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레터 51/친구의 아들]여행, 독서 그리고 사색思索(생각)
나보다 한 살 많은 한동네 꾀복쟁이 친구는 참 복도 많다. 복이 많다고 한 까닭은 출가한 딸 셋에다 35살의 아들 그리고 2000년생, 우리 나이로 23살인 막내아들까지, 요즘말로 하면 ‘다둥이 아빠’이기 때문이다. 아들만 둘인 나로서는 딸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긴 있었다. 하지만 괜, 찮, 다. 단지, 호사다마好事多魔이라는 말처럼 아내를 몇 년 전 사별死別한 게 안타까운 일이지만, 인명재천人命在天인 것을 어이 하랴.
아무튼, 이 녀석을 보면 그냥 내 아들을 보는 것마냥 예쁘기만 하고 반갑다. 스물셋, “흐-미-” 얼마나 좋은 나이인가. 나는 그때 무엇을 했을까? 제 ‘앞길’을 척척 닦아놓은 게, 올해 국립인 ‘한국농수산대학’을 졸업했다(2019학번이란 학번도 있긴 있구나 싶다). 이제 ‘농업후계자’로 아버지의 직업을 물려받기만 하면 된다. 위에 누나와 형들은 모두 ‘에우살이’(결혼해 분가했다는 사투리인가, 방언인가?)를 했으니, 내 친구는 자식들에 대해 더 이상 크게 신경쓸 일도 없다. 큰손녀가 벌써 중학교 1학년이다. 친구의 슬하에 손자손녀가 다섯을 넘고, 모두 15명이 되니 말이다. 친구는 평생 하던 대로 복숭아농사 잘 지어 연매출 2억이상을 올리면 되고, 모를 심고 나락을 베는 논농사만 잘하면 될 일이다. 물론 무조건 건강해야 한다. 그래야 말년에 딸 셋이 보내주는 해외여행도 갈 것이 아닌가. 등 긁어줄‘옆지기’가 없다는 게 문제이지만, 그것만큼은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닌 것을 어이 하랴. 칠십도 안된 창창한 나이에 ‘일가一家’를 스스로의 힘으로 이룬 셈이다. 그러니 어찌 부럽지 않겠는가.
이 아들녀석과 올해 며칠 일을 같이 해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5월말 이앙기로 모를 심는데 사흘간 모판을 날라 이앙기에 옮겨주는 작업을 내내 했다.https://cafe.daum.net/jrsix/h8dk/1186 https://cafe.daum.net/jrsix/h8dk/1188 링크된 글에도 있지만 이 녀석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죽을 것같다”고 했을까. 이 벌판의 논에 손으로 모를 심었다는 게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도 했다. 나도 말했다. “나도 손으로 농사 짓는 과정과정을 모두 보고 겪어봤지만, 이런 세상이 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고, 옛날일들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맞짱구를 쳤다. 왕년에 수작업으로 모를 심을 때 못줄 잡아주는 사람이 짬날 때마다 노래를 불러 흥을 돋운 것처럼 나도 돼지 멱따는 소리로 온 들판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음치노래를 불러제켜 친구아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정태춘의 ‘황토강으로’나 ‘홀로 아리랑’ 등 10여곡은 어디에서나 즉석 부르는 놀라운 재주가 있다). 흐흐. 얼마 전에는 콤바인으로 나락을 베는데, 이 녀석이 톡톡히 한몫을 했다. 나락들을 농협에 물수매하는 것을 RPC(미곡종합처리장)라고 하는데, 신삥 트럭으로 실어다주는 일을 해준 것이다. 두 차례 수고를 했으니 특별 알바비라고 10만원을 현금으로 줬더니 “할만하다”며 몹시 기뻐했다.
최근 우리집에서 원두커피를 내려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시간이 있었다. ‘왜 농업을 선택했느냐?’부터 군대문제 등 제법 많은 얘기를 처음으로 나눴다. 나는 대뜸 아버지 직업인 농업agriculture을 선택한 것은 정말로 ‘탁월한 선택excellent choice’라고 한 후, 특유의 ‘꼰대 강연’을 했다. 너는 모르겠지만, 함석헌 선생님이라고 아주 훌륭하고 유명한 사상가가 있었는데, 그분이 나에게 “남자로서 태어나 해야 할 직업이 농업”이라는 말씀을 해준 적이 있었단다.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지만, 나의 말에 얼마나 수긍을 하고 감명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저 ‘내 흥’에 겨워 초보농사꾼의 ‘농사철학’을 얘기한 것으로 만족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날의 특강 요지만큼은 명기하고 싶다. 탁월한 선택을 했지만, 자신의 ‘개똥철학’이 없으면 곤란한다. 철학이 없으면 그저 흙 파 먹고 사는 농사꾼에 그치고 만다. 자신의 철학이 있어야 농사가 힘들지만 재밌고 ‘자기 앞의 생生’에 자신이 생기고 보람이 있다고 역설했다. 농사는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이기에 어떤 직업보다 몇 배 더 보람이 있지 않겠냐, 농번기農繁期에는 눈코뜰 새 없이 바쁘지만, 농한기農閑期라는 게 있지 않느냐(복숭아농사는 농한기도 거의 없지만)? 너는 100% 장학금으로 대학을 마쳤으니 일정 기간만 농업에 종사하면 ‘그놈의 군대’도 면제받고 특혜받은, 선택된 사람이다. 대학에서 만난 여자친구도 농업에 취미가 있으니 금상첨화錦上添花로구나. 농한기에는 네가 평생 가지고 갈 취미趣味를 갈고 닦아라. 그것이 첫째 여행旅行이었으면 좋겠다. 다음으로 여러 가지 분야의 책을 많이 읽어야 하는 독서讀書가 아주 중요하다. 독서는 너의 철학을 굳건히 세워줄 수 있는 지름길이다. 독서 지도는 내 전공이니만큼 네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해주마. 그리고 시시때때로 사색思索을 해라. 사색은 우리말로 생각이다. 여행과 독서 그리고 사색. 요점은 딱 이 세 가지임을 늘 마음에 새기면 좋겠구나. 사색에는 성찰省察이라는 단어가 따라다니지만, 너는 아직 연부역강年富力强하고 혈기방장血氣方壯방장한 20대초이니 성찰할 필요는 없다. 성찰은 50대 이후에나 하는 것이다. 내가 웬만하면 이런 ‘잔소리’안하는 데 내 친구의 아들이니만큼 애정愛情을 듬뿍 갖고 하는 소리이니 가볍게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하-, 녀석이 다 알고 있다고 해도 할 수 없는 일(이미 알고 있는 것같다). 꼰대들은 정말 못말린다. 나도 이런 꼰대가 되고 싶지 않았지만, 이런 경우, 한마디 하지 않는다면, 아버지 친구도, 어른도 아니지 않겠는가. 너를 내 아들마냥 사랑한다. 말이 길어졌다만, 젊은 네가 이해하라. 너의 무한한 발전을 기원한다. 여행, 독서 그리고 사색(생각)이닷!