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김서령 / 푸른역사 / 2019.01.29
페이지 268
책소개
“한 사람이 가고 한 문장이 지다”
김서령이 남긴 영롱한 ‘인생 레시피’
빛나되 눈부시지 않은 ‘서령체’
이 책은 한 문장가가 세상에 흩뿌린 마지막 광휘이고, 한편으로는 그를 위한 기념비이기도 하다. 지난해 10월 세상을 떠난 김서령이 그간 음식과 관련해 썼던 글을 그러모은 그의 투병 막바지에서였다. 문학평론가 염무웅 선생의 말씀대로 “보석처럼 반짝이는 조각글”이 흩어져 사라져 가는 것을 막기 위해 시작된 편집은 그러나 안타깝게도 김서령의 인간 됨됨이를 그리워하고 김서령의 글을 아끼는 이들을 위한 일종의 유고집이 되고 말았다.
해서 통상적인 ‘머리말’ 대신 그의 글 중 한 편이 앞자리를 차지한 파격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 눈여겨보기를 당부하고 싶은 것은 김서령의 글 자체이다. 형용사 하나 허투루 쓰지 않는 그의 글솜씨는 ‘서령체’라 불릴 정도로 자기만의 빛깔을 빚어내서다. 《여자전》 등 그의 전작들이 글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서 많은 아낌을 받은 이유다.
염무웅 선생은 그의 글을 두고 “읽을 때마다 예민한 감각과 풍부한 어휘와 생생한 비유에 감탄했고 글이 만들어내는 삶의 진실에 전율 했어요”(7쪽)라고 했다. 그러면서 “안동 지방 양반가의 내실 풍속과 사랑채 역사를, 그들만의 독특한 언어와 감정세계를 속속들이 알고 손에 잡힐 듯 묘사하는 작가를 이제 우리 문학은 어디서 찾아야 하나요”라고 아쉬워했다. 자청해서 추천사를 써준 심리기획자 이명수 선생도 “당대의 문장가란 수식을 넘어서는 치유적 힘이 그녀의 글에 있었다”고 추모하면서 “내밀한 끌림이 있고 읽으면 단정해지고 맑아졌다. 문장이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글의 모든 것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김서령을 통해 알았다”고 고백했다.
그만큼 한 꼭지도 버릴 수 없고, 한 구절도 흘려보내기 아까운, 일단 한 편만 읽는다면 놓을 수 없는 음식 에세이, 그 이상의 에세이이다. 또한 잊혀져가는 고향의 정취를 되살려낸 일종의 풍물지이기도 하고, 삶의 지혜가 얼비치는 인생론이기도 하며 빛나되 눈부시지 않은 문장 전범이고 한 책이다.
저자소개
김서령
칼럼니스트, 안동 출생, 경북대 국문과 졸업. 남의 이야기 듣기를 즐겨 급기야 사람을 만나 이야기 듣는 것을 직업으로 삼게 됐다. 사람이 우주이며 한 인간의 생애 안에 가히 우주의 천변만화가 담겨 있다는 생각에 동의한다. 숱한 사람들을 만났지만 지난 세기 초중반 한국 여자로 태어나 우리 역사의 우여곡절을 온몸으로 밀고 온 분들, 그들의 삶 앞에서 전율의 농도가 가장 컸다. 이 책은 그 감동의 기록이다. 앞서 간 사람의 발자국이 우리들의 가장 훌륭한 교과서가 된다. 과일이 서리를 맞아야 단맛이 돌고 향기를 풍기듯 인생도 고난 속에서 익어간다는 것을 믿는다. 여기 실린 이야기들이 지금 행복한 사람에겐 삶의 확장을, 지금 불행한 사람에겐 삶의 깊이를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팔뚝이 잘린 사람 앞에선 손가락이 잘린 고통쯤은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앞 세대가 몸부림치며 살아온 이야기가 뒤 세대의 가슴을 울리기를, 그 울분과 통한이 서로를 연대하고 위안하고 사랑하게 만들기를, 더불어 고통을 뚫고 나와 더 너그럽고 강인해진 분들을 통해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통찰해내기를 희망한다. 한때는 국어교사였다가 신문, 잡지에 칼럼을 쓰기 시작했다. 지금은 사라진 잡지 [샘이 깊은 물]에서 인물 인터뷰의 매력에 눈떠 인터뷰 칼럼을 주로 써왔다. 펴낸 책으로 『김서령의 家』,『김서령의 이야기가 있는 집』,『삶은 천천히 태어난다』,『참외는 참 외롭다』 등이 있다. 2018년 10월, 향년 6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목차
아름다운 사람 김서령
먼저 한 꼭지_외로움에 사무쳐봐야 안다, 배추적 깊은 맛을
* ‘철철문장’ 상의 할매의 ‘보단지 타령’
책을 내며_옛 부엌의 아침과 저녁들이 앞다퉈 떠오르니
* “편차고 하다 맛을 베레뿐다”
1부 아득하거나 아련하거나
어머니의 마술, 콩가루 국수
*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슴슴한
엄마의 레시피를 귓전으로 흘려들었다
내 제사상에는 호박뭉개미만 있어도 될따
그 순간 생에 감사했다
콩 간 데 에미 손 간데라
무언가 고프고 그리운 이들에게 찔레 순 맛을
여름 더위 물렀거라, 야생 취나물 무침
삶이 ‘삶은 나물보다’ 못할 리야
* 고요한 시간 겸허한 마음으로
입이 굼풋하믄 좋은 소리가 안 나오니, 군입거리
백석이 그리도 좋아하던 가자미
* 야위어서 푸르른 가자미 한 토막
육개장과 하수상한 토란의 만남
2부 고담하거나 의젓하거나
‘명태 보푸름’의 개결한 맛이여
* “상미하게” “이식하시게”
슴슴한 무익지, ‘니 맛도 내 맛도 없는’
* 손님상엔 꿀 넣은 ‘약지’
달콤함을 옹호한다
수수 조청 고던 날 저녁
* 수수는 수수 몫이, 내게는 내 몫이
봄의 맛, 햇장 타령
* 콩나물밥에 달래 간장!
수박의 5덕德을 찬讚하노라
* 겨울 수박은 수박이 아니다
새근한 ‘증편’의 색깔 고운 자태라니
‘난젓’, 물명태와 무가 빚어낸 싱그러운 단맛
샤또 오 브리옹도 흥칫뽕! 정향극렬주
두견주 한잔 받으시라
* 한겨울 사랑방에 핀 꽃, 안동 다과상
순하되 슬쩍 서러운 갱미죽
* 가을 새벽, 홀로 차를 마시며
3부 슴슴하거나 소박하거나
팥소 든 밀가루떡, ‘연변’을 아시나요
들큰 알싸, 먹을수록 당기는 집장
쑥국 한 그릇에 불쑥 와버린 봄
* “님은 쑥을 캐겠지”
* 나의 「오감도」
* 쑥을 뜯으며 엄마를 생각하다
그 노랗고 발갛던 좁쌀 식혜는 어디로 가버렸나
* ‘식혜 르네상스’ 유감
* 안동 ‘알양반’은 안동식혜를 꺼렸다
덤덤하나 반가운 맛, 감자란 놈
* 아버지가 못내 잊지 못한, 그 제주 고구마
밤에 보늬가 있는 까닭
물고기잡이 인술 이야기 둘
끝내 다 못 쓴 간고등어 이야기
편집 후기_한 사람이 가고 한 문장이 지고
출판사 서평
슬쩍 서러운 고향의 맛에 대한 헌사
배추적에 관한 추억이 그렇다. 달고 살짝 고소하고 은은하게 매콤한 겨울 배추에 밀가루를 묻혀 구워낸 ‘배추적’은 무슨 맛일까. 밤마실 온 마을 처녀들과 아지매, 할매들이 겨울 밤 입이 궁금할 때 한 두레 구워 먹던, 지금은 낯선 그 음식 말이다. 밍밍하고 싱겁지만 ‘깊은 맛’을 가진 배추적의 맛은 생속을 가진 이들로선 제대로 알 수 없으리라. 헛헛한 속을 달래주던 배추적은 어디서 맛볼 수 있을까. 햇볕을 실컷 받고 천천히 여문 쌀알을 다시 낮은 열로 뭉근히 익힌 후 오래 묵은 간장을 똑똑 끼얹어 먹는 갱미죽은 어떤가. “아무 것도 안 넣은 흰죽, 입안의 아픈 부분을 순하게 따스하게 다정하게 어쩌면 슬쩍 서러운 듯도 하게, 상처에 바르는 연고처럼 솨르륵 도포하던 그것!”(188쪽) 아플 때 엄마가 동솥에 끓여주던 그 옛날의 흰죽을 떠올리는 이는 행복하리라.
스러져가는 옛 것에 보내는 연서
음력 오뉴월에 담가 먹던 찹쌀 술 ‘정향극렬주’가 간신히 명맥만 이어가고 있다. “무슨 무슨 블루 라벨이니 송로버섯향이 난다는 샤또 오 브리옹이니 등 이름난 술을 웬만큼은 마셔봤다. 아아, 그러나 300년 전 정향극렬주, 정성이 진주처럼 녹아든 그 술에 비한다면 다만 싱겁고 머쓱할 뿐”이란다. 곁에 이런 술을 두고도 우린 와인과 사케의 목록만을 주워섬긴다니!(183쪽)
“짜지 않지만 간이 맞고 달지 않지만 들큰하고 맵지 않지만 알싸한 이런 장이, 슴슴하고 덤덤하고 쿰쿰하고 은은한” 집장에 대한 ‘증언’도 있다. 콩과 보리와 쌀을 발효시켜 가루를 내고 엿기름을 부어 꺼룩한 즙이 생기게 한 뒤 고추씨 가루를 얹고 무와 가지, 버섯 등 건더기를 넣은 집장은 ‘밥도둑’이어서 이를 언급하지 않고 넘어가는 것은 결례고 폭력(209쪽)이라는데 이를 어디 가서 맛볼 것인가.
웅숭깊은 삶의 지혜로 그득한 인생론
조율이시, 대추·밤·배·감이라 해서 조상께 제사를 드릴 때 기본으로 올랐던 밤의 속껍질 보늬에서도 삶의 교훈을 길어낸다. “곶감이란 형태로 가공되어 겨울을 나고 대추가 쪼글쪼글 마른 채 겨울을 난다면 밤은 수분이 사라지면 존재 이유까지 위협받잖아요. 겨우내 제사상에 올라가려면 몸을 보늬로, 야문 껍데기로 무장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면서 “매사 입장 바꿔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니깐요. 그래야 세상의 전체 구도가 보이지 않겠어요?”(253쪽)란 깨달음을 설파한다. 넌지시 “범사에 감사하라”는 귀띔도 한다. 지은이 엄마 이야기다. “공중에 휘날리는 복사꽃 이파리가 좋아 그 순간 생에게 감사했다. 천지가 이토록 고우니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71쪽) 그 엄마가 “시조모와 시조부, 홀로된 시어머니와 어린 시동생 둘, 그들의 음식 수발과 옷 수발과 한 해 열세 번이나 지낼 제사를 홀로 감당해야할 운명을 목전에 둔” 신행길에 서 있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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