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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11월 3일 오전, 서울 종로구 삼영증권 본사-
“감로차입니다. 할머니가 강원도 분이시라 어릴 적에 많이 먹었더랬죠.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본사 지점장이 직접 찻잔을 영은에게 건네주었다. 맛이 약간 썼지만, 영은은 두말없이 잔을 비운 뒤 말했다.
“마루한 코퍼레이션과 합병될지 모른단 소식이 나온 지 일주일이 지났는데, 아직 주가 상승의 징후는 없나요?”
“글쎄요. 당일 날 잠깐 반짝했을 뿐, 여전히 하한가입니다. 그다지 호재는 아닌 듯합니다.”
S&J 코퍼레이션이 관리하는 마카오의 영업장을 삼류만도 못한 카지노로 격하시킴으로써 장대수의 입지를 약화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안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불투명한 앞날은 영은으로서도 큰 마음의 짐이 되고 있었다. 하루빨리 마루한의 한창우 회장에게 사업장을 인계시키는 것만이 이들의 장래를 보장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 그녀의 생각이 차츰 오판으로 굳어져 가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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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마루한이라야 하는 건 아니잖아?”
영은의 표정을 보고 대략 감을 잡은 유승용이 말했다.
“무슨 말이에요?”
“마루한 말고도, 홍콩의 삼합회 또한 군침을 흘리고 있지.”
“나도 그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닌데, 카지노가 그들에게 넘어가면 과연 그들이 우리 사람을 쓸까요? 당장에 전부 잘라버리겠죠.”
그 말을 들은 승용이 손가락을 한번 튕기자, 리무진의 운전석과 뒷좌석을 구분지은 벽이 사라지며 조수석에 앉은 사내가 뒤를 돌아보았다.
“소개하지. 홍콩 메리어트 호텔 지배인인 왕 린 씨야.”
“글쎄요, 저랑 만날 일이 있던가요?”
영은이 다소 뻣뻣한 태도로 그를 맞이했다. 승용이 중재에 나섰다.
“내가 이 사람을 부른 건, 일개 호텔 지배인이라서가 아니라 삼합회 회주의 조카이기 때문이지.”
“당신..!”
영은이 발끈하려던 찰나, 왕 린의 한 마디가 그녀의 귀를 솔깃하게 했다.
“우리 호텔 지하에 카지노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물론 귀하의 부하직원들을 전부 스카우트하는 조건에서 말입니다.”
“농담 하시나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왕 린에게 서류 봉투를 넘겨받은 영은의 눈길이 달라졌다. 그녀가 기억하는 사백 여 명의 직원들 이름이 근무 예정 부서와 더불어 한 명도 빠짐없이 적혀 있었다.
“제법 설득력이 있군요.”
“절 믿어 주시기 바랍니다.”
“두고 보겠어요. 언제든 예고 없이 카지노를 방문할 테니, 그쪽 말씀이 진심인지 아닌지는 그때 가 보면 알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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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하고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이 일을 하다니, 너무한 거 아닌가요?”
“내 전매특허잖아. 지금보다 더한 때에도 가만히 있었으면서 왜 그래. 너무 예민해진 거 아냐?”
“..그럴 지도.”
“참, 오늘 영국에서 아주머니 오시기로 하지 않았나?”
“맞아요. 오후 두 시 비행기에요.”
“아주머니께 미리 말씀 좀 전해드려. 작품이 스크린에 옮겨지게 된 것을 축하드린다고 말야.”
“알았어요.”
정순자를 공항에서 맞이한 다음, 영은은 저녁에 있을 순자의 영화 제작 보고회장 참석에 합류하기 위해 세심한 준비를 기울였다. 재필이 세상을 떠난 지 팔 년이 가까워 오지만, 여의도의 집 내부는 여전히 그의 취향 그대로였다. 재필의 수리검을 녹여 만든 목걸이를 목에 건 다음, 주차장으로 나와 마세라티에 올라탄 영은을 두 대의 미니밴이 뒤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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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수께서 오늘 유난히 저기압인 것 같습니다.”
임시로 파견된 경호팀의 서열 두 번째인 짐 맥켈리가 말했다. 평소에는 임무중에 물 한 모금도 입에 대길 꺼려하는 그였지만, 서울이 워낙 안전한 도시로 판명 난데다 토드 팀에서 차출나온 인원 덕분에 든든하다고 느꼈는지 음료수 캔을 두 개나 들이킨 상태였다. 보다 못한 팀장이 그에게 면박을 주었다.
“작작 좀 마시라고. 임무 중에 화장실 가려고 그러나? 지금부터 자정까진 물 한 모금도 입에 대지 말게.”
“킁, 목이 말라서 그렇습니다.”
“정신 똑바로 차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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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으로 가기 위해 남쪽으로 곧장 내달리던 영은 일행의 행렬이 멈춘 곳은 판교 인터체인지를 지나 수원 톨게이트가 보이는 곳이었다. 끝없이 정체가 이어진 가운데, 사잇길로 경찰차와 레카차가 쌩 하고 지나갔다.
“사고가 난 것 같군요.”
잠시 시계를 보며 영은이 말했다. 시사회까지는 두 시간의 여유가 있었기에, 일행 전부가 한숨을 돌리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영은 일행 옆으로 바이크 한 대가 스쳐 지나갔다. 육중한 몸집에, 오래된 듯 군데군데 기스가 심하게 난 오토바이였다. 바이크가 영은의 마세라티 왼쪽 옆에 멈춰선 5초의 시간 동안, 바이크 몸통에 새겨진 'FZR-Ferrari No.96'라는 문구가 영은의 눈에 선명히 들어왔다. 도금이나 페인트 따위로 한 것이 아닌, 진품 다이아몬드가 깨알같이 박힌 것이었다.
…
…
…
빠라라랑~!!
시끄러운 클랙션 소리와 함께 바이크가 앞으로 달려 나가고, 그 뒤를 마세라티가 뒤쫓았다. 사잇길로 빠진 한 대의 바이크를 석 대의 차량이 추격하는 해프닝이 연출되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전혀 예상치 못한 총수의 돌출행동에 놀란 요원 하나가 물었다. 팀장 또한 영문을 모르긴 마찬가지였다.
“일단 따라가기나 하지.”
바이크의 최종 종착지는 어느 폐차장이었다. 폭주족들의 모임인 듯, 화려한 장식에 마구 개조한 바이크 수백 대가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의 한가운데를 마세라티가 뚫고 들어갔다.
“위험한 놈들이군.”
“저런 애송이들이 말입니까?”
“애송이가 휘두르는 칼에도 날은 있는 법이니까. 총수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말도록.”
…
…
…
다이아몬드가 박힌 바이크의 주인에게로 성큼 다가간 영은이 말했다.
“당신이 이 오토바이 주인인가요?”
“그런데?”
“나한테 파세요. 값은 후하게 쳐 드릴 테니.”
여기저기서 우 하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일 억만 주쇼.”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금액이었지만, 연인의 가장 소중한 유품을 눈앞에 둔 그녀로선 전혀 아까울 게 없는 액수였다.
“이 카드에 팔천 이백이 있어요. 우선 지금 인수하고, 나머지는 내일 드리죠.”
카드를 본 폭주족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뿐만 아니라 주위의 모든 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것 봐라? 얼마나 더 있으려나?”
스멀스멀 다가오는 폭주족들을 보면서도 영은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백 여 미터 떨어진 폐차장의 입구에 웅크리고 있는 맹수들에 대한 믿음이 큰 때문이었다.
“곱게 말할 때 오토바이를 넘기는 게 좋을 텐데?”
폭주족 하나가 영은의 목덜미에 작은 칼을 들이밀었다.
“철부지 아가씨. 지금 가진 돈만 다 내놓으면 곱게 돌려보내주지. 어때?”
이제껏 지켜보고 있던 팀장으로선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맥, 자네가 나서게.”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미니밴의 옆문이 드르륵 열리며 한 남자가 나섰다. 그의 손에 야구공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
…
…
-쐐액~!-
메이저리거 못지않은 강속구가 칼을 든 폭주족의 입으로 정확히 빨려들어 갔다. 폭주족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십여 미터 뒤로 나가떨어졌다.
“아프겠군. 이빨이 몽땅 나갔을 테니.”
비아냥거리며 매클린이 말했다. 폭주족들의 한가운데로 뛰어들려는 그를 영은이 뜯어말렸다.
“그만 해요. 소동 일으키고 싶은 생각 없으니까.”
상대의 위력을 실감한 폭주족들이 쉽게 다가서지 못하는 사이, 영은과 매클린 사이에 한바탕 설전이 벌어졌다. 영은이 매클린을 진정시키는 듯 했지만, 결정적인 남자의 한 마디가 영은의 숨은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왜 거액을 들이면서까지 저 고물을 사시려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몰라요. 저 오토바이가 나한테 어떤 의미를 지니는 지.”
“어쨌든 간에, 객관적으로 봐서 저건 지금 당장에라도 폐차시켜야 마땅합니다. 왜인 줄 아십니까? 엔진 소리를 들어보니, 누군지 몰라도 한참 아마추어가 개조를 시켰더군요. 엔진에 심하게 무리가 가서 당장 폭발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런..지경이란 말인가요?”
“불행히도 그렇습니다.”
영은은 자신도 모르게 손에 쥔 카드를 구겼다. 사선(死線)을 수십 번이나 넘나든 매클린조차도 순간 섬찟하게 만든 한 마디가 영은의 입에서 튀어 나왔다.
“전부..없애 버려요.”
“그냥 사람 구실을 못하게 만들어 버리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만.”
“..당신 마음대로 하세요. 죽이든, 병신을 만들든.”
…
…
…
콰직!
“우아악!”
검은 두건을 쓴 폭주족 하나가 발목을 붙잡고 나뒹굴었다. 왼발의 아킬레스건이 싹둑 잘려나간 것이었다. 워낙 많은 수를 상대하는 만큼, 매클린의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작업이 끝났습니다. 이제 그만 가시죠.”
영은의 시선이, 그녀가 그토록 원했던 오토바이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맥.”
“네, 총수님.”
“전주..거기 백무현 오라버니한테 저 물건을 보내 주세요. 오토바이 광신도들 두목이니만큼 물건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볼 거예요.”
여자의 목소리에 흐르는 약간의 경련. 상대의 얼굴을 흘깃 훔쳐본 매클린이 점퍼 안쪽 호주머니를 뒤적였다.
“닦으시죠.”
남자가 내민 티슈를 보고서야 상황을 눈치 챈 영은이 고개를 돌리며 눈물을 훔쳤다. 잠시 후 평소의 얼굴로 돌아온 영은이 멋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눈물 따위 말라버린 줄 알았는데, 아직도 이러네.”
“만약 새 출발이, 오랜 시간을 함께 해 온 상대에 대한 의무감으로 그러시는 거라면..”
“시끄러워요.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야.”
냉랭한 태도를 보이며 돌아서던 영은이 한 마디를 추가했다.
“맥이 뭘 걱정하는지 알아요. 아는데, 절대 그럴 일 없으니까 염려 놔요.”
차츰 결혼으로 무르익는 성형외과 의사 김수창과의 관계를 훤히 아는 매클린이 수창을 염려하자 쐐기를 박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