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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실에 '낚여버린' 교과서와 수업. 현실 속 아이들의 '일리있는' 질문들에 궁색한 답변만 주절주절 늘어놓다가 진도도 못 나간 채 수업 한 시간이 흘러버렸습니다. |
ⓒ 서부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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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3학년 사회 수업 시간. 교사별 수업 시수를 배려해 교과서 내용을 단원별로 쪼개어 가르치려다보니, 늦어도 1학기 말에는 끝났어야 할 '시장 경제의 이해' 단원을 이제야 다루게 되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최근 미국발 금융 위기가 전 세계를 강타하면서, 연일 신문과 방송에 오르내리다보니 여느 때와는 달리 수업 중 하품하는 아이들이 거의 없을 만큼 관심이 높습니다.
수업 시간 머리가 굵은 한 아이가 그럴듯한 질문을 하나 던지면 봇물 터지듯 맞장구치는 통에 진도를 나가는 데에 애를 먹곤 하는데, 바로 오늘이 그랬습니다. 오늘의 수업 단원은 '시장 경제 체제의 제도적 원칙'이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과 북한 사회주의 헌법에 실린 경제 체제 관련 조항을 비교해 살펴보고, 시장 경제 체제가 원활하게 작동되기 위해서는 사유 재산권과 사적 이익 추구가 보장되어야 하며, 경제 행위에 대한 개인의 의사 결정이 자유롭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아이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단원입니다.
사실 '시장 경제의 이해'라는 대단원의 전체적인 맥락은, 다양한 경제의 주체들이 시장에 참여하고 사적 이익 추구를 위해 자신의 창의성을 최대한 발휘하게 하는 시장 경제야말로 다른 어떠한 체제보다도 우월하다는 것입니다. 공산주의 계획 경제 체제가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한계와 모순을 보여줌과 동시에 시장 경제 체제의 허점과 보완책을 다루고 있는 단원입니다.
자신의 선택에 따른 결과, 스스로 책임지라며?
시장 경제 체제의 제도적 원칙 중 '경제 활동의 자유'에 대해 설명할 차례. 이것은 시장 경제 체제의 가장 중요한 원칙이며, 그 자유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가능하고, 자신의 선택에 따른 결과에 대해서는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교과서 구절을 또박또박 읽어 내려갔습니다.
시장 경제를 축구와 같은 게임에 비유하며 시장에서의 규칙을 어기면 시장에서 퇴출되고 사회적 제재가 주어진다며, 그것이 정부의 책임이자 역할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언뜻 지루하고 딱딱할 수밖에 없는 이 수업에 한 아이가 불을 댕긴 건 바로 이때였습니다.
"TV를 보니까 건설회사와 은행들을 살려야 한다며 정부가 그들에게 세금을 쏟아 붓는다고 하던데요. 한두 푼도 아니고 9조 원이 넘는다면서요? 그럼 한 사람 당 얼마씩의 세금인가요? 대체 그들의 잘못을 왜 국민의 세금으로 메워야 하죠?"
"그건 그러한 기업이 무너졌을 때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엄청나기 때문이겠지."
'교과서적으로' 답한 것이지만, 저조차 제 말에 수긍이 가지 않는, 궁색한 답변이었습니다. 그 순간 혹시 제 답변에 '토'를 다는 질문이 쏟아지면 어쩌나 싶어 긴장이 되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손도 들지 않은 채 제 답변에 대한 '불만'이 질문으로, 또한 짝꿍끼리의 토론으로 번져 교실은 이내 술렁거렸습니다.
"규칙에 살고, 반칙에 죽는다면서요? 심판이 벌을 주기는커녕 왜 반칙한 사람들을 도와주나요? 이건 교과서에 적힌 내용과 완전히 다르잖아요?"
"나중에 벌을 주더라도 우선은 살리고 봐야한다는 생각이겠지. 우리 경제에 대한 충격을 최소화시키기 위한, 정부의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볼 수도 있지 않겠니. 예외 없는 규칙은 없다잖니."
제가 내놓은 답변을 모두 주워 담고 싶을 정도로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차라리 이 단원 수업을 모른 채하고 건너뛰어 버렸으면 더 나았겠다 싶기도 했습니다. 기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른바 금융이 이끄는 자본주의가 제조업 중심의 산업구조에 뒤이은 선진 시스템이라는, 불과 며칠 전까지의 '경제 상식'이 교과서에 그대로 반영돼 있기 때문입니다. 뭐라 답변할 수 없는 아이들의 날선 공세가 이어졌습니다.
"남이 시킨 것도 아니고 자기들 돈 벌자고 아파트 잔뜩 지었고, 은행 같은 데는 이자 벌려고 돈을 마구 빌려줬으면서 이제 와 손해 본 걸 왜 세금으로 메워달라고 하느냐구요?"
"그렇다면 대체 그들이 책임지는 건 뭐죠? 그냥 이럴 줄 몰랐다며 고개 한 번 숙이고 손 벌리면 다인가요?"
놀 만한 '호기'를 맞은 터라, 무슨 내용의 수업을 하든 시큰둥해 하는 아이들조차 가세해서 더 이상 진도를 나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다 못한 질문과 답변은 수업 후 홈페이지 게시판 등을 통해 계속하자며 두루뭉수리 넘어가려던 찰나, 그동안 교실 뒤편에서 무심한 표정으로 듣고만 있던 한 아이가 마지막 질문 하나 해도 되겠냐며 번쩍 손을 들었습니다.
"도둑이 돼도 큰도둑이 돼야지 좀도둑은 고달프대"
"선생님, 우리 집은 치킨도 팔고, 맥주도 파는 조그만 가게입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안 그랬는데, 올 들어 엄마, 아빠가 많이 힘들어하는 표정이더니만, 얼마 전에 문을 닫게 됐습니다. 저와 동생에게는 잠깐 쉬고 있을 뿐이라며 어깨를 토닥거려주시지만, 경기가 나빠 망한 거라는 걸 잘 압니다. 아빠 퇴직금으로 어렵사리 가게를 냈고, 엄마, 아빠는 밤낮으로 고생을 했지만, 주변에 치킨집이 마구잡이로 늘어나면서 결국 경쟁에서 진 거죠."
"공부도 잘 못 하고, 경제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지만,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건설사든 치킨집이든 다 마찬가지 아닌가요? 한쪽은 위기라며 국가가 나서서 도와주고, 다른 한쪽은 길거리에 당장 나앉게 돼도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나 몰라라 하고. 엄마, 아빤 모두 당신들 이 업종을 잘못 선택한 탓이라고 할 뿐 국가를 원망한 적은 없지만, 너무 속상해요."
"○○야, 힘내. 우리 아빠가 그러는데, 우리나라는 원래 그런 곳이래. 도둑이 돼도 큰 도둑이 되어야지, 좀도둑이 되면 고달프대. 그리고, 가끔 술을 드시고 오는 날이면 로또를 손에 쥐고 이런 말씀도 하시는데, 바로 '인생은 한 방이래'."
화들짝 놀랐습니다. 아이들의 불공평한 세상을 향한 분노의 외침이 어찌 해볼 수 없다는 좌절감으로, 세상을 향한 막무가내의 복수심으로 변질돼 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기성세대로부터 시나브로 전이되었을, 이러한 아이들의 우리 사회에 대한 분노와 불신은 어쩌면 지금 우리의 경제 상황보다도 훨씬 더 심각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이들과 함께 '놀았던' 한 시간의 수업을 마치고 교실을 나오면서 손에 든 교과서를 물끄러미 쳐다보았습니다. 명색이 아이들을 올바르게 이끌 지침서인데, 오로지 '수험용'일 뿐 현실 속 그들은 이미 교과서를 조롱하고 있었습니다. 교과서를 만지작거리며 벌써부터 다음 수업이 걱정되기 시작했습니다. |
첫댓글 아이들마저도 좌절감에서 허우적대며 허탈감만을 안겨주는 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