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산 그리고 갓뎀산
이름에 관한 이야기꺼리가 많은 산, 함안의 진산, 여항산 (艅航山)
한국전쟁 워커라인, 낙동강방어선 마산수호전투와 갓뎀산 (Goddamn Mt.)
여러 산꾼들이 그렇다고 주장하여, 여항산을 낙남정간의 백미(百美, 白美), 즉 풍광이 가장 빼어난 산으로 산악잡지 등에 소개되고 있지요. 그리고 자고이래로 이 산은 많은 이야기꺼리가 남아 있고 전설로 되었습니다.
1.
여항산 정상의 큰 바위가 갓처럼 보여 갓데미산, 전체적으로는 산은 갓을 쓴 사람이 요강에 오줌을 누는 형상이라 ‘요강산’이라고도 했기도. 산 동쪽 아래에 형성된 봉성 저수지가 오줌을 눈 흔적이라 전해집니다.
2.
우리나라의 지형은 대체로 북고남저, 동고서저의 형태로 물길도 남향이나, 서향이 일반적입니다. 전통적인 유교방식 사고에 의하면, 이 일반화를 벗어나면 좋지 아니하는 것으로 보기도 하였지요. 이점에서 남쪽에 있는 여항산이 분수령이 되어 여러 하천들이 북쪽으로 흐르는, 함안, 옛 咸州(함안)는, 逆水之地에 위치하여 조선시대에 풍수를 중시하는 일부 학자들은 길지라고 여기지 아니하였습니다.
이 약점에 대한 비보책으로, 갓을 쓴 것 같다하여, 예부터 이름으로 전해 내려 온, 높이 770m의 갓데미산을, 艅航山(배가 다니는 산)이라 명명하여, 해발고도를 해수면인 0m로 낮추었다고들 합니다.
3.
오랜 옛날 천지사방이 물에 잠겼을 때 이 산의 꼭대기만 배만큼 남았다고 합니다. 옛날 천지가 개벽할 때 물이 산꼭대기까지 차올라 정상에 각(곽) 하나를 놓을 자리만큼만 남았다는 데서 ‘각데미산 (곽데미산)’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산 정상에 오르면 20~30명이 앉을 수 있는 넓고 큰 마당 바위, 곽바위가 있으며, 마당 바위에서 남쪽에는 상여 바위, 북쪽으로 조금 지나면 배넘기 도랑이 나오는데 노아의 홍수 때 배가 넘나들었다는 짜집기 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산 이름을 여항산(艅航山)이라 했다는 것 입니다. 실제로 여항산 정상은 길죽한 암릉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모습이 배의 형상을 닮았습니다.
4.
방호산과 킨(철모 손에 든) 소장
1950년 한국전쟁 초기에 낙동강최후방어선, 워커라인에서 칠곡지역 다부동전투에 가려서 함안지역 마산방어전투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연합군 수뇌부는 일본 본토에서 경북 상주지역에 갓 배치된 미국육군정예 제25사단을 1950년 8월 1일 마산까지 130km 거리를 하루 만에 이동시켰습니다. 육군 참모총장을 역임하고 육해공군 총사령관으로 전투를 지휘하던 채병덕 장군을 하동에서 전사시킨, 만주 팔로군 출신으로 구성된 북한 제6기동사단이 진주를 점령한 후. 부산까지 80km에 불과한 마산으로 침공하려 하자 마산을 치키기 위한, 미8군사령관, 워커장군의 결단이었습니다, 이로서 8월 2일부터 마산을 방어하고, 지척인 진해해군기지를 지키고자, 당시 창원 삼진과 함안에서 치열한 혈전이 개시되었습니다.
1950년 여름 낙동강방어선, 워커라인의 최남단 전선이였던 함안과 마산 주변에서는 킨 소장의 미군 제25사단 일부 + 대한민국 해병대 김성은부대와 방호산의 북한군 정예 제6사단 간에 치열한 공방전이 있었습니다. '마산지구전투'라고도. 여항산의 주변 지형이 싸움터로는 미군에 더 악조건이고, 희생이 막심해 이 산을 갓댐산 (Goddamn Mt.)이라 저주했다고 합니다, 만주 팔로군 출신으로 구성된 인민해방군 주력 방호산 부대는 함안과 삼인을 돌파하여 마산을 점령하려 했습니다. 반면에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고, 당시 일본 혼슈에 주둔하던 윌리엄 킨 장군의 노련한 미육군 25사단은 여항산과 그 주변에서 적의 진격을 필사적으로 막았습니다.
1950년 8월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피난 가는 함안인, 그리고 함안역에서 마산행 기차를 기다리는 함안군 피난민. 표지판(산인 - 함안(咸安) - 군북)
워커라인, 낙동강방어선 최남단전선 이였던 함안과 마산 주변에서는 미군 제25사단 일부 + 대한민국 해병대와 북한군 정예 제6사단 간에 치열한 싸움이 있었다, 초기에는 가야면을 제외한 함안군 전 지역이 인민해방군에 의해 장악되었다. 마산으로 철수 할 수 있는 산인면의 철길과 도로도 막혔다. 당시 함안 가야면에는 호남지역에서 철수 후퇴한 경찰들과 함안지역 청년들이 포위되어 고립되어 있었다. 미국공군은 가야를 제외한 함안 전 지역을 산발적으로 폭격했고 군청사가 있던 함안면 봉성리 일대도 폐허가 되었다. 전후 한국전쟁 정리과정에서 군민들의 생활기반이 그대로 온전하게 남아 있던 가야면으로 군청을 자연스럽게 옮겼다.
미군들이 갓댐산 (Goddamn Mt.)이라 저주했던 여항산(갓데미산) 전투는 1950년 여름 여러 낙동강방어선 전투 중 가장 치열 했고 미군의 피해도 막심했다. 1950년 8월 2일부터 9월 14일까지 이 마산방어전에서 피아간에 5000여명이 전사하는 등 그야말로 血戰이였다. 또 엄청난 양의 포탄이 오고갔던, 피아간에 치열한 포격전 와중에, 발생한 불발탄 , 터지지 않았던 수류탄, 미사용 탄환 등이 함안에 널려 있어서, 호기심이 많은 친구들이나, 탄피를 팔아 먹거리를 마련하려는 아이들이 다치는 사건 사고도, 우리들이 어린 시절, 더러 있었다. 어른들이나, 관공서에서 아무리 조심하라고 해도 소용이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국군과 미군은 마산과 돌파하고 이를 통해 부산을 점령하려는 북한군의 45일간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북한군은 미군의 적극적인 방어에 밀려서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북한군 6사단과 증파된 7사단은 수천 명의 사상자와 포로 3천여 명 남기는 등의 큰 피해를 입었다. 미군의 피해도 컸다. 전력이 감소된 미 육군 25사단 제29연대는 임무 재편성 과정에서 해체 되고, 1천여 명의 전사자와 3천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고 20명이 실종 되었다.
한국 6.25 전쟁 당시 북한 공산군과의 치열했던 전투로 수많은 사상자들이 발생했던 경남 함안의 여항산 격전지를 미군들은 갓뎀 마운틴이라 불렀다. 미군에 의해 그곳을 지칭했던 갓뎀이라는 단어는 한국군 병사들과 주민들에게는 갓데미로 발음되어 갓데미 산이라는 별명으로 일컬어진다. 그것은 후일 베트남전 당시 북베트남 군대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은 미군 부대가 아군의 방어 진지를 필사적으로 사수하기 위해 처절하게 분전했던 고지에 피아간의 사체가 처절하고도 즐비하게 널려 있었던 것을 비유하여 지칭했던 '햄버거 힐'과 같은 의미가 내포된 단어였다.
한국 6.25 전쟁 당시 경남 함안 여항산 일대는 최대의 격전지로 꼽을 만큼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이었다. 1950년 8월 들어 북한 인민군 6사단은 주공격 대상인 마산을 에워싸고 파상공세를 폈다. 이에 맞서 8월 14일 미 제25사단은 가야 서북쪽에 있는 십이당산에서 부터 서쪽으로 여항산· 필봉· 서북산· 야우산· 옥녀봉을 잇는 능선에다 진지를 구축하고 반격에 나섰다. 이 고지들은 마산을 사수하는 최후의 방어선이기도 했다.
25사단 24연대는 검안리 남쪽에서 서북산 북쪽의 험준한 산악지대를 점유했다. 북한 인민군 6사단은 두 차례에 걸친 전투 끝에 수많은 전사자와 군수품 손실로 치명타를 입고 말았다. 그로 인해 강제로 징집한 2000명에 이르는 의용군을 긴급히 보충했다. 그러나 장비가 태부족이었던지라 전사자가 발생하면 그 총을 회수해 전선에 투입하는데 급급했다. 이 때 어느 의용군의 일기에서는 ‘UN군의 포격과 공중공격은 몸서리치도록 무섭고 제대로 먹지 못하면서 견디어야할 이 고난 … 몇 고개를 더 넘어야 마산인가·’라고 생사에 갈림길인 극한상황에 놓인 처지를 적어 놓았다.
미군 또한 험준한 서북산과 여항산 탈취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여항산 정상은 바로 전투 관측과 전방을 이용하기에 적합한 고지였다. 특히 8월 15일 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은 명령 제82호를 하달했다. 그 중 한 대목을 보면 사기를 진작시키는 내용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 유엔군 및 국방군에게 숨 돌릴 사이를 주지 말고 새로운 방어선에서 진지를 구축할 여유를 주지 말라! 전력을 다해서 적을 혼란 상태로 몰아넣어 그들의 저항력을 격멸하고 그들의 장비를 파괴하라! 유엔군 및 국방군에게 결정적이고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라! … ’고 독전했다. 이에 힘입어서인지 18일 밤 방호산 부대는 대대적인 집중 공격으로 나왔다. 3일간의 혈전으로 미군은 작전상 후퇴까지 했다. 무려 19회나 뺏고 뺏기는 백병전을 벌였다. 1950년 9월 중순까지 이어진 산악전으로 인해 피아간 손실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방호산 부대 13·14연대장이 전사할 정도로 여항산 능선은 시산혈해(屍山血海)로 신음하고 있었다. 이 통한의 고지를 가리켜 미군 병사들은 ‘전투산(Mountain of battle)’· ‘네이팜산’·또는 포격으로 초목이 없다 보니 ‘중머리산’으로 불렀다. 이보다 대부분의 병사들은 너무나 몸서리쳐지고 지긋지긋했던 나머지 신의 저주를 받으라는 뜻으로 ‘갓 뎀(God deme, Goddamn Mt.)’산이라고 내뱉기 일쑤였다. 이 말이 갓데미로 변해 널리 통용되다 보니 오늘날까지 여항산의 별칭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특기할 것은 정찰기를 통해 적진에 매일같이 살포되는 전단의 효과가 나타난 곳도 여항산 전투였다. 온 산야에 하얗게 뒤덮인 전단에는 ‘자유를 찾아 자수하라!’ ‘ 추석은 오는데 고향은 멀고멀다.’ ‘ 애끓는 부모의 마음 - 너는 죽었느냐 살았느냐·’는 등 호소력 있는 글로 채워져 있었다. 한국 6.25 전쟁에서 심리전이 효과적인 전쟁무기로 그 진가를 발휘한 곳도 여항산 일대가 최초였다. 전단 살포는 바로 네이팜탄에 못지않은 ‘종이폭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방호산(方虎山, 1916년 ~ 몰년미상)은 공산주의 항일운동가이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군인이다. 연안파로 분류된다. 1916년 함경북도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이천부(李天夫)이다. 중국에서 항일운동을 벌이다 1937년 모스크바 식민지 반식민지 이익연구학원(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다녔다.
1939년 연안으로 온 뒤 1940년 항일군정대학 동북간부훈련반에서 수료하고 중국공산당 팔로군 일선부대에 파견되어 조선반에서 조선해방문제를 연구하고 1945년 2월 연안에서 정식으로 개교한 조선혁명군정학교의 제1구대 협리원이 되었다. 1945년 11월 중국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동북지방으로 이동하여 동북조선의용군 제1지대 정치위원으로 남만주 일대에서 군대 증강과 조선인 보호 등에 활동하였다. 1945년부터 1948년까지의 중국공산당의 반국민당 전투에 참전하였다.
1949년 7월 조선인들이 절대 다수인 중국 인민해방군 제166사단 사단장으로서 부대를 이끌고 입북하였다. 동 부대를 제6사단으로 개편하고, 초대 사단장이 되었다. 한국 전쟁 당시에는 제6사단을 이끌고 김포반도를 통해 제일 먼저 한강을 도하하였으며 충남과 호남 일대를 점령하고 진주, 마산까지 진출하는 등 전공으로 제6사단은 근위사단의 칭호를 수여받았다. 당시 워커 장군이 “북한군 제6사단의 기동은 이제까지의 한국전쟁을 통해 가장 훌륭한 기동이었다”고 극찬하였으며 1950년 10월에는 제5군단장에 임명되어 동부전선 전투를 지휘하였다. 1956년 6월 영웅칭호를 받았다.
1958년 8월 인민군 제5군단장, 육군대학 총장을 역임하였다. 1959년 연안계가 기도한 반당·반정부 활동을 했다는 8월 종파 사건에 연루되어 숙청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