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0402. 묵상글 ( 주님 수난 성지 주일. - 기대와 각오. 등 )
----------------------------------------------------
230402. 주님 수난 성지 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기대와 각오
어제 복음에서 백성의 지도자들이 주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자
주님께서는 드러나게 다니지 않으시고 에프라임으로 피신하시는데
파스카 축제일이 가까이 오자 사람들은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시지 않겠냐고 기대감을 표시하는 것으로 어제 복음은 끝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가 축제를 지내러 오지 않겠소?”
그들의 기대대로 오늘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데
예루살렘 입성의 의미가 그들의 기대와 같은 것인지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그들의 기대는 이스라엘 다윗왕의 자손인 임금의 입성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는 잘 압니다.
그것은 헛된 기대이고 그 기대는 허망하게도 무너질 것이라는 것을.
그런데 실은 기대를 많이 하는 사람이라는 면에서 그들과 같습니다.
각오는 잘하지 않고 기대를 많이 하는 우리지요.
그런데 현명한 사람이라면 그리고 행복하려면
기대는 조금 하고 각오를 많이 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아니, 기대는 아예 하지 말고 각오는 최대한으로 해야 합니다.
그렇게 오래 살았으면 이제 알 때도 되지 않았을까요?
우리의 기대가 깨지거나 무너진 적이 한두 번입니까?
오래 살았으면 살았을수록 우리 인생은 반反 기대의 인생이었잖습니까?
그래서 악을 각오하면 행복할 것을, 선을 기대하여 불행해지지 않았습니까?
최악을 각오하면 언제나 행복할 것을, 그렇게 매번 배반당하면서도
또 기대하고 계속 기대하여 아직도 불행하지 않습니까?
그러고 보니 기대는 죽어야 그만두게 되는가 봅니다.
살아 있는 한, 우리의 기대는 계속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 나를 사랑하지 않는 한 계속 이럴 겁니다.
사랑에는 등급이 있습니다.
자기에게 그리고 자식에게 꽃길만 있기를 바라는 것도 사랑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꽃길만 걸을 수 있겠습니까?
꽃길만 걸을 수 있더라도 그 길만 바라는 것은 낮은 등급의 사랑입니다.
최고의 사랑이요 참사랑은 가시밭길을 걸어도 행복하게 하는 사랑이고
가는 길에 돌을 만나도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 삼게 하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꽃길을 걷지 않고 십자가의 길을 걸으신 것을 보면
꽃길은 나를 참 행복으로 인도하는 참사랑의 길이 아닌 것은 분명하고,
십자가 길을 가려는 곧 수난을 감수하려는 사랑이 참사랑과 참 행복의 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참으로 사랑하면 고통이 달다는 말은
고통이 더 이상 고통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라 여전히 고통이지만
사랑하는 이를 위해 받는 고통은 받아도 행복하기에 달다는 말이고,
사랑 없이 고통을 받으면 고통이 불행하게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런 참사랑을 일컬어 라틴말로 Passio, 영어로는 Passion이라고 하고,
그리스도의 수난은 Passio Christi 또는 Passion of Christ라고 합니다.
이 그리스도의 수난을 본받는 참사랑을 하면,
이런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 참사랑을 하면,
자기만 행복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도 행복하게 하고 구원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이 참사랑을 많이 묵상하고 본받으려는 오늘
프란치스코처럼 십자가 위의 주님께서 받은 고통을 할 수 있는 한 똑같이 느끼고,
그 고통을 감수케 한 주님 사랑도 할 수 있는 한 많이 느끼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처럼 기도하는 사람도 되어야겠습니다.
“주님, 나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 때문에 황송하옵게도
당신이 죽으셨으니,
당신을 사랑하는 그 사랑 때문에 나도 죽을 수 있도록,
당신 사랑의 불과도 같고 꿀과도 같은 힘으로
내 마음을 하늘 아래 있는 모든 것에서 빼내어 차지하소서.”
----------------------------------------------------
230402. 주님 수난 성지 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성주간이 시작되는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이 시기는 주님 수난 사건을 전례적으로 기념하는 연중 가장 거룩한 기간입니다. 그래서 성주간 동안 신자들은 그리스도 생애의 마지막에서 일어난 사건을 되새기며 파스카의 신비를 경축하고 재현합니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교회는 예수께서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한 사건을 기념하는 입당식과 장차 이루어질 수난과 죽음을 기념하는 수난 복음을 읽습니다.
오늘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듣는 수난 복음은 마태오 복음서의 마지막 부분으로 다른 복음서들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수난과 죽음,부활을 이야기합니다. 복음서마다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 하는 사건이 바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겪으신 수난과 죽음을 통해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신앙인들 그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그 수난에 동참하도록 촉구하며,부활사건을 통하여 하느님 구원의 신비를 드러냅니다.
수난 복음의 전후 배경을 보면 성전 정화 등으로 인해 주님께서는 죽을 위기에 처하십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바리사이 등의 음모와 유다의 배신,최후의 만찬,겟세마니에서의 기도,체포 되어 신문 받으심,조롱과 사형 선고,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혀 숨을 거두시기까지 예수의 수난, 고통과 죽음,무덤에 묻히고 부활하시기까지 이야기를 상세히 들려 줍니다.
이 성주간에 우리는 일상 안에서 주님의 수난의 의미를 더 깊이 묵상하며 구체적으로 일상 안에서 우리 각자에게 다가오는 수난은 무엇이며 어떻게 주님 수난을 구체적으로 살아야 할지 성찰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해서 깊이 우리 마음에 다가와 느끼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며 그 분의 다섯 상처의 아픔을 깊이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수난을 깊이 묵상하면 할수록 고통 중에 많은 위로와 격려가 되며 다른 이들로부터 받게 되는 오해와 비난을 잘 참아 받게 됩니다.
주님 사랑을 외치며 천국을 갈망하는 신앙인이기 이전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기쁘게 지고 그분의 수난에 깊이 동참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고통이 없는 기쁨과 위로를 구하기 이전에 일상 안에서 만나는 어려운 일들과 귀찮은 일들을 회피 하지 말고 감내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기쁨을 누리는 잔치와 축제를 찾기 이전에 주님을 위하여 일상 안에서 다가오는 고통과 모욕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때로 슬프고 부담스럽고 고달프고 씁쓸한 일이 생기면 특히 어떤 선한 것이 역겹게 보일 때면 지체말고 십자가 위에 계신 주님께로 달려가십시오. 자신의 뜻이나 세상의 충고나 육신의 충동을 따르지 않고 주님의 뜻이라 여기는 것을 자발적으로 그리고 주저함 없이 수행할 때 우리는 그분의 수난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면 확실히 이것은 온 영혼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주님의 수난을 일상 안에서 구체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수난의 의미를 깊이 깨달은 사람은 주님을 닮은 완덕의 생활로 다른 이에게 좋은 생활의 모범이되어 다른 이들을 감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것이 참된 선교요 복음화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은총을 청하며 거룩한 주간 되시길 빕니다.
✝️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프랑스 작가 샤또브리앙의 첫영성체
그러자 이번에는 제 자신이 의도한 바가 아니었는데도 그만 익숙해진 습관대로 ‘아닙니다, 신부님!’이란 말이 또다시 새어 나오고 말았어요. 그러자 고해신부님은 잠시 조용히 아무 말씀도 안하셨는데, 그것이 저에게는 마치 그분이 하늘 쪽을 쳐다보면서 도움을 간원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신부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제 너의 죄를 사하노라! “
제가 이 말을 듣고서 죄사함을 받기 위해 들어올린 신부님의 손을 보았을 때 저의 심장은 마치 번개붙이 떨어짐을 체험하는 것처럼 두근거렸습니다. 저의 온 몸은 갑자기 저에게 용기를 북돋우는 뜻밖의 의지력과 결의로 인해 몸이 떨려왔고 순간 저는 급히 다음과 같은 고백의 말로 선부님의 사죄경의 말씀을 막았습니다.
“신부님, 저는 아직 모든 것을 말씀드리지 않았읍니다.”
고해신부님께서는 그렇게 오랫동안 지켜 보시며 사랑으로 기다려셨던 이 말을 들으셨을 때 그분의 근엄한 표정이 바뀌었으며,
말할 수 없는 선하심과 부드러움이 그분의 얼굴을 밝게 해 주었습니다. 그분은 제게로 몸을 굽히시고는 속삭이셨읍니다.
“이보게, 두려워 말게. 와서 내게 모든 것을 말해보게!”
그래서 저는 스스로 거기에 대해 놀랄 정도의 그런 용기와 믿음을 가지고 모든 것을 고백했습니다. 이제 제 영혼을 압박하던 어떤 부담감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커다란 기쁨이 제 마음 속에 스며들었읍니다. 그런데 이런 축복과 사랑을 언제나 저를 감싸고 있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읍니다. 저는 울면서 흐느꼈습니다.
그것은 참회의 눈물이었고 천국의 행복감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의 눈물이었습니다. 심지어 저는 평생 처음으로 제 자신을 남자답고 정직하며 성실한 인간으로 느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제가 고집스런 불순종의 벽을 처음으로 깨어버리고 아직 모든 것을 말씀드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고백한 후에는, 남아 있는 모든 사실을 고백하기란 아주 쉽고 간단했습니다.
그런 후에 주님의 대리자이신 신부님께서 자신의 손을 드시고는 저의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그 때 그분의 팔은 머리 위에서 움직이며 위협을 느끼게 하는 그런 팔이 아니라 저를 축복하고 포용해 주시는 아버지의 팔이었습니다.
그 때 탕자의 이야기가 제 마음 속에 떠올랐습니다. 제 자신은 참회하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탕자였고 고해신부님은 용서로 맞아주시는 아버지였습니다. 또한 그분은 성서의 비유 속에서의 아버지처럼 눈물을 흘리셨읍니다. …그런 후에 저는 고해석으로부터 일어났는데 그 곳에서 저의 어머니가 저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192)
----------------------------------
에페소 평화 관상 기도의 집
----------------------------------------------------
230402.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22)
오늘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사건을 기념하는 <성지주일>입니다. 동시에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는 <수난주일>입니다. <제1독서>의 <야훼의 종의 셋째노래>는 <수난주일>의 특성을 드러내는 반면, <제2독서>의 <그리스도 찬가>는 <성지주일>의 특성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을 임금으로 환영하는 상징적 행위로 성지가지를 들고 성당에 들어와, 동시에 예수님의 수난사를 듣습니다.
오늘 <전례>는 기쁨과 슬픔이 혼합되어 교차됩니다. 한편으로는 “호산나”를 환호하는 기쁨이 차오르고, 또 한편으로는 수난과 죽음으로 치닫는 비탄이 흐릅니다. 환영의 행렬은 곧바로 조롱의 십자가 행렬로 바뀌고, 손을 흔들던 환호의 성지가지는 등을 내리치는 채찍으로 바뀝니다. 겉옷을 벗어 길에 깔았던 이들은 예수님의 속옷마저 벗겨가고, 나귀 등위에 타셨던 분은 십자가 위에 못 박혀 매달리게 됩니다. 그리고 왕으로 성 안으로 모셔진 그분은 강도와 함께 성 밖에서 처형됩니다.
오늘 <복음>은 마태오에 따른 우리 주님의 수난기입니다. 이 수난사는 “다윗의 자손 호산나”라고 외치는 군중의 환호로부터 시작되어, 바로 그 군중들이 외치는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는 배신과 욕설로 마무리 됩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을 따르던 제자들의 배신은 예수님을 더욱더 처참하게 만듭니다. 수제자였던 베드로는 하루 밤 사이에 세 번이나 스승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가리옷 유다는 은전 서른 냥에 스승을 팔아넘겨버리고, 다른 제자들이 스승이 붙잡힐 때는 옷마저 벗어던져버리며 달아나 버립니다. 호시탐탐 기회를 보고 노리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 그리고 대제관은 서로 결탁하여 온갖 음모를 꾸미고, 예수님을 심문하고 박해하며 죽음으로 몰아갑니다. 예수님은 외적으로는 군중과 모든 적대세력들로부터 위협당하고, 내적으로는 자신을 따르던 제자들의 공동체가 와해되는 절대극명의 위기상황에 빠지게 됩니다.
오늘은 26장 마지막 장면인 베드로의 배반 장면(26,69-75)만 보고자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냐는 추궁이 거듭될수록 격한 반응을 보입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부인하다가(70절), 다음에는 맹세까지 하고(72절), 급기야는 거짓이면 천벌까지 받겠다고 극구 부인합니다(74절). 결국, 그는 단지 예수님을 부인할 뿐만 아니라, 그분의 가르침인 “맹세하지 말라”(마태 5,33-37)는 가르침도 따르지 않습니다. 사실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맹세하라고 다그치는 대사제의 추궁에도 맹세하지 않고 담대하셨는데 말입니다(26,63-64).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째 부인했을 때, 닭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습니다. 베드로의 눈에서 비닐이 벗겨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구원의 카이로스의 순간이었습니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라는 그의 무지와 불신에 광명이 비추어진 것입니다. ‘닭 울음’은 어리석음에 갇힌 그의 영혼을 깨웠습니다. 그것은 하늘을 뚫고, 영혼의 귀를 뚫고 내리는 청천벽력의 뇌성이었습니다. 그 소리는 그의 불신과 의혹, 무지와 어리석음을 부서 버렸습니다. 그의 울음은 단지 죄에 대한 울음이 아니었습니다. 스승을 모른다고 부인한 거짓과 비겁함에 대한 울음도, 혹은 스승을 배신한 불효나 불충에 대한 울음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게”(75절) 하는 성령의 ‘죽비’요 ‘할’이었습니다. 닫힌 가슴을 헤치고 들어오는 주님 말씀의 광채요 섬광이었습니다. 죄가 아니라 그분의 사랑을 깨우치는 빛이었습니다. 먼저 베풀어진 주니미의 사랑 말입니다. 당신을 배신할 줄을 빤히 알면서도 먼저 베푸신 사랑 말입니다. 비록 의혹과 불신에 휩싸여 배신했어도 바로 그러한 그를 끝까지 믿고 희망하신, 그분의 먼저 베풀어진 사랑 말입니다. “사탄이 너희를 밀처럼 채질하려고 나섰다. 그러나 나는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니 네가 돌아오거든 네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주어라.”(루카 22,31-32)하시며, 결코 희망과 신뢰를 저버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사명을 주시는 그 사랑을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바로 이 먼저 베풀어진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찬란한 울음을 울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의 배신은 당신 사랑에 대한 거절 때문이지만, 실상 드러난 것은 당신의 크신 사랑이었습니다. 그토록,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보다 먼저 사랑하시고, 그 사랑 때문에 고통 받으시고, 그 어떤 고통 속에서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그 어떤 처지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통 받더라도 사랑하기를 결코 멈추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상처받더라도, 오히려 그 속에서 사랑하는 법을 배워가야 할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베풀어진 사랑을 관상하며 기쁨의 거룩한 울음을 울어야 할 일입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저를 더더더더~ 사랑하십니다. 저의 사랑이 부족하고 변덕스러워도 당신은 그러한 저를 끝까지 사랑하시니, 주님 사랑 받들게 하소서.
주님 믿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더더더더~ 저를 믿으십니다. 저의 믿음 약하고 미진하여도 당신은 저에게서 믿음을 거두지 않으십니다. 당신께 대한 저의 믿음이 아니라 저에 대한 당신의 믿음으로 제가 구원되오니, 주님께 의탁하게 하소서.
주님 희망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저를 더더더더~ 희망하십니다. 저의 희망이 그릇되고 빗나가도 제게서 희망을 거두지 않고 기다리오니, 저의 희망이 아니라 당신의 희망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제가 당신의 희망이 이루어지는 응답의 장소요 공간이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22)
주님!
더 이상 고집 부리지 않게 하소서.
생각을 움켜잡기보다, 생각에 붙잡히기보다, 생각을 바꿀 줄 알게 하소서.
당신을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 조정 당하게 하소서.
저의 바람이 아니라, 당신의 바람을 따르게 하소서. 아멘.
----------------------------------------------------
230402.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끝까지 사랑합니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에 대한 주님의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십니다.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버리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사랑하십니다. 이 시간 한결같은 사랑을 쏟아주시는 예수님을 생각하는 가운데 풍부한 은총을 받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입성할 때 제자들은 어린 나귀 위에 자기들의 겉옷을 걸치고 예수님을 거기에 올라타시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군중이 자기의 겉옷을, 어떤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꺾어 길에 깔았습니다. 그들은 “‘다윗의 자손께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마태2,9).하고 외치며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 했습니다.
옷을 길바닥에 깔았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을 바친 것입니다. 당시의 겉옷은 단순히 옷 그 이상의 것입니다. 사막 지역에서 겉옷은 ‘담보 삼을 수 있을 만큼 중한 것’으로 밤을 넘길 수 있는 이불이요, 햇빛을 가릴 수 있는 천막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소중한 것을, 길바닥에 깔고 예수님을 환영하였던 그들인데 빌라도 앞에 선 예수님을 보고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마태27,22.23).하고 소리쳤습니다. 그리고 조롱하며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마태27,29).를 외쳤습니다. 그야말로 ‘감탄고토’입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뜻입니다. ‘자기에게 이로울 때는 이용하고 필요하지 않을 때는 배척한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환영받던 예수님을 통해 소경이 보게 되고 귀머거리가 듣게 되었고, 나병환자가 낫게 되었으며 중풍병자가 일어섰고 빵을 배불리 먹는 기적도 체험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 앞에 서니까 마음이 완전히 돌변하였습니다. (신자 중에 가장 무서운 신자? 배신자! 누구? 은전 서른 양에 예수님을 팔에 팔아먹은 유다, 십자가 죽음 앞에 도망간 제자들...베드로, 우리는?)
베드로도 그들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고난의 길을 걷게 되리라고 예고할 때 베드로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다가 “사탄아 물러가라.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는 꾸중을 들었고, 결정적으로 예수님께서 수난을 예고하시며 “오늘 밤에 너희는 모두 나에게서 떨어져 나갈 것이다”(마태26,31). 하고 말씀하시자 “모두 스승님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마태26,33). 하였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과 함께라면 감옥에 갈 준비도 되어있고, 죽을 준비도 되어 있습니다”(루카22,33).하고 장담하였습니다. 그것은 솔직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급박한 상황이 닥치자 자기도 모르게 3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말하였습니다. 거짓이면 천벌을 받겠다고 맹세까지 하였습니다. 닭이 울고서야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너는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슬피 울었습니다.
이렇게 인간은 연약합니다. 강한 것 같지만 시련과 고통의 두려움 앞에서 무너집니다. 우리는 바로 이 약함 때문에 주님께 더 간절히 의탁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어떤 고난의 역경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의지만을 믿고 방심하면 걸려 넘어지고 맙니다. 사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행위’는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나의 모습입니다. 드러나는 좋은 일에는 생색내기, 궂은일, 어려운 일에는 꽁무니 빼기에 익숙합니다. 그러고 나서 모든 것이 안정되고 제자리를 찾으면 ‘그 일을 위해서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느냐?’ 하며 속 보이는 소리를 합니다. 평상시에는 드러나지 않던 모습이 위급한 상황에서는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사람은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이 사람이 참된 사람인지 거짓된 사람인지 진면목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세례성사를 받으면서 하느님의 자녀로 자유를 누리기 위하여 모든 죄를 끊어 버리고, 죄의 지배를 받지 않기 위해 악의 유혹을 끊어버린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죄를 범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으며,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지는 영원한 생명을 믿는다고, 부활의 삶을 믿는다고 선언하고서는 그 부활이 없는 것처럼 처신하고 있습니다. 우환이 생기면 성체 앞에 쫓아와서 기도할 생각보다도 ‘어디 용한 사람 없나?’ ‘오늘의 운세가 좋지 않더니만…이런 일이 생겼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점쟁이를 찾고 사주팔자를 보시는 분도 많이 계십니다. 풍수지리를 본다고 하다가 마음의 혼동을 가져와 신경쇠약으로 아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점괘가 좋고 사주팔자가 좋으면 뭣합니까? 애써 노력하지 않는데! 묘지를 잘 쓰면, 조상이 복을 줍니까? 아무 노력 없이 복이 굴러옵니까?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결혼하실 때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마지못해 하셨습니까?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고 ‘너 없이는 못산다.’고 하였습니다. 눈에 꽁깍지가 씌워져 보이는 게 없었죠. 그래도 어찌 되었든 하느님과 일가 친척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할 때나 아플 때나 신의를 지키며 일생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선언해 놓고는 상대방을 무시하고 자기 뜻에 맞춰주지 않는다고 바가지 긁고, 변명을 늘어놓고……. 인간의 변덕은 죽 끓듯 합니다. 성당에는 하느님이 계시고 가정에나 밖에서는 하느님이 안 계신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시기 질투하며 흉보고 욕하며 싸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럴 때는 신자라는 사실이 부끄럽게 보입니다.
자녀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교육한다고 해놓고서는 신앙은 자유라고 합니다. 커서 자기가 판단해서 선택하게 한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다른 교육은 왜 하십니까? 유치원은 왜 보내고, 학교는 왜 보냅니까? 더군다나 학원은 왜 보내요? 돈 들여가면서. 자기가 커서 알아서 하게 두지. 부모의 의무는 일상이나 신앙이나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에 직면해서도 당신을 뱉어버린 사람들을 용서하시고 그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걸려 넘어지는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있다는 것은 큰 복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께 알게 모르게 약속한 모든 것들에 대해서 충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행위가 더 이상 되풀이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에 이르면서도 자기를 기억해 달라는 죄수에게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하시며 구원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의 허물을 고백하며 주님께 의탁하여 구원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하고 숨을 거두실 때 이 광경을 목격한 백인대장이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루카23,47) 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조롱과 모욕, 억지로 우겨대는 사람들을 상대하여 한마디의 항변과 변명도 없이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마태27,46)하고 아버지께 기도하며 무력하게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그 깊은 침묵 속에서 백인대장과 예수님을 지키던 이들은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태2754).고 말하였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나를 모함하고 헐뜯고 비방하며 흉을 본다면 그렇게 침묵할 수 있을까요? 상대를 용서하고 아버지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해 줄 수 있을 까요? 우리도 어떤 예기치 않은 상황과 처지에서 그리고 구설수에 침묵의 언어로 사랑의 깊이를 더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침묵은 진정한 사랑이었습니다. 깊은 침묵으로 사랑에 사랑을 더하고 사랑을 담는 한 주간 되시기 바랍니다. 토마스 머튼은 “왜? 라고 묻지 않고 십자가를 포용할 때 침묵은 흠숭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매 순간 흠숭을 드리는 기쁨을 차지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이 비켜 갈 수 없는 것이라서 제가 마셔야 한다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마태26,42). 우리도 예수님께서 원하신다면 쓰더라도 뱉지 않고 기꺼이 마실 수 있는 은혜를 간청합니다. 어떠한 처지, 환경 안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주님께 대한 사랑을 끝까지 지킬 수 있기를 성모님께 전구를 청하며 ‘이런 말을 하고 저런 행동을 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다짐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230402.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생텍쥐페리는 어린왕자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배를 만들기 위해서는 배 만드는 법을 가르치기보다는 바다를 보여 주면 된다.” 배 만드는 법은 수단입니다. 바다는 배를 만들게 하는 동기를 부여합니다. 바다를 보면서 꿈을 가진 젊은이들은 바다를 건너기 위한 배를 만들기 마련입니다. 수단은 해야 할 일이지만 목적은 가야할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율법과 계명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나라에 대한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집니다. 갇힌 이들이 해방되고, 묶인 이들이 풀려나고, 눈먼 이들은 보게 됩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떠 다섯 개로 오천 명이 배불리 먹고도 12광주리가 남았습니다. 마귀 들린 사람들이 치유됩니다. 죽었던 이들도 다시 살아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을 보고 제자들은 그물도 버렸고, 배도 버렸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하느님나라가 곧 시작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바다를 보여주셨던 예수님께서, 하느님나라에 대한 표징을 보여 주셨던 예수님께서 이상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일은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벗을 위해서 목숨까지도 바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곁을 떠났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도 혼란스러웠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면 이 세상에서 부귀와 영화를 누릴 줄 알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면 하느님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십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몸소 십자가를 지고 가십니다.
오늘은 ‘주님수난 성지주일’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하느님이 이름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십자가를 지고 가십니다. 예수님 수난의 길에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은전 서른 닢에 팔아넘긴 유다입니다. 마치 길가에 뿌려진 씨와 같았습니다. 길가에 뿌려진 씨앗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곧 말라 죽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유혹이 다가오자 쉽게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세례를 받아 신앙인이 되었지만 곧 냉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욕심 때문에, 열등감 때문에, 체면 때문에 예수님을 배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입니다. 마치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와 같았습니다.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앗은 뿌리는 내리지만 가시에 찔려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서 제자가 되었지만 고난의 시간이 다가오면,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배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눈이 오는 추운 겨울에는 소나무와 전나무만 푸르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지옥까지라도 가겠다던 베드로는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안다면 천벌이라도 받겠다며 배반하였습니다.
예수님 십자가의 길에 예수님께 위로를 드린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길 5처에 나오는 키레네 사람 시몬입니다. 십자가가 너무 무거워서 예수님은 첫 번째 넘어지셨습니다. 그 길에서 성모님을 만났습니다. 성모님은 말없이 예수님 수난의 길에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마침 키레네 사람 시몬은 길을 가고 있었는데 로마의 군인이 키레네 사람 시몬에게 십자가를 지도록 하였습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은 아무런 불평 없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치료해주고 여관으로 데려간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당한 이의 이웃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은 2000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기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에 흐르던 피와 땀을 닦아드린 베로니카입니다. 교회의 전승에 베로니카는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았던 하혈하던 여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고 하혈이 멈추었던 여인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고, 십자가의 길에 끝까지 함께 하였습니다. 자캐오의 부인이라고도 합니다. 자캐오의 부인은 예수님을 만난 남편 자캐오가 변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십자가의 길 6처에서 베로니카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주님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나의 신앙이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유다와 베드로의 삶이었다면 예수님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과 예수님 얼굴에 흐르던 피와 땀을 닦아드린 베로니카의 삶이 되면 좋겠습니다.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너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라고 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네. 하느님은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네.”
----------------------------------------------------
230402.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지난달, 서울로 강의 갔을 때 깜짝 놀랄만한 체험을 했습니다. 전철을 탔는데 마침 빈자리가 있어서 얼른 그 자리에 앉았습니다. ‘편하게 가겠구나. 오늘 정말로 운이 좋은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가방 안에서 읽으려고 넣어둔 책을 꺼내 읽고 있었지요. 한참을 읽다가 잠시 고개를 돌려 옆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깜짝 놀랐습니다.
분명히 이 자리에는 아주 젊은 긴 생머리의 여자가 앉아있었습니다. 하지만 고개를 돌렸을 때 보게 된 분은 연세 지긋하신 할머니였습니다. 피곤해서 잠시 졸았던 것이 아닙니다. 책이 재미있어서 계속 깨어있었고, 또 혹시라도 내려야 할 지나칠까 봐 계속 전철역을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옆자리의 사람이 바뀐 것을 몰랐습니다. 혹시 이 자매님이 변신한 것일까요?
바로 옆에 있었음에도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책에 신경 쓰고, 전철역 확인에만 신경 쓰다 보니 불과 몇 센티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 사람의 변화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이렇게 바로 옆에 있는 사람에게도 무관심할 수 있습니다. 어디에 신경을 쓰고 있느냐에 따라, 그 무관심은 더 커지게 될 것입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무관심한 우리입니다. 일주일에 한 번 성당에 가서 미사 참석하면 자신의 의무를 다하면 그만이라는 생각만 있는 사람이 과연 늘 우리 곁에 계신 주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을까요? 다양한 방식으로 적극적인 활동을 하시는 주님을 볼 수 없습니다. 오로지 세상 것에만 집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바로 옆에 계신 주님을 외면하게 만듭니다.
주님의 현존을 느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주님이십니다. 그렇기에 계속 주님께 집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만 우리는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 수난 성지 주일’부터 ‘성토요일’까지의 한 주간을 교회는 ‘성주간’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교회의 전례 주년 중에서 가장 중요한 주간입니다. 이 주간의 시작인 오늘, 우리는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시려는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합니다. 이때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호산나’를 외치면서 열렬히 환호합니다. 그러나 이 반응이 계속되었을까요? 불과 며칠 뒤, 사람들의 반응은 180도 바뀌어서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왜 예수님을 참 하느님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을까요? 예수님께 제대로 집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만 예수님을 보려고 했기 때문에, 구원자가 아닌 없애야 할 흉악범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과연 집중하고 있을까요?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사랑 안에서만 제대로 주님께 집중할 수 있습니다.
---------------------
사람의 마음은 낙하산과 같다. 펴지 않으면 쓸 수가 없다(오스본).
---------------------
----------------------------------------------------
230402.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파스카 신비의 삶과 죽음
“아버지의 뜻대로”
-끊임없는, 한결같은 기도가 답이다-
“그리스도 예수님,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성주간의 첫째 날인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시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기념하는 날입니다. 오늘의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은 우리 삶과 죽음을 성찰하기에 참 좋은 절호의 기회입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물음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 물음으로 직결됩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을 통해 그 답이 나옵니다. 파스카 신비의 삶과 죽음에는 기도가 답임을 깨닫습니다. 기도해야 살고 기도해야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을 닮기위해 사람만이 기도합니다.
예루살렘 입성을 소개하는 마태복음입니다. 예수님은 겸손하시어 암나귀를, 어린나귀를 타고 입성하십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받으소서.이스라엘 임금님, 높은 데서 호산나!”
방금 전례시 찬미로 예수님 입성을 기념한 우리들입니다. 이렇게 찬미를 받으시며 예수님께서 입성하실 때 온 도성이 충격으로 술렁거렸다 합니다. 화두처럼 들리는 한 말씀과 답이 우리의 탐구대상입니다.
“저분이 누구냐?”
“저분은 갈릴래아 나자렛 출신 예언자 예수님이시오.”
우리가 평생 물어야 할 물음은 “저분이 누구냐?”입니다. 저분을 알아갈수록 나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나를 알 수 있는 열쇠입니다. 바로 제1독서 이사야서의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가 예수님의 신원을 은연중 암시합니다.
“주 하느님께서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열어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경청과 겸손, 격려의 주님의 종, 예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끊임없는 주님과 소통의 기도를 위해 기본적인 자세가 경청과 겸손의 자세입니다. 이어 계속되는 필리피서 말씀이 비움과 순종의 파스카 예수님의 모습을 잘 드러냅니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을 하느님께서는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필리피서 찬가 마지막 말씀은 얼마나 은혜로운 지요!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부활을 통해 우리의 영광스러운 미래가 환히 계시됩니다. 우리의 삶과 죽음이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새삶의 시작입니다. 어떻게 하면 파스카 신비의 삶과 죽음을 성공적으로 통과할 수 있겠는지요?
바로 오늘 주님 수난 주일 마태복음이 답을 줍니다. 등장하는 모든 사람이 우리에게는 귀한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빛과 어둠, 은총과 죄로 얼룩진 온갖 인간의 만물상 같습니다.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이 잘 드러납니다. 과연 나는 어디에 속합니까?
이런 와중에도 예수님의 시종일관 한결같이 기도하는 모습이 우리에겐 참 귀한 가르침이 됩니다. 참사람 하나 만나는 느낌입니다. 예수님 평소 삶이 그대로 반영되고 있는 예수님 수난의 현장입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대로 살고 사는 대로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다음 세 애제자와의 대화에 이은 기도가 감동적입니다.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남아서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 이어지는 주님의 절정의 기도입니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평생 아버지의 뜻대로 사셨던 삶이 그대로 반영되고 있습니다. 죽음을 앞둔 기도를 통해 그대로 드러나는 평생 삶의 모습입니다. 자고 있는 제자들을 깨우시는 주님의 말씀은 그대로 우리에게 해당됩니다.
“이렇게 너희는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란 말이냐?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평생과제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죽음 준비에 기도말고는 답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의 중요성입니다. 기도해야 회개이고 겸손과 경청의 자세입니다. 다시 두 번째 이어지는 기도입니다. 수난 현장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공부하다 죽어라” 라는 어느 고승의 말대신 “기도하다 죽어라” 말마디를 바꾸고 싶고 그렇게 되길 소망합니다.
“아버지, 이 잔이 비켜갈 수 없는 것이라서 제가 마셔야 한다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삶과 죽음이 되도록 끊임없이 간절히, 항구히 바쳐야 할 기도입니다. 바로 아버지의 뜻대로가 우리 삶과 죽음, 기도의 궁극의 목적입니다. 세 번째로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셨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시는 주님이십니다. 이어지는 수난 현장에서 제자들은 모두 달아났고 베드로의 배반이 이어지니 참 고립무원의 외롭고 고독한 처지의 예수님이였지만 “기도의 힘”, “하느님의 힘”으로 통과해 나가십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미하던 군중들을 폭도로 돌변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광분하여 외치고 군사들은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 침을 뱉으며 조롱합니다. 그대로 오늘날도 여전히 반복되는 배신背信, 불신不信, 광신狂信으로 요약되는 무지無知의 지옥도地獄道의 현실을 보는듯합니다.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사탄은 지나가던 사람들을 통해 예수님을 유혹했고, 사탄은 또한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 원로들을 통해 대동소이하게 예수님께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유혹하며 비아냥 댑니다.
“하느님을 신뢰한다고 하니, 하느님께서 저자가 마음에 드시면 지금 구해 내 보시라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하였으니 말이야.”
어찌 하느님을 믿는다 하면서 이렇게 무지의 죄로 하느님을 모독하는지요! 정말 기도하지 않아 무지로 눈멀면 제정신을 잃은 우리 모두의 가능성이 사탄입니다. 하느님의 언어는 침묵입니다. 하느님은 침묵중에 모두를 보시는 눈이요 모두를 들으시는 귀입니다. 마지막 예수님의 기도가 절정을 이룹니다. 바로 우리가 화답송 후렴으로 바친 기도입니다.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
심금을 울리는 기도입니다. 아버지께 대한 신뢰가 절절히 배어있는 마지막 탄원기도입니다. 이렇게 기도할 수 있는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은 또 얼마나 큰 위로요 구원인지요! 우리가 고통스런 죽음을 맞이할 때 주님과 함께 바칠 참 좋은 기도입니다. 마침내 예수님의 기도에 침묵중이던 하느님의 응답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에 이어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지고 땅이 흔들리고 바위들이 갈라졌고, 무덤이 열리고 잠자던 많은 성도들의 몸이 되살아 났니다. 예루살렘 입성시 온 도성이 술렁거리던 모습과 예수님 부활로 땅이 흔들리는 모습이 참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저분이 누구냐?”
우리가 궁금하여 물었던 분, 예수님의 궁극적 신원이 백인대장의 고백을 통해 환히 드러납니다.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바로 파스카 신비의 삶과 죽음, 부활을 통해 환히 드러나신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이십니다. 갈릴래아 나자렛 출신 예언자 예수님이 바로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그 정체를 환히 보여주십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 덕분에 하느님의 자녀되어 파스카 신비의 영원한 삶을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바로 이 수난 성지 주일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참으로 ‘기도의 사람’이 되어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게 하십니다.
“주님, 성자의 죽음으로 저희 믿음에 희망이 넘치게 하셨으니, 성자의 부활로 저희가 영원한 목적지에 이르게 하소서.” 아멘.
---------------------------------------------------
230402.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성주간은 우리 그리스도교의 핵심이고 또 제일 중요한 시기입니다.
신학교에서의 기억이 납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라고 큰소리 소리쳤던 기억이 말입니다.
그렇게 소리 지르고 나면 가슴 한쪽이 아려 온 기억이 말입니다.
여러분, 들리십니까? 광기 어린 백성들의 아우성이 들립니까?
그런데 정작 예수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십니다. 3년 동안은 그렇게 많은 이들을 만나시고 많은 말씀을 들려주신 예수님께서 일언의 대답도 하지 않으십니다.
거품을 물고 달려드는 백성들 앞에서 말입니다.
5,000명을 먹이신 기적이 생각나십니까? 왕으로 예수님을 모시려 했던 그 사람들 지금 어디 있습니까?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했던 베드로와 제자들…. 지금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손을 얹어 병을 낫게 해 주신, 또 말씀으로 낫게 해 주신 그 수많은 사람, 다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어떻습니까? 내가 어려울 때, 내가 아플 때, 내가 외로울 때 예수님을 찾았던 나는 지금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고 있습니까? 내가 예수님을 증언해야 할 때, 예수님이 우리의 그리스도라고 고백해야 할 때 우리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렇게 침묵하고 있지는 않았습니까? 고통의 길을 걸어가시는 예수님을 못 본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침묵 속에서 이런 기도를 하셨을 것입니다. '아버지 저를 받아 주십시오. 세상의 빛이신 아버지 하느님, 당신이 나의 희망이고 방패이십니다. 이제 제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라고 말입니다.
-------------
‘다원적 무지’
다원적 무지는 집단 구성원 대부분이 마음속으로는 어떤 규범을 부정하면서, 다른 대부분 사람은 그 규범을 수용하고 있다고 잘못 생각하는 현상이다. 즉 다원적 무지는 집단에 의한, 집단에 대한 편향이다. 아무도 공개적인 반대를 하지 않은 결과, 그 규범은(실제로는 모든 구성원이 싫어하는 것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속화될 수 있다. (심리학용어사전, 2014. 4.)
위의 내용을 조금 쉽게 풀어보자면 이런 것입니다.
나에게 어떤 안 좋은 일이 생겼습니다. 혹은 원하지 않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왜 나만 재수가 없는 걸까?
왜 나만 이런 일을 겪는 걸까?
사실 나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런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이것이 바로 다원적 무지입니다.
우리 한 사람에게만 늘 일어나는 불행 같은 것은 없습니다. 나만 겪는 슬픈 일은 없습니다.
누구나 힘들고 슬픈 일을 겪습니다. 그러니 나만 겪는 일이 아님을 기억하세요. 누구나 겪는 일을 나고 겪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리고 그 생각이 참임을 기억하세요.
----------------------------------------------------
230402.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길이네>
2023. 04. 02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마태오 21,1-11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다)
마태오 26,14-27,66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인 오늘 우리는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복음과 수난 복음을 함께 묵상합니다. 우리는 찬양과 환호가 감내하기 힘든 모욕과 저주로 바뀌는 십자가의 길에 함께합니다. 우리는 이 길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생의 마지막 순간에 함께 했던 사람들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걸으시는 예수님의 처절하지만 결코 멈추지 않는 마지막 발걸음에 함께합니다. 예수님의 제자요 벗이요 사람으로서 우리와 함께 우리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오늘도 몸소 걸으시기를 바라면서.
<사람길이네>
그분 가신 길
사람길이네
사람이 걸으니
사람길이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