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뛰어난 시인(詩人)적 자질
서거정이 6세에 시를 지을 줄 알았던 신동이었음은 앞에서 언급하였다. 그는 시에 천재적인 자질을 갖추고 있었고, 특히 빠른 시간 내에 시를 짓는 데 탁월하였다. 중국의 사신 기순(祈順)과 장근(張瑾)이 서거정과 수창할 때에 매번 찬탄하면서, “참으로 기재다. 우리 같은 사람은 밤새도록 짜내어도 겨우 한두 편을 지을까 말까 하는데 공은 서서 이야기하는 사이에 주옥같은 시를 짓는다. 더군다나 어떠한 소재와 상황이 주어져도 자유자재로 시를 짓는 필법을 지녔으니, 공같은 사람은 천하에 횡행할 것이다.” 하며 극찬하였다. 또 임원준(任元濬)은 〈사가집 서〉에서 “공은 시를 지을 때 붓 가는 대로 맡겨 갑자기 구상하여도 법도에 맞는 훌륭한 시를 지었으며, 어떠한 경우에 처하고 어떠한 사람을 만나도 응대하는 솜씨가 유수같이 막힘이 없어서, 보통 문사들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경지이다.” 하였다.
이처럼 서거정은 뛰어난 시인의 자질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시작(詩作)을 자기의 천직으로 여기는 인식이 매우 투철하였다. 서거정에게 시를 짓는 일은 일상생활 중에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일과였으며, 그것으로 일생을 소일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수의 시 읊고 또 읊으니 / 一詩吟了又吟詩
종일토록 시 읊는 것 외에 할 일이 없네 / 盡日吟詩外不知
지금까지 지은 시 만 수가 되니 / 閱得舊詩今萬首
죽는 날에야 읊지 않을 것을 잘 아네 / 儘知死日不吟詩
〈시성자소(詩成自笑)〉라는 제목의 시인데, 서거정이 시를 짓는 것을 지극히 좋아하였음을 잘 볼 수 있다. 그는 종일토록 시를 짓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일이 없으며, 이 일을 죽는 날까지 그만두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시를 마치 일기 쓰듯이 하여 하루에 4, 5수, 많게는 10수 이상 짓는 날도 많았다. 따라서 그는 다듬고 꾸미는 각고의 단련을 거쳐 어렵게 시를 짓기보다는 경물을 보는 즉시 생각나는 대로 쉽게 쓰는 편이었다.
이처럼 시작을 평생의 과업으로 생각한 서거정은 풍류를 즐기고 시상을 떠올리기 위하여 술을 자주 마셨다. 그는 시를 지극히 애호하여 미칠 정도였으며, 술을 지극히 좋아하여 성벽(性癖)에 걸릴 정도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읊조리고 있다.
평생토록 성품을 진솔한 데 맡겼음을 스스로 웃나니 / 自笑平生任性眞
시에 미치고 술을 지극히 좋아해 양 귀밑머리 희어졌네 / 顚詩癖酒兩毛新
시주에 미치고 버릇이 되었음을 혐의하지 마소 / 莫嫌詩酒顚仍癖
술과 시가 없다면 쉽게 늙은이 되었으리 / 無酒無詩易老人
때문에 그는 69세로 작고하던 해에 지은 〈서졸고후(書拙稿後)〉라는 시의 병서(幷序)에서 시를 너무 좋아하는 자기의 시벽(詩癖)에 대하여 회고하고 있다. 그는 즐거운 일과 슬픈 일, 그리고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모든 것을 시로 지어 표출하였기에, 시는 그의 일상생활의 전부였다. 시를 지극히 좋아하는 시벽이 있었던 서거정으로서는 시작(詩作)이 시사(時事)에 절실하지 않고 후세에 유익함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시인으로 자아를 인식함이 절실했던 그는 이 일을 그만둘 수 없었다. 이러한 성향은 서거정이 세속의 부귀공명을 다 누린 뒤 뛰어난 시인의 자질을 가지고 시를 통하여 유한(幽閑)한 삶을 만끽하고자 하는 귀족적 성향 바로 그것이었다.
이런 귀족적 성향을 가진 서거정은 대각문인과의 교류가 빈번하였고, 그 때마다 시로써 창화하였다. 더러는 시를 지어 군주와 고관대작들에게 바치고 그들을 찬양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당시의 대신들과 밀접한 유대관계를 가지게 되었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그들의 비호를 받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대각문인들과도 자주 시주회를 열어 주필(走筆)ㆍ연구(聯句) 등 유희적 성향을 띠는 시를 많이 지었다. 그의 시 중 27%가 화운시(和韻詩)ㆍ차운시(次韻詩)인데, 이는 그만큼 당시 대각문인들과 시로 수창함이 많았다는 증거이며, 300여 편의 제화시(題畵詩)를 남긴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3. 《사가집(四佳集)》의 판본
현전하는 《사가집》은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다. 서거정은 거의 매일 시를 지어 만여 수의 시를 창작하였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 결과 시집 50여 권과 문집 2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글을 남겼으나, 상당 부분이 유실되어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원래의 반도 되지 않는다.
《사가집》의 판본은 크게 무신본(戊申本, 1488년 간행본), 을유본(乙酉本, 1705년 간행본), 기사본(己巳本, 1929년 간행본)으로 나눌 수 있다. 무신본은 최초로 간행된 것이고, 을유본은 무신본의 잔권(殘卷)을 가지고 복각한 것이고, 기사본은 을유본의 내용을 대폭 줄여 만든 것이다.
무신본은 서거정 생존시 왕명에 의하여 운각(芸閣)에서 금속활자로 인쇄한 것이다. 이 판본은 원래는 총 70여 권의 방대한 양으로 이루어졌는데, 임원준(任元濬)의 〈사가집 서〉를 보면 그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가만히 보니 응제시(應製詩), 의고시(擬古詩), 제영시(題詠詩), 증시(贈詩), 송시(送詩), 애사(哀辭), 만사(挽詞), 송(頌), 부(賦), 5언ㆍ7언 고풍, 5언ㆍ7언 근체시, 가(歌), 행(行), 절구(絶句) 등 만 여 수로 시집을 만드니 50여 권이고, 서(序), 기(記), 설(說), 발(跋), 비명(碑銘), 묘지명(墓誌銘) 등 수백 편으로 문집을 만드니 20여 권이다.
위의 글에서 보듯이 무신본 《사가집》은 시집 50여 권과 문집 20여 권 등 총 70여 권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현재로서는 그것이 사실인지를 단정할 수 없으며, 그중에 특히 문집이 20여 권이었다는 것은 더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시집이 50여 권이었다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왜냐하면 무신본의 잔권을 기저로 하여 최대한 무신본과 흡사하게 간행하려 했던 을유본에서 시집 제일 마지막 권이 ‘권지오십이(卷之五十二)’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신본의 내용이 을유본에 남아 있는 것은 시집 총 52권 중 절반도 안 되는 25권과 문집 20여 권 중 6권뿐이다. 그러니까 시집은 27권이 유실되었으며 문집은 최소한 14권 이상이 유실된 셈이다. 또 임원준의 〈사가집 서〉에서 언급한 장르는 시집의 경우는 을유본에 거의 다 있으나, 문집의 경우는 서(序) 3권과 기(記) 3권만이 남아 있고 나머지 설(說), 발(跋), 묘지명(墓誌銘) 등의 장르는 완전히 유실되었다. 임원준의 서문에 언급된 것 외에도 없어진 장르가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예를 들면 서거정이 54세 때 사헌부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올린 차자(箚子) 10여 편이 《조선왕조실록》에는 실려 있지만 그의 문집에서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무신본으로 현존하는 것은 3권 1책으로, 권40ㆍ권41ㆍ권42이다. 여기에 실린 작품은 서거정이 62세 때 지은 시 189수와 63세 때 지은 시 269수 등 총 458수이다. 이 본은 이병주(李丙疇) 박사 소장본인데, 무신본을 바탕으로 하여 간행한 을유본에도 빠졌던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무신본은 서거정 생전에 간행되었다. 서거정의 글은 간행되기 전부터 역대 왕들의 관심 대상이 되었고, 그로 인하여 나라에서 주관하여 간행하려는 조짐이 있었다. 서거정은 23년간 문형을 잡아 오랫동안 중앙요직에 있었기 때문에 늘 임금을 가까이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임금으로부터 지극한 총애를 받았다. 특히 성종은 서거정의 시문집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고, 급기야 1483년에는 예문관 관리를 파견하여 그의 문집 초고를 가져오게 하여 친히 보고서 문집 간행의 의사를 나타냈다.
임금이 한번은 예문관 관원을 파견하여 공이 평생 지은 시문을 모두 수집하여 올리게 하니, 공이 당황한 가운데 다만 본고 30권만 바쳤다. 임금이 몇 달 동안 열람하시고 원고를 돌려주면서 “경은 지금 늙지 않아 글이 더 첨가될 것이니, 그때 간행해도 될 것이다.” 하였다.
위의 인용문을 통해서 볼 때 서거정이 1483년 64세 때 임금에게 올린 원고가 벌써 30권임을 알 수 있다. 이후 5년간 계속해서 저술 활동을 한 것을 감안한다면 30권보다 훨씬 많으리라는 것은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이와 같은 성종의 지대한 관심의 결과 서거정은 생전에 자신의 문집을 국가에서 간행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을유본은 무신본의 잔권을 바탕으로 하고 여러 문헌에 흩어져 있는 것을 증보하여, 1705년에 서문유(徐文裕, 1651~1707)가 전라도관찰사 겸 전주부윤으로 있을 때 전주(全州)에서 간행한 목판본이다.
을유본은 무신본이 간행된 지 200여 년이 지난 뒤였다. 이때 《사가집》을 새로 간행하려고 무신본을 백방으로 수집하였으나, 많은 권수가 유실되어 문집 전체 중 절반도 수집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간행하지 않으면 완전히 없어질까 염려하여, 잔권(殘卷) 무신본을 바탕으로 하여 편차를 만들고 또 다른 문헌에 실려 있는 서거정의 글을 모아 보유(補遺)로 붙여 간행한 것이 을유본이다.
을유본은 무신본의 잔권을 그대로 복각하였다. 그러므로 시집의 경우는 중간 중간에 많은 권수가 빠져 있지만 체제는 무신본과 동일하고, 문집의 경우는 당시까지 남아 있었던 것이 기문과 서문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것을 따로 권1에서 권6까지 새로 편집하였다. 그러나 이것 역시 무신본을 복각했을 가능성이 많다. 을유본은 현재 규장각(奎章閣)과 국립중앙도서관(國立中央圖書館)에 각각 한 질씩 소장되어 있는 희귀본이다.
무신본 중 누락되지 않고 을유본에 남아 있는 것은, 시집의 경우 권1ㆍ권2ㆍ권3ㆍ권4ㆍ권5ㆍ권7ㆍ권8ㆍ권9ㆍ권10ㆍ권12ㆍ권13ㆍ권14ㆍ권20ㆍ권21ㆍ권22ㆍ권28ㆍ권29ㆍ권30ㆍ권31ㆍ권44ㆍ권45ㆍ권46ㆍ권50ㆍ권51ㆍ권52이다. 시집 보유 권1ㆍ권2ㆍ권3은 여러 문헌에 흩어져 있는 것을 모은 것이다. 따라서 이들을 다 합쳐도 총 28권밖에 되지 않으므로, 무신본에 비하면 반 정도가 없어진 셈이 된다.
시집 보유 권1에는 《동문선(東文選)》에 실린 시와 《정미수고(丁未手稿)》를, 권2에는 《황화집(皇華集)》과 습유(拾遺)를, 권3에는 《신찬동국여지승람》 등에 실린 누대ㆍ정자 또는 명승지에 제영한 시를 모아 싣고 있다.
문집의 경우는 기문 3권과 서문 3권 등 총 6권이니, 무신본의 20여 권에 비하면 3분의 2 이상이 없어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보유 2권을 붙임으로써 누락의 정도를 줄였다. 보유 2권은 각종 문헌과 금석문 등 당시에 수집할 수 있는 것을 모두 모아 편집한 것이다. 권1에는 비지류(碑誌類) 9편을, 권2에는 각종 문헌에 실린 8편의 글을 싣고 있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영인하여 출판한 한국문집총간 10집과 11집에 실려 있는 《사가집》은 바로 을유본을 저본으로 한 것이다.
기사본(己巳本)은 1929년에 서광전(徐光前) 등이 간행한 목활자본이다. 이 본은 을유본 30여 권을 그대로 간행하지 않고, 분량면에서 반 이상 줄여 15권으로 만들었다. 15권의 내용은 시집 8권과 문집 6권 그리고 부록 1권이다. 이에 따라 문집 6권은 그대로 남았지만, 시집의 경우 을유본의 28권 분량의 6000여 수에 달하던 것이 8권 분량의 2000여 수로 대폭 삭감되었다. 시집의 편차도 질서정연하였던 을유본과는 달리 일정한 기준이 없이 뒤섞여 있다. 문집도 6권만 싣고 을유본의 문집 보유 2권은 삭제해 버렸다. 게다가 오탈자가 매우 많아 선본이 되지 못한다. 이처럼 을유본에 엄연히 있었던 작품을 대거 삭제하였을 뿐만 아니라, 많은 오탈자를 양산하면서 무리하게 기사본을 간행한 데는 당시의 상업적 목적 등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을유본에 없었던 시가 기사본에 실린 경우가 있으니, 그 점은 크게 다행한 일이라 하겠다. 이 본은 현재 오성사(旿晟社)에서 영인한 《서사가전집(徐四佳全集)》에 실려 있다. 이상의 논의를 정리하여 각 판본에 실려 있는 작품 수를 도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다만 각 판본 간에 중복되는 것은 작품 수에서 뺐다.
구분 | 시(詩) | 문(文) | 비고 |
을유본 원집(原集) | 3073제 4874수 | 127편 | 한국문집총간 10ㆍ11집 |
을유본 보유(補遺) | 388제 535수 | 17편 | 한국문집총간 11집 |
무신본(권40ㆍ41ㆍ42) | 278제 458수 | | 이병주(李丙疇) 박사 소장 |
기사본(권1ㆍ6ㆍ7) | 446제 699수 | | 서사가전집(오성사) |
총합계 | 4185제 6566수 | 144편 | |
한국고전번역원 서거정 사가집 해제에서 가져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