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습니다.—베드로 후서 1:19. 오늘날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어떻게 성경 예언을 성취시키고 있는지에 관심을 갖는 것은 적절합니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는 우리가 사탄의 제도의 끝이 가깝다는 것을 깨닫게 도와주는 여러 사건들을 언급하셨습니다. (마태 24:3-14) 사도 베드로도 강한 믿음을 유지할 수 있도록 예언의 성취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권했습니다. (베드로 후서 1:20, 21) 그의 말은 성경 예언을 살펴볼 때 균형 잡힌 태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베드로는 우리에게 ‘여호와의 날을 가깝게 여기라’고 권합니다. (베드로 후서 3:11-13)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여호와께서 아마겟돈을 가져오실 ‘날과 시간’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아 있는 시간 동안 우리의 “행실을 거룩하게 하고 경건한 정성을 행동으로 나타내”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마태 24:36; 누가 12:40) 우리는 올바른 행실을 유지하고 그분에 대한 깊은 사랑에서 우러나와 그분을 섬기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자신의 영적 상태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파23.02」 16면 4, 6항 |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습니다. We have also a more sure word of prophecy; whereunto ye do well that ye take heed, as unto a light that shineth in a dark place, until the day dawn, and the day star arise in your hearts: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베드로 후서 1:19. Barnes' Notes on the Bible We have also a more sure word of prophecy - That is, a prophecy pertaining to the coming of the Lord Jesus; for that is the point under discussion. There has been considerable diversity of opinion in regard to the meaning of this passage. Some have supposed that the apostle, when he says, "a more sure word," did not intend to make any comparison between the miracle of the transfiguration and prophecy, but that he meant to say merely that the word of prophecy was very sure, and could certainly be relied on. Others have supposed that the meaning is, that the prophecies which foretold his coming into the world having been confirmed by the fact of his advent, are rendered more sure and undoubted than when they were uttered, and may now be confidently appealed to. So Rosenmuller, Benson, Macknight, Clarke, Wetstein, and Grotius. Luther renders it, "we have a firm prophetic word;" omitting the comparison. Whereunto ye do well that ye take heed - They are worthy of your study, of your close and careful investigation. There is perhaps no study more worthy of the attention of Christians than that of the prophecies. As unto a light that shineth in a dark place - That is, the prophecies resemble a candle, lamp, or torch, in a dark room, or in an obscure road at night. They make objects distinct which were before unseen; they enable us to behold many things which would be otherwise invisible. The object of the apostle in this representation seems to have been, to state that the prophecies do not give a perfect light, or that they do not remove all obscurity, but that they shed some light on objects which would otherwise be entirely dark, and that the light which they furnished was so valuable that we ought by all means to endeavor to avail ourselves of it. Until the day shall dawn, and we shall see objects by the clear light of the sun, they are to be our guide. A lamp is of great value in a dark night, though it may not disclose objects so clearly as the light of the sun. But it may be a safe and sure guide; and a man who has to travel in dark and dangerous places, does well to "take heed" to his lamp. 반스의 성경 주석 우리는 또한 더 확실한 예언의 말씀 - 즉 주 예수의 재림에 관한 예언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논의 중인 요점입니다. 이 구절의 의미에 관해서는 상당히 다양한 의견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도가 "더 확실한 말씀"이라고 말할 때 변형의 기적과 예언을 비교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단지 예언의 말씀이 매우 확실하고 확실히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의도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 뜻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것을 예언한 예언이 예수님 강림의 사실로 확인되었으므로, 그 예언이 발화되었을 때보다 더 확실하고 의심의 여지가 없게 되었으며 이제 자신 있게 호소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라고 생각했습니다. 로젠뮐러, 벤슨, 맥나이트, 클라크, 웨트슈타인, 그로티우스가 그러합니다. 루터는 비교를 생략하고 "우리에게 확고한 예언의 말씀이 있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주의하는 것이 잘하는 것이니 - 그것들은 너희가 연구하고 면밀하고 신중하게 조사할 가치가 있습니다. 예언서만큼 기독교인들이 관심을 기울일 만한 학문은 없을 것입니다. 어두운 곳에서 비추는 빛과 같이 - 즉, 예언은 어두운 방이나 밤의 어두운 길에서 촛불, 램프 또는 횃불과 비슷합니다. 그것들은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사물을 뚜렷하게 만들고, 다른 방법으로는 보이지 않던 많은 것들을 볼 수 있게 해줍니다. 이 표현에서 사도의 목적은 예언이 완전한 빛을 주거나 모든 모호함을 제거하지는 않지만, 그렇지 않으면 완전히 어두웠을 사물에 약간의 빛을 비추고, 그들이 제공한 빛은 매우 귀중하므로 우리는 반드시 그것을 이용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날이 밝아 태양의 맑은 빛으로 사물을 볼 수 있을 때까지 전등은 우리의 길잡이가 되어야 합니다. 어두운 밤에 등불은 태양의 빛만큼 사물을 선명하게 드러내지는 못하지만 큰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안전하고 확실한 안내자가 될 수 있습니다. 어둡고 위험한 곳을 여행해야 하는 사람은 램프를 "주의"하는 것이 좋습니다. |
사도는 먼저 개인이 예언을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음을 말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1세기의 그리스도인은 그 누구도 구약 성경의 예언을 해석하지 않았다. 다만 그것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 것인지 주의하면서 기대하였다. 그런데 오늘날 워치타워 법인은 성경의 예언을 난도질하여 마구잡이로 해석하고 그 해석이 틀리면 변경하는 짓을 되풀이하였다. 예언을 해석하지 마라는 것은 그 예언이 성취되고서야 비로소 그것의 확실성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워치타워 법인은 이 사도 베드로의 말을 무시하고 이미 성경의 예언을 추측하여 얼마 있지 않아 인류 역사상 최대의 전쟁이 그들을 대적하여 일어날 것으로 해석하고서는 그 해석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에 대해 세계 정세를 살피는 것이 곧 베드로가 '주의하라'고 한 의미라고 해설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하라'고 한 것은 기대감을 가지고 노력하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예언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루어지도록 만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복음이 지니는 최대 예언은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이다. 그러므로 사도의 말씀은 이러한 예언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 세계 정세를 살피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 그 예언이 이루어지기 위해 일조할 수 있는 생활방식에 주의하라는 것이다.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개눈에는 X만 보인다'는 속담이 있다.' 이는 그의 마음 속에 무엇이 있느냐에 따라서 외부 사물의 관념이 다르게 보인다는 뜻이다. 워치타워 법인은 시한부 종말론을 펼치다 보니 모든 세계 정세가 그와 맞추어 해석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가 경계시킨,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라'는 말씀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워치타워 법인은 예언의 사사로운 해석을 중지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라는 예언에 주의하며 우리가 어떻게 해야 그 예언이 이루어질까에 '주의'해야 하는 것이다. |
질문:
1. 예언에 주의하라는 것은 세계 정세를 살피라는 뜻인가?
2. 예언의 성취를 위해 무엇에 주의해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