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곡사(麻谷寺)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 태화산(泰華山)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本寺)이다.
이곳의 물과 산의 형세는 태극형이라고 하여 "택리지" "정감록" 등의 여러 비기(祕記)에서는
전란을 피할 수 있는 십승지지(十勝之地)의 하나로 꼽고 있다.
마곡사는 자장이 창건하였으며, 고려 명종 때(1172년) 보조국사 지눌이 중수하고 범일이 재건하였다.
창건 당시에는 30여 칸의 대사찰이었으나, 현재는 대웅보전(보물 제801호), 대광보전(보물 제802호),
영산전(보물 제800호), 사천왕문, 해탈문 등이 있을 뿐이다.
이 밖에 사보로는 5층석탑(보물 제799호), 범종(지방유형문화재 제62호), 괘불 1폭, 목패,
세조가 타던 연, 청동향로(지방유형문화재 제20호)만 남아 있다.
▲ 아름다운 그림 photograph by 청류 (마곡사)
사찰의 창건 및 사찰명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마곡사 사적입안(事蹟立案)의 기록으로
신라 선덕여왕9년(640년) 당나라에서 귀국한 자장(慈藏)이 선덕여왕에게서 하사받은 전(田) 200결로
절을 창건하기 위한 터를 물색하다가 통도사(通度寺)·월정사(月精寺)와 함께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자장이 절을 완공한 뒤 낙성식을 할 때 그의 법문을 듣기 위해서 찾아온 사람들이
‘삼대[麻]와 같이 무성했다’고 하여 ‘마(麻)’자를 넣어 마곡사라고 하였다는 설이 있다.
두번째는 신라의 승 무염(無染)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이 절을 지을 때
스승인 마곡보철(麻谷普徹)을 사모하는 뜻에서 마곡사라고 하였다는 설과,
절을 세우기 전에 이곳에 마씨(麻氏) 성을 가진 사람들이 살았기 때문에 마곡사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 아름다운 그림 photograph by 청류 (마곡사)
태극형을 이룬 태화산(泰華山)과 그 산아래 고즈넉히 자리잡은 마곡사(麻谷寺).
작지만 느낌이 깊은 절..마곡사.
내가 이곳을 찾을때면 태화산 산행을 마친후 마곡사를 방문 하기 때문에 시간적 여유가 없어
늘 아쉬움이 남았던 차에 오늘 시간을 내서 마곡사만을 하나하나 둘러보며 그림에 담아보려 한다.
▲ 아름다운 그림 photograph by 청류 (마곡사)
일주문(一柱門)
사찰에 들어서는 산문(山門) 가운데 첫 번째 문으로기둥이 한 줄로 되어 있는 데서 유래된 말이다.
네 기둥[四柱]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을 얹는 일반적인 가옥 형태와는 달리
일직선상의 두 기둥 위에 지붕을 얹는 독특한 형식을 갖추고 있다.
사찰에 들어가는 첫 번째 문을 독특한 양식으로 세운 것은 일심(一心)을 상징하는 것이다.
신성한 가람에 들어서기 전에 세속의 번뇌를 불법의 청량수로 말끔히 씻고
일심으로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인 가르침이 담겨 있다.
즉, 사찰 금당(金堂)에 안치된 부처의 경지를 향하여 나아가는 수행자는 먼저 지극한 일심으로
부처나 진리를 생각하며 이 문을 통과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 아름다운 그림 photograph by 청류 (마곡사)
매표소에서 마곡사로 이어지는 산책로~
▲ 아름다운 그림 photograph by 청류 (마곡사)
해탈문(解脫門)
해탈문은 공포의 구성과 형태, 가구수법 등
전체적인 건축양식이 조선시대 후기 건축의 전형적인 특성을 이루고 있고
이 문을 통과하면 세속이 아닌 해탈의 세계에 들어가게 된다 하여 해탈문이라 부르며,
내부에 금강역사상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금강문이라 부르기도 한다.
천왕문과 더불어 마곡사의 입구에 해당하는 문으로 천왕문보다 앞서 위치하고 있는데,
초석은 자연석을 활용하였고, 기둥은 원주이며, 주심포식으로 주간에는 초각한 화반을 사용하였다.
해탈문의 정확한 창건연대를 알려주는 기록은 없고 <태화산마곡사사적입안>에
조선 헌종 12년(1846년)에 승려 정순을 화주로 하여 중수되었음이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해탈문 안에 <태화산마곡사해탈문중수기>가 있어 1910년에 중수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 아름다운 그림 photograph by 청류 (마곡사)
금강역사와 문수동자 및 보현동자는 모두 소조(塑造)이며,
문수와 보현동자는 각각 사자와 코끼리를 타고 있다.
금강역사는 장수의 복장을 하고 있으며, 얼굴이 신체에 비해 큰 편이고
험상궂은 듯한 표정을 하고 있으나 조선시대 후기의 전형적인 익살스런 표정을 지니고 있다.
▲ 아름다운 그림 photograph by 청류 (마곡사)
천왕문(天王門)
천왕문은 해탈문을 통과한 바로 다음에 있으며, 청정도량을 들어가는 정화의 의미를 지닌 문으로
사천왕은 고대 인도의 신으로 석가모니께 귀의하여 수미산 중턱의 사방을 지키는 불법의 수호신이 되었다.
겹처마에 맞배지붕으로 박공에는 커다란 풍판을 걸었으며,
건물 내외부에는 단청을 해 장엄을 베풀었다.
도리통 3간, 양통 2간으로 어간은 통로로 개방하고
협간에 방위에 맞춰 사천왕상을 모신 전형적인 사천왕문의 평면형식을 지니고 있다.
개방된 어간을 제외한 부분에는 모두 판벽을 두어 해탈문과 동일한 구성을 하고 있다.
공포의 형식과 가구수법으로 보아 조선시대 후기의 건축양식을 지니고 있으나
전형적인 조선시대 후기의 건축양식이 변화를 보이기 시작하는 시기의 건물로 보인다.
▲ 아름다운 그림 photograph by 청류 (마곡사)
외부 정면 협간에 걸려 있는 '泰華山麻谷寺天王門重修記'에 1910년에 중수하고
단청도 새로 칠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해탈문과 같은 시기에 중수되었고,
건축형식도 거의 유사하지만 해탈문에 비해서는 좀 늦게 건축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천왕상은 소조(塑造)로 화관은 화려한 모습을 지니고 있으며,
상호는 조선시대 후기의 전형적인 험상궂은 듯 하면서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 아름다운 그림 photograph by 청류 (마곡사)
명부전(冥府殿)
원통전을 중심으로 하는 수행 영역인 남원의 북쪽 끝에 위치.
명부전의 성격상 교화영역에 포함되어야 할 건물이나 이 건물을 지을 당시
북원영역에 마땅한 터가 없었는지 북원영역에 포함되어 있다.
명부전 주변으로 담장이 있는데, 원통전을 중심으로 하는 영역과는 별도로 담장 북쪽이 열려 있어서
명부전에 출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지장보살(地藏菩薩)과 염라대왕을 비롯한 시왕을 모신 곳으로
시왕전(十王殿)∙지장전(地藏殿)∙명왕전(冥王殿)이라고도 한다.
지장보살은 모든 인간을 교화시키는 역할을 맡았으며, 시왕은 염라대왕을 비롯한 10명의 지옥 심판관이다.
후면 중앙 불단은 한 단 높게 하여 주존(主尊)인 지장보살을 봉안하고,
좌우 불단에는 명부시왕상(冥府十王像)을 모시고 있다.
내부 바닥은 장마루를 깔았으며, 일제강점기인 1939년에 건립하였다.
▲ 아름다운 그림 photograph by 청류 (마곡사)
전통적으로 한국인의 미감은 비대칭의 대칭이다.
좌우가 같아 보이는데 한 군데도 같지 않은 공간 구성이 그것이다.
여기에 일직선의 미감도 좋아하지 않았다.
마곡사 해탈문과 천왕문 그리고 극락교로 이어지는 진입 공간의 동선이 직선이 아니고
조금씩 비틀려 자리한 것도 바로 이러한 한국미의 속성을 자연스럽게 반영한 것이다.
▲ 아름다운 그림 photograph by 청류 (마곡사)
북쪽 영역과 남쪽 영역으로 갈려져 있는 마곡사를 연결해 주는 다리로
극락교 아래 태화산에서 흘러내린 계곡물이 가득하다.
한가롭게 노니는 물고기..한참을 바라봐도 바쁜 움직임이 보이질 않는다.
한중한(閑中閒)이라 했던가.. 한여름, 한가로운 가운데 또한 한가롭다.
▲ 아름다운 그림 photograph by 청류 (마곡사)
난쟁이 부처
앉은키가 겨우 한 자나 될까 하는
돌부처
歷史나 이승의 업이 내내 돌의 무게로
누른다 하더라도
지금은 어느 세상을 꿈꾸는가
아무 것도 듣지 않고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 무표정으로
참 오랜 설법을 한다
불쑥 세상을 털고 일어서면
그 키가 하늘을 닿을라
잔설께를 비추던 암벽의 그림자가
한 자나 멀리 비킨다
나도 서둘러
마음을 비킨다.
김영천~
▲ 아름다운 그림 photograph by 청류 (마곡사)
범종루(梵鐘樓)
1996년에 건립한 '十자'형 평면의 건물로 극락교 건너 바로 오른편에 위치한다.
루(樓) 아래는 콘크리트 구조로 만들어 불교 용품과 서적을 판매하는 매점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루 위에는 사방에 석조 난간을 돌렸고 원형초석을 놓은 위에 기둥을 세워 목조 건물을 올렸다.
조선 후기 건축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十자'형의 평면과 그에 따른 지붕형태의 변화, 3출목 공포,
길게 뻗은 살미, 기둥과 창방 사이의 낙양각 등으로 범종각은 변화 있고 화려한 외관을 보여준다.
범종루 내부에는 범종과 법고, 목어, 운판의 사보(四寶)를 두었는데, 모두 근래에 조영된 것이다.
범종은 중앙에 위치하며,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면서 벌어지다 중간 부분부터 수직으로 내려오고
구연부가 약간 오므라든 종신(鐘身)은 전형적인 한국 종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종신에 '佛紀三0二0甲寅年秋 麻谷寺千佛殿 住持楞嚴'이라고 쓴 명문이 돋을새김 되어 있다..
▲ 아름다운 그림 photograph by 청류 (마곡사)
범종(梵鐘)은 조석 예불 때 사용되는 의식법구로 범종의 소리는 모든 중생을 구제한다고 한다.
목어(木魚)는 통나무를 깎아 물고기 모양으로 만들고,
그 속을 파서 두드리면 소리가 나는데 염불과 독경, 예배 등의 의식을 행할 때 쓴다.
법고(法鼓)는 종과 함께 중요한 의식법구로 조석예불 때 법도에 맞게 울리는 것으로
축생에게 고통에서 벗어나 기쁨을 만끽하도록 한다.
운판(雲版)은 금속판을 편편하게 하여 구름모양으로 만든 운형금속판을 말하는데.
다른 사물과 마찬가지로 조석 예불시에 두들기는 것으로 허공에 떠다니는 중생의 고통을 덜어준다고 한다.
▲ 아름다운 그림 photograph by 청류 (마곡사)
삶은 소유물이 아니라 순간 순간의 있음이다.
영원한 것은 어디 있는가
모두 한때일 뿐 그러나 그 한때를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수 있어야한다.
삶은 놀라운 신비요,아름다움이다.
▲ 아름다운 그림 photograph by 청류 (마곡사)
연화당(蓮花堂)
심검당 동쪽 개울가에 종무소로 사용되고 있으며, 최근에 신축한 건물로 정면 11간의 긴 건물이다.
주간을 넓게 설정했고 기둥의 높이도 매우 높은 편이어서 매우 시원스럽고
장대한 느낌을 주는 최근 불사의 경향을 반영한 건물이다.
공포는 주심포식으로 주간에 화반을 사용했으며, 지붕은 팔작지붕..
▲ 아름다운 그림 photograph by 청류 (마곡사)
연화당 맞은편,심검당 북쪽 뒤편으로는 담장으로 구획된 영역 속에 누각 형식의 고방(庫房)이 있다.
누마루 위에 곡물을 저장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누 아래까지 막아 창고로 사용하고 있음이 특징이다.
정면 4간, 측면 1간 규모의 민도리집으로 홑처마에 맞배기와지붕이며,
박공부는 풍판을 달지 않고 개방시켜 가구가 노출되도록 하였다.
심검당 북편에는 굴뚝이 있는데 흙과 기와를 쌓아 만들었는데
매우 큰 규모로 아래에 비해 상부를 많이 줄였고, 기와지붕을 올렸다.
굴뚝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크고 대담한 조형으로 마곡사 요사 영역 조형의 특성을 이루고 있다.
▲ 아름다운 그림 photograph by 청류 (마곡사)
내 소망은 단순하게 사는 일이다.
그리고 평범하게 사는 일이다.
내 느낌과 의지대로 자연스럽게 살고 싶다.
그 누구도 내 삶을 대신해서 살아 줄수 없기때문에
나는 나답게 살고 싶다.
▲ 아름다운 그림 photograph by 청류 (마곡사)
대광보전(大光寶殿)
현재 마곡사의 교화(敎化) 영역이라 할 수 있는 북원(北院) 영역의 중심 건물로
앞쪽에 넓은 마당을 둔 뒤에 자리 잡고 있다.
네모지게 다듬은 자연석을 가지런히 쌓아 한 단의 기단을 축조하고
그 위에 건립한 정면5칸, 측면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자연석을 이용해 막돌허튼층 쌓기로 만든 기단은 나지막한 편으로 도리통 5간의 긴 건물과 함께
수평선이 강조된 형상을 이루며 넓은 마당 뒤편을 편안하게 막아주고 있다.
기단 전면 중앙에는 기단과 동일한 재질의 자연석을 이용해 길게 계단을 설치했다.
▲ 아름다운 그림 photograph by 청류 (마곡사)
기단과 계단은 근래에 들어와 개축한 것으로 원래의 모습을 잃었다.
기단 앞에는 오래된 괘불대 지주 하나가 짝을 잃은 상태로 남아 있는데,
상당 부분이 땅에 묻힌듯 노출된 키가 낮다.
그 옆에는 새로 조성한 화강암 재질의 괘불대 지주 한 쌍이 서있다.
대광보전은 본존상 앞 예불공간을 넓게 확보하고, 다양한 예불의식을 수용할 수 있도록 하고자하는 의도에서
본존을 측면에 위치시키고, 기둥배열에 변화를 주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둥은 모두 원주로 막돌초석 위에 세웠다..
기둥의 대부분은 원목의 휜 상태를 그대로 활용하였으나 기둥 아래 부분을 윗부분보다
굵게 하는 흘림 수법을 두어 안정적인 형태로 만들고,
귓기둥을 평주에 비해 굵은 것으로 하여 건물의 윤곽을 강조하였다.
추녀 아래에는 추녀를 보강하기 위한 활주를 사용하고 있다.
▲ 아름다운 그림 photograph by 청류 (마곡사)
팔작지붕은 별다른 특성이 없는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모습이고,
처마는 네 면 모두 겹처마이며, 합각부는 합각널을 사용해 막았다.
바닥은 전체에 우물마루를 들였고, 마루 위에는 참나무로 만든 삿자리가 깔려 있다.
'泰華山麻谷寺事蹟立案'에 의하면 조선 1782년(정조 6)에 마곡사에 큰 화재가 발생해
대법당을 비롯한 1,050여 間의 건물이 소실되었다.
그 후 霽峰 體奎를 化主로 마곡사의 중창이 시작되었고, 화재가 난 3년후인 1785년(정조9)에 이르러
大法堂의 개건을 시작하여, 1788년(정조12)에 이르러 개건과 불화의 단청이 완료되었다고 한다.
▲ 아름다운 그림 photograph by 청류 (마곡사)
현재 대광보전 안에 보관되고 있는'永世不忘祝願'와
'忠淸右道公州判地西嶺泰華山麻谷寺大光寶殿重創記' 역시 대광보전이 1785년에 개건되었음을 보여준다.
'永世不忘祝願'는 1785년에 관찰사 겸 순찰사인 沈豊이 법당 중건을 위해
시주한 공덕을 기리기 위해 작성한 것이며, 법당(法堂)은 곧 대광보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불단은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이나 영광 불갑사 대웅전처럼 내부 측면에 위치시켰음이 특징이다.
즉 서향한 대광보전의 동쪽 후벽이 아닌 북쪽 측면에 불단을 두어 본존이 측면인 남쪽을 향하도록 하였다.
정면 어간에 걸려 있는 ‘大光寶殿’이라 쓴 현판은 표암(豹菴) 강세황이 쓴 것으로
현판 한쪽 모퉁이에 ‘豹菴’이라 쓴 낙관이 찍혀 있다.
약간 흘림체로 쓴 글씨는 유려하면서 힘이 잇는 모습이다.
강세황은 마곡사에서 멀지 않은 풍세에 그의 鄕邸가 있었으므로
마곡사와 어떠한 인연을 지니고 있었던 듯하다.
정면 기둥에는 '淨極光通達 寂照含虛空 却來觀世間 猶如夢中事 雖見諸根動 要以一機抽'라고 쓴 주련을 걸었다.
▲ 아름다운 그림 photograph by 청류 (마곡사)
대광보전 중단탱(中壇幀)
본존을 모신 불단 외에 동남쪽 벽면에는 중단에 해당하는 별도의 불단을 마련하고, 그 후벽에 칠성탱을 걸었다.
칠성탱 하단의 양쪽 끝에 나누어 화기를 적었는데
조선 1910년(순종 4)에 조성한 것으로 가로 304cm, 세로 180cm이다.
치성광여래를 중심으로 그 앞 좌우에 일광과 월광보살을 배치하였다.
다시 그 주변으로 상단의 칠여래(七如來)를 비롯해 칠원성군, 28숙(宿), 판관, 사천왕상 등을 배치하였다.
치성광여래를 중심으로 삼각형 구조가 중복된 구도로 사천왕상의 등장은
조선 말기 도상이 혼란해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군청색을 많이 사용하고 녹색과 적색이 탁해졌으며,
필치가 날카롭고 딱딱해지는 등 조선 말기의 경향을 보이고 있다.
금어(金魚)로 비구(比丘) 선율, 상열, 약효, 기소, 정민, □호 등이 참여하여 그렸다.
▲ 아름다운 그림 photograph by 청류 (마곡사)
대광보전 수월백의관음벽화(水月白衣觀音壁畵)
기둥을 비롯해 일부 단청이 벗겨지기는 하였으나
대광보전은 건물 내외 전체에 단청을 하여 화려하게 장엄을 하였다.
특히 내부의 단청은 변색이 거의 없이 단청이 잘 남아 있고, 그 다양하고 화려하게 베푼 단청의 무늬는
남방화소라 불리는 마곡사의 전통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이러한 전통은 특히 벽면 곳곳에 그려진 벽화에서 잘 나타난다.
일부 지워진 것도 있으나 외벽과 내부 벽 곳곳에는 사천왕과
16나한을 비롯한 인물화와 산수화 등 뛰어난 그림이 남아있다.
특히 후불벽 뒤편의 수월백의관음보살도는 18세기 후반 조선 회화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뛰어난 작품이다.
이 벽화의 관음보살은 기암괴석 위에 흰 사라와 백의를 입고 안락좌로 앉아 있으며
선재동자가 관음보살을 향하여 합장하고 있다.
▲ 아름다운 그림 photograph by 청류 (마곡사)
5층석탑(五層石塔)
대광보전 앞마당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이 탑은 고려 말에 원나라를 통해 유입된 라마교탑의 영향을 받은
청동제 상륜부를 지니고 있어 우리나라 석탑 중에는 특이한 조형을 이루고 있다.
기단부는 폭에 비해 높이가 높고, 1층 탑신부의 폭을 기단에 비해
약간 줄이기는 했으나 전체적으로 체감은 매우 적은 편이다.
전체적으로 삼국시대 이래 한국 석탑의 전통과 백제적인 지방색, 그리고 원나라와의 교류 관계 등,
고려시대 말기 석탑의 여러가지 새로운 경향 중의 한 특색을 보여주는 석탑이라 할 수 있다.
임진왜란 때 석탑 안의 유물은 도난을 당하였으며,
1972년 해체수리를 하면서 동제 향로와 문고리가 발견된 바 있다.
1984년에 보물 제799호로 지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고,
탑의 전체 높이는 8.67m이고 청석(靑石)을 이용해 만들었다.
2층의 기단, 5층의 탑신, 그리고 청동제 상륜부로 구성되어 있다.
▲ 아름다운 그림 photograph by 청류 (마곡사)
빈마음,그것은 무심이라고 한다.
빈마음이 곧 우리들의 본 마음이다.
무엇인가 채워져 있으면 본 마음이 아니다.
텅 비우고 있어야 거기에 울림이 있다.
울림이 있어야 삶이 신선하고 활기있는 것이다.
▲ 아름다운 그림 photograph by 청류 (마곡사)
신검당(尋劍堂)
대광보전 앞마당 남쪽에 자리 잡고 있는 'ㄷ자'형 평면의 요사로
승려들의 생활공간으로 대광보전의 노전이면서 대방의 역할을 한다..
'一자'형의 평면을 이루면서 대방이 있고, 대방의 전면, 즉 대광보전 앞마당 쪽에는
툇마루가 있었으나 현재는 툇마루를 없앴다.
대방 북쪽에는 불단을 조성하고 불화를 모신 1간의 인법당(因法堂)이 있으며,
남쪽 끝에는 넓은 부엌을 두었다.
마당 쪽 정면만 몰익공식의 초각을 한 초익공식으로 하여 격을 높였고,
나머지 부분은 민도리집 구조이다.
마당 쪽 전면에 ‘泰華山麻谷寺’, ‘麻谷寺’, ‘尋劍堂’이라 쓴 세 개의 현판이 있다.
‘尋劍堂’이라 쓴 현판은 정조 연간에 청백리로 유명했던 송하(松下) 조윤형(曺允亨)이 쓴 것이며,
‘麻谷寺’라 쓴 현판은 근대의 서화가인 해강(海剛) 김규진(金圭鎭)이 쓴 것이다.
심검당은 조선 후기의 건축양식을 지니고 있으나 정확한 연혁은 알 수 없다.
다만 '泰華山麻谷寺事蹟立案'에 1797년(정조 21) 중수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고,
심검당 안에 걸린 記文 편액에 1856(철종 7) 2월에 중수된 사실과 1909년에 번와공사가 있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 아름다운 그림 photograph by 청류 (마곡사)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 물어라.
자신의 속 얼굴이 드러나 보일때 까지 묻고 묻고 또 물어야 한다.
건성으로 묻지 말고 목소리의 목소리로 귀속의 귀에대고 간절하게 물어야 한다.
해답은 그 물음속에 있다.
▲ 아름다운 그림 photograph by 청류 (마곡사)
조사전(祖師殿)
응진전 영역의 뒤편 산 위로 올라간 곳에 별도로 조성된 대지 위에 위치하고 있다.
정면 3간, 측면 2간으로 정면 3간에만 띠살의 쌍여닫이문을 단 감실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고
초석은 운두가 높은 잘 다듬은 원형초석을 사용하고 있어 건물과 어울리지 않으며, 원주를 사용하고 있다.
지붕은 홑처마에 팔작지붕으로 원래는 서쪽의 1간을 온돌방으로 꾸몄었으나
현재는 내부 바닥 전체에 우물마루를 깔았다.
천장은 전체에 우물천장을 들였는데, 격자의 간격이 매우 큰 편에 속한다.
▲ 아름다운 그림 photograph by 청류 (마곡사)
내부에는 개산조 자장율사, 그 옆에 범일과 도선국사 등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 아름다운 그림 photograph by 청류 (마곡사)
응진전(應眞殿)
대광보전 앞마당의 북쪽 끝에 자연석을 이용한 작은 규모의 건물로
내부에는 후면과 양 측면 벽에 의지해 'ㄷ자'형의 불단을 두고 석가여래와 나한상을 모셨다.
겹처마에 팔작지붕으로 내부 바닥에는 전체에 우물마루를 들였고, 천장은 전체에 우물천장을 들였는데
중앙부를 주변에 비해 한 단 높게 만들었으며, 단차를 이용해 주변부 천장의 측면에
창을 달아 수납공간으로 활용하였음이 특징이다.
건물 내외에는 단청을 베풀었으나 외부 단청은 최근에 들어와 새로 칠한 것이다.
정면 기둥에는 '塵點劫前早成佛 爲度衆生現世間 嵬嵬眞相月輪滿 於三界中作導師'라고 쓴 칠언절구의 주련을 걸었다.
응진전은 작은 규모의 전각으로 공포와 창호 및 천장의 구성 등에서 조선시대 말기의 건축적 특성을 보여준다.
현재 전각 안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개의 記文이 걸려 있다.
1. '麻谷寺應眞殿新佛粮施主芳名錄' 道光 26年 丙午(憲宗12, 1846年) 2月日
2. '公州泰華山麻谷寺羅漢殿重建記' 咸豊 2年 壬子(哲宗3, 1852年)
'공주태화산마곡사나한전중건기'에는 건물이 오래되어 퇴락함에 따라 중건되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건축양식과 이 기문으로 보아 현재의 응진전은 1846년에 중건된 것으로 보인다.
▲ 아름다운 그림 photograph by 청류 (마곡사)
내부의 불단에는 어간 후벽에 의지해 중앙에 석가여래좌상을 모셨다.
수미좌 형식의 대좌 위에 모셔졌으며, 결가부좌한 채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고,
석가여래 좌우에는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모습의 가섭과 아난 좌상을 협시로 모셨으며,
그 바깥으로 좌우에 8軀 씩 16나한을 모셨다.
16나한은 웃고, 울고, 고뇌하는 등 다양한 표정을 하고 있으며,
16나한상 바깥 쪽에는 좌우에 각 1구씩 나누어 법천과 제석천을 모셨다..
응진전 안에 걸려 있는 마곡사응진전신불량시주방명록으로 미루어
조선 1846년(헌종 12)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 아름다운 그림 photograph by 청류 (마곡사)
덧없는 생각들을 끊어야 한다.
그러면 마음이 넉넉하고 안락하리라.
무엇이 덧없는 생각인가?
육신에 매달리는 것이 덧없는 것이다.
좋고 나쁜 느낌에 매달리는 것이 덧없는 것이다.
보고 느낀 생각들이 덧없는 것이다.
자기 중심적으로 사물을 판단하는 것이 덧없는 것이다.
▲ 아름다운 그림 photograph by 청류 (마곡사)
백범당으로 불리는 백범 김구선생이 은거하면서 수행하던 곳과 그 앞 백범 김구선생의 은거 기념식수.
김구가 숨어 지내던 마곡사
마곡사는 대한민국 건국에 큰 공을 세운 백범 김구와도 인연이 깊다.
김구는 동학 신도였는데, 대한제국 말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가담한 일본인 장교를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나루에서 죽이고 인천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탈옥한 뒤 승려로 위장한 채 마곡사에서 숨어 살았다.
지금도 대광보전 앞에는 김구가 심은 향나무가 있는데, 그 옆에 “김구는 위명(僞名)이요,
법명은 원종(圓宗)이다”라고 쓰인 푯말이 꽂혀 있다.
▲ 아름다운 그림 photograph by 청류 (마곡사)
김구는 3년 동안 이 절에서 사미(沙彌)로 일했는데, 그때의 상황이 (백범일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어디로 가는 길이냐를 묻기로 나는 개성에서 성장하여 장사를 업으로 삼다가 실패하여
홧김에 강산 구경을 떠나서 삼남으로 돌아다닌 지가 1년이 되어 가노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마곡사가 40리밖에 아니 되니 같이 가서 구경하자고 하였다.
마곡사라면 내가 어려서 (동국명현록(東國明賢錄))을 읽을 때 서화담 경덕이 마곡사 팥죽 가마에
중이 빠져 죽는 것을 대궐 안에 동지 하례를 하면서 보았다는 말에서 들은 일이 있었다.
나는 이 서방과 같이 마곡사를 향하여 계룡산을 떠났다. (······)
마곡사 앞 고개에 올라선 때는 벌써 황혼이었다.
산에 가득 단풍이 누릇불긋하여 (······) 감회를 갖게 하였다.
마곡사는 저녁 안개에 잠겨 있어서 풍진에 더러워진 우리의 눈을 피하는 듯하였다.
뎅, 뎅 인경이 울려온다. 저녁 예불을 알리는 소리다.
일체 번뇌를 버리라 하는 것같이 들렸다. 이 서방이 다시 다진다.
“김형, 어찌하시려오?”
김구는 말을 받아 “중이 되려는 자와 중을 만드는 자와 마주 대한 자리에서 작정합시다” 이렇게 대답하였다.
우리는 일어나서 안개를 헤치며 마곡사를 향해 나아갔다.
김구는 이곳에서 하은스님의 상좌가 되어 입산하였다.
그는 그다음 날 득도식을 마친 후 원종이라는 법명을 받고 머리를 깎았다.
그 뒤 부목(負木)을 맡은 그는 나무도 하고 종노릇까지 하였으며,
수도승이 된 다음에는 운수승(雲水僧)으로 떠돌았다.
▲ 아름다운 그림 photograph by 청류 (마곡사)
창건이후 신라말부터 고려초까지 약200년 동안 폐사가 된 채 도둑떼의 소굴로 이용되었던 것을
명종2년(1172년)에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 제자 수우(守愚)와 함께 왕명을 받고 중창하였다.
보조가 처음 절을 중창하려고 할 때 도둑들에게 물러갈 것을 명하였으나 도둑들은 오히려 국사를 해치려 하였다.
이에 보조가 공중으로 몸을 날려 신술(神術)로써 많은 호랑이를 만들어서 도둑에게 달려들게 하였더니
도둑들이 혼비백산하여 달아나거나 착한 사람이 되겠다고 맹세했다고 한다.
도둑들에게서 절을 되찾은 보조는 왕에게서 전답 200결을 하사받아 대가람을 이룩하였다.
▲ 아름다운 그림 photograph by 청류 (마곡사)
▲ 아름다운 그림 photograph by 청류 (마곡사)
대웅보전은 대광보전 옆을 돌아 높은 계단을 올라 다다르게 되는데..
이곳에선 마곡사 경내 모습을 한눈에 내려다 볼수 있다.
정면이 아닌 약간 측면에서 돌아 오르도록 되어 있으므로 대웅보전 앞마당은 좁지만 계단을 오르고,
약간 측면에서 진입하는 과정에서 중층의 건물 전체를 인식할 수 있다.
정면 중앙에 기단과 동일한 재질의 석재로 계단을 만들었다.
▲ 아름다운 그림 photograph by 청류 (마곡사)
대웅보전(大雄寶殿)
중층의 불전으로 대광보전의 뒤쪽, 산 위의 비탈면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축대 위에 만들어진 앞마당은 매우 좁은 편이다.
내부는 상하층이 통해 하층은 도리통 5간, 양통 4간인데 반해
상층은 도리통과 양통을 줄여 도리통 3간, 양통 3간으로 구성하였다.
하층은 전면 중앙 3간에 3분합, 양쪽 끝 협간에 두짝의 문을 두었으며,
양 측면 전퇴에 외짝문, 후면의 중앙 3간에 각 두짝의 창을 달았다.
상층에는 전면에만 교살 형식의 광창(光窓)을 달아 채광을 할 수 있도록 하고 나머지는 모두 판벽을 설치했다.
하층 내부에는 후면의 고주열에 의지하여 3간 길이로 불단을 마련하였다.
공포는 모두 내외3출목(내외7포)의 다포식으로 동일 구조이다.
기둥은 모두 원주로 외부의 기둥은 비교적 반듯한 부재를 사용하고 있으나
내부의 고주들은 휜 부재를 적절히 활용하고 있다.
특히 하층에 사용된 2개의 대들보를 비롯해 상층에 사용된 보도 휜 부재를 활용하고 있다.
휜 부재를 적절히 활용하는 조선 후기 건축의 일반적인 모습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 아름다운 그림 photograph by 청류 (마곡사)
지붕은 상하층 모두 겹처마이며, 상층은 팔작지붕이며, 하층의 추녀는 그 끝을 강한 곡선으로 조각을 했다.
기와는 특별한 장식용 기와는 사용하지 않았으며,
범자를 새겨 장식한 암막새와 숫막새를 사용했으나 모두 최근에 교체된 것들이다.
바닥 전체에는 우물마루를, 하층 천장은 공포 사이에 순각판을 들인 외에
양 측면 대들보와 공포대 사이 좁은 공간에 우물천장을 들였다.
상층은 대들보 옆면에 의지해 전체에 우물천장을 들였다.
다만 중앙부의 우물천장은 양쪽과 달리 조각한 소란대를 더해 장엄을 더한다.
건물 내외는 전체에 단청을 베풀었으며, 내부의 단청은 원래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으나
외부의 단청은 1985년에 새로 칠한 것이다.
정면의 중앙 세 간에 설치한 삼분합문은 아래에 궁창부를 두고 그 위를 띠살로 구성하였다.
사찰 정면의 창호에 띠살을 들인 예는 많지 않은 편인데, 후대의 개조일 가능성도 있다.
양쪽 끝 협간에는 두짝의 여닫이문을 들였는데
기본적으로는 중앙부의 창호와 같은 형식이나 정자살을 들였음이 다를 뿐이다.
▲ 아름다운 그림 photograph by 청류 (마곡사)
건축양식은 조선후기에 속하나 조선후기의 전형적 특성이 발현되기 전의 모습을 지니고 있으므로
17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대웅보전에 대한 기록이 적어 그 정확한 건축연대는 알 수 없다.
다만 '태화산마곡사사적입안'(1851년)을 비롯해 현재 내부에 걸려 있는
다음과 같은 세 개의 記文을 통해 대웅보전의 연혁을 추정해볼 수 있을 뿐이다.
'康熙九年庚戌六月初一日 公山地華山麻谷寺二層大藏殿丹靑記' : 1670년(현종 11)
'忠淸右道公州泰華山麻谷寺大雄殿懸板' 聖上卽祚16年 歲次 己卯正月15日 : 1879년(고종 16)
기문 중 먼저 주목되는 것은 1670년(현종 11)에 쓴 '공산지화산마곡사이층대장전단청기'이다.
건물명이 대장전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 분명하게 2층이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1670년에 이 건물을 단청한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이 기문이 대웅보전에 보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대웅보전은 원래 대장전으로 건축되었을 가능성이 있고,
1670년에 단청을 하였으므로 그 이전부터 속했던 건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태화산마곡사사적입안'에 의하면 마곡사는 1650년부터 각순에 의한 중창불사가 이루어져 사격을 갖추었고,
1782년9월6일 발생한 대화재로 법당을 비롯한 1,050여 간의 건물이 소실되어
1785~1788년에 걸쳐 법당, 즉 현재의 대광보전이 중건된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대장전은 1650년 각순에 의한 중창 불사로 조영된 후 1782년의 화재 때
대장전은 소실되지 않았고 임시로 법당으로 사용하였을 가능성을 추정해볼 수 있다.
1985년 해체공사 중 ‘康熙二年 癸丑 五月’(1663년), ‘康熙三十四年 乙亥’((1695년), ‘乾隆二十七年 壬午’(1762년) 등의
명문이 적힌 기와가 확인된 점 역시 이 건물이 1782년 대화재에 소실되지 않고 유지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건축양식과 기록 등에 의해 현재의 대웅보전은 1650년 이후 각순의 마곡사 중창불사에 의해 대장전으로 조영된 후
1782년 대화재로 법당이 소실되자 임시 법당으로 사용되었던 것이 법당, 즉 대광보전의 중건 이후에도
계속해서 불전으로서 유지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1831년에 아래층 중수가 있었으나 언제부터 대웅보전으로 고쳐 부르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1879년(고종 16)의 '충청우도공주태화산마곡사대웅전현판'에 따르면
적어도 이때부터는 대웅보전으로 불렸던 것으로 보인다.
상층 어간에는 ‘大雄寶殿’이라 쓴 현판이 있는데, 신라의 명필 金生이 쓴 글씨로 전하고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하층 전면 기둥에는 오언절구의 柱聯이 있다.
古佛未生前 / 凝然一相圓 / 釋迦猶未會 / 迦葉豈能傳 / 本來非?白 / 無短亦無長
내부 고주와 포벽 등에는 ‘道善居士兩主過去’ ‘高柱施主許成□’ 등
많은 명문이 있으나 시주자의 명단인 경우도 있고 낙서도 많다.
▲ 아름다운 그림 photograph by 청류 (마곡사)
불단은 하층의 후면 고주열에 의지해 불벽을 구성하고 그 앞에 세 간에 걸쳐 설치했고,
수미단은 높이가 낮은 편이며, 받침부 위에 세 단으로 구성하고 있다.
맨 아래 층에는 안상을 새기고, 그 위 두 단에는 각각 꽃을 형상화한 무늬를 조각했으며,
본존으로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약사여래와 아미타불을 모셨다.
모두 목조좌대위에 모셨으며, 목조좌상으로 금칠을 하였다.
삼불(三佛) 뒤에는 후불탱으로 각각 가로 156cm, 세로 270cm 크기의 3폭으로 이루어진 삼세불화를 걸었다.
모두 본존을 중심으로 한 동일한 구도로 석가불화를 중심으로 양쪽의 약사와 아미타불화에
사천왕과 팔부중을 나누어 배치하였고, 각 불화에 협시불이 그려지지 않았으며,
중앙의 석가불화는 8대보살과 벽지불, 10대제자, 제석과 범천, 2신중, 2동자로 구성되었다.
좌측의 약사불화는 약사여래좌상을 중심으로 6대보살, 벽지불, 10대제자, 제석과 범천, 2천왕, 용왕과 용녀,
아자타삿투 왕과 베데히 왕비, 4구의 동자와 동녀로 구성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아미타불화는 6대보살, 벽지불, 10대제자, 제석과 범천, 2천왕, 2신중, 2동자로 구성되어 있다.
석가불화와 아미타불화는 하단 양쪽에, 약사불화는 하단 중앙에 각각 화기가 있다.
조선 1905년(광무 9)에 조성된 것으로 정연, 성주, 상현, 유연, 성엽 등의 금어(金魚)가 참여해 그렸다.
▲ 아름다운 그림 photograph by 청류 (마곡사)
눈부처
당신의
물빛 눈동자를
유심히 바라보면
당신은 어디에도 없고,
외려 내가 촉촉이 젖은 채
나를 뚫어지게
응시합니다.
있는 중에 없거나
없는 중에 더욱 깊이 있거나
당신은 나에게 가끔씩
참,
불가사의합니다.
김영천~
▲ 아름다운 그림 photograph by 청류 (마곡사)
뜻대로 안 된다고 너무 근심하지 말라.
마음이 유쾌하다고 해서
너무 기뻐하지도 말라.
오랫동안 무사하다고 너무 믿지 말 것이며
처음 맡는 어려움을 꺼리지 말라.
첫 난관만 돌파하면
그 다음은 오히려 쉬워지는 법이다.
▲ 아름다운 그림 photograph by 청류 (마곡사)
성보박물관 건너편으로는 태화천을 끼고 나무데크 옆에 자리한 삭발바위.
백범 김구선생의 삭발터이다.
▲ 아름다운 그림 photograph by 청류 (마곡사)
사람이란 다행이도 그 자리에
가만히 놓여있는 가구가 아니며
앉은 자리에만 맴돌도록 만들어진 시계 바늘도 아니다.
끝없이 변화하면서 생성되는것이
생명 현상이므로, 개인의 의지를
담은 노력여하에 따라 그 인생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있다. ↓
▲ 아름다운 그림 photograph by 청류 (마곡사)
"일일시호일"
날마다 좋은날...
하루 하루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그런 시들한 날이 아니라
늘 새로운 날이라는 뜻이다.
철저한 자각과 의지적인 노력
으로 거듭 거듭 태어나기 때문에
순간 순간이 늘 새로운 것이다. ↓
▲ 아름다운 그림 photograph by 청류 (마곡사)
우리 둘레는 하루하루가 고통
으로 얼룩져 있는데 어떻게
좋은날일 수 있단 말인가.
그렇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 속에서
생의 의미를 찿아야 한다.
우리의 삶은 도전을 받고
그것을 극복할려는 의지력에
의해 의미가 주어진다. ↓
▲ 아름다운 그림 photograph by 청류 (마곡사)
날마다 좋은날을 맞으려면
모순과 갈등 속에서
삶의 의미를 캐내야 한다.
하루하루를 남의 인생처럼
아무렇게나 살아 버릴 것이
아니라 내 몫을 새롭게
소중하게 살려야 한다.
되풀이 되는 범속한 일상을
새롭게 심화시키는 데서
좋은 날은 이루어진다.
법정스님의 좋은글~
▲ 마곡사 위치도
첫댓글 종종가는 마곡사지만
다비님의 사진과 자료글을 보고 많이 배우고 갑니다.
전 늘 그자리 그 풍경을 스치듯 담아오는데......
ㄷ비님의 글을 보면 나이 지긋한 학자풍의 글인데 사진을은 넘 젊으시니^^
과찬이십니다.
거기다 젊게까지 봐주시니...ㅎ
감사합니다.
늘 태화산 산행만하고 마곡사는 스치듯 지나온 기억밖에 없어
기회가 되어 마곡사에서 오랜 시간 보내고 왔습니다.
몇년전에...꽁공 얼어붙은 마곡사를 다녀온후론 못갔네요
녹음이 짙은 마곡사 풍경도 고즈넉 합니다
자료를 많이 찿아 보시는 분인것 같네요
열정이 대단합니다.. 이렇게 사진 작업 하기도 쉽지가 않은데요...
좋은 내용과 사진 즐감하고 갑니다..좋은 하루시길요^^
초롱궁사님..감사합니다.
마곡사에서 보낸 한나절이 참으로 평온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림을 담고.. 경내 그늘진 나무밑에 앉아 짐보따리 내려놓고
한참동안 사색을 즐길수 있었던 시간이었으니까요..
또다른 느낌의 마곡사
자세한글과 멋진그림에 쉬어 갑니다
보라님.
잠시나마 머물며 쉬어가 주신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30여년 전에 건성으로 마곡사를 지나 동화사로 갔는데 자세한 설명과 함께 마곡사 구경 잘햇습니다.^^-
가람님.
감사합니다.
30년전 이라면 오래전 일이군요.
옛 추억을 되살리며 한번쯤 나들이 하셔도 좋을듯 합니다.
빈마음,
그것은 무심이라고 한다.
빈마음이 곧 우리들의 본 마음이다.
무엇인가 채워져 있으면
본 마음이 아니다.
텅 비우고 있어야 거기에 울림이 있다.
울림이 있어야
삶이 신선하고 활기있는 것이다
조은글..
자세한 설명..
멋진사진으로
깊은 감동입니다
그곳에도
얼마후면 짙은 가을로
또 다른 풍경을 만들겠지요
덕분에 잘 보았습니다
송향님.
감사합니다.
빈 마음까지는 아니라도
매일 신선하고 활기있는 삶을 살려고 노력중입니다..ㅎ
가을의 오색 옷으로 치장한 마곡사..
벌써 부터 기대가 됩니다..ㅎ
아들이 공주교대를 졸업하고
홍성에서 초등교사로 재직 중인데
언뜻 페이스북에 올려진 사진으로만 접하였습니다.
덕분에 여러가지 사료를 공부하고
마곡사의 진면목울 제대로 둘러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고즈넉한 마곡사에서
평온한 시간을 가져본 날이었습니다.
가을이 되었으니
다시한번 다녀올까 합니다.
군불로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