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이 세상에 있는 연합된 모든 형제들도 같은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베드로 전서 5:9. 이 어려운 시대에 우리의 많은 동료 형제 자매들은 아프거나 두려워하거나 외로워할 수 있습니다. 형제 자매들과 계속 연락하려고 노력하십시오. 전염병이 퍼지면 형제 자매들과도 물리적인 거리를 유지해야 할지 모릅니다. 그런 상황이 되면, 사도 요한과 같은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요한은 친구인 가이오를 직접 만나고 싶어 했습니다. (요한 3서 13, 14) 하지만 그는 한동안 가이오를 볼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습니다. 가이오에게 편지를 쓴 것입니다. 우리도 형제 자매들을 직접 만나는 것이 어려울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 밖의 방법으로 그들과 연락하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동료 그리스도인들과 계속 연락한다면 외로움을 덜고 평온한 마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불안한 마음이 커지면 장로들에게 연락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그들에게서 따뜻한 격려를 받게 될 것입니다.—이사야 32:1, 2. 「파22.12」 17-18면 6-7항 |
이 세상에 있는 연합된 모든 형제들도 같은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knowing that the same afflictions are accomplished in your brethren that are in the world. 세상에 있는 형제들에게도 동일한 고난이 임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전서 5:9. Barnes' Notes on the Bible Whom resist - See the notes at James 4:7. You are in no instance to yield to him, but are in all forms to stand up and oppose him. Feeble in yourselves, you are to confide in the arm of God. No matter in what form of terror he approaches, you are to fight manfully the fight of faith. Compare the notes at Ephesians 6:10-17. Steadfast in the faith - Confiding in God. You are to rely on him alone, and the means of successful resistance are to be found in the resources of faith. See the notes at Ephesians 6:16. Knowing that the same afflictions are accomplished in your brethren that are in the world - Compare for a similar sentiment, 1 Corinthians 10:13. The meaning is, that you should be encouraged to endure your trials by the fact that your fellow-Christians suffer the same things. This consideration might furnish consolation to them in their trials in the following ways: (1) They would feel that they were suffering only the common lot of Christians. There was no evidence that God was especially angry with them, or that he had in a special manner forsaken them. (2) the fact that others were enabled to bear their trials should be an argument to prove to them that they would also be able. If they looked abroad, and saw that others were sustained, and were brought off triumphant, they might be assured that this would be the case with them. (3) there would be the support derived from the fact that they were not alone in suffering. We can bear pain more easily if we feel that we are not alone - that it is the common lot - that we are in circumstances where we may have sympathy from others. This remark may be of great practical value to us in view of persecutions, trials, and death. The consideration suggested here by Peter to sustain those whom he addressed, in the trials of persecution, may be applied now to sustain and comfort us in every form of apprehended or real calamity. We are all liable to suffering. We are exposed to sickness, bereavement, death. We often feet as if we could not bear up under the sufferings that may be before us, and especially do we dread the great trial - death. It may furnish us some support and consolation to remember: (1) that this is the common lot of people. There is nothing special in our case. It proves nothing as to the question whether we are accepted of God, and are beloved by him, that we suffer; for those whom he has loved most have been often among the greatest sufferers. We often think that our sufferings are unique; that there have been none like them. Yet, if we knew all, we should find that thousands - and among them the most wise, and pure, and good - have endured sufferings of the same kind as ours, and perhaps far more intense in degree. (2) others have been conveyed triumphantly through their trials. We have reason to hope and to believe that we shall also, for: (a) our trials have been no greater than theirs have been; and, (b) their natural strength was no greater than ours. Many of them were timid, and shrinking, and trembling, and felt that they had no strength, and that they should fail under the trial. (3) the grace which sustained them can sustain us. The hand of God is not shortened that it cannot save; his ear is not heavy that it cannot hear. His power is as great, and his grace is as fresh, as it was when the first sufferer was supported by him; and that divine strength which supported David and Job in their afflictions, and the apostles and martyrs in theirs, is just as powerful as it was when they applied to God to be upheld in their sorrows. (4) we are especially fearful of death - fearful that our faith will fail, and that we shall be left to die without support or consolation. Yet let us remember that death is the common lot of man. Let us remember who have died - tender females; children; the timid and the fearful; those, in immense multitudes, who had no more strength by nature than we have. Let us think of our own kindred who have died. A wife has died, and shall a husband be afraid to die? A child, and shall a father? A sister, and shall a brother? It does much to take away the dread of death, to remember that a mother has gone through the dark valley; that that gloomy vale has been trod by delicate, and timid, and beloved sisters. Shall I be afraid to go where they have gone? Shall I apprehend that I shall find no grace that is able to sustain me where they have found it? Must the valley of the shadow of death be dark and gloomy to me, when they found it to be illuminated with the opening light of heaven? Above all, it takes away the fear of death when I remember that my Saviour has experienced all the horrors which can ever be in death; that he has slept in the tomb, and made it a hallowed resting-place. 반스의 성경 노트 그를 저항하는 - 야고보서 4장 7절의 주석을 참고하세요. 여러분은 어떤 경우에도 그에게 굴복하지 말고 모든 형태로 일어서서 그를 대적해야 합니다. 스스로 연약한 여러분은 하나님의 팔에 의지해야 합니다. 그가 어떤 형태의 공포로 다가오더라도 여러분은 믿음의 싸움을 힘써 싸워야 합니다. 에베소서 6:10-17의 말씀을 비교해 보세요. 믿음에 굳건히 서십시오 -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여러분은 오직 그분만을 의지해야 하며, 성공적인 저항의 수단은 믿음의 자원에서 찾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6:16의 주석을 참조하세요. 세상에 있는 것과 같은 고난이 너희 형제들에게도 있는 줄 알라 - 고린도전서 10:13의 비슷한 문장을 비교해 보세요. 동료 그리스도인들도 같은 고난을 겪는다는 사실에 용기를 얻어 시련을 견뎌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배려가 시련을 겪는 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위로를 줄 수 있습니다: (1) 그들은 자신들이 일반적인 그리스도인들처럼 고통을 받고 있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그들에게 진노하셨다거나 특별한 방식으로 그들을 버리셨다는 증거는 없었습니다. (2) 다른 사람들이 시련을 견딜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자신들도 견딜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논거가 되어야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시련을 견뎌내고 승리하는 것을 보고 자신들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3) 고통을 겪는 것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서 비롯된 지지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 즉 고통이 공동의 것이라는 사실, 다른 사람들로부터 동정받을 수 있는 상황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느끼면 고통을 더 쉽게 견딜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핍박과 시련, 죽음의 상황에서 우리에게 매우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핍박의 시련에 처한 사람들을 지탱하기 위해 여기서 제시한 배려가 오늘날 모든 형태의 체포된 재난이나 실제 재난에 처한 우리를 지탱하고 위로하는 데 적용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고통을 겪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질병, 사별, 죽음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 앞에 닥칠 수 있는 고통을 견딜 수 없는 것처럼 발을 동동 구르기도 하고, 특히 죽음이라는 큰 시련을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다음 몇 가지를 기억하면 우리에게 지지와 위로를 줄 수 있습니다: (1)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일이라는 점입니다. 우리의 경우엔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고 그분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고난을 받는다는 것에 대해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가장 사랑하신 사람들이 종종 가장 큰 고난을 받는 사람들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의 고난이 유일무이하고 그와 같은 고난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것을 안다면 수천 명, 그중에서도 가장 지혜롭고 순수하고 선한 사람들이 우리와 같은 종류의, 어쩌면 그 정도가 훨씬 더 심한 고통을 견뎌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2) 다른 사람들이 시련을 통해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희망하고 믿을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a) 우리의 시련은 그들의 시련보다 크지 않았고, (b) 그들의 타고난 힘은 우리보다 크지 않았습니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이 소심하고 움츠러들고 떨며 힘이 없어 시련을 당하면 실패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3) 그들을 지탱했던 은혜가 우리를 지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은 짧아져서 구원하지 못하시지 아니하시고, 귀가 무거워서 듣지 못하시지 아니하시나이다. 그분의 능력은 처음 고난 받는 자가 그분의 지지를 받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크고 그분의 은혜는 신선하며, 다윗과 욥을 고난 가운데서, 사도들과 순교자들을 슬픔 가운데서 지탱해 주신 그 신성한 힘은 그들이 하나님께 그들의 슬픔을 붙들어 달라고 간구했을 때와 똑같이 강력합니다. (4) 우리는 특히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실패하고 아무런 도움이나 위로 없이 죽게 될까 봐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죽음은 인간의 공통된 제비뽑기라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연약한 여성, 어린이, 소심하고 겁이 많은 사람들, 우리보다 더 이상 힘이 없는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죽어간 것을 기억합시다. 죽은 우리 동족을 생각합시다. 아내가 죽었으니 남편이 죽기를 두려워하겠느냐? 자식이 죽었으니 아버지가 두려워하겠습니까? 자매라면, 형제는? 어머니가 어두운 골짜기를 지나왔다는 것, 그 우울한 골짜기를 섬세하고 소심하며 사랑하는 자매들이 밟았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죽음의 공포를 없애는 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그들이 갔던 곳으로 가는 것을 두려워해야 할까요? 그들이 갔던 곳에서 나를 지탱할 수 있는 은혜를 찾을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까? 그들이 발견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내게는 어둡고 음침한 곳이어야만 합니까? 무엇보다도, 나의 구주께서 죽음에 있을 수 있는 모든 공포를 경험하셨고 무덤에서 주무셨으며 무덤을 거룩한 안식처로 만드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
베드로가 말하는 1세기 그리스도인들의 고난은 그들이 종교를 믿는다는 자체로 온 것이라기보다, 그들이 사탄 마귀를 저항했기 때문이다. 즉, 세상의 구조로 인해 이루어지는 상업주의 방식이나 부정직하고 음욕적이고 탐욕적인 방식을 저항했기 때문이다. 물론 두드러진 것은 황제에 대한 분향과 같은 숭배 형식도 크게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삶의 수단이 되는 돈을 거래하는 방식과 크게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사정은 오늘날 더욱 심해졌다. 분명하게 드러나는 면에 있어서는 인간의 자유와 권리가 엄청나게 신장된 것처럼 보인다. 노예 해방, 여권의 신장, 어린이 학대 금지, 차별 금지 등과 같이 모든 사람이 평등과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돈에 관해서는 어떠한가? 오늘날의 세상 구조는 돈을 벌 수 있는 것이라면 모두 정당화 된다. 마약 거래, 보이스 피싱, 조직 폭력과 같은 끔찍한 범죄들도 정치권에 로비를 함으로써 오히려 법의 보호를 받으면서 사람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양산하고 있다. 이에 더하여 범죄 경제학까지 등장하였다. 즉, 범죄를 저지름으로써 얻는 이익과 그것이 가져다주는 피해의 가치를 저울질 하는 학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받는 피해를 돈의 가치로 나타낸다는 자체가 무리인 것이다. 예를 들어 지구 기온이 올라가 모든 사람이 위기에 빠지게 된다면 이것을 돈으로 환산할 수 있겠는가? 물론 대다수의 사람들은 부정적으로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소수의 기득권층은 자신들을 기준으로 손해가 될 것 같으니 미래의 방향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세계 구조를 쥐락 펴락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그들은 수 만개의 정교한 AI가 내장된 인공위성을 쓰레기처럼 대기권에 띄워 세계의 상태를 감시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나라들은 이러한 추세에 질세라 엄청난 자금을 제공하면서 유료로 이 인공위성을 기득권 보호와 이익을 위하여 사용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첨단 과학은 선의로 사용될 때, 엄청난 혜택을 부여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이용되고 있는 추세는 사람들의 개인 정보를 파악하여 권력과 기득권의 탐욕에 이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생각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러한 구조를 개선시킬 방향을 모색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할 사람들은 결코 이익을 탐하는 기득권 층에서 나올 수 없다. 오직 인간의 평등과 자유를 획득하는 것이 인류의 미래를 밝게 만들 수 있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이어받은 사람들일 것이다. |
질문:
1. 세계는 과거에 비해 어떤 면에서 자유와 평등이 개선되었는가?
2. 오늘날 세계 기득권층의 선악의 기준은 무엇이 되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