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2·12사건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이었던 장태완(78) 장군은 사건을 주도한 신군부 세력에 맞섰다가 강제전역당했다. 2008년 폐암으로 폐의 3분의 1을 절제하는 수술을 받고 지금은 쿠데타 관련 서적을 출간 준비중이다. 월간조선 1월호가 장태완 전 사령관을 만났다.
그는 ‘12·12 사건’ 대신 ‘12·12 군사반란’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러면서 그 원인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5·16으로 힘을 키운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하나회’ 등 사조직을 키운 데 있다고 했다.
“하나회 회원들은 군 인사법을 무시하고 새로 만든 ‘육군인사규정’에 따라 초법적 특별 진급을 했습니다. 5년 후배인 전두환이 내가 준장 진급을 한 지 2년만에 준장이 됐지요. 내가 26사단장이 됐을 때는 이미 나보다 상격(上格)인 보안사령관이 됐더군요.”
그는 당시 계엄사령관이었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하게 해달라고 결재를 요청하는 신군부 세력에게 최규하 대통령이 불호령을 내리지 못한 것은 국가원수로서의 ‘직무유기’라고 했다.
"최규하 대통령이 계엄사령관 정승화를 대통령의 사전 재가 없이 무력으로 납치한 사실을 알았다면, 전두환 보안사령관 등이 정승화 총장을 연행하게 해달라고 사후 결재를 강요할 때 불호령을 내렸어야 합니다. 무엇이 두려운지 도피한 국방장관만 찾으면서 반란을 초동에 진압할 기회를 놓쳤습니다. 이것은 직무유기입니다."
쿠데타 진압에 실패한 장 장군은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끌려갔다. 1980년 2월에는 조사를 받고 있던 분실장실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장 장군을 찾아왔다. “집에 가셔서 6개월쯤 쉬고 계시면 일자리를 마련해 주겠다”는 말에 “패장(敗將)을 죽이지 않고 집에 보내준다니 나가야지!”하고 감방으로 돌아와 30년 군 생활을 마감하는 예편서를 썼다.
그 해 3월 출감한 그는 봉천동 자택에 특수수사대 요원 2명이 상주하는 사실상 가택연금을 당했다. 장 장군뿐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불행이 계속됐다. 부친은 “나라에 모반이 있을 때 충신은 모반자들에 의해 살아남을 수 없는 일”이라며 식음을 끊고 별세했다.
1982년에는 외아들 성호(당시 20세)씨가 행방불명됐다. 서울대 자연대에 입학해 그 해 자연대 수석을 차지했던 성호씨는 평소처럼 ‘아버지,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대문을 나선 지 한 달 만에 낙동강 근처 산기슭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장 장군은 스스로 “수도경비사령관의 책무를 완수하지 못한 죄인”이라고 말한다. 그는 “12·12사건의 전말에 대해서는 얘기하고 싶지 않다”면서도 “쿠데타로 강제 예편당한 군인들의 명예회복이 필요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