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러독스
여기는 무대
검정이 등장한다
회색이 등장한다
검정 속에는 빛들이 뒤섞인 회색이 있고
회색 속에는 감정이 뒤엉킨 검정이 있다고 하자
검정이 푸른 나비를 떠올리면
회색은 빙그레 웃는다
지하철 차창에 기댄 배우
검정 속에 달아나는 회색을 잡으려고 한다
자폐, 혼자서 놀다 진저리가 나면 시작되는 반란
살갗이 벗겨지도록 씻고
검은 옷으로 갈아입는다
무대 위에 긴 거울을 세운다
손바닥만 한 창문에서 쏟아지는 햇살
바닥에 길게 드리운 회색
타협을 서두르지 마
검정이 아닌 것은 교활한 마술사거든
태양을 암막 커튼으로 가리고
모든 것을 삼킨 뒤
컴컴한 대낮 같은 검정을 상상해 봐
색색의 옷을 차려입은 것들을 골목 끝까지 밀어내야지
겉만 잘 꾸민 이야기들
불쾌하기 이를 데 없는 암흑의 발상지를
주인공으로 삼는 거야
(검정을 잃은 배우 맥없이 어둠을 뒤적이다
극장 밖으로 뛰쳐나간다)
회색의 짧은 한마디
네가 내 안에 서식한다면
내가 네가 될 수 있을까
회색도 검정도 아닌 안개 속에서
암막을 빠져나가는 배우
회색은 검정의 가면을 벗고
검정은 회색의 가면을 벗는다
무대엔 텅 빈 거울과 꿈틀거리는
여백
막이 내린다
프리다 칼로
검은 옷걸이에 반 팔 상의가
벗겨진 살가죽처럼 걸려 있다
가슴 한복판에 붙어 있는 커다란 별무늬 스팽글
얼음 조각 날카롭게 박혀 있다다
이쪽에서 반짝이면 햇살 때문이고
저쪽에서 번득이면 그림자 때문인 것처럼
신의
의지만은 아니었을 거다
들떠 있던 당신에게 묻는다면
믿었던 그 만큼이길 바란다면
그것은 더 큰 죄일까
죽어서도 아프지 않을 사람이 있다
착각이라 여길 테니
습관이라 여길 테니
마지막 남은 들숨, 빛으로 품은 심장
수십 개의 대못이 박힌 햇살
숨을 쉬지 않는다
홍서연_2022 한국불교신문 신춘문예 등단. 2014 수필춘수 겨울호 등단.
<2024 모던포엠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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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십 개의 대못이 박힌 햇살에 머물다 갑니다.
그곳 만은 머물지 마소서!
철학 하시기에 위험합니다 니체님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