諶), 장강(張綱), 손번(孫蕃), 권경우(權景祐), 권빈(權璸)은 신등이 일찍이 듣건대, 행실을 닦고 경사(經史)21956)를 섭렵(涉獵)했다고 하니, 사유에 합당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본래 서로 알지못하므로 조행(操行)과 학문(學問)을 알지못합니다.”하고,
홍한(洪瀚), 허집(許輯)은 의논하기를,
“해조(該曹)에서 뽑은 바는 모두 학문이 있어 교회(敎誨)할 수 있을 것입니다.”하고,
김전(金詮), 성희안(成希顔)은 의논하기를,
“반우형등은 모두 학문이 있으니, 해조에서 선발하는데 실수가 없었습니다.”
하니, 전교(傳敎)하기를,
“송영 등이 의논하기를, ‘유루함이 있을까 두렵다.’고 하였으니, 이는 끌어내어 말하지 않은 것이다. 다시 물어서 아뢰라.”하였는데,
송영, 권건, 윤민이 아뢰기를,
“신등이 알고 있는 하형산(河荊山), 홍식(洪湜), 홍한(洪瀚)이 모두 사유(師儒)로 합당한데도 참여치 못했습니다. 그러나 신등이 보는바가 반드시 모두 옳지못하기 때문에 감히 그 사람들을 확실하게 지적하지 못하였습니다”하자, 전교(傳敎)하기를,
“하형산, 홍식은 내가 본래부터 그 사람을 알지 못하나, 홍한은 경연(經筵)에서 여러번 보았다. 그러나, 그 때 강문(講問)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유로서 합당한가를 알지 못하니, 재상(宰相) 등에게 의논하도록 하라.”하였다.
심회(沈澮), 윤필상(尹弼商), 이극배(李克培), 노사신(盧思愼), 신승선(愼承善), 이숭원(李崇元), 유순(柳洵), 이육(李陸)은 의논하기를,
“홍한은 신진(新進)의 선비이기 때문에 신등이 알 수가 없으며, 하형산, 홍식도 알지 못합니다.”하고,
이집(李諿)은 의논하기를,
“홍한은 지금 동료(同僚)가 되었는데, 조행(操行)과 학문(學問)이 있어 사유에 참여할 만한 것으로 압니다. 그리고 하형산, 홍식은 신이 그 사람을 알지 못하므로, 감히 우열(優劣)을 가리지 못하겠습니다.”하고,
노공필(盧公弼)은 의논하기를,
“하형산은 사유가 되기에 합당하며, 홍식은 신이 알지 못합니다.”하니,
전교하기를,
“예조의 간택(揀擇)에 의하여 시행토록 하라.”하였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윤탄(尹坦)은 학식(學識)이 전연 없는데도 척리(戚里)21957)를 인연하여 당상(堂上)의 자리에 뛰어 올랐는데, 사유를 의논하는데 있어서도 몽연(瞢然)21958)하게 가부(可否)도 알지못하면서, 다만 주서(注書)에게 청하여 다른 의논한 사람의 말미(末尾)에 쓰게하니, 앉아있던 사람들이 서로 눈짓하고 웃었다.”하였다.
註21954]훈회(訓誨): 가르침.註21955]표솔(表率): 모범, 본보기.註21956]경사(經史): 경서(經書)와 사서(史書).註21957]척리(戚里): 외척(外戚).註21958 ]몽연(瞢然): 어두운 모양.
○更議師表可當人。 韓致禮議: “臣以武臣, 未知某人合師儒。 然臣聞潘佑亨、金應箕、鄭誠謹、金諶, 其尤者。” 愼承善、李崇元、盧公弼、宋鐵山議: “吏、禮曹所擇, 皆合於師儒。” 宋瑛、權健、尹慜議: “今錄啓師儒等, 雖或有一二不詳知者, 同議揀擇, 大槪爲是。 但恐有遺漏。” 柳洵議: “吏、禮曹所擇, 大抵爲善。 其中拔其尤者, 久專其任, 則訓誨、表率, 庶有效矣。” 李諿、尹坦議: “(潘佑享)〔潘佑亨〕、表沿沬、金應箕、李文興、安彭命、姜景叙、鄭誠謹、鄭錫堅、金諶、張綱、孫蕃、權景祐、權璸, 臣等嘗聞, 其行修涉獵經史, 合於師儒。 其他則素非相識, 未知操行學問。” 洪瀚、許輯議: “該曹所選, 皆有學問, 可以敎誨。” 金詮、成希顔議: “潘佑亨等, 皆有學問, 該曹不失其選。” 傳曰: “宋瑛等議云: ‘恐有遺漏。’ 是引而不言。 更問以啓。” 宋瑛、權健、尹慜啓曰: ‘臣等所知河荊山、洪湜、洪瀚, 皆合師儒, 而不與焉。 然臣等所見, 未必皆是, 故不敢的指其人。” 傳曰: “荊山、洪湜, 予本不知其人, 洪瀚, 於經筵屢見之。 然時未講問, 故未知合於師儒, 其議于宰相等。” 沈澮、尹弼商、李克培、盧思愼、愼承善、李崇元、柳洵、李陸議: “洪瀚, 新進之士, 臣等未得知之, 河荊山、洪湜, 亦未知之。” 李諿議: “洪瀚今爲同僚, 備知有操行學問, 可參師儒。 荊山、洪湜, 臣未知其人, 不敢優劣。” 盧公弼議: “河荊山則合於師儒。 洪湜則臣未得知。” 傳曰: “依禮曹揀擇施行。”
【史臣曰: “坦, 絶無學識, 因緣戚里, 驟陞堂上, 於師儒之議, 瞢然不知可否, 但請注書, 書名他議之末, 在坐, 相目笑之。”】
성종 237권, 21년(1490 경술/명홍치(弘治) 3년) 2월 25일 정미 4번째기사
위관의 내수사의 장리 징납의 폐단에 대해 강경서, 김제신등과 논하다
야대(夜對)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시독관(侍讀官) 강경서(姜景敍)가 아뢰기를,
“내수사(內需司)의 장리(長利)를 위관[委差]을 보내어 징납(徵納)케 하는데, 위관[委差]등이 백성(百姓)을 침학(侵虐)하여 스스로 이(利)만을 경영하니, 청컨대 위관을 보내지말고 수령(守令)으로 하여금 검찰(檢察)하여 수납(收納)케 하소서”하니,
임금이 승지(承旨)에게 묻기를,
“어떻게 하겠는가?”하였다.
우부승지(右副承旨) 김제신(金悌臣)이 대답하기를,
“위관등의 작폐(作弊)가 없지않으나, 다만 수령의 소임이 지극히 번잡하여 환상(還上)21985)을 내고 거두어들이는 것도 오히려 할 수가 없는데, 무슨 여가에 내수사의 장리까지 수납하겠습니까? 다만 위관의 지나친 일만을 금지(禁止)토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위관의 범람(泛濫)을 금지하는 일은 전에 이미 유시하였다.”하였다.
○御夜對。 講訖, 侍讀官姜景叙啓曰: “內需(寺)〔司〕長利, 遣委差徵納, 委差等, 侵虐百姓, 自營其利。 請勿遣委差, 令守令檢察收納。” 上問承旨曰: “何如?” 右副承旨金悌臣對曰: “委差等不無作弊。 但守令所任至繁, 還上斂散, 尙不能爲, 何暇收納內需(寺)〔司〕長利乎? 但委差濫事, 宜禁止。” 上曰: “委差泛濫禁止事, 前已諭之矣。”
성종 239권, 21년(1490 경술/명홍치(弘治) 3년) 4월 21일 계묘 3번째기사
월광사의 전지 귀속에 관해 강경서, 남궁찬등과 논하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시강관(侍講官) 강경서(姜景敍)가 아뢰기를,
“오늘 아침 대간(臺諫)이 월광사(月光寺)의 전지(田之)를 돌려주는 것이 마땅하지않다는 일을 아뢰었으나,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대개 충성스러운 말은 귀에 거슬리나 행동에는 이로운 것이니, 청컨대 대간(臺諫)의 말을 따르도록 하소서.”하고,
기사관(記事官) 남궁찬(南宮璨)이 아뢰기를,
“이 전지는 본래 그 군(郡)의 둔전(屯田)이었습니다. 그런데 구달충(具達忠)이 군수(郡守)가 되었을 때 강귀동(康貴同)의 세 부자(父子)가 중이 되어 이 절을 차지하여 빼앗고는 도리어 죄를 얽어 꾸며서 감사(監司)에게 소장(訴狀)을 올려 이르기를, ‘군수(郡守)가 사람을 시켜서 불상(佛像)을 훼손하였습니다.’하니, 구달충이 위세를 두려워하여 손을 떼고 빼앗긴 것입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디에서 들었는가?”하니,
남궁찬이 말하기를,
“남계명(南季明)의 장계(狀啓) 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천천히 그 실상을 상고하여 결정함이 마땅하겠다.”하였다.
○御晝講。 講訖, 侍講官姜景叙啓曰: “今朝臺諫, 啓月光寺田地還給未便事, 不聽。 夫忠言逆耳而利於行, 請從臺諫之言。” 記事官南宮璨啓曰: “是田本其郡屯田。 具達忠爲郡守時, 康貴同三父子爲僧, 據此寺奪之, 反羅織告狀監司云: ‘郡守使人毁佛像。’ 達忠畏威, 斂手被奪。” 上曰: “聞之何處乎?” 璨曰: “南季明狀內錄之矣。” 上曰: “徐當考其實而決之。”
성종 244권, 21년(1490 경술/명홍치(弘治) 3년) 9월 8일(정사) 3번째기사
승정원에서 사유를 담당할 자로 승문원판교 김심 등을 초계하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사유(師儒)를 감당할 자로 승문원판교(承文院判校) 김심(金諶),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 정석견(鄭錫堅), 이조정랑(吏曹正郞) 강경서(姜景敍),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子) 유숭조(柳崇祖)를 초계(抄啓)22570)하니, 명하여 이조(吏曹)에 내리었다.
註22570]초계(抄啓): 초록(抄錄)하여 아룀
○承政院, 抄啓堪爲師儒者, 承文院判校 金諶 、議政府舍人 鄭錫堅 、吏曹正郞 姜景敍 、校書館正字 柳崇祖 , 命下吏曹。
성종 250권, 22년(1491 신해/명홍치(弘治) 4년) 2월 13일 기미 2번째기사
정언 강형이 박형문등을 국문할 것을 건의하다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강형(姜詗)이 와서 아뢰기를,
“박형문(朴衡文)이 앞서 풍천부사(豊川府使)에 임명되니, 어버이가 늙었다는 것으로 사직(辭職)하였었습니다. 이제 훈련원부정(訓鍊院副正)이 되었는데, 앞서 만약 어버이를 위하여 사직하고 떠났다면 지금도 오지 않았어야 옳습니다. 그렇지만 뻔뻔스럽게 직임에 나아왔는데, 이것은 지난날 사직한 것은 지방에 보임(補任)된 것을 꺼려했던 것이니, 신자(臣子)가 마음 쓰기를 이와 같이 하는 것을 마땅치 않습니다. 청컨대 그를 국문(鞫問)하게 하소서. 그리고 곡산군수(谷山郡守) 유영수(柳永脩), 광흥창수(廣興倉守) 유문통(柳文通),사온서영(司醞署令) 이평(李泙), 이조정랑(吏曹正郞) 강경서(姜景敍)는 모두 사리를 아는 조사(朝士)로 늙은 어버이가 있는데도 돌아가 봉양하지않으니, 그들도 유사(攸司)로 하여금 국문하도록 하소서.”하니,
전교하기를,
“박형문이 사직한 것은 일부러 회피하여 면하려고 핑계대는 것은 아니다.
풍천이 어버이가 살고있는 곳과 너무 멀기때문에 파직시켜 그의 고향으로 돌아가게 한 것이다. 지금 서용(敍用)하는 것이 옳고 추국(推鞫)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다른 사람은 추국하도록 하라.”하였다.
○司諫院正言姜詗來啓曰: “朴衡文前除豐川府使, 以親者辭。 今爲訓鍊副正, 前若爲親辭去, 則今可不來, 而靦然就職, 是則前日之辭憚於外補。 臣子用心, 不宜如是。 請鞫之。 且谷山郡守柳永脩、廣興倉守柳文通、司醞署令李泙、吏曹正郞姜景叙, 皆以識理朝士, 有老親而不歸養, 亦令攸司鞫之。” 傳曰: “衡文辭職, 非託故窺免。 以豐川距親居甚遠, 故罷歸其鄕。 今可敍用, 不宜推鞫。 其他人員鞫之。”
성종 292권, 25년(1494 갑인/명홍치(弘治) 7년) 7월 24일 경술 5번째기사
채수, 강경서, 신건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채수(蔡壽)를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으로, 강경서(姜景敍)를 통덕랑(通德郞) 수사헌부장령(守司憲府掌令)으로, 신건(辛鍵)을 통덕랑(通德郞) 수사헌부장령(守司憲府掌令)으로 삼았다.
○以蔡壽爲嘉善戶曹參判, 姜景敍通德守司憲府掌令, 辛鍵通德守司憲府掌令。
성종 293권, 25년(1494 갑인/명홍치(弘治) 7년) 8월 11일 정묘 3번째기사
장령 강경서가 윤형로를 체차할 것을 청하다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강경서(姜景敍)가 와서 아뢰기를,
“겸지평(兼持平) 윤형로(尹衡老)는 비록 겸관(兼官)이라고 하나, 물망(物望)이 없어서 보낼 수 없으니, 개정(改正)하기를 청합니다.”하였다.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김삼준(金三俊)이 와서 아뢰기를,
“윤형로(尹衡老)는 이미 본부(本府)의 논박을 받아 형세가 서로 용납될 수 없으므로, 관례(慣例)가 반드시 체직(遞職)되어야 하는데, 어떻게 보낼 수 있겠습니까? 또 들으니, 정조사(正朝使)를 사람들이 많이 사피(辭避)한다고 하는데, 만약 벼슬살이하면서 녹(祿)을 먹는다면 비록 중도(中途)에서 죽는다 하더라도 진실로 사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인신(人臣)의 의리(義理)가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유사(有司)에게 맡겨 다스리도록 하소서”하니, 전교하기를,
“윤형로를 까닭없이 지금 체차(遞差)할 것같으면, 후일 윤형로(尹衡老)를 제직(除職)할 때에 반드시 이것을 빙자하여 논박해서 반드시 종신(終身)의 누(累)가 될 것이니, 또한 애매(曖昧)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정조사(正朝使)는 가령 한 집안의 일로 말한다면, 종을 어느 곳으로 심부름시키고자 하는데, 그 종이 만약 병이 들었다고 핑계댄다면, 이를 강요(强要)하여 말하기를, ‘네가 비록 중도(中途)에서 죽더라도 반드시 가야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제 홍귀달(洪貴達), 윤효손(尹孝孫)이 모두 병이 들었는데, 강제로 보낼 수 있겠는가?”하였다.
강경서(姜景敍)가 아뢰기를,
“신등은 윤형로(尹衡老)를 끝내 쓸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그 임무를 감당(堪當)할 수 있다고 말하나, 사람은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옛날에 황패(黃覇)27947)가 주군(州郡)에서는 이름을 드날렸지만, 경읍(京邑)에서는 명예가 없었습니다. 하물며 수령(守令)은 어사(御史)와 그 직임이 같지 아니하니, 일률적으로 말할 수가 없습니다. 또 윤형로(尹衡老)가 피혐(避嫌)하였다는 말을 들었는데, 실수[失誤]가 많았으니, 조정(朝廷)의 체모(體貌)를 혹 손상(損傷)시키는 바가 있을까두렵습니다”하고, 김삼준(金三俊)이 아뢰기를,
“신등은 윤형로(尹衡老)가 어진지 그 여부를 논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저 대간(臺諫)은 진실로 논박을 받으면 형편이 서로 용납되지못하여 체차(遞差)하지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모두 그러한데, 어떻게 오로지 윤형로에 이르러 이를 폐지(廢止)한단 말입니까? 또 피혐한 말이 또한 매우 용렬하고 이치에 어긋나니, 체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홍귀달(洪貴達), 박건(朴楗), 박숭질(朴崇質), 권정(權侹)등은 이보다 앞서 모두 부경(赴京)하는 것을 사피(辭避)하여 이미 그 죄를 받았는데, 이제 다시 면하고자 하여 분분(紛紛)하게 그치지 않으니, 신(臣)은 전일(前日)에 중죄(重罪)를 더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징계[懲艾]되는 바가 없어서 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무릇 조그마한 병환(病患)은 사람이 모두 있는데, 만약 문득 청하여 면한다면, 누가 마침내 부경(赴京)하겠습니까? 청컨대 모두 유사(有司)에게 맡겨 다스린다면 몸에 병이 있는지 그 여부를 핵실(覈實)할 수 있고, 죄의 경중(輕重) 또한 알 수 있을 것입니다.”하였으나, 모두 들어주지 않았다.
註27947]황패(黃覇): 전한(前漢) 때의 명신(名臣).
○司憲府掌令姜景叙來啓曰: “兼持平尹衡老, 雖曰兼官, 無物望不可遣, 請改下。” 司諫院正言金三俊來啓曰: “衡老旣被本府論駁, 則勢不相容, 例必見遞, 豈可遣之乎? 且聞正朝使, 人多辭避, 若仕官而食祿, 則雖死於中途, 固所不辭也, 人臣之義, 烏可如是耶? 請付有司治之。” 傳曰: “衡老無故, 而今若遞之, 則後日衡老除職, 必藉此而駁之, 必爲終身之累, 不亦曖昧乎? 且正朝使, 借一家之事言之, 遣奴使某處, 其奴若稱有病, 則不可强謂之曰: ‘汝雖死於中途而必往之也。’ 今洪貴達、尹孝孫皆有病, 其可强遣之乎?” 景叙啓曰: “臣等非以衡老爲終不可用也, 雖云能堪其任, 然人有能、有不能。 昔黃覇馳名於州郡, 而息譽於京邑, 況守令與御史, 其任不同, 不可以一槪言也。 且聞衡老避嫌之言, 多失誤, 朝廷體貌, 恐或有所損矣。” 三俊啓曰: “臣等非論衡老之賢否也。 大抵臺諫, 苟被論駁, 則勢不相容, 不得不遞, 自古皆然, 何獨至於衡老而廢之乎? 又避嫌之言, 亦甚庸悖, 不可不遞。 洪貴達、朴楗、朴崇質、權侹等, 前此皆辭赴京, 旣受其罪, 而今復規免, 紛紛不已, 臣意謂, 前日不加重罪, 故無所懲艾而如此也。 凡小小病患, 人皆有之, 若輒復請免, 則誰終赴京乎? 請竝付有司治之, 則身之病否, 可以覈, 而罪之輕重, 亦可知矣。” 皆不聽。
성종 294권, 25년(1494 갑인/명홍치(弘治) 7년) 9월 2일 정해 2번째기사
장령 강경서가 영선을 정지할 것과 윤호, 윤숙, 박원종등을 개차할 것을 청하다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강경서(姜景敍)가 와서 아뢰기를,
“옛사람이 말하기를, ‘백성이 먹는데 부지런하면 온갖 일이 폐하여진다.’고 하였습니다. 제군(諸君)과 부마(駙馬)의 제택(第宅)과 군자강감(軍資江監)28 015)의 영선(營繕)을 일시에 함께 일으켰는데, 이 모두가 부득이한 일입니까? 우의정(右議政) 윤호(尹壕)는 홍문관(弘文館)에서 이미 합당하지 못함을 말하였고, 처음 제수(除授)할 때에 대간(臺諫)도 또한 이미 논난하였습니다. 지금의 천재(天災)가 비록 윤호(尹壕)때문이라 할 수는 없으나, 옛날에 당(唐)나라에 오랫동안 가뭄이 들자 이덕유(李德裕)로 정승(政丞)을 삼았더니 이날로 이내 비가 내리므로 당시의 사람들이, 이덕유(李德裕)의 비다.’라고 하였으며, 송조(宋朝)의 장상영(張商英)이 정승(政丞)이 되니 이날 저녁에 혜성(彗星)이 없어졌다고28016) 합니다. 의정부(議政府)는 섭리(燮理)하는 곳이니 물망(物望)이 없는 자가 있게할 수는 없습니다. 윤호(尹壕)도 또한 스스로 편안하지 못하여서 피혐(避嫌)하기를 청하였으니, 신등은 청(請)을 윤허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윤숙(尹俶)은 본디 부박(浮薄)하고 경조(輕躁)한 이름이 있어 출납(出納)의 임무에 합당하지 못하다고 하여 이 때문에 체임(遞任)을 당하였습니다. 병조(兵曹)는 단지 병권(兵權)만이 아니고 또 정권(政權)도 있으니, 어찌 윤숙(尹俶)이 마땅히 감당할 곳이겠습니까? 박원종(朴元宗)은 바야흐로 추핵(推劾)을 당하고 있는데 바로 참의(參議)에 승진하였으니, 법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설순조(薛順祖)는 연로(年老)하고 귀가 어두워 소리를 잘 듣지못하여 전번에 김해(金海)에 제수되었다가 이 때문에 체직(遞職)을 당하였는데, 이제 황주목사(黃州牧使)를 제수하였습니다. 남계응(南季膺)은 종5품(從五品)으로서 갑자기 4품(四品)에 승진하였습니다. 이 모두 물의[物聽]를 놀라게 하였으니, 개차(改差)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하니,
전교(傳敎)하기를,
“수군(水軍)은 이미 명하여 방면(放免)하였다. 만약 팽배(彭排), 대졸(隊卒)의 경우는 비록 이 역사가 아니더라도 본시 일없이 놀고 지내는 자들이 아니다. 하물며 요미(料米)를 주고 역사를 시키는 것이겠느냐? 우의정(右議政)의 일은 어찌하여 다시 와서 말하느냐? 어떤 사람을 써서 어떤 징험(徵驗)이 있다고 하는 것은 융통성없는 통하지않는 논리다. 윤숙(尹俶)은 전번에 승정원(承政院)에 있을 때 대간(臺諫)이 그가 정승(政丞)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윤숙(尹俶)도 또한 굳이 사양하는 까닭으로 체임(遞任)하였으니, 어찌 병조(兵曹)에 합당하지 않겠느냐? 박원종(朴元宗)은 윤숙(尹俶)의 좌목(座目)의 아래에 있는 까닭으로써 규례(規例)에 따라 참의(參議)로 승직(陞職)시켰는데, 어찌하여 옳지 못하다고 하느냐? 설순조(薛順祖)와 남계응(南季膺)의 일은 이조(吏曹)에 물음이 마땅하다.”하였다.
강경서(姜景敍)가 말하기를,
“옛날에 말하기를, ‘하늘의 노여움을 경외(敬畏)하면 감히 놀며 즐기지못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요사이 재변(災變)이 잇따라 일어나니 모든 역사를 정지하여 하늘의 경계를 경계하심이 마땅합니다. 윤호(尹壕)는 시종(侍從)과 대간(臺諫)이 그 합당하지 못함을 여러 번 말하였으니, 윤호(尹壕) 또한 어찌 스스로 편안할 수가 있습니까? 윤숙(尹俶)의 성품은 본시 천박하고 경솔하며, 박원종(朴元宗)은 탄핵(彈劾)을 받고 천전(遷轉)한 까닭으로 체임(遞任)하기를 청하였습니다.”하니,
전교(傳敎)하기를,
“군자감(軍資監)의 일은 부득이한데서 나온 부득이한 일이니, 어찌 재변(災變)이 있겠느냐? 제군(諸君)의 제택(第宅)은 공역(工役)을 거의 마쳐가니, 지금 그만둘 수는 없다. 우의정(右議政)은 비록 스스로 사직(辭職)하였더라도 그에게 잘못한 것이 없으며, 윤숙(尹俶)은 청백하고 간결(簡潔)하며, 박원종(朴元宗)은 규례따라 승진하였으니, 어찌 체임(遞任)할 수 있겠느냐?”하였다.
註28015]군자강감(軍資江監): 군자감(軍資監)의 분감(分監)으로 한강(漢江)가에 있는 것.註28016]송조(宋朝)의 장상영(張商英)이 정승(政丞)이 되니 이날 저녁에 혜성(彗星)이 없어졌다고: 송(宋)나라 휘종(徽宗)때에 날이 몹시 가물고, 혜성(彗星)이 갑자기 나타난 적이 있었는데, 장상영(張商英)을 재상으로 임명하자, 혜성이 그날 밤 즉시 사라지고, 그 다음날 비가 내렸다고 함.
○司憲府掌令姜景叙來啓曰: “古人云: ‘民勤於食, 則百事廢。’ 諸君、駙馬第宅及軍資江監營繕, 一時竝擧, 此皆不得已之事乎? 右議政尹壕, 弘文館旣言不合, 初授時, 臺諫亦已論之, 今天災雖不可謂壕之故, 昔唐久旱, 而李德裕爲相, 是日乃雨, 時人謂之李德裕雨。 宋朝張商英爲相, 是夕(慧)〔彗〕減。 政府, 爕理之地, 不可以無物望者處之。 壕亦不自安而請避, 臣等謂, 可允其請也。 尹俶, 素有浮躁之名, 不合出納之任, 以此見遞, 兵曹非獨兵權, 又有政權, 豈俶所宜堪處。 朴元宗方被推劾, 乃陞參議, 有違於法。 薛順祖年老重聽, 前授金海, 以此見遞, 今牧黃州。 南季膺, 以從五品, 驟陞四品, 皆駭物聽, 不可不改。” 傳曰: “水軍已命放之, 若彭排、隊卒, 雖非此役, 本非游手者, 況給料而役之乎? 右議政事, 何更來言? 用某人而有某徵者, 是膠固不通之論也。 俶, 前在政院, 臺諫言其爲政丞子, 俶亦牢辭, 故遞之, 豈不合於兵曹乎? 元宗以俶座目在下, 故例陞參議, 何謂不可? 順祖、季應事, 當問于吏曹。” 景叙曰: “古云: ‘敬天之怒, 無敢戲豫。’ 近日災異荐臻, 宜停諸役, 以戒天戒。 尹壕, 侍從臺諫, 屢言其不合, 壕亦豈能自安? 俶性本浮躁, 元宗被劾遷轉, 故請遞耳。” 傳曰: “軍資監事, 出不得已, 不得已之事, 豈有災變乎? 諸君第宅, 工役垂畢, 今不可停也。 右議政, 雖自辭職, 彼無所失, 俶淸簡, 元宗例陞, 何可遞也?”
성종 294권, 25년(1494 갑인/명홍치(弘治) 7년) 9월 2일 정해 3번째기사
강경서의 탄핵을 받은 병조참지 윤숙이 피혐하기를 청하다
병조참지(兵曹參知) 윤숙(尹俶)이 와서 아뢰기를,
“신은 본시 용렬한데다 또 대간(臺諫)의 논박을 받았으니, 피혐(避嫌)하기를 청합니다.”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兵曹參知 尹俶 來啓曰: “臣本庸劣, 又被臺駁, 請避。” 不聽。
성종 294권, 25년(1494 갑인/명 홍치(弘治) 7년) 9월 8일(계사) 3번째기사
윤호, 윤숙, 박원종, 김철손등에 대해 의논하다
노사신(盧思愼)은 의논하기를,
“박원종(朴元宗)은 신의 종모제(從母弟)의 아들이므로 감히 의논하지 못하겠습니다. 윤호(尹壕), 윤숙(尹俶), 설순조(薛順祖), 남계응(南季膺) 등의 일과 같은 경우는 아마도 사헌부(司憲府)의 말이 지나친 것이 아닌가합니다.
다만 훈련정(訓鍊正)의 품계(品階)를 제수하는 지위는 이 앞에서는 모두 정3품(正三品)을 거친 이로 하였는데 김철손(金哲孫)은 4품(四品)으로서 승자(陞資)하여 제수하였으니, 지나친 것같습니다. 그러나 직차(職次)가 상당한 이가 없고, 김철손(金哲孫)의 인물이 이 자리에 합당하다면 또한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하고,
한치형(韓致亨), 정문형(鄭文炯)은 의논하기를,
“윤호(尹壕)는 여러 대신(大臣)에게 의논하게 하여 처리한 지가 이미 오래 되었으며, 박원종(朴元宗), 윤숙(尹俶)등은 그 임무를 감당할 만하고, 설순조(薛順祖), 남계응(南季膺)등의 일은 이조(吏曹)에서 아뢴 것이 매우 마땅합니다. 김철손(金哲孫)은 비록 정품(正品)을 거치지는 않았으나 역사(歷仕)한 지가 이미 오래 되었으며, 인기(人器)가 상당하니, 모두 다시 의논할 필요가 없습니다.”하고,
유지(柳輊)는 의논하기를,
“사람을 쓸 즈음에 재덕(才德)을 겸전(兼全)한 한점의 하자(瑕疵)도 없는 사람을 얻기란 어렵습니다. 다만 《대전(大典)》의 법은 진실로 마땅히 지키기를 금석(金石)과 같이 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행하기가 어려운 곳이 있으면 혹 임시로 변통하는 것이 예(例)입니다. 윤호(尹壕)는 비록 허랑(虛浪)하다는 이름은 있더라도 명백한 흔구(痕咎)가 없고, 또 제수한 지가 벌써 오래 되었습니다. 더구나 한백륜(韓伯倫), 윤사분(尹士昐)의 전례가 있음이겠습니까? 박원종(朴元宗)은 추고(推考)함으로써 천전(遷轉)하였다고 말하나, 이것은 박원종(朴元宗)의 잘못이 아닙니다. 윤숙(尹俶)은 청렴하고 간결(簡潔)하다고 이름이 났는데 청렴간결한 사람은 세상에서 많이 얻지 못하니, 작은 흠은 족히 의논할 것이 못됩니다. 김철손(金哲孫), 설순조(薛順祖), 남계응(南季膺)도 또한 모두 쓸 만하니, 신이 임시로 변통한다고 한 것은 이것입니다.”하고,
윤효손(尹孝孫)은 의논하기를,
“병조(兵曹)는 임무가 중하니, 참의(參議), 참지(參知)가 모두 문신(文臣)이 아니고 임시로 조치하면 혹 잘못됨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이제 김철손(金哲孫)은 종6품(從六品)의 사축(司畜)으로서 차례를 넘어서 배수하고, 남계응(南季膺)은 종5품(從五品)의 도사(都事)로서 해를 넘기지않고 승차(陞差)하여 군수(郡守)를 제수하였음은 모두 외람(猥濫)한 조짐이 있을까합니다.”하니,
전교(傳敎)하기를,
“많은 사람의 의논이 이와 같으며, 내 뜻도 이와 같다. 그 사람이 현명하다면 어찌 자급을 헤아리겠느냐? 이 의논을 사헌부에 보이라.”하였다.
사신이 논평하기를, “국가에서 무릇 일을 의논하면 윤필상(尹弼商)은 반드시 임금의 뜻을 받들어 순종하여, ‘상교(上敎)가 윤당합니다.’라고 하고, 장령(掌令) 강경서(姜景敍)는 일을 논계(論啓)하다가 임금이 힐책하면 강경서(姜景敍)는, ‘지만(遲晩)28021)합니다.’를 연달아 일컬으니, 당시의 사람이 말하기를 윤당정승(允當政丞)과 지만장령(遲晩掌令)이라 하였다. 지만은 사죄(謝罪)하는 말이다.”하였다.
註28021]지만(遲晩): 죄인이 스스로 자백할 때 ‘너무 오래 속여서 미안하다.’는 뜻으로 자기의 잘못을 고백하던 말
○盧思愼議: “朴元宗, 臣從母弟子, 不敢議。 若尹壕、尹俶、薛順祖、南季膺等事, 憲府之言, 恐爲過之, 但訓鍊正階除之地, 前此皆以經正三品者爲之, 哲孫以四品陞授似過, 然職次相當者無, 而哲孫人物可合此, 則亦未爲過。” 韓致亨、鄭文烱議: “尹壕議諸大臣, 處之已久, 元宗、尹俶等, 可堪其任, 順祖、季膺等事, 吏曹所啓甚當。 哲孫雖未經正品, 歷仕已久, 人器相當, 皆不須更論。” 柳輊議: “用人之際, 得才德俱全, 無一瑕纇者爲難。 但《大典》之法, 固當守如金石, 然有難行處, 則或有臨時變通, 例也。 尹壕雖有虛浪之名, 未有顯顯痕咎, 又除授已久, 況伯倫、士昐, 有前例乎? 元宗以推考遷轉爲言, 此非元宗之失也。 尹俶以淸簡名, 則淸簡之人, 世不多得, 小疪不足論也。 哲孫、順祖、季膺, 亦皆可用, 臣所謂臨時變通者, 此也。” 尹孝孫議: “兵曹任重, 參議、參知, 俱非文臣, 臨時措置, 恐或有失。 今哲孫以從六品司畜, 越次超拜, 季膺以從五品都事, 未踰年陞授郡守, 皆有猥濫之漸。” 傳曰: “群議如是, 予意亦如是, 其人果賢, 何計資級? 其示此議于司憲府。”【史臣曰: “國家凡議事, 尹弼商必承順上意, 以爲上敎允當, 掌令姜景叙論事, 上詰之, 景叙連稱遲晩, 時人爲之語曰, 允當政丞、遲晩掌令。 遲晩, 謝罪之辭。”】
성종 294권, 25년(1494 갑인/명홍치(弘治) 7년) 9월 15일(경자) 1번째기사
박안성의 추국이 끝날 때까지 박수륜의 상언을 승정원에 그대로 두게하다
전교(傳敎)하기를,
“어제 승정원(承政院)에서 아뢰었던 뜻을 사헌부(司憲府)를 불러서 물어보라.”하니,
장령(掌令) 강경서(姜景敍)가 와서 대답하기를,
“본부(本府)는 말의 근거를 모름지기 묻지 않았던 것은 일이 만약 추국(推鞫)을 마치면, 그 일이 스스로 드러나리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아뢰었습니다.”하였다.
전교(傳敎)하기를,
“추국(推鞫)이 끝나기를 기다려서 처치하고, 박수륜(朴守綸)의 상언(上言)은 우선 승정원(承政院)에 그대로 두라.”하였다.
○庚子/傳曰: “其以昨日承政院所啓之意, 招憲府問之。” 掌令姜景叙來對曰: “本府以言根不須問, 事若畢推, 其事自露, 故啓之如此耳。” 傳曰: “俟畢推處之。 守綸上言, 姑留政院。”
성종 295권, 25년(1494 갑인/명홍치(弘治) 7년) 10월 3일(무오) 1번째기사
월성군 이철견이 정호의 첩을 간통했다는 일로 피혐하기를 청하다
월성군(月城君) 이철견(李鐵堅)이 와서 아뢰기를,
“헌부(憲府)에서 신(臣)이 정호(鄭灝)의 첩(妾)을 간통하였다하여 국문(鞫問)하는데, 이제 명하여 출사(出仕)하게 하시니, 마음이 실로 편안하지 못합니다. 청컨대 피혐(避嫌)하게 하소서. 정호(鄭灝)의 첩(妾) 다물사리(多勿沙里) 는 곧 조종(趙悰)의 비(婢)입니다. 신(臣)의 비(婢)와 더불어 관현(管鉉)을 함께 업(業)으로 하였는데, 간혹 신의 집에서 유숙(留宿)하여, 신이 일찍이 사통(私通)하였습니다. 그 뒤에 정호(鄭灝)가 첩으로 삼았다가 음행(淫行)이 있음으로써 버림을 받은 지가 이제 벌써 3년이 되었는데도 헌부(憲府)에서는 사증(辭證)은 묻지않고 신의 죄를 나직(羅織)하였으니, 신은 실로 민망합니다.”하니,
전교하기를,
“재상(宰相)의 일을 나직(羅織)하여 죄를 만듦이 어찌 대간(臺諫)의 도리이겠는가, 내가 마땅히 헌부에 묻겠으니, 피혐(避嫌)하지 말라.”하였다.
장령(掌令) 강경서(姜景敍)가 와서 아뢰기를,
“신등이 들으니, 어떤 사람이 정호(鄭灝)의 자식(子息)있는 첩(妾)을 간통(奸通)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 국치(鞫治)하고 있는데, 말이 이철견(李鐵堅)에게 미치었을 뿐입니다.”하니,
전교하기를,
“그대들은 공사(公事)는 하지않고 한갓 인군(人君)의 과실(過失)과 재상(宰相)의 일만을 논박할 따름이다.”하였다.
사신이 논평하기를, “이철견(李鐵堅)이 일찍이 서울 한복판에 집을 지었는데, 처음에 잡은 땅을 편소(偏小)하게 하였으므로, 이웃 거지(居地)를 침점(侵占)28073)하고 따라서 그 집을 크게 하여 축첩(畜妾)하는 곳을 삼으니, 희시(姬侍)28074)가 매우 많았다. 조종(趙悰)의 비녀(婢女)로서 아름답고 음률(音律)을 아는 이가 있어 내금위(內禁衛) 정호(鄭灝)의 첩이 되었는데, 이철견 이 보고는 기뻐하더니 드디어 간통(奸通)하였다. 비녀(婢女)가 조종의 외랑(外廊)에서 거처하니, 이철견이 혹 나아가서 함께 음행(淫行)하되, 스스로 협기(俠氣)가 있는 소년같이 하니, 정호가 듣고서 울며 말하기를, ‘이철견은 대상(大相)으로서 첩(妾)을 둠이 많거늘 또 나의 첩까지도 빼앗느냐?’고 했다.” 하였다.
註28073]침점(侵占): 침노하여 빼앗아 차지함.註28074]희시(姬侍): 희첩(姬妾). 곧 첩(妾)을 말함.
○戊午/月城君李鐵堅來啓曰: “憲府以臣奸鄭灝之妾鞫之, 今命出仕, 心實未安, 請避嫌。 灝之妾多勿沙里, 卽趙悰之婢也, 與臣婢共業管絃, 或宿于臣家, 臣曾與之私焉, 其後鄭灝作妾, 以有淫行見棄, 今已三年, 而憲府不問辭證, 羅織臣罪, 臣實憫焉。” 傳曰: “宰相之事, 羅織成罪, 是豈臺諫之道乎? 予當問于憲府。 其勿避嫌。” 掌令姜景叙來啓曰: “臣等聞, 有人奸鄭灝有子息妾, 時方鞫治, 而言及於鐵堅耳。” 傳曰: “爾等不爲公事, 徒論人君過失及宰相之事而已。”【史臣曰: “鐵堅嘗治第於都中, 始卜地偏小, 侵占隣居, 因大其家, 爲畜妾所, 姬侍甚衆。 趙悰有婢, 美而解音律, 爲內禁衛鄭灝妾, 鐵堅見而悅之, 遂奸焉。 婢居悰外廊, 鐵堅或就與之淫, 自同俠少, 灝聞而泣曰: ‘鐵堅大相, 畜妾不爲不多, 而又奪我妾乎?”】
편수관 명단
홍치 12년28613) 2월 22일 춘추관(春秋館)에서 교지(敎旨)를 받들어 찬진(撰進)하였다.
전후(前後)의 관직을 아울러 기록한다.
영관사(領館事)
추충정난익대순성명량좌리공신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겸영경연홍문관예문관관상감사거창부원군(推忠定難翊戴純誠明亮佐理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領經筵弘文館藝文館觀象監事居昌府院君) 신(臣) 신승선(愼承善)
감관사(監館事)
추충정난익대공신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좌의정겸영경연사함종부원군(推忠定難翊戴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領經筵事咸從府院君) 신(臣) 어세겸(魚世謙)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우의정겸영경연사(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事)신(臣) 성준(成俊)
지관사(知館事)
순성좌리공신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겸판의금부사지경연사광원군(純誠佐理功臣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知經筵事廣原君) 신(臣) 이극돈(李克墩)
숭정대부 의정부우찬성(崇政大夫議政府右贊成) 신(臣) 박건(朴楗)
정헌대부 지중추부사겸예문관제학(正憲大夫知中樞府事兼藝文館提學) 신(臣) 유순(柳洵)
정헌대부 의정부좌참찬겸지의금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성균관사 동지경연사(正憲大夫議政府左參贊兼知義禁府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成均館事同知經筵事) 신(臣) 홍귀달(洪貴達)
정헌대부 의정부우참찬겸홍문관제학 오위도총부도총관(正憲大夫議政府右參贊兼弘文館提學五衛都摠莩摠管) 신(臣) 노공필(盧公弼)
자헌대부의정부우참찬겸지의금부사(資憲大夫議政府右參贊知義禁府事) 신(臣) 윤효손(尹孝孫)
동지관사(同知館事)
추충정난익대공신가정대부 공조참판겸오위도총부부총관 한평군(推忠定難翊戴功臣嘉靖大夫工曹參判兼五衛都摠府副摠管漢平君) 신(臣) 조익정(趙益貞)
가정대부 예조참판(嘉靖大夫禮曹參判) 신(臣) 김수동(金壽童)
가선대부 병조참판(嘉善大夫兵曹參判) 신(臣) 이육(李陸)
가선대부 병조참판(嘉善大夫兵曹參判) 신(臣) 권건(權健)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 신(臣) 김극검(金克儉)
가선대부 예조참판겸예문관제학(嘉善大夫禮曹參判兼藝文館提學) 신(臣) 신종호(申從濩)
가선대부 한성부좌윤(嘉善大夫漢城府左尹) 신(臣) 김제신(金悌臣)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 신(臣) 허침(許琛)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 신(臣) 안침(安琛)
편수관(編修官)
통훈대부 홍문관직제학 지제교겸경연시강관 예문관응교(通訓大夫弘文館直提學知製敎兼經筵侍講官藝文館應敎) 신(臣) 표연말(表沿沫)
통훈대부 홍문관직제학지제교겸경연시강관(通訓大夫弘文館直提學知製敎兼經筵侍講官) 신(臣) 권주(權柱)
통훈대부 홍문관직제학지제교 겸경연시강관(通訓大夫弘文館直提學知製敎兼經筵侍講官) 신(臣) 윤희손(尹喜孫)
통훈대부 종부시정지제교(通訓大夫宗簿寺正知製敎) 신(臣) 이균(李均)
통훈대부 장악원정지제교 겸승문원참교 한학교수(通訓大夫掌樂院正知製敎兼承文院參校漢學敎授) 신(臣) 이거(李琚)
통훈대부 장악원정(通訓大夫掌樂院正) 신(臣) 강경서(姜景敍)
중직대부 수홍문관직제학지제교 겸경연시강관승문원참교(中直大夫守弘文館直提學知製敎兼經筵侍講官承文院參校) 신(臣) 이승건(李承健)
중직대부 수상의원정(中直大夫守尙衣院正) 신(臣) 양희지(楊熙止)
봉정대부 수종부시정지제교(奉正大夫守宗簿寺正知製敎)신(臣) 이달선(李達善)
통훈대부 행사헌부집의(通訓大夫行司憲府執義) 신(臣) 이유청(李惟淸)
중직대부 사헌부집의(中直大夫司憲府執義) 신(臣) 이의무(李宜茂)
중직대부 홍문과전한지제교 겸경연시강관(中直大夫弘文館典翰知製敎兼經筵侍講官) 신(臣) 김봉(金崶)
봉정대부 수홍문관전한지제교 겸경연시강관예문관응교(奉正大夫守弘文館典翰知製敎兼經筵侍講官藝文館應敎) 신(臣) 김전(金詮)
봉정대부 수성균관사성(奉正大夫守成均館司成) 신(臣) 이수공(李守恭)
봉렬대부 수성균관사성(奉列大夫守成均館司成) 신(臣) 안당(安瑭)
통훈대부 행종친부전첨(通訓大夫行宗親府典籤) 신(臣) 이계복(李繼福)
중훈대부 행의정부사인(中訓大夫行議政府舍人) 신(臣) 이세영(李世英)
봉정대부 의정부사인 겸승문원교감(奉正大夫議政府舍人兼承文院校勘) 신(臣) 장순손(張順孫)
봉정대부 의정부사인지제교 겸승문원교감(奉正大夫議政府舍人知製敎兼承文院校勘) 신(臣) 남궁찬(南宮璨)
봉정대부 행승문원교감지제교 겸교서관교리(奉正大夫行承文院校勘知製敎兼校書館校理) 신(臣) 박열(朴說)
봉렬대부 행군기시첨정(奉列大夫行軍器寺僉正) 신(臣) 손번(孫蕃)
조산대부 승문원교감(朝散大夫承文院校勘) 신(臣) 허집(許輯)
조봉대부 수홍문관응교 제교 겸경연시강관 예문관응교(朝奉大夫守弘文館應敎知製敎兼經筵侍講官藝文館應敎) 신(臣) 남세주(南世周)
조봉대부 홍문관부응교지제교 겸경연시강관 예문관응교 교서관교리(朝奉大夫弘文館副應敎知製敎兼經筵侍講官藝文館應敎校書館校理) 신(臣) 최부(崔溥)
조봉대부 사섬시첨정(朝奉大夫司贍寺僉正) 신(臣) 남세담(南世聃)
조봉대부 군기시첨정(朝奉大夫軍器寺僉正) 신(臣) 김삼준(金三俊)
통덕랑 통례원봉례지제교(通德郞通禮院奉禮知製敎) 신(臣) 이의손(李懿孫)
기주관(記注官)
조봉대부 행공조정랑(朝奉大夫行工曹正郞) 신(臣) 이전(李㙉)
조봉대부 행홍문관교리지제교 겸경연시독관(朝奉大夫行弘文館校理知製敎兼經筵侍讀官) 신(臣) 유순정(柳順汀)
통선랑 병조정랑 겸승문원교리(通善郞兵曹正郞兼承文院校理) 신(臣) 임유겸(任由謙)
통덕랑 홍문관교리지제교 겸경연시독관 승문원교리(通德郞弘文館校理知製敎兼經筵侍讀官承文院校理) 신(臣) 정광필(鄭光弼)
통선랑 행홍문관부교리지제교 겸경연시독관승문원교리(通善郞行弘文館副校理知製敎兼經筵侍讀官承文院校理) 신(臣) 이과(李顆)
봉직랑 수병조정랑지제교(奉直郞守兵曹正郞知製敎) 신(臣) 김감(金勘)
봉직랑 수예조정랑겸승문원교리(奉直郞守禮曹正郞兼承文院校理) 신(臣) 성세정(成世貞)
봉렬대부 행홍문관부교리지제교 겸경연시독관(奉列大夫行弘文館副校理知製敎兼經筵侍讀官) 신(臣) 이효문(李孝文)
봉훈랑 홍문관부교리지제교 겸경연시독관(奉訓郞弘文館副校理知製敎兼經筵侍讀官) 신(臣) 손주(孫澍)
조봉대부 행총익부도사(朝奉大夫行忠翊莩事) 신(臣) 권균(權鈞)
기사관(記事官)
통선랑 행이조좌랑지제교(通善郞行吏曹佐郞知製敎) 신(臣) 김천령(金千齡)
봉직랑 행사헌부감찰(奉直郞行司憲府監察) 신(臣) 이효돈(李孝敦)
봉훈랑 행예조좌랑(奉訓郞行禮曹佐郞) 신(臣) 유희저(柳希渚)
봉훈랑 행홍문관수찬지제교 겸경연검토관(奉訓郞行弘文館修撰知製敎兼經筵檢討官) 신(臣) 권달수(權達手)
선교랑 수공조좌랑(宣敎郞守工曹佐郞) 신(臣) 기저(奇褚)
선교랑 수성균관전적(宣敎郞守成均館典籍) 신(臣) 권민수(權敏手)
선교랑 수승문원교검(宣敎郞守承文院校檢) 신(臣) 윤은보(尹殷輔)
선교랑 수성균관전적(宣敎郞守成均館典籍) 신(臣) 조치우(曺致虞)
승훈랑 행홍문관부수찬지제교 겸경연검토관(承訓郞行弘文館副修撰知製敎兼經筵檢討官) 신(臣) 송흠(宋欽)
승훈랑 행홍문관부수찬지제교 겸경연검토관(承訓郞行弘文館副修撰知製敎兼經筵檢討官) 신(臣) 이유녕(李幼寧)
선교랑 홍문관부수찬지제교 겸경연검토관(宣敎郞弘文館副修撰知製敎兼經筵檢討官) 신(臣) 남곤(南袞)
선무랑 홍문관부수찬지제교 겸경연검토관(宣務郞弘文館副修撰知製敎兼經筵檢討官) 신(臣) 이관(李寬)
병절교위충좌위부사과(秉節校尉忠佐衛副司果) 신(臣) 신세연(辛世璉)
선무랑 행예문관봉교(宣務郞行藝文館奉敎) 신(臣) 신징(申澄)
승훈랑 행예문관봉교(承訓郞行藝文館奉敎) 신(臣) 강덕유(姜德裕)
선교랑 행예문관봉교(宣敎郞行藝文館奉敎) 신(臣) 정승조(鄭承祖)
승훈랑 행예문관봉교(承訓郞行藝文館奉敎) 신(臣) 이희순(李希舜)
선무랑 행예문관봉교(宣務郞行藝文館奉敎) 신(臣) 한세환(韓世桓)
통선랑 행승문원박사(通善郞行承文院博士) 신(臣) 심순문(沈順門)
선무랑 행홍문관박사 겸경연사경(宣務郞行弘文館博士兼經筵司經) 신(臣) 성중엄(成重淹)
선무랑 행예문관봉교(宣務郞行藝文館奉敎) 신(臣) 정희량(鄭希良)
선무랑 행예문관봉교(宣務郞行藝文館奉敎) 신(臣) 권오기(權五紀)
무공랑 예문관봉교(務功郞藝文館奉敎) 신(臣) 성희철(成希哲)
무공랑 예문관봉교(務功郞藝文館奉敎) 신(臣) 이행(李荇)
무공랑 예문관대교(務功郞藝文館待敎) 신(臣) 강징(姜澂)
무공랑 행예문관대교(務功郞行藝文館待敎) 신(臣) 고세창(高世昌)
승훈랑 행예문관대교(承訓郞行藝文館待敎) 신(臣) 김언(金,)
선교랑 행예문관대교(宣敎郞行藝文館待敎) 신(臣) 성윤조(成允祖)
무공랑 행홍문관정자 겸경연전경(務功郞行弘文館正字兼經筵典經) 신(臣) 이자(李滋)
무공랑 행예문관검열(務功郞行藝文館檢閱) 신(臣) 신공제(申公濟)
선교랑 행예문관검열(宣敎郞行藝文館檢閱) 신(臣) 김관(金寬)
선무랑 행홍문관정자 겸경연전경(宣務郞行弘文館正字兼經筵典經) 신(臣) 김세필(金世弼)
계공랑 행예문관검열(啓功郞行藝文館檢閱) 신(臣) 이사공(李思恭)
통사랑 행예문관검열(通仕郞行藝文館檢閱) 신(臣) 문근(文瑾)
계공랑 행예문관검열(啓功郞行藝文館檢閱) 신(臣) 하계증(河繼曾)
종사랑 예문관검열(從仕郞藝文館檢閱) 신(臣) 서후(徐厚)
계공랑 행교서관부정자(啓功郞行校書館副正字) 신(臣) 김숭조(金崇祖)
註28613]홍치 12년: 1499 연산군 5년.
연산 4권, 1년(1495 을묘/명홍치(弘治) 8년) 3월 16일(기해) 1번째기사
많은 산릉의 역군들이 병으로 죽은데 대해 치료에 대한 조치를 취하게 하다
전교하기를,
“산릉(山陵)의 역군(役軍)이 많이 병들어 죽었다하니, 이것은 반드시 의원(醫員)들이 구료(救療)하는데 마음을 쓰지않아 그러한 것이리라. 의원을 불러 묻고, 다른 의원으로 하여금 가서 살피고 치료하도록 하고, 또 조관(朝官) 6인을 보내어 검찰하도록 하라.”하매,
민상안(閔詳安), 이의무(李宜茂), 윤장(尹璋), 김숙정(金淑貞), 강경서(姜景敍), 권균(權鈞)을 검찰관으로 삼아서, 사목(事目)을 가지고 가게 하였는데,
1. 각처에서 역사하러 온 군인으로서 굶주리고 병들고 지친 자를 왕래하면서 진찰하여 주리고 병든 자가 있거든 끓인 술과 모주(母酒)를 먹이고, 지친 자가 있거든 쉬게 할 것, 1. 사령(使令)들이 군인을 침노하고 학대하는 자는 모두 검거할 것, 1. 군인으로서 병있는 자는 알맞은 약으로 치료할 것, 1. 의원이 치료에 마음을 쓰지아니하는 자가 있으면 와서 아뢸 것이었다.
○己亥/傳曰: “聞山陵役軍多病死。 必是醫員等, 不用心救療而然也。 其召醫員問之, 令他醫往審救療。 又選朝官六人, 檢察。” 以閔詳安、李宜茂、尹璋、金淑貞、姜景叙、權鈞, 爲檢察官, 齎事目而往。 一, 各處赴役軍人飢病勞困者, 往來診之。 有飢病者以煮酒、母酒饋之。 有勞困者休力。 一, 使令等侵虐軍人者, 竝檢擧。 一, 軍人有病者, 以適藥救療。 一, 醫員不用意救療者來啓。
연산 6권, 1년(1495 을묘/명홍치(弘治) 8년) 6월 29일(경진) 6번째기사
최응현, 이감, 이수언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최응현(崔應賢)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이감(李堪)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이수언(李粹彦)을 집의(執義)로, 반우형(潘佑亨)을 사간(司諫)으로, 민이(閔頤), 강경서(姜景敍)를 장령(掌令)으로, 권유(權瑠), 남세주(南世周)를 지평(持平)으로, 최세걸(崔世傑)을 헌납(獻納)으로, 홍경창(洪慶昌), 임유겸(任由謙)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以 崔應賢 爲大司憲, 李堪 大司諫, 李粹彦 執義, 潘佑亨 司諫, 閔頤 、 姜景敍 掌令, 權瑠 、 南世周 持平, 崔世傑 獻納, 洪慶昌 、 任由謙 正言。
연산 7권, 1년(1495 을묘/명홍치(弘治) 8년) 7월 1일(임오) 1번째기사
최응현, 이감등이 윤탕로의 죄를 다스리고 불경박는 일을 정파하기를 아뢰다
대사헌(大司憲) 최응현(崔應賢), 대사간(大司諫) 이감(李堪), 집의(執義) 이수언(李粹彦), 사간(司諫) 반우형(潘佑亨), 장령(掌令) 민이(閔頤)와 강경서(姜景敍)가 아뢰기를,
“윤탕로(尹湯老)의 사건은 그의 가까운 이웃과 관령(管領)이 이미 다 승복(承服)하였고, 증뢰(贈賂)한 물건도 역시 다 바쳐졌사오며, 간음한 기생도 집을 팔고 도망하였으니, 이는 그 형적을 없애기 위한 것입니다. 한번 함문(緘問)을 받고서 문득 병을 핑계하니, 이는 법사(法司)도 안중에 없고 조정도 안중에 없다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죄를 다스리소서. 원각사(圓覺寺)에서 불경(佛經)박아내는 일은 성종(成宗)을 위하여 복을 구하는 것이지만, 헛된 비용이 적지 않으니, 정파(停罷)시키소서.”하니,
전교하기를,
“탕로의 범죄사건은 드러난 일이 아니니 듣지못하겠고, 불경박아내는 일도 나는 모르는 바이고 대비전(大妃殿)에서 하시는 일이며, 국재(國財)를 소비하지 않는데, 무엇이 해로우랴?”하매,
최응현등은 또 아뢰기를,
“불경박아내는 일은 만약 대비전에서 하시는 것이라면, 기미를 살펴 간하여 그만두시게 하셔야 하오며, 재정 소비의 여부는 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탕로 의 일은 가까운 이웃이 이미 승복했고, 증뢰(贈賂)도 역시 드러났으니, 확실한 것이 아닙니까? 만약 죄를 다스리지 않는다면, 법이 행해지지 않음이 탕로에게서 시작된 셈이니, 결코 내버려 두어서 후세에까지 폐단을 끼치게 하여서는 안되겠습니다.”하니,
전교하기를,
“만약 탕로를 국문하여 불복할 경우에는 반드시 형장(刑杖)을 써야 하는데, 그리되면 모후(母后)의 마음이 상할까두려우니, 단호히 듣지못하겠다”하였다.
○朔壬午/大司憲崔應賢、大司諫李堪、執義李粹彦、司諫潘佑亨、掌令閔頣ㆍ姜景叙啓: “尹湯老事, 切隣、管領, 皆已承服。 贈賂之物, 亦皆現納。 所奸妓, 賣家而逃, 是欲沒其形迹耳。 一被緘問, 遽稱病, 是不有法司, 不有朝廷也, 請須治罪。 圓覺寺印經, 爲成宗徼福也。 然虛費不貲, 請停罷。” 傳曰: “湯老所犯, 非顯著之事, 不聽。 印經事, 予所不知, 是大妃殿所爲, 不費國財, 何害?” 應賢又啓: “印經事, 若大妃殿所爲, 則亦當幾諫而止之, 費財與否, 不必論也。 湯老事, 切隣已服, 贈賂亦著, 非顯而何? 若不治罪, 則法之不行, 始於湯老, 決不可不從, 而貽弊於後。” 傳曰: “若鞫湯老, 不服, 必用刑杖, 恐傷母后意, 斷不可聽。”
연산 7권, 1년(1495 을묘/명홍치(弘治) 8년) 7월 6일(정해) 1번째기사
최응현등이 윤탕로의 죄를 용서할 수 없음과 불경박는 일을 그만두기를 상소하다
대사헌(大司憲) 최응현(崔應賢), 대사간(大司諫) 이감(李堪), 사간(司諫) 반우형(潘佑亨), 집의(執義) 이수언(李粹彦), 장령(掌令) 민이(閔頤)와 강경서(姜景敍), 지평(持平) 권유(權瑠)와 남세주(南世周), 헌납(獻納) 최세걸(崔世傑), 정언(正言) 홍경창(洪慶昌)이 상소하기를,
“신들이 삼가 아룁니다. 즉위한 그 해를 춘추(春秋)에서는 반드시 원년이라 칭한 것은 무엇인가 하면, 원(元)은 선(善)과 시(始)의 뜻으로서 시초를 잘하고 종말을 잘한다는 뜻[義]인 것입니다. 대저 체통을 이어받을 임금이 구중 궁궐 속에서 생장하여 천질(天質)의 아름다움이 외부에 나타나지않고, 학문의 힘이 정사에 베풀어지지 않으며, 침묵만 지키고 있을 적에는 그 천심(淺深)과 후박(厚薄)을 측량할 길이 없다가, 위호(位號)를 바로[正]하고 만기(萬機)를 총괄하게 되매, 움직이면 개벽(開闢)이 되고, 말하면 뇌성(雷聲)이 되어, 잘하면 다스려지고 잘못하면 어지러워지는 것이니, 선악의 나눔과 치란(治亂)의 기틀이 다 첫 해에 결판됩니다. 그런데 반드시 원(元)이라 이른 것은 그 원을 본받아서 시초를 바르게 하고, 악을 버리고 선을 따라서 무궁한 업적을 도모하려는 것이니, 오늘날이야말로 전하의 만기(萬機)의 초원(初元)입니다. 한번 호령을 내리고 한번 형벌을 가하매, 원근 사방에서 우러러 보지않는 자가 없어, 잘할 경우에는 ‘능히 그 종(終)이 있으려는가?’하고, 잘못할 경우에는 ‘말류(末流)의 폐를 구제할 수 있을 것일까?’하며, 두 조건이 대립되어 승부를 서로 기다리니 이는 바로 조심조심할 때요, 도(道)를 바라는 날입니다. 추요(芻蕘)499)에게 선(善)을 묻고 노성(老成)한 이에게 말을 구하며, 형벌에 있어서는 사(私)에 따름으로써 공(公)을 폐하지말고, 상에 있어서는 친구라해서 함부로 주지말며, 길이 갱장(羹墻)500)을 사모하면〈선왕의〉평소의 뜻을 생각하여 잘 계술해서 망령됨이 없게하고, 삼전(三殿)을 봉양하면 반드시 예로써 섬기어 그 과실을 바로잡으시어 만백성으로 하여금 모두 말하기를 ‘거룩하시도다, 왕의 말씀이여!’ 또는 ‘한결같도다, 왕의 마음이여!’하게 하여야만 비로소 원(元)이라 칭하는 큰 뜻에 배합되고, 신민의 소망에 부응한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즉위하신 처음부터 부처 앞에 재지내고 불공하는 일이 큰 사찰[巨刹]에서 서로 잇달고, 쇄쇄한 인아(姻婭)들이 혹은 큰 벼슬자리에 앉아 있으며, 유생(儒生)을 귀양보내고 대간(臺諫)을 잡아 가두어, 진언(進言)하는 길을 막고 직사(直士)의 기를 상하는 것은, 시초를 잘하고 종말을 삼가는 도리가 전연 아닌 것입니다. 그 중에도 더욱 불가한 것이 두 가지가 있으니, 탕로 에게 사정을 써서 선왕의 법을 무너뜨리는 것이 첫째요, 불경을 박아내어 부처에게 아첨함으로써 선왕의 덕에 누가 미치게 하는 것이 둘째입니다. 옛날에 초왕(楚王) 무(戊)가 박태후(薄太后)의 상(喪)을 당하여 복사(服舍)501)에서 사간(私奸)을 했는데, 조조(鼂錯)가 죄주기를 청하였고, 지금에도 관찰사(觀察使) 이종호(李宗灝)가 국상(國喪)을 당한 처음에 아들을 장가들였는데, 유사(有司)가 탄핵하여 파직시켰으니, 무릇 복을 입고 사간(私奸)한 것이 불경(不敬)하기는 마찬가지인데, 한(漢)나라에서는 봉한 땅을 삭감한 것을 이제 전하께서는 완전히 놓아주시고, 아들을 장가들이나 창기의 집에서 묵는 것이나 무법(無法)하기는 마찬가지인데, 전에는 파직한 것을 뒤에 와서는 용서하시고, 재최(齋衰)와 참최(斬衰)는 복으로 말하면 탕로가 중하며, 아들을 장가들인 것과 창기에게 묵은 것은 정으로 말하면 탕로가 심한데, 전하께서 반드시 구명하지않으려 하심은 무엇 때문입니까? 사면령(赦免令)에 의한 것입니까? 아니면 팔의(八議)의 친이된다해서 그러시는 것입니까? 사면령이 내리기 전에 아들을 장가들인 자가 사면령이 내린 뒤에 죄를 얻었으니, 탕로의 죄가 용서할 열에 있지않음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같은 성[同姓]의 후왕(侯王)도 오히려 봉한 땅을 삭감당함을 면하지못하는데, 다른 성의 친(親)이 홀로 사면을 받아야 옳단 말입니까? 옛일을 상고해도 죄준 확증이 있고, 지금으로 헤아려봐도 용서할 근거가 없습니다. 전하께서 반드시 애매하여 밝혀내기 어렵다고 말씀하시지만, 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창기의 집에 드나드는 것은 여러 사람이 모두 본 바로 형적이 환히 드러났는데, 어찌 애매한 일입니까? 탕로가 어른[結髮]이 된 뒤로 성종을 섬기매, 성종께서 옷을 주어 입히시고 밥을 주어 먹이셨으니, 그 길러주신 은혜는 부모라도 그렇지 못할 터인데, 문득 종천(終天)의 슬픔을 잊고 곧 연안(宴安)한 마음을 가졌으니, 이는 충신효자가 분개하여 깊이 미워할 바인데, 전하께서는 홀로 이런 생각을 않고 덮어 주시며 다스리지 않으려 하십니까? 전하를 위하여 취할 일이 아닙니다.
성종 대왕께서 성학(聖學)이 고명하시어서, 집희(緝熙)502)를 말하면 주문왕(周文王)의 극진한 마음이요, 종시(終始)를 말하면 은고종(殷高宗)의 전학(典學)이시라, 석씨(釋氏)의 교에 있어서는 음탕한 소리처럼 미워하고 아름다운 여색처럼 멀리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돈을 바치고 중이 되는 것은 예전부터 법조문에 있었는데, 성종께서 별지(別旨)를 내려서 없애버리려 하시매, 양전(兩殿)께서 들으시고 국문으로 글월을 써서 그것이 불편하다고 진술하시므로, 성종께서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 조용히 간하시어 마침내 성지(聖志)를 달성하여 여태까지 힘입고 있으니, 가령 상전(上殿)께서 다시 부처를 존중하실 때 성종께서 역시 금단하지 않으실 줄로 생각하십니까? 대저 효자가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서는 오직 의(義)를 볼 따름이니, 의(義)에 틀림이 없으면 어버이 또한 스스로 순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수(瞽叟)처럼 완악한 사람으로도 순(舜)의 대효(大孝)에는 마침내 감동이 되었으니, 이는 천리나 인정의 필연적인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말하면, 불경 박아내는 일이 비록 상전(上殿)에게서 나왔을지라도 전하께서 삼전(三殿)을 효도로 봉양하여, 아울러 환심을 얻으시기를, 성종이 양전(兩殿)을 섬기듯이 못하십니까?
진정 성종의 마음을 마음으로 삼으시어 상전을 섬기시고, 성종의 뜻을 뜻으로 삼으시어 이단(異端)을 버리신다면, 상전께서 무엇때문에 듣지않으시며, 무엇때문에 그만두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런데 이제는 그렇게 하지않아, 부드러운 소리로 말씀드리는 효도를 시험해보시지도 않고, 먼저 듣지않으실 것으로만 생각하시어 구차하게 상전의 잘못된 명령만 따르시며 성종의 본뜻을 저버리니, 전하를 위하여 취할 일이 아닙니다.
대개 이 두 가지 실책은 다 첫 정사의 흠이요, 다스림을 좀먹는 근원이므로 뉘우치지않으면 고치지못하고, 고치지못하면 글러져서 그 조짐이 마침내는 상과 벌이 법도가 없게 되어, 선(善)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하지 못하여, 외척(外戚)이 교만방자하며 또한 장차 법을 업신여기고 기강을 무너뜨리는 지경에 이를 것입니다. 가령 이단이 날로 성하고 달로 커져서, 모든 백성이 머리 깎은 중이 되고 탑묘(塔廟)가 여염(閭閻)의 반을 차지한 뒤에야 바야흐로 그 그름을 뉘우친다면, 때는 벌써 늦은 것이니,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처음부터 조심하시고 작은 일부터 삼가하여 악(惡)이 적다하여 범하지마시고, 선이 적다하여 아니하지 마시며, 이 마음을 지키시되 거울처럼 통명하게 하시어 사정에 가려지지 마시고, 이 법을 지키시되 금석(金石)처럼 굳건히 하시어 사정에 흔들리지 마소서. 그렇게 한 뒤라야 《춘추(春秋)》의 ‘크게 정(正)에 거한다[大居正]’는 것이 항상 전하의 대용(大用)이 되어 어기는 바가 없어서 원(元)이란 한 글자를 저버림이 없게 될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채택하여 받아들여 주소서.”하니,
전교하기를,
“탕로는 파직하라. 그 나머지는 들어주지 않는다.”하매,
대간이 또 탕로를 국문하여 그 죄를 끝지을 것을 청하였으나, 듣지않았다.
註499]추요(芻蕘): 나무꾼을 말한 것.註500]갱장(羹墻): 선왕(先王)을 사모하는 뜻으로 쓰임.《후한서(後漢書)》 이고전(李固傳)에, “옛날 요(堯)임금이 붕(崩)한 뒤에 순(舜)임금이 3년동안 사모하여, 앉았을 적에는 요임금이 담장[墻]에서 보이고, 밥먹을 적에는 요임금이 국[羹]에서 보였다.”하였음 註 501]복사(服舍): 상주가 거처하는 여막.註502]집희(緝熙): 밝고 빛난다는 뜻.
○丁亥/大司憲崔應賢、大司諫李堪、司諫潘佑亨、執義李粹彦、掌令閔頤ㆍ姜景叙、持平權瑠ㆍ南世周、獻納崔世傑、正言洪慶昌上疏曰:臣等伏以, 卽位之一年, 《春秋》必稱元年, 何? 元者, 善也, 始也, 善始善終之義。 夫繼體之君, 生於深宮之中, 長於九重之內, 天質之美, 不見於外, 學問之功, 不施於政。 坤以闔之, 淵而默之, 深淺厚薄, 莫得測識, 而及其正位號、摠萬機, 動之爲天闢, 言之爲雷聲, 善則治, 不善則亂。 善惡之分、治亂之機, 皆決於初載, 而必謂之元者, 欲其體元而正始, 去惡而從善, 以圖無窮之業也則今日實殿下萬機之初元也。 一號令之出, 一刑罰之加, 遠近四方, 莫不瞻仰, 善則曰: “庶幾能有其終耶?” 不善則: “末流, 其可救耶?” 二者對立, 勝負相須, 此正兢業之時, 望道之日。 詢善於芻蕘, 乞言於耆舊, 刑不以徇私而廢公, 賞罔以親舊以妄加。 永慕乎羹墻, 則思平生之志, 善述而不妄; 奉養乎三殿, 則必事之以禮, 而匡救其有失。 俾萬姓咸曰: “大哉, 王言!” 又曰: “一哉, 王心!” 如此然後, 始可以配稱元之大, 副臣民之望, 而嗣服之初, 齋佛飯僧, 相繼於巨刹, 瑣瑣姻婭, 或躋於膴仕。 分配儒生, 繫治臺諫, 杜進言之路, 傷直士之氣, 甚非所以善始愼終之道也, 而其尤不可者, 有二焉, 曲私湯老, 以毁先王之法, 一也; 印經媚佛, 以累先王之德, 二也。 昔者, 楚王戊服薄太后喪, 私奸服舍, 鼂錯請誅之。 今者, 觀察使李宗灝醮子於大恤之初, 有司覈罷之。 夫持服私奸, 其不敬, 一也, 漢則削地, 今則全釋; 醮子與宿倡, 其無法, 一也, 前則罷之, 後則宥之。 齊衰之與斬衰, 以服而言, 湯老爲重; 醮子之與宿娼, 以情而言, 湯老爲甚, 殿下必欲不究, 何也? 以其會赦耶? 抑爲八議之親耶? 醮子於赦前者, 得罪於赦後, 則知湯老之罪, 不在於原列也。 同姓侯王, 尙不免削地, 則異姓之親, 獨可赦耶? 稽之於古, 則罪之有徵; 揆之於今, 則赦之無據。 殿下必以曖昧難明爲辭, 則是不然, 出入娼家, 十目所視, 情現迹著, 豈曖昧疑似之事乎? 湯老結髮事成宗, 賜衣衣之, 賜食食之。 卵育之恩, 父母不如, 而遽忘終天之痛, 乃有宴安之心, 此忠臣孝子, 所以憤惋而深嫉者也。 殿下獨無是念, 乃欲庇之不治耶? 竊爲殿下不取也。 成宗大王聖學高明, 緝熙則文王之殫心也; 終始則高宗之典學也。 釋氏之敎, 惡之如淫聲; 遠之如美色。 是故納錢度僧, 舊在令甲, 成宗欲降別旨以罷之, 兩殿聞之, 假諺代書, 陳其不便。 成宗盡其誠敬, 從容微諫, 卒成聖志, 至今賴之。 (意)〔豈〕復謂上殿崇佛, 成宗亦不能禁也耶? 大抵孝子事親, 惟義是視, 義之所安, 則親亦自順。 故雖瞽叟之頑, 底豫於舜之大孝, 此天理人情之必至也。 由是言之, 印經之擧, 雖出於上殿, 殿下孝養三殿, 而竝得懽心, 獨不如成宗之於兩殿乎? 倘以成宗之心爲心, 而事三殿; 以成宗之志爲志, 而去異端, 則上殿何以不聽? 何以不罷? 今乃不然, 不試柔聲之孝, 而先度其不聽, 苟循上殿謬旨, 而負成宗之雅志, 竊爲殿下不取也。 凡此二失者, 皆初政之疵, 蠹治之源, 不悔則不改; 不改則遂非。 其漸至於賞罰無章, 不能勸善而(徵)〔懲〕惡, 外戚驕恣, 亦將侮法而干紀, 異端日熾而月盛, 齊民作爲緇髡, 塔廟半於閭閻, 然後方悔其非, 嗚呼! 亦晩矣。 願殿下愼之於初, 謹之於微, 勿以惡小而爲之, 勿以善小而不爲。 守此之心, 如鑑之空, 而勿以私蔽; 執此之法, 如金石之固, 而勿以私撓。 然後《春秋》大居正常, 爲殿下大用而無所違, 可以無負於元之一字矣。 伏惟採納焉。
傳曰: “湯老罷職。 餘不聽。” 臺諫又請鞠湯老, 究竟其罪, 不聽。
연산 7권, 1년(1495 을묘/명홍치(弘治) 8년) 7월 8일 기축 3번째기사
장령 강경서등이 무신인 유용평의 문관직 5품 등용을 개정하기를 아뢰다
장령(掌令) 강경서(姜景敍), 정언(正言) 임유겸(任由謙)이 아뢰기를,
“근일의 정사(政事)에서 유용평(劉用平)을 선공판관(繕工判官)으로 삼았지만, 용평은 항상 군직(軍職)에만 보되었을 따름이고, 동반(東班)506)에는 전혀 경력이 없는데, 처음으로 5품(品)관을 주는 것은 너무도 과하오니, 개정(改正 )하소서. 주서(注書)는 비록 참외(參外)라 할지라도 현직(顯職)507)인데, 이전(李㙉)이 그 아비의 자급을 대신 받았으니, 그 동생들 중에 반드시 대신 받을 만한 사람이 있을 터인데, 전(㙉)이 대신한 것은 그 마음이 관작을 사모해서 그런 것입니다. 개정하소서.”하니,
전교하기를,
“유용평이 그 직을 감당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이조(吏曹)에 물으라. 그리고 대신 가자받은 일은 그 아비가 주었는데, 무엇때문에 개정하느냐?”하매,
경서는 다시 아뢰기를,
“아비가 비록 주었지만, 형제중에 관직이 없는 자에게 사양해야하니, 개정하소서.”하니,
명하여 원상(院相)에게 문의하도록 하였다. 이조(吏曹)에서 아뢰기를,
“유용평(劉用平)은 일찍이 20여년을 수참(水站)의 판관(判官)으로 있다가, 마침 상(喪)을 만나서 전직되지 못했는데, 그 사람됨이 지취가 속되지않고, 또 글씨에 능합니다. 글씨가 비록 조그마한 기술이오나, 성종께서도 일찍이 찬양하셨고, 또 이제 군적낭청(軍籍郞廳)이 되었는데, 오랫동안 군적을 맡아 본 자는 정사(政事)할 적마다 차례차례로 등용하게 되었으므로 신들이 의망(擬望)한 것입니다. 그 사람이 적당하고 적당치 못한 것은 병조(兵曹)에 하문(下問)하시면 알 수 있으실 것입니다.”하니,
전교하기를,
“이런 뜻으로써 대간에게 유시하라.”하매,
대간이 다시 아뢰기를,
“6품만 제수하여도 넉넉한데, 5품은 경수(徑授)508)하는 것은 부당하오니, 개정하소서.”하였다.
註506]동반(東班): 문관 註507]현직(顯職): 좋은 벼슬 註508]경수(徑授): 차서를 뛰어넘어 제수하는 것
○掌令姜景叙、正言任由謙啓: “近日之政, 以劉用平爲繕工判官。 用平常補軍職而已, 於東班全無來歷, 而初受五品官太濫, 請改正。 注書雖參外, 亦顯職也, 而李㙉代受其父之資。 其同生必有可代之人, 而㙉代之, 是其心慕官爵而然也, 請改正。” 傳曰: “用平能堪其職與否, 問於吏曹。 代加事, 其父與之, 何用改正?” 景叙更啓: “父雖與之, 當讓於兄弟無職者, 請改正。” 命議于院相。 吏曹啓: “劉用平曾爲水站判官二十餘年, 而適遭喪, 未得遷轉。 其爲人志趣不俗, 又能書。 書雖小技, 成宗亦嘗褒之。 且今爲軍籍郞廳, 久任軍籍者, 每政次次用之, 故臣等擬望。 若其人當否, 下問於兵曹, 則可知矣。” 傳曰: “其以此意, 諭臺諫。” 臺諫更啓: “只授六品, 已優矣。 徑授五品, 未便, 請改正。”
【태백산사고본】 2책 7권 11장 A면
연산 7권, 1년(1495 을묘/명홍치(弘治) 8년) 7월 8일(기축) 4번째기사
최응현등이 노사신이 재상의 소임을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해 상소하다
대사헌 최응현(崔應賢), 대사간 이감(李堪), 집의 이수언(李粹彦), 사간 반우형(潘佑亨), 장령 민이(閔頤)와 강경서(姜景敍), 지평 권유(權瑠)와 남세주(南世周), 헌납 최세걸(崔世傑), 정언(正言) 홍경창(洪景昌)과 임유겸(任有謙)이 상소하기를,
“임금이 남면(南面)하고 만기(萬機)를 처리하는데 중임을 맡겨 믿고 의지하는 것은 정승이니, 그 사람을 얻으면 온 나라가 힘입고, 그 사람을 얻지 못하면 조정이 해체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공(周公)이 재상이 되매 불끈 흥하고, 황보(皇父)가 재상이 되매 홀연히 망하였으니, 이는 떳떳한 이치입니다. 비록 그러나 주공은 큰 성인(聖人)이라 세상에서 항상 얻을 수 없지만, 황보는 어질지 못한 중에서도 더욱 심한 자라, 중등가는 임금도 신하 삼기를 부끄러워하기 때문에 오직 그르다할 근거도 없고, 나무랄래야 나무랄 것도 없는 향원(鄕原)509)의 무리들이 항상 천하에서 뜻을 얻어 남의 나라를 그르치는 것이니, 저 한(漢)나라 장우(張禹)같은 자가 그것입니다. 반고(班固)는 장우의 사람됨이 근후(謹厚)하다고 칭하고 천자도 그를 경대하여 큰 정사가 있을 적마다 반드시 함께 의논을 결정하여 그 장점만을 취하였으니, 어질지 않다고 이를 수도 없지만, 그가 정승이 되어서 성제(成帝)의 실덕(失德)에 도움이 없어 한나라는 드디어 쇠하였으니, 후세에 정승을 두는 자는 거울삼지 않아서 되겠습니까?
영의정 노사신(盧思愼)이 본래 경술(經術)로써 겉치레를 하고 아속(雅俗)을 잘 진정시킨다고 자부했기 때문에 큰 자리를 얻어서 조정의 으뜸이 되어 당세의 물망을 걸머진 지 오래였습니다. 그러다가 근래에 와서는 그 정책이 매우 어긋나서 도리를 위배한 것이 많으며, 더욱 심한 것은 전대사헌(大司憲) 이의(李誼)등이 직간(直諫)으로 전하의 분부를 거스렸다하여 그 죄를 다스리려고 대신에게 하유(下諭)하셨는데, 사신의 몸이 수상(首相)이 되어 간하여 말리지 못하고 도리어 지당하십니다하였으니, 사신의 생각이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알 수 없습니다. 무릇 임금이 대간이란 벼슬을 두어 이목(耳目)의 귀중한 책임을 맡긴 것은 국가의 병되고 이익됨과 민생의 안락하고 걱정됨을 보고듣는 대로 다 말하게한 것이니, 임금이 혹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일이 있으면 이미 사직의 복이 아닌데, 더구나 목을 매어 옥에 가두는 것은 어찌 성덕을 가진 분의 처사이리까? 이런 경우에는 정승이 된 자가 마땅히 분주하여 바로잡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인데, 도리어 종용하고 아첨하여 그 그름을 수행하게 하는 것은 오척동자(五尺童子)도 불가함을 알 것인데, 사신의 지혜로써 이에 미치지 못한단 말입니까?
성제(成帝) 때에 이민(吏民)의 말들이 ‘재앙과 괴이가 자주나는 것은 왕씨(王氏)510)가 정사를 전권한 때문이라.’고 하니, 성제의 뜻도 자못 그렇게 여겨 장우(張禹)에게 물으매, 장우는 제 나이 늙고 자손이 약하여, 왕씨에게 피해를 당할까두려워서 곧 경술(經術)로써 의탁하면서 대답하기를 ‘신학(新學)의 소생들이 도(道)를 어지럽히고 사람을 그르치니, 의당 신용할 수 없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이의(李誼)등이 전하의 뜻을 거슬린 것은 외척을 논한 때문이라, 바로 외척의 원수입니다. 옥에 가둔 것은 외척이 다행으로 여기는 바이고, 그를 구원하려는 자는 외척이 원망하는 대상이 될 것이니, 사신은 마치 장우(張禹)가 왕씨를 두려워한 것과 같아서 감히 구원을 못한 것이 아닙니까?
아니면 이의 등이 일찍이 자기를 탄핵했다하여 음으로 배척하고자 하여 그가 갇힌 것을 다행히 여겨서 구원하지 않은 것입니까? 과연 외척이 두려워서 감히 구원하지못했다면, 이는 차라리 임금을 저버릴망정 감히 외척을 저버리지 못하겠다는 것이요, 과연 옥에 갇힌 것을 다행으로 여겨 구원하지 않았다면, 이는 사람이 자기를 비난하는 것이 두려워서 중상(中傷)하려고 한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우유(優遊)하고 나약하여 능히 시비를 가리지않고 구차스럽게 영합만 하여 부귀를 보전하려는 것이니, 이 세 가지중에 하나일 것은 틀림없습니다.
사신이 여러 조(朝)를 내리 섬겨, 나이 이미 70세가 되었고, 부귀도 이미 극에 달했으며, 자손도 이미 현직(顯職)의 열에 있는데, 다시 무슨 미련이 있어서 능히 여러 관료들 가운데 우뚝 솟지못하여 백성의 소망을 끊어버리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른단 말입니까? 이른바 나라와 더불어 휴척을 같이 한다는 자가 진실로 이와 같습니까? 더구나 전하께서 처음으로 즉위하시어, 천질(天質)은 비록 아름다우시나 학문이 지극하시지 못한데, 언어와 동작이 어찌 다 잘하실 수 있으리까? 이야말로 제초(祭楚)의 어울림이라 가장 두려운 고비511)이오니, 진실로 과실에 따라 문득 간하여 덕성(德性)을 완성하시게 하는 것이 바로 그의 책임인데, 하는 짓이 이와 같으니, 이는 전하를 가르치기를 과실을 수행하고 간하는 말을 꺼리며, 이로부터는 오직 내 말을 어기지 말라 하게한 것이 반드시 사신의 이 말에서 기인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없으니, 두려워하지않아서 되겠으며, 조심하지 않아서 되겠습니까? 사신은 전하의 막중하신 부탁을 받고 전하의 원로(元老)가 되었으니, 전하께서 안락과 걱정을 같이 하려고 생각하시는 바인데, 이제 곧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저 성제가 장우를 스승으로 삼아 은례(恩禮)만 헛되게 베풀고 그 보답을 얻지못한 것과 무엇이 다르리까? 신들이 전하를 성제에게 비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사신(思愼)의 이번 실수가 장우(張禹)와 같은 점이 있기때문에 시종(始終)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재상(宰相)의 직이란 온갖 책임이 모두 집중된 자리이므로, 의연(毅然)하여 뽑히지않는 절조가 있지않으면 자립(自立)하는 자도 적은데, 어찌 임금을 바르게 할 수 있으리까?
그러므로 전하께서 사신을 의뢰하시다가 세가지 실책이 있음을 면하지못하게 되었으니, 첫째, 탕로(湯老)의 죄를 규명하시지않은 것, 둘째, 불경박아내는 잘못을 간하지않은 것, 셋째, 관작을 남발하시고 명기(名器)를 가벼이 쓰신 것등입니다. 전자에 무인(武人) 박원종(朴元宗)이 승지가 되매, 말하는 자가 그것을 과하다하여 열흘 동안을 두고 굳이 다투니, 허종(許琮)이 우상(右相)이 되어 맨 먼저 정의(正義)를 말하여 대간의 말을 따르기를 원하므로 성종은 받아들여 과연 원종(元宗)을 가셨고, 성종께서 도승(度僧)하는 예전 법을 없애려 하시는데, 양전(兩殿)이 불가하게 여기시므로 말하는 자가 그것을 그르게 여겨 상소를 하며 달이 넘도록 항쟁하니, 허종이 삼전(三殿)의 사이를 주선하여 조용히 계도하여, 마침내 양전의 마음을 돌려 성종의 뜻을 성취시켜 드렸습니다. 슬프게도 국운이 불행하여 허종은 이미 먼저 죽고, 성종 께서 승하하시어 전하로 하여금 영원히 소호(所怙)512)를 잃게하고 조정에도 의형(儀刑)513)이 없어서 믿는 바는 오직 사신 한 사람뿐인데, 탕로의 죄를 알고도 탄핵하지않고, 불경 박아냄의 잘못을 듣고도 간하지않아 전하의 첫 정사에 흠을 만들었으니, 만약 허종만 살아 있었더라도 반드시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또 말하자면, 관작이란 임금이 어진 이를 격려하는 자본이요, 사제(賜祭)하는 것은 천자(天子)의 떳떳한 은례(恩禮)이며, 분주하여 집사(執事)한 것은 신자의 직책인데, 무슨 상이 있으리까? 사신은 불가한 줄을 알면서도 힘껏 말을 하지않아 마침내 천의(天意)를 돌이키지 못하였으니, 전자의 두 가지 실수에 비하면 저것이 이것보다 낫다 하겠지만, 저 이항(李沆)이 사신을 대하여 조서(詔書)를 불태운 것을 비하면 역시 그 책임을 사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빨리 사신을 국문하시어 조정을 엄숙하게 하고 모든 관료로 하여금 생각을 바꾸게 하며, 전하께서도 빨리 세 가지 과오를 버리시어 모든 사람의 소망을 시원하게 하소서.”하니,
듣지 않으매, 대간이 다시 아뢰기를,
“신들이 사신을 국문하기를 청하였는데, 전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신을 국문하려하는 것은 바로 나를 국문하자는 것이다’하셨으니, 전하의 이 말씀은 일부러 군상(君上)에게 관련을 시켜서 간언(諫言)을 드리는 길을 막으려 하시는 것입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말이 임금[乘輿]에게 미치면 천자(天子)도 얼굴빛을 고친다.’하였으니, 옛날 성군(聖君)은 비록 군상(君上)의 과실을 지척(指斥)하였을지라도 오히려 즐겁게 들어주는데, 하물며 재상의 과실을 말하는데 이런 말씀을 하신단 말씀입니까? 이는 간하는 것을 막아버리시려는 조짐이오니, 신들은 통분합니다. 탕로의 강상을 무너뜨린 죄는 추궁하지 않을 수 없고, 상전(上殿)께서 불경 박아냄의 잘못은 간하지 않을 수 없으며, 집사(執事)에게 가자(加資)한 것은 지나친 상이 너무도 심하여, 두어 달 사이에 거푸 세자급이 올랐고, 자궁(資窮)되고 준직(準職)된 자는 당상으로 올리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성종조에 없던 일인데, 전하께서 감히 하신단 말씀입니까? 다시 깊이 생각하시어 여망(輿望)에 따라 주소서.”하니,
전교하기를,
“아무리 여러 모로 말하여도 끝내 들어 줄 수 없다”하였다.
사신(思愼)이 수상(首相)으로서 ‘대간의 항론(抗論)은 임금의 위엄을 떨치지 못하게하는 것이요, 대간을 잡아가둔 것은 영걸한 임금의 위단(威斷)이 되는 것입니다.’고 하여, 마침내 간하는 신하를 거의 다 죽이는 지경까지 이르렀으니, 사신이 그르쳐 놓은 것이다.
註509]향원(鄕原): 원(原)은 원(愿)과 같은데, 시골 사람으로 외모가 근원(謹愿)한 자를 지칭한 것임. 《논어(論語)》양화편(陽貨篇)에, “향원은 덕의 적이다.[鄕原德之賊也]”하였는데, 대개 향원이란 한 고을이 모두 선인(善人)이라 칭하지만, 그 충신(忠信)과 염결(廉潔)이 모두 가탁이기 때문에 공자(孔子)는 이를 가리켜 덕의 적이라 한 것임 註510]왕씨(王氏): 왕망(王莾)을 일컬음. 註511]제초(祭楚)의 어울림이라 가장 두려운 고비: 선악(善惡)의 분기(分岐)라는 뜻임. 《맹자(孟子)》등문공편(滕文公篇)에, “맹자가 대불승(戴不勝)더러 이르기를, 그대는 그대의 왕을 선(善)하게 만들고 싶은가, 그렇다면 나는 분연히 그대에게 일러주노니, 가령 초(楚)나라 대부(大夫)가 여기에 있어, 그 아들에게 제(齊)나라 말을 가르치고자 하여 제나라 사람에게 배우게 하지만, 제나라 사람 하나가 가르치고 뭇 초나라 사람이 떠들면 날마다 매질하며 제나라 말을 하라해도 못할 것이다”하였음 註512]소호(所怙): 아버지의 아칭임. 《시경(詩經)》육아편(蓼莪篇)에, “아비가 없으면 무엇을 믿으랴[無父何怙]”에서 기인되었음. 註513]의형(儀刑): 법식과 같은 말임.《시경(詩經)》대아(大雅) 문왕편(文王篇)에, “문왕을 의형하면 만왕이 믿음을 가지리라[儀刑文王 萬邦作孚]” 하였음.
○大司憲崔應賢、大司諫李堪、執義李粹彦、司諫潘右亨、掌令閔頤ㆍ姜景叙、持平權瑠ㆍ南世周、獻納崔世傑、正言洪景昌ㆍ任由謙上疏曰:人君南面而聽萬機, 其所托重, 而恃力者相也。 得其人則一國賴之, 不得其人則朝廷解體。 是故, 周公爲宰, 而其興也, 勃焉; 皇父爲宰, 而其亡, 忽焉。 此常理也。 雖然, 周公大聖人也, 世不可常得, 而皇父不仁之尤者, 中主羞以爲臣。 故惟非之無(據)〔擧〕, 剌之無剌, 鄕原之徒恒得志於天下, 以誤人國, 若漢之張禹, 是也。 班固稱禹爲人謹厚, 天子敬之, 每有大政, 必與定議, 取其所長。 不可謂不賢, 而其爲相也, 無補於成帝之失德, 而漢室遂衰, 後之置相者可不鑑諸? 領議政盧思愼素以經術自文, 雅俗自許, 馴致大位, 冠于巖廊, 負當世之望者, 久矣。 邇來, 謨畫甚悖, 違道者多而尤甚者。 前大司憲李誼等以切直, 忤殿下之旨, 欲治其罪, 下諭大臣, 思愼身爲首相, 不爲諫止, 而反曰: “可也” 不知思愼之慮, 曷爲至此哉。 夫人主置臺諫之官, 委耳目之責, 使國家之利病、生民之休戚, 惟其所聞, 皆得言之, 而人主, 或不聽納, 則已非社稷之福, 而係頸下吏, 豈盛德事乎? 爲輔相者當奔走匡救之不暇, 而反從臾, 以遂其非, 五尺童子猶知不可, 而思愼之智, 乃不及此耶? 成帝時吏民言: “災異以爲王氏專政所致。” 帝意頗然以問禹, 禹自見年老、子孫弱, 恐爲王氏所害, 乃托以經術對曰: “新學小生, 亂道誤人, 宜無信用。” 誼等所以忤旨者, 以論外戚而外戚之仇也, 則其下獄, 乃外戚之所幸, 而救之者外戚之所怨也。 無乃畏之如張禹之於王氏, 而不敢救耶? 抑以誼等, 嘗劾己陰欲排擠, 以見囚爲幸, 而不之救耶? 果畏於外戚, 而不敢救, 則是寧負其主, 而不敢負外戚者也; 果幸於見囚, 而不爲救, 則是畏人議己, 而欲中傷之者也, 不然則優游懦弱, 不能爲異同, 苟爲逢迎, 而欲保富貴者也。 三者必居一於此矣。 思愼歷事累朝, 年已七十、富貴已極、子孫已列通顯, 復有何所顧慮, 而不能屹然百僚之表, 以絶民望之至此哉? 所謂與國同休戚者, 固如是乎? 況殿下初卽大寶, 天質雖美, 學問未至, 言語動止, 夫豈盡善? 此, 齊、楚之交, 可畏之幾, 固宜隨過輒諫, 俾成德性, 乃其責也, 而所爲若此, 是敎殿下遂過愎諫, 自是惟予言, 而莫之違者, 未必非思愼此言, 爲之階也, 可不懼哉, 可不愼哉? 思愼受殿下負托之重, 爲殿下元老。 殿下所以擬休戚與同, 而今乃至此, 何異於成帝以禹爲師, 恩禮空施, 而不獲其報者耶? 臣等非以殿下比於成帝也, 直以思愼此失, 有疑於禹, 故終始言之。 且宰相之職, 百責所萃, 不有毅然不拔之節, 則自立者鮮矣, 其能有以正君乎? 是以, 殿下倚思愼, 而不免有三失焉, 不究湯老之獄, 一也; 不諫印經之非, 二也; 濫賞官爵, 輕用名器, 三也。 向者, 武人朴元宗爲承旨, 言者以爲過也, 連旬固爭。 許琮爲右相, 首唱正議, 願從臺諫之言, 成宗納焉, 果遞元宗。 成宗欲罷度僧舊法, 而兩殿以爲不可, 言者非之, 抗章逾月。 琮周旋於三殿之間, 從容啓迪, 卒回兩殿之意, 以就成宗之志。 噫, 國運不天, 琮旣先逝, 成宗上賓, 使殿下永失所怙, 朝廷無儀刑, 而所恃者, 唯一思愼, 而湯老之罪, 知而不覈; 印經之非, 聞而不諫, 爲殿下初政之疵, 就使琮在, 必不至此矣。 且夫官爵, 人主礪賢之資, 賜祭, 天子恩禮之常, 而奔走執事, 臣子之責, 何賞之有焉? 思愼知其不可, 而言之不盡其力, 竟不能回天, 比前二失, 惟曰彼善於此, 而其視李沆對使焚詔, 則亦不得辭其責矣。 伏願亟鞫思愼, 使朝廷肅震, 百僚易慮, 而殿下亦宜亟去三失, 以快輿望。
不聽。 臺諫更啓: “臣等請鞫思愼, 而殿下敎之曰: ‘欲鞫思愼, 是乃鞫我也。’ 殿下此語, 欲以逼上之語, 杜進言之路也。 古人云: ‘言及乘輿, 則天子改容。’ 古之聖君, 雖指斥君上之過, 尙爲之樂聞, 況言宰相之過, 而爲此言耶? 此拒諫之漸, 臣等痛憤。 湯老敗常之罪, 不可不究; 上殿印經之非, 不可不諫。 執事加資, 濫賞莫甚, 數月之間, 疊陞三級, 而資窮准職者, 至陞堂上, 此成宗所無之事, 而殿下敢爲之哉? 更留三思, 以從輿望。” 傳曰: “雖言之多方, 終不可聽。” 思愼以首相謂: “臺諫抗論, 爲主威不振; 囚係臺諫, 爲英主威斷。”馴致殺戮諫臣殆盡, 思愼誤之也。
연산 7권, 1년(1495 을묘/명홍치(弘治) 8년) 7월 10일 신묘 1번째기사
강경서등이 유용평의 부당한 5품 제수와 이를 승인한 노사신을 추국하기를 아뢰다
장령(掌令) 강경서(姜景敍), 정언(正言) 임유겸(任由謙)이 아뢰기를,
“육조(六曹)의 좌랑이 개만(箇滿)되어야 5품으로 올리는데, 이제 유용평(劉用平)이 본시 경력이 없는 것을 갑자기 5품으로 올려 제수하는 것은 매우 온당하지 않으니, 모름지기 개정하소서. 영상의 서계한 사연이 만약 신들의 일을 말한 것이라면, 직에 눌려 있기 미안하오니, 보여 주소서.”하니,
전교하기를,
“영상이 서계한 것은 보여 줄 수 없고, 유용평에 대해서는 내가 그 사람의 쓸 만한지의 여부를 몰라서 원상(院相)에게 문의하였더니, 쓸 만하다 하기 때문에 쓴 것이다.”하매,
대간이 합사(合司)하여, 유용평, 윤탕로 및 사제 집사(執事)를 가자(加資)한 것과 불경 박아낸 것등을 논계하니, 전교하기를,
“윤탕로는 이미 파직되었으니 국문해서 무엇하며, 불경박아내는 일에 대하여는 만약 백성을 괴롭히거나 재물을 손상하지 않는다면, 비록 금은(金銀)으로 부처를 만들고 크게 사찰을 일으킨들 무슨 해가 있으며, 유용평은 동반(東班)에 등용할 만한 사람이니, 다시 무슨 말이 있겠느냐? 나는 정승의 말로써 경들에게 유시하였는데, 경들이 믿어주지 않으니, 비록 공사라 할지라도 무엇 때문에 나에게 품하느냐? 사제(賜祭) 때의 집사(執事)에게 가자한 것은 경들의 말을 따라 다시 작정(酌定)하겠다.”하매,
대간이 또 상소하기를,
“옛날 급암(汲黯)이 무제(武帝)를 섬기면서 자주 직간(直諫)을 함으로써 꺼림을 받았는데, 급암의 말이 ‘천자가 공경(公卿), 보필(輔弼)의 신하를 둔 것은 어찌 아유구용(阿諛求容)하여 뜻만 받아서 임금을 의(義)롭지못한데 빠뜨리게 한 것이랴? 또한 그 지위에 있으니, 비록 그 몸을 아낀다지만, 조정을 욕되게 함에야 어찌 하랴’하였으니, 급암은 이 마음이 항상 중(中)에서 주재하기 때문에, 능히 일을 만나면 문득 간하여 조금도 쇠약한 기미가 없었으니, 이는 바로 맹자(孟子)가 이른바, 임금을 좋아하는 자이온데, 무제가 쓰지못했으니, 어찌 의혹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급암이 한(漢)나라에 있어 비록 크게 쓰이지는 못했지만, 이미 조정의 소중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반란을 일으키려고 하면서 급암의 강직함을 꺼리며 말하기를 ‘유독 급암이 두려울 뿐이요, 승상(丞相) 공손홍(公孫弘) 따위는 마치 터진 깎지를 벗기고 시든 잎사귀를 흔들어 떨어뜨리는 것과 같이 쉽다’하였으니, 그 사람의 있고 없음에 따른 경중이 대개 이와 같사온데, 애석하게도 사신(思愼)은 그와 같지 못합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처음이오라 사방에서 생각하고 바라는 때이온데, 능히 도(道)로써 보필하며 선(善)으로써 인도하지 못하고서, 곧 비위를 맞추어 영합만 하여 구차히 넘기는 것을 취하고 있으니, 원로(元老)의 책임이 진실로 이러하옵니까? 대개 사람이 요순(堯舜)이 아닌 바에야 어찌 허물이 없으리까? 허물이 있어도 잘 메워나가면 그야말로 허물이 없는 것입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곤직(袞職)514)이 이지러짐이 있으면 중산보(仲山甫)가 메워 나간다[袞職有闕 惟仲山甫補之]’하였으니, 이는 허물을 잘 메워나감을 말한 것인데, 무릇 간관(諫官)을 잡아가두신 것은 전하의 허물입니다. 전하께서 성스러운 본성이 아무리 아름다우실지라도 학문이 지극하시지 못하오니, 그 허물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온데, 잘 메워드릴 사람이 없기 때문에 마침내 첫 정사에 누가 된 것이오니, 어찌 마음 아픈 일이 아니겠습니까? 대저 임금이 간하는 말을 듣고도 쓰지않으면 벌써 그것부터 좋은 덕이 아니온데, 또 뜻을 거슬린 것으로써 노기를 가하여 간하는 자를 잡아내어 감옥속에 가두고서 곤욕을 보이기를 마치 큰 죄인 다루듯이 하니, 조정의 큰 변고요, 사방에서 놀랄 일이라, 무릇 혈기있는 사람치고 분개하지않는 자 없사옵니다.
그러므로 고려(高麗) 말엽에 정언(正言) 이존오(李存吾)가 옥에 갇히매, 이색(李穡)은 오히려 불가하다고 말하였습니다. 지금으로 보면 공민왕(恭愍王)의 혼란(昏亂)한 것이 전하의 성명(聖明)한 것과 판이하옵고, 이색의 어짐도 사신(思愼)에게 미치지 못하는데, 이색은 혼란한 조정을 구원하였으되, 사신은 성명한 임금앞에서 말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사신이 요순(堯舜)같은 임금이 되기를 전하에게 바라지않은 것이요, 자기 처신도 또한 이색에게 훨씬 떨어진 것이오니, 너무 박하지않습니까?
임금이 허물이 있어도 앉아서 보기만 하고 바로잡지 않아 이미 대신의 체통을 잃었는데, 또 그 잘못된 것을 찬성까지 하니, 이는 옛날의 간웅(奸雄)이 임금을 팔아서 스스로를 살찌우는 술책이온데, 사신이 감히 그런 짓을 하니, 그 심정이 반드시 곡절이 있는 것이오라, 신들이 이 때문에 매우 미워하여 묻고자하는 것이온데, 전하께서 도리어 말씀하시기를 ‘내 말을 받아서 대답한 것이 무슨 허물이냐? 만약 사신을 국문한다면 이는 나를 국문하려는 것이다’하시니, 아! 이것은 나라를 상실할 말인데, 전하께서 어찌 경솔히 입밖에 내시나이까? 공자(孔子)의 말에 ‘나는 임금노릇하는 것이 즐거운 것이 아니라, 오직 내 말을 어김없는 그것이라 한다면, 거의 이 한 말로 나라를 상실하는 것이 아니냐?’하였사오니, 사신이 전하의 실언(失言)을 듣고도 그 그름을 바로잡지 않으니, 이른바 오직 그 말을 어김이 없다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구차스럽게 어김없이 순종하는 것을 즐거워하여, 그 죄를 용서하시려고 곧 위에 저촉되는 말이라하여 말하는 사람의 입을 다물게 하시니, 사직(社稷)의 복이 아닙니다. 이것이 버릇되어 고치지 않으면, 그 안색과 성음이 이미 사람을 천리밖에서부터 거절하게 되어 참소하고 아첨하는 사람만이 이를까 염려되오니, 이런 뒤에야 전하께서 비로소 그 그름을 깨달으시고서 사신을 허물하신들 무슨 소용이 있으리까? 사신이 젊어서부터 당시의 물망을 얻어서 항상 관대한 양 자처하고 일을 처리하는데는 착실히 힘을 쓰지않았으니, 전하께 주대(奏對)한 말이 만약 우연의 발로라 이를 것같으면, 자기를 논박한다는 말을 듣고는 문을 닫고 나오지아니하며 허물을 인정하고 사피하여 장차 용신할 곳이 없는 것같이 하여 공의(公議)에 사죄한다면 거의 가하겠다고도 여기겠사오나, 얼굴을 버젓이 들고 일을 보며 조금도 기탄이 없으므로, 이는 처음 주대(奏對)한 일이 우연에서 나온 것이 아니요, 반드시 그 곡절이 있는 것임을 알았사오니, 이를 그대로 두고 다스리지 아니한다면, 나라에 사람이 있다 하리까? 사신이 이미 아유 구용하여 비위만 맞추어서 임금을 의롭지못한데에 빠지게하여, 옛날 직신(直臣)에게 죄를 얻었사온데, 신들이 또 직위에 있어 남의 일 보듯이 하고 그 죄를 바로잡지 아니하면 후세에서 반드시 신들이 몸을 아끼고 녹(祿)만 생각하여 조정을 욕되게 하였다할 것이므로, 그 죄가 도리어 사신보다 오히려 큰 점이 있을 것이니, 두렵지 않겠습니까?
또 조정의 경중은 대신에게 달렸사오니, 대신의 명망이 중하면 조정이 높아지고, 대신의 명망이 경하면 조정이 높아지지 않습니다. 사신이 일찍이 학손(鶴孫)의 옥사(獄事)를 다루다가 대간의 논평에 시달려서 이 말을 써서 상소하고 사면을 빌며 자신이 적당하지 못함을 밝혔으니, 자신을 알지 못한다고도 못하겠는데, 알고도 고치지 아니하며, 늙어서는 더욱 심하오니, 끝내 조정의 소중한 인물이 되지못할 것은 뻔합니다. 오늘날에 있어서는 족히 나랏일을 근심할 무엇이 없지만, 불행히도 간사한 사람이 불측한 모의를 한다면, 반드시 사신을 저 터진 깎지를 벗기고 시든 잎을 떨구기와 같다는 것같이 여기고 조금도 꺼림이 없을 것이니, 장차 그 정승을 어디에 쓰리까? 빨리 추국할 것을 허락하시어 불충한 자를 경계하소서.
《예경(禮經)》에 이르기를 ‘안 말은 안방 문턱을 벗어나지 않게 하고, 바깥 말은 안방 문턱에 들어오지않게 한다’하였으니, 부부(夫婦)가 거처하는데도 오히려 이와 같이 엄하온데, 더구나 초방(椒房) 적유(翟帷)의 깊은 내전은 바깥 말을 들여보낼 곳이 아니온데, 불경 박아냄의 그릇된 점에 대하여 전하께서 곧 신들로 하여금 상전(上殿)께 간하라는 말씀입니까? 전하의 효성으로서 능히 상전께 순히 간하시지 못하고, 반드시 대간으로 하여금 내정(內庭)에서 다투란 말씀입니까? 부모가 과실이 있을 때 능히 스스로 간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시켜 인도하게하면 이는 더욱 성글어지게 하는 것이니, 《예경(禮經)》의 이른바 ‘공경과 효도를 다하여 부모가 즐거워하면 다시 간한다.’는 훈계는 법받을 것이 못됩니까? 과연 불경박아내는 일이 상전(上殿)의 명령에서 나왔으니 자의로 파할 수 없다하신다면 탕로(湯老)의 죄도 상전께서 억제하시는 바여서 처단하시지 못하겠다는 말씀입니까? 과연 탕로가 대비의 지친이니 은혜를 끊을 수 없다하신다면, 전하께서 신민(臣民)의 임금이 되셨는데도 능히 자의로 못하시어 곧 이런 말씀이 계신 것입니까? 이는 모두 핑계하시는 말씀으로 간언(諫言)을 싫어할 조짐이오니, 이 실책을 고치지 아니하시면 나랏일이 날로 글러져서 장차 어찌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입니다. 원컨대 다시 깊이 생각하시어 빨리 여론에 따르소서.”하고,
이어 아뢰기를,
“신들의 생각으로는 전하께서 대간을 이목(耳目)의 관(官)이라 하여 모든 행위를 다 신임하여 맡겨야할 것이라 여겼는데, 지금 사신의 서계한 사연을 보여 주기를 여러번 청했으나, 끝내 보여주지 않으시니, 신들은 전하께서 신들을 대우하시는 뜻이 무엇이온지 알 수 없사옵니다. 유용평(劉用平)을 동반(東班)515)에 서용하는 것을 불가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본시 경력이 없는 것을 동반의 5품직에 뛰어넘어 제수하니, 그렇다면 비록 동반의 실직을 지내지 않았더라도 이미 서반(西班)의 상호군(上護軍)을 지낸 자는 정(正)이나 부정(副正)이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렇다면 개만(箇滿)하면 승서(陞敍)하는 법이 폐기되는 것이오니, 개정하지 않아서는 안됩니다.”하니,
전교하기를,
“사신(思愼)의 일과 불경박아내는 일에 대하여는 듣지 못하겠다. 경들이 탕로를 국문하고자 하지만, 국문하려면 반드시 형장(刑杖)을 쓰게될 것이니, 모후(母后)의 아우을 형문(刑問)해서 되겠느냐. 유용평에 관해서는 경들의 장계에 따라 낮추어 제수하겠다.”하매,
대간이 또 아뢰기를,
“전하께서 하교하신 사신(思愼)의 서계한 사연이 신들이 들은 것과는 달라서 한갓 피혐할 뿐 아니라, 또 별도로 다른 뜻이 있는 모양이지만 전해들은 것이어서 상달할 수 없으므로 보여 주시기를 청한 것입니다. 조정의 일은 대간이 알아야 할 것이온데, 이제 보여주지 않으시니, 전하께서는 무슨 생각이신지 알 수 없사오며, 탕로(湯老)의 일에 대하여는 만약 모후(母后)의 아우라 하여 국문을 아니한다면, 심미(沈湄)는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친정 삼촌 조카로서 심씨의 제사를 맡은 처지로되 지난번 국상(國喪)중에 소를 도살한 죄로써 이미 패상안(敗常案)에 기록되었고, 또 직첩(職牒)까지 환수하였사오니, 탕로의 죄는 심미보다 더하옵고 친(親)으로 따져도 다름이 없사온데, 파직만 시키는 것은 국법을 사용함이 고르지못하오니, 왕후(王后)가 살아계시고 안계신 것으로써 그 죄가 경중이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불경박아내는 일에 있어서는 상교에 ‘만약 백성을 괴롭히고 재물을 상하지않는다면 그렇게 한들 무엇이 해로우냐?’하시지만, 본궁(本宮)의 백성도 국가의 백성이요, 그 재물도 국가의 재물이오니, 어찌 백성을 괴롭히고 재물을 상하는 것이 되지않는다하겠습니까? 마땅히 그 세미한 것부터 삼가하여 간해서 말리셔야할 것입니다.”하니,
듣지않으매, 대간이 또 장계하기를,
“대신(大臣)의 직책은 앉아서 도(道)를 논하며, 임금이 아름다운 덕이 있으면 받들어 순종하고, 임금이 그릇된 처사가 있으면 바로 잡아야 하는 것이온데, 지난번에 대간이 간언(諫言)을 하는데 잡아 가두었으니, 이는 전하의 그릇되신 행동이오라, 대신이 그것을 들었다면 장차 분주하여 바로 잡기에 겨를이 없어야할 터인데, 사신(思愼)은 곧 말하기를 ‘상교가 지당하옵니다.’하였으니, 그 대신의 직을 하찮게 여기는 뜻이 너무도 심하므로 신들이 국문하려는 것이옵니다. 예로부터 대신이 용사(用事)하려고 하면 먼저 대간의 입을 막아 말을 못하게한 뒤에야 그 소행을 마음대로 하였던 것입니다. 신등이 그의 서계한 사연을 듣자오니, 위단(威斷)이다거나 기뻐서 치하한다거나 하였다하오니, 이것이 만약 참말이라면 국가에 관계됨이 너무도 큽니다. 어찌 한심하지 않으리까? 이는 실로 대간의 입을 막아서 용사(用事)하려 할 조짐입니다.
또 재상의 과오를 대간이 말하지 않으면 전하께서 어떻게 알 수 있으리까? 이것이 신들이 보여 주시기를 청해 마지않는 것입니다.”하니, 듣지 않았다.
註514]곤직(袞職): 왕직(王職)을 말한 것임. 《시경(詩經)》대아(大雅) 증민편(蒸民篇)에, “곤직이 궐(闕)함이 있으면 중산보가 메워나간다.[袞職有闕 惟仲山甫補之].”하였고, 그 주에, 왕직이라 아니하고 곤직이라 한 것은 감히 지척(指斥)하여 말할 수 없기 때문이라 하였음. 註515]동반(東班): 문신
○辛卯/掌令姜景叙、正言任由謙啓: “六曹佐郞箇滿, 則陞爲五品。 今劉用平本無來歷, 而驟除五品, 甚未便, 請須改正。 領相書啓之辭, 若言臣等之事, 在職未安, 請見之。” 傳曰: “領相書啓之事不可示。 劉用平予未知其人之可用與否, 問於院相而曰: ‘可用。’ 故用之耳。” 臺諫合司論啓劉用平、尹湯老及賜祭執事加資、印經事, 傳曰: “湯老旣已罷之, 鞫之何爲? 印經事若不勞民傷財, 則雖至金銀鑄佛, 大興寺刹何害? 劉用平東班可用之人, 更有何言? 予以政丞之言, 諭諸卿等, 卿等不信, 雖公事何稟於予乎? 賜祭執事加資, 從卿等之言, 更酌定耳。” 臺諫又上疏曰:昔者, 汲黯之事武帝, 以數直諫見憚, 黯曰: “天子置公卿輔弼之臣, 寧令從諛承意, 陷主於不義乎? 且已在位縱愛其身, 奈辱朝廷, 何?” 黯之此心, 常主於中, 故能遇事輒諫, 跲而不衰, 此孟子所謂好君者也, 而武帝不能用之, 豈不惑哉? 然黯在漢, 雖不爲大用, 而已爲朝廷之重。 如淮南王安欲叛而憚其直曰: “獨黯可畏, 而丞相弘如發蒙振落耳。” 其人之能爲有無蓋如此, 惜乎思愼之不如也。 當殿下嗣政之初, 遠近想望之日, 不能輔之爾, 導之以善, 乃循志迎合, 以取苟容, 元老之責, 固如是乎? 蓋人非堯、舜, 孰能無過? 有過善補, 是爲無過。 詩曰: “袞職有闕, 〔惟〕仲山甫補之。” 善補過也。 夫係治言官, 殿下之過也。 殿下聖性雖美, 學問未至, 其過也固宜, 而善補之無其人, 故遂爲初政之累, 豈不痛心哉? 大抵人君聞諫而不用, 已非令德。 又以忤旨加怒, 言者拘囚困苦於圜土之中, 使若大罪然, 朝廷之大變, 四方之所駭, 凡有血氣, 莫不憤惋。 是故, 高麗之季, 正言李存吾下獄, 李穡猶言其不可。 以今觀之, 恭愍之昏亂, 異於殿下之聖明; 穡之賢, 不及於思愼, 穡乃救之於昏亂之朝, 而思愼不能言之於聖明之主, 是思愼不以堯、舜望殿下, 而自處則又下於穡也遠矣, 不已薄乎? 君有過, 坐視不匡, 已失大臣之體, 而又贊其謬, 此則古之奸雄所以賣君自利之術, 而思愼敢爲之, 其情必有所在。 此臣等所以痛疾, 而欲問者也, 而殿下反曰: “承我言以對, 何過焉? 若鞫思愼, 是欲鞫我也。” 噫, 此喪邦之言, 殿下何發之輕也? 孔子曰: “予無樂乎爲君, 惟其言而莫之違也。 不幾於一言, 而喪邦乎?” 思愼承殿下失言, 而不矯其非, 所謂惟其言而莫之違也。 殿下悅於苟順而無違, 欲丐其罪, 而乃爲屬上之辭, 鉗制欲言之口, 非社稷之福也。 習此不改, 則深恐其顔色、聲音, 已拒人於千里之外, 而讒諂面諛之人至矣。 至此然後, 殿下始悟其非, 而以咎思愼, 其可及乎? 思愼少負時望, 常以寬大自居, 處事不用着力, 其對殿下之言, 疑若出於偶然云爾, 則自聞駁已, 固宜杜門不出, 引咎遜避, 若將無所容焉, 以謝公議, 其亦庶乎其可也, 而靦面視事, 略無忌憚, 是知初對之事, 非出於偶然, 而必有其情, 此厥不治, 其謂國有人乎? 思愼旣從諛承意, 陷主於不義, 得罪於古之直臣, 而臣又在位越視, 不正其罪, 後世必謂臣等, 愛身、懷祿, 以辱朝廷。 其罪反有大於思愼者矣, 可不懼哉? 且朝廷輕重, 係在大臣, 大臣望重, 則朝廷尊; 大臣望輕, 則朝廷不尊。 思愼嘗逮鶴孫獄, 困於臺評, 用此言上書乞免, 明己之不稱, 不可謂不自知之, 而知而不改, 老而益深, 終不爲朝廷之所重也決矣。 在今保無足虞, 不幸奸人有不測之謀, 則必擬發蒙振落, 而無所忌矣, 將焉用彼相? 亟許推鞫, 以警不忠。 《禮》曰: “內言不出於梱; 外言不入於梱。” 夫婦居室, 尙且如此其嚴, 況椒房翟帷之邃, 非外言可入, 而印經之非, 殿下乃使臣等, 自諫於上殿耶? 殿下誠孝不能有以順乎上殿, 而必使臺諫爭之於內庭耶? 父母有過, 不能自諫, 而使他人導之, 則是愈疎, 而《禮經》所謂起敬起孝, 悅則復諫之訓, 不足法耶? 果曰印經事出上殿, 不可擅罷云爾, 則湯老之罪, 亦爲上殿之所制, 而不可斷耶? 果曰湯老大妃至親, 不可斷恩則是殿下爲臣民之主, 不能自專, 而乃有是言耶? 此皆天辯之縱, 愎諫之漸, 不改此失, 國事日非, 將至於不可爲矣, 願留三思, 亟從輿望。
仍啓: “臣等常謂, 殿下以臺諫爲耳目之官, 凡有所爲, 皆當信任, 而委之矣。 今者思愼書啓之辭, 累請見之, 而竟不出示, 臣等不知殿下待臣等之意, 爲何如也。 劉用平非印班敍用爲不可也, 本無來歷, 而徑除東班五品職。 然則雖未經東班實職, 已經西班上護軍者, 或爲正, 或爲副正乎? 然則箇滿陞敍之法, 廢矣, 不可不改正。” 傳曰: “思愼及印經事不聽。 卿等欲鞫湯老, 然鞫之則必用刑杖, 母后之弟, 可以刑問乎? 劉用平則因卿等之啓, 而降受。” 臺諫又啓: “上敎思愼書啓之辭, 異於臣等所聞。 非徒避嫌, 又別有他意, 而但以傳聞之事, 不可上達, 故請見耳。 朝廷之事, 臺諫所當知, 而今不示之, 未知上意何如, 湯老事若以爲母后之弟, 而不鞠, 則沈湄, (照憲王后)〔昭憲王后〕之三寸姪, 而主沈氏之祀, 頃以國喪內宰牛之罪, 旣錄敗常案, 又收職牒。 湯老之罪浮於湄, 而切親則無異, 只罷其職, 其用法不均, 不可以存沒, 而輕重其罪也。 印經事上敎云: ‘若不勞民傷財, 則爲之何害?’ 本宮之民, 亦國家之民, 其財亦國家之財, 則其可不爲勞民傷財乎? 當謹其微, 而諫止之耳。” 不聽。 臺諫又啓: “大臣之職, 坐而論道, 君有美德, 則將順之; 君有過擧, 則匡救之。 頃者臺諫言事, 而囚係之, 此殿下之過擧也。 大臣聞之, 則將奔走匡救之不暇, 思愼乃曰: ‘上敎允當。’ 其無大臣之意甚矣, 故臣等欲鞫之耳。 自古大臣欲用事, 則先塞臺諫之口, 使之不言, 然後恣其所爲。 臣等聞其書啓之辭, 曰威斷, 曰喜賀。 此若實言, 則其有關於國家大矣, 豈不寒心哉? 此實杜塞臺諫口, 欲用事之漸也。 且宰相之過, 臺諫不言, 則殿下何以知乎? 此臣等所以請見不已也。” 不聽。
연산 7권, 1년(1495 을묘/명홍치(弘治) 8년) 7월 13일(갑오) 2번째기사
대사간 이감등이 노사신, 윤탕로의 죄와 불경박아내는 일에 대해 아뢰다
대사간(大司諫) 이감(李堪), 사간(司諫) 반우형(潘佑亨), 집의(執義) 이수언(李粹彦), 장령(掌令) 민이(閔頤)와 강경서(姜景敍), 헌납(獻納) 최세걸(崔世傑),정언(正言) 홍경창(洪慶昌)과 임유겸(任由謙)등이 아뢰기를,
“전일에 대간이 대궐안에서 목을 매어 하옥(下獄)된 뒤로 일국의 신민이 놀라지않은 자가 없는데, 노사신(盧思愼)이 유독 ‘기뻐서 하례합니다’하였으니,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오니, 죄를 물으소서. 윤탕로의 일은 상교에 ‘모후(母后)의 지친이니 국문할 수 없다’하시나, 창원군(昌原君)은 왕자(王子)였으되 집안의 종을 마음대로 죽이매 성종(成宗)께서 특별히 죄를 내려 용서하지 아니하셨으니, 성종께서 어찌 그를 친애하시는 마음이 없으셨겠습니까만, 국가의 공법(公法)을 사사때문에 흔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탕로(湯老)의 죄가 강상을 범했는데, 만약 용서해주신다면 외척이 거리끼는 바가 없어서 강상이 다 무너지고 말 것이오니, 전하께서 장차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시렵니까? 불경박아내는 잘못도 간하여 말리시지 않아서는 안되겠습니다.”하니, 듣지 않았다.
○大司諫李堪、司諫潘佑亨、執義李粹彦、掌令閔頤ㆍ姜景叙、持平權瑠、獻納崔世傑、正言洪慶昌ㆍ任由謙啓: “前日臺諫自闕內鎖項下獄, 一國臣民莫不驚駭。 思愼獨曰: ‘喜賀。’ 必有情由, 請問之。 湯老事, 上敎以爲母后切親, 不可鞫。 昌原君, 親王子也, 擅殺家婢, 成宗特罪之不恕, 成宗豈不有親愛之心乎? 以國家公法, 不可以 私撓之也。 湯老罪犯綱常, 而饒之則外戚無所忌憚, 而綱常盡毁矣。 殿下將何以爲國乎? 印經之非, 不可不諫止。” 不聽。
연산 8권, 1년(1495 을묘/명홍치(弘治) 8년) 8월 8일(무오) 3번째기사
대사헌 최응현등이 중국사신을 업신여겼다하여 의금부에 추국하라 전교하다
의금부(義禁府)에 전교하기를,
“대사헌 최응현(崔應賢), 대사간 이감(李堪), 사간 반우형(潘佑亨), 집의(執義) 이수언(李粹彦), 장령(掌令) 민이(閔頤)와 강경서(姜景敍), 지평(持平), 권유(權瑠)와 남세주(南世周), 헌납(獻納) 최세걸(崔世傑), 정언(正言) 홍경창(洪慶昌)과 임유겸(任由謙)이 중국사신 김보를 간휼이라고 지목하여 조사(詔使)를 업신여겼으니, 중국 사신이 돌아간 뒤에 추국하고 아뢰라.”하였다.
○傳于(議)〔義〕禁府曰: “大司憲 崔應賢 、大司諫 李堪 、司諫 潘佑亨 、執義 李粹彦 、掌令 閔頤ㆍ 姜景敍 、持平 權瑠 ㆍ 南世周 、獻納 崔世傑 、正言 洪慶昌 ㆍ 任由謙 指天使 金輔 爲奸譎, 輕慢詔使, 天使回程後推鞫以啓。”
연산 16권, 2년(1496 병진/명홍치(弘治) 9년) 7월 5일 경술 3번째기사
홍석보, 강경서, 김수동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홍석보(洪碩輔)를 대사간으로, 강경서(姜景敍)를 사간으로, 김수동(金壽童)을 홍문관직제학으로, 홍한(洪瀚)을 전한(典翰)으로, 허집(許輯)을 사헌부장령으로, 이세전(李世銓)을 홍문관응교로, 최보(崔溥)를 부응교로, 문빈(文彬)을 사간원헌납으로, 남곤(南袞), 이과(李顆)를 홍문관수찬으로 삼았다.
○以洪碩輔爲大司諫, 姜景敍司諫, 金壽童弘文館直提學, 洪瀚典翰, 許輯司憲府掌令, 李世銓弘文館應敎, 崔溥副應敎, 文彬司諫院獻納, 南袞、李顆弘文館修撰。
연산 16권, 2년(1496 병진/명홍치(弘治) 9년) 7월 6일 신해 1번째기사
강경서, 허집이 사당과 신주세우는 일, 노사신, 윤효손, 김순손등의 일에 대하여 논계하다
사간 강경서, 장령 허집이 사당과 신주를 세우는 일과 노사신, 윤효손, 김순손등의 일에 대하여 논계(論啓)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정언 이세걸이 신주와 사당을 세우는 일에 대하여 논계하였으나, 들어 주지 않았다.
○辛亥/司諫姜景敍、掌令許輯論啓立廟立主, 盧思愼、尹孝孫、金舜孫等事, 不聽。 正言李世傑論啓立主立廟事, 不聽
연산 24권, 3년(1497 정사/명홍치(弘治) 10년) 6월 14일(갑신) 2번째기사
이집, 신수근, 이승건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집(李諿)을 사헌부대사헌, 신수근(愼守勤)을 승정원도승지, 이승건을 동부승지(同副承旨), 최진(崔璡)을 사간원대사간, 양희지(楊熙止)를 홍문관부제학, 홍한(洪瀚)을 직제학, 홍식(洪湜)을 사간원사간, 이수공(李守恭) 홍문관전한(典翰), 강경서(姜景敍)를 사헌부집의(執義), 조형(趙珩), 강겸(姜謙)을 장령(掌令), 노언방(盧彦邦), 손번(孫蕃)을 지평(持平), 손중돈(孫仲噋)을 사간원헌납(獻納), 조순(趙舜), 송흠(宋欽)을 정언(正言), 남곤(南袞)을 홍문관부수찬(副修撰), 구수영(具壽永)을 도총관(都摠官), 강귀손(姜龜孫)을 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로 임명하였다.
수근(守勤)은 성질이 본래 시기심이 있어 남을 해치는 일이 많고, 세력을 빙자하여 제 뜻을 자행하였으며, 남과 교제할 때에도 겉으로는 따뜻한 말을 하지만, 자기에게 좋게하지않는 사람은 반드시 암암리에 중상했었고, 도승지가 되어서는 승정원의 일을 모두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하므로 동렬(同列)들이 모두 그의 망령된 짓을 비웃었었다.
○以李諿爲司憲府大司憲, 愼守勤承政院都承旨, 李承健同副承旨, 崔璡司諫院大司諫, 楊熙止弘文館副提學, 洪瀚直提學, 洪湜司諫院司諫, 李守恭弘文館典翰, 姜景叙司憲府執義, 趙珩、姜謙掌令, 盧彦邦、孫蕃持平, 孫仲暾司諫院獻納, 趙舜、宋欽正言, 南袞弘文館副修撰, 具壽永都摠管, 姜龜孫京畿觀察使。 守勤性本猜忌, 多忮害。 憑藉勢焰, 恣行己意。 與人交, 陽爲溫語, 而其不善於己者, 則必陰中之。 其爲都承旨, 院中事皆欲專擅, 同列皆笑其妄作。
연산 24권, 3년(1497 정사/명홍치(弘治) 10년) 6월 15일(을유) 3번째기사
사간 홍식 등이 임사홍등의 가자가 불가함을 아뢰다
사간 홍식과 집의 강경서가 아뢰기를,
“전 대간이 아뢰었던 임사홍(任士洪), 조득림(趙得琳), 정숭조(鄭崇祖), 한환(韓懽)등에의 공신 가자(加資)는, 연전에도 대간의 논박으로 도로 빼앗았던 것을 지금 또 다시 가자하였으므로, 대간이 공론에 의거하여 아뢴 것인데, 전하께서 그 말을 들어주지 않으시고, 도리어 그 관직을 가셨으나 대단히 미안할 일이요, 환관은 공신으로 논할 수 없는 것인데, 또한 가자까지 하여 주었으니 더욱 불가합니다. 또 《대전(大典)》에 이르기를, ‘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은 도승지가 겸임한다’하였으니, 도승지는 문신이 아니면 안되는데, 신수근을 도승지로 승진함은 《대전(大典)》과 서로 어그러지니 모두 개정하소서.”하니,
전교하기를,
“비록 문신이라하더라도 현명하지못한 사람일 것같으면 도승지가 될 수 없다.”하고, 다른 것도 역시 들어주지 않았다.
○司諫洪湜、執義姜景叙啓: “前臺諫所啓任士洪、趙得琳、鄭崇祖、韓懽等功臣加資, 年前臺諫論駁還奪, 今又復加。 臺諫據公議以啓, 殿下不聽其言, 反遞其職甚未便。 宦官不可論以功臣, 而亦加其資尤不可。 且《大典》云: ‘藝文館直提學, 都承旨兼。’ 則都承旨, 非文臣不可, 而愼守勤陞爲都承旨, 與《大典》相違, 請幷改正。” 傳曰: “雖文臣, 如其不賢者, 則不可爲都承旨也。 餘亦不從。”
연산 24권, 3년(1497 정사/명홍치(弘治) 10년) 6월 28일(무술) 1번째기사
벼락친 일로 일품 재상, 의정부, 육조, 대간등을 인견하여 묻다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전번의 벼락친 변괴는 비록 대궐안이었지만 모두 정전(正殿)이 아니었는데, 이번에는 정전에 쳤으니, 그 변괴스러움이 큽니다. 대저 재변이 일어나는 것은 대개 위의 실덕(失德)에서 오는 것입니다. 지금 이것을 해소시킬 길로써 응당 거행하여야할 고사(故事)에 있어서는, 아래서 거행할 것은 마땅히 거행하겠사오니, 성상의 몸에 관한 일은 전하께서 특별히 유념하시어, 마음을 바르게하고 몸을 닦아 하늘의 꾸지람에 보답해야 하겠습니다.”하니,
왕이 정전을 피하고 반찬을 감하시고 희정당(熙政堂)에 납시어 일품(一品) 재상 및 의정부, 육조, 한성부, 대간, 홍문관(弘文館)을 인견하여 묻기를,
“어제의 뇌성변괴는 실로 내가 부덕한 소치이다. 무슨 일을 하여야 해소시킬 수 있을런지 모르겠으니, 각기 말하라.”하매,
윤필상(尹弼商)이 말하기를,
“선왕조의 고사를 상고하여 시행하고, 또 하교(下敎)하시어 말을 구해들이되, 정사의 잘잘못과 민간의 복리(福利)와 병폐를 물어 보아 하늘의 재변을 해소시키도록 하옵소서.”하고,
노사신(盧思愼)은 말하기를,
“예전에 이르기를, ‘하늘의 마음이 인군을 인자하게 사랑하여 재변을 내려 경각시킨다.’하였으니, 지금 만일 이로 인하여 경계하고 조심하신다면 비록 재변이 있었으나 그 응보가 없게될 것입니다. 근자에 경연에 나오시지 않아, 여러 신하들을 접견하시는 일이 좀처럼 없으셨는데, 이런 것이 모두 잘못된 정사입니다. 지금 천변이 반드시 여기에 연유하지않은 것도 아닌 것이오니, 모름지기 경계하고 조심하옵소서.”하고,
필상이 또 말하기를,
“《춘추전(春秋傳)》에 말하기를, ‘인군이 재변을 만나 두려워하면 비록 그런 징후는 있으되, 그 응보는 없다.’하였으니, 방금 사신의 아뢴 말이 당연합니다. 청컨대 정사를 부지런하게 하시어 하늘의 경계에 삼가소서.”하니,
왕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도다. 근일 내가 서증(暑證)이 있는데다 일기가 몹시 덥기때문에 경연등의 일을 오랫동안 폐하고 행하지않았으니, 이것이 재변을 가져올 만하다.”하였다.
필상이 말하기를,
“일찍이 듣건대, 중국에서도 벼락이 승천문(承天門)에 떨어졌었는데, 여러 신하들이 수리하기를 청하니 황제가 ‘하늘의 경계를 조심하여야 한다.’고 하여 오랜 후에야 수리하였다고 하옵니다. 지금 선정전 역시 급하게 수리할 것이 없으니, 청컨대 다른 곳에서 정사를 보옵소서.”하고,
좌의정 어세겸(魚世謙)이 말하기를,
“신은 〈이번 재변이〉무슨 일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뇌성벽력은 바로 아랫사람들의 정이 억울한 데에서 오는 것입니다. 예전에 이르기를 ‘인군계시는 대궐의 문이 천리보다도 멀다’하였습니다. 지금 백성들이 어찌 원통한 사람이나 억울한 사람이 없겠습니까? 무릇 백성들의 송사를 판결하는데 큰일은 30일, 중간 일은 20일, 작은 일은 15일입니다. 비록 이런 법이 있기는 하지만 관리들이 미루고 끌어 여러 달씩 쌓이고 밀리는데, 만일 관리에게 물어보면 반드시 말하기를, ‘피고[元隻]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그 미결된 세월과 정상을 참고한다면 백성들의 원통이 반드시 풀릴 것입니다. 근자에 외지부(外知部)1638) 사람들을 시비도 묻지않고 온 가족을 변방으로 옮기는데, 한 지아비가 원망만하여도 족히 화기를 손상하여 재변을 가져올 수 있을 것입니다.”하고,
정문형(鄭文炯)은 말하기를,
“재변을 해소시킬 길을 이루 다 들어 말할 수 없으나, 정사에 부지런하고 백성을 구휼하는 것이 그 큰 강령입니다. 기타의 수신(修身) 성찰(省察)하는 방법은 전일의 준례를 상고하여 시행하소서.”하고,
세겸이 또 말하기를,
“상참(常參)과 조계(朝啓)는 모두 행하여야할 고사(故事)이오니, 비록 계청(啓請)하지않더라도 전하께서 의당 차례로 거행하셔야할 것입니다. 옛날에 문왕(文王)은 아침부터 낮이 되고 또는 해가 기울도록 식사할 겨를이 없이 하여 만백성들을 모두 화평하게 하였는데, 이것은 천재가 있은 다음에야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하물며 지금은 천재가 이러하니, 덕을 닦아 그 꾸지람에 보답하지 않아서는 안될 것입니다.”하고,
우의정 한치형(韓致亨)은 말하기를,
“청컨대 전하께서는 정신을 가다듬어 정치를 도모하되, 공구스럽게 생각하여 몸을 닦고 성찰하시며, 부지런히 경연에 납시어 날마다 여러 신하들을 접견하시어 재변을 해소시킬 도리를 다하소서.”하고,
좌찬성(左贊成) 이극돈(李克墩)은 말하기를,
“지금 윤필상등이 아뢴 말은 모두가 재변을 당하여 근신하는 뜻입니다. 다만 세겸이 아뢴 원통하고 억울한 일들에 대하여는 차례차례 거행하셔야 하겠습니다. 옛날 초(楚)나라의 장왕(莊王)은 재변이 없는데도 경계하고 두려워하였고, 노(魯)나라의 애공(哀公)은 재변이 있는데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대개 하늘의 마음은 인군을 인자하게 사랑하는 것인데, 초장왕은 하늘이 자기를 도와주지않을까 두려워하고, 노애공은 하늘이 두려운 줄을 몰랐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천재를 만나시자, 대신과 시종(侍從),대간을 인견하시고, 재앙을 가져오게 된 이유를 널리 물으시니, 신등의 기쁜 마음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하늘에의 응답은 실지로써 하고 겉치레로 하지 않는다’하였는데, 이른바 진실이라는 것이 덕을 닦고 정사를 거행하는데에 지나지않는 것입니다. 경연(經筵)에 나오시어 정사를 보시는 것이나 어진 사대부(士大夫)를 접견하시는 것과 같은 것이 오늘의 급무인데, 만일 전하께서 힘써 거행하신다면 재변이 도리어 상서가 되는 것입니다.”하고,
판부사(判府事) 이극균(李克均)은 말하기를,
“하늘이 경계를 보여주는 것이 오로지 전하의 한 몸에 달려 있습니다.《서경(書經)》에 이르기를, ‘길을 명할지 흉을 명할지 역년(歷年)을 명할지는 지금 나의 첫 일에서 알 수 있다’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즉위하신 이래 조회도 보지않고 경연에도 납시지않으시며, 또한 대간이 오랫동안 궐하(闕下)에 엎드려있느라 직무를 보지못하고, 백성들의 원통한 일도 역시 많으니, 이런 것들을 유념하셔야할 것입니다.”하고,
호조판서 이세좌(李世佐)는 말하기를,
“옛사람이 이르기를, ‘하늘에의 응답은 실지로써 하고 겉치레로 하지않는다.’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깊이 구중(九重)궁궐에 계시면서 여러 신하들을 접견하지않으시니, 정치의 잘잘못과 민간의 아픔과 괴로움을 어떻게 아실 것이겠습니까? 지금부터 마땅히 날마다 경연에 납시어 대신, 시종, 대간들을 접견하시어서 다스리는 도를 자문하고 잘못된 일이 없는지를 알아보시되, 미치지 못할 것처럼 하셔야 하옵니다.”하고,
이조판서 유순(柳洵)은 말하기를,
“전에도 우레가 대궐안에 떨어진 적이 있었습니다만, 이번에는 정전에 떨어져 어좌(御座)에까지 미쳤으니, 이것은 비상한 변괴입니다. 우레라는 것은 하늘의 노한 기운인데, 그 진노(震怒)가 이러하였으니, 어찌 까닭이 없는 일이겠습니까? 대간이 일을 논쟁하여 여러 달을 대궐에 머물러 있지만, 천정(天聽)을 돌리지못하여 직무를 돌아보지못하니, 원통한 일과 억울한 일이 풀리지 못하여 인심의 답답함이 지금처럼 심한 적이 없습니다. 청컨대 대간의 말을 따르시어 마음을 다해서 몸을 닦고 살피소서.”하고,
무령군(武靈君) 유자광(柳子光)은 말하기를,
“천재와 사변에 대한 일은 좌우에서 이미 다 논계(論啓)하였으므로 신이 감히 다시 덧붙여 말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옛날의 역사를 열람해 보면, 재변이 있고 나면 반드시 응보(應報)가 있었습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경계하시고 조심하시되, 즉위하신 이후의 천재와 시변(時變)을 써올리게 하여 날마다 더욱더 경계하옵소서. 대저 인정이란 처음 천재나 시변을 당하였을 때에는 그 마음이 놀래어 두려워하다가도 하루만 지나게 되면 두려워하는 마음이 쇠퇴해지기 일쑤인 것입니다. 근래에 아내가 그 남편을 죽이고, 종이 그 주인을 죽인 자가 많으니, 역시 적어올리게 하여 보시면서 항상 유념하셔야 할 것입니다. 또한 근래에 경연에 납시지 않으시고 여러 신하들을 접견하지 앉으시는 것이 성상께서 기체가 안녕하지 못하신 탓이니, 비록 항상 정전에 납시지 못하시더라도 편전에라도 납시어 여러 신하들을 불러 보신다면, 문견이 넓어지고 성학(聖學)이 밝아지실 것입니다.”하고,
우참찬(右參贊) 윤효손(尹孝孫)은 말하기를,
“신은 듣건대, ‘하늘의 총(聰)하고 명(明)함은 우리 백성의 시청(視聽)으로 인하여 총하고 명하게 되고, 하늘의 명외(明畏)1639)는 우리 백성의 호오(好惡)로 인하여 명외하게 된다’하였으니, 하늘과 사람은 한가지 이치로써 상통되어 간격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 하늘이 꾸짖음을 이토록 하는 것이 어찌 그 원인이 없겠습니까? 원컨대, 전하께서 하늘의 경계를 받기에 힘을 다하여 널리 충직한 의논을 받아들이고, 몸을 돌볼 새없이 덕을 닦아, 하늘의 꾸지람에 보답하옵소서.”하고,
대사헌 이집(李諿)은 말하기를,
“근래에 전후 대간이 5, 6개월 동안이나 복합(伏閤)하면서 차자로 소장으로 말로 진달하기까지 하여도 전하께서 한결같이 들어주지 않으시니, 신등이 깊이 통분하게 생각하옵니다. 전일에 정문형(鄭文炯)등이 간사한 의논으로 전하를 오도하였는데도 전하께서 국문하지않으시고 지금 모두 전과 같이 대신으로 인견하시니, 전하의 실덕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또 전하께서 비록 ‘나는 사정이 없다.’하셨지만, 신수근(愼守勤)은 왕후의 친척으로서 법을 어겨가며 도승지가 되었고, 임사홍(任士洪)은 본래부터 하나의 악덕한 인간인데도 과람하게 준 가자를 개정하지 않으시니, 이것은 전하께서 반드시 대간을 이겨내시려는 마음을 먼저부터 속에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또 안동(安同)은 참으로 우건(友騫)의 아들인데도 전하께서 헌부(憲府)의 판결을 좇지 않으십니다. 우건의 어미와 형제들이 모두 그 아들이라고 하는데, 전하께서 어떻게 그의 아들이 아닌 것을 아시옵니까? 이런 일들이 넉넉히 화기를 손상시킬 수 있습니다.”하고,
대사간 최진(崔璡)은 말하기를,
“지금 전하께서 정전(正殿)을 피하고 찬수를 감하시는 것은 바로 공구(恐懼)하고 수성(修省)하는 뜻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등의 바른 의논을 들어 주지 않으신다면 공구 수성하시는 실상이 과연 어디 있겠습니까?”하니, 왕이 이르기를,
“사홍등의 일은 전일에 이미 의논한 일이다.”하였다.
사간(司諫) 홍식(洪湜)이 말하기를,
“옛부터 재변이란 공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번쩍 번쩍하는 뇌성번개가 착하지않고 편치않다’하였는데, 이것은 오로지 유왕(幽王)1640)때의 소인이 밖에서 행세하고 폐첩(嬖妾)들이 안에서 왕의 마음을 고혹(蠱惑)시킨데서 온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경연에도 나오시지않고, 여러 신하들을 접견하지도 않아 아름다운 말과 어진 정사를 듣지못하시므로 상하사이의 정이 상통되지 못하니, 금번의 이 변괴가 반드시 이런 것에 연유하지않은 것도 아닐 것입니다. 성종께서는 하루에 세 번씩이나 경연에 납시고 매일 아침마다 정사를 보시면서도 오히려 부족하게 여겨 또한 야대(夜對)까지 하셨습니다. 전하께서 성종의 자리를 계승하셨으면서도 성종을 본받지 않으시는 것은 어쩐 일입니까? 옛부터 소인을 등용하면 반드시 나라를 어지럽혔던 까닭에 신등이 사홍등의 가자를 개정하자고 청한 것인데 들어주지 않으시고, 또 의논을 모으게 하였는데 문형(文炯)등이 소인을 비호하였으니, 그 아랫사람에게 붙고 위를 기망함이 이보다도 더 큰 것이 없습니다. 또 특별히 오늘에만 이런 재변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후로 우박이 철 아닌 때 내리고, 별빛이 낮에 나타나는 등 재변이 한 가지만이 아니었습니다. 전하께서 앞으로 또 하늘의 경계를 조심하지 않으시어 바른 의논을 받아들이지 않고, 경연에 납시지 않으신다면, 천변이 또 생기게 될지 어찌 알겠습니까?”하니,
왕이 이르기를,
“사홍등의 일은 재상들의 의논이 만일 잘못되었다면 고치기가 어찌 어렵겠는가?”하였다.
집의(執義) 강경서(姜景敍)가 말하기를,
“사홍등의 일을 대간이 논계(論啓)하였으되, 여러 달이 되도록 고치지않았기 때문에 별빛이 낮에 나타나고 흰 기운이 하늘을 가로지른 것이며, 또한 월식과 우박의 재앙이 있으니 하늘의 꾸짖음이 현저하다 하겠습니다. 전하께서 만일 그때에 간하는 말을 받아들이어 공구하고 수성(修省)하시었다면 반드시 이런 변이 없었을 것입니다. 옛날 태무(太戊)1641)는 덕을 닦아 상곡(桑穀)의 재변1642)을 없앴고, 무정(武丁)1643)은 덕을 닦아 우는 꿩의 재변1644)을 해소시켰습니다. 전하께서 덕을 닦고 정사를 거행하신다면 재앙이 도리어 상서가 될 것이나, 그렇지 않으신다면 손상과 파멸이 오게될 것입니다.
또 전하께서 신수근(愼守勤)을 도승지에 임명하고 안동(安同)을 우건(友騫)의 아들이 아니라고 하시는데, 이것은 오로지 사사 은혜를 쓰고 공론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또 전하께서는 필시 비록 소인에게 한 계급을 더 준들 어찌 갑자기 위망(危亡)하게 되겠는가하시겠지만, 이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만일 한 번 그 단서를 열어주면 그들이 반드시 동류들을 끌어 들여 권세있는 요직에 배치되어 그 인군이 고립(孤立)하게될 것이니, 두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정문형등 4인이 말하기를, ‘지금 다시 도로 빼앗는다면 그 잘못이 당초에 과람하게 준 폐단보다도 더하다’고 합니다만, 왕자의 덕은 거행하기를 어떻게 하는데에 달려있는 것으로서, 가령 그 거행이 제대로 되지못하였다면 비록 열 번 바꾸더라도 나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개꼬리가 담비꼬리를 잇고1645), 양의 내장을 잘 구어 벼슬한다는 비난이 다시 오늘날에 생기게 할 것이겠습니까? 또한 대간이 오랫동안 대궐뜰에 서있는 것은 옛날에도 들어보지 못한 일이라고 하였지만, 옛날 송(宋)나라 신하가 한 해 동안에 상소를 백 번까지 올린 일이 있었으니, 말로 아뢴 것은 몇 백번이 될지 모를 일입니다. 문형등의 이 말은 전적으로 위를 속여가며 사정을 따른 것인데, 국문하지 않으시니 어찌 하늘의 변괴가 있지 않겠습니까? 《시경》에 이르기를, ‘하늘의 노여움을 공경하여 감히 즐기고 놀지 못한다.’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신의 경계를 들어주시어 사정 버리기를 힘쓰고 대신들을 접견하신다면 재변을 해소시킬 수 있고 국가가 다스려져 편안할 것입니다.”하고,
사신(思愼)이 또 말하기를,
“금번의 이 재변이 정전에 있게되어 다른 데에 있는 것과 같지않으니, 청컨대 더욱더 수성(修省)을 하옵소서.”하니,
왕이 이르기를,
“재변을 해소시켜 가는 절목(節目)이 비록 전례가 있으나, 이번과는 같지않을 것이니 속히 상고하여 아뢰라.”하였다.
사신이 또 말하기를,
“해놓은 말이 비록 많지만 재변을 해소시키기에 절실하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청컨대 전례를 상고하여 속히 자신을 죄주는 말씀을 내리시어 중외가 모두 전하께서 하늘을 조심하고 백성을 돌보시는 뜻을 알게 하소서.”하고,
필상(弼商)은 말하기를,
“이러한 큰 변을 만났으니, 반드시 상하가 공구하고 수성(修省)한 후에야 재변을 해소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하고,
장령(掌令) 강겸(姜謙)은 말하기를,
“전하께서 실덕(失德)하신 것을 신등이 혹은 차자(箚子)로 혹은 소장(疏章)으로 말씀드릴 수 있는데까지 하였으나, 한결같이 들어주지않으시고, 또한 홍문관의 차자보기를 청하였는데도 역시 윤허하지 않으시니, 이것은 전하께서 일일마다 거절하시는 것으로서 통분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또 전하께서 사홍을 일러, ‘우두머리 간물이다.’ ‘소인이다.’하시면서도 바로 개정하지 않으시고, 또 간사한 의논을 한 신하들을 국문하지 않으시니 더욱 통분하고 애석합니다.”하고,
예조판서 박안성(朴安性)은 말하기를,
“전하께서 오래도록 대간의 말을 들어주지않으시는데, 옛말에 이르기를, ‘군자의 과오는 일식이나 월식과 같아 과오가 있을 때에는 모두 보게되고, 고치면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 본다.’하였고, 또한 인군의 덕을 칭찬할 때에는 반드시 ‘간하는 말 들어주기를 흐르는 물같이 한다.’하였고, 또 말하기를, ‘허물고치기를 인색하게 하지않는다.’하였으니, 원컨대, 전하께서 의심마시고 쾌히 결단하시어 여러 사람의 소망도 맞추어주시고 하늘의 꾸지람에도 보답하옵소서.”하고,
장령 조형(趙珩)은 말하기를,
“전하께서 이번 재변을 만나 비록 정전(正殿)을 피하시고 찬수를 감하시기는 하셨습니다. 그러나 옛말에 이르기를, ‘하늘에의 응답은 실지로써 한다.’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경연에 납시지않고, 친히 정사를 보지않으시며, 소인을 등용하고 간하는 말을 듣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천변이 일어난 원인이오니, 청컨대 그 실지를 수행하소서. 또한 《시경》에 이르기를, ‘번쩍번쩍하는 뇌성번개다.’하였는데, 이것은 소인을 등용한 소치입니다. 옛부터 소인이 등용되면 반드시 천변이 있었으니, 전하께서 신등의 말을 들어주시면 천재와 시변이 해소되게될 것입니다. 또 전하께서 공론을 보시려고 하여 대신들의 의논을 모으셨는데, 문형등이 위의 뜻에 영합하여 그토록 아첨하였으니, 죄를 비록 위에서 결정하실 것이나 그렇다고 완전히 놓아주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또 홍문관의 차자보기를 청하는데도 윤허하지않으시고, 또 면대(面對)를 청하면 하교하시기를, ‘이같이 더운 시기에 사홍의 일로 하여 관복을 갖추고 너희들을 볼 것인가?’하셨으니, 이것은 전하께서 경각하시는 마음을 갖지않아 무슨 일이나 거절하시는 것입니다. 청컨대 오늘은 전교를 들어보고 물러가게하여 주소서.”하고,
헌납(獻納) 손중돈(孫仲暾), 지평(持平) 노언방(盧彦邦)은 말하기를,
“오늘 다행히도 인견하여주셨으니, 확정하신 명령을 듣기바라나이다”하였고, 정언(正言) 조순(趙舜)은 말하기를,
“옛말에 이르기를, ‘삼공(三公)1646)은 음양(陰陽)을 조화하여 잘 다스린다.’ 하였는데 지금 하늘의 변괴가 이러하여도 대죄할 줄을 모르고, 전하께서 실덕(失德)하시는 일이 있는데도 또한 그 잘못을 바로잡지못하니, 이것은 삼공들이 역시 그 직책을 다하지못하는 것입니다. 또 문형(文炯)등이 아첨으로 전하를 오도하였으니, 진실로 대죄(待罪)하기에 겨를이 없어야할 것인데, 도리어 말하기를, ‘같이 따져 변명하고 싶다.’느니, ‘다시 가부의 의논을 듣지 않으실 것입니다.’느니하여, 전하께서 전적으로 자기의 말만을 들으시게 하려하였으니, 국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공신에게 가자(加資)한 것은 신 등이 모두 개정하려한 것인데, 전하께서 들어주지 않으시기 때문에, 그중에 우심한 자만을 논쟁한 것입니다. 대저 한 사람의 소견은 한정이 있는 것인데, 전하께서는 편벽되게 사사의견만을 고집하시어 여러 사람들의 의논을 들어주지않으시니, 신등이 통분하고 민망함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하고,
정언 송흠(宋欽)은 말하기를,
“동중서(董仲舒)1647)가 말하기를, ‘국가에 장차 도를 잃어 패망하게 되는 일이 있으려면 하늘에서 먼저 천재와 시변을 내리어 꾸짖고 경고하는 것인데, 그래도 변통할 줄을 모르면 손상과 패망이 따라오게 된다.’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후로 경연에 납시지않고 간하는 말을 듣지않으시기 때문에, 우박이 철 아닌데 내리고 별빛이 도수를 잃었으니, 하늘의 꾸짖어 경고함이 역시 현저한 것이 아닙니까? 지금도 또한 신등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신다면 손상과 패망이 오고야 말 것입니다.”하고,
지평(持平) 손번(孫蕃)은 말하기를,
“유왕(幽王)때에 소인들이 득세하고 총애하는 첩들이 고혹(蠱惑)시키기 때문에 일식과 월식이 생기고 산과 골짜기가 위치를 바꾸었습니다. 금번의 이 하늘의 변괴도 역시 소인들에게 과람하게 준 작위에서 온 것이오니 지금 당장 개정하고, 아울러 위를 기망한 신하들을 국문하며, 몸돌볼 겨를없이 덕을 닦아가시면 하늘의 변괴가 해소될 것입니다. 옛날 송(宋)나라 경공(景公)의 한마디 말에 형혹(熒惑)성이 물러갔었으니, 청컨대 정사를 개혁하시어 하늘의 꾸지람에 답하소서.”하니,
왕이 이르기를,
“하늘의 변괴가 반드시 사홍등의 가자(加資)때문에 온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대간의 말이 이러하니 도로 빼앗는 것이 어찌 어렵겠는가?”하고,
좌우에게 물었다. 필상(弼商)이 말하기를,
“오늘의 재변을 적실하게 사홍의 가자때문에 온 것이라고 지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대간의 말이 이러하고 일을 폐지한 지 오래되어, 원통한 일을 풀지못하는 사람이 또한 많으므로 화기를 손상하여 재앙을 불러들이는 일로 인하여 일어나게 될 것이오니, 청컨대 대간의 말을 좇으소서.”하고,
세겸(世謙)은 말하기를,
“지금 사홍에게 가자한 것은 일을 맡기는 것도 아니요, 또 사홍이 국가에 관계되는 사람도 아니오니, 비록 그 가자를 회수하더라도 또한 일에 해로울 것 없으니, 청컨대 힘써 대간의 말을 들어 주소서.”하고,
치형(致亨)은 말하기를,
“신의 의견 역시 세겸과 같사오니 들어주소서.”하고,
자광(子光)은 말하기를,
“지금 대간이 기필코 청한 대로 하고서야 물러가기로 하는 것이니, 원컨대, 먼저 옳고 그름을 결정하시어 굳세게 결단하소서. 우유부단(優柔不斷)하는 것은 제왕(帝王)의 미덕이 아닙니다.”하니,
왕이 이르기를,
“공신에게 한 계급 더 주는 것이 흥망에 관계되지않을 것같다. 그러나 대간이 한 사람이 아니니, 비록 한 사람이 잘못생각하더라도 그 밖의 사람들이 어찌 다 그렇겠느냐? 만일 재변을 해소시키려면 바른 의논을 들어주어야 할 것이니, 도로 빼앗으라.”하였다.
도승지 신수근(愼守勤)이 말하기를,
“다만 사홍의 가자만을 고칠 것입니까?”하니,
왕이 이르기를,
“대간이 아뢴 대로 다 빼앗으라.”하였다.
강겸(姜謙)이 말하기를,
“문형등을 국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하였다.
부제학 양희지(楊熙止)가 말하기를,
“그 일이 잘못되면 그 일에 대한 재앙이 나타난다는 것은, 옛사람이 고집불통이라고 하였으니, 확실히 사홍의 가자때문에 나타난 것이라하여 빼앗을 수는 없습니다. 옛날 진(晉)나라 무제(武帝)때에 벼락이 함장전(含章殿)기둥을 친 일이 있었는데, 이번은 바로 정전이니 그것보다도 심한 일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후에 경연에도 나오시지않고 여러 신하들을 접견하지도 않으시어 아랫사람들의 정이 위에 통달되지 못하였으니, 이 역시 재앙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하자,
홍식(洪湜), 강경서(姜景敍)가 말하기를,
“희지의 말은 반드시 사정이 있는 말입니다. 희지가 본래 사홍과 서로 교분이 있으므로 구출하려고 말을 꺼낸 것입니다. 옛날 왕안석(王安石)이 ‘천변은 무서워할 것이 못된다’하였는데, 희지의 말이 이와 같으니, 국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하니,
왕이 이르기를,
“각기 그 뜻을 말한 것인데, 국문할 수 있는가?”하였다.
응교(應敎) 이수공(李守恭)이 말하기를,
“공신의 가자는 진실로 모두 고쳐야합니다. 토목(土木)공사도 역시 재앙을 가져올 수 있을 것입니다. 해소시키는 길도 잠시 인견하는 동안에 다 강구할 수는 없으니, 청컨대 널리 물어보고 광범위하게 수집하며 토목공사를 모두 정지하여, 하늘의 꾸지람에 보답하소서.”하고,
교리(校理) 김전(金銓)은 말하기를,
“공신의 가자는 진실로 모두 고쳐야할 것이요, 근자에 전하께서 과도하게 시행한 일이 너무도 많았으니, 청컨대 두루 생각해보고 둘러보시어 모든 토목 공사와 내원(內苑)의 동물이나 노리개 거리를 일체 정지하고 없애소서”하니, 말이 끝나기도 전에 왕이 이르기를,
“지금 이 아뢴 말들을 각기 글로 써서 아뢰라.”하였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이때 사람들이 조롱하기를, 임사홍이 당초에도 하늘의 변괴가 무서울 것 없다는 말때문에 죄를 당하더니, 금번에도 역시 하늘의 변괴때문에 그 가자를 회수당하니, 하늘의 보응(報應)이란 무서운 것이로다.”
註1638]외지부(外知部): 국경을 넘어와서 살고있는 외국인 註1639]명외(明畏): 선을 나타내고 악을 두렵게 함.註1640]유왕(幽王): 중국 주(周)나라의 못된 임금.註1641]태무(太戊): 중국 은(殷)나라의 제7대 왕.註1642]상곡(桑穀)의 재변: 뽕나무와 닥나무. 즉 중국 은(殷)나라 임금 태무때에 두 나무가 뜰에 생겨나 하룻밤 사이에 두 줌이 되게 크므로 임금이 두려운 마음이 생겨, 이척(伊陟)이란 신하의 말을 들어 보고 덕을 닦았더니, 두 나무가 한꺼번에 말라죽은 고사로, 재앙과 상서의 조짐을 비유한 것.註1643]무정(武丁): 은나라의 제20대 왕.註1644]우는 꿩의 재변: 은(殷)나라 고종(高宗)이 제사드리는데 꿩이 솥귀에 올라가 울므로 고종이 변괴로 생각하고 덕을 닦아 은나라를 중흥시킨 고사. 구치(雊雉).註1645]개꼬리가 담비꼬리를 잇고: 담비 꼬리로 장식한 관(冠) 뒤에 개꼬리로 장식한 관이 뒤따른다는 것. 즉 좋은 뒤에 하찮은 관이 뒤따른다는 뜻으로 관작이 남발되는 것을 비유한 것. 구미속(狗尾續).註1646]삼공(三公): 삼정승.註1647]동중서(董仲舒): 중국 한(漢)대의 학자.
○戊戌/承政院啓: “前者雷變雖在闕內, 皆非正殿。 今震正殿, 其爲變大矣。 大抵災變之作, 蓋由於上之失德。 今弭之之道, 若應行故事, 則在下者當修擧之, 若關於上躬之事, 殿下所宜軫慮。 當正心修身, 以答天譴。” 王避殿減膳, 御熙政堂。 引見一品宰相及議政府、六曹、漢城府、臺諫、弘文館問曰: “昨日雷變, 實予不德所致。 不知某事, 可以弭之, 其各言之。” 尹弼商曰: “請考先朝故事施行。 又下敎求言, 訪問時政得失, 民間利病, 以弭天災。” 盧思愼曰: “古云: ‘天心仁愛人君, 降災以警。’ 今若因此戒謹, 則雖有其變, 而無其應。 近日不御經筵, 曠接群臣, 皆是失政。 今天變未必不由於此, 請須警愼。” 弼商又曰: “《春秋傳》云: ‘人君遇災而懼, 則雖有其象, 無其應。’ 今思愼所啓當矣。 請克勤政事, 以謹天戒。” 王曰: “卿言是也。 近日予有暑證, 日候酷熱, 故經筵等事久廢不行, 此足以召災也。” 弼商曰: “嘗聞, 中國雷震承天門。 群臣請修, 皇帝以謂: ‘當謹天戒。’ 久然後修。 今宣政殿亦不必遽修, 請於他處聽政。” 左議政魚世謙曰: “臣未知爲某事之應, 然雷霆乃下情鬱抑之所致也。 古云: ‘君門邈於千里。’ 今百姓豈無冤抑者乎? 凡決民訟, 大事三十日, 中事二十日, 小事十五日。 雖有其法, 然官吏淹延, 累朔積滯。 若問官吏則必曰: ‘元隻不現矣。’ 若考其歲月與情狀, 則民冤必伸矣。 近者外知部人等, 不問是非, 全家徙邊。 一夫之怨, 足以傷和召災矣。” 鄭文炯曰: “弭災之道, 不可枚擧, 勤政、恤民此其大綱。 其他修省之方, 請考前例施行。” 世謙又曰: “常參、朝啓皆應行故事, 雖不啓請, 殿下當次第擧行。 昔文王自朝至于日中昃, 不遑暇食, 用咸和萬民, 此非有天災而後然也。 況今天災如此, 不可不修德, 以答其譴也。” 右議政韓致亨曰: “請殿下勵精圖治, 恐懼修省, 勤御經筵, 日接群臣, 以盡弭災之道。” 左贊成李克墩曰: “今尹弼商等所啓, 皆謹災之意。 但世謙所啓冤抑等事, 當次第擧行。 昔楚莊王無災而戒懼; 魯哀公, 有災而不懼。 蓋以天心, 仁愛人君。 楚莊王恐天之不佑己; 魯哀不知天之可懼也。 殿下今遇天災, 引見大臣、侍從、臺諫, 垂訪致災之由, 臣等不勝喜賀。 古人云: ‘應天以實, 不以文。’ 所謂實者, 不過修德、行政而已。 如經筵視事, 接賢士大夫, 今日急務。 若殿下力行, 則災反爲祥矣。” 判府事李克均曰: “天之示警, 專在殿下一身。 《書》云: ‘命吉凶, 命歷年, 知今我初服。’ 殿下卽位以來, 不視朝、不御經筵。 且臺諫長伏闕下, 不治職事, 民冤亦多, 是宜留念。” 戶曹判書李世佐曰: “古人云: ‘應天以實, 不以文。’ 殿下深居九重, 不接群臣, 政治得失, 民間疾苦何由知之? 今宜日御經筵, 接見大臣、侍從、臺諫, 咨訪治道, 迎問闕失, 如恐不及。” 吏曹判書柳洵曰: “前此雷震闕內則有之, 今則雷震正殿, 延及御扆, 非常之變也。 雷者天之怒氣也。 震怒至此, 豈無所自? 臺諫論事, 累朔守闕, 未回天聽, 不顧官守, 冤抑未伸, 人心悶鬱, 莫甚於此時。 請從臺諫之言, 盡心修省。” 武靈君柳子光曰: “災變之事, 左右已盡論啓, 臣不敢更贅。 但歷觀古史, 書災變於前, 必有後應。 願殿下戒之敬之, 令寫進卽位以後天災時變, 日加警戒。 大抵人情初遇變異, 其心驚懼。 若過一日, 則驚懼之心易衰。 近來妻殺其夫, 奴殺其主者多。 亦使書進, 常須留念。 且近日不御經筵, 不接群臣, 由上體不寧。 雖不得常御正殿, 請御便殿, 引接群臣, 則聞見廣, 而聖學明矣。” 右參贊尹孝孫曰: “臣聞, 天聰明, 自我民聰明; 天明畏, 自我民明畏。 天人一理, 通達無間。 今天之譴告至此, 豈無所自? 願殿下克勤天戒, 廣迎讜論, 側身修德, 以答天譴。” 大司憲李諿曰: “近日前後臺諫, 連五、六朔伏閤, 以箚、以疏、以言, 而殿下一不聽納, 臣等深爲痛憤。 前日鄭文炯等以邪議誤殿下, 而殿下不鞫。 今皆例以大臣而引見, 殿下之失德無大於此。 且殿下雖曰我無私情, 而愼守勤以椒親, 違法爲都承旨; 任士洪本一惡德之人, 而不改濫資。 是殿下必勝臺諫之心, 先存乎中故也。 且安同眞友騫之子, 而殿下不從憲府之決。 友騫之母與兄弟皆曰其子, 則殿下何由知其非子也? 如此之事, 足以感傷和氣矣。” 大司諫崔璡曰: “今殿下避殿、減膳者, 乃所以示恐懼修省也。 然若不聽臣等之正論, 則恐懼修省之實, 果安在哉?” 王曰: “士洪等事, 前日已議之矣。” 司諫洪湜曰: “自古災不虛生。 《詩》云: ‘燁燁震電, 不令不寧。’ 此專由幽王之時, 小人用事於外, 嬖妾蠱惑王心於內也。 今殿下不御經筵, 不接群臣, 不得聞嘉言、善政, 上下之情不通。 今此之變, 未必不由於此。 成宗則日三經筵, 每朝視事, 猶以爲不足, 又有夜對。 殿下繼成宗之位, 而不法成宗何也? 自古用小人, 必亂邦, 故臣等請改士洪等資而不從。 又令收議, 而文炯等庇護小人, 其附下罔上, 莫大於此。 且非特今日有此災也, 殿下卽位以後, 如雨雹失時, 星文晝見, 災變不一。 殿下繼此以往, 又不謹天戒, 不納正論, 不御經筵, 則安知天變之又至耶?” 王曰: “士洪等事, 宰相議若以爲非, 則改之何難?” 執義姜景叙曰: “士洪等事, 臺諫論啓, 累月不改。 故星文晝見, 白氣經天。 又有月蝕、雨雹之災, 天之譴告, 可謂顯矣。 殿下若於其時, 聽納諫言, 恐懼修省, 則必無此變矣。 昔太戊修德以消桑穀之災, 武丁修德以弭雊雉之異。 殿下修德行政, 則災反爲祥, 不然則傷敗乃至。 且殿下以愼守勤爲都承旨, 以安同爲非友騫之子, 此專用私恩, 不從公議也。 且殿下必以爲, 雖加小人一級, 何遽至危亡也? 此不然。 今若一開其端, 彼必援引同類, 列置權要, 人主孤立, 可不懼哉? 鄭文炯等四人乃曰: ‘今復奪之, 其失甚於當初濫授之弊。’ 王者之德, 在行之何。 若設未得其當, 雖十易之不爲病。 豈可使狗尾續、爛羊胃之譏, 復譏於今日乎? 且以爲, 臺諫久立闕庭, 前古所未聞。 昔有宋臣一歲之間, 疏至於百八十上, 則其以言奏者, 不知其幾百也。 文炯等此語, 專是誣上、徇私, 而殿下不鞫, 其何不有天變乎? 《詩》云: ‘敬天之怒, 無敢戲豫。’ 殿下聽臣之戒, 務去私情, 接見大臣, 則災變可消, 國家治安矣。” 思愼又曰: “今此災變在正殿, 與他處不同, 請益加修省。” 王曰: “弭災節目, 雖有前例, 與此不同, 其速考啓。” 思愼又曰: “所言雖多, 不切於弭災則何用? 請考前例, 速下罪己之言, 使中外洞知殿下謹天、恤民之意。” 弼商曰: “遇此大變, 必上下恐懼修省然後, 災可弭也。” 掌令姜謙曰: “殿下之失德, 臣等或箚、或疏, 言之已盡, 而一不見聽。 又請見弘文館箚子, 而亦不許。 是殿下事事而拒之也, 不勝痛憤。 且殿下稱士洪曰: ‘魁憸。’ 曰: ‘小人。’ 而不卽改正, 又不鞫邪議之臣, 尤爲痛惜。” 禮曹判書朴安性曰: “殿下久不聽臺諫之言。 古云: ‘君子之過, 如日月之蝕, 過也人皆見之, 更也人皆仰之。’ 且稱君之德則必曰: ‘從諫如流。’ 又曰: ‘改過不吝。’ 願殿下勿疑快斷, 以副衆望, 以答天譴。” 掌令趙珩曰: “殿下遇此災變, 雖避殿、減膳, 然古云應天以實。 殿下卽位以來, 不御經筵, 不親視事, 進用小人, 不聽諫言。 此天變之所由起也, 請修其實。 且《詩》云: ‘燁燁震電。’ 此用小人所致也。 自古小人見用, 則必有天變。 殿下聽臣等之言, 則變異可消矣。 且殿下欲觀公論, 收議于大臣, 而文炯等逢迎上意, 獻諛如此, 罪雖上裁, 然不可全釋。 且請見弘文館箚子而不許, 又請面對則敎云: ‘如此暑月, 爲士洪事, 具冠服見爾等乎?’ 是殿下不有惕慮之心, 事事而拒之也。 請於今日得聞上敎而退。” 獻納孫仲暾、持平盧彦邦曰: “今日幸賜引見, 請聞定命。” 正言趙舜曰: “古云: ‘三公爕理陰陽。’ 今天變如此, 而不知待罪。 殿下有失德, 而又不能格非, 是三公亦不能盡其職也。 且文炯等以諛悅誤殿下, 固當待罪之不暇, 乃曰: ‘請與分辨。’ 曰: ‘不復聞可否之論。’ 欲使殿下專用己言, 不可不鞫。 且功臣加資, 臣等欲盡改正, 而殿下不聽, 故論其甚者耳。 大抵一人之見有限, 殿下偏執己私, 不聽衆論, 臣等不勝痛悶。” 正言宋欽曰: “董仲舒云: ‘國家將有失道之敗, 天乃先出災異, 以譴告之。 尙不知變, 傷敗乃至。’ 殿下卽位以後, 不御經筵, 不聽諫言, 故雨雹不時, 星文失度, 天之譴告, 不亦顯乎? 今又不聽臣等之言, 則傷敗乃至。” 持平孫蕃曰: “幽王之時, 小人用事, 嬖妾蠱惑, 故日月薄蝕, 山谷易處。 今此天變, 亦由於小人之濫爵。 今速改之, 竝鞫罔上之臣, 側身修德, 則天變可消。 昔宋景公一言而熒惑退舍, 請改紀其政, 以答天譴。” 王曰: “天變未必由於士洪等加資, 然臺諫言之如此, 奪之何難?” 問左右, 弼商曰: “今日之災, 不可的指爲士洪加資之應, 然臺諫所言如是, 而廢事已久, 未伸其冤者亦多。 傷和召災, 職此而起, 請從臺諫之言。” 世謙曰: “今士洪加資, 非任事也。 且士洪非關係國家之人, 雖收其資, 亦非害事, 請勉從臺諫之言。” 致亨曰: “臣意亦與世謙合, 請從之。” 子光曰: “今臺諫必得請而後退。 願先定是非, 而剛斷焉。 優游不斷, 非帝王美德。” 王曰: “加功臣一級, 似不關興亡, 然臺諫非一人, 雖一人錯計, 其餘豈皆然耶? 若欲弭災, 則當聽正論, 其還奪之。” 都承旨愼守勤曰: “只改士洪資乎?” 王曰: “臺諫所啓, 盡奪之。” 姜謙曰: “文炯等不可不鞫。” 副提學楊熙止曰: “其事失則某咎徵應, 古人以爲膠固不通, 不可的指爲士洪加資之應而奪之也。 昔晋武帝時, 雷震含章殿柱。 此則乃正殿, 有甚於彼。 殿下卽位之後, 不御經筵, 不接群臣, 而下情不得上達, 此亦可以召災也。” 洪湜、姜景叙曰: “熙止之言必有其情。 熙止本與士洪相交, 故欲救而發此言也。 昔王安石以爲: ‘天變不足畏。’ 熙止之言與此同, 不可不鞫。” 王曰: “各言其志耳, 其可鞫乎?” 應敎李守恭曰: “功臣加資, 固宜盡改。 土木之役, 亦足召災。 弭之之道, 非暫時引見之間所能盡講, 請須廣問博採, 盡罷土木之役, 以答天譴。” 校理金詮曰: “功臣加資, 固當盡改。 近日殿下過擧甚多, 請宜周慮却顧。 凡土木之役, 內苑禽獸戲玩之具, 一切停罷。” 言未竟, 王曰: “今此所啓之辭, 其各書啓。”
【史臣曰: “時人譏之曰: ‘士洪初以天變不足畏之說抵罪, 今亦以天變被奪其資。’ 天之報應, 可畏也夫。”】
연산 25권, 3년(1497 정사/명홍치(弘治) 10년) 7월 1일(경자) 1번째기사
경연에서 《강목》의 한 대목에 대해 의논하다.
집의 강경서 등이 양희지, 신수근의 일등에 대해 논의하다
왕이 경연(經筵)에 납시었다. 《강목(綱目)》 한기(漢紀)를 강하는데 ‘낙양령(洛陽令) 동선(董宣)에게 30만전(錢)을 하사하라.’라는 대목에 이르자, 시강관(侍講官) 장순손(張順孫)이 아뢰기를,
“이는 광무(光武)가 곧은 신하를 정표(旌表)한 것이온데, 청컨대 이를 본받으소서.”하니,
왕이 이르기를,
“광무(光武)가 동선에게 돈을 내린 것은 잘못이다.”하였다.
영사(領事) 어세겸(魚世謙)이 아뢰기를,
“광무가 사심(私心)에서 성낸 것이기 때문에, 깨달은 다음에 돈을 하사하여 그 강직함을 표한 것이오니, 광무의 하사가 잘한 일입니다.”하였고,
손순(孫順)은 아뢰기를,
“강항령(强項令)1650)이라 이름한 것은 그 굴하지않는 것을 취한 것입니다.”하였다.
집의 강경서(姜景敍)가 아뢰기를,
“요사이 천재(天災)가 자주 일어나니, 바른 마음으로써 닦고 반성하여 한 가지 생각도 경홀함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예로부터 하늘이 경계하는 것을 삼간다면, 그 형상은 있을지라도 그 조응[應]은 없으며, 삼가하지않는다면 상패(傷敗)가 마침내 이르는 법입니다. 하늘의 경계를 삼가하는 길은 사심을 억제하고 사욕을 막는데 있습니다. 만약 사심이 없으면, 광명정대하여 천지는 제자리하고, 만물은 육성되어, 재이(災異)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양희지(楊熙止)는 임사홍(任士洪)의 자급(資級)을 뺏는 것이 천변(天變)에 순응하는데 합당하지않다고 하니, 이는 소인에게 아첨하고 전하를 면전(面前)에서 속인 것입니다. 그래서 전하께 국문할 것을 요청하였는데, 전하께서 듣지 않으시니, 매우 미편(未便)합니다.
또 음흥(陰興)은 황후의 아우인데, 광무가 대사마(大司馬)를 삼으려하매 음흥 은 굳이 사양하기를 ‘성덕(聖德)에 손상되는 일이니 구차하게 벼슬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신수근(愼守勤)을 도승지로 삼으신 것은 성덕에 크게 누가 되는 일이며, 더구나 안동(安同)을 우건(友騫)의 어미와 그 아우 우하(友夏)가, 모두 우건의 아들로 여기는데, 아들이 아니라고 논하였으니, 족히 화기(和氣)를 손상시키는 처사이오니, 재상에게 하문하여 처리해야 하옵니다. 그리고 장악원(掌樂院)은 소사(小司)이므로 예로부터 도제조(都提調)가 없었으며 악공(樂工)과 여기(女妓)같은 작은 일은, 정승(政丞)이 참예해서 알 바가 아니온데, 지금 우의정 한치형(韓致亨)을 제조(提調)로 삼은 것은, 대신을 존대하고 예우하는 것이 아니옵니다.”하니,
왕이 이르기를,
“안동이 우건(友騫)의 집에 출입하지 않았고, 또 적모(嫡母)의 복(服)도 입지 않았으니, 그 아들이라 말할 수 없다.”하였다.
헌납(獻納) 손중돈(孫仲暾)이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대신과 문안(文案)에 의거해서 처결하지 않고 위에서 홀로 결단하시니, 신은 전하께서 사심을 가지고 계신다는 인상을 면하지 못할까두렵습니다. 양희지(楊熙止)가 시종(侍從)으로서 전하께 등대할 기회를 갖자, 임사홍(任士洪)의 가자를 뺏는 것이 천견(天譴)에 순응하는 것과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으니, 그 면전에서 전하를 속인 것이 이 같은즉, 마땅히 죄를 다스려야 하겠으며, 신수근(愼守勤)에 대하여도 역시 개임(改任)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하고,
어세겸(魚世謙)은 아뢰기를,
“희지(熙止)의 뜻은 계근(戒謹)하는 일을 광범위하게 말하려는 것이며 사홍의 가자를 뺏는 것으로서 천견(天譴)에 응하는 일이 못된다는 것은 아니옵니다.”하였다.
이극균(李克均)이 아뢰기를,
“희지가 만약 사홍을 비호할 마음을 두었다면, 희지 하나쯤이야 아낄 것이 없겠지만, 만약 그 마음이 없었다면, 대간(臺諫)의 말들이 너무 과하지 않습니까?”하니,
중돈(仲暾)이 아뢰기를,
“그때 대간이 들은 자가 하나가 아니요, 안침(安琛)도 또한 일찍이 그 잘못을 낯대고 따졌습니다.”하고,
중돈이 또 후원(後苑)의 일을 논하려 하니, 왕은 변소에 간다 칭탁하고 들어갔다. 얼마 후 전교하기를,
“희지는 국문을 하라. 도승지에게 대한 일은 전례가 있다. 장악원제조는 정승이 어느 때부터 겸임하게 되었는지 전례를 상고해서 계(啓)하라.”하였다.
註1650]강항령(强項令): 목이 굳굳하다는 뜻임.
○朔庚子/御經筵。 講《綱目》《漢紀》, 至賜洛陽令蕫宣三十萬錢, 侍講官張順孫曰: “此光武所以旌直臣也, 請須法之。” 王曰: “光武賜蕫宣錢非矣。” 領事魚世謙曰: “光武以私心而怒之, 故旣悟而賜錢, 以表其直。 光武之賜善矣。” 順孫曰: “以强項令名之者, 取其不屈也。” 執義姜景叙曰: “近有天災, 宜正心修省, 無一念之敢忽也。 自古克謹天戒, 則雖有其象, 而無其應, 不謹則傷敗乃至。 謹天戒之道, 在於勝私、窒慾。 若無私心, 則光明正大, 位天地, 育萬物, 無災異之戾。 楊熙止以奪士洪資, 不合於應天變, 是黨友小人, 面欺殿下。 請鞫之, 殿下不聽, 甚未便。 且陰興皇后之弟, 光武欲爲大司馬, 興固讓曰: ‘虧損聖德, 不可苟冒。’ 今以守勤爲都承旨, 大累聖德。 且安同, 友騫之母與其弟友夏, 皆以爲友騫之子, 而論以非子, 此足以感傷和氣, 宜下問宰相, 而(使)〔處〕之。 掌樂院小司, 古無都提調。 如樂工、女妓屑瑣之事, 非政丞所當與知。 今以右議政韓致亨爲提調, 非所以尊禮大臣也。” 王曰: “安同不出入友騫之家, 又不服嫡母之喪, 則不可謂其子。” 獻納孫仲暾曰: “殿下不與大臣據文案以決, 而獨斷於上, 臣恐殿下未免有私心也。 熙止以侍從, 當殿下賜對之時以 ‘奪士洪之資, 非關於應天譴。’ 其面欺殿下如此, 固當治罪。 愼守勤亦不可不改。” 魚世謙曰: “熙止之志, 欲廣言戒謹之事, 非以奪士洪資爲不足應天譴也。” 李克均曰: “熙止若有庇士洪之心, 則何惜一熙止? 若無此心, 則臺諫之駁, 無乃過乎?” 仲暾曰: “其時臺諫聽之者非一, 安琛亦嘗面論其非。” 仲暾又將論後苑事, 王托如廁而入。 有頃, 傳曰: “熙止鞫之。 都承旨事有前例。 掌樂院提調, 政丞自何時帶之? 考例以啓。”
연산 25권, 3년(1497 정사/명홍치(弘治) 10년) 7월 4일 계묘 5번째기사
사헌부집의 강경서등의 하늘에 순응할 수있는 다섯가지 급무에 대한 상소문
사헌부집의 강경서(姜景敍)등이 상소하기를,
“신등은 듣건대 하늘과 사람의 사이는 현저하고 은미한 간격이 없어서, 정침(精祲)1654)이 서로 부딪치고 선악(善惡)이 서로 추이(推移)하여, 인사(人事)가 아래서 움직이면 상변(象變)이 위에서 나타나는 것은 필연적인 이치라고 합니다. 그러나 극도로 어지러운 세상에도 상서가 없지않고, 성하게 다스려진 세상에도 요괴(妖怪)가 없지 않습니다. 그런데 안일한 임금은 상서를 믿고 스스로 대견하게 여기기 때문에 더욱 사치하여 화를 취하게 되고, 흥기하는 임금은 재앙을 만나면, 경계할 줄을 알기때문에 더욱 두려워하여 복을 이룩합니다. 그렇다면 상서라해서 반드시 경사가 되지않는 것이고, 재앙이라 해서 반드시 나쁜 것이 되지 않습니다. 요점은 경계하고 두려워하여 천변(天變)에 보답하고 덕을 닦아서 재앙을 복으로 바꾸는데 있습니다. 신등은 보건대 성체(聖體)가 강녕하지 못하여 구중궁궐에 깊숙이 계시므로 사대부를 접견하여 치치(致治)의 방법을 강론하여 경국(經國)의 장원책(長遠策)을 세우지 못하시고, 더불어서 서정을 의론하는 것이 규달(閨闥)의 사이를 벗어나지 못하십니다. 이런 까닭에 내시들은 안에서 굄만 받고 소인들은 밖에서 계급이 승진되어, 정령(政令)은 많이 잘못되고 모든 일은 해이해져 갑니다. 하늘이 마침내 우박을 내려 견고(譴告)를 하고 성문(星文)의 변을 보여 계구(戒懼)하게 하는데, 전하께서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간하는 말을 거부하여 듣지 않으시니, 하늘이 돌아보고 미리 염려하여 이 큰 변고를 보여 성심(聖心)을 열리게 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전하께서 척연(惕然)히 계구하여, 여러 신하를 맞기도 하고 찾기도 해서 다스리는 도리를 강론하시고, 소인을 내치고 멀리하여 재앙과 변괴를 누르고 소멸하소서. 뭇사람이 모두 달리보고 여러 신하가 서로 즐거워하는데, 재앙이 변해서 상서가 되어 큰 업을 빛내지 않겠습니까?
신등은 듣건대 ‘고종(高宗)은 은(殷)나라의 착한 임금이었지만 요괴를 만나서 덕을 닦았고, 선왕(宣王)은 주(周)나라의 어진 임금이었지만 재앙을 만나 몸을 기울였다’합니다. 그러므로 그 정성이 능히 귀신을 감동시키어 진기(沴氣)를 화하여 태화(太和)가 되고, 쇠운(衰運)을 변경하여 중흥(中興)으로 되게 하니, 이것이 흥왕(興王)의 재앙을 만나 복을 이루는 것입니다.
신등의 직무가 언책(言責)에 있으니 비록 명을 안했더라도 가슴속에 간직한 바를 진술해야 하옵는데, 하물며 좋은 말을 구하신다는 전교를 내려 과실을 듣고자 하심에리까? 이는 바로 왕심(王心)의 발견으로 그 천견(天譴)을 보답함에 있어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이에 어리석은 정성을 다하여 성도(聖道)를 논(論)하여 하늘에 순응할 수 있는 다섯가지 진실한 일을 들어 성명을 우러러 돕겠습니다.
1. 간하는 말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신등이 듣건대 순(舜)임금은 천하에 대성인으로, 그 인(仁)은 하늘과 같고 그 덕은 못[淵]과 같아 넓고 넓으며 높고 높은 것을 이루 이름지어 말할 수 없었는데, 남의 말을 취택하여 자기의 선(善)으로 만들기를 즐긴 까닭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천하의 선(善)이 무궁한 반면에 성인의 선을 좋아하는 마음 역시 무궁하니, 자신이 비록 선이 있다해도, 밖에 또 선이 있는 것을 알 수 없으므로 아집을 버리고 남을 따라서, 선을 취하는 것으로써 덕을 삼은 것입니다. 이는 스스로 만족하지 않는 것으로, 그 도(道)는 광명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두운 임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귀(貴)로 말하면 사람의 임금이 되었고, 부(富)로 말하면 한 나라를 차지했으므로 의사만 보이고 얼굴빛만 달리하면, 천하가 진동을 하며, 말만 전하고 호령만 발하면 만리밖에서도 분주하니, 마음이 교만하고 뜻이 안일하여 스스로 어질게 여기고 스스로 처리하며 변론을 벌여 간하는 것을 거부하되, 마치 돌과 물이 서로 받아들이지않는 것같습니다. 성(聖)은 더욱 성이 되고, 우(愚)는 더욱 우가 되는 것이 모두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옵니다.
지금 우리 전하께서 천품이 밝고 슬기로우며 참신한 생각으로 다스림을 구하는데, 대신이 첫머리로 사설(邪說)을 아뢰어 전하를 그릇되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전하께서는 요순(堯舜)의 밝음이 있는데도 대신은 고기(皐夔)의 충성이 없으며, 전하께서는 간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밝음이 있는데 대신이 간하는 것을 거부하는 술책을 올려 전하로 하여금 충언(忠言)을 귀에 거슬린다하게 해서, 마치 본래 타고난 것같이 습관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전하를 요,순으로 만들려하지 않고, 전하를 한(漢)나라 환제(桓帝), 영제(靈帝)로 만들려고 한 것이니, 그 마음을 이해할 길이 없사옵니다.
전하께서 이미 간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잘못임을 알아 전일의 정사를 고치려하면 원컨대, 길을 열어 간언(諫言)을 구하고 평화한 얼굴로 받아들여서 말이 채용할만 하면 그 곧음을 상주고 쓸 수 없더라도 그 어리석음을 용서하여 언로(言路)를 열어 간하는 자를 오게하신다면, 일이 빗나감이 없고 몸은 아름다운 이름을 누리실 것이니, 이것이 하늘에 순응하는 진실이옵니다.
2. 어진이를 응용하는 것입니다. 신등은 듣건대 어진이를 취택하는 길은 친소(親疎)와 귀천을 막론하고 오직 어진 그것을 본위로 하여, 귀하면 귀해서 취하고 천하면 천해서 취할 따름이니, 어찌 공경(公卿)의 자제와 포의한사(布衣寒士)를 구별하겠습니까? 그러므로 관중(管仲)이 제(齊)나라 정승이 되었을 적에 어질다하여 두 도둑을 천거했고, 목공(穆公)이 진(秦)나라를 패(伯)할 적에, 어질다하여 유여(由餘)를 등용하였으니, 만약 어질지않다면 비록 귀하기가 공공(共工)이나 곤(鯀)과 같고 친하기가 관숙(管叔)이나 채숙(蔡叔)과 같더라도, 그를 써서 천하를 어지럽게 하겠습니까?
옛날에는 국가에 재앙과 변괴가 있으며, 삼공(三公)을 문책하여 응(應)하게 하였으며, 대신도 역시 벼슬자리를 물러나 〈재앙의 소멸을〉빌었는데, 지금 전하께서는 변을 만나 경외(警畏)하시고 좋은 말을 구하여 허물을 듣고자하시거늘, 대신은 한 사람도 재앙이 이루게된 것을 역력히 아뢰어 막을 수 있는 바를 갈구하지도 않으며 허물을 책임지고 자리를 물러나〈재앙의 소멸을〉빌려는 생각도 하지않고, 과실을 전하에게 돌려 그 허물을 면할 것만 노리려고 하니, 어찌 옛날 과실을 자기에게 돌리는 도(道)라 하겠습니까?
더구나 그 사이에는 또다시 부정한 사람의 용사(用事)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미 무재(武才)를 시험해보고 또 활쏘는 품위를 보고싶다는 것은 이견(異見)을 세워 가슴속에 먹어둔 것을 실행하는 것이요, 또 이미 정의(正議)를 건의하고 중도에 변하여 인륜(人倫)을 무너뜨리는 것은 기회를 노려 아첨하려는 것이요, 여러 사람의 공의를 배격하고 소인을 구원하는 것은 거짓을 지어서 임금을 그릇되게 하는 것이요. 기강(紀綱)에 힘써 자기 집을 윤택하게 하는 것은 사를 먼저하고 공을 뒤로하는 것입니다. 재주와 덕이 없이 정부에 들어갔으니, 어찌 죽반승(粥飯僧)1655)과 다를 것이며 역량이 없이 추부(樞府)의 어른이 되었으니 어찌 반식(伴食)1656)의 꾸지람을 면하겠습니까?
조지서(趙之瑞)는 비록 강작(强作)이라 이르지만 두 번이나 다사(多士)들 가운데서 장원을 하였으니 그 재주가 등용할 만하오며, 정성근(鄭誠謹)은 비록 경경(硜硜)1657)하다 일컫지만 효행(孝行)이 온 나라에 나타났으니 그 행실이 취할만 합니다. 또 뇌락(磊落)1658)한 인재가 하류(下流)에 침체해 있고, 강직하고 신실한 신하가 주현(州縣)에서 곤궁하게 지내니, 이것은 곧 등용된 자가 반드시 어질지를 못하고 어진자도 반드시 등용되지 못하였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전하께서 어진 줄 알았으면 들어쓰시고, 들어쓰셨으면 신임하시며 소인들로 하여금 그 사이에 끼지못하도록 하시면 어진자가 휘정(彙征)1659)되어, 그 나라를 광명하고 번창하게 만들 것이니, 이것이 하늘에 순응하는 진실이옵니다.
3. 사(邪)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재주있는 사람이라면 질투하여 미워하고, 언성(彦聖)한 사람이라면 일부러 거부하여 통하지못하게 한다면, 내 자손과 여러 백성을 보전하지못할 것이다.’하였으니, 대개 소인이 악한 짓을 하는 것이 천태만상입니다만, 그 중에도 가장 미운 것은 사람의 선을 해치는 것보다 더한 것은 없습니다.
옛부터 소인이 그 심술을 부려보려 할 때는, 반드시 바른 사람을 미워하여 일망타진한 연후에 그 간악을 행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그 은택을 입지못하게하고 화가 후세까지 미치게하니, 저 당(唐)의 사흉(四凶)1660)과 송(宋)의 오귀(五鬼)1661)같은 것이 어느 때인들 없겠습니까? 임금이 이를 통렬히 다스려서 종국에 함께 있지못하게 하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전하께서는 신정(新政)의 처음이시니, 더욱이 거절하여 일을 맡지못하도록 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임사홍(任士洪)의 무리는 비록 그 가자(加資)는 빼앗았지만 오히려 멀리 내치지못하고 있으며, 그 사이에는 또 간악하고 탐오하기 그지없는 한치례(韓致禮)같은 것이 있어 훈련원(訓鍊院)의 장이 되었고, 행동이 시정배(市井輩)와 같은 이계명(李繼命) 따위가 태복(太僕)이 되었습니다. 최개지(崔蓋地)같은 더러운 자가 어찌 고비(皐比)의 자리에 합당하며, 원중구(元仲矩)같은 탐독(貪黷)한 자가 어찌 한 방면을 맡겠습니까? 만약 전하께서 밝게살피사 간사한 신하를 내치시고 멀리하여 일을 맡기지않는다면 이것이 하늘에 순응하는 진실이옵니다.
4. 쓰기를 절약하는 것입니다.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제도로써 절약하여 재물을 상하지아니하고, 백성을 해롭게 하지아니한다’하였고 전(傳)에 이르기를 ‘쓰기를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한다’했습니다. 옛부터 제왕(帝王)이 절약해서 쓰는 것을 귀히 여긴 것은, 재물이란 하늘이나 귀신이 실어다주는 것이 아니고 모두 우리 백성의 힘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만약 사치스럽게 쓰면 재물을 상하고, 재물을 상하면 반드시 백성을 해롭게 하는데 이르기 때문입니다. 옛날 어진 임금은 찌푸리고 웃는 것까지도 반드시 아껴서 낡은 바지라도 반드시 간직해주었는데, 하물며 재용(財用)이겠습니까? 전하께서 근년에 들어와서 사여(賜與)하시는 것이 절도가 없어서 상방(尙方)1662)의 저축이 거의 떨어지게 되었고, 어구(御廐)의 말[馬]이 사사 측근자에게까지 남급(濫及)이 되고 있으니, 만약 부고(府庫)의 재물이 마를 지경에 이른다면, 반드시 백성에게 징수할 것입니다. 어찌 재물을 상하고 백성을 해롭게하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무릇 재물이란 하늘과 땅에서 나오는 것이니, 만약 하늘을 두려워하지않고 쓰기를, 진흙이나 모래와 같이 한다면, 그 백성의 마음을 상하게하는 것이 아닙니까? 백성의 마음을 상하게하는 것은 마침내 하늘의 마음을 상하게하는 것입니다. 만약 전하께서 한 나라를 위하여 재물을 지키시되, 검소하게 절약하여 쓰고 함부로 내주지않는다면 이것이 하늘에 순응하는 진실이옵니다.
5. 원통하고 억울한 사정을 풀어주는 것입니다. 신등은 듣건대 관자(管子)가 말하기를, ‘당(堂) 아래는 천리보다 멀고 궐문(闕門)이 만리보다 멀다’하였사옵니다. 대개 정지(情志)가 막히지않고 위아래가 서로 통하면 천리의 밖에서도 응하며, 그렇지 않다면 한 울타리 사이에서도 호월(胡越)과 같은 간격이 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아래 백성들이 원통한 것이 주현(州縣)에서도 펴지는 일이 적은데 하물며 감사(監司)에게 펴지겠으며, 감사에게 펴지는 자가 적은데 하물며 구중궁궐에서 펴지겠습니까? 그래서 수령(守令)들은 그 포악함을 아래에 행하되, 궁한 백성들은 그 원통함을 위에 부르짖을 길이 없어서 음원(陰冤)의 기운이 누적되어 배설되지못하므로, 격(激)하여 가뭄이 되고 떨쳐서 뇌정(雷霆)이 되어 전하의 정치에 누를 끼치니, 이는 전혀 감사가 그 자격이 아닌데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안처량(安處良)은 본래 재간이 없어서 능히 결단있는 정치를 못하여 경상도(慶尙道)는 소첩(訴牒)이 들이밀리고, 부서(簿書)가 책상에 가득한데도 망매하여 처결을 못하여, 일이 정체된 것이 많습니다. 백성은 따라서 원통함을 호소하여 천명 백명이 떼를 지어다니니, 온 도내의 수심과 한탄이 어찌 그치겠습니까? 만약 강명(剛明)하고 재능이 있는자를 골라서 처량(處良)과 교대하여 도내의 원한을 펴게 하고 음원의 기운을 배설토록 하시면, 이는 하늘에 순응하는 진실이옵니다.
신등은 듣건대 ‘내가 요순의 도가 아니면, 감히 왕앞에 진달하지 않는다.’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신등은 전대 성왕(聖王)께서 다스림을 이룩한 사적이 가히 법이 될 만한 것과, 어둔 임금이 어지러움을 빚어낸 일이 가히 경계가 될 만한 것을 들어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제법 다스림을 이룩코자하면, 모름지기 다스리는 요령을 알아야합니다. 무릇 다스린다는 것을 어진이를 친히 하고 간신을 멀리하며, 상과 벌을 분명히 하여 몸소 앞장서서 백성으로 하여금 나아갈 방향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순(舜)임금은 어떤 사람이며, 나는 어떤 사람이냐?’ 혹 아침과 저녁으로 늘 생각해서, 그 순임금과 같지못한 것은 버리고, 그 순임금과 같은 것을 따르면, 이 또한 순임금일 따름이다.’하였으니, 전하께서도 이에 뜻을 두시고 경홀함이 없으시면, 어찌 다만 재변이 화해서 상서가 될 뿐이겠습니까? 적이 요순과 더불어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註1654]정침(精祲): 정기(精氣)와 같은 뜻 註1655]죽반승(粥飯僧): 다만 죽밥을 먹을 뿐 아무 쓸모가 없는 중을 이름. 《오대사(五代史)》 이우전(李愚傳)에, ‘폐제(廢帝)가 우(愚)등이 일을 하는 것이 없다고 이르며, 항상 재상에게 눈짓하며 이는 죽반승(粥飯僧)이라 하였다.’하였음.註1656]반식(伴食): 직(職)에 있으면서 아무 일도 안하는 것을 이름. 《구당서(舊唐書)》노회신전(盧懷愼傳)에, “개원(開元) 3년에 회신이 요숭(姚崇)과 더불어 추밀(樞密)을 관장하였는데, 회신의 생각에 자신이 이도(吏道)에 대하여 요숭(姚崇)만 못하다는 것을 시인하여 매사를 다 미루어 사양하니 당시 사람들이 이르기를, 반식재상(伴食宰相)이라 하였다.”하였음.註1657]경경(硜硜): 옹색한 소인의 모양.註1658]뇌락(磊落): 마음이 활달하여 조그마한 일에 구애하지않는 모양 註1659]휘정(彙征): 휘(彙)는 유(類)라는 뜻임.《주역(周易)》 태(泰)괘에, “모여를 뽑아서 그 유로써 함께 가니 길하다”하였는데, 이는 군자가 등용되면 혼자만 가는 것이 아니라 그 유까지 다 데리고 간다는 뜻임.註1660]당(唐)의 사흉(四凶): 당요(唐堯) 시대의 사흉(四凶)으로, 즉 환도(驩兜),공공(共工), 삼묘(三苗), 곤(鯤)을 이름註1661]송(宋)의 오귀(五鬼): 송(宋)나라 때 왕흠약(王欽若), 정위(丁謂), 임특(林特), 진팽년(陳彭年), 유승규(劉承珪)등 5인이 간사하고 험위(險僞)하매 당시 사람들이 오귀(五鬼)라 이름 하였음註 1662]상방(尙方): 상의원(尙衣院)을 이름. 내부(內府)의 사용물(私用物)을 제작, 또는 관장하는 용무를 맡았음
○司憲府執義姜景叙等上疏曰:臣等聞, 天人之際, 顯微無間, 精祲有以相盪, 善惡有以相推, 人事動於下, 象變著於上, 乃理之必然者也。 然亂極之世, 不能無祥; 盛治之代, 不能無妖。 逸王恃祥而自大, 故益侈而取禍; 興王遇災而知戒, 故愈畏而致福。 然則祥不必爲慶, 災不必爲殃, 要在戒懼以答天變, 修德以變災殃耳。 臣等伏見, 聖體違豫, 深居九重, 不得接見士大夫, 講論致治之道, 爲經國長遠之計, 其所與圖議庶政者, 不出閨闥之間。 是故, 宦寺恃寵於內, 小人階進於外, 政令多失, 百事解弛。 天乃雨雹, 以譴告之; 星文示變, 以戒懼之, 殿下尙未覺悟, 拒諫不聽。 皇天存顧預慮, 示此大變, 以啓聖心。 是以, 殿下惕然戒懼, 迎訪群臣, 講論治道, 黜遠小人, 以厭銷災變, 衆目改觀, 群心胥悅, 其不變災爲祥, 以光丕業歟? 臣等聞, 高宗商之令主也。 逢妖而修德; 宣王周之賢君也。 遇災而側身, 故誠感神祗, 化沴氣爲太和, 變衰運爲中興, 此所以興王遇災, 而(知)〔致〕福也。 臣等職在言責, 雖不命, 當陳所蘊, 況下敎求言, 欲聞過失, 是乃王心之發見, 其答天譴, 斯無難矣。 是用罄竭愚誠, 考論聖道, 槪擧應天之實五事, 仰贊聰明。 其一曰, 納諫。 臣等聞, 舜天下之大聖人也。 其仁如天, 其德如淵, 蕩蕩巍巍, 莫罄名言。 其所以樂取人以爲善何也? 蓋天下之善無窮, 聖人好善之心亦無窮。 已雖有善, 安知又有善焉? 是以, 捨己從人, 取善以爲德, 此不自滿足, 其道光明者也。 暗主則不然, 貴爲人主, 富有一國, 意諭色授, 而六服震動; 言傳號渙, 而萬里奔走, 心驕而意逸, 自賢而自用, 縱天辯以拒諫, 如石水之不受, 聖益聖、愚益愚, 其皆出於此乎。 今我殿下天資英睿, 銳意求治, 而大臣首陳邪說, 以誤殿下, 是殿下有堯、舜之明, 大臣無皋、夔之忠; 殿下有納諫之明, 大臣進拒諫之術, 使殿下以忠言爲逆耳, 習慣若天成, 是不致殿下於堯、舜, 而欲導殿下如桓、靈, 其心未可知也。 殿下已知拒諫之非, 改紀前日之政, 願開道而求諫, 和顔以受之, 言可用則賞其直, 不可用則恕其愚, 開言路以來諫者, 則事無過擧, 身享美名, 此應天之實也。 其二曰, 用賢。 臣等聞, 取賢之道, 無間親疎、貴賤, 惟其賢之所在。 貴而貴取焉, 賤而賤取焉, 豈間公卿子弟、布衣寒士也? 故, 管仲相齊, 賢也而擧二盜; 穆公伯秦, 賢也而擧由余。 如非賢也則雖貴如工、鯀, 親如管、蔡, 豈可用以亂天下哉? 古者國有災變, 責免三公以應之, 爲大臣者, 亦避位以禳之。 今殿下遇變以警畏, 求言以聞過, 大臣未有一人歷陳致災以求所以弭之, 引咎避位以圖所以禳之, 欲歸過於殿下, 而窺免其咎, 豈古者過則歸己之道乎? 況其間復有匪人參用焉。 如旣試武才, 而又欲看弓品, 立異以行胸臆也; 如旣建正議, 而中變以壞人倫, 審伺以獻諛侫也。 排群議以救小人, 作僞以誤君也; 務紀綱以潤其屋, 先私而後公也。 無才德入政府, 豈異粥飯僧; 無幹局長樞府, 寧免伴食誚? 趙之瑞雖云强作, 再魁多士, 其才可用; 鄭誠謹縱稱硜硜, 孝著一國, 其行可取。 又有磊落之才, 沈於下流; 鯁亮之臣, 困於州縣, 是則用者未必賢, 而賢者未必用也。 若殿下知賢而擧之, 擧而信任之, 不使小人參廁於其間, 則賢者得以彙征, 升其國於明昌, 此應天之實也。 其三曰, 去邪。 《書》曰: “人之有技, 媢嫉以惡之; 人之彦聖, 而違之俾不通, 以不能保我子孫、黎民。” 蓋憸人之爲惡, 雖千條萬緖, 其所可惡者, 莫如害人之善。 自古小人欲售其術, 必疾害正人, 一網打盡, 然後得以行其奸, 使民不被其澤, 而禍及後世。 如唐之四凶, 宋之五鬼, 何代無之? 在人君痛繩之, 使不同中國耳。 況殿下新政之初, 尤宜去絶, 使不得任事。 今士洪之輩, 雖奪其資, 猶未遠斥。 其間又有姦貪無狀如韓致禮, 而長於訓鍊; 行同市井如李繼命, 而得爲太僕。 崔盖地之汚衊, 豈宜居皐比; 元仲秬之貪黷, 豈宜典方面? 若殿下明以察之, 黜遠邪臣, 不任以事, 此應天之實也。 其四曰, 節用。 《易》曰: “節以制度, 不傷財、不害民。” 《傳》曰: “節用而愛民。” 自古帝王以節用爲貴者, 財非天運鬼輸, 皆出於吾民之力。 若侈用則傷財傷財, 則必至於害民故也。 古之賢王嚬笑必惜, 敝袴必藏, 況財用乎? 殿下自近年以來, 賜與無節, 尙方之儲, 幾於告罄; 天廐之馬, 濫及私昵。 若府庫之財, 至於匱竭, 則必徵斂於民, 其不傷財, 而害民乎? 夫財者, 天地之所生。 若不畏天, 而用之若泥沙, 其不傷民之心乎? 傷民心, 乃所以傷天心也。 若殿下爲一國守財, 儉以節用, 不敢妄與, 此應天之實也。 其五曰, 伸冤抑。 臣等聞, 管子曰: “堂下遠於千里, 君門遠於萬里。” 蓋情志不隔, 而上下交通, 則千里之外應之, 否則藩籬之間隔如胡、越。 是故, 下民之冤, 能自直於州縣者鮮矣, 況自直於監司乎; 能自直於監司者鮮矣, 況自直於九重乎? 以此, 守令得以肆其暴於下, 窮民無以號其冤於上, 陰冤之氣, 積而不洩, 激而爲旱, 奮而爲雷霆, 以累殿下之治, 專由監司不得其人也。 安處良素無才幹, 不能剸治。 慶尙道牒訴倥偬, 簿書滿案, 茫昧不決, 事多積滯。 民隨訴冤, 千百爲群, 一道愁嘆, 曷有窮已? 若擇剛明有才能者, 俾代處良, 以伸〔一〕道之冤, 以洩陰冤之氣, 此應天之實也。 臣等聞, 我非堯、舜之道, 不敢陳於王前。 故, 臣等以前代聖王所以致治之迹, 可以爲法, 與夫暗主兆亂之道, 可以爲戒者而獻焉。 夫欲致治, 須知爲治之要。 夫治也者, 親賢、遠奸, 信賞必罰, 以身先之, 使民知趨向之方。 古人云: “舜何人也, 予何人也?” 早夜以思, 去其不如舜者, 就其如舜者, 是亦舜而已。 殿下亦以此加意, 而無忽焉, 則豈但化災變爲祥瑞而已? 德與帝舜而無閒矣。
연산 25권, 3년(1497 정사/명홍치(弘治) 10년) 7월 7일(병오) 1번째기사
집의 강경서등이 신자건등의 일과 야인들에게 동청례를 파견하는 일등에 대해 논의하다
왕이 경연에 납시었다. 《강목(綱目)》에서 광무기(光武紀)를 강하는데,
특진관(特進官) 유자광(柳子光)이 아뢰기를,
“광무(光武)는 옛사람이 일컫기를 ‘그 밝음이 능히 만리밖을 내다본다’하였는데, 양송(梁松)의 참소를 듣고 드디어 마원(馬援)을 멀리하여, 신식후(新息侯)의 인(印)을 추탈(追奪)하였습니다. 이는 소인의 감언이설이 그릇친 것입니다. 고금의 제왕이 남의 말을 들을 때는, 반드시 자세히 살펴야 능히 그 시비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서책을 보는데도 반드시 제왕이 행사한 자취를 더듬어서, 그 치란(治亂)과 득실의 연유를 생각해야할 것입니다.”하고,
집의(執義) 강경서(姜景敍)는 아뢰기를,
“이조(吏曹)의 관리는, 비록 신등이 아뢰지 않더라도 의당 국문해야합니다. 홍문관(弘文館)은 대간(臺諫)과 같은데, 어찌 단 한 사람만을 의망(擬望)합니까? 대저 임금은 인후(仁厚)가 남발되고 결단성이 부족하면 아니되니, 청컨대 쾌히 결단을 하옵소서.”하였으나, 들어 주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신자건(愼自健), 한훈(韓訓), 양희지(楊熙止), 안처량(安處良)의 일을 아뢰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유자광이 아뢰기를,
“대간(臺諫)의 말이 매우 옳습니다. 대간이 아니라면 왕이 어떻게 이 말을 들으실 수 있겠습니까? 재상은 비록 아뢰고 싶지만, 그 직무가 아니기 때문에 감히 못하는 것입니다. 대간이 처량(處良)을 사물에 어둡다하니, 만약 그렇다면 어찌 쓸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대간이 과연 다 어질다면 말한 바가 공정할 것이지만, 간혹 어질지못한 사람도 있으니, 어찌 한결같이 대간의 말만을 듣고서 경솔히 한 방면의 소임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처량은 일찍이 도승지와 부제학(副提學)을 지낸 바 있으니, 어찌 어두운 사람에게 이와 같은 직을 제수하였겠습니까? 마땅히 좌우에게 수의하시여 모두 다 불가하다고 한 연후 결단하옵소서.”하니,
왕이 이르기를,
“이미 대신에게 수의하였는데, 모두 갑자기 체임(遞任)해서는 안되니 마땅히 유시를 내려 스스로 면려(勉勵)하게해야 하므로 갈지않은 것이다.”하였다.
강경서는 또 아뢰기를,
“동청례(童淸禮)가 연전에 이미 갔다왔는데, 지금 무슨 까닭으로 다시 보내는 것입니까? 예로부터 이적(夷狄)과 상통하면 끝에 가서는 반드시 걱정이 생기는 법입니다.”하니, 왕이 좌우에게 물었다.
특진관(特進官) 이극균(李克均)이 아뢰기를,
“연전에 동청례가 갔을 적에, 야인(野人) 수백명이 와서 말하기를 ‘국가에서 사자를 보내왔으니 이제는 다시 살았다’고 하므로 청례가 말하기를 ‘너희들이 마땅히 적을 포박해와야한다’하니 그자들의 말이 ‘우리들이 명색은 비록 추장이라하지만 실로 통속(統屬)이 없는데, 어떻게 해서 포박해 오겠는가? 다만 사신이 갈적에 적인(賊人)의 집을 가르쳐 주겠다’하고 드디어 나와서 명령을 환영하고 적인의 집을 참으로 가리켜주면서, 또 말하기를 ‘명년에 만약 다시 오게되면 당연히 평탄한 길로 인도하리니, 그렇게 되면 우리들의 정상을 알 수 있을 것이다.’했다고 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국가에서 매양 토벌을 할 적에는 도로를 알지못하여 마치 눈먼 뱀이 갈대밭에 달아나는 것과 같으니, 만약 도로를 잘 안다면 어찌 이와 같겠습니까? 또 국가가 대마도(對馬島)에 대하여는, 많은 포목과 곡물을 수송하여 호의를 통하면서, 서방의 야인에게는 그렇지 아니하니, 지금 그자들의 청에 의하여 사신을 보내시면, 서방 방수(防守)의 노고는 생략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동청례를 보내겠다고 의사를 표시하고서 도로 중지한다면, 그들의 배반은 전과 같을 것입니다.”하니,
자광(子光)이 아뢰기를,
“증여(贈與)하는 물품이 너무도 적습니다. 비록 친구에게 서로 기증하는 물품이라도 어찌 이와 같을 수 있습니까?”하고,
극균(克均)은 아뢰기를,
“대마도에는 심지어 공인(工人)까지 보냈는데, 지금은 조정의 의론이 서로 어긋나므로 넉넉하게 못했습니다. 그러나 정해년 정토(征討)할 적에, 신은 처음에 적의 소굴이 매우 가깝다고 듣고 행군하여 산을 오르다가 길을 잃었습니다. 신은 홀로 몇 명의 기병과 더불어 강변으로 내려와 길을 얻은 다음에 군사를 거느리고 나왔습니다. 신의 뜻은, 그들의 부락과 도로의 원근을 알고자하는 것은 후일에 용병(用兵)할 계획을 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들의 청에 의하여 보내는 것이니, 욕될 것이 없습니다.”하고,
경서(景敍)는 아뢰기를,
“일시동인(一視同仁)하는 것이 왕자의 정사요, 도로를 알아서 공격하려는 것은 어질지못한 일입니다. 옛부터 제왕은 오랑캐를 일로 삼지않았습니다. 또 그들의 종류가 매우 많은데, 어찌 사람마다 물건을 줄 수 있습니까? 오는 자는 후대하며 가는 자는 쫓지말고, 스스로 나의 변방[邊鄙]만을 굳건히 하는 것이 좋습니다.”하고,
극균이 아뢰기를,
“경서(景敍)는 한갓 문학만을 일삼아 변방의 사정을 알지못하기에, 그 말이 이 같습니다. 스스로 변방을 굳건히하고 오랑캐를 일삼지않는다는 것은, 경상(經常)의 말입니다. 그러나 나라일을 하자면 진실로 권의(權宜)의 행동도 해야하는 것이옵니다. 신이 지난날 변방에 있을 적에, 군사 한두 사람으로 농민 백여명을 수호했습니다. 어찌 한두 사람으로써 백여명의 군중을 수호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조정은 중국의 예와 달라서 군사가 매우 적은데, 어떻게 변방을 튼튼히 할 수 있습니까? 만약 경서의 말과 같다면, 간우(干羽)로 양계(兩階)에서 춤을 추고 문덕(文德)을 닦아서오게 하는 일을 지금 행할 수 있단 말입니까?”하고,
경서는 아뢰기를,
“논계(論啓)한 여러가지 일이 하나도 윤허를 받지 못하였사오니, 신등은 직책이 언책(言責)에 있으니만치 마음이 실로 통분하고 민망하옵니다”하니,
왕이 이르기를,
“아뢴 여러가지 일을 모두 들어줄 수는 없는 것이다. 청례(淸禮)를 보내는 일은, 변방의 일을 맡은 재상이 어찌 익히 생각지않고서 말했겠는가?”하였다. 자광이 아뢰기를,
“변방 일에 대하여는 마땅히 장신(將臣)의 말을 좇아야하옵니다.”하매,
경서가 아뢰기를,
“예로부터 개주(介胄)1671)한 장수는, 정벌(征伐)을 중하게 여기고, 진신(搢紳)의 선비는 화친을 고수하여 각기 소견을 고집하옵니다. 지금 만약 청례 를 보내고자하시면 아무쪼록 다시 수의하여 시행하도록 하옵소서. 또 자건(自建)의 일은 더욱 쾌히 좇아야 하오며, 이조의 관리들도 국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하였다.
註1671]개주(介胄): 무장을 말함
○丙午/御經筵, 講《綱目》《光武紀》, 特進官柳子光曰: “光武稱明見萬里之外, 而聽梁松譖, 遂疎馬援, 追奪新息侯印, 此小人甘言以誤之也。 古今帝王當聽言之時, 必審察然後, 能辨其是非矣。 至於觀書, 必尋繹帝王行事之跡, 思其治亂得失之所由。” 執義姜景叙曰: “吏曹官吏雖非臣等之啓, 固當命鞫。 弘文館與臺諫同, 豈可單擬乎? 大抵人主仁厚有餘, 剛斷不足則不可, 請夬斷。” 不聽。 更啓愼自建、韓訓、楊熙止、安處良事, 不答。 子光曰: “臺諫之言甚是。 非臺諫則王何鎰聞此言乎? 宰相雖欲啓之, 非其職事, 故未敢耳。 臺諫以處良爲茫昧。 若然, 則何可用也? 然臺諫果皆賢也, 則所言公矣。 間或有不賢之人, 則豈可一聽臺諫之言, 輕遞方面之任乎? 況處良曾經都承旨與副提學。 豈應茫昧之人, 授如此之職乎? 宜收議于左右, 皆曰不可, 然後斷之。” 王曰: “已議于大臣, 皆曰: ‘不可遽遞, 當下諭, 使自勉勵。’ 故不遞耳。” 景叙又啓: “童淸禮前年旣往還, 今何用更遣? 自古交通夷狄, 終必有患。” 王問左右, 特進官李克均曰: “前年淸禮之往, 野人數百來云: ‘國家遣使, 今復蘇矣。’ 淸禮語之曰: ‘汝宜縛賊來。’ 彼曰: ‘我等名雖酋長, 實無統屬, 何能縛致? 但於使臣之往, 當指賊人家。’ 遂出來迎命, 果指賊人家。 且云: ‘明年若更來, 則當導以搭。 然後可知我等情狀。’ 臣意以爲, 國家每當加討, 未諳道路, 如肓蛇走蘆田。 若備諳道路, 則何有如此乎? 且國家於對馬島, 多輸布穀以通好, 西方野人則不然。 今因彼人之請, 遣使則西方防戍之勞可省矣。 且已諭遣淸禮之意, 而還止則彼人之叛, 將如前矣。” 子光曰: “贈與之物甚少, 雖朋友間相贈, 豈宜如是?” 克均曰: “對馬島則至遣工人, 今者朝議牴牾, 故不得從優耳。 然丁亥年征討時, 臣初聞賊巢甚近, 及行軍, 登山失路, 臣獨與數騎, 下江邊得路然後, 率軍出來。 臣意, 欲知彼部落道路遠近者, 將爲後日用兵之計耳。 且今因彼之請而遣之, 未爲辱也。” 景叙曰: “一視同仁, 王者之政。 欲知道路而擊之, 不仁也。 自古帝王不事於外夷。 且彼類甚多, 豈可人人而贈物乎? 莫若來者厚待, 去者不追, 自固我邊鄙而已也。” 克均曰: “景叙徒事文學, 未諳邊鄙, 故其言如此。 自固邊鄙, 而不事於外, 乃經常之言, 然爲國固當爲權宜之擧。 臣曩在邊圉, 軍士一二人護守農民百餘, 豈可以一二人能護百餘之衆乎? 我朝非中國例, 軍士甚少, 何以固邊鄙乎? 若如景叙之言, 則舞干羽于兩階, 修文德以來之, 今可行之乎?” 景叙曰: “論啓累事, 一不蒙允。 臣等職在言責, 心實痛悶。” 王曰: “所啓數事, 皆不可聽。 遣淸禮事, 知邊事宰相豈不熟計而言之?” 子光曰: “邊事宜從將臣之言。” 景叙曰: “自古介冑之士, 重征伐; 縉紳之士, 守和(觀)〔親〕, 各執所見。 今若欲遣淸禮, 須更收議施行。 且自建事尤宜快從, 吏曹官吏亦不可不鞫。”
연산 25권, 3년(1497 정사/명홍치(弘治) 10년) 7월 15일(갑인) 1번째기사
경연에서 신자건, 양희지등의 일로 대간과 대신들이 논쟁하다
경연(經筵)에 납시었다. 사간 홍식(洪湜), 집의 강경서(姜景敍)가 양희지(楊熙止), 신자건(愼自建)의 일을 아뢰었는데, 경서는 아뢰기를,
“채윤공에게 글읽기를 시험하니, 전혀 이해를 못합니다. 어떻게 위임을 합니까? 박형무(朴衡武)는 죄가 탐오(貪汚)를 범하고 다행히 사면을 입었으나 10년동안 조용(調用)이 되지못했는데, 지금 갑자기 병조(兵曹)에 승진되었으니 어찌 사정이 없다고 하겠습니까? 청컨대 아울러 개정(改正)하소서”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홍식등이 다시 윤공을 논박하니, 왕이 좌우영사(領事)에게 물었다.
노사신(盧思愼)이 아뢰기를,
“온갖 집사(執事)를 문신(文臣)만 쓸 수는 없습니다. 무릇 사람의 재질이 각기 달라서 글을 잘하는 자는 혹 판결력이 짧습니다. 지금 허다한 수령들에게 만약 일일이 글을 강요받기로 한다면 통하지못하는 자가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신은 윤공(允恭)의 재간을 알지못하옵니다만, 그러나 그 사람의 자질이 아름다워서 수령이 될 만하옵니다.”하고,
특진관 이세좌(李世佐)는 아뢰기를,
“신이 경상감사(慶尙監司)가 되었을 적에 윤공(允恭)이 문경현감(聞慶縣監)으로 있었으나, 그 문자를 이해하지못하는 것은 신이 알지못하옵니다. 다만 포폄(褒貶)을 할 때에 폄(貶)은 되지않았으니, 진실로 상교(上敎)와 같이 한 번 등용하지않으면 끝에 가서는 반드시 폐기되고 말 것입니다.”하고,
경서(景敍)는 아뢰기를,
“윤공은 사신(思愼)의 집 담장밑에 살고 있습니다. 윤공이 벼슬을 한 것이 모두 사신의 힘이므로 사신은 말하지않아야 합니다.”하니,
사신이 아뢰기를,
“윤공이 비록 가까운 이웃에 살고 있으나 신의 힘이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대간의 논박이 이와 같으니 비록 소회가 있더라도 죄수처럼 한마디 말도 않겠습니다.”하였다.
홍식(洪湜)이 아뢰기를,
“윤공이 《대전(大典)》을 통하지못하는데, 사신의 말은 ‘문자는 이해하지 못하나 수령을 맡길 수 있다’하니, 이 말부터 큰 실언입니다.”하니,
사신은 아뢰기를,
“신이 어찌 사정이 있겠습니까? 문신(文臣)들도 백성을 잘 다스리지 못하는 자가 있기때문에 이같이 아뢴 것인데, 대간이 논박을 하니 이는 사람의 입을 함봉하려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도 신등에게 하문하실 필요도 없고 신등도 감히 다시 전하께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만약 이웃에 가까이 살지않는 재상만을 골라서 일을 의논하기로 하면 장차 누구하고 의논을 하겠는가? 대간들이라해서 어느 누가 가까운 이웃이 없겠는가?”하매,
사신은 아뢰기를,
“비록 신의 자식이라도 과연 그르다고 생각되면 아뢰겠습니다. 신이 어찌 사정을 두겠습니까?”하니,
왕이 이르기를,
“사람을 계속 폐기하고 쓰지않는 것은 불가하다.”하였다.
홍식은 아뢰기를,
“만약 다른 직책이라면 오히려 모르겠으나 전성(專城)의 소임은 더욱 불가합니다.”하고,
경서(景敍)는 아뢰기를,
“백성을 다스리는 것은 매우 중한 책임인데, 윤공(允恭)의 벼슬길을 어찌 헤아리겠습니까?”하니,
왕이 이르기를,
“백성은 참으로 소중하다. 그러나 남의 벼슬길을 폐하는 것도 역시 불가하다.”하였다.
검토관 이전(李㙉)이 아뢰기를,
“온갖 집사(執事)와 수령은 소임이 같지않으니 수령의 소임은 문자에 어둡지않은 자만이 능히 감내할 수 있습니다. 감사가 포폄(褒貶)한 것도 혹은 부서(簿書)의 보고[答報]와 주전(廚傳)1710)의 영송(迎送)으로써 등급을 정합니다. 그러니 누차 수령을 역임했다해서 다시 백성을 다스리게 하는 것은 불가합니다.”하니,
왕이 이르기를,
“대신과 더불어 일을 의논한 것을 가까운 이웃이라해서 논박하는 것이 옳으냐? 대간(臺諫)의 말도 옳은 것이 있고 그른 것이 있기때문에 임금은 독단하는 일이 있고, 대신과 더불어 상의해서 결단하는 것도 있다. 그러므로 좌우에게 고문을 하면 좌우도 또한 소회대로 대답하는 것인데, 대간이 그것을 논박하니 그 폐단이 역시 크다. 더구나 요사이는 대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곁에서 따라 말하는자가 있는데, 이것은 대체에 불가한 일이다”하였다.
특진관 유자광(柳子光)은 아뢰기를,
“지난날에 대간이 어세겸(魚世謙)을 가리켜 오고당상(午鼓堂上)이라 하고, 신승선(愼承善)은 죽반승(粥飯僧)이라 하고, 한치형(韓致亨)은 ‘자질은 아름다운데 배우지 못했다’했습니다. 그 일을 말한 것은 옳습니다만, 신의 의사로는 이러한 사람들을 대간이 그 과실을 모두 지적하여 논박하였으니, 만약에 그 논박에 따라서 체임(遞任)을 한다면 조정이 존엄하겠으나 굳이 체임하지않는다면 그 아전(衙前)과 요속(僚屬)들이 반드시 뒤따라 손가락질하기를 ‘아무개는 오고당상이요, 아무개는 죽반승이요, 아무개는 바탕은 아름답지만 배우지 못했다’할 것이니,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경홀히 여기는 버릇이 여기에서 일어날까걱정입니다. 임금은 의당 사람의 과실을 덮어주어야하옵고, 대간도 역시 마땅히 참작해서 논박해야 할 것입니다.”하고,
경서는 아뢰기를,
“예로부터 대신을 논박한 자가 하나만이 아닙니다. 대신이라 하더라도 만약에 과실이 있다면 어찌하여 말하지 않겠습니까? 대간을 억눌러서 대신을 논박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불가합니다.”하고,
자광은 아뢰기를,
“옛사람이 상방검(尙方劍)을 청해서 간사한 신하의 머리를 베려고 한 일이 있으니, 어찌 저지하고 억압하겠습니까? 그러나 사람이 누구라도 과실이 없겠습니까? 큰 과실이 아니면 의당 말하지않고 조정을 존중해야할 것입니다.”하고, 홍식은 아뢰기를,
“대신의 한 일이 다 잘했으면 대간이 무슨 말이 있겠습니까? 만약 과실이 있는데도 조정을 존중하려해서 말하지 않는다면 전하는 어떻게 대신의 시비를 듣겠습니까? 이는 전하로 하여금 간하는 것을 막아 대간이 감히 말을 못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전일에 3, 4명의 대신이 사정을 끼고서 의논을 드렸으니, 대신의 행위가 이 같은데도 대간은 조정을 존중하기위하여 말을 않겠습니까? 또 비록 오고당상(午鼓堂上)이라하더라도 잘 한 것이 많다면 체임하는 것은 불가합니다.”하고,
경서는 아뢰기를,
“오고당상이란 말이 오늘날에 사직된 것이 아니라 지난날 형조판서가 되었을 적에도 이러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겸(世謙)이 이치(吏治)에 능해서 송사를 직결하고 머물러두지 않았습니다.”하였다.
자광(子光)은 아뢰기를,
“대간이 한 말은 모두 들어주셔야 합니다. 신의 아뢴 바는 단지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경홀히 여기지를 못하게 하자는 것입니다.”하니,
왕이 이르기를,
“국가에서 대간을 둔 것은 임금의 과실을 다 말하게 하자는 것이다. 임금의 과실도 다 말해야 하는데 대신의 과실을 어찌하여 말하지 못하겠느냐?
그러나 이같이 작은 일을 모두 말한다는 것은 역시 불가하다. 그러나 어진 재상이라면 어찌 대간을 두려워해서 소회를 펴지못하겠느냐?”하였다.
자광은 아뢰기를,
“재상은 모름지기 어진 자를 선택하여 써야합니다. 광무제(光武帝)가 처음 봉선(封禪)1711)의 일을 듣고서 이내 말하기를 ‘뒤에 다시 봉선을 말하는 자가 있으면 죄를 가하리라’했는데, 2년도 채 못가서 도로 행했습니다. 당시에 만약 허무(許懋)같은 자가 재상이 되었다면 광무는 끝내 하지아니했을 것입니다. 무릇 재상의 건백(建白)이 만일 잘못된 바가 있다면, 대간이 어찌 논박하지 않겠습니까? 요사이 대간이 장시간 궐정(闕庭)에 서있는 것으로 보아 잘못된 일이 아마도 많은 듯합니다.”하고,
사신은 아뢰기를,
“무릇 수의를 하는 것은 가부를 서로 들어서 공론을 채택하자는 것이며, 의자(議者)의 의논드리는 것도 또한 각각 그 뜻을 말하는 것인데, 조금 대간의 뜻과 같지않으면 곧 논박하기를 ‘이것은 사(私)를 낀 것이다’하니, 이 폐단이 자라나서는 아니되고, 이 풍습을 바로잡지 않을 수 없습니다.”하니,
홍식은 아뢰기를,
“무릇 의논드리는데 있어서 그 말이 비록 다르더라도 모두가 공론이면 어찌 감히 논박하겠습니까? 지금 사신(思愼)은 사를 끼고 말씀드리면서 끝내 말하기를 ‘이 풍습이 커가서는 안된다’하니, 이는 전하로 하여금 대간의 말을 듣지못하게 하는 것입니다.”하고,
경서는 아뢰기를,
“국가에 이익이 되는 것은 공론이지만 국가에 이익되지않는 것은 모두 공론이 아닙니다. 어찌 논박하지 않겠습니까?”하였다.
사신이 아뢰기를,
“대간이 만일 모구가 공자(孔子)라면 그럴만하지만, 만약 공자가 아니라면 그 말을 다 따를 수 없습니다. 한 가지만 뜻에 합하지않으면 사를 끼었다말하니 이것이 옳습니까? 신은 늙었으니 죽을 날이 며칠 남지않았으나 이 풍습만은 바로잡지않을 수 없습니다. 또 선유(先儒)의 논(論)도 옛글을 보면 역시 같지않은 것이 많은데, 지금의 의논이 어찌 같을 수 있겠습니까? 자기 마음에 합당하지 않다하여 선뜻 사를 끼었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합니다”하니, 왕이 이르기를,
“대저 임금이 수의를 하는 것은 그 좋은 것을 취택하려는 것인데, 지금 대간이 일일이 논박하니, 그렇다면 단지 대간만으로 나라를 다스려야하느냐?”하매, 경서는 아뢰기를,
“삼공, 육경이 진실로 대간의 일을 행할 수 없으며, 대간도 역시 삼공, 육경의 일을 행할 수 없습니다. 각기 그 책임이 있으니 대간은 임금의 귀와 눈이므로 그 권세를 두려워하지않고 모두를 말하는 것은 바로 국가를 위한 것이며, 자신을 위해 꾀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종(成宗)께서 일찍이 대간을 추장(推奬)하여 그 말을 다 하게하셨으므로 대간도 또한 각기 기휘하지않고 할 말을 다 했는데, 지금 사신(思愼)의 아뢴 바가 이러하니 이는 대간으로 하여금 감히 말씀을 드리지 못하게하고 전하로 하여금 허물을 듣지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하니,
세좌(世佐)는 아뢰기를,
“사신의 아뢴 바는 다만 소회를 말했을 뿐, 대간이 말을 못하게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하였다.
자광은 아뢰기를,
“한기(韓琦), 부필(富弼)은 다 송조(宋朝)에 어진 정승입니다. 그러나 그 의논이 상반되어 다투어 변론하기를 마치 송사하듯 하였으니, 예로부터 건의(建議)하는 것이 어떻게 다 같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신등이 말한 것은 대간으로 하여금 말을 못하게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옛사람이 말하기를 ‘악은 숨기고 선(善)은 들춘다’하였고, 또 남의 과실은 말하지않는다고 하였으니, 이와 같은 세세한 일은 비록 대간이라하더라도 말할 것이 못됩니다”하니,
홍식은 아뢰기를,
“악을 숨기고 선을 들추는 것과 남의 과실은 말하지않는 것은 모두 대간을 두고 한 말이 아니니, 이 말은 잘못입니다.”하였다.
사신이 아뢰기를,
“옛 말에 이르되 ‘잘못을 들추어내는 것을 직(直)으로 삼는 자를 미워한다.’ 하였는데, 지금의 대간은 반드시 대신의 논의를 반박하기 때문에 비록 소회가 있더라도 감히 아뢰지는 못합니다. 이것은 잘못을 들추어내는 것을 직으로 삼은 것이니, 이 풍습을 어찌 자라나게 할 수 있겠습니까?”하니,
왕이 이르기를,
“비록 대간의 말이라도 취할 것이 있고 취하지않을 것이 있으며, 대신의 말에도 또한 그러한데, 지금 피차가 서로 시기하여 논쟁을 쉬지않으니, 이는 실로 내가 어질지못해서 능히 시정을 못하는 까닭이다. 이 말류(末流)의 폐단을 바로잡지 않을 수 없도다.”하였다.
경서는 아뢰기를,
“다만 상의 앞에서 그 옳고 그른 것을 논쟁할 따름인데 어찌 서로 시기한다 하겠습니까? 지금 자광(子光)의 아뢴 바와 같이 한기(韓琦), 부필(富弼)도 의논이 상반되어 말다툼하는 것이 마치 서로 송사하는 것같았으나, 저 한기 , 부필이 상의 앞에서는 논변을 이같이 하였지만 조회에서 물러나면 어찌 서로 친하지 않았겠습니까? 또 윤공(允恭)은 《대전(大典)》을 통하지못하는데 어떻게 일을 다스리겠습니까? 형무(衡武)의 탐독(貪瀆)이 이같고, 제포(薺浦) 는 더욱이 외국의 물산인데, 욕심을 제지할 수 있겠습니까?”하고,
특진관 허침(許琛)은 아뢰기를,
“제포(薺浦)는 바로 왜인(倭人)이 살고있는 땅이니 마땅히 어진 사람을 선택해서 맡겨야합니다. 신등이 전조(銓曹)1712)에 있을 적에 인선(人選)을 어렵게 여겨 널리 낭관(郞官)에게 물으니, 모두 말하기를 ‘형무(衡武)는 무재(武才)가 있고 또 일에 익숙하다’하므로, 차임(差任)에 의망(擬望)한 것이오며, 애초에 탐오(貪汚)한 줄을 몰랐습니다. 만약 실지로 탐오하다면 체직(遞職)하는 것이 당연합니다.”하고,
세좌(世佐)는 아뢰기를,
“형무(衡武)의 추안(推案)이 헌부(憲府)에 있으니 상고를 하면 알 수 있습니다.”하니,
왕이 이르기를,
“그것을 상고해서 아뢰도록 하라.”하였다.
경서가 또 윤공(允恭)을 논박하니, 왕이 이르기를,
“나는 듣건대 ‘성종조에 한 대간이 매양 수령의 위법된 일을 논하였는데 급기야 자신의 수령이 되어서는 탐오(貪汚)하여 도피해있다가 사면을 받고서 나왔다’고 한다. 그러니 배우고 안배운 것만 들어서 하나같이 논한다는 것은 불가하다.”하매,
자광(子光)은 아뢰기를,
“이는 최반(崔潘)이란 사람인데, 과연 김제군수(金堤郡守)가 되었다가 도피해 있었습니다.”하니,
경서는 아뢰기를,
“이 사람은 대간에서 군수가 되어 나간 것이 아니라 일찍이 김제군수로 재임시에 불법을 저질렀으며, 급기야 체임(遞任)되어 집의(執義)가 되었는데, 동료의 논박으로 인하여 도피해 있었습니다.”하였다.
전경(典經) 이자(李滋)가 아뢰기를,
“무릇 조정이 화목한 뒤에 국가가 잘 다스려지는 법인데, 신은 보니 근일에 대신과 대간이 상의 앞에서 서로 논쟁하기를 마치 서로 송사하듯이 하고 있으니 이 어찌 화목하는 도(道)라 하겠습니까? 원컨대 전하는 깊이 화목할 수 있는 길을 생각하소서. 또 대간이 바야흐로 탐오에 관한 일을 논하는데, 전하께서 대간의 탐오한 자를 들어 꺾어버리시니 신의 생각엔 전하께서 이 말씀은 자못 실수인 듯합니다. 전하께서 만약 대간을 의심하는 마음을 먼저 가지시면 어찌 들으시고 받아들일 리가 있겠습니까? 원컨대 겸허하신 마음으로 간언(諫言)을 받아들이소서.”하니, 왕은 대답하지 않았다.
註1710]주전(廚傳): 《한서(漢書)》선제기(宣帝記)에 ‘주전을 꾸며서 사객(使客)을 대우한다’하였는데 풍찬(豊饌)을 이름 註1711]봉선(封禪): 《대대례(大戴禮)》보부편(保傅篇)에, ‘태산(泰山)에 봉하고 양보(梁父)에 선(禪)한다’하고, 그 주에 ‘태산에 봉한다는 것은 태산의 상봉에 흙을 봉해서 단을 모은다는 말이요, 양보가 선한다는 것은 양보에 닦아 선(禪)을 만든다는 말이다’하였음. 《사기(史記)》에 봉선서(封禪書)가 있음 註1712]전조(銓曹): 이조, 병조의 별칭
○甲寅/御經筵。 司諫洪湜、執義姜景叙啓楊熙止、愼自建事, 景叙曰: “試蔡允恭書, 全不解理, 何可委任? 朴衡武罪犯貪汚, 幸蒙赦宥, 十年不調, 而今遽陞敍兵曹, 豈無情乎? 請竝改正。” 不聽。 湜等更論允恭, 王問于左右領事, 盧思愼曰: “百執事不可皆用文臣。 凡人才質各異, 其能文者, 或有短於剖決。 今許多守令, 若一一講書, 則不通者必多矣。 臣未知允恭之才幹, 然其人質美, 可爲守令也。” 特進官李世佐曰: “臣爲慶尙道監司時, 允恭爲聞慶縣監。 其不解文字, 則臣未之知, 但於褒貶時, 不至於貶, 誠如上敎。 一不用則終必廢棄矣。” 景叙曰: “允恭居思愼墻底, 允恭授職, 皆思愼之力, 思愼不當言。” 思愼曰: “允恭雖居近隣, 有何臣力? 臺諫駁之若此, 雖有所懷, 一無所言, 若囚奴然。” 湜曰: “允恭不通《大典》。 思愼云: ‘雖不解文, 可任守令。’ 此言大失。” 思愼曰: “臣豈有私情? 雖文臣有不能治民者, 故如此啓之。 臺諫駁之, 是欲箝人之口也。 殿下不須下問於臣等, 臣等不敢更言於殿下也。” 王曰: “若待無切隣宰相而後議事, 則將誰從而議之? 雖臺諫誰無切隣?” 思愼曰: “雖臣之子, 果爲非也則當啓之, 臣豈有私情乎?” 王曰: “人不可一廢而不用。” 湜曰: “若他職則猶之可也, 專城之任尤不可也。” 景叙曰: “治民重任, 允恭仕路, 何可計乎?” 王曰: “民固重矣。 廢人仕路, 亦不可也。” 檢討官李㙉曰: 百執事與守令之任不同, 守令之任非暗於文字者所能堪。 監司褒貶, 或因簿書答報, 廚傳迎送, 而等第之。 不可以累任守令, 而復使臨民也。” 王曰: “與大臣議事, 必以切隣駁之, 豈可乎? 臺諫之言, 有是有非, 而人君有獨斷之事, 亦有與大臣議, 而斷之者, 故顧問左右, 左右亦有以所懷對之。 臺諫從而駁之, 其弊亦大。 且近日臺諫之言, 答辭未竟, 又有從傍言之者, 其於大體不可?” 特進官柳子光曰: “頃者臺諫指魚世謙爲午鼓堂上, 愼承善爲粥飯僧, 韓致亨爲質美而未學。 其言事則是矣, 臣意以爲, 如此之人, 臺諫盡摘其過失而駁之, 若從其論而遞之, 則朝廷尊矣。 苟不遞之, 則其衙前僚屬必從其後, 而指之曰: ‘此則午鼓堂上也, 此則粥飯僧也, 此則質美而未學者也。’ 下之慢上 恐從此起。 人君固當掩人之過, 臺諫亦當斟酌而論之。” 景叙曰: “自古論大臣者非一, 雖大臣若有所失, 則何以不言哉? 不可沮抑臺諫, 使不得論大臣也。” 子光曰: “古人有請尙方劍, 欲斬侫臣者, 豈敢沮抑哉? 然人孰無過, 如非大過, 宜當不言, 以尊朝廷也。” 湜曰: 大臣所爲皆善, 則臺諫有何言? 若有過失, 欲尊朝廷而不言, 殿下何由得聞大臣之是非乎? 是欲使殿下拒諫, 而臺諫不敢言也。 前日有三四大臣挾私獻議, 大臣所爲如此, 臺諫欲尊朝廷, 而不言乎? 且雖曰: ‘午鼓堂上。’ 所善多則不可遞也。” 景叙曰: “午鼓堂上之言, 非始於今日, 曩爲刑曹判書時, 有是議也。 然世謙善吏治, 而決訟無留。” 子光曰: “臺諫所言, 固當盡聽。 臣之所啓, 只欲下不慢上耳。” 王曰: “國家置臺諫者, 欲盡言人君過失。 人君過失, 猶當盡言, 大臣之過, 何可不言乎? 然如此小事, 亦皆言之, 是則不可。 然賢宰相則豈畏臺諫, 而不能展布所懷乎?” 子光曰: “宰相須擇用賢者。 光武初聞封禪事, 乃曰: ‘後有言封禪者, 當加罪。’ 不二年行之。 當時若有如許懋者爲宰相, 則光武終不必爲也。 凡宰相建白, 若有所失, 則臺諫豈不從而駁之? 近者臺諫長立闕庭, 廢事恐多。” 思愼曰: “凡收議者, 欲可否相濟, 而採公論也。 議者之獻議, 亦各言其志耳。 若小不如臺諫之意, 卽論之曰: ‘此挾私也, 此弊不可長。 此風不可不矯。” 湜曰: “凡獻議, 而其辭雖異, 如皆公論, 則豈敢駁之? 今思愼挾私進言, 而乃曰: ‘此風不可長。’ 此欲殿下不聽臺諫之言也。” 景叙曰: “利於國者爲公論, 苟不利於國, 則皆非公論, 安得不駁哉?” 思愼曰: “臺諫若皆孔子則然矣, 若非孔子則其言不可從也。 一不合意則曰: ‘挾私可乎?’ 臣則老矣, 死亡無日, 此風不可不矯也。 且先儒之論, 古文亦多不同。 今之議論, 何可使之皆同乎? 不可以不合於心, 輒以爲挾私也。” 王曰: “大抵人君之收議, 欲取其善。 今臺諫一一駁之, 然則只與臺諫治國乎?” 景叙曰: “三公、六卿固不可行臺諫之事, 臺諫亦不可行公卿之事, 各有其任。 臺諫人主之耳目, 其不畏權勢而盡言者, 乃爲國家, 非爲身謀。 成宗嘗推奬臺諫, 使盡其言, 故爲臺諫者亦各盡言不諱。 今思愼所啓如此, 此欲臺諫不敢進言, 而殿下不得聞過擧也。” 世佐曰: “思愼所啓, 但言所懷, 非欲臺諫不言。” 子光曰: “韓琦、富弼皆宋朝賢相, 然其議論相反, 爭辨若交訟。 自古建議, 何可同也? 今臣等所言, 非欲臺諫不言, 但古人云: ‘隱惡揚善。’ 又云: ‘不言人過失。’ 如此瑣屑之事, 雖臺諫不宜言也。” 湜曰: “隱惡揚善, 不言人過失, 皆非臺諫之謂也。 此言誤矣。” 思愼曰: “古云: ‘惡訐以爲直。’ 今之臺諫必駁大臣之議, 故雖有所懷, 不敢以啓。 此以訐爲直者, 此風豈可長乎?” 王曰: “雖臺諫之言, 有可取、有不可取, 大臣之言亦然。 今彼此交猜, 爭論不息, 此實由予不賢, 不能正之之故也。 末流之弊, 不可不矯。” 景叙曰: “但在上前, 爭論其是非, 豈相猜忌哉? 今子光所啓: ‘韓琦、富弼議論相反, 爭辨若交訟。’ 彼韓琦、富弼雖在上前, 論辨如是, 其退朝豈不相親乎? 且允恭不通《大典》, 何以治事, 衡武之貪瀆如此, 而薺浦多異土所産, 其能制欲乎?” 特進官許琛曰: “薺浦乃倭人所居之地, 宜擇賢任之。 臣等在銓曹, 固難其人, 廣問郞官, 皆曰: ‘衡武有武才, 且諳練。’ 故擬差耳, 初不知貪汚也。 若實貪汚, 遞之爲當。” 世佐曰: “衡武推案在憲府, 若考之則可知。” 王曰: “其考啓。” 景叙又論允恭, 王曰: “予聞, 成宗朝有一臺諫, 每論守令不法事。 及爲守令, 以貪汚齋, 經赦乃出者。 不可以學不學, 一槪論也。” 子光曰: “此崔潘也。 果爲金堤郡守齋矣。” 景叙曰: “此非以臺諫出爲郡守, 曾任金堤時爲不法, 及遞任爲執義, 因同僚駁論齋矣。” 典經李滋曰: “大凡朝廷和睦然後, 國家治安。 臣觀, 近日大臣、臺諫在上前交相爭論, 若相訟然, 此豈和睦之道乎? 願殿下深思所以和睦之道。 且臺諫方論貪汚之事, 殿下擧臺諫貪汚者以折之, 臣意, 殿下殆失斯言矣。 殿下若有先疑臺諫之心, 則有何聽納之理? 請虛懷納諫。” 不答。
연산 25권, 3년(1497 정사/명홍치(弘治) 10년) 7월 17일(병진) 1번째기사
경연에서 강한 내용을 의논하다.
대간들이 사찰 건립의 일과 노사신의 일에 대해 논하다
왕이 경연에 납시어 《강목(綱目)》광무기(光武紀)를 강하게 했는데 ‘경리(經理)를 논하고 밤이 이슥해서야 잠을 잤다.’란 대문에 이르러,
시독관(侍讀官) 윤금손(尹金孫)은 아뢰기를,
“광무(光武)가 강론(講論)에 부지런함이 이와 같았습니다. 지금 일기도 서늘하오니 청컨대 전하는 날마다 경연에 납시소서.”하였다.
또 ‘내가 이를 스스로 즐기니 피곤하지 않도다.’라는 대문에 이르자,
왕이 좌우를 돌아보며 묻기를,
“광무의 말이 또한 착하지 않느냐?”하니,
영사(領事) 정문형(鄭文炯)은 아뢰기를,
“광무는 한가롭고 편안하게 지내지않고 성정(性情)을 기르며 정체(政體)를 신중히 여기므로, 전열(前烈)을 회복해서 몸소 태평을 이룩한 것입니다”하고, 참찬 송질(宋軼)은 아뢰기를,
“임금은 부지런해야할 것이 있으며, 부지런하지않아도 될 것이 있습니다. 진시황(秦始皇)의 형석정서(衡石程書)1718)나 수문제(隋文帝)의 위사전찬(衛士傳餐)1719)은 마땅히 부지런히 하지않아도 됩니다.”하였다.
또 동평왕(東平王) 유창(劉蒼)이 서조연(西曹椽)으로 있는 오량(吳良)을 천거하니 제(帝)가 말하기를 ‘어진 이를 천거하여 나라를 돕는 것은 재상의 직책이라’하는 대문에 이르자, 송질은 아뢰기를,
“광무의 이 말이 대단히 좋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천거하는 법은 있으나, 그러나 한 재상도 어진이를 천거한 자가 없으니 신은 그 연유를 알지 못합니다. 선조(先朝) 때에 홍응(洪應)이 일찍이 한 선비를 천거하니 성종께서 즉시 수용해서 당상관(堂上官)의 품계(品階)까지 제수했습니다.”하고,
특진관 박숭질(朴崇質)은 아뢰기를,
“임금이 잘 알 수없기 때문에 반드시 추천으로 인해서 등용하는데, 요사이는 재상이 천거한바 있으면 논박이 뒤따르니, 이 때문에 추천이 되지못합니다.”하니, 왕이 이르기를,
“과연 대간의 논박으로 인하여 그 소회를 전달하지 못하는 것이다.”하였다. 지평 노언방(盧彦邦)은 아뢰기를,
“대간의 직책이 비록 언사(言事)에 있다하지만, 전조(銓曹)가 만약 어진 자를 천거한다면 어찌 논박하겠습니까? 하지만 채윤공은 문리를 이해하지못하는데 어떻게 전성(專城)의 책임을 맡기겠으며, 사신(思愼)은 대신으로서 그 이웃 사람을 비호하기위하여 대간에게 허물을 돌리는데, 더구나 그 어진 자를 천거하기 바라겠습니까? 신은 못내 마음이 쓰라립니다.”하고,
특진관 이육(李陸)은 아뢰기를,
“그 문자를 이해못하는 것은 신이 알지못합니다. 신이 경상감사로 있을 적에 윤공이 문경현감(聞慶縣監)이 되었었는데 그렇게 미욱하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러나 이는 녹록한 사람이고, 유순정(柳順汀)같은 자는 문무(文武)가 겸전하니 참으로 등용할 만합니다.”하고,
숭질은 아뢰기를,
“조정의 의논은 모두가 순정이 나이가 늙으면 국가에서 앞으로 크게 쓰지 못할까 염려하고 있습니다.”하고,
문형(文炯)은 아뢰기를,
“문종조(文宗朝)에 구치관(具致寬)은 나이 46세에 병조의 낭관(郞官)이 되었습니다. 한 정승이 천거하자 문종께서는 즉시 4품의 직을 제수하셨으니 이로부터 마침내 크게 쓰였던 것입니다. 옛날에는 이러했는데 지금은 사람을 천거하지않는 것은 바로 사람들의 말이 두려워서입니다.”하고,
정언 조순(趙舜)은 아뢰기를,
“윤공이 문리(文理)를 해독하지 못하는데 대해서 사신은 시정하기를 청하지 않을 뿐아니라, 또 따라서 변명까지 해서 임금의 과실을 그대로 굳히게 했으니, 청컨대 지금부터는 경연(經筵)에 입시하지 말도록 하소서.”하니,
왕이 이르기를,
“사신은 대간으로 하여금 언사(言事)를 못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윤공이 비록 문자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수령이 될 만하므로 나의 고문(顧問)에 답한 것이다.”하였다.
조순은 아뢰기를,
“사신이 임금에게 간하는 말을 잘 받아들이도록 인도하지못하고 도리어 대간을 저지하였으니 어찌 경연에 입시할 수 있습니까?”하고,
전경(典經) 성중엄(成重淹)은 아뢰기를,
“전일에 대간이 사신을 논박하니, 사신이 유자광과 아뢰기를 ‘이 풍습은 빨리 고쳐져야합니다’했습니다. 자광이야 족히 헤아릴 것도 없지만 사신은 대신으로서 그 말이 이 같으니 어떻게 좌우에 두고, 나의 고문에 답한다하겠습니까? 더구나 전일 전교에 이르시기를 ‘선릉(宣陵)에 절을 짓는 것은 새로 창설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예전대로 수리하는 것이다’하셨는데, 지금 새 절을 짓는 것은 어떻게 된 일입니까?”하고,
문형(文炯)은 아뢰기를,
“비록 옛 절을 그대로 둔다해도 부족할 것이 없습니다. 건원릉(健元陵)의 개경사(開慶寺)도 매우 협소합니다.”하고,
이육은 아뢰기를,
“헌릉(憲陵)에 절을 세우지않은 것은 태종(太宗)께서 불교를 좋아하지않았기 때문입니다.”하니,
왕이 이르기를,
“절이 있어도 참으로 유익할 것은 없다. 그러나 대비(大妃)께서 사사로이 창설하시는 것이고, 국가에서 세우는 것은 아니다.”하였다.
윤금손은 아뢰기를,
“만약 이치에 합당하지않다면 비록 성종의 유교(遺敎)라 할지라도 따라서는 안되옵니다. 더구나 성종께서 본시 불교를 좋아하지않았는데, 지금 절을 세우시면 성종의 하늘에 계신 영혼이 어찌 언짢게 여기시지 않겠습니까? 비록 대비께서 하시는 것일지라도 전하께서 만약 불가한 점을 말씀드린다면 대비께서 어찌 응종하지 않겠습니까? 또 사신의 아뢴 바에, ‘이 풍습은 빨리 고쳐져야한다’는 말은 과연 조정을 경멸해서 기탄한 바가 없는 말입니다. 또 근일에 복선(復膳)1720)에 대한 전례를 상고하라 명하셨는데, 무릇 천변(天變)에 응하는 것은 반드시 성실한 마음으로 해야합니다. 마음이 만약 성실하지못하오면 비록 정전(正殿)을 길이 피한다해도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진실로 전례를 상고하고 날 수를 계산해서 구차스럽게 행할 일은 아닙니다.”하고, 조순은 아뢰기를,
“보통 사람이 재궁(齋宮)을 세우는 것은 수호하기 위함입니다만 능침(陵寢)은 이미 수호군(守護軍)이 있는데 무엇하러 절을 세웁니까? 예로써 죽은 이를 섬기는 것이 임금의 효도이고, 예로서 아니하면 효도가 아닙니다. 더구나 옛 절이 퇴락할 지경은 아닌데 무엇하러 새로 창설을 하십니까?”하니,
왕이 이르기를,
“옛절은 능과 너무 가깝기때문에 새로 지어서 멀게 하자는 것이다”하매,
중엄(仲淹)은 아뢰기를,
“만약 능(陵)에 가까운 것이 싫다면 철거해야합니다. 어찌 꼭 고쳐지으려 하십니까? 요사이 전하께서 전일의 실수를 고치셨는데, 다시 과실을 지으시니 그 과하신 처사가 어느 때에 그치겠습니까?”하니,
왕이 이르기를,
“비록 과한 처사라 하지만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다.”하였다.
금손(金孫)은 아뢰기를,
“헌릉(獻陵)에 절을 세우지않은 것은, 태종께서 불교를 숭상하시지않았기 때문이라고 사람들은 압니다. 지금 선릉(宣陵)에 절을 세우면 사람들이 장차 성종께서 불교를 필시 좋아하신 모양이라고 말할 것입니다.”하고,
언방(彦邦)은 아뢰기를,
“전일에 왕께서 하교하시기를 ‘대간이 장시간 대궐뜰에 있는 것은 불가하다’ 하셨습니다. 요사이 박형무(朴衡武), 양희지(楊熙止), 신자건(愼自建)의 일을 논하여 윤허를 받지 못했으므로 장시간 대궐 뜰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하고, 기사관 신세련(辛世璉)은 아뢰기를,
“옛사람이 이르되 ‘부인은 전제(專制)하는 의(義)는 없고 삼종(三從)의 도(道)가 있다’하였으니 전하께서는 마땅히 자주 청하시고 세 번 간하되 듣지않으시면 부르짖으며 따라다니는 것이 옳습니다. 성종께서 불교를 좋아하지않은 까닭으로 공혜왕후(恭惠王后)의 능에도 사찰을 짓지않았는데, 지금 성종을 위하여 능곁에 절을 지어 아침저녁 종을 울리고 북을 치는 것이 이 어찌 성종을 섬기는 효도이겠습니까?”하니,
왕이 이르기를,
“규문(閨門)안에서 만약 부덕한 일이 있으면 부르짖어 울며 따라다니는 것이 가하다하지만, 절을 짓는 것이야 무슨 누(累)될 것이 있겠느냐?”하였다.
조순은 아뢰기를,
“이 일은 비단 대비만이 누가 되는 것이 아니오라, 장차 성종의 성덕에도 누가 될 것입니다.”하니,
왕이 이르기를,
“성종께서 평소에 불교를 숭상하지않았던 교서가 역사책에 소상히 나타나 있는데 후인이 누가 불교를 숭상하셨다하겠느냐?”하였다.
이육은 아뢰기를,
“만약 불교를 좋아하는 세대라면 저 조그만한 절 하나쯤 짓는 것을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기지않을 것이지만, 오늘날 이 거조가 있기때문에 대간이 실덕(失德)으로 여겨서 아뢴 것입니다. 또 전하께서 ‘그 공력과 비용이 모두 내수사(內需司)에서 나오므로 국가와는 관계가 없다.’여기시지만 내수사의 물건도 우리 백성의 힘에서 나오지않은 것이 없습니다.”하니,
왕이 이르기를,
“내수사는 사사의 비축으로서 전내(殿內)의 비용으로 제공되는 것이다. 만약 사섬시(司贍寺)에서 제용(濟用)할 물건을 쓴다면 불가하다.”하였다.
조순은 아뢰기를,
“공력과 비용은 우선 그만 두더라도 그 의(義)는 어찌합니까?”하니,
왕이 이르기를,
“다시 대비께 청하겠노라.”하였다.
조순은 아뢰기를,
“사사전(寺社田)은 청컨대 감사(監司)의 아뢴 바에 의하여 학전(學田)으로 충당해 주옵소서.”하니,
왕은 이르기를,
“학조(學祖)의 밭은 성종조부터 이미 그렇게 된 것이다. 성종께서 불교를 좋아하지않았는데도 오히려 이같이 하셨는데, 지금 만약 빼앗는다면 앞으로 중들의 토지는 다 빼앗을 작정이냐?”하였다.
조순은 아뢰기를,
“학조의 밭은 지금 이미 현저하게 드러났기 때문에 청한 것입니다. 어찌 중들의 밭이라해서 다 공전에 속할 수 있겠습니까?”하니,
왕은 이르기를,
“만약 민전(民田)이나 학전(學田)을 빼앗아 중들에게 준다면 참으로 불가한 일이다. 그러나 이는 본래가 승전(僧田)인데 줘도 무슨 해가 되겠는가?”하매, 조순은 아뢰기를,
“이것은 본시 신미(信眉)의 밭인데 학조에 전해졌으니, 학조가 죽더라도 뒤에는 반드시 중에게 전할 것입니다. 또 사신(思愼)이 전일 대간(臺諫)이 구금당함을 보고 기뻐서 치하했는데 지금 또 이와 같으니 이는 나라를 그르치는 사람입니다. 청컨대 법사(法司)에 회부하여 국문한 다음 죄를 주소서.”하니, 왕이 이르기를,
“이미 지나간 일을 어찌해서 추론(推論)하느냐?”하였다.
조순은 아뢰기를,
“추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용심(用心)이 그릇됨을 말하는 것입니다.”하니,
왕이 이르기를,
“무릇 사람의 말이란 옳은 것도 있고 그른 것도 있으니, 당연히 그 옳은 것을 취하고 그 그른 것은 버려야 한다.”하였다.
조순은 아뢰기를,
“상의 하교가 지당하옵니다. 그러나 주심(誅心)의 법으로써 따지자면 대신이 국가를 보좌함에 있어 이와 같이 한다는 것은 부당합니다. 사신이 이미 전하를 그릇되게 인도하였는데, 어찌 대신이라해서 용서할 수 있습니까?
사신의 의도는 전하로 하여금 대간의 말을 듣지못하게 하자는 것이니, 이는 간신(奸臣)입니다.”하니,
왕은 이르기를,
“나로 하여금 간하는 말을 듣지못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경서(景敍)가 사신에게 이웃 사람을 비호했다하니까, 마침내 자기 뜻을 말한 것인데 어찌 간신이라 이르겠느냐?”하였다.
조순은 다시 사전(私田)과 윤공(允恭)등 여러 가지 일로서 굳이 청하기를 마지않으니, 왕은 ‘앞에 내린 교서에 다 말하지 않았으냐?’했다. 조순은 강경히 논하고 땅에 엎드려 오래 나가지않았으나, 왕은 끝내 답하지 않았다.
註1718]형석정서(衡石程書): 《예기(禮記)》월령(月令)에, ‘형석(衡石)을 고른다’하였음. 형(衡)은 저울대요, 석(石)은 1백20근의 무게를 말함인데, 진시황기(秦始皇紀)에 ‘천하의 일이 대소를 막론하고 다 상(上)에게서 결제되므로 상(上)은 심지어 형석(衡石)으로 서류를 담아서 결제한 서류가 그 근수에 해당되지아니하면 휴식하지 못했다’하였음.註1719]위사전찬(衛士傳餐): 찬(餐)은 소식(小食)인데, 위병(衛兵)이 전달했다는 뜻임 註1720]복선(復膳): 평상시에 진상하는 수라와 같이 한다는 뜻임. 대개 임금이 천변지이(天變地異)를 만나면 공구수성하기 위하여 감선(減膳)하는 전례가 있음.
○丙辰/御經筵。 講《綱目》光武紀, 至論經理, 夜分乃寢, 侍讀官尹金孫曰: “光武之勤於講論如是。 今日候淒涼, 願殿下日御經筵。” 又至我自樂此, 不爲疲也, 王顧問左右曰: “光武之言, 不亦善乎?” 領事鄭文炯曰: “光武不敢優游自寧, 頣養性情, 而明愼政體, 故能恢復前烈, 身致太平。” 參贊官宋軼曰: “人主有所當勤, 有所不當勤。 如秦始皇衡石程書, 隋文帝衛士傳餐, 此所不當勤也。” 又至東平王蒼薦西曹椽吳良, 帝曰: “薦賢助國, 宰相之職也。” 軼曰: “光武此言善矣。 我國亦有薦擧之法, 然無一宰相薦賢者, 臣未知其由。 先朝洪應嘗薦一士, 成宗卽收用, 至授堂上階。” 特進官朴崇質曰: “人主不能知之, 必因薦擧而用之。 近者宰相偶有所薦, 論駁隨之。 以此不得耳。” 王曰: “果因臺駁, 不得達其所懷。” 持平盧彦邦曰: “臺諫雖職在言事, 銓曹若薦賢者, 則豈得論之乎? 如蔡允恭不解文理, 何可委以專城之任? 思愼以大臣, 欲庇其隣, 反咎臺諫, 況望其薦賢乎? 臣不勝痛心。” 特進官李陸曰: “其不解文, 則臣不得知。 臣爲慶尙監司時, 允恭爲聞慶縣監。 不甚迷劣, 然此乃碌碌人也。 如柳順汀, 文武全才, 眞可用也。” 崇質曰: “朝議咸恐順汀年老, 則國家將不及大用。” 文炯曰: “文宗朝具致寬年四十六, 猶爲兵曹郞官。 有一政丞薦之, 文宗卽授四品職, 從此遂大用。 古則如是, 今無薦人者, 乃畏人言耳。” 正言趙舜曰: “允恭不解文理, 思愼非徒不請改, 又從而爲之辭, 遂君過擧。 請今後勿令入侍經筵。” 王曰: “思愼非欲使臺諫不得言事, 允恭雖不解文, 猶可爲守令, 故因予顧問言之耳。” 舜曰: “思愼不導君納諫, 而反沮臺諫, 豈可入侍經筵乎?” 典經成仲淹曰: “前日臺諫論思愼, 思愼與子光啓曰: “此風宜亟正之。’ 子光不足數, 思愼以大臣, 其言如此, 何用置之左右, 以備顧問乎? 且前日敎云: ‘宣陵創寺, 非新創, 只仍舊修之。’ 今創新寺何也?” 文炯曰: “雖仍舊寺, 非不足也。 健元陵開慶寺亦甚小。” 陸曰: “獻陵不建寺者, 以太宗不好佛也。” 王曰: “雖有寺, 固無益矣。 然大妃私創, 非國家所建也。” 金孫曰: “如非當理, 雖成宗遺敎不可從, 況成宗素不好佛, 今爲之建寺, 成宗在天之靈, 寧不憾乎? 雖大妃所爲, 殿下若陳其不可, 則大妃其不從乎?, 且思愼所啓此風宜亟正之之言, 果蔑朝廷, 而無所忌憚也。 又近日, 命考復膳前例。 凡應天變, 必以誠心。 心若不誠, 則雖長避正殿, 有何益乎? 固非考前例, 計日數苟爲之事也。” 舜曰: “常人之所以建齋宮者, 爲守護也。 陵寢旣有守護軍, 何用建寺? 以禮事亡, 人君之孝, 不以禮則非孝也。 且舊寺不至頹圮, 何用新創?” 王曰: “舊寺近陵, 故欲新而遠之耳。” 重淹曰: “若惡其近陵, 所當撤去, 何必改創? 近日殿下纔改前失, 復有後過, 過擧何時而止也?” 王曰: “雖曰過擧, 非吾所爲。” 金孫曰: “獻陵不建寺, 人皆知太宗之不崇佛。 今於宣陵建寺, 人將謂成宗必好佛。” 彦邦曰: “前日王敎以臺諫長在闕庭爲不可。 近日論朴衡武、楊熙止、愼自建事, 未蒙兪允, 此所以長在闕庭也。” 記事官辛世璉曰: “古人云: ‘婦人無專制之義, 有三從之道。’ 殿下宜亟請至於三諫而不聽, 號泣而隨之可也。 成宗不好佛, 故恭惠王后之陵, 不作寺社。 今爲成宗, 作寺陵側, 朝夕撞鍾擊鼓, 此豈事成宗之孝乎?” 王曰: “閨門之內, 若有不德, 則號泣而隨之可也。 創寺有何累也?” 舜曰: “此非徒累大妃, 將累成宗之德。” 王曰: “成宗平日不崇佛之敎, 昭著史冊。 後人誰以爲崇佛乎?” 陸曰: “若好佛之世, 則創彼小寺, 人不爲異。 今有是擧, 故臺諫以爲失德而啓之。 且殿下以爲: ‘其功費, 皆出於內需司, 非關國家。’ 內需司之物, 無非出於我民之力矣。” 王曰: “內需司私蓄, 而以供內用。 若用司贍、濟用之物不可矣。” 舜曰: “功費則姑置勿論, 於義何?” 王曰: “當更請于大妃。” 舜曰: “寺社田請依監司所啓, 充給學田。” 王曰: “學祖之田, 自成宗朝已然。 成宗不好佛, 而尙如此。 今若奪之, 則亦將盡奪僧人田乎?” 舜曰: “學祖之田, 今已現露, 故請之。 凡僧人之田, 盡可屬公。” 王曰: “若奪民田、學田給僧人, 則固不可矣。 此本僧田, 與之何害?” 舜曰: “此本信眉之田, 而傳于學祖。 學祖雖死, 後必傳之於僧耳。 且思愼前見臺諫被囚而喜賀, 今又如是, 此誤國之人也。 請下法司, 鞫而罪之。” 王曰: “旣往之事何可追論?” 舜曰: “非欲追論, 乃言其用心之誤也。” 王曰:“凡人之言, 有是有非, 當取其是, 而捨其非。” 舜曰: “上敎允當。 然以誅心之法論之, 大臣輔國不當如是。 思愼旣誤殿下, 何可以大臣, 而容恕乎? 思愼之意, 正欲殿下不聽臺諫之言, 此奸臣也。” 王曰: “非欲使予不聽諫言, 景叙謂: ‘思愼庇護隣近。’ 故乃言其志耳, 何可謂之奸臣?” 舜更以私田、允恭等數事, 固請不已, 王曰: “前敎已悉。” 舜强論伏地, 久而不出, 王竟不答。
연산 25권, 3년(1497 정사/명홍치(弘治) 10년) 7월 26일 을축 1번째기사
경연에서 강한 내용을 의논하다.
집의 강경서가 조순의 일에 대해 논하니 이에 대해 하교하다
경연에 납시어 《강목(綱目)》을 강했는데, ‘한명제(漢明帝)가 마씨(馬氏)를 세워 황후(皇后)를 삼았다.’라는 대문에 이르자, 왕이 묻기를,
“안의 사삿일로 정사에 간예(干預)함이 없는 것이 바로 황후의 일인가?”하니, 영사(領事) 정문형(鄭文亨)이 아뢰기를,
“그러하옵니다.”하고,
시강관 장순손(張順孫)은 아뢰기를,
“이는 황후의 어진 일입니다. 대저 임금은 마땅히 그 내외를 엄격히해서 여알(女謁)을 끊어야 하옵니다.”하고,
지사 홍귀달(洪貴達)은 아뢰기를,
“운대(雲臺) 공신(功臣)에 마원(馬援)을 초방(椒房)의 친척이라해서 참예시키지 않았으니, 이는 명제(明帝)의 과실입니다. 그러므로 선유(先儒)들이 많이 그르게 여겼습니다.”하고,
손순은 아뢰기를,
“선유(先儒)의 논설이 혹은 이러합니다만, 초방(椒房)을 대우하는 도리는 이것이 잘한 처사입니다.”하고,
집의 강경서(姜景敍)는 아뢰기를,
“조순(趙舜)의 말이 비록 과격한 것같으나, 사신의 말이 ‘대간이 만약 공자(孔子)가 아니라면 그 말이 족히 들을 것이 없다’하였으니, 공자의 뒤에 어찌 다시 공자가 있으리까? 이는 전하로 하여금 대간의 말을 들으시지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전일 경연에서 강하는데 ‘동선(董宣)이 공주(公主)의 어거노(御車奴)1730)를 때려죽이니, 광무제(光武帝)가 처음에는 죄를 주려고하다가, 도리어 금백(金帛)을 내려주었다’는 대문에 이르러, 전하께서 이르시기를 ‘광무가 처음에 죄주려고 한 것은 잘못이다’하셨으니, 전하의 이 말씀이 참으로 간신(諫臣)을 대우하는 도리를 체득하신 것입니다. 옛날에 순(舜)임금은 자기 고집을 버리고 사람들의 의견에 따랐으며, 우(禹)임금은 좋은 말을 들으면 절을 했으며, 탕(湯)임금은 간언(諫言)을 들어 거스르지 않았으니, 간언받아들이기를 꼭 이같이 해야 합니다.
신하들이 녹(祿)을 유지하고 몸을 용납하려는 자는 많지만, 적심(赤心)으로 나라를 보좌하려는 자는 적습니다. 지금 조순의 말한 바는 다만 전하의 관용만을 믿고 한 것이니, 이는 성종께서 곧은 기운을 배양(培養)하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만약 죄를 주신다면 곧은 말을 하는 기운이 저상되어 국가의 복이 되지않을까 걱정되옵니다.”하니,
왕이 이르기를,
“내가 직신(直臣)의 기운을 저상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사신의 말이 크게 관계되는 일이 아니다. 비록 ‘대간의 말이라도 이 풍습을 불가불 시정되어야 한다’고 말했다하더라도, 내가 어찌 그 말에 따라 시정하겠느냐? 대간 역시 그 말을 두려워하여 감히 할 말을 못하겠느냐? 재상의 지위는 하루아침에 갑자기 올라간 것이 아니고 조종조(祖宗朝)를 내리 섬기어 높은 자리에까지 오르게된 것인데, 어찌 말 한 마디 잘못했다해서, ‘그 살을 씹어먹고 싶다’고까지 할 수 있느냐? 만약 대간이라하여 관용만 한다면, 끝내는 대간만이 말을 하고 대신은 거부할 수 없게 될 것이니, 장차 나랏일은 날로 그릇될 것이며, 또 사람마다 말하기를, ‘내가 대간이 되었으니, 대신의 일을 비록 심하게 말하더라도 해가 없다’한다면, 마침내는 반드시 구원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고 말 것이다.”하였다.
註1730]어거로(御車奴): 수레 굴리는 종
○乙丑/御經筵。 〔講〕《綱目》至‘漢明帝立馬氏爲皇后’, 王問曰: “無以家私干政事者, 乃皇后之事乎?” 領事鄭文炯曰: “然。” 侍講官張順孫曰: “此皇后之賢也。 大抵人君固當嚴其內外, 以絶女謁也。” 知事洪貴達曰: “雲臺功臣, 馬援以椒房之親不與, 此明帝之失也。 故先儒多以爲非。” 順孫曰: “先儒之論, 雖或如此, 待椒房之道, 此其善處也。” 執義姜景叙曰: “趙舜之言, 雖似過當, 思愼云: ‘臺諫若非孔子, 則其言不足聽也。’ 孔子之後, 豈復有孔子乎? 是欲殿下不聽臺諫之言也。 前日經筵講至董宣杖殺公主御車奴, 光武初欲罪之, 反賜金帛。 殿下云: “光武初欲罪之者非也。’ 殿下此言, 眞得待諫臣之道也。 在昔舜則舍己從人, 禹則拜昌言, 湯則從諫弗咈。 從諫之道, 固當如是也。 人臣持祿容身者多, 赤心輔國者少。 今舜之所言, 只恃殿下之優容, 是成宗培養直氣之所致。 今若罪之, 則恐直言之氣沮喪, 而非邦家之福也。” 王曰: “予非使直臣之氣沮喪也, 思愼之言非大關之事, 雖云 ‘臺諫之言, 此風不可不矯。’ 予豈從而矯之乎? 臺諫亦豈畏其言, 而不敢盡言乎? 宰相之位, 非一朝驟陞。 歷事祖宗朝, 以至高位, 豈可以一言之失, 至於欲食其肉乎? 若以臺諫而優容, 終使臺諫獨言, 而大臣無所可否, 則國事將日非矣。 且人人皆曰: ‘我爲臺諫也, 雖極言大臣之事無害, 則終必至於不可救矣。”
연산 26권, 3년(1497 정사/명홍치(弘治) 10년) 8월 4일 계유 1번째기사
집의 강경서등이 노사신과 유자광의 일, 도첩제 혁파의 일등에 대해 논하다
왕이 경연에 납시어 강을 하였다.
동평왕(東平王) 창(蒼)의 말이 ‘착한 일을 하는 것이 가장 즐겁다.’라는 대목에 이르니, 시강관(侍講官) 이과(李顆)는 아뢰기를,
“누군들 착한 일을 하고싶지않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물욕이 가려서 그 착한 일을 하겠다는 마음을 이루지못합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군자에게 미칠 수없는 점은 사람이 보지않을 때다’고 하였으니, 임금이 구중궁궐에 깊숙이 계실지라도 사람이 알지못하는 곳이라 여기지말고 힘쓰셔야합니다”하고, 집의(執義) 강경서(姜景敍)는 아뢰기를,
“노사신(盧思愼)이 경연(經筵)의 영사(領事)에 합당치가 않으니, 청컨대 체임하옵소서. 그리고 유자광(柳子光)도 전일에 붕당(朋黨)을 맺어 정사를 어지럽힌 문제로 죄를 입었으니, 청컨대 특진관(特進官)을 체임하소서.”하고,
정언(正言) 홍윤덕(洪潤德)이 또한 사신을 논박하였으나 모두 좇지 않으니, 경서(景敍)가 아뢰기를,
“경연관은 임금의 덕을 돕고 기르는 것이므로 비인(匪人)이 섞여서는 안됩니다. 청컨대 사신을 교체하옵소서. 또 대간은 알면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록 부월(斧鉞)이 앞에 있고 정확(鼎鑊)이 뒤에 있을지라도 오히려 피하지 않아야 합니다. 만약에 대간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내가 공자가 아닌데 어떻게 사람의 과실을 말할 수 있으랴?’하고, 전하께서 또한 ‘대간이 공자가 아니니 그 말을 들을 수 없다’하신다면 언로(言路)는 막히고 말 것입니다.”하고, 이과(李顆)는 아뢰기를,
“만약 ‘대간이 공자가 아니니 그 말을 들을 수 없다’한다면 이는 나라를 망치는 말입니다. 대신이 논박을 입었으면 당연히 합문(閤門)에서 대죄(待罪)를 해야하는데, 임금 앞에서 도리어 대간을 휘어잡아 욕하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대저 인신(人臣)은 몸을 아끼는 자가 많고 바른 말하는 자가 적은데, 이렇게 한다면 누가 말을 다 하리까? 대간의 말이란 옳으면 받아들이고 옳지 않으면 쓰지않는 것이 가합니다. 옛사람은 추요(芻蕘)의 말이라도 꼭 들었사온데, 요사이는 대간의 말을 비단 듣지않을 뿐아니라, 또 따라서 죄까지 주시니, 신은 앞으로 대간을 죽이는 일까지 있지나않을까 걱정이 됩니다”하고, 설경(說經) 이자(李滋)는 아뢰기를,
“말의 바른 것을 꼭 배척한다면 언로가 반드시 막히고 말 것입니다”하고,
이과는 아뢰기를,
“옛 말에 이르되 ‘임금이 밝으면 신하가 바르다’했습니다만, 그러나 인신(人臣)이 백가지 말을 품었다하더라도 뇌정(雷霆)1759)같은 위엄을 내리게 되면 10가지에서 반은 상실하고 맙니다. 전하께서 만약 관용하지 않으시면 누가 능히 말을 다 하리까?”하고,
홍윤덕(洪潤德)은 아뢰기를,
“옛날 당현종(唐玄宗)때에 두진(杜進)이 언사(言事)로써 배척을 당하였고, 대신(大臣)이 또한 장마(仗馬)를 비유해서 대간을 협제(脅制)하니, 이로부터 언로(言路)가 막혀 마침내 천보(天寶)의 난리를 이루었던 것입니다.”하고,
경서(景敍)는 아뢰기를,
“대신이 죄가 있는데도 전하께서 징계를 안하므로 조순(趙舜)이 분통이 터져 천청(天聽)을 돌이키려한 것입니다. 그 본심에 어찌 다른 것이 있으리까?
대범 인신(人臣)이 처자(妻子)를 사랑하는 자는 많아도 그 직책을 위해 죽는 자는 적습니다. 청컨대 용서하여 주옵소서.”하고,
특진관(特進官) 안침(安琛)은 아뢰기를,
“당연히 조순(趙舜)을 복직시키셔야 합니다.”하니,
왕이 이르기를,
“복직시키는 일은 위에 있으니, 아래서 말할 것이 아니다.”하였다.
경서는 아뢰기를,
“옛날 유의(劉毅)가 무제(武帝)에게 말하기를 ‘환영(桓靈)1760)의 벼슬판 돈은 관부(官府)에 들어갔는데, 폐하의 벼슬판 돈은 사고(私庫)로 들어가니, 폐하는 도리어 환제, 영제만도 못합니다’하였으나, 무제는 성내지 않았습니다. 조순의 말도 당연히 용서해야합니다. 또 양희지(楊熙止)는 직을 파하자는 것이 아니라 경연관을 교체하자는 것입니다.”하고,
영사 정문형(鄭文炯)은 아뢰기를,
“그 당시에 입시(入侍)한 재상들은 대부분 희지의 말이 그렇지 않다고 이릅니다.”하니,
왕이 이르기를,
“희지는 하늘에 순응하는 것을 진실로 하고 겉치레로 아니해야한다는 뜻으로써 부연해서 말했으니 그르지않다. 그리고 중론을 들어 임사홍(任士洪)등의 자급(資級)을 도로 주기로 한 것이다. 어찌 희지의 말 한 마디로써 도로 주었겠느냐?”하였다.
경서는 아뢰기를,
“전하께서 이미 중의를 좇으셨는데, 희지가 백번 말을 하여도 어찌 들을 수 있으리까? 다만 그 말한 것이 너무나 실언을 했습니다. 어찌 신등과 경연을 함께 모시겠습니까?”하였으나,
왕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자(李滋)가 아뢰기를,
“듣자오니 예조(禮曹)에서 선승(選僧)의 법을 혁파하라고 청했다합니다. 청컨대 들어주옵소서.”하니,
왕이 이르기를,
“승도들은 허무(虛無)로써 종(宗)을 삼으니, 참으로 혁파해야 한다. 그러나 조종(祖宗)께서 혁파하지 않으신 바이다.”하매,
경서는 아뢰기를,
“도승(度僧)의 법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였습니다만, 그러나 성종께서는 군액(軍額)이 부실하다해서 특별히 혁파를 했습니다. 옛 말에 이르되 ‘만약 그 도가 아니면 어찌 3년을 기다리랴하였으니, 성종께서 숭상하고 신봉하신 것일지라도 오히려 개혁해야하는데, 더구나 성종께서 숭상도 신봉도 않으신 것이 아닙니까?”하고,
이과는 아뢰기를,
“승려(僧侶)들에게 주지(住持)를 제수하는 일도 역시 이조(吏曹)에서 관장하지 못하도록 하옵소서. 조종(祖宗)의 좋은 법과 아름다운 뜻은 당연히 준수해야하지만 이와 같은 폐법은 시대에 따라 개혁하는 것이 온당합니다”하니, 왕이 이르기를,
“내가 숭상도 신봉도 않으니, 점차적으로 개혁할 것이다.”하였다.
註1759]뇌정(雷霆): 임금의 위엄을 말한 것임.註1760]환,영(桓靈): 한(漢)나라 환제(桓帝)와 영제(靈帝).
○癸酉/御經筵。 講至東平王蒼曰: “爲善最樂。” 侍講官李顆曰: “人孰不欲爲善, 然物欲蔽之, 不能遂其爲善之心ㆍ 古云: ‘君子之所不可及者, 其惟人之所不見乎。’ 人主深居九重, 勿以人所不知, 而勉焉可也。” 執義姜景叙曰: 盧思愼不合領經筵, 請遞之。 柳子光前以黨比, 亂政被罪, 請遞特進官。” 正言洪潤德亦論思愼, 皆不從。 景叙曰: “經筵官輔養君德, 不可雜以匪人, 請遞思愼。 且臺諫當知無不言, 雖斧鉞在前, 鼎鑊在後, 猶當不避。 若臺諫自以謂: ‘我非孔子, 何得言人之過?’ 殿下亦曰: ‘臺諫旣非孔子, 其言不可聽也。’ 則言路塞矣。” 顆曰: “若以爲, 臺諫非孔子, 不可聽, 則是亡國之言也。 大臣被駁, 則當閤門待罪。 安有於君前, 反折辱臺諫乎? 大抵人臣愛身者多, 而直言者少。 若是則誰能盡言? 夫臺諫之言是則納之, 否則不用可也。 古人雖芻蕘之言必聽, 近者臺諫有言, 非徒不聽, 又從而罪之, 臣恐有殺臺諫之漸也。” 說經李滋曰: “言之直者, 必斥之則言路必塞。” 顆曰: “古云: ‘君明臣直。’ 大抵人臣雖懷百言, 及至雷霆之下, 十喪其半, 殿下若不優容, 誰能盡言?” 潤德曰: “昔唐玄宗時, 杜進以言事斥去, 大臣亦以仗馬比喩, 脅制臺諫。 自是言路閉塞, 遂致天寶之亂。” 景叙曰: “大臣有罪, 而殿下不懲, 故趙舜憤疾, 欲回天聽, 其本心豈有他哉? 凡人臣顧戀妻子者多, 而死於其職者鮮矣, 請恕之。” 特進官安琛曰: “當復舜職。” 王曰: “復職在上, 非下之所可言也。” 景叙曰: “昔晋劉毅言於武帝曰: ‘桓、靈賣官錢入官府, 陛下賣官錢入私庫, 反不如桓、靈。’ 然武帝優容, 不以爲怒, 舜之言, 在所當恕。 且楊熙止非欲罷職, 欲遞經筵官耳。” 領事鄭文炯曰: “其時入侍宰相多以謂熙止之言, 不爲非矣。” 王曰: “熙止欲以應天以實, 不以文之意, 敷衍言之, 不爲非矣。 且採衆論, 已收士洪等資, 豈以一熙止之言還授乎?” 景叙曰: “殿下已從群議, 熙止雖百有言, 豈可聽乎? 但其發言太失, 豈得與臣等同侍經筵乎?” 王不答。 滋曰: “聞, 禮曹請罷選僧之法, 請從之。” 王曰: “僧徒以虛無爲宗, 固當罷之, 然祖宗所不革也。” 景叙曰: “度僧之法, 其來已久。 成宗以軍額不敷, 特革之。 古云: ‘如其非道, 何待三年?’ 此雖成宗所崇信者, 猶當革之, 況成宗所不崇信者乎?” 顆曰: “凡僧人差除住持, 亦勿令吏曹掌之。 祖宗良法美意, 固當遵守。 如此弊法, 因時革之爲便。” 王曰: “予旣不崇信, 當漸以革之。”
연산 26권, 3년(1497 정사/명홍치(弘治) 10년) 8월 13일(임오) 1번째기사
사간 홍식등이 성균관 직임의 일, 관직 구임의 일등에 대해 논하다
왕이 경연에 납시니, 사간 홍식(洪湜)이 아뢰기를,
“특진관은 간혹 합당하지않은 자가 있습니다. 좌우 시종은 모두가 정인(正人)이어야 합니다. 청하옵건대 선택해서 임명하소서.”하고,
집의 강경서(姜景敍)는 아뢰기를,
“청하옵건대 심술이 바른 자를 선택하여 임명하소서.”하니,
왕이 이르기를,
“이미 임명한 자를 사퇴시킬 필요가 없다. 만약 적당한 있다면 더 뽑는 것이 옳겠다.”하였다.
강경서는 아뢰기를,
“학교는 수선(首善)1765)하는 곳이니, 선비로서 조정에 선 자는 모두 여기를 거쳐서 나오므로 진실로 배양(培養)해서 인재를 양성해야합니다. 성균관에 동지사(同知事)가 두 명이온데 윤효손(尹孝孫)은 실록청(實錄廳)에 출사하고 김응기(金應箕)는 도총관(都摠管)을 겸대(兼帶)하고 있어, 전임하지를 못하니 어떻게 잘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청하옵건대 늘 성균관에 출사하게 하여 주소서.”하니,
왕이 이르기를,
“성균관에 소임된 자는 다른 사(司)를 겸하지 못하느냐?”하매,
세겸이 아뢰기를,
“성균관에 임직하고 있는 자가 다른 사를 겸임하면 가르침에 전념을 못하니 어찌 일시의 준례에 구애하겠습니까? 그때그때 요량해서 할 것입니다.”하고, 강경서는 아뢰기를,
“사복시(司僕寺)의 관원이 오래 임직하는 것은 온당치 못합니다. 6시(寺)와 7감(監)을 들어 말하더라도 봉상시(奉常寺)는 제향의 일을 맡고 군기시(軍器寺)는 군기를 제조하는 일을 맡았으니 그 소임이 사복시(司僕寺)보다 큰 데도 모두 오래 임직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유독 사복시만이 오래 임직하고 있으니, 한갓 법을 무너뜨릴 뿐만 아니라 사체로 보아도 역시 불가하옵니다.”하고,
홍식은 아뢰기를,
“사복시의 관원이 오래 임직하는 것은 법을 무너뜨리는 것이 이보다 심함이 없사오니 청하옵건대 《대전(大典)》에 의하옵소서.”하고,
지사 이극돈(李克墩)은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봉상시의 제조로 있었는데 적전(籍田)의 일은 중대하므로 동편의 첨정(僉正)과 서편의 판관(判官)이 모두 오래 임직하고 있었습니다. 요사이는 이조(吏曹)에서 자주 그 직을 교체하니 매우 온당치 못합니다.”하니,
왕이 이르기를,
“이조에서 무엇 때문에 자주 체임하는가 물어보라.”하였다.
세겸이 아뢰기를,
“국가는 자성(粢盛)이 가장 중대하고 군정(軍政)이 큰 것이며, 마정(馬政) 역시 경하지않습니다. 그러나 군정과 마정은 스스로 경중이 있는데 지금 경한 것이 중해지고 중한 것이 경해졌으니 지극히 온당치 못합니다. 대저 제조(提調)가 그 요속(僚屬)을 천거하지 못하는 것은 이미 법이 있는데, 오늘날 제조가 사사로 천망해서 ‘아무 관원이 구임(久任)할 만하다’하고 계속 입법(立法)을 주장하니 되겠습니까? 전조(銓曹)가 스스로 공정하게 의망(擬望)할 것이지 어찌 제조가 사사로 천거해야 하옵니까?”하였다.
註1765]수선(首善): 모범을 세운다는 말.
○壬午/御經筵。 司諫洪湜曰: “特進官間有不合者, 左右侍從, 罔非正人可也, 請須擇差。” 執義姜景叙曰: “請擇其心術正者差之。” 王曰: “已差者不必汰也。 如有可當者, 加選可也。” 景叙曰: “學校首善之地, 士之立朝者, 皆由此出, 固宜培養, 而作成之。 成均同知事二員, 而尹孝孫仕于實錄廳, 金應箕兼帶都摠管, 不得專任, 何以能訓誨乎? 請常仕成均館。” 王曰: “任成均館者, 不兼他司乎?” 世謙曰: “任成均者, 兼帶他司, 則不專敎誨, 豈可拘於一時之例? 在臨時酌量耳。” 景敍曰: “司僕寺官員久任未便。 以六寺、七監言之, 奉常寺掌祭享, 軍器寺掌造軍器, 其任大於司僕, 而皆不不久任, 獨司僕久任, 非徒壞法, 事體亦不可。” 湜曰: “司僕久任, 壞法莫甚, 請依《大典》。” 知事李克墩曰: “臣曾爲奉常寺提調, 籍田事大, 故東則僉正, 西則判官, 皆爲久任。 近日吏曹數遞其職, 甚爲未便。” 王曰: “吏曹何爲數遞? 其問之。” 世謙曰: “國家粢盛最重, 軍政爲大, 而馬政亦非輕。 然軍政、馬政, 自有輕重。 今輕者重, 而重者輕, 至爲未便。 大抵提調不得薦其僚屬, 已有法, 而今者, 提調私自薦望曰, 某員爲可久任。’ 續續立法, 可乎? 銓曹自當公正擬望, 何必提調私薦乎?”
연산 27권, 3년(1497 정사/명홍치(弘治) 10년) 9월 13일(신해) 4번째기사
성현, 정석견, 김영정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성현(成俔)을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으로, 정석견(鄭錫堅)을 이조참판으로, 김영정(金永貞)을 사간원대사간으로, 강경서(姜景敍)를 사헌부집의로, 안당(安瑭)을 장령으로, 박권(朴權), 권민수(權敏手)를 사간원정언으로, 강징(姜澂)을 홍문관부수찬으로, 이자(李滋)를 박사로, 성중엄(成重淹)을 저작(著作)으로, 이계동(李季仝)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안침(安琛)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한충인(韓忠仁)을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로 임명하였다.
○以成俔爲漢城府判尹, 鄭錫堅爲吏曹參判, 金永貞司諫院大司諫, 姜景叙司憲府執義, 安瑭掌令, 朴權、權敏手司諫院正言, 姜澂弘文館副修撰, 李滋博士, 成重淹著作, 李季仝知中樞府事, 安琛同知中樞府事, 韓忠仁慶尙左道兵馬節度使。
연산 28권, 3년(1497 정사/명홍치(弘治) 10년) 12월 21일(기축) 1번째기사
실록청총재관 신승선등 여러 신하에게 상을 내리다
실록청(實錄廳)총재관(摠裁官) 신승선(愼承善), 어세겸(魚世謙)에게는 안장을 갖춘 말 한필과 표리(表裏) 한벌과 비단 한필을 하사하고, 당상(堂上) 이극돈(李克墩), 유순(柳洵), 홍귀달(洪貴達), 윤효손(尹孝孫), 안침(安琛), 허침(許琛), 조익정(趙益貞), 이육(李陸), 신종호(申從濩)에게는 안장갖춘 말 한필과 표리 한벌을 하사하고, 노공필(盧公弼), 김제신(金悌臣)에게는 아마 한필을 하사하고, 낭청(郞廳) 표연말(表沿沫), 김수동(金壽童), 이승건(李承健), 이거(李琚), 이균(李均), 권주(權柱)에게는 아마(兒馬) 한필과 향표리(鄕表裏) 한벌을 하사하고, 이달선(李達善), 남세담(南世聃), 이수공(李守恭), 강경서(姜景敍), 김전(金詮), 이세영(李世英), 허집(許諿), 이계복(李繼福), 이유청(李惟淸), 이의무(李宜茂), 손번(孫蕃), 남궁찬(南宮璨), 이과(李顆), 손주(孫澍), 임유겸(任由謙), 이의손(李懿孫), 장순손(張順孫), 김삼준(金三俊), 정광필(鄭光弼), 정승조(鄭承祖), 성중엄(成重淹), 강덕유(姜德裕), 정희량(鄭希良), 권오기(權五紀), 이유녕(李幼寧), 이전(李㙉), 김천령(金千齡), 신세련(辛世璉), 송흠(宋欽), 조치우(曺致虞), 권균(權均), 기저(奇褚), 신징(申澄), 권달수(權達手), 이희순(李希舜)에게는 각각 한 자급을 더하고, 양희지(楊熙止), 최부(崔溥), 신공제(申供濟), 남곤(南袞), 한세환(韓世桓), 성희철(成希哲), 권민수(權敏手), 이관(李寬), 강징(姜澂), 이목(李穆), 이자(李滋), 유희저(柳希渚)에게는 향표리 한벌을 하사하고, 본 건을 아뢴 승지(承旨) 김응기(金應箕), 강귀손(姜龜孫), 이인형(李仁亨), 신수근(愼守勤), 정광세(鄭光世)에게는 아마 한필을 내려주고, 《세조실록(世祖實錄)》의 예에 의해 출사(出仕)한 날짜의 구근(久近)에 따라 논상(論賞)에 차등을 두었다.
○己丑/賜實錄廳摠裁官愼承善、魚世謙鞍具馬一匹, 表裏一襲, 段子一匹, 堂上李克墩、柳洵、洪貴達、尹孝孫、安琛、許琛、趙益貞、李陸、申從濩鞍具馬一匹, 表裏一襲, 盧公弼、金悌臣兒馬一匹, 郞廳表沿沫、金壽童、李承健、李琚、李均、權柱兒馬一匹, 鄕表裏一襲, 李達善、南世聃、李守恭、姜景叙、金詮、李世英、許諿、李繼福、李惟淸、李宜茂、孫蕃、南宮璨、李顆、孫澍、任由謙、李懿孫、張順孫、金三俊、鄭光弼、鄭承祖、成重淹、姜德裕、鄭希良、權五紀、李幼寧、李㙉、金千齡、辛世璉、宋欽、曺致虞、權均、奇楮、申澄、權達手、李希舜各加一資, 楊熙止、崔溥、申公濟、南袞、韓世桓、成希哲、權敏手、李寬、姜澂、李穆、李滋、柳希渚鄕表裏一襲, 該啓承旨金應箕、姜龜孫、李仁亨、愼守勤、鄭光世兒馬一匹, 依《世祖實錄》例, 隨其仕日久近, 論賞有差。
연산 30권, 4년(1498 무오/명홍치(弘治) 11년) 7월 20일(갑인) 1번째기사
사초에 기록된 권씨, 윤씨의 일과 김종직의 조의제문에 관한 허반, 표연말의 공초 내용
허반(許磐)은 공초하기를,
“신의 처음 초사(招辭)에 ‘회간왕(懷簡王)2032)의 상(喪)을 끝마친 뒤에 세조께서 권씨에게 육식(肉食)을 권했는데, 권씨가 먹지아니하니, 상이 노하시자 권씨가 달아났다’는 일은 집안에서 항상 말해오기로 신이 이를 일손에게 말했다하였사온데, 그 실상인즉 당초에 윤씨의 일을 말할 때에 권씨의 일까지 연속해서 말하였기때문에, 말이 오가는 사이에 착오가 생겨서 과연 일손의 기재한 바와 같이 되었사옵니다.”하고,
표연말(表沿沫)은 공초하기를,
“신의 사초(史草)에 ‘소릉(昭陵)을 꼭 헐지않아도 되는데 헐었다’고 한 것은, 문종께서 승하하신 뒤에 헐어버렸기 때문이며, 조의제문으로 말하면 글 뜻이 험하고 궁벽하기 때문에 알아보지못하였고, 종직의 행장에 도덕과 문장을 극구 칭찬한 것은, 종직의 가슴속에 쌓인 포부를 비록 알리지는 못했을지라도 한 시대 사람들이 다 일컫기때문에 신이 행장에다 이와 같이 칭찬한 것이옵니다.”하였다.
추관(推官)이, 최보가 종직의 문집을 수장한 지가 3년에 이르렀는데도, 초사(招辭)에 ‘겨를이 없어 펴보지못했다’한 것은 사기(詐欺)이며, 홍한(洪瀚)과 표연말(表沿沫)의 사초(士草)는 아울러 속셈이 있는데도, 연말은 또 ‘처음에 조의제문의 뜻을 해석하지못했다’한 것은 바르지못한 말이며, 종직을 칭찬한 것도 역시 반드시 속셈이 있다고 여기어 각각 형장 심문을 한 차례씩 하였는데, 모두 승복하지 아니하였고, 또 강경서(姜景敍)가 ‘권오복, 권경우의 사초를 보지 못했다’고 한 것도 사기라하여 한 차례 형장심문을 했는데 불복하였다.
註2032]회간왕(懷簡王): 덕종
○甲寅/許磐供: “臣初招云: ‘懷簡王喪畢後, 世祖勸肉權氏, 權氏不食, 上怒之, 權氏走出事, 家門常說, 臣以此語馹孫云云。’ 實則初說尹氏事時, 以權氏事, 連接說道, 言語之間, 誤錯詿誤, 果如馹孫所載。” 表沿沫供: “臣史草, 昭陵不必毁之而毁之云者, 文宗升遐後, 毁之故也。 《弔義帝文》, 則辭義險僻, 故未得解見。 宗直行狀, 道德、文章極口稱美者, 宗直胸中蘊奧, 雖未得知, 而一時人皆稱之, 故臣於行狀, 如此稱美。” 推官以崔溥藏宗直文集至於三年, 而招云: “無暇未得披覽。” 者, 詐也。 洪瀚、表沿沫史草竝有情, 而沿沫又云: “初未解《弔義帝文》義。” 者, 不直, 其稱美宗直, 亦必有情, 各刑訊一次, 竝不服。 姜景叙云: “不見五福、景裕史草。” 者, 詐也, 刑訊一次, 不服。
연산 30권, 4년(1498 무오/명홍치(弘治) 11년) 7월 26일(경신) 4번째기사
윤필상등이 사초사건 관련자 김일손, 권오복, 권경유등의 죄목을 논하여 서계하다
윤필상등이 같이 의논하여 서계하기를,
“김일손(金馹孫), 권오복(權五福), 권경유(權景裕)는 대역(大逆)의 죄에 해당하니 능지처사(凌遲處死)하고, 이목(李穆), 허반(許磐), 강겸(姜謙)은 난언절해(亂言切害)의 죄에 해당하니 베어 적몰(籍沒)하고, 표연말(表沿沫), 정여창(鄭汝昌), 홍한(洪瀚), 무풍부정(武豊副正) 총(摠)은 난언(亂言)을 했고, 강경서(姜景敍), 이수공(李守恭), 정희량(鄭希良), 정승조(鄭承祖)는 난언(亂言)한 것을 알면서도 고발하지아니하였으니 아울러 곤장 1백대에 3천리밖으로 내쳐서 봉수군(烽燧軍) 정로한(庭爐干)으로 정역(定役)하고, 이종준(李宗準), 최부(崔溥), 이원(李黿), 강백진(康伯珍), 이주(李胄), 김굉필(金宏弼), 박한주(朴漢柱), 임희재(任熙載), 이계맹(李繼孟), 강혼(姜渾)은 붕당(朋黨)을 지었으니 곤장 80대를 때려 먼 지방으로 부처(付處)하고, 윤효손(尹孝孫), 김전(金詮)은 파직을 시키고, 성중엄(成重淹)은 곤장 80대를 때려서 먼 지방으로 부처하고, 이의무(李宜茂)는 곤장 60대와 도역(徒役) 1년에 과하고, 유순정(柳順汀)은 국문하지 못했으며, 한훈(韓訓)은 도피 중에 있습니다.”하고,
따라서 대간(臺諫)들도 역시 붕당(朋黨)으로 논한 것을 청하였다.
유자광은 아뢰기를,
“강겸(姜謙)이 맨 처음 허반(許磐)의 말을 들었으나, 일손이 말을 내놓은 후 답하기를, ‘나도 역시 일찍이 권씨의 조행이 과연 높다고 들었다.’하였은즉, 허반의 죄와는 사이가 있지않을까 하옵니다.”하고,
노사신은 아뢰기를,
“종직이 시문(詩文)을 지어서 기롱하였으니, 그 정이 절해(切害)하므로 대역(大逆)으로써 논단하는 것이 진실로 당연하오나, 일손등은 단지 종직의 시문만을 찬양하였으니, 종직과 더불어 죄과를 같이 하는 것은 부당하옵니다.
이 일은 마땅히 후세에 전해야할 것이온즉 용이하게 결정지을 수 없사오니, 난언절해(亂言切害)로 논하는 것이 어떠하옵니까? 비록 이와 같이 하여도 역시 마땅히 가산(家産)은 적몰(籍沒)해야 하옵니다.”하고,
윤필상은 아뢰기를,
“신종호(申從濩), 이육(李陸)은 지금 비록 사망하였사오나, 아울러 그 죄를 다스리는 것이 어떠하옵니까?”하니,
전교하기를,
“일손 등을 벨 적에는 백관(百官)으로 하여금 가보게하라. 근일 경상도(慶尙道)와 제천(堤川)등지에서 지진(地震)이 일어난 것도 바로 이 무리들 때문에 그런 것이다. 옛사람은 지진이 임금의 실덕에서 온다하였으나, 그러나 금번의 변괴는 이 무리의 소치가 아닌가여겨진다. 유생(儒生)이 혹은 관(館)에 있고 혹은 사학(四學)에 있으므로 단지 옛 글만 보았고, 조정의 법을 알지못하여 서로 더불어 조정(朝政)을 비방하니, 어찌 이와 같은 풍습이 있었겠는가? 이 무리가 비록 문학이 있다할지라도 소위가 이러하니, 도리어 학식이 없는 사람만 못하다. 죄있는 자는 당연히 그 죄에 처해야하는 것이니, 이 뜻으로써 다시 선성부원군(宣城府院君)2037)에게 물으라.
무령(戊靈)2038)이 말한 강겸(姜謙)의 일은 과연 가긍한 점이 있으니, 그 죄가 마땅히 허반보다 경해야하며, 그 나머지도 스스로 율문(律文)이 있을 것이나 오직 이주(李胄)만은 당연히 한 등급을 더해야하며, 윤효손(尹孝孫)은 기망(欺罔)한 말이 있었으니, 당연히 파직해야하며, 이극돈(李克墩)은 아뢰려 한 지가 오래라고 한다. 어세겸(魚世謙)도 역시 파직해야 하느냐?
의논하여 아뢰라. 이육과 신종호도 마땅히 죄를 다스려야 한다. 이는 큰일이니 나는 종묘에 고유하고 중외(中外)에 반사(頒赦)하려고 한다.
경등의 생각은 어떠한가?”하였다. 필상등이 아뢰기를,
“종묘에 고유하고 사령(赦令)을 반포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옵니다. 이육, 신종호에 있어서는 고신(告身)을 추탈(追奪)하는 것이 어떠하옵니까?”하고, 사신은 아뢰기를,
“일손등이 시문(詩文)을 자작(自作)한 것이 아니옵고 단지 종직만 찬양하였사온즉 그 죄가 마땅히 가벼워야 하옵니다. 그러므로 감히 아뢰는 것이옵니다.”하니,
전교하기를,
“종호(從濩)등은 아뢴 바에 의해 처치하라.”하였다.
註2037]선성부원군(宣城府院君): 노사신 註2038]무령(戊靈): 유자광.
○尹弼商等共議書啓:金馹孫、權五福、權景裕大逆, 凌遲處死。 李穆、許磐、姜謙亂言切害, 斬, 籍沒。 表沿沫、鄭汝昌、洪瀚、茂豐副正摠亂言, 姜景叙、李守恭、鄭希良、鄭承祖知亂言不告, 竝決杖一百、流三千里, 烽燧軍庭爐干定役。 李宗準、崔溥、李黿、康伯珍、李冑、金宏弼、朴漢柱、任熙載、李繼孟、姜渾朋黨, 決杖八十、遠方付處。 尹孝孫、金詮罷職, 成重淹決杖八十、遠方付處, 李宜茂決杖六十、徒一年, 柳順汀未鞫, 韓訓齋。仍請臺諫等亦以朋黨論之。 子光啓: “姜謙初聞許磐之言, 及馹孫開端, 乃答云: ‘吾亦曾聞權氏操行果高。’ 則與磐罪, 恐有間也。” 思愼啓: “宗直作詩文以譏議, 其情切害。 論以大逆, 允爲便當。 馹孫等只讃宗直詩文, 恐與宗直不當同科也。 此事當傳後世, 不可容易斷之。 論以亂言切害何如? 雖如此, 亦當籍沒家産。” 弼商啓: “申從濩、李陸今雖已死, 竝治其罪何如?” 傳曰: “誅馹孫等也, 其令百官往見。 近日慶尙道及堤川等處地震, 是爲此輩而然也。 古人以地震爲人君失德之致, 然此變予疑此輩所致也。 儒生或居館, 或在四學, 但觀古書, 不知朝章, 相與謗訕朝政, 安有如此之風? 此輩雖有文學, 所爲如此, 反不如無學之人。 有罪者當坐其罪, 其以此意, 更問于宣城府院君。 武靈所言姜謙事, 果有可矜, 其罪宜輕於磐。 其餘自有律文, 唯李冑當加一等。 尹孝孫有罔言, 當罷職。 李克墩則欲啓久矣, 魚世謙亦當罷職乎? 其議啓。 陸及從濩宜治罪。 此大事也, 予欲告于宗廟, 頒赦中外, 於卿等意何如?” 弼商等啓: “告廟、頒赦甚當。 陸、從濩追奪告身何如?” 思愼啓: “馹孫等非自作詩文, 只讃宗直, 則其罪宜輕, 故敢啓之。” 傳曰: “從濩等事, 依所啓。”
연산 30권, 4년(1498 무오/명홍치(弘治) 11년) 7월 26일(경신) 6번째기사
윤필상등이 사초사건 관련자들의 정배지에 대해 논하다
전교하기를,
“유형(流刑)이나 부처(付處)를 받은 사람들은 마땅히 15일 노정(路程) 밖으로 정배(定配)해야 한다.”하니,
필상(弼商) 등이 서계하기를,
“강겸(姜謙)은 강계(江界)에 보내어 종을 삼고, 표연말(表沿沫)은 경원(慶源) 으로, 정여창(鄭汝昌)은 종성(鍾城)으로, 강경서(姜景敍)는 회령(會寧)으로, 이수공(李守恭)은 창성(昌城)으로, 정희량(鄭希良)은 의주(義州)로, 홍한(洪瀚) 은 경흥(慶興)으로, 임희재(任熙載)는 경성(鏡城)으로, 총(摠)은 온성(穩城)으로, 유정수(柳廷秀)는 이산(理山)으로, 이유청(李惟淸)은 삭주(朔州)로, 민수복(閔壽福)은 귀성(龜城)으로, 이종준(李宗準)은 부령(富寧)으로, 박한주(朴漢柱)는 벽동(碧潼)으로, 신복의(辛服義)는 위원(渭原)으로, 성중엄(成重淹)은 인산(麟山)으로, 박권(朴權)은 길성(吉城)으로, 손원로(孫元老)는 명천(明川) 으로, 이창윤(李昌胤)은 용천(龍川)으로, 최부(崔溥)는 단천(端川)으로, 이주(李胄)는 진도(珍島)로, 김굉필(金宏弼)은 희천(熙川)으로, 이원(李黿)은 선천(宣川)으로, 안팽수(安彭壽)는 철산(鐵山)으로, 조형(趙珩)은 북청(北靑)으로, 이의무(李宜茂)는 어천(魚川)으로 정배(定配)하소서.”하니, 왕이 좇았다.
○尹弼商等共議書啓:金馹孫、權五福、權景裕大逆, 凌遲處死。 李穆、許磐、姜謙亂言切害, 斬, 籍沒。 表沿沫、鄭汝昌、洪瀚、茂豐副正摠亂言, 姜景叙、李守恭、鄭希良、鄭承祖知亂言不告, 竝決杖一百、流三千里, 烽燧軍庭爐干定役。 李宗準、崔溥、李黿、康伯珍、李冑、金宏弼、朴漢柱、任熙載、李繼孟、姜渾朋黨, 決杖八十、遠方付處。 尹孝孫、金詮罷職, 成重淹決杖八十、遠方付處, 李宜茂決杖六十、徒一年, 柳順汀未鞫, 韓訓齋。仍請臺諫等亦以朋黨論之。 子光啓: “姜謙初聞許磐之言, 及馹孫開端, 乃答云: ‘吾亦曾聞權氏操行果高。’ 則與磐罪, 恐有間也。” 思愼啓: “宗直作詩文以譏議, 其情切害。 論以大逆, 允爲便當。 馹孫等只讃宗直詩文, 恐與宗直不當同科也。 此事當傳後世, 不可容易斷之。 論以亂言切害何如? 雖如此, 亦當籍沒家産。” 弼商啓: “申從濩、李陸今雖已死, 竝治其罪何如?” 傳曰: “誅馹孫等也, 其令百官往見。 近日慶尙道及堤川等處地震, 是爲此輩而然也。 古人以地震爲人君失德之致, 然此變予疑此輩所致也。 儒生或居館, 或在四學, 但觀古書, 不知朝章, 相與謗訕朝政, 安有如此之風? 此輩雖有文學, 所爲如此, 反不如無學之人。 有罪者當坐其罪, 其以此意, 更問于宣城府院君。 武靈所言姜謙事, 果有可矜, 其罪宜輕於磐。 其餘自有律文, 唯李冑當加一等。 尹孝孫有罔言, 當罷職。 李克墩則欲啓久矣, 魚世謙亦當罷職乎? 其議啓。 陸及從濩宜治罪。 此大事也, 予欲告于宗廟, 頒赦中外, 於卿等意何如?” 弼商等啓: “告廟、頒赦甚當。 陸、從濩追奪告身何如?” 思愼啓: “馹孫等非自作詩文, 只讃宗直, 則其罪宜輕, 故敢啓之。” 傳曰: “從濩等事, 依所啓。”
연산 30권, 4년(1498 무오/명홍치(弘治) 11년) 7월 27일(신유) 1번째기사
김일손등을 벤 것을 종묘사직에 알리고 중외에 사령을 반포하다
김일손등을 벤 것을 종묘사직에 고유하고,
백관의 하례를 받고 중외에 사령(赦令)을 반포하기를,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세조혜장대왕(世祖惠莊大王)께서 신무(神武)의 자질로 국가가 위의(危疑)하고 뭇 간신이 도사린 즈음을 당하여, 침착한 기지와 슬기로운 결단으로 화란(禍亂)을 평정시키시니 천명(天命)과 인심이 저절로 귀속되어, 성덕(聖德)과 신공(神功)이 우뚝 백왕(百王)의 으뜸이었다.
그 조종(祖宗)에게 빛을 더한 간대(艱大)한 업적과 자손에게 끼친 연익(燕翼)의 모훈(謨訓)을, 자자손손 이어받아 오늘에까지 이르러 아름다웠었는데, 뜻밖에 간신 김종직이 화심(禍心)을 내포하고, 음으로 당류(黨類)를 결탁하여 흉악한 꾀를 행하려고 한 지가 날이 오래되었노라.
그래서 그는 항적(項籍)이 의제(義帝)를 시해한 일에 가탁하여, 문자에 나타내서 선왕(先王)을 헐뜯었으니, 그 하늘에 넘실대는 악은 불사(不赦)의 죄에 해당하므로 대역(大逆)으로써 논단하여 부관참시(剖棺斬屍)를 하였고, 그 도당 김일손, 권오복, 권경유가 간악(姦惡)한 붕당을 지어 동성상제(同聲相濟)하여 그 글을 칭찬하되, 충분(忠憤)이 경동한 바라하여 사초에 써서 불후(不朽)의 문자로 남기려고 하였으니, 그 죄가 종직과 더불어 과(科)가 같으므로 아울러 능지처사(凌遲處死)하게 하였노라.
그리고 일손이 이목, 허반, 강겸등과 더불어 없었던 선왕의 일을 거짓으로 꾸며대서 서로 고하고 말하여 사(史)에까지 썼으므로, 이목, 허반도 아울러 참형(斬刑)에 처하고, 강겸은 곤장 1백대를 때리고 가산(家産)을 적몰(籍沒)하여 극변(極邊)으로 내쳐 종으로 삼았노라.
그리고 표연말(表沿沫), 홍한(洪瀚), 정여창(鄭汝昌), 무풍정(茂豊正) 총(摠) 등은 죄가 난언(亂言)에 범했고, 강경서(姜景敍), 이수공(李守恭), 정희량(鄭希良), 정승조(鄭承祖)등은 난언(難言)임을 알면서도 고하지않았으므로 아울러 곤장 1백대를 때려 3천리를 밖으로 내치고, 이종준(李宗準), 최부(崔溥), 이원(李黿), 이주(李胄), 김굉필(金宏弼), 박한주(朴漢柱), 임희재(任熙載), 강백진(康伯珍), 이계맹(李繼孟), 강혼(姜渾)등은 모두 종직의 문도(門徒)로서 붕당을 맺어 서로 칭찬하였으며, 혹은 국정(國政)을 기의(譏議)하고 시사(時事)를 비방하였으므로, 희재는 곤장 1백대를 때려 3천리밖으로 내치고, 이주는 곤장 백대를 때려 극변(極邊)으로 부처(付處)하고 이종준, 최보, 이원, 김굉필, 박한주, 강백진, 이계맹, 강혼등은 곤장 80대를 때려 먼 지방으로 부처함과 동시에 내친 사람들은 모두 봉수군(烽燧軍)이나 정로한(庭爐干)의 역(役)에 배정하였고, 수사관(修史官)등이 사초를 보고도 즉시 아뢰지 않았으므로 어세겸(魚世謙), 이극돈(李克墩), 유순(柳洵), 윤효손(尹孝孫)등은 파직하고, 홍귀달(洪貴達), 조익정(趙益貞), 허침(許琛), 안침(安琛)등은 좌천(左遷)시켰다. 그 죄의 경중에 따라 모두 이미 처결되었으므로 삼가 사유를 들어 종묘사직에 고하였노라.
돌아보건대 나는 덕이 적고 일에 어두운 사람으로 이 간당(奸黨)을 베어 없앴으니, 공구한 생각이 깊은 반면에 기쁘고 경사스러운 마음도 또한 간절하다. 그러므로 7월 27일 새벽을 기하여 강도, 절도와 강상(綱常)에 관계된 범인을 제외하고는 이미 판결이 되었든 판결이 안되었든 모두 사면하노니, 감히 유지(宥旨)를 내리기 이전의 일로써 서로 고발하는 자가 있으면 그 죄를 다스릴 것이다.
아! 인신(人臣)이란 난리를 만들 뜻이 없어야하는 것이다. 부도(不道)의 죄가 이미 굴복하였으니, 뇌우(雷雨)가 작해(作解)2039)하듯이 마땅히 유신(惟新)의 은혜에 젖도록 하겠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敎示)하는 것이니, 이 뜻을 납득할 줄 안다.”하였다.
註2039]뇌우(雷雨)가 작해(作解): 《주역(周易)》해괘(解卦) 대상(大象)에 ‘뇌우(雷雨)가 작(作)하는 것이 해(害)이니, 군자가 이용하여 과(過)를 사하고 죄를 유(宥)한다.’하였음
○辛酉/告誅金馹孫等于宗廟、社稷, 受百官賀, 頒赦中外曰:恭惟, 我世祖惠莊大王以神武之資, 當國家危疑, 群姦盤據之際, 沈機睿斷, 戡定禍亂, 天命、人心自有歸屬, 聖德神功卓冠百王。 增光祖宗艱大之業, 貽厥子孫燕翼之謀, 繼繼承承, 式至今休。 不意姦臣金宗直包藏禍心, 陰結黨類, 欲售兇謀, 爲日久矣。 假托項籍弑義帝之事, 形諸文字, 詆毁先王, 滔天之惡, 罪在不赦, 論以大逆, 剖棺斬屍。 其徒金馹孫、權五福、權景裕朋姦黨惡, 同聲相濟, 稱美其文, 以爲忠憤所激, 書諸史草, 欲垂不朽, 其罪與宗直同科, 竝令凌遲處死。 馹孫與李穆、許磐、姜謙等誣飾先王所無之事, 傳相告語, 筆之於史, 李穆、許磐竝處斬, 姜謙決杖一百、籍沒家産, 極邊爲奴。 表沿沫、洪瀚、鄭汝昌、茂豐正摠等, 罪犯亂言, 姜景叙、李守恭、鄭希良、鄭承祖等, 知亂言而不告, 竝決杖一百、流三千里。 李宗準、崔溥、李黿、李冑、金宏弼、朴漢柱、任熙載、康伯珍、李繼孟、姜渾等俱以宗直門徒, 結爲朋黨, 互相稱譽, 或譏議國政, 謗訕時事, 熙載決杖一百、流三千里, 李冑決杖一百、極邊付處, 宗準、崔溥、李黿、宏弼、漢柱、伯珍、繼孟、姜渾等, 決杖八十、遠方付處, 而流人等竝定烽燧庭爐干之役。 修史官等見史草, 而不卽啓, 魚世謙、李克墩、柳洵、尹孝孫等罷職, 洪貴達、趙益貞、許琛、安琛等左遷。 隨其罪之輕重, 俱已處決, 謹將事由, 告于宗廟、社稷。 顧予寡昧, 剪除姦黨, 戰懼之念旣深, 而喜幸之心亦切。 肆於七月二十七日昧爽以前, 强竊盜、關係綱常外, 已決正、未決正, 咸宥除之。 敢以宥旨前事, 相告言者, 以其罪罪之。 於戲! 人臣無將, 旣伏不道之罪。 雷雨作解, 宜霈惟新之恩, 故玆敎示, 想宜知悉。
연산 31권, 4년(1498 무오/명홍치(弘治) 11년) 9월 6일(신축) 3번째기사
김종직의 문집을 중국에 가지고 간 성절사 조위등을 국문하는 일에 대해 의논하다
성절사(聖節使) 조위(曺偉), 서장관(書狀官) 정승조(鄭承祖)가 의주(義州)에서 잡혀오니, 명하여 빈청(賓廳)에서 국문하게 하고, 이어서 전교하기를,
“조위가 중국에 갈 적에 김종직의 문집을 싸가지고 갔다하니 국문하라”하였다. 조위는 말하기를,
“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과 화도연명시(和陶淵明詩)는 모두가 기롱과 풍자를 가탁한 것이었으나, 실로 그것이 국조(國朝)의 일에 범촉(犯觸)되는 줄을 알지못했습니다. 만약 그것이 부도(不道)한 문자인 줄을 알았다면 어찌 감히 그 글을 써서 성종(成宗)께 올렸겠습니까?”하니,
전교하기를,
“종직의 글은 권오복, 권경유도 모두가 그것이 기의(譏議)의 작품임을 알면서도 함께 찬성하였다하는데, 조위만이 어찌 모를 리가 있겠느냐?”하였다.
윤필상등이 아뢰기를,
“상의 하교가 지당하옵니다. 조위는 큰 선비인데, 어찌 그 글이 부도(不道)한 것인지를 몰랐겠습니까?”하니,
전교하기를,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하였다.
필상등이 아뢰기를,
“마땅히 형신(刑訊)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정승조(鄭承祖) 또한 이수공(李守恭), 강경서(姜景敍), 정희량(鄭希良)과 죄(罪)가 같사오니, 당연히 곤장 1백대를 때려서 천리밖으로 내쳐야 하옵니다. 그러나 지금 조회(朝會)를 정지하고 있는 마당에 궐정(闕庭)에서 형장(刑杖)을 쓴다는 것은 불가하옵니다”하니, 전교하기를,
“조위등을 의금부에 하옥시키고, 광릉(光陵)에 다녀온 뒤를 기다려서 형장 심문하도록 하라.”하였다.
○聖節使曺偉、書狀官鄭承祖, 自義州拿來, 命鞫於賓廳, 仍傳曰: “偉赴京時, 齎金宗直集而去, 鞫之。” 偉云: “宗直《弔義帝文》及和陶淵明詩, 皆假托譏諷, 實不知其爲犯觸國朝事也。 若知其爲不道之文, 則何敢書其文, 以獻成宗乎?” 傳曰: “宗直之文, 權五福、權景裕皆知其譏議, 而作共贊之, 偉何獨不知乎?” 尹弼商等啓: “上敎允當。 偉大儒, 何不知其文爲不道耶?” 傳曰: “奈何?” 弼商啓: “當刑訊矣。 鄭承祖亦與李守恭、姜景叙、鄭希良同科, 當決杖一百、流三千里, 然今當停朝, 不可於闕庭用刑杖。” 傳曰: “下偉等義禁府, 待光陵行幸後刑訊。”
연산 36권, 6년(1500 경신/명홍치(弘治) 13년) 2월 30일(갑인) 2번째기사
지평 최해가 송여해의 일을 아뢰었으나 들어주지 않다
지평 최해(崔瀣)가 아뢰기를,
“금년에 남방 백성들의 기근, 곤고가 심합니다. 국가에서 왜적이 장난한 일로 하여 특별히 경차관을 명하여 군관 10인을 거느리고 가서 잡도록 하였는데, 변방을 수비하는 방법을 당연히 이와 같이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왜노(倭奴)는 반드시 도적질하고 곧 돌아갔을 것이요, 반드시 근처에 머물러있지 않을 것입니다. 이보다 앞서 녹도의 변이 있었을 때에도 대신을 보내어 군관을 거느리고 가서 잡게하였지만, 끝내는 한치의 공도 없었습니다. 이번의 이 일 역시 무익한 일이 아닐까합니다. 가서 수색하여 잡게하더라도 그 도의 병사, 수사, 수령(守令)등을 시켜 급히 추격하게하면 될 것이지, 하필 따로 경차관을 보낼 것입니까? 또 김석철(金錫哲)은 전에 남포현감(藍浦縣監)이 되었는데, 기한이 차기 전에 장수의 재주가 있다고 하여 불러서 경직(京職) 6품을 주었으며 얼마 안있다가 판관을 삼고 마침내 첨정(僉正)을 삼으니, 당시 대간(臺諫)이 오히려 불가하다고 하였는데, 지금 또 건너뛰어 당상관(堂上官)을 제수하여 제포첨사(薺浦僉使)를 삼으니, 옳겠습니까?
조정에 어찌 쓸 만한 사람이 없겠습니까? 만일 사람이 모자라서 반드시 당상관으로 승진시켜 보내기로 한다면 또 그 직위의 서차(序次)에 해당하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근래 병조에서 차제(差除)2592)하는 것이 많이 지나친 것 같으니, 사정을 두지않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조극치로 말하면 거칠고 사나운 사람으로서 전일 대간이 이미 그 흠을 논박하였으며 일찍이 평안절도사가 되었을 때 병조에서 그 불가함을 아뢰었는데, 성종께서 특별히 보냈다가 과연 실패하여 체차되었습니다. 지금 남방에 일이 있는 때에 조극치로 주수(主帥)를 삼으니, 어찌 소임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김윤제(金允濟)는 일찍이 만포첨사(滿浦僉使)가 되었는데 야인(野人)이 와서 도둑질하니, 창황 실조(失措)하여 어찌할 줄을 몰랐으니 참으로 겁장(怯將)입니다. 절충어모(折衝禦侮)2593)를 할 수 있겠습니까? 송여해는 슬픔을 잊고 자녀를 초례(醮禮)시켰으니 죄가 강상(綱常)을 범한 것입니다.
청하옵건대 서용(敍用)하지 마옵소서.”하였는데, 좇지 않았다.
그리고 전교하기를,
“김석철의 일은 병조에서 사정을 둔 것이라 하는데 그것이 무슨 일이냐?”하니, 최해가 아뢰기를,
“병조판서 이계동(李季仝)의 집이 김석철과 한 마을이고 친교가 지극히 두터우며, 그 형제들이 모두 이계동의 추천으로 등용되었습니다. 김석철은 6품관에서 아직 2년도 못되어 당상관에 승진하였으니, 이것은 전에 없었던 일입니다. 이계동의 힘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하였는데,
전교하기를,
“무릇 사람이 이웃이 없는 자가 있겠는가? 전일 강경서(姜景敍)가 노사신(盧思愼)을 지적하여 이 역시 이웃관계가 있다고 하였었다. 이것은 너무도 무리한 일이다.”하였다.
註2592]차제(差除): 임명과 제수 註2593]절충어모(折衝禦侮): 적을 눌러 모욕을 당하지않게 함.
○持平崔瀣啓: “今年南方之民飢困甚矣。 國家以倭賊作耗, 特命敬差官, 率軍官十人往捕。 備邊之道, 當如是也, 然必倭奴作耗旋去, 必不屯住近處。 前此鹿島之變, 遣大臣, 率軍官追捕, 而卒無寸功。 今(今)此之擧, 亦恐無益也。 假使搜捕, 令其道兵使、水使、守令等急追可也, 何必別遣敬差官乎? 且金錫哲前爲藍浦縣監, 瓜期未滿, 而以其有將才, 召爲京職六品, 未幾爲判官, 尋爲僉正。 當時臺諫猶以爲不可, 今又超授堂上爲薺浦僉使可乎, 朝廷豈無可用之人乎? 如其乏人, 而必須陞堂上以遣, 則又豈無職次相當者乎? 近來兵曹差除, 似多過越, 不得無情。 曺克治麤猛人, 前日臺諫已駁其痕咎。 嘗爲平安節度使, 兵曹啓其不可, 成宗特遣之, 果敗而遞。 今當南方有事之時, 以克治爲主帥, 豈能堪任? 金允濟曾爲滿浦僉使, 野人來寇, 而蒼黃失措, 罔知所爲, 眞㤼將也, 其能折衝禦侮耶? 宋汝諧忘哀醮子, 罪犯綱常, 請勿敍。” 不從。 傳曰: “錫哲事, 謂兵曹用情者何事?” 瀣啓: 兵曹判書李季仝家與鍚哲同里閈, 交契至篤。 其兄弟皆因季仝推薦而見用。 錫哲自六品, 未二年陞堂上, 前此所無, 非季仝之力而何?” 傳曰: “凡人安有無隣里者乎? 前日姜景叙指盧思愼, 亦有隣里之言, 此甚無理。”
연산 41권, 7년(1501 신유/명홍치(弘治) 14년) 9월 23일(무술) 1번째기사
윤필상등이 무오년의 대간들에게 직첩을 돌려줄 것을 청하다
윤필상, 한치형, 성준이 강경서(姜景敍), 이수공(李守恭), 정승조(鄭承祖), 정희량(鄭希良)등의 이름에 표를 붙여서 아뢰니, 전교하기를,
“모두 방면(放免)하라.”하였다.
또 아뢰기를,
“무오년2972)의 대간들은 비록 그때에는 잘못 의논한 허물이 있었습니다만, 직첩(職牒)은 돌려주기를 청합니다.”하니,
전교하기를,
“돌려주되 다만 대간이나 홍문관에는 서용할 수 없다”하였다.
註2972]무오년: 1498 연산군 4년.
○戊戌/ 尹弼商 、 韓致亨 、 成俊 付標 姜景敍 、 李守恭 、 鄭承祖 、 鄭希良 等名以啓, 傳曰: “竝放之。” 又啓: “戊午年, 臺諫雖於其時, 有議謬誤之失, 請還給職牒。” 傳曰: “還給。 但不可敍於臺諫、弘文館。”
연산 41권, 7년(1501 신유/명홍치(弘治) 14년) 10월 11일(병진) 3번째기사
유자광이 서거정의 ‘수직론’을 가지고 아뢰다
유자광(柳子光)이 서거정의 ‘수직론(守職論)’을 들어서 아뢰기를,
“서거정이 신을 가리켜 말하기를 ‘사람의 죄를 꾸며 법망(法網)에 끌어넣고, 거짓을 꾸며서 상소했다’고 했지만, 신이 죄를 받은 초사(招辭)에는 이 말이 없으니, 이것은 서거정이 거짓으로 꾸민 것입니다. 대간이 매양 아뢰기를, 신을 도총관(都摠管)에서 쫓아내면 조정에서 이를 상쾌하게 여길 것이라고 했으나, 과연 신을 쫓아내는 것을 상쾌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김종직(金宗直), 김일손(金馹孫)의 족당(族黨)들일 것입니다. 신이 전복[鰒]을 진상한 죄가, 어찌 조의제문(弔義帝文)2981)이나 여릉왕시(廬陵王詩)2982)의 뜻을 잘 알면서도 김종직이 반역자가 아니라고 한 대간의 죄보다 무겁겠으며, 또 어찌 강경서(姜景敍)와 정희량(鄭希良)의 죄보다 무겁겠습니까?
또 대간이 임희재(任熙載)의 방면을 논박하면서도 강경서와 정희량은 논박하지않으니, 같은 대간으로서 같은 죄인을 어떤 사람은 논박하고 어떤 사람은 논박하지 않는 것은 반드시 시비와 사정(邪正)이 있을 것인데, 대간이 유독 신에 대해서만 작은 허물까지 들추어내어서 기어이 신을 쫓아내고야 말려고 하니, 만약 낱낱이 대간에게 하문(下問)하신다면 알 수없지만 무엇으로써 아뢰겠습니까? 신은 옥에 나아가 스스로 밝히기를 원합니다. 서거정의 저술은 오로지 한명회를 위하여 지은 것입니다. 서거정은 어릴 때부터 한명회와 같이 유학(遊學)을 했고 한명회의 비명(碑銘)을 지어서 그 평생에 서로 친밀하게 사귄 일을 모두 기록했습니다. 서거정은 첫머리에 신이 한명회를 공박한 일을 말했고, 다음에는 신의 구언(求言)2983)에 대한 상소를 말했으며, 그 다음에는 현석규(玄碩圭)를 논박한 일을 말했으므로, 신도 또한 중요한 것만 들어서 한명회의 일로써 아뢴 것뿐입니다.”하니,
전교하기를,
“대간과 재상이 처음에는 비록 공의로 말했다하더라도, 만약 사정(私情)을 끼었다면 어찌 국가를 유지하고 임금의 허물을 바로잡는 뜻이 되겠는가?”하였다.
註2981]조의제문(弔義帝文): 성종(成宗) 때 김종직(金宗直)이 지은 글. 내용은 세조(世祖)의 찬탈행위(簒奪行爲)를 초(楚)의 항우(項羽)가 그 임금인 의제(義帝)를 시해(弑害)한 고사(故事)에 비유하여 풍자했음 註2982]여릉왕시(廬陵王詩): 여릉왕(廬陵王)은 중국 남조(南朝) 송무제(宋武帝)의 둘째 아들인 유의진(劉義眞)인데, 나중에 살해되었음. 이 시는 안평대군(安平大君)과 금성 대군(錦城大君)이 살해된 사실에 비유하였다 함 註2983]구언(求言): 임금이 신하들에게 직언(直言)을 구함.
○柳子光將徐居正《守職論》以啓: “居正指臣曰: ‘羅織人罪, 誣罔上疏。’ 然臣之坐罪招辭, 無此語, 乃居正之誣罔。 臺諫每啓曰: ‘黜臣摠府, 朝廷快之。’ 果有快於黜臣者, 是必金宗直、金馹孫族黨。 臣之進鰒之罪, 豈重於審知《弔義帝文》、廬陵王詩之意, 而謂金宗直非反逆。 臺諫之罪又豈重於姜景叙、鄭希良之罪乎? 且臺諫論熙載之放, 不論姜景叙、鄭希良。 一臺諫而同罪之人或論或不論, 必有是非邪正。 臺諫獨於臣, 吹毛覓疵, 期於必黜臣而後已, 若一一下問臺諫, 則未知何以啓之乎, 臣願就獄自明。 居正著述, 專爲明澮而作。 居正自少與明澮同遊學, 撰明澮碑銘, 盡敍其平生交密之事。 居正首言臣攻明澮之事, 次言臣對求言之疏, 次言論碩圭之事, 故臣亦擧重以明澮之事啓之耳。” 傳曰: “臺諫、宰相始雖以公議發之, 若挾私則豈維持國家、匡正君過之義乎?”
연산 41권, 7년(1501 신유/명홍치(弘治) 14년) 10월 17일(임술) 1번째기사
대사헌 한사문이 유자광의 상소가 잘못된 것임을 아뢰다
상참을 받고 경연에 납시었다. 대사헌 한사문(韓斯文)이 아뢰기를,
“유자광의 상소를 살펴보니, 첫머리에 ‘신이 도총관(都摠管)에서 쫓겨난 일을 시원하게 여기는 사람은 김종직(金宗直), 김일손(金馹孫)의 일가와 그 친구의 무리들이니 신이 성명(聖明)의 시대를 당하여 어찌 스스로 변명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하고, 다음에 ‘신이 전복[鰒]을 진상한 죄가 김종직, 김일손을 반역자가 아니라고 말한 대간(臺諫)과 어느 쪽의 죄가 더합니까?’하고,
또 그 다음에 ‘임희재(任熙載)의 방면은 논박하면서 강경서(姜景敍)와 정희량(鄭希良)의 방면은 논박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는데, 신등의 생각으로는 임희재는 은총(恩寵)이 사사로운데서 나왔기 때문에 아뢴 것이고, 강경서등은 천둥의 변괴(變怪)로 인해서 대신들과 더불어 의논해서 너그럽게 처결한 것이기 때문에 아뢰지않은 것뿐입니다. 유자광이 전일의 상소에서도 이미 군신의 분의를 모른다고 말해서, 신등의 기세를 꺾어 욕보였으니, 그 전후의 상소를 보면 그 심술을 알 수 있습니다.”하였다.
○壬戌/受常參, 御經筵。 大司憲韓斯文曰: “觀子光疏, 首言: ‘以臣之罷摠管爲快者, 金宗直、金馹孫族親、朋友之黨類,’ 臣當聖明之朝, 焉得不自明歟?” 次云: ‘臣之進鰒之罪, 孰與謂金宗直、金馹孫, 非反逆之臺諫乎?’ 又云: ‘論任熙載之放, 不論姜景叙、鄭希良之放。’ 臣等意以謂, 任熙載恩出於私, 故啓之; 景叙等則因雷變, 與大臣議, 而疏放, 故不啓耳。 子光於前疏, 旣云: ‘不知君臣之分。’ 挫辱臣等。 觀其前後疏, 可知其心術矣。”
중종 1권, 1년(1506 병인/명정덕(正德) 1년) 12월 18일 임술 1번째기사
강경서등 일곱 사람을 전강하고, 불교 허용과 관리 임용의 일을 의논하다
사도시정(司䆃寺正) 강경서(姜景敍)등 일곱 사람을 전강(殿講)하였다.
권홍(權弘)이 강하여 불사(佛事)를 논함에 이르러, 유자광이 아뢰기를,
“세조조에 허종(許琮)이 등제(登第)한 지 오래지않아 불도의 잘못을 극언하였는데 그 뒤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장단(長湍)에 가있는 것을 세조가 특명으로 기복(起復)시켰고, 또 예종(睿宗)에게 이르기를, ‘나도 비록 불도를 신봉하였으나 진실로 해가 없었다. 그러나 네가 만약 불도 신봉하기를 나와 같이하면 반드시 나라를 망치고 집을 패할 것이다’하셨습니다. 이로써 보면 세조가 불도의 잘못을 몰랐던 것이 아닙니다. 근래 승도(僧道)가 크게 폐해졌는데 시종 이렇게 된다면 성치(聖治)가 지극하다고 할 만합니다.”하고,
권홍은 아뢰기를,
“우리나라는 신라이래로 불법을 숭신하였는데 고려때 신돈(辛旽)의 화는 참혹하였습니다. 불도는 세상을 혹하고 백성을 속일 뿐만 아니라, 또한 족히 나라를 망치고 집을 패하게 합니다.”하였다.
부원군 성희안이 아뢰기를,
“나라를 다스림에는 사람 등용하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고, 인재는 비록 당우(唐虞) 삼대(三代)310)때라도 많이 얻기가 쉽지않았는데 하물며 우리나라는 인재가 대체로 적습니다. 그리하여 여창(臚唱)311)하는 정도의 가장 낮은 인재도 또한 많이 얻지못하니, 한가지 재주로도 이름이 있으면 온 나라가 모두 알아서 진실로 유일(遺逸)된 자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인재가 적은데도 근래 폐조에서 많이 주륙되어, 지금 신이 전조(銓曹)에 재직하고 있는데 홍문관과 대간을 주의(注擬)312)할 때면 항상 사람이 모자람을 근심하니, 반드시 양육하여 얻어야합니다. 성종은 인재를 애석이 여겨서 항상 배양하기에 뜻을 기울였으므로 인재가 배출되었습니다. 그리고 유림가운데 재학(才學)이 뛰어난 자가 있으면, 사람들이 반드시 일컫기를, ‘아무개가 반드시 외과(巍科)313)에 합격할 것이다’하여, 그 뒤 시취(試取)하면 과연 그 말과 같았습니다. 지금 조정에 포열(布列)한 이들은 곧 전일 명예있던 선비들인데, 지금은 이와 같은 재주가 있는 이를 듣지못하겠습니다. 그리고 전자에 권경희(權景禧)의 처계(妻系)가 서얼(庶孽)로 의심되었으므로 대간이 논박하였는데, 성종은 이르기를, ‘사람의 어질고 어질지못함은 임금이 등용하느냐? 않느냐의 여하에 달려있을 뿐이다. 경희의 처계가 비록 한미하지만 내가 허통(許通)하면 된다’하고, 특명으로 허통하게 하니, 경희의 지위가 2품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 뒤 김석(金磶)이 크게 사람의 도리를 잃어 차마 아뢰지못할 일이 있었는데, 그때 시종이 논박하여 아뢰기를, ‘서용하여서는 안됩니다’하였으나, 성종은 이르기를, ‘애매하여 밝히기 어려운 일이다’하고 끝내 좇지않아, 김석은 마침내 현달(顯達)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성종이 한 사람의 경희나 한 사람의 김석을 위하여 그리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인재를 중히여겨서 사람때문에 말까지 폐하지않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너그럽게 용납하여 다른 사람을 권면(勸勉)한 것입니다. 지금 갑자방(甲子榜)은 그 수가 19인인데, 간혹 쓸만한 사람이 있습니다. 쓸만한 사람이 없다하더라도, 이미 급제하였다고 한 이상 현직에 서용하지 않으면 되겠습니까?
지금의 대간들은 모두 외방에 귀양살이하여 사습(士習)이 비루한 것을 목견하고 바로 잡고자생각하므로 작은 실수라도 있을 것같으면 반드시 바른 의논을 극언(極言)하는 것입니다. 소신도 또한 잘못한 바가 있습니다. 앞서 폐조에서, 조계형(曺繼衡)이 홍문관을 혁파하라는 교지를 지을때 신도 또한 지어올렸습니다. 신이 만약 착한 사람이었다면 혁파하여서는 안된다고 아뢰었을 것인데, 신이 구차스럽게 세월을 보내면서 겨우 목숨을 보전해가지고 태평한 정치를 발돋음하여 보고자하였으므로 짓지않을 수 없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정성근(鄭誠謹)은 본래 명망이 있던 사람인데 폐조에서 궤이(詭異)한 것으로 죄를 의논할 때 온 조정이 따랐으니, 그러면 온 조정에 모두 잘못이 있는 것입니다. 대간의 뜻은 홍문관을 혁파할 때를 당하여 진실로 마땅히 사피(辭避)하고 짓지않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와 같다면 한 세상에 뛰어난 인물일 것인데 그런 사람을 어찌 많이 얻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갑자방 사람을 현직에 서용하지 말라는 일은 신은 온당치않다고 생각합니다. 사습을 바로 잡고자하면, 위에 있는 사람이 가르치기를,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있는데 어찌 반드시 이와 같이한 뒤에야 사습을 바로 잡겠습니까? 대체로 인재는 일조일석에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도 또한 잘못이 있는데, 대신의 지위에 있으면서 이런 허물없는 사람이 논박받는 것을 보니, 신은 실로 부끄럽습니다. 신의 뜻으로는 갑자방 사람을 현직에 통용함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하였다.
부원군 유자광은 아뢰기를,
“희안의 말이 옳습니다. 앞으로는 잘못하는 일이 있으면 대간이 논박하여도 되지만, 폐조때 일은 대간으로 하여금 다시 말하지말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 세종조에는 쓸만한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병장(屛障)에 적어두었다가, 불차탁용(不次擢用)하거나, 혹은 명하여 수령을 삼았고, 만약 실수한 일이 있으면 남이 알까두려워하여 반드시 가리워 덮어두고자 하였습니다. 이는 임금이 사람을 대우하는 도리입니다. 다만 유숭조가 올린 차자는 바르지못함이 심합니다. 옛적, 송나라 왕안석(王安石)은 비록 학문이 있었으나 그 마음은 바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소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숭조가 비록 정통한 학문이 있으나, 그 입론(立論)의 바르지 못함이 이와 같으니, 마땅히 죄를 정하여 뒷사람을 면려하여야 합니다.”하였다.
영의정 유순이 아뢰기를,
“신은 폐조에서 우두머리로 정승지위에 있으면서 실수한 일이 몹시 많아서 죽고자하였으나 죽지못하였습니다. 신의 잘못이 이와 같으니, 최세절(崔世節) 등이 시(詩)를 지은 것도 또한 그러지않을 수 없어서였습니다.”하고,
희안(希顔)은 아뢰기를,
“아직 현직에 서용하지 말라했으니, 현직을 하지못하는 기간이 진실로 오래지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만약 이로써 허물을 삼는다면 뒤의 대간이 이를 빙자하여 논박할 것이니, 반드시 종신(終身)의 누가 될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인재는 진실로 쉽게 얻지못한다. 그러나 여러 사람의 의논이 이미 정하여졌으니, 이제 다시 고쳐서는 안된다.”하였다.
대사헌 이계맹(李繼孟)이 아뢰기를,
“즉위 초에 법령을 마땅히 한결같이 하지않아서는 안되는데, 최세철등의 방(榜)을 혹은 파하고, 혹은 회복하며, 혹은 현직에 서용하지말게 하였는데 이제 또다시 고치면 법령이 무상하게될 것이니 누가 능히 믿겠습니까?
어떤 일에 대하여 여러사람의 의논이 이미 정하여졌는데, 한 재상의 건의로 다시 고치면 그 의논은 끝이 없고, 법도 또한 한결같지 못합니다.
조계형의 일은 홍문관 혁파하는 글을 지은 것이 만약 전지(傳旨)를 좇았을 뿐이지 따로 포장(鋪張)한 뜻이 없다면 어찌 이를 논박하겠습니까? 그리고 유자광의 말은 크게 잘못되었습니다. 만약 폐조때 일이라해서 다시 말하지 못한다면, 나인들에게 빌붙은 것과 같은 일도 논란하지말아야 합니까? 대체로 대간의 말은 상께서 스스로 결단하는 것이 옳습니다. 만약 대간으로 하여금 말하지못하게 하라 하였다면 그것은 대신의 할 말이 아닙니다.”하고,
희안은 아뢰기를,
“과연 대간이 아뢴대로 법령은 마땅히 한결같이 하지않아서는 안됩니다만, 죄가 만약 합당한데이르지 못했다면, 비록 열번 바꾸더라도 무방한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여러 사람의 의견은 어떠한가?”하였다.
좌의정 박원종이 아뢰기를,
“일이 이치에 맞으면 열번을 바꾸더라도 해가 없습니다. 지금 공론이 이미 정하여져서 이미 현직에 서용하지말게 하였는데, 또 어찌 번거롭게 고치겠습니까? 이는 끝까지 등용하지않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을 고치고 지조를 바꾸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하였다.
註310]삼대(三代): 하,은,주 註311]여창(臚唱): 전상(殿上)에서 진사합격자의 이름을 외쳐 불러들이는 것 註312]주의(注擬): 추천하는 것 註313]외과(巍科): 대과, 즉 문과
○壬戌/殿講司䆃寺正姜景叙等七人。 權弘講至論佛事, 柳子光曰: “世祖朝 許琮, 登第未久, 極言佛道之非, 厥後丁父憂, 在長湍, 世祖特命起復。 又謂睿宗曰: ‘我雖奉佛, 固無害也。 汝若奉佛如我, 則必亡國、敗家。’ 以此見之, 則世祖非不知佛道之非也。 近來僧道大闢, 終始如一, 則聖治可謂至矣。” 權弘曰: “我國自新羅以來, 崇信佛法, 高麗辛旽之禍慘矣。 佛道非徒惑世、誣民, 亦足以亡國、敗家。” 府院君成希顔曰: “治國莫先於用人, 而人才雖唐虞三代, 未易多得, 況我國人材蓋寡? 如臚唱之聲, 最下之才, 亦未多得, 有名一藝者, 則通國皆知之, 固無遺逸者。 以如此人才之少, 而頃在廢朝, 多見誅戮。 今臣, 待罪銓曹, 弘文館、臺諫注擬, 常患乏人, 必養育, 而得之可也。 成宗愛惜人才, 常注意培養, 故人才輩出。 儒林之中, 如有才學超卓者, 則人必稱之曰: ‘某也必中巍科。’ 厥後試取, 則果如其言。 今之布列朝端者, 卽前日名譽之士也, 而今則未聞有如此之才者也。 且前者權景禧妻, 係疑於庶孽, 故臺諫駁之, 成宗曰: ‘人之賢不賢, 在人主用捨如何耳。 景禧妻係雖微, 予若許通, 則可矣。’ 特命許通, 景禧位至二品。 其後金磶, 大失人道, 有不忍啓之事, 則其時臺諫、侍從駁之云: ‘不宜敍用。’ 成宗曰: ‘曖昧難明之事也。’ 竟不從, 金磶終至顯達。 成宗非爲一景禧、一金磶而然也。 只以重惜人才, 不以人言廢之, 故如此優容, 以勸勉其他也。 今甲子之榜, 其數十九, 而間有可用之人。 雖曰無可用人, 旣云及第, 而勿敍顯職可乎? 今之臺諫者, 皆謫居外方, 目見士習卑陋, 思欲正之, 故如有小失, 則必極言正論。 小臣亦有所失, 前在廢朝, 曺繼衡製革罷弘文館敎旨時, 臣亦製進。 臣若善人, 則以不可革罷啓之, 臣苟延歲月, 僅保軀命, 欲竚見太平之治, 故不得不製耳。 且鄭誠謹, 素有名望, 廢朝以詭異議罪, 擧朝唯唯, 然則擧朝皆有所失。 臺諫之意, 必謂當革罷弘文館之時, 固當辭避而不作。 然若如此, 則超出一世之人也, 豈可多得乎? 今甲子榜人勿敍顯職事, 臣以爲未便。 欲正士習, 則在上之人敎養之如何耳, 何必如此, 然後正士習乎? 大凡人材, 非一朝、一夕, 所能得也。 臣亦有失, 而居大臣之位, 見此無咎之人被駁, 臣實愧恥。 臣意以爲甲子榜人, 通用顯職爲當。” 府院君柳子光曰: “希顔之言當矣。 自今以後, 如有所失者, 臺諫可駁, 廢朝時事, 則使臺諫勿復言之可也。 世宗朝有可用者, 則必書諸屛障, 或不次用之, 或命爲守令, 如有所失, 則恐人之知, 必欲掩覆, 此人君待人之道也。 但柳崇祖所上箚字, 不正甚矣。 昔宋王安石, 雖有學問, 其心則不正, 故終爲小人。 崇祖雖有精學, 其立論之不正如此, 固宜定罪, 以勵其後。” 領議政柳洵曰: “臣在廢朝, 首居相位, 所失亦甚多。 臣欲死而未得。 臣之失如此, 如崔世節等製詩, 亦不得不爾。” 希顔曰: “姑勿敍顯職, 則其不爲顯職, 固未久也。 然今若以此爲過, 則後之臺諫, 籍此而駁之, 必爲終身之累。” 上曰: “人才固未易得。 然群議已定, 今不可更改。” 大司憲李繼孟曰: “卽位之初, 法令不宜不一, 而崔世節等榜, 或罷、或復、或勿敍顯職, 今又更改, 則法令無常, 誰能信之? 凡有事, 群議已定, 一宰相建白, 而更改, 則其議無窮, 而法亦不一矣。 曺繼衡事, 則其製革罷弘文館之文, 若只從傳旨, 而別無鋪張之意, 則何以駁之? 且柳子光之言, 大爲失也。 若以廢朝時事, 不復言, 則如攀附內人等事, 亦可勿論耶? 大凡臺諫之言, 在上自斷可也。 若曰勿使臺諫言之, 則非大臣之言也。” 希顔曰: “果如臺諫所啓, 法令不宜不一, 罪若不至於當, 則雖十易之, 無妨矣。” 上曰: “僉意何如?” 左議政朴元宗曰: “大抵事之當理, 則雖十易之, 果無害也。 今公論已定, 旣以勿敍顯職, 則又豈紛更乎? 此非終不用, 以待其改心、易操。”
중종 3권, 2년(1507 정묘/명정덕(正德) 2년) 5월 6일 무신 1번째기사
문신을 모이게하여 시를 짓게하여 수석한 강경서의 자급을 올려 당상으로 삼다
문신(文臣)을 전정(殿庭)에 모이도록 하여 배율(排律) 심운(十韻)을 짓게했는데, 강경서(姜景敍)가 수석을 차지하니, 한 자급(資級)을 더하여 당상(堂上)으로 올리도록 하고, 그 다음인 이행(李荇)에게는 말[馬]을 하사했다.
○戊申/命會文臣于殿庭, 使製排律十韻。 姜景敍居首, 命加一資, 陞堂上, 其次李荇, 賜馬
중종 3권, 2년(1507 정묘/명정덕(正德) 2년) 5월 20일 임술 1번째기사
대사간 강경서 장령 강중진이 하한문의 일을 논계하다
조강을 하였다. 대사간 강경서(姜景敍), 장령 강중진(康仲珍)이 하한문의 일을 논계했다. 영사(領事) 유순정이 아뢰기를,
“음율(音律)을 해득하는 자를 제조(提調)로 삼는다는 것이 《대전(大典)》에 있습니다. 때문에 변포(卞袍)등이 음율을 알므로 제조를 맡겼고, 한문도 음율을 아는 자로 앞서 장악원정(掌樂院正)으로 있을 때에 근간(勤幹) 신중하고 일에 능숙하다는 소문이 있기때문에 신이 박원종과 더불어 의계(議啓)하였습니다. 신이 평안도감사로 있을 때에 한문이 정주목사(定州牧使)였는데, 그 정사의 실적을 보니 도내에서 제일이었고, 아전과 백성이 지금까지 사모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에 음율아는 사람을 차임했기 때문에 윤허하지 않는다.”하였다.
경서가 또 아뢰기를,
“변포는 통정(通政)이므로 제조에 맞지않고, 다만 음율을 가르칠 뿐입니다”하고, 또 아뢰기를,
“어제 김준손이 아뢴 김극괴(金克愧)의 일은 조관(朝官)을 가려보내어 추국(推鞫)하시기 바랍니다.”하니,
조원기(趙元紀)를 보내어 김극괴의 일을 추핵하게 하였다
○壬戌/御朝講。 大司諫姜景敍、掌令康仲珍諭河漢文事。 領事柳順汀曰: “以解音律者爲提調, 亦在《大典》, 故卞袍等, 以知音, 差提調, 漢文亦知音律者, 前爲掌樂正時, 以勤謹練熟聞, 故臣與朴元宗議啓耳。 臣爲平安道監司時, 漢文爲定州牧使, 觀其政治, 道內第一, 吏民至今思慕。” 上曰: “前以知音人差之, 故不允。” 景敍又曰: “卞袍以通政, 不稱提調, 而只敎誨音律耳。” 又曰: “昨日金駿孫所啓金克愧事, 請擇遣朝士推鞫。” 命遣趙元紀, 推,金克愧事。
중종 3권, 2년(1507 정묘/명정덕(正德) 2년) 5월 26일 무진 2번째기사
대사헌 민상안, 대사헌 강경서등이 합사하여 북간, 상좌, 구수영등의 일을 논계하다
대사헌 민상안(閔祥安), 대사간 강경서등이 합사(合司)하여, 북간, 상좌, 구수영등의 일을 논계하고, 또 아뢰기를,
“한순(韓恂)은 성종께서 방출(放出)한 궁녀 귀비(貴非)를 간음하여 1남 1녀를 낳고도 방자한 행동이 기탄없다가 반정(反正)한 뒤에 도로 내보낸 사실은 귀비가 이미 문초에서 자복하였으니, 아울러 국문하소서.”하니,
정원에 전교하기를,
“홍북간, 상좌등은 공로를 기록할 때에 분요(紛擾)로 기록에 빠졌으니, 빨리 추록(追錄)하라.”하고,
또 대간에게 전교하기를,
“북간, 상좌등은 방금 공신으로 추록했기 때문에 윤허할 수 없고, 한순의 일은 폐조 때에 추문을 다하지 않은 의도가 있을 것이니 다시 상고하여 아뢰고, 구수영의 일은 추문을 다한 뒤에 다시 아뢰라.”하니,
상안등이 또 아뢰기를,
“북간 등은 노비로서 주인을 배반했는데, 지금 그 죄를 다스리지 않고 또 공로를 기록하게되면, 이는 악한 사람을 상주는 것이므로 풍속을 크게 해칠 뿐 아니라 성덕(聖德)에도 누가되니, 속히 주인에게 돌리소서.”하고,
또 상차(上箚)하였는데, 그 대략에,
“전하께서 등극하시던 처음에 맨 먼저 ‘모든 투속(投屬)되었던 공사천(公私賤)은 본주인에게 돌려주라.’명하시자, 온 나라 신민이 눈을 씻으며 서로 경하하지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결과 명분(名分)이 비로소 정해지고 공론이 크게 행해진다고 여겼는데, 뜻밖에도 북간 부자를 특명으로 내수사에 그대로 두게하시니, 신등은 실망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북간과 그 자식 상좌는 녹수에게 의탁하여, 지난 계해년 정월에 내수사에 소속되고, 갑자년에는 녹수에게 사급(賜給)되었습니다. 이 자는 주인을 배반함이 더 심한 자인데, 전하께서 이미 죄를 주지않으시고 도리어 사은(私恩)을 베푸시니, 이는 그의 악을 기르는 것입니다.
폐조때에 배반한 하례배를 불러들여 명분을 땅을 쓴 듯 없애고 인군을 미혹시키고 나라를 어지럽게한 것은 녹수가 제일 심하니, 전하의 명성(明聖)으로 마땅히 통렬히 개혁할 것이 이보다 더 급한 것이 없는데, 지금 여러 날을 논집(論執)해도 어렵게 여기고 결단하지않으시니, 이는 그 잘못을 본받고 그 폐단을 답습하는 것입니다.
공론은 다 이것을 첫 정사의 큰 결점이라고 하는데, 전하께서는 홀로 괴이하게 여기지않고 도리어 공로가 있다하여, 원종공신(原從功臣)의 줄에 추록하고자하시니, 신등은 자세히 알지못하나, 북간 부자가 무슨 공로가 있어서 이런 분부를 내리십니까?
옛날 정공(丁公)646)은 한(漢)나라에 큰 공이 있음에도, 고조(高祖)가 서슴없이 목벤 것은 사사로운 정이 대의를 가릴 수 없는데다가 처음 정사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게 하지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전하께서 북간을 공로가 있다 여기시는 것은 반드시 거마(車馬)사이를 바쁘게 따라다닌 것에 지나지 않으며, 주인을 배반한 그 악은 정공(丁公)의 불충(不忠)보다 만배나 더한데도, 전하께서 이미 벌을 주지않으시고 온 나라의 공론을 거절하며 사정으로써 공의를 없애어 정사를 해롭게하시니, 이와 같이하고도 지난날의 폐풍을 개혁하여 법을 후세에 전할 수 있겠습니까?”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註646]정공(丁公): 이름은 고(固). 초(楚)나라 장수가 되어 항우(項羽)를 도왔는데, 한고조(漢高祖)를 팽성(彭城) 서쪽 골짜기에 몰아넣고 단기로 달려들었다. 이에 급한 고조(高祖)가 정공에게 화해를 청하자, 정공은 그대로 회군(回軍)하고 말았다. 그 후에 고조가 항왕(項王:항우)을 멸망함에 미쳐 정공이 고조를 알현(謁見)했는데, 고조는 정공을 군중(軍中)에 돌리면서, “정공이 항왕의 신하가 되어 불충(不忠)하므로 항왕이 천하를 잃었다”하면서 참(斬)하여 신하된 자를 징계했다. 《사기(史記)》 계포전(季布傳).
○大司憲閔祥安、大司諫姜景叙等, 令司論北間、上佐, 具壽永等, 又啓: “韓恂奸成宗放出宮女貴非, 産一男女, 恣行無忌, 反正後還出事, 貴非已服招, 請竝鞫。” 傳于政院曰: “洪北間、上佐等各人, 方錄功時, 因擾落書, 斯速追錄。” 又傳于臺諫曰: “北間、上佐等, 今方追錄功臣, 故不允。 韓恂事, 廢朝時有未畢推之意, 其考以啓。 具壽永事, 畢推後更啓。” 祥安等又啓: “北間等以奴背主, 今不治罪, 又至錄功, 則是賞惡矣。 非特大毁風俗, 亦累聖德, 宜速還本主。” 又上箚, 其略曰:殿下臨御之初, 首命凡投屬公私賤, 幷還其主。 一國臣民, 莫不拭目相慶, 以爲名分始定, 公論大行, 不意北間父子, 特命仍屬內需司, 臣等不勝缺望。 北間及其子上佐, 依托綠水, 去癸亥正月, 投屬內需司, 甲子年, 賜給綠水, 此背主之甚者。 殿下旣不加罪, 反示私恩, 是長其惡也。 在廢朝, 招納叛隷, 名分掃地, 以至迷君亂邦者, 綠水其尤也。 殿下明聖, 所當痛革者, 莫急於此。 今累日論執, 留難不決, 是效其尤, 而踵其弊也。 公論皆以此爲初政之巨疵, 而殿下獨不爲怪, 反以爲有功, 欲追錄原從之列, 臣等未審北間父子, 有何功勞, 而殿下有此敎耶? 昔丁公, 有大功於漢家, 而高祖斬之不疑者, 以其私不得掩義, 而在初政, 尤不得不爾故也。 殿下以北間爲有功者, 必不過奔走車馬之間, 背主之惡, 萬倍於丁公之不忠, 而殿下旣不加誅, 拒一國公論, 以私廢公, 妨政害治, 如此其能革前日弊風, 垂憲後世乎?不允。
중종 3권, 2년(1507 정묘/명정덕(正德) 2년) 6월 10일 임오 3번째기사
정사와 교화에 필요한 12가지 조목에 관한 대사간 강경서, 사간 김당등의 상소
대사간 강경서(姜景敍), 사간 김당(金璫), 헌납 김숭조(金崇祖), 정언 신봉전(申奉全)과 박거린(朴巨鱗)등이 상소하기를,
“삼가 듣건대, 많은 혼란은 나라를 부흥시키게 하고 큰 근심은 성지를 계발[啓聖]한다 하였으니, 대개 사세가 위태로우면 의지가 날카롭고, 마음이 괴로우면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화를 되돌려 복이 되게 하고, 위기를 되바꾸어 안전하게 하는 것입니다.
지난 연산때에 강상(綱常)을 끊어 없애고 민생을 잔인하게 학대하여, 천명이 가버리고 인심이 이탈되어 나라 사세의 위태롭기가 터럭 하나같았는데, 전하께서 천명에 부응하고 인심에 따라 빛나게 임금자리를 이어받아 신속하게 세상을 일소하고 조정을 맑게하시니, 천지가 맑고 화하지 않은데없고, 안팎이 즐겁고 기쁘지않은데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밝고 밝으신 상제(上帝)께서 큰 복을 내리셔야할 것인데, 올해 정월 첫날에 일식의 변괴가 있었고, 5월 양기가 성한 때에 월식의 재변이 있었습니다. 신등이 생각하건대, 상제의 뜻이 전하를 인자하게 사랑하므로 밝게 재앙과 변괴를 보여, 전하로 하여금 날이 갈수록 삼가 길이 어질게 다스리도록 하려는 것이니, 이는 황천(皇天)이 전하를 돌보아 도와줌이 깊은 것입니다. 전하께서 한시라도 하늘의 뜻을 받들어 따르지않고 하늘의 명령을 조심하고 두려워하지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마음을 단속하고 뜻을 가다듬어 옛 성인들의 덕을 고찰하여 소박한 도리를 돈독히 하시되, 뜻을 정하고 간함을 받아들이며, 작상(爵賞)을 중히 여기고 용도(用度)를 절약하며, 어진 선비를 친히 하고 아첨하여 알랑거리는 자를 멀리하며, 학교를 일으키고 선비의 습속을 바로잡으며, 환관을 억제하고 외척을 보호하며, 상벌을 밝히고 백성의 고통을 돌보아, 하늘의 꾸짖음에 보답하고 중흥하는 정사와 교화의 융성을 이루시면 이보다 다행함이 없을 것이므로 신등이 조목을 들어 아뢰어 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릴까합니다.
1. 뜻을 정하는 것[定志]입니다. 《대학》에 ‘멈출데를 안 뒤에 정하게된다.’ 하였으니, ‘멈출데’라는 것은 사물의 이치의 당연한 극치요, ‘정한다.’는 것은 착한데를 가리어 굳게지키며 마음을 망령되이 움직이지않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대개 마음이 정한 주장이 없어, 잡고 놓음이 일정치않아 의리가 먼저 극진하게되지 않으면 많이 들을수록 의혹되기 쉽고, 의지가 먼저 정해지지않으면 착하게하여 가다가도 더러 변하는 것이니, 요컨대, 성현의 말씀을 늘 생각하며 선왕의 덕을 항상 법으로 삼아, 근습(近習)675)의 말에 물들지 않고 속된 의논에 견제됨이 없이 믿기를 반드시 독실하게 하고 마음 수습하기를 반드시 한가한데서도 하며, 어진 사람을 쓰고 간사한 사람을 버림이 모두 그 마땅함을 얻게하여, 한 시대의 다스림이 삼대(三代)676)와 같이 융성하게한 뒤에 그만두어야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 어진 사람과 바른 선비를 뽑아 법종(法從)677)에 모시도록 하여 조석으로 자리를 같이하여 성정(性情)을 안정하게 기르고, 착한 도리를 말하게 하여 문견을 넓히고, 외물에 유혹되지도 않고 인심(人心)678)에 끌리지도 않아 항상 바른 도를 굳게지키고 흔들리지않게 하면, 마음의 본체가 허령불매(虛靈不昧)하여 고요한 물과 같고 티없는 거울같아, 사물을 접하여 느끼는 바가 이치에 합당하게되어, 자연 몸이 닦여지고 집이 평온하여 나라가 잘 다스려질 것입니다.
2. 간함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허물듣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흥하지않는 일이 없고 충간(忠諫)을 거역하는 사람은 망하지않는 일이 없으니, 허물듣기를 좋아하면 아랫사람의 정이 통하고, 아랫사람의 정이 통하면 정사가 결함이 없는 것이니 이래서 다스리고, 충간을 거역하면 바른 도가 막히고 바른 도가 막히면 임금이 외로워지니, 이래서 어지러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날 어진 임금은 늘 상하가 서로 막히고 뜻이 서로 미덥지않아, 정교(政敎)가 순일하지 못하고 상벌(賞罰)이 밝지못하여, 뭇 신하들의 사특과 바름을 가리지못하고 백성들의 이해를 듣지못할까 염려하여, 특히 귀와 눈이 되는 관원을 두어 충간의 길을 열어놓은 것이니, 모두 종사(宗社)와 생령(生靈)을 위한 큰 계책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 바른 말 구하기를 목마르듯 하고, 간하는 말 듣기를 물 흐르듯 하셨으며, 이제 또 대간에게 하사까지 하여 권장하는 뜻을 보이시자, 사람들이 너나없이 모두 경사로 여기니, 이는 이른바 ‘흥하는 임금은 간하는 신하에게 상을 준다.’는 것이니, 누군들 곧은 말로 바르게 간하여 충성을 바치려 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듣건대, 당(唐)나라 초기에, 수(隋)나라 때의 습속으로 인해 천하에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법조(法曹)679) 손복가(孫伏伽)가 표(表)를 올리기를, ‘수나라가 그 허물듣기를 싫어하다가 천하를 잃었으므로 폐하께서 얻게 되셨으니, 마땅히 그 실패한 전철(前轍)을 아랫사람들이 심정을 다해 말하도록 하소서.’하니, 당나라 임금이 대단히 기뻐하여 조서를 내려 포상하고, 발탁하여 시어사(侍御史)를 삼아 베[布] 3백필을 하사하고, 이어 온 나라에 반포하니, 이로부터 일을 논하는 사람들이, 오직 그 말이 자기의 충성을 다하지못하고 간하는 것이 위의 뜻을 격려하지못할까 두려워하였으며 기휘(忌諱)될까 염려하거나 범촉(犯觸)됨을 혐의하지않았으니, 어찌 몸을 돌보지않고 임금의 비위 거스르기[逆鱗]680)를 좋아서 그러하였겠습니까?
임금이 권장하여 그렇게 된 것입니다.
대체로 따르는 것만 좋아하고 거스리는 것을 싫어함은 예나 지금이나 사람의 상정이나, 당나라에서 천안(天顔)범하는 간쟁을 좋아하고 아첨하는 간사한 말을 싫어한 것은, 아마도 순종에 따른 이득은 가볍고 위험과 멸망의 화는 크기 때문이었으니,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당나라 임금의 아름다운 덕을 본받아, 간하는 말을 좋아하는 마음과 간쟁을 따르는 미덕을 시종일관하여 넓게 보고 다 들어주되, 허심탄회하게 남의 말을 받아들여, 궁벽한데 사람의 말이 숨겨지지않고 먼 데 사람의 말이 막히지않게 하여, 임금의 밝으심이 만리에 미치고 백성의 마음이 구중궁궐에 통하게 하시면, 성덕(聖德)이 더욱 드러나 정사가 아름답게 밝아질 것입니다.
3. 벼슬을 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대체로 작록(爵祿)은 임금이 신하를 부리고 호걸(豪傑)을 묶는 기구입니다. 임금이 귀히 여겨 재주없는 사람에게 주지않으면 사람들이 작록을 사모하게 되고, 신하들이 천히 여겨 누구나 낚으려하면, 사람들이 싫어하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 조빈(曹彬)681)이 강남을 차지하고 돌아와 방자(榜子)682)를 올리되, ‘명을 받고 강남으로 가서 공사(公事)를 처리하고 왔습니다.’하니, 태조(太祖)683) 역시 ‘본래 경에게 사상(使相)을 제수하려한 것인데 유계은(劉繼恩)이 복속치않았으니 잠시 기다리라.’하였으니, 대체로 조빈이 공을 자랑하지 않은 것과 태조가 작상(爵賞)을 아낀 것이 모두 잘한 일이라할 수 있습니다.
조여우(趙汝愚)684)와 한탁주(韓佗胄)가 같이 영종(寧宗)을 추대하였을 적에, 탁주가 정책(政策)685)한 공로를 추천하고자하니, 여우가 ‘나는 종실이요 너는 외척인데 어찌 공을 말할 수 있겠는가?’하였고, 또 섭적(葉適)686)의 공을 추천하니, 사양하기를, ‘나라가 위태로와서 충성을 다하는 것은 직책이다.’하였으니, 자기의 공으로 여기지 않음이 이러했습니다.
요새 정국공신(靖國功臣)으로 먼저 거의(擧義)하기를 주장한 사람들의 공이야 크지만, 그 중에 소식을 듣고 참여하기를 간청한 자는 그 몸을 온전히 하려한 것에 불과한데, 그들이 공신에 참여한 것은 너무도 외람되지 않습니까?
성종때는 재상자리가 비면 반드시 당하관을 올려서 썼는데, 이제는 가선(嘉善)과 통정이 무려 수백명이나 되니, 관작의 외람됨이 한결같이 이에 이르렀습니다. 가령 ‘중흥(中興)때이므로 많을 수밖에 없다’하신다면, 광무제(光武帝)687)가 중흥하여 천하를 얻을 때 성과 땅을 뺏고 적장을 베고 진지를 함락시킨 장수가 많았건만 공신은 불과 28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룻밤사이에 공신된 자가 백여명이 되고, 그 원종(原從)이라고 하여 조그마한 공도 없이 당상관에 오른 자가 거의 백명에 이르니, 어찌 성덕의 결함이 아니겠습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멀리 성종을 본받아 작록을 중히 여기시되, 일자(一資)나 반급(半級)의 자리라도 어진 사람이 아니면 주지않고, 용렬하거나 어리석은 사람은 공이 있어도 임용하지않으시면, 불초한 사람은 스스로 알아 물러갈 것이고 어진 사람은 무리지어 나와 좌우에서 정사를 돕게될 것입니다.
4. 용도를 절약하는 것입니다. 대체로 재물이란 사람을 기르는 것으로서 쓰기를 절약하지않으면 도리어 사람을 해치게 되므로, 법으로 절약하여 낭비하지도 않고 백성을 해되게 지도 않게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옛날 어진 임금은 한번 찡그리고 웃는 것도 반드시 아끼고 헤어진 바지도 반드시 간직하여688), 일호라도 재물쓰기를 헛되이 하지않았고, 송태조는 일찍이, ‘짐은 천하를 위하여 재물을 지키는 것이다. 어찌 망령되이 쓰겠는가?’하였으니, 그 재물쓰기를 가볍게 여기지않음이 이러하였습니다.
신등은 전하께서 보신, 우리 조정이 재물을 쓰는데 잘하고 잘못된 것에 대하여 전하께서 보신 것을 가지고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선 성종께서 지치(至治)의 근본을 아시어 백성들에게 받는 세를 하나도 억울하게 거둠이 없으셨고, 나라의 재물과 포백(布帛)을 조금도 헛되이 씀이 없었으므로 인심이 화락하고 농사가 풍년이 들어서 창고에 곡식과 비단이 썩도록 넘쳤는데, 연산 때에 이르러 부고(府庫)가 가득찬 것을 믿고 선왕의 재물을 경홀히 여겨 한없는 욕심을 부리고 자녀의 마음을 기쁘게만 하여, 헛되이 밥먹여 가르치는 사람이 수천이나 되고 망령되이 비단옷입는 계집이 수백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백성에게서 거두는 것은 날로 늘어나나 부고에 있는 것은 날로 줄어들어 창고에는 반년 쓸 물건이 없고 곳간에는 한때 쓸 것도 모자라니, 사람과 귀신의 미움을 사서 스스로 망하게된 것을 전하께서 친히 보신 바입니다.
지금 백성들은 가난에 빠지고 국고는 텅비어 성종때에 비하면 백분의 일도 안되니, 어찌 함부로 내리고 상을 주어 부고의 재물을 비게 하겠습니까?
부고에 곡식과 비단이 넉넉하더라도 마땅히 가난한 백성을 구휼하여 민심을 수습할 것이요, 명분없이 허비하여 국고가 비는 것을 한탄하게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5. 어진 선비를 가까이하는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사람이 어질어야만 등용하는 것은 정사를 다스리는 것이요, 사람이 재능이 있어야 벼슬시키는 것은 일이 잘 되게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군자와 소인은 다 각각 그 무리에 따르는 것이니, 만일 어진 줄은 알지만 쓰지못하거나 쓰더라도 믿지못하고 믿더라도 끝까지 하지못한다면, 군자는 도를 행하기에 뜻을 두므로, 구차하게 머물러있지 아니할 것이니, 어찌 알아서 쓸 수 있는가?’하신다면, 신등은, 임금이 어진 사람을 쓸 마음이 있어서 잘 가린다면, 어짐과 어리석음을 알기 어렵지 않다고 여깁니다.
대개 덕행을 숭상하는 사람은 흉덕(凶德)이 없고, 공정을 힘쓰는 사람은 간사하지않으며, 청렴한 사람은 취하지 않는 바가 있고, 근신한 사람은 하지 않는 바가 있으며, 신의가 있는 사람은 거짓된 자와 말하지아니하고, 지혜가 있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과 놀지아니합니다. 그러므로 난새[鸞鳥]는 새매와 날개를 맞대지않고, 향기로운 풀[薰]과 냄새나는 풀[蕕]은 한그릇에 담지 않는 것이니, 그 이치가 당연하여 더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거울같이 밝고 저울처럼 공정하게 선악을 구별하되, 힘써 어진 인재를 얻어 항시 곁에 두시고 허심탄회하게 묻고 자신을 극복하여 몸을 낮추시며, 아끼기를 더욱 돈독히 하고 친근하기를 더욱 두텁게하며, 한 가지 실수로써 조금이라도 그 마음을 의심하지 마시어 소인이 그 사이에 끼어들지못하게 하신다면, 군신이 서로 믿게되어 어진 사람이 즐겁게 쓰임이 되어줄 것입니다.
6. 참소하고 아첨하는 사람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공자는 ‘아첨하는 사람을 멀리 하라’하였고, 《서경(書經)》에는 ‘짐은 참소가 착한 사람의 일을 끊는 것을 미워한다.’[朕堲讒說殄行]하였습니다. 대개 아첨하는 사람은 그 마음이 험하고 쓰는 술책의 교묘함이 천태만상이나 사람들이 알지 못하므로 글로 무롱(舞弄)하고 지혜로 꾸미어[舞文飾智] 어질고 착한 사람을 모함하는데, 임금이 알지못하여 아첨을 공손하다하고 고자질하는 것을 정직하다여겨 그 말을 듣고서 신용한다면, ‘그 착한 사람의 행실을 끊어버린다.’는 것이 어찌 어렵겠습니까?”
《시경(詩經)》에 ‘윙윙거리는 파리, 가시 울타리에 앉았도다. 참소하는 사람은 한이 없어, 사방 나라를 어지럽혀 놓네.’[營營靑繩止于棘讒人罔極交難四國]하였으니, 아첨하는 사람은 흰 것을 검게하여 그 꾀를 이루는 것이므로, 시인(詩人)이 이를 미워하여 ‘저 참소하는 사람을 잡아다가 승냥이, 호랑이에게 던져라. 그들도 먹지않으면, 저 북쪽에 던져버려라.’ [取彼讒人投卑豺虎豺虎不食投卑有北]하였으니, 참소에 마음이 상하게 어찌할 수없어 한 말입니다.
그래서 초(楚)나라에 무극(無極)689)이 있으므로 오자서(伍子胥)가 적국의 소용이 되었고, 한(漢)나라에 강충(江充)690)이 있으므로 태자가 무고의 화에 빠졌으며, 두후(竇后)691)의 분별이 아니었으면 주발(周勃)이 반신(叛臣)이 되고, 소제(昭帝)의 밝음692)이 아니었으면 곽광(霍光)이 난적이 됨을 면하지못하였을 것이니, 참소의 해를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생각하건대, 전하께서는 천품의 예성(睿聖)하심이 천고에 뛰어나시니, 어찌 참소하고 아첨하는 사람이 조정에 섞일 수 있겠습니까마는, 혹시 있다면 총명으로써 밝히시고 과감하게 결단하시되, 속여 숨기는 자취를 상세히 구명하시고 참소하는 말을 듣지않으신다면, 비위를 맞추는 아첨이 저절로 사라지고 참소도 없어질 것입니다.
7. 학교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학교를 세워 선비를 기르고 사부(師傅)를 두어 교육하는 것은 그야말로 나라의 급선무요, 제왕의 고매한 일이라 합니다.
우리 성종께서 깊이 그러한 것을 아시어 만기(萬機)의 여가에 학교에 뜻을 두시어, 학전(學田)693)을 주어 권장하고 사부를 가려 교육시켜 교양과 권면을 곡진하게 방법을 다하니, 학교에서 배우는 사람이 날로 성하고 달로 증가하여 모두 경술(經術)에 통달하고 문장에 뛰어나며 행실이 순수하여 모두 학행의 실적이 있어 변변한 군자가 되었습니다.
연산때에는 문예를 천시하여, 학교를 폐하여 놀이터를 만들고 유생을 시켜 연(輦)을 메게하니, 책을 읽는 선비가 백에 하나도 없어 문풍(文風)이 무너지고 어지러워져 말로 형언할 수 없었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시어 없어진 것을 복구하고 옛 법을 회복하시자, 유생들이 공부할 줄 알게되었으니, 이제 학문과 덕행이 있는 사유(師儒)로 호원(胡瑗)694)과 같이 몸을 바르게하고 사물을 기율(紀律)할 사람을 잘 가려 배우는 자의 교훈과 감독을 모두 법도가 있게하되, 열흘마다 살피고 달마다 시험보여 행의(行義)를 장려하고, 또 생도들의 과거에 합격한 수의 다소로, 스승의 등급을 정하면, 스승과 학생이 모두 권면하고 게으르지아니하여 점차 효과가 쌓여 인재가 많이 배출될 것입니다.
8. 선비의 풍습을 바로잡는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나라의 근심은 사대부(士大夫)가 염치를 모르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사대부가 염치없으면 사람들이 모두 재물만 이(利)롭게 여기고 인의(仁義)는 이롭게 여기지않아 자신을 잊고 부정한 재물[賕]을 받으며 사(私)를 따르고 공(公)을 폐하여, 이리처럼 탐내고 파리처럼 덤벼 염치가 없게되는 것입니다.
지난 연산때는 조사(朝士)들이 모두 지조를 잃어 더러는 전비(田非), 장녹수(張綠水)에게 붙어서 높은 벼슬을 차지한 자가 있고 혹은 흥청(興淸)에 붙어 남의 토지와 집을 강탈한 자가 있으며, 글읽은 선비라고 칭하는 자가 역사를 감독하는 천역을 부끄럽게 여기지않고, 고관의 지위에 있는 자가 부모의 상례를 지키지아니하여 다시는 인간의 수치되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지못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 폐정(弊政)을 개혁하여 선비의 풍습을 크게 혁신하셨으나 물든 지 오래되어 단번에 변화될 수 없으니, 바라건대, 전하께서 예양(禮讓)의 기풍을 숭상하시고 염치의 지조를 장려하여, 위로는 청의(淸議)가 행해지고 아래로는 더러운 습속이 고쳐지게하시되, 만약 완악하고 둔하고 염치가 없어 청의에 용납되지않는 자가 있으면, 조정의 반열[朝班]에서 자취를 없애어 사대부에 끼지못하게 하소서.
그래도 고치지않으면 들[郊]로 내치고 그래도 고치지않으면 시골[遂]로 내치시면, 사람들이 모두 보고 느끼며 경계할 줄 알아, 부끄럽게 여기며 바로잡게될 것입니다.
9. 환시(宦寺)를 억제하는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환관의 화는 그 유래가 오래나 임금이 그래도 깨닫지못하고 서로 이어 패망하기를 마치 같은 길을 가듯 합니다.
동한(東漢) 중엽에 오후(五侯)695)가 권세를 독차지하여 손으로는 나라의 법을 농락하고 입으로는 천작(天爵)을 마음대로 부려, 크게 당옥(黨獄)696)을 일으켜 명사들을 다 죽이니, 황건적(黃巾賊)697)이 일어나 천하가 크게 어지럽자, 조조(曹操)가 그만 이를 틈타 한나라 사직을 무너뜨렸습니다. 당나라 말기에 환관들이 정권을 쥐어 군부(君父)를 시해하고 재상을 얽어죽여, 피가 흘러 도랑을 이루고 조정이 거의 비게되었는데, 그들은 자칭 정책국로(定策國老), 문생천자(門生天子)698)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황소(黃巢)의 군사699)가 일어나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지자, 주전충(朱全忠)이 변(汴)700) 으로 들어가 당나라를 찬탈하였습니다. 후세의 임금들이 어찌 이것을 경계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전하께서는 밝은 지혜로 아랫사람을 거느리고 환관들을 종처럼 다루시니 참으로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모실 때나 버릇없이 구는 중에 속임을 당하시고도 깨닫지 못하실까 두렵습니다.
옛날 구사량(仇士良)이 그 무리들에게 교사(敎唆)하기를, ‘천자는, 글을 읽거나 유생(儒生)과 가까이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지난 역대의 흥망을 보고 마음에 근심하고 두려워할 줄 알게되면 우리를 멀리하고 배척할 것이다.’하였습니다. 그 흉계가 이와 같으니, 그 해됨을 알 수 있습니다.
전하께서 만일 나이 젊은 환관으로는 뜰을 쓸고 문을 여닫는 일을 하게하고, 품질이 높은 나이든 환관은 때에 따라 부리시되, 궁중에서는 사특하고 아첨하는 짓으로 그 간계를 부리지못하게 하고, 밖에서는 총애를 믿고 방자하고 교만한 짓을 못하게하여, 안팎이 구별되고 궁금(宮禁)이 엄숙하고 바르게 되도록 하시면, 환관이 힘을 못써 절로 걱정되지않을 것입니다.
10. 외척을 돌보는 것입니다. 신이 생각하건대, 외척이란 초방(椒房)의 가까운 집안으로 소홀히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외척을 너무 가까이하면 비방을 듣게되니, 기무(機務)701)를 맡기거나 높은 자리 주어 총애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만일 지각없는 외척으로 벼슬이 주자(朱紫)702)에 이르러 몸에 은, 금띠를 매고 그 오만한 마음을 키워 방자하게 교만횡포한 짓을 한다면, 나라의 바른 도를 훼손시키고 조정의 법을 그르칠 것이니, 그 옳지못한 죄를 범한 때에 귀한 외척이라해서 너그러이 용서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그를 후하게 대접하는 것은 바로 화를 주는 것입니다.
옛날 당나라 문덕황후(文德皇后)703)가 태종에게 아뢰기를, ‘첩이 몸을 황제[紫宮]께 의탁하여 존귀함이 이미 지극하므로, 사친(私親)이 조정에서 권세에 의거하여 덕이 없이 녹을 받아 화를 받기쉽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니, 외척으로서 봉조청(奉朝請)만 하더라도 족합니다’하였고, 송나라 선인태후(宣仁太后)704)가 9년동안 임조(臨朝)705)하다가 병환이 있자, 여대방(女大防) 706)에게 이르기를, ‘9년동안의 일을 말하건대, 일찍이 고씨(高氏)707)에게 은혜를 베푼 적이 있었는가? 지극히 공정하게 했을 뿐이다’하였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 두 말을 본받으시되, 문제(文帝)가 두광국(竇廣國)708)에게와, 명제가 마원(馬援)709)에게 하듯이 하여, 사사로운 뜻으로 벼슬을 주지도 마시고, 친하고 귀하다고 가까이하지도 마시며, 일을 맡기지도 마시고 권세를 주지도 말아, 충후(忠厚)한 사람은 은혜와 예로서 대접하고, 부들부들 아첨하는 자는 너그러이 포용하여 멀리하시며, 유보(乳保)710),왕비의 집안은 때로 만나 주시되 자주 궁중에 드나들면서 말을 전파하지못하게 하여, 의로써 밖을 막고 예로써 안을 다스리는 것이 곧 외척을 돌보는 길입니다.
11. 상벌을 밝히는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하늘은 덕있는 사람에게 명을 내리는 것이니, 5등의 복장을 다섯 가지로 밝히고[天命有德五服五章哉], 하늘은 죄있는 사람에게 벌을 주는 것이니, 다섯 가지 형벌을 다섯 가지로 쓰라.’[天討有罪 五刑五庸哉]711) 하였으니, 이는 작상(爵賞)과 형벌이 비록 임금의 정사지만 실은 상제(上帝)가 명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어찌 조금이라도 사사로운 뜻을 그 사이에 둘 수 있겠습니까?
이런 까닭으로 요(堯)가 우순(虞舜)을 들어 쓴 것은 그가 큰 효자이기 때문이요, 순이 4흉(四凶)712)을 벤 것은 너무나도 간악함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니, 그들을 쓰고 죽임이 원래 그들에게 달린 것이요, 요나 순이 무슨 상관이 있어서 거기에 성내고 기뻐하겠습니까? 연산은 이와 달라서 마음에 맞으면 악할지라도 반드시 상을 주고, 뜻에 거슬리면 착할지라도 반드시 벌하여 상과 벌이 분별이 없고, 권면과 징계가 법도가 없어 충성스럽고 어진 사람은 멀리 귀양가니, 아첨하는 것이 풍조가 되어 관아는 어지럽고 사람은 탐심을 부려 마침내 나라를 잃었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요, 순의 공정함을 본받고 연산의 잘못을 경계삼아 항상 지극히 공평하고 지극히 바른 마음을 가지시어 친근히 하거나 멀리하는 편벽된 사심을 두지마시고, 그 허물을 벌주어야할 경우라면 비록 귀할지라도 용서하지않으며 그 착한 것을 마땅히 상주어야할 경우라면 비록 소원하더라도 신임하시어, 사사로운 뜻때문에 그 공정한 길을 해하지도 아니하고 기쁨과 성냄때문에 그 법을 굽히지도 마시기를, 하늘이 만물을 생양(生養)하고 숙살(肅殺)함이 아무런 마음이 없이 하듯 하소서. 그러면 상과 벌이 모두 마땅하여 사람들이 권면하고 저지될 줄 알 것입니다.
12. 백성의 괴로움을 돌보는 것[恤民隱]입니다. 신이 듣건대, ‘하늘의 보고 들음은 백성을 통해서 하고 나라의 존망은 저 하늘에 매였다.’합니다. 옛날 어진 임금은 그러함을 잘 알아, 백성사랑하기를 마치 부모가 어린 자식 돌보듯 하고 백성 두려워하기를 썩은 새끼로 여섯 말[六馬]713)을 어거하듯 하여, 부역과 세납을 가볍게하여 어루만져 두루 돌보기를 지극하게 하지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이제 우리 전하께서 한결같이 성종(成宗)의 훌륭한 다스림을 본받아, 오직 백성돌보기를 일삼으시고 바치지 못한 공물(貢物)과 부세를 모두 감면하고 이름없는 부당한 징수를 다 없앴으니, 백성을 사랑하여 기르심이 지극하십니다. 그러나 나라와 각도(各道)나 군읍(郡邑)에서 어찌 모두 양리(良吏)만을 썼겠습니까? 그 중에는 탐욕스럽고 포악한 아전이 도리어 절반을 차지하고 날로 자기 이익만 일삼아 관가를 빙자하여 사삿일을 경영하되, 교묘한 명색으로 거두어들이며 엄한 채찍질로 위협하고 겁주니, 부세와 징수의 독이 뱀의 독보다 더 심합니다. 이러므로 임금의 은택이 아래에 내려가지못하고 백성의 사정이 위에 달하지못하여 임금이 계신 구중궁궐이 천리나 머니, 전하께서 백성을 구휼하시는 마음이 계셔도 백성들이 어찌 알 수있으며, 여염(閭閻)에 근심되어 탄식하는 소리가 있을지라도 전하께서 어찌 들으실 수가 있겠습니까? 이로 인하여 실지의 은혜가 백성에게 미치지 못하여 원통하고 억울한 것이 펴질 때가 없습니다.
신은 바라건대, 굳세고 바른 조사(朝士)를 가려 여러 도에 나누어 보내, 수령의 불법을 적발하고 민간의 이익과 병폐를 찾아 곳곳마다 가만히 조사하여 사실을 알아내도록 힘쓰게 하되, 공사(公事)를 빙자하여 사삿일을 방자하게 하거나, 달리 명색을 붙여 교묘히 백성에게 거두거나, 가혹한 정사로써 백성을 병들게하고 원성을 모으는 것을 덕으로 삼는[斂怨以爲德] 자가 있다면, 무거운 법으로 다스려 하나를 징계하여 여러 사람에게 본보이면, 탐내는 버릇은 절로 없어지고 백성들은 제 농토와 마을에 안정될 것입니다.
신등이 삼가 생각하건대, 하늘이 성군을 내심을 반드시 시운(時運)에 따른 것으로 천년에 한번이나 있는 기회이며 두번 다시 만나기 어려운 때입니다. 신등이 말할 수 있는 때를 만나고 말할 수 있는 직책을 가지고서 요순의 도를 들어 말씀드리지 못하고 도리어 쓸데없는 말로 성청(聖聽)을 더럽히니, 얼굴이 부끄러워 붉어짐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등이 듣건대, 하늘은 사사로이 덮음이 없고 땅은 사사로이 실음이 없으며 해와 달도 사사로이 비침이 없으니, 임금은 하늘의 사사로움이 없는 뜻을 받들어 천하를 다스린다는 것인데, 어찌 사사로운 뜻이 중심을 흔들고 외물이 마음을 유혹하게 하겠습니까? 한 가지 생각중에도 천리인지 인욕인지를 살펴, 과연 천리라면 경(敬)으로써 확충하여 박히지않게 하고, 과연 인욕이라면 의(義)로써 억제하여 자라지못하게 하시되, 비록 시끄럽게 번화한 곳이거나 그윽하게 홀로있는데일지라도 항상 공경과 두려움을 가지고 그 마음을 지켜 본체의 밝음이 환하고 허령(虛靈)하게 하면 귀신도 그 사이를 엿보지 못하게될 것이니, 이는 정일극복(精一克復)714)하는 공부이며 제왕들이 서로 전하는 도로서 몸을 닦고 집을 정제해서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옛날 송나라 주희(朱熹)가 부름을 받아 나아갈 적에, 어떤 사람이, ‘마음을 바르게 하고 [正心] 뜻을 성실히 하는 [誠意] 논(論)은 위에서 듣기싫어하는 것이니, 다시 그런 말을 하지 말라.’하니, 주희가 이르기를, ‘평생에 배운 것이 오직 이 넉 자인데 어찌 감히 침묵하여 우리 임금을 속일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신들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주희로써 종(宗)을 삼아 왔습니다.
그러므로 또한 마음을 바르게하고 뜻을 성실히하는 학문으로써 전하를 위하여 시종 말씀드리는 것이니, 전하께서 오활하게 여기지않으시고 마음을 두어 힘써 행하시면, 임금을 사랑하는 구구한 정성이 전하에게 다소 도움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하니,
전교하기를,
“이는 반드시 내가 보고 살피게하려는 것이니 마땅히 그대로 하겠다”하였다.
註675]근습(近習):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자 註676]삼대(三代): 하(夏),은(殷),주(周).註677]법종(法從): 왕의 거가(車駕).註678]인심(人心): 사람에게는 도심(道心)과 인심이 있음 註679]법조(法曹): 법사(法司)를 말함.註680]거스르기[逆鱗]: 임금의 분노를 상징한 것. 용(龍)의 턱에 거슬린 비늘이 있어 건드리면 사람을 죽인다는 전설이 있음 註681]조빈(曹彬): 송(宋)나라 사람. 태조(太祖)를 도와 천하를 평정하고 노국공(魯國公)에 봉작(封爵)되어 장상(將相)을 겸함 註682]방자(榜子): 관직, 성명등을 적은 글의 일종 註683]태조(太祖): 송나라 태조 조광윤(趙匡胤).註684]조여우(趙汝愚): 송(宋)나라 사람. 효종(孝宗)이 죽고 광종(光宗)이 병들어 집상(執喪)을 못하게되자 헌성태후(憲聖太后)에게 내선(內禪)의 뜻을 청하여 가왕(嘉王)을 받들어 황제가 되게 하였음 註685]정책(政策): 왕을 옹립(擁立)하는 것.註686]섭적(葉適): 송(宋)나라 영가(永嘉)사람. 한탁주(韓佗胄)에게 거슬려 귀양가자, 두문불출(杜門不出)하고 저술에 종사하여 일가(一家)를 이룸 註687]광무제(光武帝): 후한을 다시 세운 유수(劉秀).註688]찡그리고 웃는 것도 반드시 아끼고 해어진 바지도 반드시 간직하여: 한소후(韓昭侯)가 헤진[弊] 바지를 간직하라고 하니, 시자(侍者)가, “인색하십니다. 좌우 신하에게 주지않고 간직하십니까?”하므로, 소후가 “밝은 임금은 한 번 웃음과 찡그림도 아낀다하니 이제 바지가 어찌 웃음이나 찡그림에 비할 것이겠느냐? 나는 반드시 공있는 자를 기다려 주고자한다.”하였음. 《자치통감(資治通鑑)》註689]무극(無極): 초(楚)나라 간신 비무극(費無極)이 태자소부(太子小傅)로 평왕(平王)에게 태자를 참소하여 부자(父子)를 이간하니, 태부(太傅) 오사(伍奢)가 이를 구원하려다가 피살되고, 그 아들 오자서(伍子胥)가 화를 피하여 오(吳)나라로 도망, 그는 오(吳)를 도와 초(楚)를 쳐 영(郢)에 들어가 평왕(平王)의 시체를 파내어 매[笞] 3백을 쳐 아비의 복수를 하였음. 《사기(史記)》註690]강충(江充): 한(漢)나라 무제(武帝)때 사람. 직지수의사자(直指繡衣使者)가 되어 도적을 다스릴 때 권귀(權貴)를 돌보지않고 일을 처리하다가 태자와 틈이 생겼는데, 무제가 죽으면 태자에게 죽음을 당할까 두려워, 무제가 병들자 그는 “태자가 무고술(巫蠱術)로 저주한다.”고 참소하였음. 태자는 강충을 잡아죽이고 군사를 일으켜 반하다가 패하여 자살하였음 註691]두후(竇后): 혹자가 “주발(周勃)이 반역한다.”고 고발하여 치려할 때, 두후가 “강후(絳侯:주발)가 여씨(呂氏)를 칠 때 옥새를 가지고 북군(北軍)을 거느렸거늘, 그 때 반하지아니하고 도리어 이제 작은 고을에서 반하겠습니까?”하니, 문제(文帝)가 석방하였음. 《사기(史記)》봉후세가(絳侯世家) 註692]소제(昭帝)의 밝음: 한(漢)나라 황제. 상관걸(上官桀)이, “대장군(大將軍) 곽광(霍光)이 교위(校尉)를 뽑아 늘리고 권세를 오로지하니 딴 뜻을 품었다.”고 참소하였으나, 14세인 소제가 거짓임을 분별하여 무사하게 되었음. 《한서(漢書)》註693]학전(學田): 성균관 또는 향교에 속한 토지 註694]호원(胡瑗): 송(宋)나라 해릉(海陵) 사람. 경술(經術)로 오중(吳中)에서 교수하였는데, 범중엄(范仲淹)이 천거하여 숭정전(崇政殿)에서 황제를 뵙고 아악(雅樂)을 교정하여 교서랑(校書郞)이 됨. 다시 호주에서 교수할 때 경술(經術),치도(治道) 두 서재를 두어 생도들을 재질대로 가르치며 크게 학풍(學風)을 일으킴. 경력연간(慶歷年間 1041∼1048)에 태학(太學)을 세울 때 그 법을 취하여 법령을 삼았음. 후일 태학에 그 제자들이 많았으며 태상박사(太常博士)로 치사(致仕)함. 안정(安定)선생이라 부름.註695]오후(五侯): 후한(後漢) 환제(桓帝)가 환관 선초(單超), 서황(徐璜), 구원(具瑗), 좌관(左琯), 당형(唐衡) 다섯 사람을 후로 봉함 註696]당옥(黨獄): 후한 환제 때 환관이 크게 성하므로, 사대부 이응(李膺)등이 미워하여 잡아죽이려 하니, 환관들이 알고, “이응이 태학 선비들과 붕당을 만들어 조정을 비방한다.”고 참소하므로, 황제가 노하여 이응과 그 제자 2백여명을 종신금고에 처함. 영제(靈帝)때 이응등이 다시 기용되자, 대장군 두무(竇武)와 함께 환관들을 죽이려다가 실패하여 이응등 2백여인이 모두 죽음을 당하고 금고된 자가 6백∼7백인에 이름 註697]황건적(黃巾賊): 후한 영제(靈帝)때 거록(鉅鹿)에서 장각(張角)이 일어나 황노(黃老)의 학설을 받들며 스스로 대현양사(大賢良士)라 칭하여 요술을 부리면서 부수(符水)로 병을 고쳐 태평도(太平道)라 부름. 그 제자가 수십만에 달하자 왕실이 어지러운 틈을 타 난을 일으켜 스스로 황천이라 불렀음. 그 무리들이 모두 황건을 썼으므로 황건적이라 부름.註698]정책국로(定策國老), 문생천자(門生天子): 당(唐)나라 경종(敬宗)에서 선종(宣宗)에 이르는 동안의 임금 폐립(廢立)이 모두 환관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므로, 환관 양복공(楊復恭)이 스스로 정책국로 문생천자라고 했는데 천자(天子)를 폐립하는 나라의 원로로서 천자가 자기들 문하에서 생겨난다는 뜻. 《당서(唐書)》양복공전(楊復恭傳).註699]황소(黃巢)의 군사: 당(唐)나라 희종(僖宗) 때 왕선지(王仙芝)가 난을 일으키니, 황소가 대응하여 기병(起兵)함. 왕선지가 죽은 뒤 그 무리를 거느리고 장안(長安)으로 들어가 제제(齊帝)라고 부르다가 이극용(李克用)에게 평정됨 註700]변(汴): 하남성 개봉 註701]기무(機務): 국가의 중요한 일 註702]주자(朱紫): 고관의 관복의 빛깔. 즉 고관 註703]문덕황후(文德皇后): 당태종(唐太宗)의 황후. 장손무기(長孫無忌)의 누이로서 독서를 좋아하고 덕이 있으며 예절을 잘 지켰음. 여칙(女則) 12권을 지음 註704]선인태후(宣仁太后): 송영종(宋英宗)의 황후. 성은 고씨(高氏). 철종(哲宗)을 세우고 섭정을 하였는데, 왕안석(王安石) 일당을 축출하고 사마광(司馬光)등을 동용하여 원우(元祐)의 성시(盛時)를 이룸. 후세에 여중요순(女中堯舜)이라 부름.註705]임조(臨朝): 왕후가 정사를 대행하는 것.註706]여대방(女大防): 송나라 명신 註707]고씨(高氏): 황후의 친가 註708]두광국(竇廣國): 한문제(漢文帝)의 황후의 동생. 어릴 때 가난하여 남에게 팔려갔는데, 누이가 황후가 되었다는 것을 듣고 호소하여 밭과 집을 하사받았으나, 문제는 탐탁히 여기지않고 항상 냉대하였음 註709]마원(馬援): 후한 명제(後漢明帝)의 황후 마씨의 아버지. 마황후는 친정의 이익을 구하지않아, 장제(章帝)가 마원 형제를 봉하고자 하였으나, 황후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음 註710]유보(乳保): 왕의 유모 註711][天討有罪 五刑五庸哉]: 《서경(書經)》우서(虞書) 고요모(皐陶謨)편의 말 註712]4흉(四凶): 요(堯)임금때 네 사람의 흉인. 즉 공공(共工), 환도(驩兜), 삼묘(三苗), 곤(鯀)을 말함. 순(舜)임금이 네 사람을 처벌하자 천하가 모두 복종하였다함 《서경(書經)》순전(舜典).註713]여섯 말[六馬]: 임금의 수레를 끄는 여섯 마리의 말.註714]정일극복(精一克復): 《서경》대우모(大禹謨)편에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미묘하니 정하고 전일하여야 참으로 그 중(中)을 잡게 된다.”[人心惟危道心惟微精惟一允執厥中]하고, 《논어》 안연(顔淵)편에 “사욕[己]을 극복하여 예로 돌아간다.”[克己復禮]한 데에서 요약된 말
○大司諫姜景叙、司諫金璫、獻納金崇祖、正言申奉全ㆍ朴巨鱗上疏曰:伏聞多亂興國, 殷憂啓聖, 蓋事危則志(銃)〔銳〕, 情苦則慮甚。 故能轉禍爲福, 變危爲安也。 頃在燕山朝, 滅絶典常, 殘虐生民, 天命已去, 人心已離, 國家之勢危如一髮。 殿下應天順人, 光繼大統, 迅掃氛垢, 肅淸朝廷, 天地無不淸夷, 中外無不懽欣。 明明上帝, 宜錫介福, 而正月歲首之日, 有日食之變, 五月盛陽之辰, 有月食之災。 臣等伏念天心, 仁愛殿下, 昭見咎異, 欲日愼一日, 永保聖治, 是皇天於殿下, 眷佑深矣。 殿下敢不奉若天意, 寅畏天命哉? 伏願殿下, 約心勵志, 考先聖之德, 敦索撲之道, 定志而納諫, 重爵而節用, 親賢士而遠謟侫, 興學校而正士習, 抑宦寺而保外戚, 明賞罰而恤民窮, 以答天譴, 以致中興政化之盛, 不勝幸甚。 臣等條陳, 以效一得。 其一曰定志。 《大學》曰: “知止而後有定。” 止者, 事理當然之極, 而定者, 擇善固執, 而心不妄(勤)〔動〕之謂也。 夫心無定主, 操舍無常, 義理不先盡, 則多聽而易惑, 志意不先定, 則守善而或移。 要在聖人之言, 爲常念。 先王之德, 爲常法, 近習之說, 無所侵潤, 流俗之論, 無所牽制, 信道必荑, 收心必於閑, 任賢去邪, 皆得其當, 使一代之治, 如三代之隆而後已也。 伏願殿下, 選擇賢人正士, 使得陪侍法從, 朝夕與居, 顧養性情, 開陳善道, 以廣聽聞, 不爲外物遷惑, 不爲人心牽引, 常守正道, 堅定不移。 心之本體, 虛靈通澈, 如水未波, 如鑑未塵, 事至物來, 隨感曲當, 自然身修家齊, 而國無不治矣。 其二曰納諫。 臣聞樂聞過者, 罔不興, 拒忠諫者, 罔不亂。 樂聞過, 則下情通, 下情通, 則政事無缺, 此所以治也。 拒忠諫, 則正道壅, 正道壅, 則人主孤立, 此所以亂也。 故古之賢君, 常慮上下否隔, 情志不孚; 政敎未純, 賞罰未明, 群臣之邪正未辨, 閭閻之利害未聞, 特置耳目之官, 以開忠諫之路, 皆所以爲宗社生靈大計也。 殿下自卽位以來, 求言如渴, 從諫如流, 今又賜給臺諫, 以示勸奬, 人無賢愚, 萬口稱慶, 此所謂 ‘興王賞諫臣’, 孰不欲直言正諫, 以效忠誠乎? 臣聞唐室之初, 因隋之習, 天下莫有言者, 法曹孫伏伽上表曰: “隋以惡聞其過, 亡天下, 故陛下得之, 宜易其覆轍, 務盡下情。” 唐主大悅, 下詔褒美, 擢爲侍御史, 賜布三百匹, 仍頒示遠近。 自是論事者, 唯恐言不盡己之忠, 諫不激上之意, 不以忌諱爲虞, 犯觸爲嫌, 豈好忘身, 而批逆鱗哉? 由上激而進之也。 夫嘉順從而惡逆耳, 古今情一也。 唐祖獨好犯顔之諫, 不喜謟侫之辭者, 蓋以順從之利輕, 危亡之禍大也。 伏望殿下, 法唐祖美德, 好諫之心, 從諫之美, 始終如一, 博覽兼聽, 虛以受人, 使深者不隱, 遠者不塞, 明鑑及於萬里, 下情達於九重, 則聖德益著, 而政治休明矣。 其三曰重爵。 夫爵祿者, 人主所以駕馭人臣, 而牢籠豪傑之具也。 君以爲貴, 而不加於菲材, 則人慕之。 臣以爲賤, 而有意於獵取, 則人惡之。 昔曺彬取江南而還, 進榜子云: ‘差往江南, 句當公事回。’ 太祖亦曰: “本授卿使相, 劉繼恩未下, 姑少待之。” 夫曹彬之不伐功, 太祖之愛爵賞, 可謂兩得矣。 及趙汝愚、韓伉冑推戴寧宗也, 伉冑欲推定策功, 汝愚曰: “吾宗姓, 汝外戚, 何可言功?” 又推葉適之功, 辭曰: “國危效忠職也。” 其不有其功如此。 近日靖國功臣, 首倡擧義者, 功則多矣, 其聞風投乞者, 不過欲全其身, 其得與功臣, 不已猥濫乎? 成宗朝宰相有闕, 必陞堂下官而用之, 今則嘉善、通政, 無慮數百, 官爵之濫, 一至於此。 且曰: “中與之時, 不得不多。” 則光武中興而得天下, 其攻城略地, 摧堅陷陣之將, 不爲不多, 而功臣止二十八人, 一夜之間, 爲功臣者, 百有餘人, 其曰原從, 亦無寸效, 而陞堂上者, 幾至於百, 豈不爲聖德玷乎? 願殿下, 遹追成宗, 毋輕爵祿, 一資、半級, 非賢不加, 庸愚之人, 雖功不任, 則不肖者, 自知而退, 賢者彙征, 以光左右矣。 其四曰節用。 夫財者所以養人, 用之不節, 則反以害人, 故節以制度, 不傷材不害民。 是以古之賢君, 嚬笑必惜, 弊袴必藏, 一亳財用, 且不妄費。 宋太祖嘗曰: “朕爲天下守財耳。 豈可妄用?” 其不輕財用如此。 臣等請以我朝用財得失, 殿下所親見者而言之。 我成宗得至治之體, 民間賦稅, 無一枉歛, 國家財帛, 無一虛費, 人心和樂, 年穀豐稔, 粟腐布爛, 倉庾盈溢。 及燕山朝, 恃府庫之盈, 忽先王之財, 騁無厭之慾, 悅子女之心, 虛食(敎)〔穀〕者, 數千人, 妄衣帛者數百女。 民間徵歛日加, 而府庫所入日減, 倉無半歲之儲, 庫乏一時之用, 人怨神怒, 自取滅亡, 殿下所親見者也。 今黎庶貧窮, 帑藏空竭, 成宗朝, 百不存一, 豈可濫頒黷賞, 虧損府財乎? 雖府有餘帛, 庫有餘粟, 當賑救窮民, 以收衆心, 不宜無名而虛費, 致空竭之歎也。 其五曰親賢士。 臣聞官人唯賢, 政所以治也; 位人唯能, 事所以理也。 然君子小人, 各因其類, 若知賢, 而不能用, 用以不能信, 信而不能終, 則君子志存行道, 不爲苟舍, 豈其信之不終, 而爲世用也? 借曰: “安知賢者而用之?” 則臣等以爲 ‘人主存此心, 以精甄別’, 則人心賢愚, 知之不難矣。 夫尙德行者, 無凶德, 務公正者, 無朋邪, 廉者有所不取, 謹者有所不爲, 信不與僞者言, 知不與愚者游。 是以鸞、隼不接翼, 董、蕕不同器, 其理固然, 無可疑者。 願殿下鑑空衡平, 旌善別惡, 務得賢才, 常置左右, 虛心以訪之, 克己以下之, 愛之益篤, 親之益厚, 勿以一失, 少有疑其心, 不使小人, 得以雜其間, 則上下交孚, 而賢者樂爲之用矣。 其六曰遠讒侫, 臣聞孔子曰: “遠侫人。” 《書》曰: “朕堲讒說殄行。” 蓋侫人, 其爲心也險, 其用術也巧, 千態萬狀, 人莫能測, 舞文飾智, 欲陷良善, 人主不悟, 以謟爲恭, 以訐爲直, 聽其言, 而信用之, 則其殄絶善人之行, 豈其難哉? 《詩》曰: “營營靑蠅, 止于棘。 讒人罔極, 交難四國。” 以其能變白黑, 以售其術也。 詩人疾之曰: “取彼讒人, 投畀豺虎, 豺虎不食, 投畀有比。” 傷於讒, 無所聊賴之辭也。 是以楚有無極, 而伍胥爲敵國之用, 漢有江充, 而太子陷巫蠱之禍, 微竇后之辨, 則周勃不免爲叛臣, 非昭帝之明, 則霍光未免爲亂賊, 其爲害可勝言哉? 伏惟殿下, 天資睿聖, 超越千古, 焉有讒侫之人, 得雜於朝廷? 如或有之, 明以照之, 剛以斷之, 詳究詭秘之迹, 不聽萋斐之辭, 則自無迎合之侫, 而讒說亦不行矣。 其七曰興學校。 臣聞建學校以養士, 置師(傳)〔傅〕以敎育, 此有國之先務, 帝王之高致也。 我成宗深知其然, 萬機之暇, 注意於學校, 給學田以勸之, 擇師傅以敎之, 育養策勵, 曲盡其方, 學於學者, 日盛月增, 各通經術, 辭藝卓異, 履行純飭, 皆有學行之實, 化爲彬彬之君子矣。 及燕山, 薄於文藝, 廢學校爲游戲之所, 役儒生爲荷輦之卒, 挾冊讀書者, 百無一人, 文風毁亂, 莫可形言。 殿下卽位, 修擧廢墜, 盡復舊章, 儒生皆知向學。 今宜精擇師儒有經術、德行者, 如胡瑗之正身律物, 訓督學者, 皆有法度, 旬省月試, 策勵行義, 又以生徒登第多少, 爲師儒, 考課上下, 則師生勸勉不怠, 積有成效, 蔚然人材輩出矣。 其八曰正士習。 臣聞國家之患, 莫大於士大夫無恥。 士大夫無恥, 則人皆以貨財爲利, 不以仁義爲利, 忘身而受賕, 徇私而廢公, 狼貪蠅營, 無所用恥矣。 曩在燕山時, 朝臣皆喪其所守, 或依附田、張, 獵取高官者有之, 或攀緣興淸, 刦奪田宅者有之, 名齒鼓篋者, 不羞監役之賤, 位列顯官者, 不行父母之喪, 不復知人間有羞恥事也。 殿下卽位以來, 革祛弊政, 丕新士習, 然漸染已久, 未能頓變。 願殿下崇禮讓之風, 勵廉恥之節, 使淸議行於上, 汚習變於下。 如有頏鈍無恥, 不容於淸議者, 削迹朝班, 不得齒於縉紳, 而不變移之郊, 不變移之遂, 則人皆觀感知戒, 而有恥且格矣。 其九曰抑宦寺。 臣聞宦者之患, 其來已久, 人主猶不之悟,相繼敗亡, 如循一軌。 東漢中葉, 五侯擅權, 手弄邦憲, 口舍天爵, 大成黨獄, 夷滅名士, 及黃巾賊起, 天下大亂, 曹操因之, 遂移漢鼎。 李唐之末, 宦寺用柄, 賊害君父, 枉殺宰相, 流血成溝, 朝廷幾空, 自稱定策國老、聞生天子。 及黃巢兵起, 天下大亂, 全忠入汴, 因以簒唐。 後之人主, 豈可不以此爲戒耶? 今殿下, 以明智御下, 以奴隷畜宦, 固無可虞。 然而親近之時, 狎昵之中, 恐有受欺而不自覺也。 昔仇士良, 敎其黨曰: “天子愼勿讀書, 親近儒生。 彼見前代興亡, 心知憂懼, 則吾輩疎斥矣。” 其謀如此, 爲害可知。 殿下若以年少宦寺, 供掃除之役, 守宮門之鑰, 秩高老宦, 以時任使, 勿逞邪媚於內, 以售其奸, 憑侍寵於外, 以恣驕縱, 使內外截然, 宮禁肅正, 則宦者銷縮, 而自不爲患矣。 其十曰保外戚。 臣謂外戚者, 椒房之切親, 不可疎而忽之也。 然戚里甚近, 謗議已集, 不可任以機務, 寵以崇班也。 如使無知貴戚, 位至朱紫, 身帶銀黃, 長其傲慢之心, 恣爲驕橫之事, 則虧損國經, 枉悖朝章, 及其犯不義之罪, 其可以戚里之貴, 而貸之乎? 然則其所以厚之, 適所以禍之也。 昔唐文德皇后謂太宗曰: “妾托體紫宮, 尊貴已極, 不願私親據權于朝。 無德而祿, 易以取禍, 以外戚, 奉朝謂足矣。” 宋宣仁皇后臨朝九年, 因不豫, 謂呂大防曰: “試言九年間, 曾施恩高氏否。” 只爲至公。 願殿下體此二言, 如文帝之於廣國, 明帝之於馬援, 不以私意爵之, 不以親貴狎之, 不任以事, 不借以權, 忠厚者恩禮以待之, 柔侫者優容而遠之, 乳保之母、妃主之家, 宜以時接, 勿使數通行於宮禁, 傳語於內外, 義以防外, 禮以治內, 此乃保外戚之道也。 其十一曰明賞罰。 臣聞天命有德, 五服五章哉; 天討有罪, 五刑五庸哉。 是知爵賞刑罰, 雖人君之政事, 實上帝之所命, 豈可少有私意於其間哉? 是故堯之擧虞、舜, 爲其有大孝也, 舜之誅四凶, 以其畏孔壬也。 其可擧可誅, 固在於彼, 堯、舜何與焉, 而喜怒於其間乎? 燕山則異於是, 順於心, 則雖惡必賞之; 逆於意, 則雖善必罰之, 賞罰無章, 勸懲無法, 忠賢遠謫, 謟侫成風, 官亂人貪, 終失其國。 伏願殿下, 法堯、舜之公, 戒燕山之失, 常存大公至正之心, 不留親疎偏僻之私。 罰當其過, 則雖貴而不恕, 賞當其善, 則雖疎而必信, 不以私意害其公, 不以喜怒, 撓其法。 如天之於萬物, 其生養肅殺, 付之於無心, 則賞罰皆當, 而人知勸沮矣。 其十二曰恤民隱。 臣聞天之視聽, 自我民; 國之存亡, 係彼天。 古之賢君, 深知其然, 其愛民, 如父母之保赤子, 其畏民, 若朽索之御六馬, 輕徭薄歛, 撫摩周恤, 無所不用其極。 今我殿下一遵成宗盛治, 惟以恤民爲事, 盡蠲未納之貢稅, 革除無名之橫歛, 其愛養斯民至矣。 然國家各道郡邑, 安得盡用良吏? 其中貪暴之吏, 顧居其半, 日事己利, 憑官營私, 巧名色以徵歛, 峻鞭朴以威刦, 賦歛之毒, 有甚於蛇。 是以澤未下究, 情未上達, 君門九重, 邈乎千里, 殿下有恤民之心, 百姓安得而知, 閭閻有愁嘆之聲, 殿下焉得而聞? 由是實惠, 未及於民, 冤抑無時而伸也。 臣願擇剛正朝士, 分遣諸道, 摘發守令之不法, 詢訪民間之利病, 隨處廉問, 務要得實。 其有依憑公事, 恣行其私, 別作名色, 巧取於民, 苛政以病民, 歛怨以爲德者, 置之重典, 懲一礪百, 則貪風自戢, 而庶民安於田里矣。 臣等伏念, 天生聖君, 必因時運, 千載一會, 時難再得。 臣等遇可言之時, 任可言之責 , 不能推明堯、舜之道, 以陳於左右, 而顧以無用之言, 仰塵聖聽, 不勝愧赧。 然臣聞天無私覆, 地無私載, 日月無私照, 人君奉天無私, 以治天下, 豈可使私意? 撓其中, 外物窺其內歟? 一念之中, 必審天理人欲, 果天理則敬以充之, 而勿使雍閼, 果人欲則義以克之, 而勿使滋長。 雖在紛華之中, 幽獨之處, 而常存敬畏, 持守此心, 使本體之明, 炯然虛靈, 雖鬼神不得窺其際, 此精一克復之功, 帝王相傳之道, 可以修身齊家, 而治國矣。 昔宋朱熹赴召, 或謂: “正心誠意之論, 上所厭聞, 愼勿復言。” 熹曰: “平生所學, 唯此四字, 豈可隱默, 以欺吾君。” 臣等自少讀學, 以熹爲宗, 故亦以正心誠意之學, 爲殿下終始言之。 殿下勿以爲迂, 而潛心力行, 則區區愛君之誠, 未必無小補云。
傳曰: “是必令予觀省也, 當依之。”
중종 3권, 2년(1507 정묘/명정덕(正德) 2년) 7월 1일 임인 1번째기사
대사헌 민상안, 대사간 강경서등이 한순, 이줄등의 일을 아뢰다
대사헌 민상안(閔祥安), 대사간 강경서(姜景敍), 사간 김당(金璫), 집의 윤은보(尹殷輔), 장령 이원성(李元成)과 강중진(康仲珍), 헌납 김숭조(金崇祖), 지평 유의신(柳義臣)과 이사균(李思鈞), 정언 신봉전(申奉全)과 박거린(朴巨鱗)이 아뢰기를,
“사노(私奴) 양귀성(梁貴成)이 본부(本府)에 정장(呈狀)하기를, ‘내수사(內需司) 서제(書題) 이성손(李盛孫)과 상궁(尙宮) 임씨(林氏)의 집 일로 서로 다툴 때, 내수사에서 공공연하게 잡아다가 혹 상처나도록 때리고 혹 공갈하여 서로 다투지못하도록 했다.’하므로, 본부에서 곧 이성손을 불러다 물어보니, 성손이 답하기를, ‘귀성이 나와 서로 다투는데 내가 어찌 그 사람을 추문하겠는가? 이는 반드시 형방(刑房) 별좌(別坐)의 소행이니, 부(府)에서 그를 불러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하기에, 본부에서 또 형방 양수동(梁壽同)을 추문하니, ‘설맹손(薛孟孫)이 승전(承傳)을 받들어 추문했다’하므로, 신등이 그 진위를 밝히려고 취품726)하였더니, 전교하기를, ‘과연 그런 명이 있었다.’ 하셨습니다.
대체로 모든 사송(詞訟)하는 자는 혹 억울하고 답답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해당 관[該司]에 고하여 퇴장(退狀)727)을 받은 연후에야 상언(上言)할 수 있고, 또 반드시 정원을 거친 뒤에야 분간하게 하는데 따로 내수사로 하여금 그 다투는 송사를 추문하도록 한다는 일은 듣지 못했습니다.
전하께서 구중(九重)의 깊은 궁궐에 계시니, 자질구레한 백성의 일을 어찌 아시겠습니까? 바라건대, 계달한 사람에게 물어보아 그 죄를 다스리도록 하소서.
한순은 전자에 이미 내보낸 궁녀 귀비석(貴非石)을 간음하고, 이제 또 천과(天科) 흥청 수생(水生), 양비(楊妃)등을 간음하였습니다. 순은 폐주에게 총애를 받던 신하로 소행이 이러하니 길가 사람들이 지목하기를, ‘행동이 금수와 같다’고 합니다.
바라건대 속히 죄를 다스려 사류(士類)에 끼지 못하도록 하소서.
이줄은 만약 그때 고변하였다면 헤아리지못하게 되었을 것이니, 바라건대 속히 공신(功臣)에서 삭제하여 죽이지않는 것으로 대우하소서.”하니,
전교하기를,
“대비께서 분부하시기를, ‘사노 양귀성이란 자는 성종의 보모 장명(長命)이 버린 남편의 조카로서 전혀 장명과는 아무 관계도 없으면서 그 가재(家財)를 망녕되이 탐내어 서로 다투기때문에, 폐조때 이미 치죄(治罪)하였었는데, 이제 또 다툰다는 소리를 듣고 내수사로 하여금 추문하게하니, 가재 때문이 아니라 집때문이라기에 그냥 두었다.’고 하셨다. 대비께서 보모에게 고려하는 바가 계시어 이런 명이 있었던 것이요, 다른 사람으로 인한 것이 아니다. 한순, 이줄의 일은 윤허하지않는다.”하였다.
또 아뢰기를,
“비록 자전의 하교라 하시나 자전께서 들으시기를 어찌 인연없이 하셨겠습니까? 바깥 말이 안에 들어감은 심히 불가하니, 바라건대 인연하여 계달한 자를 추문하도록 하소서. 이런 일들은 정원에 명을 내리시어 맡은 관청으로 하여금 추문함이 가하고, 사사로이 내수사로 하여금 추문하게 하여서는 아니됩니다. 한순, 이줄등의 일은 벌써 다 아뢰었으니, 속히 결단하소서.”하니, 전교하기를,
“장명의 일은 자전께서 자세히 알고 계신다. 전자에도 이미 내수사로 하여금 추문케 하였기때문에 지금도 내수사에 하문하신 것이다. 내가 어찌 감히 세세한 일로 자전께 청하겠는가? 이줄, 한순등의 일은 모두 윤허하지 않는다”하였다. 또 아뢰기를,
“세민(細民)들이 저들끼리 사사로이 송사하는 것이 내수사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보모 장명이 비록 생존하였다하더라도 만일 송사가 있으면 의당 해당 관사에서 분간해야합니다. 더구나 그가 죽은 지 벌써 오랜데 해당 관사를 거치지 않고 내수사에서 추열(推閱)하였으니, 폐조의 어지러운 발판이 오로지 바깥 말이 들어가기 쉬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분부에 ‘세세한 일이다’하셨으나 신등은 일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다고 생각되므로 합사(合司)하여 아뢰는 것이며 인연하여 계달한 사람을 알려고하는 것입니다. 한순, 이줄의 일은 이미 다 아뢰었으니 불가불 쾌히 결단하셔야 하겠습니다.”하니, 전교하기를,
“이제 만약 그 계달한 사람을 알려고 한다면 허물을 자전에게 돌리려고 하는 것같아 매우 불가하다. 한순, 이줄의 일은 윤허하지않는다.”하였다.
註726]취품: 품의하고 그 답을 기다림 註727]퇴장(退狀): 정장(呈狀)의 각하
○壬寅朔/大司憲閔祥安、大司諫姜景叙、司諫金璫、執義尹殷輔、掌令李元成ㆍ康仲珍、獻納金崇祖、持平柳義臣ㆍ李思鈞、正言申奉全ㆍ朴巨鱗啓曰: “私奴梁貴成呈狀于本府云: ‘與內需司書題李盛孫, 尙宮林氏家舍相爭之際, 內需司公然捉去, 或傷打, 或恐赫, 使不得相爭。’ 云, 故本府卽致李盛孫問之, 盛孫答曰: ‘貴成與吾相爭, 吾何以推其人乎? 是必刑房別坐所爲, 府若招問, 則可知矣。’ 本府又推刑房梁壽同, 則曰: ‘薜孟孫奉承傳推之。’ 云, 臣等欲覈其眞僞, 取稟, 傳曰: ‘果有是命。’ 云。 大抵凡詞訟者, 或有冤悶, 則必告該司, 受退狀然後上言, 又必由政院, 然後分揀, 未聞別令內需司, 推其爭訟也。 殿下深居九重, 細民之事, 何鎰知? 請問所啓之人, 以治其罪。 韓恂前者旣奸放出宮女貴非石, 今又奸天科興淸水生、楊妃等。 恂以廢王幸臣, 所行如此, 道路目之曰: ‘行同禽獸。’ 請速治罪, 不齒士類。 李茁若其時上變, 則禍將不測, 請速削功, 待之以不死。” 傳曰: “大妃敎曰: ‘私奴梁貴成者, 成宗保母長命棄夫之姪子也。 專不干於長命, 而其家財妄料相爭, 故廢朝旣已治罪矣。 今又聞相訟, 故卽令內需司推之, 則非家財也, 乃家舍, 故卽置之。’ 大妃於保母, 有所顧念, 故有是命也, 非因他人也。 韓恂、李茁事不允。” 又啓曰: “雖是慈殿之敎, 而慈殿所從聞, 亦豈無因? 外言入內, 甚不可, 請推因緣啓達之人。 此等事, 命下政院, 著令該司推問可也, 不宜私令內需司推之。 韓恂、李茁等事, 已悉啓之, 請速夬斷。” 傳曰: “長命事, 慈殿細知之矣。 前者旣使內需司推之, 故今亦下問于內需司矣。 予何敢以細事, 請於上殿乎? 李茁、韓恂等事, 幷不允。” 又啓曰: “細民自相私訟, 何關於內需乎? 保母長命雖生存, 如有爭訟, 則自當於該司分揀, 況其死已久, 不由該司, 而推閱於內需司? 廢朝亂階, 專在於外言易入。 雖傳曰: ‘細事。’ 臣等以爲事無大於此。 故合司來啓, 欲知因緣啓達之人耳。 韓恂、李茁事, 已悉啓之, 不可不夬斷。” 傳曰: “今若請其啓達之人, 則似若歸過於上殿, 甚不可。 韓恂、李茁事, 不允。”
중종 3권, 2년(1507 정묘/명정덕(正德) 2년) 7월 11일 임자 4번째기사
대사헌 민상안, 대사간 강경서등이 합사하여 한순, 이줄등의 일을 논하다
대사헌 민상안, 대사간 강경서등이 합사하여 아뢰기를,
“별좌등이 범한 짓을 써서 아뢰라 명하시므로 신등이 써서 아뢰었는데, 또 범한 짓이 더욱 심한 자를 각각 그 이름 밑에 써서 아뢰도록 명하셨습니다. 대저 일이 재상이나 조관에 관계되더라도 이같이 힐문함은 마땅치 않은데, 하물며 이런 미미한 자들의 일이겠습니까? 이제 깊이 그 이유를 구명하려 하신다면, 이는 대간을 신임하지않으시는 것으로서 신등은 황송함을 이길 수 없습니다. 이는 아랫사람에게 보이실 도리가 못됩니다.”【내수사별좌 호성장(扈城長), 서제 이성손(李盛孫)등 7사람이 범한 것을 서계했음】하고,
한순, 이줄등의 일도 극력 논하였는데, 전교하기를,
“한순, 이줄의 일은 윤허하지않는다. 또 내가 호성장이 범한 짓을 물은 것은 경등을 믿지못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범한 것을 다 안 연후에 죄를 주려고 물은 것이다.”하니,
대간이 또 아뢰기를,
“신등이 한순, 이줄의 일을 논계(論啓)한 지가 벌써 석달이 넘었으나, 윤허 받지못하였으니, 이는 신등이 직책을 다하지 못한 소치입니다. 어찌 직에 나갈 수 있겠습니까? 또 좌의정 박원종이 이보(移堡)의 일로 함경도에 가게하심은, 이는 바로 유비무환(有備無患)의 훌륭한 마음이십니다. 그러나 근년에 북도는 폐조(廢朝)의 피물(皮物)무역으로 곤핍과 피폐가 더욱 심하여 백성이 흩어지고 안정되지못하였는데, 이제 만약 중신(重臣)을 보낸다면 더 말할 나위도 없이 시끄럽고 백성에게 고통이 될 것입니다. 또 보를 옮기는 일은 그다지 긴급하지않으니 보내지 말도록 하소서.”하니,
전교하기를,
“한순, 이줄의 일은 윤허하지않는다. 정승을 보내는 일은 내 어찌 그 폐됨을 모르겠는가? 그러나 일이 부득이하기 때문에 보내도록 명한 것이다”하였다. 대간이 다시 아뢰기를,
“한순, 이줄이 범한 행위는 안팎에서 통분히 여기는데, 전하께서 용서하여, 굳이 거절하시니, 실망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또 신등은 구세건(具世健)을 서용하라는 명을 듣고 적이 의혹됩니다. 세건은 폐조때에 그 아비 전(詮)과 더불어 창녀 말비(末非)를 서로 범하였는데, 지평(持平) 이유령(李幼寧)이 이 사실을 사헌부안에서 발설하여 추문(醜聞)이 날로 퍼졌고, 유령이 죽음을 당한 것은 연산이 광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세건 부자가 절대로 서로 범하지 않았다면, 어찌 이런 추문이 있었겠습니까? 바라건대, 서용하지 마소서. 또 진(鎭)을 옮기는 일은 반드시 금년에 급히 서둘러 할 필요는 없으며, 만약 중신을 보낸다면 그 폐가, 진을 옮기지않는 폐보다 더 심할 것이니, 바라건대, 보내지 마소서.”하니,
전교하기를,
“한순, 이줄의 일은 윤허하지않고, 정승을 보내는 일은 수의하여 처리하겠다. 또 구세건의 일은 그 어미의 상언(上言)에 의하여 서용하도록 명한 것이다. 그러나 다시 상고하여 결정하겠다.”하였다.
○大司憲閔祥安、大司諫姜景叙等合司啓曰: “別坐等所犯, 旣命書啓, 故臣等書啓, 而又命所犯尤甚者, 各其名下書啓。 凡事雖涉於宰相、朝官, 猶不當詰問, 況此微者之事乎? 今深欲究其所由, 是不信臺諫也, 臣等不勝惶悚之至。 此不可示下之道也。”【內需別坐扈城長、書題盛孫等七人所犯書啓。】 韓恂、李茁等事, 亦極論。 傳曰: “韓恂、李茁事, 不允。 且予之問扈城長所犯, 非以卿等爲未信也, 欲悉知其人之所犯, 然後罪之, 故問之耳。” 臺諫又啓曰: “臣等將韓恂、李茁事論啓, 已逾三朔, 未得蒙允, 此臣等不能盡職之致也。 其何能就職乎? 且左議政朴元宗以移堡事, 往咸鏡道, 此正有備無患之盛心也。 然近年北道, 以廢朝皮物貿易, 困弊尤甚, 人民流散, 未得安集。 今若遣重臣, 則其騷擾病民, 何可勝言? 且移堡事, 不甚緊急, 請勿遣。” 傳曰: “韓恂、李茁事不允。 遣政丞事, 予豈不知其有弊? 然事出不得已, 故命遣之爾。” 臺諫復啓曰: “韓恂、李茁所犯, 中外痛憤, 而殿下容貰固拒, 不勝缺望。 且臣等聞具世健敍用之命, 竊惑焉。 世健在廢朝, 與其父詮, 相奸娼女末非, 持平李幼寧以此發言於臺中, 醜言日播, 幼寧之得蒙誅戮, 以燕山狂悖也。 若世健父子, 截然不相奸也, 則安有如此醜說乎? 請勿敍用。 且移鎭事, 不必今年急遽爲之, 若遣重臣, 則其弊有甚於不移鎭之弊, 請勿遣。” 傳曰: “韓恂、李茁事不允, 遣政丞事, 當收議處之。 具世健事, 因其母上言, 命敍用。 然當更考發落。”
중종 3권, 2년(1507 정묘/명정덕(正德) 2년) 7월 12일(계축) 3번째기사
한순의 일에 대해 부원군 이상으로 하여금 의논하도록 하다
대사헌 민상안, 대사간 강경서등이 합사하여, 한순, 이줄, 구세건의 일을 극력 논하니, 전교하기를,
“한순의 일은 정원으로 하여금 금부의 전후 추안(推案)을 가져다가 그 공술한 것을 살펴보게 하겠으니 경등은 우선 기다리라. 이줄의 일은 윤허하지않는다. 정승을 보내는 일은 정승, 병조당상과 변방 일아는 사람으로 더불어 의논하였는데, 그들의 의논도 마찬가지로 진을 옮기기를 속히 하지않으면 안되며 또 중신을 보내지않으면 안된다고 하므로 내가 부득이 보내는 것이다.
구세건의 일도 삼공과 의논하니, 모두 세건은 이미 시비가 분간되었으므로 이 때문에 끝내버리는 것은 실로 애매하다하므로 윤허하지않는다.”하니,
대간이 이줄, 구세건등의 일로 굳이 전하기를 마지않았다.
강경서가 또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언사(言事)때문에 회령(會寧)에 30년동안 귀양가있었으므로 무산보의 일을 잘 아는데, 30리 둘레가 과연 모두 모래와 돌의 땅이어서 사는 백성들이 농사를 지을 수 없었으니, 이제 진을 옮기더라도 경작할 만한 땅이 없습니다. 더구나 조종때부터 보(堡)를 세워 이제 백여년이나 되었는데, 꼭 금년에 시급히 옮길 것이 없으니, 바라건대 중신을 보내지 마소서”하니,
전교하기를,
“내가 한순의 초사를 보니, 앞뒤 말이 과연 같지않았다. 그러나 공이 있는 재상이라 경솔히 죄를 정할 수 없으니 부원군 이상으로 의논하도록 하겠고, 이줄, 구세건 및 진을 옮기는 등의 일은 모두 윤허하지않는다.”하였다.
○大司憲閔祥安、大司諫姜景叙等, 合司極論韓恂、李茁、具世健事, 傳曰: “韓恂事, 當令政院, 取禁府前後推案, 觀其所供, 卿等姑待之。 李茁事不允。 遣政丞事, 亦與政丞、兵曹堂上知邊事者議之, 則其議亦同, 移鎭不可不速, 且不可不遣重臣云, 故予不得已遣之。 具世健事, 亦與三公議之, 皆云世健, 旣已辨別, 以此永廢, 實爲瞹昧, 故不允。” 臺諫以李茁、具世健等事, 固爭不已。 景叙又啓曰: “臣嘗以言事, 謫居會寧三年, 熟知茂山堡之事, 環三十里許, 果皆沙石之地, 居民不得耕種。 今雖移鎭, 亦未有可耕之地。 況自祖宗朝立堡, 今已百餘年, 不必今年急急移之, 請勿遣重臣。” 傳曰: “予觀韓恂招辭, 前後所言, 果有不同。 然有功宰相也, 不可輕易定罪, 其令府院君以上議之。 李茁、具世健及移堡等事, 皆不允。
중종 3권, 2년(1507 정묘/명정덕(正德) 2년) 7월 13일 갑인 1번째기사
민상안, 강경서등이 무산보에 중신 보내는 것을 재고하도록 건의하다
조강(朝講)을 하였다. 민상안, 강경서등이 아뢰기를,
“함경도의 여러 고을은 쇠잔하고 피폐됨이 다른 도보다도 더욱 심합니다. 봉명(奉命)사신이 있게되면 그 지대(支待)할 물자를 마련할 길이 없어 활 잘 쏘는 사람으로 하여금 촌가의 닭이나 개를 쏘아잡아 마련하기까지 하고 있는데, 더구나 박원종이 가면 그 폐단을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려움이 겨우 안정된 백성들이 장차 다시 이산(離散)될 것이니 어찌 진(鎭)옮기는 한 가지 일로 한 도의 커다란 폐를 가져오게 하겠습니까? 그 도의 감사와 절도사로 하여금 같이 의논하여 친히 살펴 이보(移堡)에 대한 사정을 아뢰게한 뒤에 조치하여도 될 것이며, 그만둘 수 없다면 경차관만 보내도 살펴서 검토할 수 있을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승의 행차는 나도 그 폐가 있는 줄 안다. 그러나 무산보(茂山堡)에 사는 백성들이 농사를 지을 수가 없다고 하므로 특히 보내는 것이다.”하였다.
또 한순, 이줄, 구세건등의 일을 논하였으나 또한 윤허하지 않았다
○甲寅/御朝講。 閔祥安、姜景叙等曰: “咸鏡道列邑殘弊, 尤甚於他道。 若有奉命使臣支待之資, 末由措辦, 至令善射者, 射村家鷄、犬以供之, 況元宗之行, 其弊可勝言哉? 艱難甫定之民, 將復離散, 豈可以移堡一事, 以致一道之巨弊哉? 令其道監司、節度使同議親審, 啓移堡形勢, 然後措置可也。 無已則只遣敬差官, 亦足以審撿也。” 上曰: “政丞之行, 予亦知其有弊。 然茂山堡居民, 不得耕種云, 故特遣爾。” 又論韓恂、李茁、具世健等事, 亦不允。
중종 3권, 2년(1507 정묘/명정덕(正德) 2년) 7월 14일 을묘 3번째기사
대사헌 민상안, 대사간 강경서등이 이줄, 한순, 구세건등의 일을 아뢰다
대사헌 민상안, 대사간 강경서등이 합사하여, 이줄, 한순, 구세건등의 일을 아뢰었으나, 윤허하지않았다. 또 아뢰기를,
“유순정의 의논이, 신등이 아뢴 바와 같으니 곧 온 나라의 공론입니다. 순정이 어찌 두루 생각하지 않고 의계(議啓)하였겠습니까? 바라건대, 순정의 의논대로 순(洵)의 죄를 다스리소서.”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大司憲閔祥安、大司諫姜景叙等, 合司啓李茁、韓恂、具世健等事, 不允。 又啓曰: “柳順汀之議, 與臣等所啓同, 而乃一國公論也。 順汀豈不周慮而議啓乎, 請依順汀議, 治恂之罪。” 不允。
중종 3권, 2년(1507 정묘/명정덕(正德) 2년) 7월 15일 병진 2번째기사
대사헌 민상안, 대사간 강경서등이 사직하고 물러나다
대사헌 민상안, 대사간 강경서등이, 상이 한순, 이줄 등의 일을 윤허하지않는 것때문에 사직하고 물러났다.
○大司憲閔祥安、大司諫姜景叙等, 以上不允, 韓恂、李茁等事, 辭職而退。
중종 3권, 2년(1507 정묘/명정덕(正德) 2년) 7월 16일 정사 3번째기사
대사헌 민상안, 대사간 강경서에게 직에 나가도록 명하였으나 다시 사직장을 올리고 물러나다
대사헌 민상안, 대사간 강경서등이 부름을 받고 대궐에 나아가니, 사직장(辭職狀)을 도로 주도록 명하고, 전교하기를,
“사직하지 말고 곧 직에 나아가라.”하니,
상안등이 아뢰기를,
“한순, 이줄의 일을 장무관(掌務官)으로 하여금 여러 달을 두고 아뢰게 했는데도 윤허받지못하였고, 신등이 합사하여 대궐문에 엎드린 지 거의 스무날이나 되는데도 역시 청납(聽納)하시지않으므로 사직하고 물러간 것입니다.
오늘 경연에 대간을 부르지 아니하셨는데 조종 때부터 본시 이런 예는 없었습니다. 조종조에서 반드시 대간이 시강(侍講)하도록 한 것은, 대간은 임금의 이목(耳目)으로서 접대(接待)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등이 당초 간관의 책임을 다하지못하였으므로 사직하고 물러난 것인데, 이제 또 이러하시니742), 이는 반드시 경연의 시강관 및 정원이 대간을 있으나마나하게 여긴 것입니다. 가령 신등을 맡길 만한 사람이 못된다고 여긴다면, 반드시 다른 대간을 기다린 연후에 경연에 납시는 것이 사체에 합당할 것입니다”하니,
전교하기를,
“한순으로 말하면 의친(懿親)이고 큰 공이 있으니 어찌 큰 죄[大罪]로 논할 수 있겠는가? 이줄도 그 죄를 더할 수 없다. 경연에 대간을 부르도록 명하였으나 미쳐오지못했고, 날이 늦었기때문에 정승과 의논해서한 것이요 다른 이유가 없다.”하였다.
또 아뢰기를,
“경연때 정원은 마땅히 명을 받고 빨리 불렀어야하는데도 곧 하지않았고, 홍문관 역시 대간과 일체(一體)인데도 정원의 태만을 아뢰지않고 그대로 들어가 진강(進講)하였으니, 이 또한 잘못이므로 추문하시기 바랍니다. 한순은 상을 기망한 죄가 있고, 이줄은 상변(上變)하여 공을 노리려한 죄가 있어 둘 다 큰 죄이니, 진실로 사(赦)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미 전교하시기를, ‘순의 의친이며, 줄(茁)은 또한 옛 은혜가 있다.’하시니, 비록 저지른대로 죄술 수 없다하더라도 순은 사불이실죄(詐不以實罪)743)로 죄주고, 줄은 공을 삭탈하는 것으로 죄주어 죽이지만 않는 것으로 대우함이 좋겠습니다”하니,
전교하기를,
“한순, 이줄의 일은 윤허하지않는다. 대간이 경연에 참여하지못한 일은 정원에서 우연히 생각이 거기에 미치지못했기 때문이지 무슨 딴 사정이 있었겠는가? 홍문관도 정승과 의논할 때 역시 바빠서 미처 생각하지못한 것이요, 모두 다른 뜻이 없는 것인데 어찌 추문할 것이 있겠는가?”하였다.
상안등이 잇달아 재차 아뢰었으나, 윤허하지않으니 직에 나아가지않고 사직장을 올리고 물러났다.
註742]또 이러하시니: 대간을 경연에 나오도록 명패보내지 않은 것 註743]사불이실죄(詐不以實罪): 속이고 사실을 말하지 않은 죄명.
○大司憲閔祥安、大司諫姜景叙等, 承召詣闕, 命給辭職狀, 而傳曰: “其勿辭, 卽就職。” 祥安等啓曰: “韓恂、李茁事, 令掌務官, 累朔來啓, 而不得蒙允, 臣等合司伏閤, 幾至二十日, 而亦不聽納, 故辭職而去。 今日經筵, 不召臺諫, 自祖宗朝, 固無此例。 在祖宗朝, 必使臺諫侍講者, 以臺諫爲人主耳目, 不可不接待。 臣等初以不盡言責, 故辭職退去, 今又如此, 是必經筵侍講官及政院, 以臺諫, 不足爲輕重有無也。 借以臣等爲不可任, 必待他臺諫, 然後御經筵, 乃合事體也。” 傳曰: “韓恂則旣是懿親, 又有大功, 豈可論以大罪? 李茁亦不可加其罪也。 經筵命召臺諫, 而不及來, 因日晩, 故議于政丞而爲之, 非有他故也。” 又啓曰: “經筵時, 政院當承命早召可也, 而不卽爲之, 弘文館亦與臺諫一體, 而不啓政院之懈緩, 輒入進講, 此亦非矣, 請推之。 韓恂有欺罔君上之罪, 李茁有上變邀功之罪, 皆是大罪, 固在不赦。 然旣敎曰: ‘恂爲懿親, 茁亦有舊恩。’ 雖不得以全科罪之, 當罪恂以詐不以實罪, 茁以削功, 待以不死可也。” 傳曰: “韓恂、李茁事不允。 臺諫不與經筵事, 政院偶爾慮不及此, 有何情焉? 弘文館則議于政丞時, 亦忙未及慮耳, 俱是無情, 何用推焉?” 祥安等仍再啓不允, 不就職, 呈辭狀而退。
중종 3권, 2년(1507 정묘/명정덕(正德) 2년) 7월 17일(무오) 2번째기사
한순을 외방에 부처하도록 하다
대사헌 민상안, 대사간 강경서등을 불러 직에 나아가도록 명하니, 상안등이 직에 나아갈 수없는 사리를 극력 진술하였다. 전교하기를,
“한순의 일은 대간이 말하기를 극력하니 이에 그를 외방에 부처(付處)하도록 하겠고, 이줄은 전일의 은공이 있으니 삭탈할 수 없다. 그가 고변하려한 정상도 뚜렷한 것이 없는데, 대간이 합사하여 굳이 말하니 부원군 이상에게 수의하도록 하라.”하였다.
○命召大司憲閔祥安、大司諫姜景叙等, 使就職, 祥安等極陳不可就職之義。 傳曰: “韓恂事, 臺諫言之極矣, 玆以付處外方, 李茁有前日之恩功, 則不可削也。 其上變情狀, 亦無顯著, 而臺諫合司强言之, 其收議于府院君以上。”
중종 3권, 2년(1507 정묘/명정덕(正德) 2년) 8월 1일 임신 1번째기사
대사간 강경서등이 구수영등의 징계를 청하다
조하(朝賀)를 받았다. 조강을 하였다. 대사간 강경서(姜景敍)가 아뢰기를,
“구수영이 남의 무덤을 뭉개버린 죄가 이미 중대한데, 만일 징계하는 바가 없다면 무슨 일을 하지 않겠습니까? 율에 의해서 죄를 다스려 주시기 바랍니다.”하고,
장령 이원성은 아뢰기를,
“구수영의 죄는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번에도 역시 잘못 용서되었기 때문에 징계하는 바가 없고 교만방자한 버릇만 늘어서, 폐조에서는 미녀와 기묘한 물건들을 많이 바쳐서 임금의 마음을 유혹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큰아들 구숭경(具崇璟)을 차술로 진사(進士)에 합격하게 하였으므로 파방되었고, 또 둘째 아들 구희경(具希璟)에게는 밖에서 차술하여 도장을 조작하여 시권(試券)에 찍어서 남모르게 과차(科次)에 집어넣게 하려다가 마침내 탄로되었으며, 지금 또 재상 아내의 무덤을 마음대로 뭉개버렸으니, 이것은 다 교만하고 방자하여 기탄이 없는 것입니다. 그 죄를 따져본다면 진실로 용서해줄 수 없으니, 율에 의해서 치죄하소서.
이줄의 일을 신등이 이토록 누차 아뢰는 것은 괴려(乖戾)773)함이 지나치기 때문이니, 속히 결단하소서. 김계우를 특은(特恩)으로 판관(判官)에 임명하였으니, 특은은 곧 임금의 사정입니다. 즉위 초에 사정을 사람에게 보이는 것은 온당치않습니다. 옛적의 임금은 간언을 잘 따르고 가르침을 잘 받아들였기 때문에 혹은 늙은이를 보호하면서 좋은 말을 빌었으며774), 혹은 좋은 말을 들으면 절을 하기도775) 했으니, 이래서 간언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 인군의 미덕(美德)인 줄을 알겠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요즈음 논계하는 일에 편박되게 고집하고 굳이 거절하시니, 실망됨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대체로 경연에서 논쟁하는 것은, 그 원수(元首)776)와 고굉(股肱)777)이 서로 가부를 논의하여 정치하는 방도에 이바지하자는 것인데, 만일 듣기싫어한다면 누가 할 말을 다하겠습니까?”하였다.
강경서가 아뢰기를,
“유자광을 추고하는 관원이 그 왕래할 때에 각관(各官)778)이나 각역(各驛)에 많은 폐단이 있을까 염려가 되니, 어사(御史)의 직함을 띠어 보내소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수영은 알지못한 일이며 부하를 단속하지못한 데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장 80, 탈고신 3등(奪告身三等)으로 조율하고 공신이기 때문에 감등하여 속하게하였으니, 이것도 죄를 주지않은 것은 아니다. 어사의 직함을 띠게하는 일은 아뢴대로 하라.”하였다.
강경서가 또 아뢰기를,
“갑자년779) 이후로는 나라에 대간의 말이 없기 때문에 수령등이 기탄하는 바가 없어 불법을 자행하였습니다. 지금 성명(聖明)의 때를 당하여 지난날의 폐단을 철저히 혁신하고 인물(人物)을 정히 선택해야될 것인데, 요즘 혹 친공신(親功臣)이나 원종(原從)인 당상(堂上)으로서 갑자기 의임을 제수하여 부사(府使)등의 벼슬을 주기까지 하였습니다. 지금 회양부사(淮陽府使) 이한원(李翰元)은 내력이 전혀없는데 무슨 경사(更事)780)가 있겠습니까? 이런 무리는 절대로 보내서는 안됩니다.”하였으나, 상이 대답하지 않았다.
註773]괴려(乖戾): 어긋나고 틀어진 것.註774]늙은이를 보호하면서 좋은 말을 빌었으며: 《예기(禮記)》내칙(內則)편에, “무릇 늙은이를 보호하여, 오제(五帝)는 법받고 삼황(三皇)은 또 말을 빌었다.”[凡養老五帝憲三王有乞言]한 데에서 나온 말로서, 그의 덕행을 법받고 실행할 만한 좋은 말을 빌었음註775]좋은 말을 들으면 절을 하기도: 《서경》대우모(大禹謨)편에 “우(禹)임금은 창언(昌言)을 절하였다”[禹拜昌言]라고 한 데에서 나온 말로서, 맹자(孟子)가 이를 인용하여 “우(禹)는 선언(善言)을 들으면 절한다”라고 하였음 註776]원수(元首): 임금 註777]고굉(股肱): 임금의 좌우 註778]각관(各官): 각 지방의 고을 註779]갑자년: 1504 연산군 10년.註780]경사(更事): 경력
○壬申朔/受朝賀、御朝講。 大司諫姜景叙曰: “具壽永削平人塚之罪, 旣爲重大, 若無所懲, 則何所不爲? 請依律治罪。”掌令李元成曰: “具壽永之罪, 不可不懲。 前亦曲宥, 故無所懲戒, 馴致驕縱。 其在廢朝, 多獻美女奇技, 蠱惑主心, 使其長子崇璟, 借述得參進士, 至於罷榜, 又使次子希璟, 借述於外, 造印踏(卷)〔券〕、潛投科次之類, 終見敗露。 今復擅削宰相妻墳而夷之, 是皆出於驕縱無所忌憚, 推原其罪, 固在不赦。 請依律治罪。 李茁事, 臣等所以累啓至此者, 以乖戾之甚也, 請速夬斷。 金季愚以特恩爲判官, 特恩乃人君之私也。 卽位之初, 不宜示人以私也。 古之人主, 能從諫納誨, 故或養老乞言, 或聞善言則拜, 是知納諫, 乃人君美德。 而殿下於近日論啓之事, 偏執固拒, 不勝缺望。 大抵於經筵所以論諍者, 以其元首股肱, 相濟可否, 以資治道也, 若不樂聞, 則誰有盡言者乎? 景叙曰: “柳子光推考之官, 其往來也, 各官各驛, 恐多有弊, 請結御史銜而遣之。” 上曰: “此壽永所不知之事, 而出於不能檢下, 故照杖八十、奪告身三等, 以其功臣, 而減贖, 是亦非不罪之也。 結銜御史事, 依啓。” 景敍又曰: “自甲子以後, 國無臺諫之言, 故守令等, 無所忌憚, 恣行不法。 今當聖明之時, 痛革前弊, 精擇人物可也, 而近日或以親功臣, 或以原從堂上, 而驟除外任, 至授府使等官者。 今淮陽府使李翰元, 專無來歷, 有何更事乎? 如此之類, 斷不可遣也。” 上不答。
중종 3권, 2년(1507 정묘/명정덕(正德) 2년) 8월 10일 신사 1번째기사
대사간 강경서등이 도감낭관에게 가자한 일등을 논계하다
조강을 하였다. 대사간 강경서(姜景敍), 장령 이원성(李元成)이 도감낭관에게 가자를 친수한 일과, 이안세, 이세회, 고안정, 황소로등의 일과 영경연사의 일을 논계(論啓)하고, 시독관(侍讀官) 조순(趙舜)도 역시 도감에게 가자한 일을 논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경서가 아뢰기를,
“검상(檢詳) 안팽수(安彭壽)가 곧 북경에 가기 때문에 이행(李荇)으로 대신을 삼았으나, 검상이라는 직책은 반드시 본부에서 추천한 바가 있어야 전조(銓曹)에서 의망(擬望)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행의 위인이 그 재행(才行)은 비록 검상의 책임에 맞을지라도 아직 천장(薦狀)827)도 없는데 하루아침에 갑자기 임명하였으니, 신은 고풍이 여기에서 떨어질까 염려됩니다.”하니,
전교하기를,
“그렇다면 체직하는 것이 옳다.”하였다.
註827]천장(薦狀): 추천서
○辛巳/御朝講。 大司諫姜景叙、掌令李元成, 論啓都監郞官, 親受加資事、李安世、李世薈、高安正、黃小老等事及領經筵事, 侍讀官趙舜, 亦論都監加資事, 不允。 景叙曰: “以檢詳安彭壽將赴京, 故命以李荇代之, 檢詳之職, 必有本府所薦, 銓曹方得擬望。 李荇爲人, 其才行雖合於檢詳之任, 第無薦狀, 而一朝遽爲之, 臣恐古風, 於此墜矣。” 傳曰: “然則遞之可也。”
중종 3권, 2년(1507 정묘/명정덕(正德) 2년) 8월 24일(을미) 1번째기사
대사헌 민상안등이 가례도감에게 가자한 일은 전례에 의거하여 고치도록 건의하다
조강(朝講)을 하였다. 대사헌 민상안(閔祥安)이 아뢰기를,
“신등이 아뢴바 가례도감에게 가자한 일은, 자궁(資窮)되고 준직(准職)이 못된 자를 말한 것이 아니라, 조종(祖宗)이 이룬 법을 준수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윤희인(尹希仁)은 이제 이미 고쳤고, 한세환(韓世桓)등은 마땅히 이 예에 의거하여 고쳐야 합니다.”하였다.
대사간 강경서(姜景敍)가 아뢰기를,
“대저 전례에 없는 일은 그 단서를 열 수없는 것이니, 청컨대 전례를 한결같이 준수하소서.”하였다.
민상안이 아뢰기를,
“심정, 남곤, 김극성등은, 종묘사직에 관계되는 일이 아닌데, 문서귀와 더불어 앞을 다투어 고소하여 공을 바라니, 선비의 기풍이 심히 아름답지 못합니다. 더구나 김감, 정미수등은 이미 방면되었으니, 김공저, 박경의 죄는 실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남곤등의 상직(賞職)867)은 진실로 줄 수 없는 것이니, 추탈(追奪)하소서.”하였다.
영사 성희안(成希顔)이 아뢰기를,
“대간이 심정등의 일로 논계하는 것은, 김공저의 죄가 크지않은데 심정등이 공을 세우려고 고소한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만, 당초에 신이 추국할 때 그 일을 소상하게 압니다. 문서귀는 나아가 고하려하였으나, 유생(儒生)이라 스스로 주달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심정, 남곤, 김극성등이 그 말을 듣고 마음에 참을 수가 없어서 달려와서 고한 것뿐이지, 공을 세우고 상을 받는 데에 마음이 있지않았습니다. 하물며 심정등은 심상(尋常)한 인물이 아닌데, 어찌 남의 비밀을 들추어내서 상을 구하려 하겠습니까?
김공저, 박경등이 범한 것은 가볍지 않으니 그 죄를 받음이 아주 마땅합니다. 그러나 정미수, 김감등은 김공저의 도모하는 바를 듣고도 미친 사람의 말이라고 하여 곧 고하지않았으니 그 정상이 가긍(可矜)할 뿐만 아니라 그 죄 역시 가볍기때문에 특별히 놓아 주도록 명한 것인데, 어찌 이것으로 김공저등의 죄까지 아울러 없다고 하여 남곤등의 상가(賞加)를 추탈하여야 되겠습니까?
대저 대간이 일을 의논함에는 마땅히 그 처음과 끝을 헤아린 뒤에 아뢰는 것이 옳은 것인데, 요즘은 간혹 정실(情實)을 구명하지않고 망령되이 시비를 논하니, 심히 옳지못합니다. 심정등의 상직은 제수한 지 이미 오래 되었으니, 이제 와서 결코 고칠 수가 없습니다.”하였다.
특진관 정광세(鄭光世)가 아뢰기를,
“김극성(金克成)이 선전관(宣傳官)으로서 마침 입직(入直)하였다가 심정등의 말을 듣고 덧붙여서 고하였으니, 그 마음이 공을 세우려한 것이기 때문에 사림(士林)이 다 불쾌하게 여기는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김공저, 박경등이 대신을 모해하려는 것을, 심정, 남곤등이 듣고 달려와 고한 것이 잘못인가? 김감, 정미수는 김공저와 더불어 같은 죄가 아니니, 놓아주는 것이 진실로 마땅한데, 어찌 심정등의 상직(賞職)을 아울러 빼앗아서야 되겠는가?”하였다.
강경서가 아뢰기를,
“문서귀는 고하는 것이 당연하나 김극성이란 자는 마침 입번(入番)하였다가 덧붙여서 고한 것이니, 선비들이 더욱 아름답지못하게 여깁니다.”하였다.
성희안이 아뢰기를,
“대간이 논계한 일이, 다 처음과 끝을 헤아리지 않고 상달(上達)한 것이니, 심정등의 상가를 추탈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이 사람들은 인물이 정대(正大)하여, 만약 대간의 논박(論駁)을 듣는다면 형을 받고 죽을지언정 사람들이 허물을 논하는 것을 들으려하지 않을 것입니다.”하였다.
시독관 조순(趙舜)이 아뢰기를,
“김공저등이 대신을 모해하려는 것을 심정등이 듣고 달려와 고한 것은 잘한 일이지만, 김극성은 마침 궐내에 있었던 관계로, 처음에는 몰랐다가 함께 고하였으니, 이것은 심히 불가한 일입니다. 이러므로 여론이 좋지못합니다.
김공저등의 죄는 주륙(誅戮)을 당해 마땅하지만, 그 처자(妻子)가 종이 되는 것은 지나친 것같으니 놓아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신이 항상 이 뜻이 있었는데, 오늘 마침 이 일을 논의하기 때문에 감히 아룁니다.”하였다.
성희안이 아뢰기를,
“김공저등의 처자(妻子)가 종이 된 일은 그 때, 그 죄를 법에 비춰 처단한 것인데, 지금 죄를 입은 지 오래되지 않았으니, 천천히 의논하여 사면하는 것이 마땅합니다.”하였다.
조순(趙舜)이 아뢰기를,
“경연에 특진관이 입참(入參)하는 것은 고문(顧問)에 대비한 것인데, 지금은 대사헌이 특진관을 겸하게 되니, 이것은 고문에 대비하는 뜻에 맞지않습니다. 앞으로 대간은 대간으로 입시하고, 특진관(特進官)은 특진관으로 입시하는 것이 옳습니다.”하였다.
성희안이 아뢰기를,
“이 말은 과연 그렇습니다. 요즘 대간이 사람을 논함이 아주 상세하여 논박을 당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대저 인물이 어찌 다 착할 수가 있겠습니까?
정원에서 마땅히 사람의 그릇을 따라 기록하여 아뢰어 입시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성종조(成宗朝)에 특진관이 아주 많아, 심지어 참의(參議)까지도 되었습니다. 그 때 홍이로(洪利老)가 무반(武班)으로 역시 참여하여, 활과 말, 화살대같은 일을 아뢰었는데, 이것 역시 각각 소회를 다 말하는 것입니다. 인군은 중론을 널리 채택하여 가릴 뿐입니다.”하였다.
강경서가 아뢰기를,
“특진관은 사람을 가려야 되는 것이니, 전후좌우에 다 바른 사람인 후에 임금의 덕이 성취되는 것인데, 어찌 사람마다 특진관이 될 수 있겠습니까?”하였다. 사경(司經) 어영준(魚泳濬)이 아뢰기를,
“옛말에, ‘좌우 전후에 바르지 못한 사람이 없다’하였으니, 바르지 못한 사람이 어찌 특진관이 될 수 있겠습니까? 성희안의 아뢴 바는 잘못입니다”하였다. 성희안이 아뢰기를,
“특진관에 마땅한 사람은 지금 많이 있으니, 정원에서 가려서 쓰는 것이 마땅합니다.”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성희안이 힘써 대간의 말을 변론하였는데 억누르는 것이 너무 지나친 것이다. 임금이 요(堯)순(舜)이 아닌 바에야 간(諫)하는 자를 좋아하는 사람이 드문 것이다. 대신이 된 자가 곧은 말을 좇도록 아침저녁으로 깨우치더라도 오히려 거스림이 있을까 두려울 것인데, 하물며 언관(言官)이 한 말에 그 지나친 것을 책망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임금의 처음 정사를 인도하는데 있어 그 도에 맞지않음이 이와 같으니, 장차 그런 정승을 어디에 쓰겠는가? 달을 넘기지않아서 대간을 옥에 가두게 되었으니, 성희안이 열어놓은 것이 아니겠는가? 임금의 좌우에는 모름지기 바른 사람이라야 능히 보양(輔養)할 수 있는 것인데, 만일 사정을 분변하지않고 다만 고관만을 취하여 특진관으로 삼는다면 도움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 손해가 있을 것이다. 이 때 김감, 정미수, 강혼의 무리들이 폐조(廢朝)의 행신(幸臣)으로 바야흐로 탄핵을 받았기 때문에, 성희안이 이 사람들의 편이 되어 이 말을 꺼낸 것이니, 그 생각이 천박하지 않은가?
註867]상직(賞職): 상으로 주는 직품.
○乙未/御朝講。 大司憲閔祥安曰: “臣等所啓嘉禮都監加資事, 非以資窮, 而職未准者, 以其祖宗成憲, 不可不遵故也。 尹希仁今旣改, 韓世桓等, 宜以此例改之。” 大司諫姜景叙曰: “大抵前例所無之事, 不可開端, 請一遵前例。” 祥安曰: “沈貞、南袞、金克成等, 以不關宗社之事, 與文瑞龜, 爭先告訴, 以邀其功, 士風甚不美也。 況今金勘、鄭眉壽等, 旣得免放, 金公著、朴耕之罪之不實, 可知矣。 南袞等賞職, 固不可授之, 請追奪。” 領事成希顔曰: “臺諫以沈貞等事論啓者, 必以謂金公著之罪不大, 而沈貞等, 欲邀功告訴, 然臣當初推鞫之時, 詳知其事也。 文瑞龜卽欲進告, 而以儒生, 難於自達, 故沈貞、南袞、金克成等, 聞其言, 而不忍於心, 馳告之耳, 非有心於邀功受賞也。 況沈貞等, 非尋常人物, 其肯以告訐設心, 而欲求賞耶? 公著、朴耕等所犯非輕, 其被罪甚當。 而鄭眉壽、金勘, 聞公著所謀, 以爲狂人之說, 而不卽告之, 其情可矜, 其罪亦輕, 故特命放之, 豈可以此, 較公著等之罪, 竝爲無實, 而追奪南袞等賞加乎? 大抵臺諫論事, 當計其終始, 然後啓之可也, 近日或有不究情實, 妄論是非者, 此甚不可也。 沈貞等賞職除授已久, 萬無追改之理。” 特進官鄭光世曰: “金克成以宣傳官, 適入直, 聞沈貞之說, 附會告之, 其心有若邀功, 故士林皆未快焉。” 上曰: “金公著、朴耕等, 謀害大臣, 沈貞、南袞等, 聞而馳告, 不可乎? 金勘、鄭眉壽, 不與公著等同罪, 放之固當, 豈可竝奪沈貞等賞職乎?” 景叙曰: “文瑞龜則告之當矣, 如克成者, 適入番而附會告之, 士類尤以爲不美。” 希顔曰: “近日臺諫論啓之事, 皆不度終始, 而上達, 沈貞等賞加, 萬無追奪之理也。 但此人等人物正大, 若臺諫之論駁, 則寧受其刑, 以至於死, 不欲聞人論此過失也。” 侍讀官趙舜曰: “公著等, 將欲謀害大臣, 而沈貞等聞之, 卽馳告可矣, 克成則適在闕, 初未聞知, 卽與之同告, 此不可之甚者。 以此物論不美。 公著等之罪, 被誅固當矣, 但其妻子爲奴, 似過矣, 放之何如? 臣常有此意, 而今適論是事, 故敢啓。” 希顔曰: “公著等妻子爲奴事, 其時以其罪比律科斷, 今則被罪不久, 當徐議赦之。” 趙舜曰: “於經筵, 特進官入參者, 以其備顧問也。 今則以大司憲兼特進官, 此於備顧問之意未便。 自今以後, 臺諫則以臺諫入侍, 特進官則以特進官入侍可也。” 希顔曰: “此言果然。 近〔日〕臺諫論人甚詳, 駁擊者多矣。 大抵人物, 豈能盡善乎? 政院當隨人器錄啓, 入侍可也。 成宗朝特進官甚多, 至以參議爲之。 其時洪利老, 以武班亦參, 以弓馬箭竹之事啓達, 此亦各盡所懷也, 人君當博採衆論, 裁擇之耳。” 景叙曰: “特進官當擇人爲之, 左右前後皆正人, 然後君德成就, 豈可人人而爲之乎?” 司經魚泳濬曰: “古云: ‘左右前後, 罔非正人。’ 不正之人, 何可爲特進官乎? 希顔所啓非矣。” 希顔曰: “特進官可當者, 今多有之, 令政院擇差爲當。”
史臣曰: 成希顔力辨臺諫之言, 挫抑太過。 君非堯、舜, 樂諫者鮮, 爲大臣者, 以從繩之言, 朝夕納誨, 猶懼有逆, 況言官有言, 更責其過當, 引君初政, 其不當道如此, 將焉用彼相? 未逾月, 臺諫繫獄, 豈希顔啓之? 人主左右, 須正人, 乃能輔養, 若不辨邪正, 秪取高官, 以備特進, 非直無助, 而又有損。 是時有金勘、鄭眉壽、姜渾輩, 以廢朝幸臣, 方被劾, 故希顔爲斯人地, 乃發此言, 其慮不亦淺乎?”】
중종 3권, 2년(1507 정묘/명정덕(正德) 2년) 8월 29일 경자 14번째기사
대사헌 민상안, 대사간 강경서등의 좌천을 명하다
대사헌 민상안(閔祥安), 대사간 강경서(姜景敍), 사감 김당(金璫),장령 이원성(李元成), 지평 유의신(柳義臣), 헌납 유운(柳雲), 정언 신봉전(申奉全)과 박거린(朴巨鱗)의 좌천을 명하였다
○命左遷大司憲閔祥安、大司諫姜景敍、司諫金璫、掌令李元成、持平柳義臣、獻納柳雲、正言申奉全ㆍ朴巨鱗。
중종 7권, 3년(1508 무진/명정덕(正德) 3년) 10월 22일(병술) 1번째기사
조강에서 인재 양성을 위해 불시의 고강, 적절한 교수, 독서당 예우등을 아뢰다
조강(朝講)에 나아갔다. 지평 신상(申鏛)과 정언 홍언필(洪彦弼)이 앞의 일을 논하고, 신상이 또 아뢰기를,
“인재의 부진함이 이때와 같은 적이 없었습니다. 성종조(成宗朝)에서는 인재를 양육해서 훌륭한 선비들이 배출되었으나, 불행하게도 폐주(廢主)가 죽이고 귀양을 보내 거의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이로부터는 사기(士氣)가 소삭(蕭索)하여 학문에는 뜻을 두지아니하고, 먼저 매진(媒進)1869)할 마음을 갖고있으니 이는 권려(勸勵)의 올바른 길을 얻지못한 때문입니다. 근자에 무사(武士)에게는 활쏘기를 시험하여, 우등을 한 자에게는 문득 상물(賞物)을 하사하시니, 무인은 이를 영화롭게 여겨 다투어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성균관과 사학(四學)의 거재(居齋) 유생(儒生)에게도 또한 불시에 점명(點名)하여, 혹은 제술(製述), 혹은 강경(講經)을 하여 입격한 자에게는 서책을 하사하여 권면하는 뜻을 보이시면, 저들도 반드시 임금의 하사를 영광으로 여겨 흥기(興起)할 마음이 많아질 것입니다.”하고
언필(彦弼)이 아뢰기를,
“성균관 동지사 안침(安琛)은 병으로 사진(仕進)하지 못하고, 윤금손(尹金孫)도 또한 연고없이 출사하지않으니, 청컨대 모두 해임하시고, 참판(參判)중에 문학과 덕망이 있는 이를 겸임시켜 교회(敎誨)하도록 하소서.”하고,
지사 신용개(申用漑)가 아뢰기를,
“인재의 부진은 과연 신상(申鏛)이 아뢴 바와 같습니다. 예전에는 비록 재상의 자식이라도 학업에 뜻을 돈독하게 하다가, 늙도록 성취하지 못하면 이에 비로소 관직을 구하였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겨우 강보(襁褓)를 면하게 되면 모두 매진(媒進)할 마음을 품고 학문을 힘쓰지아니하며, 비록 학업에 뜻하는 자가 있다할지라도 대부분이 자기 집에서 연습을 하고, 성균관에 거재하기를 좋아하지 아니하니, 지금의 계책으로서는 물망이 있는 사람을 선택하여 표솔(表率)1870)을 삼는 것만한 것이 없겠습니다. 강경서(姜景敍), 남곤(南袞)같은 이에게 동지사(同知事)를 겸임시켜 훈회(訓誨)를 하게하면, 유생(儒生)들이 흥기하여 즐거이 부학(赴學)할 것입니다. 이렇게 한 후에 재주를 시험하여 혹은 바로 회시(會試)1871)에 직부(直赴)케 하거나 서책(書冊)을 하사하면 어찌 인재가 부진함을 근심하겠습니까?
또 사학(四學)의 관원은 그 직에 제수(除授)된 지 오래지않아 문득 다른 관직에 옮기므로, 오래 있고자 하지않고, 교도에 근실하지 아니하니, 금후로는 사학 교수를 택차(擇差)하여 구임(久任)1872)한 자를 승천(陞遷)하도록 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또 예전에는, 윤차당상(輪次堂上)이 한달 내에 2∼3차 성균관에 나아가서 혹은 제술(製述)도 하고 혹은 강경(講經)도 하였으나 지금은 폐지되었으니, 청컨대 이를 신명(申明)하여 시행하되, 성균관뿐만 아니라 사학도 또한 성균관의 예에 따르도록 하소서. 그리고 당하관으로서 문학이 있는 자로 하여금 윤차(輪次)로 사진(仕進)케 하여 유생들의 제술을 고찰하도록 하소서.
또 독서당(讀書堂)이 경중(京中)에 있으므로 사가(賜暇)한 사람이 자주 그 집을 내왕하고 친우들의 방문도 또한 많아 전업(專業)할 수 없으니, 용산 독서당을 수리하는 동안에 제안대군(齊安大君)의 두모포(豆毛浦) 정자(亭子)에 거처하면서 학업에 전력하게 하소서. 그리고 서당에는 경비의 지응(支應)이 너무 박하고 사령(使令)도 부족하니, 넉넉하게 예우(禮遇)하여야 합니다.”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인재의 부진이 이와 같아, 이미 해조(該曹)1873)및 관학(館學)1874)의 관원을 추고(推考)하게 하였다.”하였다.
설경(說經) 성세창(成世昌)이 아뢰기를,
“독서당의 지응에 관한 일은 헤아릴 것도 없습니다. 만약 서책과 지필(紙筆)이 부족하다면 국가에서 간직한 서책도 많으니, 청컨대 이를 옮겨두어 관람에 편리하도록 하면 될 것입니다.”하고,
참찬관 이세인(李世仁)이 아뢰기를,
“오늘에 아뢴 것은 모두 인재를 양육하기 위한 일이니 유의하소서. 우리나라는 비록 해외(海外)에 있다할지라도, 중조(中朝)에서 문사(文士)가 많다는 것을 아름답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 앞서 천사(天使) 예겸(倪謙)이 나와서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의 재주를 보고 소중화(小中華)라고 칭찬한 일이 있습니다. 지금 홍문관(弘文館)의 관원으로서 장래가 있는 자는 오래도록 그 직에 있으면서 나라를 빛낼 인재가 되도록 하소서.”하였다.
註1869]매진(媒進): 다투어 나아가기를 꾀함 註1870]표솔(表率): 모범. 본보기.註1871]회시(會試): 한성부와 지방에서 초시(初試)에 합격한 사람을 서울로 모아 제2차로 보이는 시험을 회시, 또는 복시(覆試)라 한다. 이 회시에 합격한 사람만이 최종 시험인 전시(殿試)에 응시하게 된다.註1872]구임(久任): 문무관은 그 품계에 따라 일정한 재임 기간이 있다. 그러나 그 직무의 중요도를 감안하여 일정 임기에 구애치 않고 오래도록 근무하게 하는 것.註 1873]해조(該曹): 당해조, 즉 예조를 말함.註1874]관학(館學): 성균관과 사학
○丙戌/御朝講。 持平申鏛、正言洪彦弼論前事。 申鏛又曰: “人才之不作, 莫此時若也。 在成宗朝, 養育人材, 多士輩出, 不幸廢主, 誅竄殆盡。 自此以後, 士氣蕭索, 不志文學, 先有媒進之心, 此勸勵之不得其道也。 近者令武士試射, 優等者輒賜賞物, 武人以爲榮, 爭相鍊習。 如儒生之居館學者, 亦不時點名, 或製述或講經, 其入格者, 或賜書冊, 以示勸勉, 則彼必以君賜爲榮, 多有興起之心矣。” 彦弼曰: “成均館同知安琛, 以病不仕, 尹金孫亦無故不仕, 請皆罷去, 以參判中有文學德望者兼差, 使之敎誨。” 知事申用漑曰: “人才之不作, 果如申鏛所啓。 曩時雖宰相之子, 篤志學業, 老而(無)〔垂〕成, 乃始求官, 今則不然。 纔免襁褓, 皆懷媒進之心, 不業文學, 雖有志學者, 率皆居家鍊業, 不喜居館。 爲今計者, 莫若擇有物望者, 以爲表率。 如姜景叙、南袞, 兼差同知, 以之訓誨, 則儒生庶可興起, 而樂爲赴學矣。 於是而試才, 或直赴或賜書冊, 則人才何患不作乎? 且四學官員, 授職未久, 輒遷他官, 故不以久居爲計, 不勤於敎導。 今後四學敎授擇差, 而久任者陞遷, 何如? 且曩時輪次堂上, 一月之內, 二三次就成均館, 或製述, 或講經, 今則廢, 請申明擧行。 非獨館也, 四學亦依成均館例, 令以堂下官有文學者, 輪次仕進, 考其儒生之製述。 讀書堂在京中, 賜暇人員, 數往來其家, 朋友亦多尋訪, 不得專業。 龍山讀書堂修葺間, 請於齊安大君豆毛浦亭子處之, 使專其業。 且書堂, 支應甚薄, 使令不足, 當優禮遇之。” 上曰: “人才之不作如是, 故已令推考該曹及館學官員耳。” 說經成世昌曰: “讀書堂支應等事, 不足數也。 如書冊、紙、筆不足, 國家所藏書冊亦多, 請移置, 以便觀覽。” 參贊官李世仁曰: “今日所啓, 皆養育人才事, 請留意焉。 我國雖在海外, 中朝以文士之多爲美, 先是天使倪謙出來, 見成三問、朴彭年之才, 稱爲小中華。 今弘文館官員有將來者, 使久居其任, 以成華國之才。”
중종 7권, 4년(1509 기사/명정덕(正德) 4년) 1월 5일(무술) 2번째기사
웅천 사람이 왜적에게 피살된 일, 함경도 군보의 이설 문제를 의논하다
경상도 경차관(敬差官) 김근사(金謹思)가 치계(馳啓)하기를,
“웅천(熊川)의 관리가 사람을 시켜 가덕도(加德島)에서 재목을 취하다가 왜적(倭賊)을 만나 피살되었다는 사실을 신이 방금 추문(推問)하였습니다. 친히 가서 그 형세를 보았더니, 섬이 바다가운데 있고 왜인이 살고있는 포소(浦所)와 멀지 아니하므로, 신의 생각으로는 저들이 우리나라 사람이 홀로 깊숙이 들어간 것을 보고 그 틈에 몰래 쳐들어가서 이러한 변고가 나게 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하고,
병조(兵曹)가 아뢰기를,
“이 일은 마땅히 도주(島主)2035)에게 통유(通諭)해야 하오나, 신등이 천단할 수없는 일이니 청컨대 수의하소서.”하니,
‘그렇게 하라.’ 전교하고,
이어 삼공과 병조 당상(兵曹堂上)을 불러 의논하도록 하였다. 영의정 유순(柳洵), 좌의정 박원종(朴元宗), 우의정 유순정(柳順汀), 판서 홍경주(洪景舟), 참판 임유겸(任由謙), 참의 박소영(朴召榮), 참지 강경서(姜景敍)등이 의논드리기를,
“근사(謹思)가 아뢴 뜻을 보니 가덕도의 적변(賊變)은 반드시 삼포(三浦)에 사는 왜인(倭人)의 소행일 것입니다. 만약 그대로 두고 묻지아니한다면, 국가의 위신을 떨치지못하고, 또 저들이 두려워하는 바 없어 구초(寇鈔)2036)가 더욱 심할 터이니, 근사(謹思)로 하여금 두왜(頭倭)등을 불러 이르기를, ‘근자 웅천 사람이 가덕도에서 재목을 취하였는데, 연일(連日) 큰 바람으로 인하여 돌아오지 못하였다. 왜적(倭賊)이 밤을 이용해서 몰래 쳐들어가 사람을 살해하고, 옷과 양식을 약탈하였다. 그들은 우리나라의 언어(言語)를 잘한다하니, 만약 참으로 왜적이라면 어찌 우리나라의 말을 알겠으며, 또 큰 바람에 홀로 대해(大海)를 건너와서 도둑질을 했겠는가? 이는 반드시 삼포(三浦) 왜인(倭人)이 웅천 사람이 이 섬에 있음을 알고, 편리한 기회를 엿보아 도둑질을 한 것이다. 너희들이 와서 여기서 산지도 여러 해가 되었으며, 우리 땅에서 생산되는 곡식을 먹고 자손을 길렀으니 나의 편맹(編氓)2037)이나 다름이 없는데, 오히려 짐승의 마음을 품고 표절(剽竊)2038)하여서야 되겠느냐? 네 어찌 휘하인(麾下人)의 범행임을 모르겠는가? 만약 와서 고하지 아니하면 조정에서 반드시 처치가 있을 터이니 그 때에 후회를 해도 소용이 없다’하고 엄중한 말로써 힐책을 하여 그 요령을 얻으면 치계(馳啓)하도록 하유(下諭)하시는 것이 어떠합니까?”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시행하라.”하였다.
병조가 또 아뢰기를,
“함경도관찰사 고형산(高荊山)이 아뢰는 바, 각 군보(軍堡)의 이설에 관하여 대신을 파견하여 조치하기를 청하였으니 어떻게 하오리까?”하니,
전교하기를,
“마땅히 파견토록 해야하나, 다만 지난해에 실농(失農)을 하였으므로 혹 불가할 듯하니, 삼공(三公)에게 의논하도록 하라.”하였다.
유순(柳洵)등이 아뢰기를,
“함경도는 비록 실농을 하였다해도 대사를 위해서는 약간의 폐되는 것은 따질 수가 없으니, 각 군보를 이설하는 일을 지금 만약 즉시 조치하지아니하면 대폐(大弊)가 있을 듯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도는 근년에 와서 인마(人馬)가 조잔하여 방수(防戍)가 튼튼하지 못하므로, 더욱 마땅히 속히 대신을 파견하여 조치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성밑에 있는 야인(野人)에게도 또한 대신(大臣)이 행차할 때 음식물을 보내주어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즐겁도록 해야합니다. 다만 인솔하는 사람을 적게하여 주현(州縣)의 폐가 없도록 하소서.”하니,
‘그렇게 하라.’전교하고, 박원종(朴元宗)을 파견하도록 명하였다.
원종이 아뢰기를,
“국가의 일이니 마땅히 힘을 다해야하지만 일신(一身)의 괴로움을 꺼림은 아니오나 신은 무인(武人)으로서 갑자기 태위(台位)2039)에 있으므로 전일에 굳이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못하여 항상 위태하고 두려움을 품고 있었습니다. 지금 이 연혁(沿革)의 일은 지극히 중대하여 신이 조치할 수 없으니 사면하여 주소서.”하니,
전교하기를,
“변방의 일은 경이 마땅히 책임을 져야하겠다. 지난해에 갔어야할 것을 정지하였으니, 지금은 사퇴할 수 없다.”하였다.
註2035]도주(島主): 대마도주 註2036]구초(寇鈔): 침략 註2037]편맹(編氓): 호적에 편입된 백성 註2038]표절(剽竊): 협박하여 빼앗음.註2039]태위(台位): 삼공의 자리.
○慶尙道敬差官金謹思馳啓曰: “熊川官吏, 令人取材木于加德島, 逢倭賊見殺事, 臣方推之。 且親到觀其形勢, 島在海中, 與倭居浦所不遠。 臣疑彼見我人孤單懸入, 乘機竊發, 致此變故也。” 兵曹啓曰: “此事當通諭島主, 然臣等不得擅便, 請收議。” 傳曰: “可。” 仍召三公、兵曹堂上議之。 領議政柳洵、左議政朴元宗、右議政柳順汀、判書洪景舟、參判任由謙、參議朴召榮、參知姜景叙等議: “觀謹思所啓之意, 則加德島賊變, 必是三浦居倭所爲也。 若置而不問, 國威不振, 彼無所畏忌, 寇鈔益甚。 令謹思招語頭倭等曰: ‘近者熊川人, 取材木于加德島, 因連日大風, 不得回來, 賊倭乘夜竊發, 殺害人物, 掠奪衣糧。 聞其人皆能爲我國言語, 若眞賊倭, 則豈得解我國言語? 又於大風, 獨能渡大海來寇, 是必三浦倭人, 知熊川人在此島, 窺便作耗耳。 爾等來居于此, 積有年紀, 食我土毛, 長子及孫, 與我編氓無異, 猶懷獸心, 剽竊不已可乎? 爾豈不知麾下人所犯乎? 如不來告, 則朝廷必有處置, 後悔無益。’ 以此嚴辭詰責, 得其要領馳啓事, 下諭何如?” 傳曰: “依啓。” 兵曹又啓曰: “咸鏡道觀察使高荊山所啓各堡移排事, 請遣大臣, 措置何如?” 傳曰: “固當遣之。 但去年失農, 似或不可, 其議于三公。” 柳洵等啓曰: “咸鏡道雖曰失農, 然爲大事, 不計小弊。 各堡移排事, 今若不卽措置, 則恐有大弊。 且此道近年以來, 人馬彫殘, 防戍不固, 尤當速遣大臣, 以爲措置之方。 其城底野人, 亦於大臣之行, 可饋餉慰悅其心。 但令省減帶行之人, 俾無州縣之弊。” 傳曰: “可。” 命遣朴元宗, 元宗啓曰: “國家之事, 所當盡力, 而一身不足憚勞也。 然臣以武人, 驟居台位, 前日固辭不得, 常懷危懼。 今此沿革之事至大, 非臣所能措置, 請辭。” 傳曰: “邊方之事, 卿當任責。 去年當行而止, 今則不可辭。”
중종 8권, 4년(1509 기사/명정덕(正德) 4년) 4월 2일(계해) 4번째기사
김근사가 왜노에 대한 방책으로 4조를 서계하니 유순, 김수동등이 의논하다
김근사(金謹思)가 4조(條)를 서계(書契)하여,
“첫째, 국가에서 삼포(三浦)의 왜리(倭里)에 제한구역을 정하여 경계를 넘어 출입할 수 없게 한 것은 안팎의 구분을 엄히 하여 난잡히 하지못하게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스스로 방자하게 출입하여 조금도 기탄이 없습니다. 혹은 나무를 하고 예불(禮佛)을 하러 내지에 깊이 들어오며, 혹은 흥판(興販)2260)을 인하여 옷을 바꾸고 말씨를 변하여 여러 고을로 횡행하되, 변장이 금하지 못하여 드디어 선례를 이루었고, 비록 금하여 억제하려 하여도 왜인이 노염을 품어 반드시 헤아리지 못할 변을 꾸밀 것이므로, 구차스럽게 세월을 보내어 자행(恣行)하게까지 된 것입니다. 청컨대 변장을 신칙하여 한결같이 조종조의 옛규범에 의하고, 스스로 방자하게 출입하지 못하게하소서.
둘째, 웅천현 보평역(報平驛)은 제포 북쪽 3리쯤에 있는데, 그 곳 인민과 역리들이 왜인과 결호(結好)하여, 수양(收養)이라고 칭하여 서로 왕래하면서 아비라 부르고 형이라 일컬으니, 상고(商賈)로서 장사하는 자나 와서파는 왜인들이 모두 역인(驛人)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피차사이에 끼여 정을 통해주고 물품을 무역하며, 국가의 사정을 누설하지않음이 없는 것이 모두 이런 사람들의 소위입니다. 대체로 웅천(熊川)성 밑에 사는 인민은 모두 그러한데, 역인이 더욱 심합니다. 신이 보건대 이 역은 비록 변지에 있지만, 있으나 없으나 관계되지 않습니다. 현 동쪽에는 적항역(赤項驛)이 있고 서쪽에는 창원부(昌原府)의 안민역(安民驛)이 있으니, 만일 급한 일이 있게되면 본현에서 보고를 띄우고, 두 역도 또한 체전(遞傳)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청컨대 보평역을 혁파, 두 역에 분속(分屬)시켜서 왜인의 교통하는 폐단을 끊고, 성밑에 사는 인민도 아울러 일체 사사로운 무역을 통절히 금하게하소서.
세째, 지난번 국가에서 삼포의 왜리에 제한구역을 설치하고자, 성자(城子) 기지를 감사가 가서 살필 때, 부산에 사는 왜인들이 변고가 있는가 의심하여 제 멋대로 목책(木柵)을 세우고 또 경수(警守)를 엄하게하여, 우리에게 항거하는 듯한 형상이 있었습니다. 왜인들이 당초에 와서 거주할 때, 국가에서 호수를 약정하고 이들을 좁은 곳에 두어 겨우 살도록 하였었는데, 지금은 종류(種類)2261)가 점차 번져서 목책을 설치하고 스스로 방위하게까지 되었으니, 국가의 본뜻에 몹시 어긋납니다. 다른 포(浦)의 왜인들도 이를 본받아 설비하면 장래에 닥칠 걱정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이 두렵습니다.
네째, 부산포의 왜인들은 본읍 인민에게서 농기와 경우(耕牛)를 매입하여 동평현(東平縣) 땅에서 무리와 섞여살면서 경작하는데, 경작을 다투어 싸움질을 하는 자까지 있으니, 몹시 불가합니다. 청컨대 통절히 금하소서”하였다. 유순, 김수동, 유순정, 노공필, 김응기, 임유겸(任由謙), 박소영(朴召榮), 강경서(姜景敍)등이 의논드리기를,
“김근사(金謹思)가 아뢴 바, 상고의 무리가 보평역의 역리(驛吏) 및 거주민가에 의지하여 왜인과 교통하면서 국가의 사정을 누설한다한 것은 폐단이 과연 적지않습니다. 그러나 호시(互市)2262)하는 법은 그 유래가 오래어 한결같이 금하여서는 안되며, 보평역도 또한 혁파하여 다른 역에 소속시킬 수 없습니다. 다만 교통하여 누설하는 것은 스스로 그 법이 있으니 마땅히 거듭 밝히어 엄금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웅천은 성이 좁아 만일 변고가 있으면 백성을 수용하여 수어(守禦)할 수 없으니, 이것이 염려됩니다. 오는 가을을 기다려 널찍하게 물려쌓고 역리(驛里)의 인가도 아울러 성중에 들어가 살게하여, 출입이 때가 있도록 하면 왜인과 더불어 교통하는 것이 저절로 방자한 데까지는 이르지 않을 것이고, 수어도 또한 견고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한구역을 정하여 출입할 수 없게 하고, 농우 및 농기를 파는 것을 금하는 것은 법령이 이미 뚜렷하니 또한 마땅히 거듭 밝혀 통절히 금하게 하소서. 목책을 설비하는 것과 같은 것은, 반드시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어서 스스로 방위하고자 함이니, 어찌 이것이 우리에게 항거하는 계교이겠습니까? 걱정할 것이 못됩니다.”하니,
명하여 의논대로 시행하게 하였다.
註2260]흥판(興販): 상업 註2261]종류(種類): 왜인.註2262]호시(互市): 상호간에 무역하는 것.
○金謹思書啓四條:其一, 國家於三浦倭里, 定關限, 使不得踰越出入者, 所以嚴內外之分, 不使亂雜。 今者自恣出入, 略無忌憚, 或樵採禮佛, 深入內地, 或因興販, 易服變言, 橫行諸郡。 邊將不能禁, 遂以成例, 雖欲禁抑, 而倭人懷怨, 必搆不測之變, 故苟度歲月, 以至恣行。 請申勑邊將, 一依祖宗朝舊規, 使不得自恣出入。 其二, 熊川縣報平驛, 在薺浦迤北三里許, 其人吏等, 與倭人結好稱收養, 相往來, 呼爺稱兄, 商賈就貿者, 倭人來賣者, 皆依驛人。 是故介於彼此, 通情貿物, 國家事情, 無不漏洩, 皆此等人所爲也。 大抵熊川城(氐)〔底〕居人皆然, 而驛人尤甚。 臣見此驛, 雖在邊地, 不關有無。 縣之東有金海府赤項驛, 西有昌原府安民驛, 如有緩急, 則本縣可以發報, 而兩驛亦可以遞傳也。 請革報平驛, 分屬兩驛, 以絶倭人交通之弊, 城底居人, 竝一切痛禁私貿。 其三, 頃者國家欲於三浦倭里, 設關限城子基址, 監司往審時, 釜山居倭等, 疑有變故, 擅樹木柵, 且嚴警守, 有若抗我之狀。 倭人等當初來居之時, 國家約定戶數, 處諸隙地, 使之苟活。 而今則種類滋蔓, 乃至設柵自衛, 甚違國家本意。 臣恐他浦之倭, 效此設備, 將來之患, 有不可勝言。 其四, 釜山浦倭人等, 買農器耕牛於本邑人, 於東平縣地, 而與我混處耕作, 至有爭耕狠鬪者, 甚爲不可。 請痛禁。
柳洵、金壽童、柳順汀、盧公弼、金應箕、任由謙、朴召榮、姜景叙等議: “金謹思所啓, 商賈之徒, 依報平驛吏及居民家, 與倭人交通, 漏洩國家事情, 弊果不貲。 然互市之法, 其來尙矣, 不宜一禁。 報平驛亦不可革屬他驛。 但交通漏洩, 自有其法, 宜申明嚴禁。 且熊川城子狹隘, 萬有變故, 不得容民守禦, 是可慮也。 待秋稔, 寬闊退築, 驛里人家, 竝令入居城中, 使出入有時, 則與倭人交通, 不至自恣, 而守禦亦固矣。 如定關限, 使不得出入, 禁賣農牛、農器, 法令已著, 亦宜申明痛禁。 若其樹柵設備, 此必有畏懼之心, 欲爲自衛, 豈是抗我之計? 不足患也。” 命依議施行。
중종 8권, 4년(1509 기사/명정덕(正德) 4년) 6월 11일 신미 4번째기사
신윤무, 장순손, 성몽정, 최인, 박소영, 이공우, 유속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신윤무(辛允武)를 의정부우참찬으로 삼고, 장순손을 호조판서로, 박열(朴說)을 공조판서로, 성몽정을 이조참판으로, 최인(崔璘)으로 병조참의로, 박소영(朴召榮)을 형조참의로, 이공우(李公遇)를 참지로, 유속(柳續)을 승정원동부승지로, 강경서(姜景敍)를 사간원대사간으로, 김관(金寬)을 홍문관응교로, 김세필(金世弼)을 부응교로, 김정(金淨)을 헌납으로, 최명창(崔命昌)을 수찬으로, 김정국(金正國)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以辛允武爲議政府右參贊, 張順孫爲戶曹判書, 朴說爲工曹判書, 成夢井爲吏曹參判, 崔璘爲兵曹參議, 朴召榮爲刑曹參議, 李公遇爲參知, 柳續爲承政院同副承旨, 姜景敍爲司諫院大司諫, 金寬爲弘文館應敎, 金世弼爲副應敎, 金淨爲獻納, 崔命昌爲修撰, 金正國爲副修撰。
중종 8권, 4년(1509 기사/명정덕(正德) 4년) 6월 17일 정축 1번째기사
조강에서 강경서가 박열, 정광필을 들면서 관작을 급히올리는 잘못을 논하다
조강에 나아갔다.
대사간 강경서(姜景敍)가 관작을 급히 올리는 잘못을 논하여 아뢰기를,
“성종조에는 관작을 중히 여기고 아껴서 한 자급도 외람되게 베풀지않았습니다. 한치형(韓致亨)이 가선으로 가정을 가하였고, 정활(鄭括)이 가선으로 자헌(資憲)에 오른 것은 특이한 성적(聲績)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박열, 정광필은 모두 가선으로 판서가 되었으니, 급히 오름이 더 심할데 없습니다.”하고,
영사 박원종은 아뢰기를,
“신은 나이 젊어서 급히 승진하였으니 감히 남을 의논할 수 없사오나, 신이 들은 바 있기 때문에 아룁니다. 성종께서는 관작을 중히 여기시고 아껴서 일찍이 헛되게 베풀지 않으셨으니, 박건(朴楗), 이극돈(李克墩)은 모두 쓸 만한 사람이었으되, 당시 사람들이 철가선(鐵嘉善)이라 한 것은 그 진급이 오랜 것을 말한 것이었습니다. 지금으로 보면 상거(相去)가 매우 먼 얘기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작상(爵賞)이 과연 가벼웠다. 자헌(資憲) 재상(宰相)중에 판서로 임명할 만한 사람이 없기때문에 혹 가선(嘉善)을 올린 것이니, 이는 그 사람됨에 있는 까닭이다.”하였다.
○丁丑/御朝講。 大司諫姜景敍, 論官爵驟陞之失曰: “成宗朝, 重惜官爵, 一資級, 猶不濫施。 韓致亨, 以嘉善, 加嘉靖, 鄭括, 以嘉善, 陞資憲, 以有特異聲績故也。 今者朴說、鄭光弼, 皆以嘉善爲判書, 驟陞莫甚焉。” 領事朴元宗曰: “臣亦年少驟陞, 不敢議人。 然臣有所聞, 故啓之。 成宗重惜官爵, 未嘗虛施。 朴楗、李克墩, 皆可用之人, 而時人以爲鐵嘉善, 以言其資級之久也。 以今見之, 相去遠甚。” 上曰: “爵賞果輕矣。 資憲宰相, 無可任判書者, 故或以嘉善陞之。 此在其人故也。”
중종 8권, 4년(1509 기사/명정덕(正德) 4년) 6월 27일 정해 4번째기사
대사헌 권홍, 대사간 강경서등이 합사하여 기신재, 내수사장리 혁파를 청하다
대사헌 권홍, 대사간 강경서등이 합사하여 아뢰기를,
“신등은 간쟁하는 자리의 관원이 되어, 국가의 폐단이 기신재및 내수사의 장리(長利)와 같은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조종조로부터 대간이 논집(論執)하여 마지않았고, 정국(靖國)2536)한 뒤에도 계속 열흘동안이나 복합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 뜻은 중흥하는 정치를 위하여 큰 폐단을 버리고자 함이었습니다. 근래 논계하여 윤허된 일이 또한 많지만, 지금 이 두 가지 폐단으로 본다면 그것은 모두 사소한 일입니다.
그래서 신등이 다시 이것을 아뢰어 마침내 소청을 얻기를 기약하는데, 장무관(掌務官)만을 보내어서는 회천(回天)2537)할 수 없을까 염려되므로 합사하여 와서 아룁니다.”하고, 또
운산군, 신윤무, 성율, 정자지, 최인수, 박영창의 일을 아뢰니, 전교하기를,
“기신재(忌晨齋)와 내수사의 장리는 그 유래가 벌써 오래다. 조종께서 어찌 그 잘못을 알지못하고 하셨겠는가? 그리고 논란하는 바 인물들은 대단한 과실이 없는데 가벼이 진퇴시키는 것이 어찌 옳겠는가?”하였다.
註2536]정국(靖國): 중종반정註2537]회천(回天): 임금의 마음을 되돌리는 것
○大司憲權弘、大司諫姜景叙等, 合司啓曰: “臣等皆備員諫諍之地, 念國家弊端, 無如(忌晨齋)〔忌辰齋〕、內需司長利兩事。 故自祖宗朝, 臺諫論執不已。 至於靖國而後, 彌旬伏閤而止。 其意爲中興之治, 欲袪大弊。 近來論啓蒙允之事亦多, 今以此兩弊觀之, 彼皆餘事。 故臣等更以此啓, 經期得請, 只遣掌務官, 恐未能回天, 故合司來啓。” 且啓雲山君、辛允武、成慄、鄭子芝、崔仁壽、朴永昌事。 傳曰: “(忌晨齋)〔忌辰齋〕、內需司長利, 其來已久。 祖宗豈不知其非, 而爲之? 所論人物, 無大段過失, 而輕易進退, 豈可乎?”
중종 8권, 4년(1509 기사/명정덕(正德) 4년) 7월 1일 신묘 1번째기사
권홍, 강경서가《대학연의》에 표를 붙여올리며 기신재, 장리등의 일을 아뢰다
대사헌 권홍, 대사간 강경서가 합사하여 아뢰기를,
“기신재 및 내수사장리(長利)의 일에 대해 어제 하교하시기를, ‘성종께서 상전(上殿)2539)을 위하여 부설하신 것이니, 내 뜻도 또한 이에 불과하다’하셨는데, 신등은 제왕의 효도는 필부의 효도와 같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어찌 반드시 사재(私財)늘림을 효도라 하겠습니까?”하고,
이어 《대학연의(大學衍義)》2540)에 표를 붙여 올리며 아뢰기를,
“이로써 보면, 제왕의 효도를 알 만합니다. ‘옛날 밝은 임금이 효도로 천하를 다스림에는 감히 작은 나라의 신하라도 저버리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공,후,백,자,남(公侯伯子男)이겠는가? 그러므로 만국의 환심을 얻어 그 선왕을 섬긴다.’하였으니, 이는 천자의 효도입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감히 홀아비와 과부[鰥寡]를 업신여기지 못하거든, 하물며 사민(士民)이겠는가? 그러므로 백성의 환심을 얻어 그 선군(先君)을 섬긴다.’하였으니, 이는 제후의 효도를 말한 것입니다. ‘집을 다스리는 사람은 감히 신첩(臣妾)에게도 실수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처자이겠는가? 그러므로 사람의 환심을 얻어 그 어버이를 섬긴다.’하였으니, 이는 대부의 효도를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았으면 어버이가 편안하고 제사지내면 귀신이 흠향합니다. 이 때문에 천하가 화평하여 재변이 발생하지않고 화란이 일어나지 않으니, 밝은 임금이 효도로 천하 다스림은 이와 같은 것입니다. 만약 백성을 침범하고 사채(私債)를 늘려서 어버이 봉양하는 자본을 삼는다면, 누가 백성의 환심을 얻었다고 말하겠습니까? 대개 사대부의 집에서 사채를 늘리는 사람은 맑은 의논[淸議]에 끼지못하겠거든, 하물며 나라 임금이 백성과 이(利)를 다투겠습니까? 그러므로 진서산(眞西山)2541)이 이르기를, ‘후세 임금은 대개 그 백성에게 포학하여 원망을 맺고 재앙을 쌓아서 그 어버이를 위태롭게 하고, 그것이 종묘에까지 미치기에 이른 이가 있으니, 그런 뒤에야 성인의 말이 참으로 백세의 시구(蓍龜)2542)임을 안다.’하였습니다.
비록 옛 일을 원용하여 아뢰지않고 폐조로부터 보더라도, 그 실덕(失德)함이 모두 내수사에서 비롯되어 마침내 나라를 그르치기에 이르렀으니, 진서산의 말이 부절(符節)을 맞춘 것과 같습니다. 이제 성명(聖明)한 임금이 중흥하시니, 이는 정히 경장(更張)하여 다스리고 교화할 기회인데, 이 때에 혁정(革正)하지않으시면 상께서는 성덕을 더럽히시고, 신등은 천고의 죄인이 됩니다. 기신재는 부처의 말이 망령되고 허탄한 것이라 선유들이 상세히 논난하였으니, 신이 비록 아뢰지않더라도 천감(天鑑)이 이미 훤히 비추실 것입니다. 다만 선왕선후(先王先后)의 신령이 호귀(胡鬼)2543)에게 욕보심은 한갓 후사(後嗣)의 차마 못할 바일뿐만 아니라, 또한 신민의 차마 못할 바입니다.
성인이 말하기를, ‘살아서도 예로써 섬기며, 죽어서도 예로써 장사지내고 예로써 제사지낸다.’하였습니다. 국가에서 이미 종묘와 원묘에 예로써 제사지내니, 사도(邪道)로써 선조를 욕보일 것은 없습니다. 운산군 및 신윤무는 개정하지 않아서는 안됩니다. 수령은 서경(署經)하지않으면 부임할 수 없으나, 다만 고을에 주인되는 수령이 없으면 사체가 어그러지므로 아룁니다”하고, 또 성율, 정자지, 김정간(金貞幹), 최인수의 일을 아뢰었으나 윤허하지않았다. 다시 아뢰기를,
“전교에 이르시기를 ‘이롭고자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하셨으나, 이미 이름을 ‘장리’라 하고 그 잉여(剩餘)2544)를 쓰니, 어찌 이(利)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사대부가 남에게 이식을 취하여도 오히려 맑은 의논에 용납되지 못하거든, 어찌 백성과 이를 다투면서 비용을 충당하겠습니까? 운산군은 대종정(大宗正)이라, 남들이 표준이 되어야 할텐데 도리어 번각(煩刻)합니다. 신윤무는 나이가 젊어 도당(都堂)에 맞지않으니, 노성하기를 기다려 뒤에 임명하는 것이 무엇이 해롭습니까? 성율은 비록 공신이라 하나 젖내나는 사람입니다.
공을 상주는 것도 또한 반드시 이와 같이 외람될 것이 아닙니다. 박영창은 망령되고 패덕스러워 그 소임에 맞지않습니다. 정자지(鄭子芝)는 탐오하다고 물론이 파다하니, 장오(贓汚)를 면한 것만도 또한 다행합니다. 최인수는 조열(朝列)에 끼어있어서는 안됩니다. 김정간은 폐조에 사운(四韻) 1연(聯)으로 출신하여 학술을 알지못하니, 어찌 사유(師儒)의 소임에 맞겠습니까?【1연(聯)은 곧 ‘자맥(紫陌)2545)에는 이미 호리(狐狸)의 자취가 없고 단산(丹山)2546)에는 응당 봉황의 울음이 있으리.’[紫陌已無狐狸迹, 丹山應鳳有凰鳴 ]라한 것이니, 때에 소인이 없음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청컨대 속히 청납하소서.”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註2539]상전(上殿): 윗전 註2540]《대학연의(大學衍義): 송(宋)나라의 진덕수(眞德秀)가 지은 책으로 모두 42권으로 되어 있으며, 첫머리에 정치하는 요점과 학문하는 근본을 서술하고, 다음에 격물치지(格物致知), 성의정심(誠意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의 네가지 대강(大綱)을 말하였음. 모두 경훈(經訓) 사사(使事)를 방징(旁徵)하고 선유의 논의를 참고하여 법계(法戒)를 밝히고, 근본을 맑고 바르게할 것을 주장하고 있음. 조선왕조에서는 역대 왕이 이 책을 경연의 교재로 사용하였음 註2541]진서산(眞西山): 진덕수(眞德秀). 서산은 그의 호 註2542]시구(蓍龜): 복서(卜筮).
○辛卯朔/大司憲權弘、大司諫姜景叙合司啓曰: “(忌晨齋)〔忌辰齋〕、內需司長利事, 昨日下敎曰: ‘成宗爲上殿復設, 予意亦不過此。’ 臣等以謂帝王之孝, 與匹夫之孝不同, 何必殖私財爲孝乎?” 因以《大學衍義》, 付標進曰: “以此觀之, 帝王之孝可知。 昔者明王之以孝治天下也, 不敢遺小國之臣, 況於公、侯、伯、子、男乎? 故得萬國之歡心, 以事其先王。 此天子之孝也。 治國者, 不敢侮於鰥寡, 而況於士民乎? 故得百姓之歡心, 以事其先君。 此言諸侯之孝也。 治家者, 不敢失於臣妾, 而況於妻子乎? 故得人之歡心, 以事其親。 此言大夫之孝也。 夫然故生則親安之, 祭則鬼享之。 是以天下和平, 災變不生, 禍亂不作, 明王之以孝治天下也如此。 若侵百姓殖私債, 以爲榮養之資, 則孰曰得百姓之歡心乎? 大槪士大夫之家, 殖私債者, 不齒淸議, 況國君與民爭利乎? 故眞西山曰: ‘後世人君, 蓋有暴虐其民, 結怨稔禍, 至於危其親, 以及宗廟者, 然後知聖人之言, 眞百世(耆龜)〔蓍龜〕也。’ 雖不援古以啓, 自廢朝觀之, 其爲失德, 皆由於內需司, 而終至於誤國, 眞西山之說, 如合符節。 方今聖明中興, 此正更張治化之機會, 不於此時革正, 則上累聖德, 而臣等爲千古之罪人矣。 (忌晨齋)〔忌辰齋〕, 佛說妄誕, 先儒之論詳矣, 臣雖不啓, 天鑑已洞照矣。 但以先王先后之靈, 見辱於胡鬼, 非徒後嗣之所不忍, 亦臣民之所不忍也。 聖人有言曰: ‘生事之以禮, 死葬之以禮, 祭之以禮。’ 國家旣於宗廟、原廟, 祭之以禮, 不必以邪道, 辱先祖也。 雲山君及辛允武, 不可不改正。 守令不署經, 則不得赴任, 但邑無主宰, 事體乖宜, 故啓之。” 且以成慄、鄭子芝、金貞幹、崔仁壽事啓之, 不允。 更啓曰: “傳敎云: ‘非欲利而爲之。’ 旣名爲長利, 而用其剩餘, 何以不謂之利乎? 士大夫取息於人, 猶不容於淸議, 豈必與民爭利而後足用乎? 雲山君大宗正也, 人所準則, 而反爲煩刻。 辛允武, 年少而不合都堂, 待其老成而後任之何害? 成慄雖曰功臣, 而乳臭人也, 賞功亦不必如是其濫也。 朴永昌, 妄悖不合其任, 鄭子芝, 貪汚播諸物論, 其免贓汚亦幸矣。 崔仁壽, 不可齒在朝列, 金貞幹, 於廢朝, 以四韻一聯出身, 不知學術, 豈合於師儒之任乎?【一聯乃 ‘紫陌已無狐狸迹, 丹山應有凰鳳鳴。’ 指言時無小人也。】請速聽納。” 不允。
중종 9권, 4년(1509 기사/명정덕(正德) 4년) 8월 3일 계해 2번째기사
대사간 강경서가 경연에 납실 것을 아뢰다
대사간 강경서(姜景敍)가 아뢰기를,
“신은 성종(成宗)때에 경연관(經筵官)으로 있었는데, 한창 더울 때를 당하게 되면 경연의 정지를 청하셨고 7월 보름 뒤가 되면 경연에 납시기를 청하셨는데, 이것은 전례였습니다. 성종께서는 전교하시기를,
‘때는 가을, 오랜 비 개니,
서늘한 새 맛 들판에 드네.
등잔불 가까이할 만하니,
간편을 펴봄직하도다.‘하셨고,
‘이제야말로 글을 볼 때다.’하시면서 곧 경연에 납시었습니다.
지금 이미 가을이 깊어졌는데도 경연에 납시지 않으시니, 신은 그윽이 의혹됩니다. 속히 경연에 납시기 바랍니다.”하였으며,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장령(掌令) 김안국(金安國)과 신상(申鏛)등이 말하기를,
“금방 사직하였는데 어찌 감히 다른 일을 아뢰는가?”하니,
경서가 곧 중지하여 아뢰지않고 사직장을 올리고 물러갔다
○大司諫姜景叙曰: “臣成宗朝爲經筵官, 當盛(署)〔暑〕則請停經筵, 至七月望後, 請御經筵例也。 成宗傳曰: ‘時秋積雨霽, 新涼入郊墟。 燈火稍可親, 簡編可卷舒, 此正閱書之時。’ 卽御經筵。 今旣秋深, 不御經筵, 臣竊惑焉。 請速御經筵。” 語未竟, 掌令金安國、申鏛等曰: “今方辭職, 何敢啓他事?” 景叙卽止不啓, 呈辭狀而退。
중종 9권, 4년(1509 기사/명정덕(正德) 4년) 10월 19일(정미) 8번째기사
송천희, 이세인, 손중돈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송천희(宋千喜)를 승정원도승지, 이세인(李世仁)을 좌승지, 손중돈(孫仲暾)을 우승지로, 강경서(姜景敍)를 좌부승지, 김당(金璫)을 우부승지로, 이희맹(李希孟)을 동부승지로, 성세정(成世貞)을 대사간으로, 이자견(李自堅)을 부제학으로, 김극핍(金克愊)을 집의(執義)로 삼았다.
○以宋千喜爲承政院都承旨, 李世仁爲左承旨, 孫仲暾爲右承旨, 姜景叙爲左副承旨, 金璫爲右副承旨, 李希孟爲同副承旨, 成世貞爲大司諫, 李自堅爲副提學, 金克愊爲執義。
중종 10권, 4년(1509 기사/명정덕(正德) 4년) 11월 18일 병자 2번째기사
김세필, 강경서등이 도승법, 박영문등에 대해 아뢰다
주강에 나아갔다. 시강관(侍講官) 김세필이 아뢰기를,
“근일 겨울이 따뜻함으로 말미암아, 어서(御書)를 내리시어 구언(求言)하시었으므로 관(館)2893)중에서 함께 의논하여 몇 가지 일을 열거하여 진언하였는데 하나도 청납(聽納)하지안하시니, 처음 구언하시는 뜻과 다릅니다”하고,
이어 검토관(檢討官) 김정국(金正國)과 함께 도승과 박영문등의 일에 대하여 극론하였다.
참찬관(參贊官) 강경서(姜景敍)가 아뢰기를,
“간하는 말을 받아들임은 임금의 미덕입니다. 도승의 일은 이미 행용하지않으니, 그 법이 있은들 무엇이 성덕(聖德)에 손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대간, 시종이 논집(論執)하여도 따르지 않으시니, 간하는 말을 받아들이는 미덕에 혹시라도 누가될까 걱정됩니다. 남겨두어도 무익하니, 삭제함이 무어 해될 것이 있겠습니까? 또 영문의 과실이 크므로 전번에 그 관직을 다 갈고 봉조하(奉朝賀)만 되게 하였습니다. 대저 육경(六卿)에 빈자리가 있으면, 신중히 현량(賢良)을 택해서 맡겨야 합니다. 또 옛날에는 사람에게 벼슬을 주는데 공으로 하지않았습니다.
울지경덕(尉遲敬德)2894)은 태종(太宗)에게 큰 공이 있었습니다. 제왕(齊王) 원길(元吉)2895)이 태종을 활끝으로 찌르려고 하는데 경덕이 활을 빼앗아 태종이 화를 면하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태종이 경덕에게 말하기를, ‘사람들이 말하기를 「공이 배반했다」고 한다’하니, 경덕이 아무 말도 하지않고, 옷을 풀고 땅에 엎드렸는데, 온 몸에 완전한 곳이 없으니, 서로 부여잡고 울었다 합니다. 그 임금과 신하사이가 어찌 부자 골육에 그칠 것입니까? 그런데도 끝내 일은 맡기지않았으니,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천하다스리는 것을 마상(馬上)에서 얻은 전공으로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왕규(王珪)와 위징(魏徵)은 건성(建成)2896)의 무리이니, 태종에게는 원수입니다. 그런데도 나중에는 등용하여 정승으로 삼았으니, 이것은 천하를 다스리는 도가 어진이를 쓰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영문은 신이 사귄 사람으로서 학문은 좀 있으나 허물이 이러하니, 장차 무엇에 쓸 것입니까?”하였으며,
세필이 아뢰기를,
“경서의 의논이 지당하니, 유의하여 세번 생각하소서.”하였다.
註2893]관(館): 홍문관 註2894]울지경덕(尉遲敬德): 중국 당(唐)나라의 명장 註2895]원길(元吉): 당태종의 아우 註2896]건성(建成): 태종의 형으로 원길과 함께 태종을 죽이려 하였음
○御晝講。 侍講官金世弼曰: “近因冬暖, 下御書求言, 館中共議, 條陳數事, 而一不見聽, 與初求言之意異矣。” 因與檢討官金正國, 極論度僧、朴永文等事。 參贊官姜景叙曰: “聽諫, 人主之美德。 度僧事, 旣不行用, 雖有其法, 何損於聖德? 然而今者臺諫、侍從, 論執而不從, 於納諫之美德, 恐或有累。 存之無益, 削之何妨? 且永文之過大, 故前者盡遞其職, 只爲奉朝賀而已。 大抵六卿有闕, 當愼擇賢良, 以委任之。 且古者爵人不以功。 尉遲敬德於太宗, 有大功, 齊王元吉, 欲刺太宗, 敬德奪弰, 太宗得免。 一日太宗謂敬德曰: ‘人言公反。’ 敬德無一言, 解衣伏地, 身無完處。 相持而泣, 其君臣之分, 豈特父子骨肉哉? 然而終不任以事, 此無他, 治天下, 不可以馬上也。 王珪、魏徵, 建成之黨, 於太宗讎也, 而卒用爲相, 是治天下之道, 在用賢也。 永文, 臣與之交, 稍有學問, 然其過也如此, 將焉用之?” 世弼曰: “景叙之論至當, 願留三思。”
중종 10권, 5년(1510 경오/명정덕(正德) 5년) 1월 12일(기사) 1번째기사
성세정이 박원종의 죄를 아뢰다
조강에 나아갔다. 대사간 성세정이 아뢰기를,
“성종조에 대간이 한꺼번에 홍귀달(洪貴達)등 6인을 탄핵, 논박하였지만 과하다 하시지않았으며, 심지어는 유생들이 수상 윤필상(尹弼商)을 공박하여 간귀(奸鬼)라고 하였는데도 과하다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박원종이 대간의 인물을 논박하는 것이 과중하다하고 임금을 격동하여 간언을 막는 조짐을 이루니, 그 죄를 다스리소서.”하니,
영사(領事) 성희안이 원종의 영문을 두둔하는 뜻이 없음을 밝히고,
또 아뢰기를,
“강경서(姜景敍)가 승지를 사임하고 4일을 지나 병으로 죽었습니다. 경서는 누대(累代) 조정의 경연관으로서 빈한한 생활이 이를데 없었습니다. 그 아내가 경서가 북방으로 귀양갔을 때에 가재를 다 팔고, 그 치마까지도 팔아, 경서의 적소(謫所)로 보내었으므로 국가에서 이미 그 마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습니다. 청컨대 부중(賻贈)을 보내게 하소서.”하니,
전교하기를,
“강경서는 승지와 다름이 없다. 우상(右相)이 아뢴 대로 승지의 예(例)로 치부(致賻)하라.”하였다.
○御晝講。 侍講官金世弼曰: “近因冬暖, 下御書求言, 館中共議, 條陳數事, 而一不見聽, 與初求言之意異矣。” 因與檢討官金正國, 極論度僧、朴永文等事。 參贊官姜景叙曰: “聽諫, 人主之美德。 度僧事, 旣不行用, 雖有其法, 何損於聖德? 然而今者臺諫、侍從, 論執而不從, 於納諫之美德, 恐或有累。 存之無益, 削之何妨? 且永文之過大, 故前者盡遞其職, 只爲奉朝賀而已。 大抵六卿有闕, 當愼擇賢良, 以委任之。 且古者爵人不以功。 尉遲敬德於太宗, 有大功, 齊王元吉, 欲刺太宗, 敬德奪弰, 太宗得免。 一日太宗謂敬德曰: ‘人言公反。’ 敬德無一言, 解衣伏地, 身無完處。 相持而泣, 其君臣之分, 豈特父子骨肉哉? 然而終不任以事, 此無他, 治天下, 不可以馬上也。 王珪、魏徵, 建成之黨, 於太宗讎也, 而卒用爲相, 是治天下之道, 在用賢也。 永文, 臣與之交, 稍有學問, 然其過也如此, 將焉用之?” 世弼曰: “景叙之論至當, 願留三思。”
중종 12권, 5년(1510 경오/명정덕(正德) 5년) 8월 15일(무술) 1번째기사
성균관관원 등이 《대학》의 뜻을 명확히 모르니 처음부터 끝까지 토론하게 하다
조하(朝賀)를 받고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 성균관의 관원과 유생(儒生)등을 강(講)하게 하였는데, 좌의정 유순정(柳順汀), 우의정 성희안(成希顔), 교성군(交城君) 노공필(盧公弼), 여평부원군(驪平府院君) 민효증(閔孝曾), 형조판서 권균(權鈞), 좌찬성 이손(李蓀), 우찬성 김응기(金應箕), 좌참찬 홍경주(洪景舟), 판윤(判尹) 윤순(尹珣), 병조판서 정광필(鄭光弼), 지사(知事) 이점(李坫), 창녕군(昌寧君) 조계상(曺繼商), 병조참판(兵曹參判) 홍숙(洪淑), 형조참판 이우(李堣), 대사헌(大司憲) 유세침(柳世琛)등이 입시하였다. 강을 마치고 노공필에게 주문(主問)을 행하게 하고, 김응기, 이점에게 변대(辨對)를 명하였다. 노공필이 말하기를,
“관원(館員)이 《대학(大學)》을 강하였으나 《대학》의 뜻을 다 강명(講明)하지 못하였으니, 청컨대 《대학》첫 장(章)에서부터 종편(終篇)까지를 종횡으로 토론하는 것이 좋겠습니다.”하니,
김응기가 답하기를,
“이른바 ‘명덕’(明德)이란 것은 곧 마음입니다. 하늘이 음양(陰陽)과 오행(五行)으로 만물을 화생(化生)하였는데, 바르고 또 통(通)한 것은 사람이요, 치우치고 막힌 것은 만물입니다. 사람의 성품은 본래 선(善)한 것이지만, 그러나 기품(氣品)은 태어나기 이전에 형성되는 것이요, 물욕은 태어난 뒤에 마음을 가리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허령불매(虛靈不昧)한 것이 때로는 어둡게 되어서, 마치 거울의 티끌같고 물의 물결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 본체(本體)의 맑음은 일찍이 정지하는 일이 없으니 만약 자신을 반성하여 스스로 살피고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으로 몸을 닦으면, 집안이 가지런하여지고 나라가 다스려지는 일을 다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임금이 만약 명덕을 천하에 밝히고자한다면 반드시 먼저 뜻을 정성되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여서 몸을 닦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조정의 백집사(百執事)와 멀고 가까운 사방에서 흥기(興起)하여 본받지않는 이가 없을 것입니다. 이른바 ‘명덕’은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명덕으로 백성을 새롭게하는 일이 만약 지선(至善)한 곳에 이르지 않는다면, 한갓 그 이름만 있고 실지는 없을 것입니다. 요컨대 이 이치를 잘 알아내어서, 만사 만물에 그 극치를 쓰지않음이 없어야할 것입니다.”하고,
또 묻기를,
“중심의 충실함을 남이 무엇으로 인하여 알아낼 수 있습니까?”하니,
이점이 답하기를,
“숨은 것보다 더 잘 드러나는 것이 없는 법이니, 중심(中心)에 정성(精誠)이 있으면 겉으로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남이 나를 보는 것이 자기의 폐간(肺肝)【마음 속】을 보는 것과 같은 것이라, 선악(善惡)의 드러남은 마음속의 것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하고,
또 묻기를,
“혈구지도(絜矩之道)라는 것은 무엇입니까?”하니,
김응기가 답하기를,
“자기의 마음으로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니, 내가 가지는 것은 간략하지만 그 덕택이 미치는 것은 넓은 것입니다. 이것이 천하를 태평하게 하는 요긴한 길입니다. 재용(財用)에 있어서 혈구(絜矩)하지 못하면 백성을 파리하게 만들고 자신을 살찌게 할 것이며, 사람을 쓸 때에 혈구하지못하면 현인(賢人)과 불초(不肖)한 자를 혼동할 것입니다. 오직 어진 사람은 마음에 사곡(私曲)함이 없기때문에, 능히 소인을 멀리하고 군자를 천진(薦進)할 수 있는 것입니다. 천지가 재물을 내는데는 일정한 수(數)가 있어서, 여기에 있지않으면 저기에 있는 것입니다. 주무왕(周武王)은 재물을 흩었기 때문에 일어섰고, 상주(商紂)는 재물을 모았기 때문에 망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홍범팔정(洪範八政)3255)에는 식(食)과 화(貨)를 먼저 말하였고, 《논어(論語)》에는 말하기를 ‘재용(財用)을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하라’하였습니다. 나라에 버려둔 백성이 없으면 생산하는 자가 많고, 조정에 요행의 벼슬이 없으면 공밥먹는 자가 적을 것입니다. 농사때를 빼앗지않으면 하는 것이 빠르고, 수입을 헤아려서 지출하면 쓰는 것이 오랠 것입니다. 옛날에는 집주위에 뽕나무와 삼을 심지않는 자를 벌하고, 백성으로서 직업이 없는 자를 벌하였습니다. 근본인 농사를 힘쓰게하고 말리(末利)인 상업을 억제하면 백성의 덕성(德性)이 순후하게될 것입니다. 근래에는 풍년이 들어도 곡식 귀하기가 금과 같으니, 신은 이재(理財)에 그 도(道)를 다하지못하고 말리를 좇는 자가 많지 않은가 두렵습니다.”하였다.
토론이 끝난 뒤에 성희안이 아뢰기를,
“사유(師儒)를 많이 얻기가 쉽지 않습니다. 성종조(成宗朝)에 있어서 강경서(姜景敍)가 은율현감(殷栗縣監)이 되었는데, 사유로 삼기에 합당하다고 하여 불러들여 관원(館員)으로 보직(補職)한 일이 있습니다. 지금도 육시칠감(六寺七監)의 관원으로서 사유로 삼을 만한 자가 있으면 잘 선택하여 충용(充用)하는 것이 좋겠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유는 전에도 또한 골라서 임명하였다. 그러나 홍문관이나 대간에는 사람마다 임명할 수 없어서 사유(師儒)로 있는 자라도 부득이 옮겨다 임명하지만, 그 밖의 다른 직임(職任)에는 사유를 옮겨다가 임명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하자,
희안이 아뢰기를,
“신등이 사사로이 염려하여 이조에 물었더니, 내자부정(內資副正) 김안국(金安國)이 사유에 매우 합당하나 그의 아우가 이조좌랑이 되었으므로 옮겨 임명하지 못한다고 합니다.”하고,
노공필은 아뢰기를,
“옛날에는 스승된 자가 교회(敎誨)를 게을리 하지않았는데, 지금은 사람이 없습니다. 다만 유숭조(柳崇祖)가 있으나 어찌 능히 홀로 제생(諸生)들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그런 까닭에 유생 한 사람도 책을 끼고 다니는 자가 없습니다. 또 무사(武士)도 활쏘기 배우는 것을 즐겨하지 않습니다. 성종조(成宗朝)에는 지위가 높은 당상관도 또한 다 활쏘기를 익혔습니다. 어유소(魚有沼)같은 이는 1품관이면서 친히 스스로 기사(騎射)하였으며, 김세형(金世亨)은 승지로서 또한 기사에 능하였고, 최경례(崔敬禮)는 70세의 늙은이로서도 활쏘고 말달리는 연습을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었습니다. 지금은 조금만 높은 지위에 이르면 무사(武事)는 추솔(麤率)하다고 하여 수습(修習)하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근자에 병조(兵曹)와 함께 장수에 가합한 사람을 뽑아 적어보니, 다만 10인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모름지기 따로 상권(賞勸)의 조례를 세워서 자중(自重)함을 알게한 뒤라야 다른 사람들도 또한 본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또 특별히 겸선전관(兼宣傳官) 수원(數員)을 설치하여 차례차례로 근시좌우(近侍左右)에 충용하기로 하고 시재(試才)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성종조에 장정(張挺), 박원종(朴元宗), 박영문(朴永文), 허함(許瑊)등은 다 겸선전으로 발신(發身)하여 지금은 다 대상(大相)이 되었습니다. 유장(儒將)으로 가합한 사람도 또한 마땅히 선택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변방에 일이 있을 때 유장에 가합한 사람을 보내어, 왕환출입(往還出入)하는 사이에 반드시 병사(兵事)를 익히게한다면 반드시 수령(守令)이 된 뒤라야 변장으로 임명할 수 있다고 할 까닭은 없습니다”하고, 희안이 또 아뢰기를,
“양계(兩界)의 일은 유순정(柳順汀) 외에는 더 자세히 알고있는 이가 없으니, 금후에 만약 왕환(往還)할 일이 있으면 이 무리를 보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만약 수령(守令)이라면 부모(父母)가 있는 자는 어렵다 하겠습니다. 신도 또한 지나가 본 곳은 형세(形勢)를 조금 알지만 그렇지않은 곳은 반드시 남에게 도움을 받은 뒤라야 압니다. 지금 이 선택(選擇)에 드는 사람은 다 후일(後日)에 크게 쓸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하고,
지사(知事) 이점(李坫)은 아뢰기를,
“신이 성균관을 겸대(兼帶)하고 있는데, 대사헌이 아뢴 것이 과연 우의정이 아뢴 것과 같습니다. 김안국은 상피(相避)할 처지이나 만약 관직의 차례에 상당하다면 임명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직강(直講) 이하라면 육사칠감(六司七監)에 또한 가합한 사람이 많습니다.”하였다.
순정(順汀)등이 빈청(賓廳)에 물러나와 의계(議啓)하기를,
“지금 유담년의 서장(書狀)을 보니 비록 중진(仲珍)이 이 계책을 먼저 세우기는 하였지만 1등으로 논공할 수는 없으니, 청컨대 내려서 2등으로 기록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유회철은 비록 비천(卑賤)하나, 상례에 의한 가자(加資)라면 신분의 한계(限界)를 넘을 수 없지만 이것은 특히 군공(軍功)으로 주는 것이니 해로울 것이 없습니다.”하니,
전교하기를,
“다 아뢴대로 따르겠다.”하였다.
이어 유담년에게 하서(下書)하기를,
“진실로 경의 죄를 꾸짖어야 마땅하겠으나, 특히 전의 공로가 있기에 죄책하지않는다. 이제 경이 논공(論功)을 균평하게 하지않아서 아랫사람의 원망을 가져왔으니, 뒤에는 이와 같이 하지말라.”하고,
또 전교하기를,
“김안국은 법을 어겨가면서 직임을 옮길 수는 없다. 어찌 다른 사람이 없겠는가? 외직에 있으면서 사유(師儒)로 합당한 자가 있으면 관원(館員)으로 승보(陞補)하도록 하라.”하였다.
註3255]홍범팔정(洪範八政): 《서경(書經)》홍범(洪範)에 나오는 백성을 잘 살게하는 여덟 가지 정치요강. 홍범은 중국 고대 하(夏)나라의 우왕(禹王)이 요순(堯舜) 이래의 사상을 정리하여 집성한 천하를 다스리는 큰 법칙으로 보는데, 이것이 우 때에 낙수(洛水)에서 나온 신구(神龜)의 등에 적힌 9장(章)의 글이었고, 뒤에 기자(箕子)에게 전하여져 기자가 추연(推衍)하여 주무왕(周武王)에게 전수되었다고 하나 이설(異說)이 있다. 홍범은 아홉 가지 큰 법칙으로 되어 있으므로 구주(九疇)라 하며, 그 세째가 팔정이다. 팔정은 식(食:먹는 것),화(貨:재화),사(祀:제사하여 근본에 보답하는 것),사공(司空:토지를 관장하여 거주를 편안하게 하는 것), 사도(司徒:교육을 관장하여 본성을 성취하는 것), 사구(司寇:금령을 관장하여 간사를 다스리는 것), 빈(賓:제후(諸侯)나 먼 나라 사람을 예우하여 왕래 교제하는 것), 사(師:군사로써 잔포(殘暴)를 제금(除禁)하는 것)이다. 식은 백성에게 당장 급한 것이고, 화는 백성이 밑천으로 하여 살아가는 것이므로, 식화는 곧 백성을 양생(養生)하는 방법이 되는 까닭에 맨 먼저 언급한 것이다.
○戊戌/受朝賀。 御思政殿, 講成均館官員及儒生等。 左議政柳順汀、右議政成希顔、交城君盧公弼、驪平府院君閔孝曾、刑曹判書權鈞、左贊成李蓀、右贊成金應箕、左參贊洪景舟、判尹尹珣、兵曹判書鄭光弼、知事李坫、昌寧君曺繼商、兵曹參判洪淑、刑曹參判李堣、大司憲柳世琛等入侍。 講訖, 命盧公弼主問, 金應箕、李坫辨對。 盧公弼曰: “館員所講《大學》, 未盡講明, 請以《大學》首章至終篇, 縱橫論難可乎?” 金應箕對曰: “所謂明德, 卽心也。 天以陰陽五行, 化生萬物, 而正且通者, 人也, 偏且塞者, 物也。 人性本善, 然氣品拘之於未生之初, 物欲蔽之於旣生之後。 是故虛靈不昧者, 有時而昏, 如鏡之塵, 如水之波焉。 然其本體之明, 有未嘗息者。 若反躬自省, 格物致知, 誠意正心而修身, 則家齊國治, 擧而措之耳。 人君苟欲明明德於天下, 則必先誠意正心以修身。 於是朝廷百執事, 四方遠近, 莫不興起而取則焉, 所謂明德新民也。 然明德新民, 若不止於至善之地, 則徒有其名, 而無其實也。 要須識得此理, 萬事萬物, 無所不用其極可也。” 問曰: “中心之實, 人何由知得?” 李坫對曰: “莫見乎隱, 莫顯乎微, 誠於中心, 形於外, 人之視己, 如見其肺肝。 然善惡之著, 不能逃於方寸也。” 問曰: ‘絜矩何也?” 金應箕對曰: “能以己之心, 度人之心, 所操者約, 而所及者廣, 此平天下之要道也。 財用不能絜矩, 則瘠民自肥。 用人不能絜矩, 則賢不肖混淆。 唯仁人, 心無私曲, 故能遠小人而進君子也。 天地生財, 只有此數, 不在於此, 則在彼。 武王散財以興, 商紂聚之以亡。 是以洪範八政, 食貨爲先, 《論語》曰: ‘節用而愛人。’ 國無(遺)〔遊〕民, 則生者衆矣; 朝無倖位, 則食者寡矣。 不奪農時, 則爲之疾矣; 量入爲出, 則用之舒矣。 古者宅不種桑麻者罰之, 民無職業者罰之, 務本抑末, 民德歸厚矣。 近來雖有豐年, 穀貴如金, 臣恐理財未盡其道, 而逐末者多矣。” 論難旣畢, 成希顔曰: “師儒未易多得, 在成宗朝, 姜景叙爲殷栗縣監, 以師儒可當, 入補館員。 今六寺、七監官員, 有可當者, 審擇充差可也。” 上曰: “師儒前亦擇差。 然弘文館、臺諫, 不可人人而任之, 雖在師儒, 不得已移任。 他餘職任, 則不須以師儒任之也。” 希顔曰: “臣等私爲之慮, 而問諸吏曹。 內資副正金安國, 甚合於師儒, 而以其弟爲吏曹佐郞, 故未果遷敍也。” 盧公弼曰: “古者爲師者, 敎誨不倦, 今則無人焉。 只有李崇祖, 豈能獨誨諸生? 是以儒生, 無一挾冊, 且武士亦不肯學射。 在成宗朝, 雖位高堂上, 亦皆習射。 有如魚有沼, 以一品, 親自騎射, 金世亨, 以承旨而亦能騎射, 崔敬禮, 以七十之老, 射御之習, 未嘗少懈。 今則稍至高位, 則以武事爲麤率, 而不肯修習。 近與兵曹, 抄將帥可當人, 只得十人。 右人等須別立賞勸之條, 使知自重, 然後他人亦能效之矣。 此人須別設兼宣傳數員, 次次充差近侍左右, 試才可也。 成宗朝, 張珽、朴元宗、朴永文、許瑊等, 皆以兼宣傳而發身, 今皆爲大相。 儒將可當人, 亦當擇之。 若邊方有事, 須以儒將可當人差遣, 往還出入, 必諳練兵事, 不須爲守令然後可任也。” 希顔曰: “兩界事, 柳順汀外, 更無備諳者。 今後若有往還事, 使送此輩爲當, 如守令則有父母者, 以爲難矣。 臣(刃)〔已〕經行處, 則稍知形勢, 否則必資於人然後知之。 今此與選者, 皆後日大任之人也。” 知事李坫曰: “臣兼帶成均館, 大司憲所啓果然。 如右議政所啓, 金安國有相避, 若於職次相當, 則差之可也。 直講以下, 則於六司、七監, 亦多可當也。” 順汀等退于賓廳, 議啓曰: “今見柳聃年書狀, 雖曰: ‘仲珍首建是策。’ 不可論以一等。 請降錄二等何如? 兪懷哲雖卑賤, 若例加, 則不可踰越分限, 此則特以軍功授之不妨。” 傳曰: “皆依所啓。” 仍下書柳聃年曰: “固當罪責於卿, 特以有前勞, 故不爲耳。 今卿論功不均, 以致下人之怨咨。 後勿如是可也。” 又傳曰: “金安國則不可毁法遷敍。 豈無他人乎? 在外任而師儒可當者, 陞補館員可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