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에 칼바람이 불어제끼는 추운 이맘때가 되면 길가에 보잘것 없는 돌맹이처럼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모진 삶을 살았던 부끄러운 지난날 그 유년의 생채기가 올해도 어김없이 흑백필림으로 되감겨 옵니다. 그것은 꿈속에서 마저 아무리 날개짓 해도 상처입고 날지 못하는 연약한 한마리 어린 새였습니다. 1959년 대구에서 제가 태어날 당시만 하더라도 다들, 꽁보리밥만 먹어도 감지덕지 했었고 그나마 하루 세끼를 다 못 먹고 살았다고 합니다. 곤궁했던 그 시절, 우리집은 비교적 부유해서 이웃들은 부러워했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아버지는 당시로는 아주 전문직이었던 지금으로 말하자면 개인택시 사업자였답니다. 신기한 것은 당시에는 개인택시에 조수까지 있었다고 하데요. 아버지는 인심도 후해서 짬나는 데로 동네사람들을 돌아가며 한번씩 차를 태워 주고 했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술을 너무 좋아하셔서 거의 매일 일 마치고 나면 찝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 오실 때는 차에서 내리면 몸도 못 가눌 정도로 술을 마셨답니다. 그 시절에는 음주운전을 단속하는 법이 없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당시 좁은 대구 바닥에 얼마나 소문이 많이 났으면 경찰서 직원까지 '술이 너무 과했으니 오늘은 차를 두고 가라'고 사정 할 정도였답니다. 그러나, 그러던 어느날 아버지는 언제나 그랬듯이 술에 만취되어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그만 사람을 치어서 사망사고를 일으키고 말았답니다. 그 여파로 운전면허는 취소되고 찝차도 팔고 집까지 팔아서 합의금을 지불했답니다. 그전까지 편하고 안락한 삶을 살았던 저희집은 갑자기 어려워졌고 그에 적응하지 못한 탓인지 어머니는 아버지가 교도소에 갇혀 있는 와중에 사기 노름에 빠져 그나마 남은 재산을 탕진하고 노름빛 마저 감당하지 못해 우리 형제를 남겨 두고 집을 나갔답니다. 이제 겨우 세 살이였던 저는 얼마간 친척집에 맡겨졌다가 일년후, 아버지가 출소하시고 얼마후에 재혼을 하셔서 형과 함께 새어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여기 까지는 집안 어른들의 구술에 의한 것이고 이후는 제 기억에 의한 것입니다 새어머니에게 구박 당하기 시작된 기억은 이복여동생이 태어나던 그해, 제가 초등학교 입학하던 이른 봄이였습니다. 뭔지 이유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하루 걸러 새어머니에게 매를 맞았고 저는 세 살 터울의 형의 손에 이끌려 수시로 가출해서 걸식으로 연명하다가 파출소에 인계되어서 아버지 손에 다시 집으로 이끌려 온 기억이 납니다. 그때가 초등학교 2학년이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이복남동생 막내가 태어났고 우리 형제는 더욱 더 찬밥신세가 되었습니다. 결국, 그해 겨울방학 얼마 앞두고 형은 다시 가출해서 영-영-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웃들은 저를 두고 불쌍하다며 새어머니 몰래 먹을 것을 갔다 주고한 기억도 나네요. 철이 들수록 저는 외로움이 쌓여만 갔습니다. 이복동생들과 새어머니는 숫가락 밥그릇을 함께 사용하면서도 제 것은 따로 정해졌습니다. 그 이유는 유독 저만 위생이 불결하다는 것이였습니다. 중학교 시절, 학교수업이 파하고 나면 집으로 돌아 가기가 싫어 하릴없이 본관 앞 잔디밭에 누워 이리저리 뒹굴다가 교정에 땅거미가 길게 드러누워서만 어쩔수 없이 집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아버지는 제게는 새어머니에 관한 이런저런 단 한 마디의 얘기도 한 적이 없었지만 이따끔 새어머니 몰래 신발 밑창에 돈을 넣어 뒀다고 귓속말을 하셨지요. 아버지는 한참을 끊었던 술을 언젠가 부터 다시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술에 취해서 밤늦게 골목에 들어서면 늘 애수의 소야곡을 흥얼거리며 집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때는 몰랐었지만 사십대 중반의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아버지도 힘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아버지는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 간경화로 돌아가시고 저는 곧바로 학업을 중단하고 집을 나와서 공사장 인부, 음식점배달원, 공장직공, 신문배달원, 노점상, 자동차학원 강사 영업용택시 기사 등,등, 숱한 직업을 전진한 그 와중에서도 군대도 갔다 오고 나이 서른이 다 되어서 방송통신고등학교에 편입해서 졸업을 해서 만학의 꿈도 이루었습니다. 지나고 보니 참으로 질기고 모진 삶을 살았던 것 같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서른 다섯의 늦은 나이에 지금의 아내를 만나서 아이 둘 낳고 다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마음씨 고운 아내가 십 수년 전에 돌아가신 새어머니 제사까지 맡기를 강력히 주장하여 아내와 결혼해서부터 새어머니 제사를 제가 모시고 있습니다. 그저 아내에게 고마울 따름이지요. 지금은 아내와 함께 치킨호프 가게를 하고 있는데, 요즘 불경기라서 그런지 다소 어려움이 있습니다만 지난날, 어둔 길을 힘들게 걸어갈 때, 늘, 저만치서 내가 가야 할 길을 밝혀준 가로등이 있었듯이 하루하루 최선을 다한다면 능히 오늘의 어려움을 극복하리라고 믿습니다. 지금 당장 어려움에 처해 있는 이들이 있다면 '힘 내십시요. 참고 기다린다면 이 어둠의 장막은 언젠가는 걷힐 것입니다.'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가난한 이웃들이 추위로 갈라지는 아픔을 여미는 겨울이 성큼 다가 섰습니다. 어려울 수록 사랑을 함께 나눠야겠지요? 내일에는 생각난 김에 한달에 한번씩 가는 보육원에 통닭 몇마리를 맛있게 튀겨서 사랑을 나누러 가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계십시요. . . . 이글은 MBC라디오 여성시대에서 스크랩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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