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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서현(재경향우 서울 강서구 화곡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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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엊그제 막 내린 명량대첩축제와 관련, 축제의 테마로 채택하면 좋을 것 같은 생각에 몇 자 적어 본다. 명량대첩은 1597년 9월 16일의 일로 조선 선조34년인 정유년 왜적의 재침이 원인된 전투이다. 그런데 이날의 대첩이 있기 전인 9월 13일부터 15일까지 3일간 옥천면 성산리 대교 들(野)에서는 우리 의병과 왜 육군과의 혈전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사실, 그 전투가 명량해전 승리의 밑거름이 됐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없는 것 같다.
3일에 걸쳐 치루어진 이 전투는 명량해전 승전의 밑거름이 된 중요한 전투였다. 당시 왜군은 남원성을 침탈하고 지금의 충남 연산인 황산성 전투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순천 보성을 거쳐 전라도 전역을 침공해 전라우수영을 향해 오는데 성산리 대교 들에서는 정예 왜군 2만여 명과 맞붙은 1만여 의병이 분전혈투 중이었다.
이때 송지 달마산 아래서 왜적을 만나 싸워 이기고 성산 대교 들의 의병과 합세하기 위해 성산으로 진군하던 의병(의병장 윤현, 윤검)이 도착해 전세가 승세로 역전된다. 그러나 어란진에서 왜적이 또 상륙해 북상하고, 황산성에서 승리한 왜군이 영암으로 남하해 합세하므로 또 다시 전세가 불리해진다.
결국 이 전투로 당시 1만여 의병은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2만여 왜군 또한 패퇴해 장흥 수문포 방면으로 물러가게 된다. 이때 9월 12일에 진도 벽파진에 도착한 이순신 장군은 15일에 왜 적선과 전초전을 치른다. 그리고 이튿날인 16일 명량해전의 대첩을 거두게 된다.
정유년 9월 13일부터 15일까지 옥천 성산리 대교에서 의병들의 혈투로 왜군의 진격을 저지한 공이 아니었다면 과연 명량대첩이 있었을까? 그래서 명량대첩을 이야기하기 전에 피로써 이순신장군의 등 뒤를 지켜낸 옥천 성산 대교 1만여 의병들의 전투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지방자치제가 실시되면서 각 자치단체마다 무슨무슨 축제가 한창이다. 해남의 명랑대첩축제가 이번에는 진도군과 전라남도가 세계적인 축제를 표방하면서 진행됐는데, 관람하는데 그치는 축제가 아닌 참가하는 축제로의 전환을 바란다.
당시 치열한 격전이 끝나고 시신을 거두어 합장한 묘가 몰(沒)무덤! 해남에서 강진으로 가는 18번 국도변에 자리하고 있는 옥천면 성산리 소재 만의총이다.
임진년 금산전투에서 칠백의사의 최후를 능가하는 전적일진데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다행히도 명량대첩축제가 열리고 있는 만큼 이들 1만 의병의 충절이 되새겨 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